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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암 낙관의 독창성과 그 유형분류

        박재복(朴載福) 한국서예학회 2014 서예학연구 Vol.24 No.-

        창암(蒼巖)이 활동하던 조선후기는 청나라에서 고증학(考證學)과 실학(實學)이 유입되었고, 천주교 등과 같은 서양의 종교와 문물이 전래되면서 성리학에 전통을 둔 사회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격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창암의 낙관에서도 이러한 과도기적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서첩형식의 작품에서 낙관글씨와 인장의 배치가 다른 서가(書家)들과는 확연히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를 표출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창암의 작품에 보이는 낙관 글씨와 인장을 중심으로 유형을 분류하고 그 독창적인 특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는 낙관글씨를 5型 10式으로 구분하고, 창암의 인장을 성명인(3型 6式), 자호인(3型 6式), 본관인(2型 4式), 본관+성명인(2型 2式), 사구인으로 분류하고, 인장의 조합과 위치를 3型 9式으로 분류하였다. 이를 통해 작품의 연대별, 종류별로 일정한 특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서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이 있음을 증명해 내었다. 서첩형태로 된 창암의 작품은 시 한수 혹은 문장 한편을 하나의 단위로 구도하여 두인과 낙관인을 찍었는데, 이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중간의 매 면에 '이삼만(李三晩)'이란 인장을 찍는 방식은 그만의 독특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낙관 글씨와 인장을 분석하여 다양하게 불리던 그의 호칭과 사용연대를 구체적으로 고증해 내었다. 초명은 이규환(李奎煥)과 이규환(李奎桓)이며, 42세경에 이미 '이삼만(李三晩)'으로 개명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삼만(李弎晩), 이삼만(李三万), 이삼만(李參晩), 이삼만(李三萬)이라는 호칭도 확인된다. 본관인 전주(全州)는 50~51세 전후에, 완산인(完山人)은 76~77세 때에 주로 확인되고, 완산(完山)은 50~77세 때에 모두 확인된다. 자인 윤원(允元)은 30대 초반부터, 윤원(允遠)은 50대 초반부터 쓰기 시작하여 말년까지 사용하였다. 아호인 강재(强齋)는 31~51세 때에 확인되고, 창암(蒼巖)은 42세경부터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창암(蒼岩), 창암(蒼嵒)이라는 호칭도 확인된다. 다양한 호칭은 자형을 달리하거나 발음이 같은 글자로 바꾸었다. 일반적으로 아호와 당호를 다양하게 사용한 서가들은 많았지만 창암과 같이 자신의 이름과 자, 아호를 다양하게 변형시켜서 사용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본고와 같은 논증을 통해 창암 작품의 연대고증과 진위문제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蒼巖活動在朝鮮後期,是从淸朝考證學和許多先進文物流入,因此逐渐動搖朝鲜性理學傳統的社會秩序。從蒼巖的落款也可見這樣過渡形態的特徵。尤其是在書帖形式的作品中,落款和印章的组合與同時期書法家相比有很大的差別并表現出獨特形態。所以本文以蒼巖書法作品中可見的落款和印章為中心進行類型分類并找出其獨創性的特徵。 在本文中,蒼巖的落款可分為5型10式;蒼巖的印章可分為姓名印(3型6式)、字號印(3型6式)、本貫印(2型4式)、本貫+姓名印(2型2式)、詞句印;印章的組合和位置可分為3型9式。通過以上的分类,蒼巖的作品不僅在年代和種類上有一定的特徵,而且還可以證明和同時期的書法家相比有不同的特徵。 蒼巖書帖形式的書法作品由一首詩或一篇文章蓋上頭印和落款印構成。這樣的方式可能是受到圓嶠李匡師的影響。蒼巖作品的每面蓋有"李三晩"印章的方式,可以說是蒼巖的獨特方式。 從本文中的落款和印章的分析,可以具體考證出各種各樣的稱呼及其使用年代。其一,確認其名叫"李奎煥"、"李奎桓";42歲時已經改名為"李三晩"。也可見"李弎晩"、"李三万"、"李參晩"、"李三萬"等不同的稱呼。其二,確認本貫印"全州"主要使用在50-51歲左右;"完山人"使用在76-77歲;"完山"是50-77歲一直使用。字印"允元"是從30歲初期開始,"允遠"是從50歲初期開始,一直使用至末年。其三,確認雅號印"强齋"是31-51歲使用;"蒼巖"是從42歲開始使用至末年。也可見"蒼岩"、"蒼嵒"的呼稱。各種各樣的稱呼主要由字形或者同音字的改變來變化。一般來說,使用各種各樣雅號和堂號的書法家們有很多,但是和蒼巖一樣多變姓名和字號的情況是非常少有的。 本文的論證,希望在蒼巖作品的年代考證和眞僞問題上,可以作為重要的根據。

      • KCI등재후보

        蒼巖 李三晩의 書論 - 順自然의 양상을 중심으로

        김남형(Kim Nam-Hyeng)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6 동양한문학연구 Vol.23 No.-

          이 논문은 조선 후기의 빼어난 서예가이자 서예이론가였던 蒼巖李三晩(1770~1847)의 書論을 書藝觀, 學書論, 創作論으로 나누어 검토하고 그것이 지닌 서예사적 의의와 영향에 대하여 점검한 것이다.<BR>  조선시대 대부분의 지식인들과는 달리 이삼만은 ‘書는 자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작은 道가 아니다.’는 적극적인 서예관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서예관을 기반으로 창암은 ‘卽自然’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法自然’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인위적인 기교에 치중함으로써 자연스러운 生氣를 상실한 당대의 서풍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소산인 것으로 판단된다.<BR>  이삼만의 學書論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 또한 그것이 ‘法自然’을 이념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이삼만은 운필법을 위시한 구체적인 필법을 설명하면서 자연의 원리, 자연현상,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의 특성 등을 援用하여 논리를 전재하고 있으며, 사물의 형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해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BR>  창작론에서 이삼만은 전문적인 서예가의 작품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 得筆과 逸韻을 지목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象自然’을 서예가 지향하여야 할 궁극적인 경지인 것으로 파악하였다.<BR>  이러한 이삼만의 서론은 ‘卽自然-法自然-象自然’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는 서예에 있어서 자연성을 추구하는 심미의식의 발로로 그 기저에는 민족문화의 총체적 특성을 推動한 ‘順自然’의 이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삼만의 서론과 ‘行雲流水體’로 지칭되는 그의 書風은 호남지역의 후배 서예가뿐만 아니라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 서예가들에게까지 전해져서 조선 말기 한국 서단에 정채로운 한 봉우리를 형성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review the view of calligraphy of Changam Sam-man Lee(1770~1847) who was a remarkable calligrapher and calligraphy theorist in late Chosun focusing on his view of calligraphy, theory of Hakseo and theory of creation, and to review its meaning and influence on the history of the calligraphy.<BR>  Unlike most of intelligence in Chosun, Sam-man Lee had positive view of calligraphy such as ‘Calligraphy is from nature and it is not a small asceticism’. Based on his view of calligraphy, he emphasized concrete and practical ‘Beopjayeon’ based on ‘Jeukjayeon’, which seems to be the output of critical perception on the contemporary calligraphic style that lost natural vitality by emphasizing artificial techniques.<BR>  The most attracting characteristic of his theory of Hakseo is that it is based in the ideology of ‘Beopjayeon’. For example, he developed his logic borrow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living things, theory of nature and natural phenomena when he explained the concrete calligraphic technique including ‘Wunpilbeop’ and he emphasized symbolical expression of the phenomena.<BR>  In his theory of Creation, he pointed ‘Deukpil’ and ‘Manwun’ as basic requirements that professional calligraphic works should have. Moreover, he proposed that ‘Sangjayeon’ would be the ultimate goal that the calligraphy should go for.<BR>  His theories can be summarized as ‘Jeeukjayoen-Beopjayeon- Sangjayeon’. It is judged that it is from his aestheticism of calligraphy under the which there seems to be the ideology of ‘Sunjayeon’ implied from our culture. His calligraphic style summarized as ‘Seoron’ and ‘Haengwunyusuche’ was descended to calligraphers in Yeongnam Area not to mention of his junior calligraphers in Honam Area and it made a vivid peak in calligraphy in late Chosun.

      • KCI등재

        論山 白日軒 李森 家 문화자원의 활용방안

        강경윤(Kyung, Yoon-Kang) 역사문화학회 2016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19 No.2

        여러 다양한 인물과 관련한 역사문화자원이 지역의 경쟁력확보를 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연구와 축제들은 단순한 흥미유발 위주의 행사가 되고 있으며 인물에 관한 자료들의 정리 과정이 부족해지고, 결국에는 역사적 가치나 의의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인물을 중심으로 다루어지는 활용들은 다른 인물이나 유적과의 차별성과 특성을 확보해야 하며 나아가 다양한 활용분야를 모색해 교육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본 연구는 지역역사 인물에 대한 사례연구로 자료를 수집과 정리․고증의 과정을 거쳐 그 인물을 규명하고,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교육이나 전시, 그리고 활용가능하고 직접적인 프로그램의 활용방안을 모색 해 인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지속 가능한 실질적인 자원화 활용방안을 연구하고자 하였다. 이에 많은 역사적 인물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충남 논산 출신의 이삼 장군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역사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계시켜 유물과 유적을 효율적으로 전승ㆍ활용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문화자원을 바탕으로 가장 먼저 자료의 원형소재인 이삼의 생애와 사상, 업적 등을 여러 문집이나 기록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활용 가능한 유적과 유물들의 현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이삼과 관련한 문화자원의 특징과 경쟁력이 무엇인지를 분석하여 고택의 활용이나 전시관의 운영 등 실제 활용할 수 있는 방법과 자원화의 방안을 기획하여 여러 구체적인 방법의 활용방안을 제시해 보고자 하였다. 예컨대 백일헌 이삼의 학문과 사상을 정확히 규명하고 알리는 기초적인 자료 정리와 연구, 그리고 그것을 통한 특성을 찾아 다양한 활용방안 모색하였다. 또한 인물 선양 사업에 흔히 나타나는 보수 정비의 행태를 극복하고 차별화하여 교육과 전시로 연계시켜 교육 자료의 개발의 강조하였다. While various people and relevant historical and cultural resources have the potential for securing competitiveness of each region, studies and festivals until now have focused only on creating fun factors. In this process, efforts have been lacking in organizing and maintaining data on significant figures and eventually they are not receiving their due attention for their historic values and significance. Applications focused on significant figures should gain uniqueness and traits differentiated from other figures and historic remains and the various areas of use should be searched in an educational and systematic way. This study, as a case study of a historical figure of a region, went through the process of collecting, organizing, and studying data and examined a historic figure. Based on the existing data, it searched for ways for education, exhibition, and programs that are directly applicable, and tried to find ways to have the right understanding of a regional figure and to practical and sustainable ways to use resources. To this end, this study chose as its study object, general Lee Sam from Nonsan, Chungcheongnam-do Province, one of the figures who are not very well known, systematically organized his historical significance, connected past, present, and future, and tried to search for ways to effectively inherit and use historical remains and ruins. Based on cultural resources that are currently handed down, it systematically organized life, beliefs, and achievements of Lee Sam through literature and records, which is the original material of the resource, and examined the current status of remains and ruins that can be utilized. Then by analyzing the features and competitiveness of cultural resources related to Lee Sam, it planned actual ways of using resources such as utilizing old houses and operating exhibition halls, and presented a specific way to use resources. For example, through the process of organizing data, conducting a research, and finding features on the academic aspects and beliefs of Baekilhun, Lee Sam, it searched for various ways of using them. Also, it overcame the frequent modifying and mending practice that is often shown in the process of exalting a historic figure, connected the project to education and exhibition, and stressed the development of educational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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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의 학서연원(學書淵源)과 학고정신(學古精神)

        이은혁 ( Lee Een-hyuk ) 퇴계학부산연구원 2017 퇴계학논총 Vol.30 No.-

        1988년 7월에 전주문화방송(MBC) 주최로 열린 『蒼巖 李三晩 遺墨展』은 창암 서예 연구의 발단을 일으킨 의미 있는 전시였다. 전시에 맞춰 발간된 『蒼巖 李三晩 遺墨帖』(전주문화방송, 1988年刊)에는 수집 전시된 작품이 원색으로 인쇄되어 있다. 책의 뒤편에 첨부한 해설은 향토사학자로서 전북문화재위원이었던 고 작촌(鵲村) 조병희(趙炳喜) 선생이 집필하였다. 「蒼巖 李三晩 書道와 生涯」라는 제하의 장문으로 간단한 생평을 소개한 뒤, 원문과 해석을 제공함으로써 창암 서예연구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후로 창암에 대한 관심이 재고되어 서첩들이 꾸준히 발굴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창암 선생의 나이 71세(庚子, 1840년) 때 완산 공기골[上關]에서 집필한 『기오이적(機奧異跡)』의 발굴이다. 창암에게 작품 이외에도 별도의 체계적인 서론이 존재하고 있음은 창암 연구 즉 예술가로서의 그의 작품은 물론 더 근원적으로 미의식과 가치관을 총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었음을 의미한다. 『기오이적』을 비롯한 창암의 단편적 서론을 읽다보면 일면 구조적 체계성이 발견된다. 논설의 입장은 필법전수와 자득성가한 작가의 측면으로 대별할 수 있다. 후학들을 위하여 체득한 법칙들을 체계적으로 전술하는 학습론의 성격을 보이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서의 가치와 궁극적 목적을 성찰하기도 한다. 법(法)의 측면에서 본다면, 전자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고법(古法)을 강조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법을 초월한 무법(無法)을 역설한다. 전통적인 고법은 역사적으로 검증된 학서의 표준으로서 학서자가 숙련해야 할 필수적 과정이며, 무법의 경지는 자득성가한 서가가 일체의 법을 초월하여 자오(自娛)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예술가의 이상세계이다. 즉 유법을 통한 무법의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처럼 창암의 저술과 서첩에 남겨진 문장들을 세밀하게 고찰하면 그만의 득의처와 차별성을 부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의 연구들은 창암의 서예를 조명하는 한편 서론에 내포된 철학적 의미를 밝히는 데 치력해왔다. 다만 창암의 서예를 논할 때 문헌적 근거로 삼는 서론들을 변별하지 않음으로써 그 진의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존중하면서, 창암 서론의 구조적 체계에 주목하고 거기에 나타난 중요한 특징들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예술관과 궁극적 지향점을 재검토하였다. Organized by Jeonju MBC in July, 1988, “Exhibition of Autographs of Deceased Changam Lee Sam-Man” was meaningful for shedding light on his calligraphy. Published at the same time as the exhibition, Book of Changam's Autographs introduced his life, his original works, and explanations for his works and built a foundation to figure out the world of his art. Since then, growing interest in the calligrapher has led to the continuous excavation of his scrapbooks, which helped to confirm that he had his own systematic calligraphy theory along with his calligraphy works. That is, the research conditions were met to shed total light on his aesthetics and values as well as his works as an artist. One would find structural systemicity of some sort while reading the theories on his calligraphy. One is his learning theory to transmit his technique of calligraphy, and the other is his art theory to figure out the technique himself and reach his own level. He developed a learning theory of mentioning the principles that he learned systematically for his pupils on the one hand and reflected on the values of calligraphy and the ultimate goals of art in relation to his own life on the other hand. From the perspective of principles, the former case emphasizes old traditional principles, whereas the latter highlights absence of principles that transcend principles. The old traditional principles represent the standards of calligraphy study that have been demonstrated historically and present an essential course that should be mastered by anyone who studies calligraphy. The level of absence of principles presents the ideal world of a calligrapher and artist that learned principles himself and reached his own level, transcending all principles to have a good time himself and enjoy freedom to his heart's content. That is, his goal was to practice absence of principles through their presence. A close look at the sentences in his writings and scrapbooks will help to highlight his own elation and differentiation. Previous studies focused on figuring out philosophical meanings in his calligraphy theory while examining his calligraphy works. They, however, did not consider the calligraphy theory as a literature ground to discuss his calligraphy works and accordingly failed to figure out his real intentions. Respecting the research achievements of previous studies, the present study paid attention to the structural systemicity of his calligraphy theory, analyzed its crucial characteristics, and thus reviewed again his view of art and ultimate intention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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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書論의 一局面 : 李 와 李三晩의 서론이 지닌 서예사적 의의 검토를 중심으로

        김남형(Kim Nam Hyung) 한국서예학회 2016 서예학연구 Vol.28 No.-

        이 논문은 조선후기 대표적 서예비평가의 書論을 검토하고 그 특성과 그것이 지닌 서예사적 의의를 검토하기 위하여 집필된 것이다. 본고의 텍스트는 조선후기의 서예비평서 가운데 비교적 온전한 내용과 체제를 갖춘 李 의 『筆訣』과 李三晩의 『蒼巖書訣』이다. 본고에서 논의된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후기에 이르러 체계적인 서예비평서가 출현하게 된 서예사 및 정신사적 배경은 통일신라시대 이래 중국의 특정 서풍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였던 서예사적 질곡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조선이 유교전통문화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문화적 자긍심인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李 는 당대의 書風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바탕으로 書의 본질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書의 성립 근원에서부터 창작의 실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易理를 적용하여 해설하였다. 그러나 이서의 書論은 『주역』과 書를 구조적으로 일원화하여 ‘書法自然’을 표방하면서도 자연과 書 사이에 『주역』이라는 시공을 초월한 典範을 개재시킴으로써 또다른 서예사적 매너리즘을 초래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셋째, 이삼만은 ‘書는 자연에서 비롯되었다’라는 고전적 서예관에 충실하면서, 『주역』이라는 이념적 典範을 개재시키지 않고 ‘卽自然-法自然-象自然’으로 이어지는 일관된 논리를 제시하여 書와 자연과의 긴밀한 관련성을 환기하였다. 이러한 이삼만의 書論은 우리나라의 자연풍토와 민족의 삶에서 형서된 미의식을 서예로 구현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확보하였고, 그 자신이 작품창작을 통해 이를 실천하였다. This paper is written in order to review the characteristics of the discussion on calligraphy of late Joseon Dynasty and its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calligraphy. The texts of this paper are Lee Seo's 『Pilkyeol』and Lee Samman's 『Chamamseokyeol 』wich have relatively complete contents and systems among critical books on calligraphy in the late Joseon Dynasty. Summary of the important information discussed in this paper is as follows. First, it is considered that the calligraphic historical and intellectual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emergence of systematic critical books on calligraphy in late Joseon Dynasty are critical awareness on the calligraphic historical fetter which uncritically imitated the certain Chinese ways of writing since Unified Silla and the cultural pride that Joseon is the true inheritor of Confucian culture. Second, Lee Seo deeply contemplated on the nature of writing on the bassis of the critical awareness of the way of writing of that time, and explained it by applying it constantly from the basis of the establishment of writing and the reality of creating. But the discussion on calligraphy of Lee Seo unified 『Juyeok』and writing structurally and claimed to support 'Seobeopjayeon'. And it contains the possibility of causing mannerism of calligraphic history by interposing 『Juyeok』, the role model which transcends the time and space between the nature and writing. Third, Lee Samman was faithful to the classic view of calligraphy that 'Writing is derived from nature', and did not interpose the conceptual role model, called『Juyeok』. And he suggested the consistent logic which leads to 'Jeukjayeon ilbeoojayeon ilsangjayeon' and called attention to the close relation between writing and nature. This discussion on calligraphy of Lee Samman secured the theoretical basis for realizing the aesthetic awareness formed from natural features and people's lives of our country with calligraphy, and practiced it through creating pieces.

      • 문학적 견지에서 본 한국서예의 독창성

        김병기(金炳基) 한국서예학회 2008 서예학연구 Vol.13 No.-

        本稿是通过对隶属古代金石文的廣開土太王碑文·百濟武寧王誌石文·朝鲜后期的書藝家蒼巖李三晩的書藝作品与書論文章的分析研究,完成了关于韩国書藝的独创性初步考察。考察的要略如下:➀ 统一新羅之后,即在对中国的事大之前的原始的韓民族書藝時期,韩民族所特有的书藝与中国的书法有着较大区别,即独创性。这种独创性可以简单的概括成为‘无意图性’。所谓的’无意图性‘包含了自由性,自然性,豪放性,質朴性等深意。我们的民族从书法流入的初期开始便形成了一种非纯粹模仿 中国书法的模式,与有意图的临摹相比,我们更注重无意图性的自由书写。我们民族的这种性急的卓越创意性可以用‘卽創性’来加以形容。所谓‘卽創’中的‘學卽創’即在学习的同时进行思考并进行创造。➁ 从朝鲜后期完成朝鲜眞體的李三晩的作品,廣開土太王碑,百濟武寧王誌石,新羅的冷水里碑及赤城碑中也可以寻找到韩民族式書藝的無意圖性。➂ 廣開土太王的諡號被封为‘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意为将国家建立在丘陵之上并广泛开阔国土,造福百姓的好太王。这个諡號与后来受中国影响被称为‘眞平王’,‘武烈王’,‘文武王’的这些諡號在结构上完全不同,因此通过这个諡號也可以窥探出高句丽在文化上的独立以及其文化的独创性。➃ 廣開土太王碑文中所涉及的:"掃加城, 敦拔城, 婁賣城, 牟婁城, 于婁城,....."等虽是借助汉字来记录的,但也只是对纯粹高句丽语言的音译。由此可以看出廣開土太王碑中所体现的独创性。➄ 在廣開土太王碑中出现的‘屬民’一词在中国的许多典籍中无法找到。在『魏書』,『晉書』, 『宋書』,『梁書』等典籍中则未出现过‘屬民’一词。儒家的經典『周禮』中曾出现的‘屬民’一词也与廣開土太王碑中的‘屬民’之意不同。这又一次证明了高句丽文化的独自性。以上➂➃➄点通过廣開土太王碑的独自性可以看出廣開土太王碑的書藝与中国的书法相比具有自己的独创性。➅ 百濟武寧王誌石中‘百濟斯麻王’, ‘登冠大墓’, ‘立志如左’, ‘錢一万文, 右一件’, ‘故立券爲明’等是百濟人使用的独特的表现方法。由此可以推测百濟的書藝与中国的书法有着明显的差异。➆ 李三晚的书法作品自作文与他编写的書論文章也与中国的書論及文章有所差异,具有独特的内容及特别的文章形式。因此,独特的文章构成方式造就了与中国书法不同的朝鲜真体。 본고는 고대 금석문인 광개토태왕비문과 백제무령왕 지석문, 그리고 조선 후기의 서예가인 창암 이삼만의 서예작품과 서론문장을 중심으로 문학적 견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국서예의 독창성에 대해서 초보적인 고찰을 하였다. 고찰하고 증명한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➀ 신라가 통일을 이룬 후, 중국에 대해 事大를 하기 이전인 삼국시대, 즉 원형 적 한민족 서예시기에는 우리 민족만이 구사한 중국과는 판이한 독창성이 분명히존재하였는데 그 독창성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의도성’이다. 이 ‘무의도성’이라는 말 안에는 자유성, 자연성, 호방성, 질박성 등의 의미가 포함됨은 물론이다. 우리 민족은 서예가 유입된 초기부터 중국의 서예를 의도적으로 모방하여 중국 서예와 닮게 잘 써보고자 하기보다는 오히려 아무런 의도가 없이 그저 ‘우리 식’으로자유스럽게 쓰고자 하였다. 우리 만족의 이러한 성급하면서도 탁월한 창의성은 ‘卽創性’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卽創’이란 ‘學卽創’, 즉 배움과 동시에 창작을생각한다는 뜻이다.➁ 조선 후기에 자각적 조선진체를 완성한 이삼만의 작품에도 원형적 한민족 서예시기의 광개토태왕비나 백제 무령왕 지석, 신라의 냉수리비나 봉평비, 적성비에서 느낄 수 있는 무의도성을 느낄 수 있다.➂ 광개토태왕의 시호인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은 “나라의 언덕 위에(國岡上) 묻히신 나라의 경계를 널리 넓히시고(廣開土境) 백성들을 평안하게 한(平安)좋고 위대한 왕(好太王)”이라는 뜻인데 이 시호를 통해서도 고구려의 독자적 문화와 문학의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 후대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부르게 된 ‘眞平王’이니 ‘武烈王’이니 ‘文武王’이니 하는 시호와는 완전히 다르다.➃ 비록 한자를 빌어 기록했지만 掃加城, 敦拔城, 婁賣城, 牟婁城, 于婁城 등은순수 고구려 말이란 점을 통해서 볼 때 광개토태왕비문은 중국과 다른 문학적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➄ 광개토태왕비 이외에 중국의 다른 典籍에서는 광개토태왕비에서 사용한 의미와 같은 의 ‘屬民’이라는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魏書』,『晉書』,『宋書』,『梁書』등에는 아예 ‘屬民’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儒家의 경전인『주례(周禮)』에서 더러 ‘屬民’이라는 말이 보이나 그 뜻은 광개토태왕비문의 그것과는완전히 다르다. 고구려 문학의 독자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다. 이상 ➂, ➃, ➄와 같은 광개토태왕비의 독자성을 통해서 볼 때 광개토태왕비의 서예도 중국서예와는 다른 독창적인 서예를 구사했다는 점을 간접 증명할 수 있다.➅ 백제 무령왕 지석에는 ‘百濟斯麻王’, ‘登冠大墓’, ‘立志如左’, ‘錢一万文, 右一件’, ‘故立券爲明’등 백제인들만이 구사한 독특한 문장 표현법이 있다. 이를 통하여백제의 서예 또한 중국의 서예와 뚜렷한 차이를 보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➆ 이삼만의 自作文 서예작품과 그가 지은 書論문장에도 중국의 문장이나 중국의 서론과는 다른 독특한 내용과 특이한 형식의 문장이 들어있다. 이처럼 독특한문장을 구사한 그였기 때문에 중국서예와는 다른 자각적 조선진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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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삼만(李三晩)의 원기자연적(元氣自然的) 서예미학에 관한 연구

        장지훈 ( Ji Hoon Jang ) 한국동양예술학회 2010 동양예술 Vol.15 No.-

        Ch``angam Lee Sam-man(蒼巖 李三晩 : 1770-1847), active in the Chosun period of the nineteenth century, was not considered to be the best calligrapher by his contemporary. Yet he was one of the calligraphers who characterized the late Chosun period calligraphy with Wongyo Lee Kwang-sa(圓嶠 李匡師 : 1705-1777) and Ch``usa Kim Chong-hi(秋史 金正喜 : 1786-1856). He was a strong-willed calligrapher who created his unique calligraphic style called Yusuch``e(流水體 : literally, a style that flows like water) through an incessant effort despite of his humble origin of Chungin(中人 : middle group of people). His calligraphic exploration can be seen through many of his calligraphic collections and calligraphic treatises recorded from his late fifties until his death. This paper focuses on his calligraphic theories from his calligraphic treatises to examine his unique calligraphic aesthetics. Lee Sam-man considered that calligraphy lost its Wongi(元氣 : original spirit) and its fundamental nature as it moved further away from its foundation since Han and Wei dynasties. As a way to recover the original spirit of calligraphy, he paid his attention to the calligraphic aesthetics of Wongijayon(元氣自然 : original spirit and nature) originated in the Han period. He encouraged the individualistic and independent calligraphic spirits based on natural human sentiments and he tried to renovate the Chosun calligraphy that lost its vitality and spirits by sublimating the power of spiritual strength into calligraphic beauty. In the area of artistic creation, he pursued dynamic beauty through the usage of the brush of Ch``ujon(推展 : literally, push and expansion) and realized the beauty of Ilwunmi(逸韻美 : beauty of comfortable rhyming) based on natural sentiments. This artistic achievement overcame to a certain degree the general calligraphic aesthetics of Chosun that bound arts with ethics and moved toward the free artistic achievement. To sum up, Lee Sam-man tried to create a dynamic Chosun calligraphy by combining the honest natural sentiments and vitalistic spirits and power. That is, he created a self-obtained calligraphic world through the Wongijayon calligraphic aesthe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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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蒼巖 李三晩의『書訣』에 대한 고찰 - 歷代 書論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朴載福 동양고전학회 2010 東洋古典硏究 Vol.38 No.-

        蒼巖 李三晩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서예가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환경적인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서도연마에 정진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초서는 ‘行雲流水體’라 하여 ‘용이 승천하고 뱀이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으며, 하늘의 구름이 가는 것 같고 물이 흐르는 기상을 가진 초서’로 평가된다. 기존 논의에서 창암의 서론과 서예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는 했으나 아직은 본격화되지 않았고, 특히 창암의 서론에 관한 연구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본고에서는 창암이 71세(1840년)에 쓴 書訣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그의 서론에 영향을 끼쳤거나 배경이 되는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서가의 서론들과 비교를 통해 창암 서론의 원류를 밝혀 보고자 한다. 서결의 내용은 크게 총론, 본문, 결어 그리고 종이와 붓에 대한 설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총론에서는 채옹, 왕희지, 왕헌지, 소식 그리고 이광사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영자팔법, 늑법, 운필법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주로 위부인, 왕희지, 구양순, 이양빙, 장회관, 이광사 그리고 여러 저본의 「영자팔법」 등을 광범위하게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특히, 왕희지, 이양빙, 이광사의 서론 내용을 많이 수용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일부내용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창암의 서결은 孔子의 “述而不作”의 정신에 입각하여 역대 서가들의 이론을 충실히 기술하고, 새로운 일부 내용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까닭에 서결은 초학자들을 위한 종합적인 서예 이론서이면서 동시에 자연에서 얻은 창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자연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독특한 서론을 전개하여 초학자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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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소재로 살펴본 蒼巖 李三晩의 학문세계

        박재복(朴載福) 한국서예학회 2011 서예학연구 Vol.18 No.-

        蒼巖 李三晩이 직접 쓴 저술이 없는 상황에서 작품에 사용된 소재는 그의 학문적 성향과 학습과정을 짐작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동안 선행연구에서 소홀하게 다루었던 작품소재를 분석정리하고 유가적인 내용과 자연을 노래한 시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하였다. 본 고찰을 통해 창암의 작품소재에 나타난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존하는 창암의 작품은 대부분 50-70대에 쓰여진 것으로, 자연을 노래한 시와 서예에 관련된 내용이 각각 1/3을 차지하고 유교ㆍ석각ㆍ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그 나머지를 차지한다. 둘째, 창암은 朱子를 비롯한 宋代 학자들의 문장을 작품소재로 다루고 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先秦시기의 유가경전을 심도있게 공부하였다기 보다는 주자학적인 견지에서 四書 특히 『中庸』을 그 주요 대상으로 하고 있다. 셋째, 중국의 역대 시 중에서 자신의 性情에 알맞은 자연시를 선별하여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자연시는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魏晉시기의 시에는 2명의 16首가 50-70대의 작품에 전반적으로 보이는데, 嵇康의 1首를 제외하면 모두 陶淵明의 시에 속한다. 隋唐시기의 시에는 모두 18명의 29首가 40-70대의 작품에 보이며, 주로 40-50대의 작품에 집중되었다. 宋元시기의 시에는 모두 6명의 17首가 40-50대의 작품에 집중되었고, 주자의 시가 12首로 가장많다. 따라서 창암은 40-50대에는 주로 唐宋시기의 시를, 50대 이후에는 도연명의 시를 주로 작품화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넷째, 자연을 노래한 시 중에서 도연명과 주자의 시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주자는 자연을 노래한 시뿐만 아니라 그의 문장과 글씨도 창암이 많이 학습하여 작품화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작품소재에 나타난 현상만으로 본다면 창암이 주자의 성리학적인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기보다는 주자가 자연을 노래한 시에 더욱 심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창암의 학문과 인생철학에서 주자와 도연명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섯째, 선행연구에서 창암이 주역의 음양오행이나 노장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창암이 인용한 魏晉시기의 서론이나 도연명의 시와 같이 玄學的 성향이 강한 내용들을 분석한 것에 기인한다. 물론 창암이 이러한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나, 또한 이러한 내용이 모두 창암의 思惟라고 하는것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와 같이 창암은 역대의 서예와 문헌 자료들을 학습하여 서예작품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서예는 王羲之를 宗主로 하고, 인생철학은 주자와 도연명을 근간으로 하여 창암의 독특한 ‘行雲流水體’를 탄생시키고, 역대 서론을 자신의 시각에서 정리보완하여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目前在沒有蒼岩李三晚親自寫的著作的情况下,他的作品中所使用的題材,就是了解他的學問趨向和學習過程的重要線索。因此,針對前人硏究過程中較輕易忽略的作品題材,本文試圖系統全面收集整理,並集中探討了其作品題材中与“儒家的內容和贊美自然的詩”相關的部分。 通過探討可知,蒼岩的作品題材所表現的特征如下: 首先,目前現存的蒼岩作品大部分爲蒼岩50-70歲所寫,贊美自然的詩和有關書法的內容各占1/3,其餘爲儒教、石刻、佛教相關的內容。 第二,蒼岩的作品題材中多見以朱熹爲代表的宋代理學者的文章,故推測蒼岩不是深入學習先秦時期的儒家經典,而是以朱熹理學的角度,選取“四書”尤其“中庸”爲其作品題材的主要對象。 第三,從中國曆代詩中選取与自身性情合適的自然詩,作爲其作品的主要題材對象。這些自然詩大致可分3個時期:魏晉時期有2位的16首詩,蒼岩50-70歲都見,除嵇康的1首詩之外,其餘都是陶淵明的詩;隋唐時期有18位的29首詩,蒼岩40-70歲均見,主要集中於40-50歲;宋元時期有6位的17首詩,集中于蒼岩40-50歲,其中朱熹的詩最多,共有12首詩。由此可見蒼岩40-50歲主要采取唐宋時期的詩,50歲以後主要采取陶淵明的詩,寫出書法作品。 第四,贊美自然的詩中,以陶淵明和朱熹的詩占主導位置。尤其是朱熹蒼岩除了他贊美自然的詩之外,也多學習並采取他的文章和書法作品,寫出書法作品。但以其作品題材體現的現象來看,蒼岩受朱熹理學思想較輕,而受朱熹的自然詩影響較深。因此,說蒼岩的學問和人生哲學深刻地受到朱熹和陶淵明的影響,也不過分。 第五,前人硏究中,有的學者提出蒼岩主要受到“周易的陰陽五行”或者“老莊哲學”的影響,其依據是蒼岩所引用的魏晉時期書論以及陶淵明詩中含有玄學傾向較强的內容。當然,不能說蒼岩絲毫未受到這些影響,但這些內容全都是蒼岩的思維之想法,再有思考之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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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암 이삼만, 工拙을 벗어난 서예

        이성배(Lee, Sung-Bae) 한국서예학회 2007 서예학연구 Vol.11 No.-

        This study aims at exploring the history of Korean calligraphy and Changma, Samman Lee's calligraphy by dividing calligraphy into schools of rational and emotional calligraphy. This approach helps to provide a more various and broader understanding of the materials of calligraphy and presents a new way to understand the identity of Korean calligraphy. Changam, Samman Lee(1770-1847) possessed a very unique calligraphy style. This study investigates the commonalities and differences of Changam's calligraphy from his predecessors in terms of both his rational and emotional calligraphy styles. In the late Josun Dynasty, Changam freely pursued both rational and emotional calligraphy styles, not clinging to elaboration. His calligraphy practice and theory had two special aspects. His rational calligraphy style was shown in epitaphs or printed-style tablets, and his emotional style was written with printed, semi-cursive and cursive style. Both of his styles resulted from his unique consciousness of calligraphy. Changam's rational calligraphy style was based on his strict academic standards, serious consideration of process, and his endless endeavor to enter the ideal world of calligraphy. Meanwhile, his emotional calligraphy style was based on Jinhanwe's calligraphy which was different from Jindang calligraphy that had aesthetics of ugliness, pursuing strong strokes and a temperament overcoming the soft beauty. Changam's calligraphy presents Jinhanwe's style of strong, simple and honest strokes as well as reflecting the calligraphy trend of the late Joson Dynasty which focused on Jongyo, Wangheji. That is, his calligraphy crosses the boundaries between rational and emotional calligraphy and his aesthetics of calligraphy, as one of ugliness, shows another trend of Joson's calligraphy. 본고는 서예를 이성파와 감성파로 구분하고 이를 한국 서예사와 창암 이삼만 서예에 적용해 고찰한 글이다. 이성과 감성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기존의 서예자료에 대한 다양한 접근과 폭넓은 이해를 위한 한 방도이며, 한국 서예의 정체성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방도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매우 독창적인 글씨로 알려진 창암 이삼만(1770-1847)에 대해 이성서예와 감성서예의 시각으로 그의 서예와 서론이 이전과 어떠한 同異點이 있는지에 관해서도 살펴볼 수 있겠다. 조선 말기의 창암은 감성서예와 이성서예를 추구하면서 공교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추구하려 하였다. 그의 많은 서예작품과 서론은 이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성서예는 비문이나 크고 작은 楷書, 편액 글씨 등에서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에 비해 감성서예는 해서와 行書草書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보였다. 창암의 이성서예와 감성서예는 그의 독특한 서예의식에서 비롯된다. 그의 이성서예는 엄격한 학서기준과 과정을 중시하고, 끊임없이 서예의 眞境에 들고자 엄청난 노력을 통해 나타났다. 이에 비해 감성서예는 당시 서예에서 추구하던 晉唐서예에서 벗어나 秦漢魏의 서예에서 古法을 추구하고, 연미함에서 벗어나 골기와 필세가 강한 愚拙의 美感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창암의 서예는 조선 말기의 鍾繇? 王羲之를 중시하는 당시의 서예경향을 반영하면서도 한 단계 더 나아가 骨氣가 강하고 질박한 秦漢魏시기의 서예미감을 추구하였다. 이에 그의 서예는 이성서예와 감성서예를 넘나들었고, 그의 서예의식 은 愚拙의 美感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또한 당시 조선 서예가 추구하는 한 서예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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