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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소수서원과 중국 백록동서원의 비교고찰: 건립배경과 자연환경의 풍수적 특성을 중심으로

        조인철 한국도교문화학회 2019 道敎文化硏究 Vol.50 No.-

        This study compares Sosu-Seowon, the first Korean seowon and Bailudong-Shuyuan, the first Chinese shuyuan. Bailudong and Sosu which was originally called Baiyundong have a significant similarity from the name itself. The figures who had an important influence on the foundation of Baekrok-dong Seowon are Kuangsu 匡俗, Taoyuanming 陶淵明, Libo 李渤, Sonchen 孫琛, and Zhuxi 朱熹. A symbolic word related to the foundation background of Bailudong-Shuyuan is ‘hermit[隱遁]’. The main people involved in the foundation of Sosu-seowon in Korea are Anhang 安珦, as the representative of Sun Hung-an family, Keumsengdaegun 錦城大君, Jusebung 周世鵬, and Toegye-Yihwang 退溪李滉. A symbolic word related to the foundation background of Sosu-seowon is ‘integrity[節槪]’. When it comes to the site plan of Bailudong-Shuyuan, the four courts[院] are placed in parallel at the north of the Kwandaoxi 貫道溪, facing Wulaofeng 五老峰 of Lishan 麗山. Meanwhile, Sosu-seowon is located under Yeongyubong 靈龜峰 and at the westside of Jukgyecheon 竹溪川. Since, Sosu-seowon of Korea is established in the ruins of temple, it reflects the Buddhist temple’s site plan. 본 연구는 중국서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과 한국서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소수서원)의 건립배경과 건립지 주변의 자연환경, 건물의 배치 등을 비교분석한 것이다. 서원이라는 시설이 성리학적 교리에 따라 인재를 교육 양성하는 기관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유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분석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유교적 측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하기에 본 연구는 유교적 측면과 더불어 풍수적 측면을 포함한 다양한 관점에서 비교 분석을 시도하였다. 서원이라는 건축 시설을 최초로 세운다고 할 때는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의 교리만으로는 실제적으로 구체화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에 서원과 같은 어떤 건축 시설물이 특이한 모습으로 건립되어 있는 상황을 이해하려면 성리학적 교리 외에도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나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역성을 갖는 전통 건축 시설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민간신앙이나 풍수적 관점은 매우 유익한 관점이나 분석도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특히 풍수(風水)는 특정한 터에 자리한 특정한 시설의 의미에 대해 살피는 학문이므로 서원과 관련해서도 유의미한 시점을 끌어낼 수 있다. 중국의 백록동서원과 백운동서원이라고 불리었던 한국의 소수서원은 그 명칭과 여러 기록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서원이라는 용도적 측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을 가진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이나 지역적, 민간 신앙 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양자 간에는 특이성과 차이점도 분명 존재한다.

      • 퇴계(退溪)의 서원향사례정초(書院享祀禮定礎)에 대한 고찰(考察) - 백운동서원향사례(白雲洞書院享祀禮)수정을 중심으로 -

        한재훈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3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53 No.-

        書院의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은 講道(作人)와 尊賢(崇道)이다. 즉, 敎學공간으로서의 기능과 享祀공간으로서의 기능이 書院의 대표적인 기능이다. 하지만 그동안書院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敎學공간으로서의 書院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해 왔다. 이는 書院의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인 講道(作人)와 尊賢(崇道) 중에서 전자에 편중된 것으로, 書院의 전모를 온전히 구명하기 위해서는 후자에 대한 연구 또한 활발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1549년 12월 退溪는 豊基郡守로 재직하면서 白雲洞書院을 賜額해달라는 주청을方伯을 통해 나라에 올렸고, 이를 계기로 이듬해 白雲洞書院이 우리나라 최초의 賜額書院인 紹修書院이 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賜額을 주청하기직전인 1549년 가을 退溪가 白雲洞書院에서 준행되어 온 기존의 享祀禮에 대하여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를 개정함으로써 書院享祀禮와 관련한 중요한 표준을 제시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본 논문은 書院享祀禮의 定礎라는 관점에서 退溪의 업적을 고찰하고자한다. 이를 위해 논문은 먼저 白雲洞書院에서 행해지던 享祀禮에 대하여 退溪가 제기한 문제를 검토하고, 다음으로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退溪가 제정한 春秋享圖와 廟祭笏記를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退溪가 書院享祀禮를 완벽한 수준에서 정립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나갈수 있는 든든한 초석을 놓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 KCI등재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건립의 과정과 의의

        허권수 연민학회 2022 연민학지 Vol.38 No.-

        Shinjae Chu Se-pung was a literati, academic, and educator who lived during the mid-Chosŏn era. Many great scholars were active around his time; Shinjae made sure to communicate with them academically to widen his scholarly perspective. Shinjae treated his seniors like teachers, and also reached out to both T'oegye and Nammyŏng-who were both six years his junio-whereas T'oegye and Nammyŏng themselves never met each other. Shinjae also had a strong sense of responsibility and loyalty to his government post. In life, he always tried to practice what he had learned, and thus, he was able to remain in a government post all his life. Shinjae regarded Confucianism as the correct form of edification, and thus endeavored to disseminate Confucian teachings. He also made an active effort to apply Confucian ideology to politics. His founding of Paegundong Seowon reflects this mentality. As the first Seowon built in Chosŏn, Paegundong Seowon invigorated the autonomy of scholarship and enhanced the pride of Korean scholars by enshrining them for the first time. This had a great impact on Korean scholarship, culture, and education among other areas. Shinjae’s founding of the Seowon allowed Korean scholars to be methodically trained, and scholarly thinking came to be established. At this time, government schools-Seonggyungwan and local Confucian schools-had already become vessels of perfunctory education, oriented towards studies for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nstead, the Seowon came to be the site of a novel and authentic academic innovation, providing an education that focused on the learning of “the Way” (道學). Paegundong Seowon primarily dedicated its efforts to the practical application of Neo-Confucianism, such as the edification of the people through scholarship, rather than theoretical research. The one who succeeded the tradition of founding Seowon was T'oegye Yi Hwang, who not only supported such projects, but went on to construct Seowon himself. Approximately one thousand Seowon had been constructed by the end of the Chosŏn dynasty’s rule, serving as headquarters for academic research and the edification of the people. A collection of Shinjae’s works, Various Writings of Murŭng, is more structured in its contents compared to the other literati and academics of his time, making it a valuable resource in studying the politics, society, and culture of the period. In particular, there are invaluable materials for researching the history of Seowon and the scholarly mind of Korea.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면서 학자이자 교육자였다. 신재의 시대에는 동시대에 대학자들이 많았는데, 신재는 이들과 모두 학문적 교류를 하여 자신의 학문적 안목을 넓혔다. 신재는 선배를 스승처럼 모셨고, 퇴계와 남명보다는 6세 많은 중간에 위치한 인물로서 두 사람과 다 교류하였다. 퇴계와 남명이 직접 만난 적이 없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벼슬에 대하는 자세도 매우 적극적으로 책임감과 충성심이 강했다. 배운 바를 최대한 실현하려고 노력하였으므로 평생 관직에 있었다. 그는 유학(儒學)을 교화(敎化)의 방도로 여겨 유학의 보급을 위해 정성을 쏟았고, 또 유학의 이념을 현실정치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인물이다. 그가 백운동서원을 창설한 것은 이런 그의 정신적 자세의 반영인 셈이다. 조선 최초로 창설된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최초로 우리나라 학자를 향사(享祀)함으로 해서 우리 학문의 자주성을 높이고, 우리나라 학자의 자존심을 세웠다. 이후 우리나라 학문, 문화, 교육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재가 서원을 창설함으로 해서 우리나라의 선비가 비로소 체계적으로 양성되고 선비정신이 정립되게 되었다. 이때 오랜 역사를 지닌 관학(官學)인 성균관과 향교는 이미 과거시험 위주의 형식적인 교육으로 추락하여, 새로운 참된 학문적 전기를 마련한 곳이 서원이었다. 특히 도학(道學)을 위주로 하는 참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이다. 백운동서원은 성리학의 이론적인 연구보다는 학문을 통한 백성 교화 등 현실 적용에 더 비중을 두었다. 신재의 서원 창설의 전통을 계승하여, 자신이 직접 서원을 창설하거나 서원 창설을 적극 지원한 인물이 바로 퇴계 이황이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면 근 1천여 개의 서원이 건립되어, 학문연구와 백성교화의 본부가 되었다. 신재의 문집인 무릉잡고(武陵雜稿) 는, 동시대의 여타 문인ㆍ학자들에 비해서 비교적 완비된 체재를 갖추고 있어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특히 우나라의 서원의 역사와 선비정신을 연구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자료가 많다.

      • KCI등재

        紹修書院 任事錄 연구

        송정숙 한국서지학회 2007 서지학연구 Vol.38 No.-

        The aim of this paper is to review the first volume of the List of Directors of Sosoo-Seowon Academy(紹修書院) mainly for the 16th and 17th centuries, and investigate the characteristics of those Directors in terms of their backgrounds, including the residences, birthplaces, and family names, the age of being appointed to the Director, as well as passing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and the length of holding offices in the Academy.The results of the analysis are as follows :Sosoo-Seowon Academy was established in Poonggee(豊基) by Chu Seboong(周世鵬) in 1543, and accredited by King Myungjong(明宗) with the request of Lee Hwang(李滉) in 1549.A total of 181 Directors held offices in this Academy from 1542 to 1718, and on the average every director serves a year. Of the Directors, 93% came from Kyungsangbuk-Do Province(慶尙北道), and especially 87% were from Poonggee(豊基), Soonheung(順興), and YoungJoo(榮州). While the age of Directors ranged 30 to 70 years old, the largest group were in their 40s to 50s.Out of 107 Directors, 47 passed the examination to enter Seonggyunkwan National College called Sangwon-Jinsa-Si(生員進士試), and 14 passed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called Moonkwa(文科).An analysis of their family names and ancestral homes evidences that of 18 family names, Hwang-Park-An and Kim, in the order of frequency, constituted the largest group. It is surprising to see that none of 107 Directors was Lee Hwang's pupil, which seems to suggest this Academy's independent position. 조선조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원장의 명단을 기록한 명부인 소수서원 임사록 제1권을 분석하여 소수서원 원장의 평균 재임기간과 그 추이, 거주지와 성씨ㆍ관향을 통해 본 원장의 출신배경, 원장의 소수서원 수학 비율과 생원진사시와 문과 급제 비율 등을 소수서원 입원생과 비교ㆍ분석하여 소수서원 원장의 특성과 시대별 추이를 파악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다.1) 소수서원 원장의 재임기간을 보면, 1542년부터 1599년까지는 초대 원장 김중문을 제외하면 원장이 평균 2~3년간씩 재임하였으나, 1600년부터 1679년까지와 1700년 이후는 1년 내외(8개월~13개월) 재임하였고, 1680년~1699년까지는 평균 5개월 정도 재임하였다. 서원에 입원생이 많은 때에는 원장의 재임기간이 길었고, 학생이 거의 없을 때에는 재임기간이 짧았다. 즉 서원이 교학의 기능을 원활히 수행할 때에는 서원 운영이 안정되어 재임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고 파악된다.2) 소수서원 원장의 거주지를 분석한 결과 경북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 중에서도 풍기ㆍ순흥ㆍ영천(榮川) 즉 현재의 영주 출신이 87%를 차지함은 소수서원의 운영을 주도한 세력이 서원 인근의 영주 사림임을 입증하고 있다.3) 소수서원 원장의 성씨와 관향을 분석한 결과, 소수서원 원장을 배출한 성씨는 18개로 황 - 박 - 안ㆍ김의 순이다. 관향을 보면 창원황씨가 원장을 15명을 배출하여 가장 많고 다음이 순흥안씨(10명), 무안박씨(9명)의 순이다.4) 원장의 소수서원 출신 비율을 보니, 전체 107명 가운데 52명이 소수서원 출신으로 49%에 해당한다. 예상밖으로 소수서원 출신 비율이 적어 연도별 소수서원 원장의 비율을 살펴보니, 1620년대부터 소수서원 출신이 조금씩 감소하기 시작하다가 1680년대부터는 비소수서원 출신이 전적으로 서원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1650년대부터 1696년까지 47년 동안 소수서원 입원생이 9명에 불과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소수서원의 교학기능 쇠퇴와 관련이 깊다. 5) 원장의 과거사항을 분석한 결과 원장의 생원진사시 합격률은 44%, 문과 급제율은 12%로서 소수서원 입원생과 비교할 때 생원진사시 합격률은 12% 높았지만 문과 급제율은 1% 낮았다. 물론 사마시와 문과 급제여부로 학문적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이를 통해 볼 때 원장의 선임기준은 적어도 학문적 능력순은 아니라고 보아진다. 이는 이즈음의 대학의 총장이나 학장 선임이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순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다.6) 소수서원 원장 가운데 퇴계 문하에서 수학여부를 조사한 결과 놀랍게도 1명도 없었다. 소수서원 입원생 가운데는 이황 문하에서 수학한 학생이 735명 중 57명이었는데, 원장은 1명도 없다는 사실은 소수서원만의 독자성을 간직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 KCI등재

        紹修書院 入院錄 분석- 1617세기를 중심으로

        송정숙 한국서지학회 2006 서지학연구 Vol.34 No.-

        The aim of this paper is to review the establishment and accreditation of Sosoo-Seowon School(紹修書院) by the King and to analyze the composition of students, when to enter the School, from where they come, what age to enter, when to pass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and what their academic, political inclination are, based on the 1st volume of the Register List of the School. 이 연구에서는 소수서원의 건립과 사액과정을 살펴보고 소수서원 입원록 제1권을 대상으로 1617세기 소수서원 입원생의 인적 구성, 입학연령과 과거 급제, 학문적정치적 성향 등을 분석하였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향교를 이건하고, 이어서 주자의 학문을 계승발전하기 위해 주자의 백록동서원의 예에 따라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후임 풍기군수인 이황의 요청으로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는데, 여기에는 척신세력의 지원이 있었다.소수서원 입원록 제1권에 수록된 1543년부터 1696년까지의 입원생 735명을 대상으로 입원 연도를 분석한 결과 입원생은 한 해에 평균 5명이 입학하였다. 입원생은 1550년대에 119명으로 가장 많았고, 출신지역은 제주도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입원하였는데, 경북이 610명으로 전체의 83%를 차지하였다. 입원생의 연령은 9세부터 59세로 이즈음보다 입원연령의 폭이 넓었으며, 이즈음처럼 20대가 가장 많았다. 생원진사시 합격연령은 14세부터 66세이고, 문과 급제 연령은 23세부터 60세로 이즈음보다 고령에도 과거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과거시험이 관료진출만이 목적이 아니라 급제 사실 자체가 개인과 가문의 영광이었던 조선중기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과거급제 정도를 보면, 735명 가운데 생원진사시 합격자가 313명으로 전체의 43%를 차지하고, 대과 합격자는 99명으로 전체의 13%를 차지하였다. 서원에 입원한 후 20년이 지나면 전체의 38%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전체의 11%가 문과에 급제한다. 과거급제연도를 보면 임란이 일어났던 1590년대를 제외하고는 1550년대부터 1610년대까지 평균 매년 3~4명씩 합격하였고, 문과는 1560년대부터 1600년까지 평균 매년 1~2명이 급제하였다. 1650년 이후 급제자가 급속히 줄어들었는데, 이는 이 시기에 입학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과는 정규시험인 식년시보다 비정규시험이 더 많이 시행되었으며, 1회에 1~2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소수서원 입원생들은 상당수가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영남학파에 속하며, 소수서원 입원생들이 도산서원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동인, 남인이 다수이지만 서인과 북인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공존하였다.

      • KCI등재

        18ㆍ19세기 소수서원의 院生 연구 - 「소수서원 입원록(紹修書院 入院綠)」 제2권을 중심으로 -

        송정숙 한국서지학회 2008 서지학연구 Vol.41 No.-

        The aim of this paper is to analyze students composition when to enter Sosoo-Seowon(紹修書院), where to come from, what age to enter, when to pass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based on the 2nd volume of the Register List of Sosoo-Seowon. The results of the analysis are as follows : 1,805 students admitted this School during the years of 1790 to 1888, with 10 to 26 new students enter per one year. By the way, in 1850s the size of registered students was the largest. Students came from many areas nearby Kyungsangbuk-Do. 90% of the Students came from Kyungsangbuk-Do. Especially 82% of the Students came from Andong and YoungJoo. The age of students were 15 to 74 years old. But the age of 30s were the largest. The number of the students who passed the examination for admission of Seonggyunkwan National College called Sangwon-Jinsa-Si(生員進士試) among the total 1,805 students was 143. The number of the students who passed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called Moonkwa(文科) among the total 1,805 students was 61. 이 연구에서는 「소수서원 입원록」 제2권을 대상으로 18·19세기 소수서원 원생의 인적 구성을 파악하기 위해 입원 인원, 출신 지역, 입원 연령, 입원 후 생원진사시와 문과 급제의 소요연한 등을 분석하였다. 아울러 16·17세기와 비교하여 변모양상도 파악하였다. 「소수서원 입원록」 제2권에 수록된 1790년부터 1888년까지의 99년 동안의 입원생 1,805명을 대상으로 입원 연도를 분석한 결과 입원생은 한 해에 대략 10명 이었지만 많을 때에는 26여명에 달하였다. '취인'이라 하여 한 해에 68명에서 369명까지 대규모로 입원한 해도 있었다. 출신지역은 경북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 출신이 대다수인데, 특히 안동, 영주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입원생의 연령은 15세부터 74세로 16·17세기보다 입원연령의 폭이 넓어졌으며, 고령인 60대와 70대가 125명으로 전체의 7.6%나 되었다. 16·17세기보다 고령화되어 18·19세기의 입원생은 30대가 가장 많았고, 20대·40대의 순이었다. 과거급제 정도를 보면, 1,805명 가운데 생원·진사시 합격자가 143명으로 전체의 8%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78명이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이후에 서원에 입원하였다. 문과 급제자는 61명으로 전체의 3%에 불과한데, 이 가운데 42명은 문과에 급제한 후에 소수서원에 입원하였다. 이를 볼 때 18·19세기에 이르면 당시 선비들에게 소수서원은 과거 준비기관으로서의 의미는 다소 퇴색하고, 서원 입원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고 파악된다. 이렇게 18·19세기에 이르면 원생의 출신 지역의 범위가 좁혀지고, 입원연령이 고령화되고, 원생 가운데 생원·진사시나 문과급제자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듦과 아울러 생원·진사시나 문과 급제 후 서원에 입원하는 경향은 서원이 남설되는 당시의 사회적 환경, 재정이 고갈되어 선비를 기를 수 없는 소수서원의 열악한 재정 상황, 남인의 정치적 몰락으로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중앙정계로의 진출에 제약이 있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 과거에 대한 부정적 인식 및 위기지학을 추구하는 영남사림의 학문적 성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하겠다.

      • KCI등재

        영남지역 퇴계문인의 서원건립과 교육활동

        이수환(李樹奐) 한국국학진흥원 2011 국학연구 Vol.0 No.18

        본 논문은 서원이 보급되는 초창기 퇴계와 그 문인들의 서원건립 활동과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원의 교육활동을 검토하였다. 조선에 있어서 서원제도는 주세붕의 백운동서원 설립으로 출현하였지만 이를 조선사회에 보급ㆍ정착시키고 그 성격을 규정하여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퇴계 이황이었다. 이러한 퇴계의 서원보급 운동에 문인들이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서원은 단기간에 조선사회에 자리잡게 되었다. 퇴계 문인으로 서원건립에 관여한 사람은 56명으로 43개 서원의 건립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여, 이 시기 서원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나아가 서원제의 전국적인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퇴계문인들의 서원 건립과 퇴계의 서원론을 계승한 영남지역 서원의 교육활동을 살펴보았다. 서원의 일차적 기능이 교육적 측면에 있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이 분야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있어왔지만 자료상의 문제로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1980년대 이후 향촌사회사 연구의 일환으로 개별 서원 소장의 필사원본류와 고문서 자료에 대한 수집ㆍ정리가 이루어지면서, 서원 교육과 관련된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조금씩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자료는 서원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가장 일차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본 논문은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영남지역 서원의 입원생의 자격, 절차 및 교육활동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This paper reviewed the activities regarding constructions of Teoigye Seowon and the educational activities of the disciples of Teoigye focusing on Yeongnam area during the early period of the distribution of Seowon. Seowon was a representative country operating organization of the noble men since the later Joseon period; however, its primary function had an educational aspect in that it had been begun originally as an educational institute for Ganghak (mastering of study and researching) and Jangsu (reading books and striving in studying) aimed at Confucian scholars or students. Therefore, although there have been various studies on this area, there has been a certain limitation. As for such a limitation regarding education in Seowon, the great problem was related to its relevant data. As the collection and reorganizing of the original copies of manuscripts and archives owned by individual Seowon have been conducted as one of the research projects into the country society history since the 1980s, data related to education in Seowon has been introduced little by little. Such data has a high value as it is because it is the most primary data which contains the details of education in Seowon. This paper is to review the qualifications, procedures, and educational activities of newly enrolled students for Seowon in the Yeongnam area based on the data. Also, this paper looked into the activities for construction of Teoigye Seowon by the disciples of Teoigye which occurred during the early period since the education conducted in Seowon of the Yeongnam area distributed and established Seowon during Joseon society and succeeded the educational theory of Seowon by Teoigye Yi Hwang, who prepared the foundation of its advancement by defining its character.

      • KCI등재후보

        書院志 分析을 통해 본 初期 書院의 性格 - 竹溪志, 迎鳳志, 吳山志를 中心으로 -

        조준호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한국학논총 Vol.33 No.-

        The process of establishment of Seowon, which emerged in the middle of 16th century, is studied in the paper through analyzing the earlier places of Seowon-gi(書院志). The main places covered in the research consist of Jukgye-gi(竹溪志) of Baegundong seowon(白雲洞書院), Yeongbong-gi(迎鳳志) of Yeongbong seowon(迎鳳書院) and Osan-gi(吳山志) of Osan seowon(吳山書院). Because it examines the introduction to a new academic organization system and the changes followed in cognitive way, the paper will help future understanding of typical Seowon in Chosun Dynasty. 이 글에서는 초기 서원의 서원지 분석을 통해 16세기 중엽에 등장한 서원의 정착 과정을 살폈다. 분석대상으로 삼은 서원지는 백운동서원의 <<죽계지>>(1543년경), 영봉서원의 <<영봉지>>(1559년경), 오산서원의 <<오산지>>(1588년경)이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죽계지>>에 나타나듯 중국 서원의 운영 사례를 참고하여 관 주도 교화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이러한 발흥기의 모습은 이황 등 사림계 인사들이 도학의 학습장으로 서원의 존재 의미를 강조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황 등은 제향인물의 기준 선정과 학습 방식 등 전반적인 부분으로 논의를 확산시켰고, 논란과 갈등을 경험하며 자신들의 주장을 실현시켜 나갔던 것이다. 이처럼 서원지의 분석을 통해 새로운 학제의 도입과 이해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고, 17세기이후 발전의 시기를 맞이하는 조선시대 서원의 전형이 성립되어 가는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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