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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申緯의 墨竹畵에 대하여

        진준현 한국한문학회 2019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75

        This paper focused on the bamboo paintings by Jaha(紫霞) Shin Wi(申緯) who was one of the most renowned shishuhua sanjue(a person talented in poetry, calligraphy, and paint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paper first examined the origins of Shin Wi’s bamboo paintings. Shin Wi learned how to paint bamboos from Kang Se-hwang(姜世晃). His view on bamboo paintings, therefore, succeeded Kang Se-hwang’s realistic view on painting. Shin Wi and Kang Se-hwang’s realistic view on art was also linked to Yi Ik(李瀷). Shin Wi’s views were also based on Su Shi’s theory on literati painting. The literati during the period were all well acquainted with the theories on literati painting proposed by Su Shi and Wen Tong and Shin Wi explored such theories in depth through his works. Aside from the earlier works he painted at the ages of 15 and 26, the majority of Shin Wi’s bamboo paintings were painted later in his life when he was in his 60s and thereafter. In 1812, at the age of 44, Shin Wi went to Beijing as a member of the envoy to the Qing dynasty. During his visit, he met and befriended Weng Fanggang(翁方綱) and many of his fellow Qing literati. Shin Wi’s bamboo paintings, however, do not display particular influences from his visit to China. In fact, Shin Wi’s bamboo paintings were introduced and gathered fame in China. Shin Wi was revered as the three major bamboo painters in Joseon along with Taneun(灘隱) Lee Jeong(李禎) and Soowoon(岫雲) Yoo Deok-jang(柳德章). Unlike Lee Jeong, who mostly painted bamboo trees in the wind(風竹) and bamboo trees in the snow(雪竹), and Yoo Deok-jang, who usually painted bamboo trees in the snow(雪竹) and entire bamboo trees(筒竹), Shin Wi’s usual subjects were bamboo trees in the rain(雨竹) and bamboo trees in the fog(霧竹). Whereas Lee Jeong and Yoo Deok-jang mostly portrayed the honor of the scholar or the hermit through their bamboo paintings and did not add any poems, Shin Wi’s bamboo paintings were more lyrical and were accompanied by flourishing poems. As a great artist with an international perspective, Shin Wi was aware of the contemporary trends in Beijing and also pointed out trends which he considered erroneous. 이 글은 조선후기의 시서화 삼절 紫霞 申緯의 墨竹畵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서 먼저 신위의 묵죽화의 연원을 살펴보았다. 신위의 묵죽화는 姜世晃에게 배운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묵죽화론도 강세황의 寫實主義的인 繪畵觀을 계승한 것이다. 신위와 강세황의 사실주의적 회화관은 李瀷으로 연결된다. 신위의 묵죽화론의 기반은 蘇軾의 文人畵論이다. 당시 문인이라면 모두 소식과 文同의 문인화론을 잘 알고 있었고 신위는 창작을 통해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신위의 묵죽화 작품은 15세 무렵과 26세 때 그린 초기작 이외에는 대부분 60대 이후 만년작들이다. 신위는 1812년 44세 때 청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북경에 가서 翁方綱(1733-1818)을 중심으로 한 많은 淸朝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그러나 신위의 묵죽화는 중국 여행으로부터 뚜렷한 영향을 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위의 묵죽화는 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졌으며, 灘隱 李霆, 岫雲 柳德章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추앙되었다. 그런데 風竹, 雪竹을 즐겨 그렸던 이정과, 설죽, 筒竹을 즐겨 그렸던 유덕장에 비해, 신위는 雨竹, 霧竹을 즐겨 그렸다. 이정과 유덕장이 題畵詩가 거의 없는 묵죽화를 통해 선비나 은일의 志操를 주로 표현한 데 비해, 신위는 풍부한 제화시를 곁들여 抒情이 풍부한 묵죽화를 그린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신위는 국제적 안목을 가진 대예술가로 당시 북경의 예술계의 동향도 파악하고, 잘못된 경향을 지적하기도 했다.

      • 『華陽九曲圖』 연구

        진준현 한국고지도연구학회 2017 한국고지도연구 Vol.9 No.2

        화양동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아름다운 골짜기인데, 2014년 명승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華陽九曲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학자 宋時烈(1607∼1689)이 1666∼1688년 이곳에 은거하였기 때문이다. 九曲이란 명칭은 중국 송나라 때 성리학을 완성시킨 朱熹(1130∼1200)에서 비롯되었다. 주희는 복건성 무이산에 精舍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그리고 무이산의 아름다운 구곡을 읊은 시 「武夷棹歌」를 지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 율곡 李珥(1536∼1584)는 황해도 해주에 은거하면서 주희를 본받아 「高山九曲歌」를 지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이이를 계승하였다. 그래서 송시열이 죽은 후 제자들은 화양동에 아홉 곳의 지명을 정해 화양구곡을 완성하였다.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西人이 조선 후기 정치사의 주류를 차지하자, 이들은 주희-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도통을 확립하고자 했다. 중국 성리학의 도통이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朝鮮中華思想의 배경은 중국 명나라가 오랑캐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망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고산구곡도』를 그리고자 하였다. 송시열이 죽은 뒤 제자들은 송시열의 유지를 이어 화양동에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는 萬東廟를 짓고 『화양구곡도』를 그렸다. 『화양구곡도』를 처음 그린 사람은 송시열의 제자 金鎭玉(1659∼1736)이다. 그리고 송시열의 수제자 權尙夏(1641∼1721)의 조카인 權燮(1671∼1759)이 화양구곡도를 계승하고자 했다. 권섭의 희망은 손자 權信應(1728∼1786)에 의해 이루어졌다. 『화양구곡도』는 단순한 실경산수화가 아니라 유교철학의 전통,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현재 전하는 『화양구곡도』는 충북대박물관 소장품과 李馨溥(1791∼1851)가 그린 것, 그리고 조선민화박물관 소장품이 있다. 충북대본은 권신응이 그린 것으로 주장되었으나 화풍분석 결과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충북대본에는 화면에 동서남북의 정확한 방위를 적어 회화식 지도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형부가 그린 것, 조선민화박물관 소장본은 더욱 후대의 작품이어서 사실성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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