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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의 기원과 옹중석

        정승모 국립문화재연구원 2013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Vol.46 No.1

        우리가‘장승’이라고 부르는 조형물들은 그 기원이나 역사, 또는 기능이 서로 달라 엄밀한 구별이 필요하다. 이 글은 장승의 기원과 함께 역사적인 변화과정을 더듬어 이 구조물이 갖는 두 가지 다른 측면을 구분하고 이에 기초하여 소위‘석장승’의 다양한 기원과 기능을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고려시기에 사찰에서는 장생, 또는 관련 석물을 세웠는데, 이 중‘통도사국장생석표’는 석표(石標)라기보다는 석비(石碑)의 기능을 갖는다. 석비에 음각된 명문을 보면 이전의 판아(判兒)처럼 다시 세우라고 하였는데, 판아란 역귀(疫鬼)를 쫓는다는 종규(鍾郡)를 말한다. 명문 내용은 통도사의 영역을 장생으로 표시하였다는 것이다. 허목의 「월악기(月嶽記)」에 실려 있는 한준겸(韓浚謙)의 기사를 보면 도갑사 국장생의 규모가 매우 커서 이러한 추정을 가 능케 하며‘국장생’이나‘황장생’이라고 새긴 입석은 장생이 아니라 표석, 즉 장생표(長生標)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정(굑程) 기능을 하는 후를 장생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사찰 장생과는 달리 나무로 만들어 사찰 장생의 생(生) 자에 나무 목(木) 변을 붙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요즈음과는 달리 조선시기에는 비보 성격을 갖는 사찰 석상이나 읍성풍수물을 장승이라고 부른 경우는 찾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제주도‘돌하 르방’을 두고 장승이라고도 불렀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다.『 탐라기년(耽갥紀年)』에 의하면 제주목사 김몽규(갏夢 奎)가 성문 밖에 옹중석(翁仲石)을 세웠다고 했는데, 옹중석은 대개 고대 제왕(帝王)이나 대신(大臣)의 능묘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을 지칭하는 말이다. 옹중석은 엽승[壓勝]을 위한 풍수물로도 나온다.『 광주읍지(光州邑誌)』 (1899년간)에는 수구(水口)를 만들고 석옹중 2기를 마주 세워 그 기를 진압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전라북도 부안읍치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2기씩 세워진 석물에는‘上元周將軍’과‘下元唐將軍’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읍성풍수물인 이것 역시 석장생이나 장승, 또는 당산으로 불릴 이유는 없다. 도교적인 개념인 상원(上 元)과 하원(下元)이 붙은 주장군이나 당장군은 이후 사찰 석상의 명문으로 자주 등장하고, 이후에는 이표 장승에 도 붙는다. 사모를 쓴 북한산성 옹중석을 지금은 볼 수 없는 것처럼 많던 옹중석들은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그 와중 에도 제주의 옹중석과 부안 읍성의 석상은 위치 이동이 적어 옹중석의 기능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석상들은 고려시기에 조성된 장생(長生)과 기능상 가장 관련이 깊은 듯하다. 즉, 과거의 장생처럼 18세기 초중반의 석상들은 읍성, 또는 사찰의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 찰 석상의 설립시기는 양전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때이기도 하지만 속세에서는 산송(山訟)이 활발해지는 때 라 사찰에서는 비보와 함께 영역 표시를 위해 석상들을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승으로 통칭되는 목인과 석상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유로 세워진 것들이다. 그 출발은 고려시기 사찰의 장생(長生)으로 비보물이면서 동시에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석물, 또는 석상이었다. There is the need to make a sharp distinction as regards JANGSEUNGs (Korean traditional totem poles) that are different in origin, history and function.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functions of the figures, as well as to trace stone JANGSEUNGs to their origins. In this regard, researched were conducted into the origins of JANGSEUNGs and their changes in history. There was a tradition in the GORYEO Dynasty (an ancient dynasty in the Korean Peninsula) that it erected JANGSAENGs (the archaic name of JANGSEUNGs) or allied stone figures within temples; especially, ‘TONGDOSA GUKJANGSAENG SEOKPYO (a stone JANGSAENG that was erected by the royal command and is at the entrance of TONGDO Temple located in YANGSAN, South GYEONGSANG Province, South Korea)’functions as a stone monument rather than as a stone sign. In the engraved inscription, it is written that it should be erected in the form of PANA as before.‘ PANA’refers to‘ ZHONGKUI’, a god in Chinese Taoism believed to exorcise devils that spread diseases. The inscription is to define the territory of TONGDO Temple. The article on HAN JUN GYEOM in a book ‘WORAKGI (a travelogue on WORAK Mountain in North CHUNGCHEONG Province, South Korea)’written by HEO MOK makes it possible to guess the scale of GUKJANGSAENGs erected in DOGAP Temple. The stones, on which ‘GUKJANGSAENG’or ‘HWANGJANGSAENG’were engraved, are not JANGSAENGs but are demarcation posts. In the JOSEON Dynasty (the last dynasty in the Korean Peninsula) JANGSAENGs functioned as signposts. Unlike JANGSAENGs in temples, they were made of wood. At first, the word ‘JANGSAENG’was written ‘長生’in Chinese characters, but in the JOSEON Dynasty another character ‘木(wood)’was added to them, and thus the orthography was likely to change into ‘JANGSEUNG.’In the JOSEON Dynasty, in addition, optative or geomantic figures were not called‘ JANGSEUNG.’Historically, for instance, there has been no case where‘ DOL HARBANGs (stone figures found only in JEJU ISLAND, South Korea)’are called‘ JANGSEUNG.’In a book‘ TAMRA GINYEON (a historical record on JEJU Island, South Korea)’it is written that KIM MONG GYU, JEJU governor, erected ONGJUNG Stones outside the fortress gate. ONGJUNG Stones usually refer to stone statues erected in front of ancient kings or dignitaries’ mausoleums. Moreover, they were geomantic figures erected to suppress miasma. A magazine ‘GWANGJUEUPJI (a journal on old GWANGJU, South Korea, 1899)’shows that two two ONGJUNG Stones were so erected that they might look at each other to suppress miasma from a pathway through which lucks lose. On the two stone figures located in BUAN-EUP, North JEOLLA Province, South Korea, inscriptions‘ SANGWON JUJANGGUN’and ‘HAWON DANGJANGGUN’were engraved. The words are to identify the figures’sexes. They are a kind of optative geomantic figures, and therefore there is no reason to call them ‘JANGSAENG’or ‘JANGSEUNG’or ‘DANGSAN.’The words ‘SANGWON’and ‘HAWON’are closely associated with Taoism. Since then, the words have been widely used as inscriptions on stone figures in temples, and subsequently are used for JANGSEUNGs. A hatted ONGJUNG Stone, found in BUKANSAN Fortress, disappeared and other ones may be being buried somewhere. Meanwhile, ONGJUNG Stones in JEJU Island and stone figures in BUAN-EUP have hardly been displaced and thus have properly functioned. Stone figures, made in those days, seem to be most similar in function to JANGSAENGs made during the GORYEO Dynasty. Specifically, like earlier JANGSAENGs, stone figures made during the early to mid-18th century were likely to function not only as optative figures but as boundary stones. Most of stone figures in temples were made whenever the land use survey was conducted throughout the nation, but given that at the same period of time, the commonalty filed many lawsuits against grave sites, temples might erect many stone figures to mark their territories. Currently, wooden or stone figures are commonly called ‘JANGSEUNG’, but they were erected in different epochs and for different reasons. Their origins are to be sought in stone figures that functioned not only as optative figures in temples but as boundary stones during the GORYEO Dynasty.

      • KCI등재

        東國文獻備考 민속자료의 특징

        정승모 진단학회 2007 진단학보 Vol.- No.104

        東國文獻備考속의 민속자료는 다른 관찬사료나 문헌에서처럼 별도의 분야로 설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있다. 그래서 책 전체를 대상으로 민속관련 자료를 추출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이미 다루어진 바 있는 禮考와 樂考 등은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또한 자료추출의 한 방법으로 1983년에 간행한 增補文獻備考索引을 적극 활용하였다. 그리고 추출한 내용은 민속신앙, 관습규범제도, 연희놀이, 세시풍속, 농업상업어염업 등으로 분류하였다. 민속신앙과 관련하여 東國文獻備考에는 淫祀에 관한 기사는 있는데 左道에 관한 기사가 없는 것은 좌도에 관한 문제는 그동안 국가 차원에서 이미 정리되어 후기에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東國文獻備考의 기사 선택은 특히 前朝, 즉 고려와의 비교나 변화상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東國文獻備考에 나오는 민속자료의 성격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그 자체로 해당 민속이 국가 전체의 틀 속에 받아들여졌거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東國文獻備考에서는 특히 이전시기 사회와는 다른 영조 때의 변화된 사회상을 보여준다. 刑考의 廢律條가 그 예다. 東國文獻備考 상의 민속자료는 그것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등장한 것이므로, 이는 곧 당시 시대상의 반영이면서 변화상도 함께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조선후기적인 민속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요소인 가족, 친족 등에 관한 자료들도 東國文獻備考에 산재되어 있는데, 별도로 禮考를 중심으로 한 의례 연구에서 다루어져 이 글에서는 생략하였다. 이제는 문화사적인 역사연구가 관심을 받기 시작하는 때이니만큼 東國文獻備考의 분석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사료편찬 작업의 개발이 절실하다. The Character of Materials related to Joseon Folk Lifes Contained in the Donggukmunheonbigo (東國文獻備考)

      • KCI등재

        의례를 통한 의미의 구상화과정

        정승모 한국문화인류학회 1979 韓國文化人類學 Vol.11 No.1

        1. 상징인류학의 基本前堤 인간의 행위는 자연현상의 사건과는 달리 意味를 갖는다. 意味는 象徵에서 나타나며 槪念的 體系인 이 상징을 통해 인간들은 意味를 전달한다. 意味는 社會的 次元과 理念的 次元으로 분리될 수 있으며 어느 차원에 강조를 하느냐에 따라 사회인류학적인 상징연구와 문화인류학적인 상징연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상징연구는 인간들이 그들의 현실을 어떻게 formulate하는가를 본다. 이를 위해 분석자는 현실세계로 나타난 상징에서 그 意味를 찾아낸다. 2. 儀禮狀況에서 인간의 象徵行爲에 대한 兩者擇一的 理解 1) 문제점 ① 행위자간에는 그 역할과 경험에 따라 상징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다르거나 또는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儀禮專門人과 平人의 관계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 이러한 점은 Communication 構造가 共有된 意味體系를 前提로 이루어 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示唆한다. ② 행위자에 의해 파악되지 않은 상징이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에 행위자의 상징적 행위는 規範的 價値에 의해 이루어진다. ③ 이러한 규범적 가치에 의한 상징적 행위일수록 意味를 전달(Communication)하려는 측면이 약하거나 또는 생략되어 있다. 2) (Communication 構造를 반영한) 意味와 象徵의 관계 儀禮的 狀況에서 分析上 意味는 상징으로 표현되기 以前외 개념(M)과 상징결과에서 나타나는 의미 (M)'로 구분이 가능하며 S에서 M'로의 과정(→)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3) 象徵行爲( : 특히 儀禮行爲)에 대한 양자택일적 理解 ① 상징을 통해서 他人에게 의미를 알리고자 함(S→M'의 과정을 중요시) ② 象徵行爲에 의한 意味의 具象化 ( M→S의 과정을 중요시) 의례상황에서 특히 愛信者(또는 聽者, 參與者) 등이 존재하지 않을때 이 의례 행위는 意味를 具象化(reification :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實體로 다루려고 함) 하려는 행위라고 해석될 수 있다. ※ 儀禮에서 平人의 規範的 價値에 따라 의례 전문인이 채택되어 진다. (←平人은 의례전문인에게 意味의 具象化를 의뢰함) 3. 관련자료 :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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