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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재 최병심을 통해 본 간재문집 간행의 갈등양상

        이천승 한국철학사연구회 2022 한국 철학논집 Vol.- No.75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conflicts between Ganjae’s disciples with the publication of Ganjae’s collection of writings. Focusing on Choi, Bueng-sim, in terms of the mental conflicts experienced by the Confucian schola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d period. During this period, the censorship process (印可) of the Japanese governor authorization was inevitable. Therefore, publishing the collection of writings in a way that can properly continue the spirit of Joseon became the biggest problem and motives of conflicts between Ganjae Jeon, Wu’s disciples. When Ganjae was alive, he divided his own collection of writings into former and latter grades. Writings organized in the state just before the publication. However, after Ganjae died, his disciples have a serious conflicts over the publication of their teacher's collection of writings, which they have longed for so much. There were conflicts between Oh, Jin-young and Choi, Byung-sim who were the representative of disciple groups. In the previous discussion, there was review for the perspective of Oh, Jin-young. However, in this paper, the issue of conflicts over the publication of the collection of writings were reviewed, centering on Choi, Byung-sim, who was standing on the opposite side. Oh, Jin-young rushed to publish the collection of writings, based on the two reasons. Convenience and freedom without Japanese governor authorization for publishing the collection of writings at Jin Ju. His intention was to publish quickly so that the teacher's collection of writings would not disappeared in the dark periods. However, the progress that did not go through sufficient agreement within disciples, such as the composition of deviations and printing methods, were the reasons of conflicts. Choi, Byung-sim expressed his opinion that the reconstruction of the deviation could results in distorting the Jeon Wu’s intention. Furthermore, he promoted his own independent publication of collection of writings. Claiming that Jeon Wu's collection of writings which published in the process of censorship and deletion by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would damage the spirit of resistance to Japan. As a result, Currently there are different series of Ganjae’s collection of writings by Oh, Jin-young and Choi, Byung-sim. In the gloomy period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period, the collection of writings, the spiritual heritage of Joseon, remains with us as more valuable than just data. 이 논문은 간재 전우의 문집간행을 둘러싼 문인 내부의 갈등을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 유교지식인이 겪었던 정신적 갈등이란 측면에서 검토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총독부의 ‘인가(印可)’라는 검열과정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는 방법으로 문집을 간행하는 것이 간재와 그 문인들 앞에 놓인 가장 큰 관건이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전우는 생전에 전고와 후고로 나누어 어느 정도 문집간행 직전의 상태로 정리해 두었다. 미흡한 점은 보완의 여지를 남기면서 시대적 열망과 좌절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간재 사후에 문인들은 바로 그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스승의 문집간행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홍을 겪게 된다. 오진영을 주축으로 한 세력과 최병심 등을 주축으로 한 문인집단의 충돌이 대표적이다. 기존의 논의에서 오진영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입장에서 검토되었는데, 이 논문에서는 그 반대편에 서있던 최병심을 중심으로 문집간행을 둘러싼 갈등의 쟁점을 재검토한 것이다. 오진영은 문집간행에 필요한 경제적 조건과 상황을 내세우며 문집간행을 서둘렀다. 암울한 시대에 스승의 문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신속히 발간하려는 의도가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편차의 구성이나 인쇄방법 등 문인내부의 충분한 합의를 거치지 않은 문집발간의 추진은 문인 내부에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최병심은 편차의 재구성은 스승의 의도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더 나아가 일제 총독부의 검열과 삭제라는 인가과정 속에서 출간되는 문집이란 스승의 의리정신을 손상시키게 될 것이라는 주장하면서 독자적 문집간행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현행 간재문집은 오진영과 최병심을 중심으로 문인들의 갈등이 치열했고, 동일 저자의 서로 다른 3종의 문집이 있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에서 조속히 간행을 서둘렀던 것은 자칫 산실될지도 모르는 스승의 문집을 ‘전도(傳道)’의 사명감으로 유통보급하려는 노력이었다. 반대측에서는 스승의 유훈에 따라 총독부의 인가라는 굴욕을 피해 제대로 된 문집의 원형을 인출하려는 ‘정도(正道)’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최병심이 별도의 문집간행을 염두에 두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신념과 가치의 충돌 이전에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스승을 향한 문인들의 열정이 충돌한 사건이었음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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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재 전우의 자존의식과 강학활동

        이천승 한국유교학회 2016 유교사상문화연구 Vol.0 No.63

        This paper explored the spirit of Seonbi from Ganjae Jeon Woo (艮齋 田愚), a Confucian scholar who was devoted to preserving Confucian culture through his sense of self-esteem in relation to traditional culture and education around the dawn of the 20th century. First, I identified in Ganjae one single aspect of an intellectual who lived through the chaotic period of rapid collapse of traditional value set. Albeit fame he earned early on, Ganjae went through a series of anger and frustration. The society had changed into the one that would not embrace his strong ambition to bring traditional values into full fruition. His sense of self-esteem that desired to recover Confucian-based spirits and civilization of the Joseon Dynasty demonstrates the spirit of scholar trying to hold our cultural identify right. Second, I noticed education he chose; and aspiration for the new age he presented and laid the foundation for as a means to preserve Confucian value. Even in extreme situations in which future seemed elusive, he never gave up having seed of hope sown to flourish. An idea that any psychology and behavior should at all times be judged primarily based on moral compass or value of norms laid the theoretical groundwork of his such behavior. And this is considered as one of his major academic achievements. Academic activities of literary figures following Ganjae have influenced the academic circle for generations. Albeit limits in getting the messages through to the real world, strict self-discipline and call for awakening about human nature that Ganjae and other literary figures presented formed a type of ethical values that was never swayed even in the time of rapid transformation. 이 논문은 기호학맥의 흐름을 올곧이 계승하려 노력했던 간재 전우(艮齋 田愚)의 삶과 철학, 그리고 일상에 녹아내린 교육활동을 통해 당대 지식인의 문화자존의식과 유교문화를 사수하려는 불굴의 지향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첫째, 기존의 가치체계가 급격하고 송두리째 붕괴되던 시대적 혼돈 속에서 간재가 열망했던 인간다운 삶의 가치와 그러한 삶의 방식을 묵수하려는 과정에서 존재의미를 찾았던 지성인의 한 모습을 살펴보았다. 개인의 영민성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유림계에서 명성을 지녔던 간재의 삶은 분노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미 전통적 가치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었던 그의 결기어린 선비정신을 더 이상 이해하고 포용할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단발령, 창씨개명 등 노골화된 일제의 식민지배는 유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이 지탱해온 정신문명의 근간을 흔들었다. 일제의 문명개화를 앞세운 타율적 근대화가 전방위적으로 강요되는 상황에서 간재는 꺼져가는 유학의 불씨를 사수하는 선봉에 섰다. 유학의 정신을 바탕으로 형성된 정신문화에 대한 당대 지식인의 자각과 그 실현 주체로서 느끼는 문화자존감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길이 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불굴의 선비정신은 간재를 마지막까지 간재답게 자리매김해 주었다고 평가된다. 둘째, 일제강점기라는 참담한 현실에서 유학적 가치를 고수하려는 방법으로 간재가 택한 교육과 그를 통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을 살펴보았다. 그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싹을 뿌리는 길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 이론적 토대로서 간재의 학문은 도덕적 본성의 준수에 따른 인간다움의 가치를 고양시키는 일에 집중되었다. 어떠한 심리나 행동이든 항상 도덕적 본성 내지 규범의 가치를 우선적인 기준에 두고 판단해야 한다는 점, 우리가 추구해야 될 본성은 존재 그 자체로 변함없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 등은 그의 학문적 성취로 손꼽힌다. 조선유학의 말미에서 정리된 간재의 그러한 사유들은 다름 아닌 유학을 근간으로 하는 문화자존의식의 재천명이었다. 즉 인간은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간재의 정신은 그를 중심으로 결집된 문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하나의 목소리로 모아지면서 꺼져가는 전통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현실에 좌절하기보다는 교육을 통해 희망의 싹을 키워나가려는 간재의 노력이 일궈낸 결과들이다. 이를 이은 간재문인들의 학문 활동은 세대를 넘어 학계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지역 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보이지 않는 저수지 역할을 하였다. 비록 현실과의 소통에 한계는 있었지만, 간재와 그 문인들이 보여준 엄격한 자기절제와 본성에 대한 각성의 촉구가 급변하는 시대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윤리적 가치규범의 한 전형으로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 KCI등재

        특집 : 송명유학 수양론에서 "미발"(未發) 설의 형성과 전개 ; 도남학(道南學)의 미발설과 "천리체인(天理體認)"의 수양론

        이천승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09 철학연구 Vol.0 No.38

        이 논문에서는 미발상태에서 천리의 기상을 체인하려는 도남학(道南學)의 수양론을 살펴봄으로써, 주자학 형성 이전의 도남학풍이 지닌 주요한 특징을 검토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다. 주자에게 반면교사로 깊은 영향을 주었던 도남학의 전통은 주자학의 형성과 전개양상을 이해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미발기상을 통해 천리를 체인하려는 도남학자들은 `정좌`라는 다소 불교와 유사한 듯한 방법을 통해 유교의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본연을 향해 끝없이 순수자아를 찾아가면서도 구체적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균형감을 유지하려는 그들의 자세는 천리에 대한 인식을 명료히 하려는 수양론으로 이어졌다. 미발에서의 중을 구함으로써 천리를 체인하려는 양귀산의 경우는 언어문자에 사로잡히지 않고 온몸으로 그러한 기상을 체험할 것을 강조했다. `구중(求中)`을 향한 그러한 노력이 이연평에 이르면 `묵좌징심(默坐澄心)`을 통해 천리를 체인하려는 것으로 방향이 선회하게 된다. 연평은 중에 대한 집착대신에 변함없는 함양의 노력을 강조하고, 점진적으로 누적된 공부를 기반으로 가슴속이 저절로 툭 트이는 쇄연(灑然)한 경지를 도모했던 것이다. 불교와 차별화된 유교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려는 노력의 일단에서 나온 도남학풍은 주자에게 있어 구중의 공부법에서 나올 수 있는 장단점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리고 그러한 내면을 향해 순수의식을 지향하려는 마음과 수양자세는 학파나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는 불씨로 남아있다. 本論文的目的主要在於通過硏究未發狀態中體認天理的道南學的修養論,而檢討朱子學形成以前道南學的主要特征。因爲作爲朱熹的反面敎師的道南學傳統乃是理解朱子學的入手處。以未發氣象體認天理的道南學者們通過與佛敎修養方法흔相似的`靜坐`試圖保持儒家整體性。他們一方面爲了達到本然的狀態尋求純粹自我,而령一方面力圖不脫離具體的現實。他們的這種保持平衡的態度,自然而然引起明確認識天理的修養論。楊龜山主張求未發之中而體認天理,故他强調不能困繞於言語文字而以身體驗未發氣象。楊氏的`求中`態度到李延平之後變爲通過`默坐澄心`體認天理的修養態度。延平比`求中`的執著更强調的是平時涵養。他想通過這種長期的平時功夫能구達到灑然境界。這種道南學修養態度乃是重建근佛家不同的儒家整體性的努力之一,却就朱熹而言充分地檢討求中修養功夫之得失的背景。不過,尋求內面純粹意識的這種心態及修養態度,則在任何時代任何學派的功夫態度中不可淹沒。

      • KCI등재후보

        農巖 金昌協의 人性物性論

        이천승 한국철학사연구회 2004 한국 철학논집 Vol.0 No.15

        Kim Chang-hyup(金昌協) with the pen name of Nong-am(農巖) was one of the most typical figures among Noron(老論) party in political power by the latter seventeenth century, and his ideas exerted great influence on the birth of the doctorial sect of Nak(洛學). The object of this writing is placed on the more clear identification of the doctrines of Nak sect. As a matter of fact, the doctrines of Nak sect have remained under somewhat ambiguous conditions. Kim Chang-hyups theories, related to the problems of human nature and the natures of things, revealed some logical inconsistency. Thats why sometimes his theories used to be open to the severe criticism from Ho sect(湖論) and even from Nak sect itself. As clear in his assertion of differences between human nature and the natures of things, he was trying to uplift social morality inside each social beings nature especially by criticizing Pak Se-dangs thoughts. It is true that because of his criticizing like this, he became held in check by Noron(老論) and Soron(少論) political party. However, despite their political attacks, he continued to denounce Pak Se-dang, saying that if one detaches only human nature from the natures of things so as to highlight facing against things and private cultivation, one cannot understand the real aspects of human nature, and rather is apt to lead oneself to let ones emotion to irregular and uncontrolled situation. Like above, he placed his main emphasis not just on the existence of a certain fact but on human efforts to make something psychologically presupposed condition embodied in the real world. His standpoint with denying the aperture between human nature and natures of things, gave lots of academic inspiration to the theory that asserted sameness between human nature and natures of things afterward, and accordingly at last his thoughts became main ones among scholars of Nak doctrinal sect. 農巖 金昌協은 1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노론집권층을 대표하였으며, 사상사적으로 湖洛論辨에서 洛學系列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그의 인물성론에 대한 논의를 통해 다소 불투명하게 남아있는 ‘洛學’의 실상과 그들의 문제의식을 검토해보려는데 있다.김창협은 여타의 성리학자들과 같이 기의 제한을 극복하기 위한 도덕적 마음의 확충을 위해서 그 근거와 기준이 되는 본성의 정립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본성과 관련하여 김창협의 견해는 일관성을 상실한 듯 보이는 그의 진술로 인해 호학측의 반론 및 낙학 내부에서의 비판과 재검토가 있었다. 특히 인성과 물성의 차이를 통해 인간 내면에 지닌 도덕의식의 고양을 기도하려는 그의 시도에서 전환점이 된 것은 박세당에 대한 비판과정에서 두드러진다. 노론과 소론사이의 정치적 견제이외에도 그는 박세당처럼 인과 물의 분리를 통해 타자에 대한 주체적 대응과 수양을 강조하려는 견해는 대상과의 상관관계에서 주관적 태도가 중시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견해는 인간 본성에 대한 몰이해이며 자칫 감정의 방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김창협의 이러한 논리는 진리의 ‘있음’에 만족하지 않고, 심리적 현실로 ‘있게끔’ 만드는 주체의 적극적 활동을 강조에 초점을 두고 있다. 결국 人과 物, 나와 타자와의 균열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김창협의 입장은 인성과 물성이 동일하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고, 그의 견해는 그를 종장으로 추앙하던 낙학계열 학자들의 보편적 믿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KCI등재

        栗谷 學脈의 修養論에 관한 硏究 : 栗谷․巍巖․南塘을 中心으로

        이천승 한국유교학회 2009 유교사상문화연구 Vol.35 No.-

        This artic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heory of self-culture, combines the opinions of Yulgok, one of the greatest scholars of Sung Confucianism in Chosun Dynasty with main issues of the Horak argument (argument of whether the original nature of human beings and beasts are same or not) which had developed from his school and has the purpose of investigating the ultimate goals of then Confucian scholars and their methods for mental culture. First, I look for why Yulgok paid a special attention to [intention], a mental state, being before a practical judgment in a daily life and methods to change his or her disposition for the recovery of the original nature. The attitude of pursuing moral consciousness with sincerity emphasized the self-control efforts that put a wrong state of temperament on a right place. And along with this, he also adopted a double standard in order to invigorate the natural state like a great morale, depending on situation. Second, I examine meanings of subjects of issues which had been formed and discussed in the Korean Confucianism circle that also took over the opinions of Yulgok and different views around them. Discussions related to 'being dormant' that tries to embody pure moral consciousness in the theory of self-culture dealt by Confucianism scholars were a key subject, called Horak argument. Oiam stressed efforts to harmoniously build his or her right mind (differentiated from dignity) and nature, while Namdang emphasized regulation of spirits by saying that people cannot escape from a basis of disposition. Through the above study, it has been found that tries to integrate correction and stimulation, a method to change temperament, suggested by Yulgok were divided into two methods of the theory of mental culture through Horak argument. 이 논문은 수양론의 관점에서 조선 성리학의 한 축을 대변하는 율곡의 견해와 그의 학맥에서 진행된 호락논변의 주요쟁점들을 연관시켜, 당시 성리학자들의 지향점과 수양의 방법을 살펴보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다. 먼저 율곡이 일상의 구체적 판단 이전의 심리상태인 의향[意]에 특별히 주목한 점과 본성의 회복을 위한 기질변화의 방법을 살펴보았다. 성실한 마음가짐으로 도덕의식을 지향하려는 자세는 가변적인 마음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것이다. 율곡은 기질의 그릇된 상태를 교정하여 바로잡으려는 극기의 노력과 더불어, 상황에 따라서는 호연지기와 같은 본연의 상태를 보양하려는 이중적 잣대를 적용하였다. 다음으로 율곡의 견해를 계승하면서도 한국 성리학계의 쟁점을 형성하였던 논의들의 주제가 지니는 의미와 견해 차이를 검토해보았다. 성리학자들의 수양론에서 순수도덕의식을 체현하려는 미발과 관련된 논의는 호락논변으로 일컫어지는 핵심주제였다. 아울러 기질 혹은 기질지성을 미발상태의 순수의식에까지 연관시켜 볼 수 있는지 여부는 기존의 성리학 전반에 걸친 재검토의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외암은 기품과 차별되는 본심 그리고 심성이 일치되는 함양의 노력을 앞세웠고, 반면에 남당은 기질이라는 토대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강조하면서 기의 검속과 규제를 강조하였다. 이상을 통해 율곡이 聖學을 지향하면서 제시하였던 기질의 변화방법인 교정과 보양의 통합적 시도는 호락논변을 거치면서 두 방향의 수양론으로 나눠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바람직한 도덕적 인간상의 구현을 위해서는 내적인 함양을 통한 본심의 보존, 혹은 외적 규제를 통해 기질을 개선하고 성찰하려는 서로의 주장 속에 도덕적 인간다움의 의미를 묻는 전통지식인들의 절실함이 드러난다.

      • KCI등재

        이간과 한원진의 심성논변 전개과정과 철학적 함의

        이천승 한국사상문화학회 2007 韓國思想과 文化 Vol.38 No.-

        The mind and natural debate's process and philosophical significance of Yi Gan(李柬) and Han Won-jin(韓元震) / Lee, Cheon-Sung 이 논문은 조선후기 호락논변을 대표하는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의 논변 전개과정을 재검토함으로써, 논의의 상호관련성 및 쟁점 사유의 곡절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두고 다음과 같은 두 방향에서 서술된 것이다.첫째, 두 학자의 논변과정에서 쟁점이었던 미발과 본성에 관한 견해들이 어떻게 교차되면서 진행되었는가? 둘째, 논변의 진행과정에서 어떠한 사유의 전환과정을 거쳐 각자의 일관성을 유지하였으며 근본적 견해차이는 무엇인가? 두 학자의 논의는 출발단계부터 미발과 본성의 개념을 둘러싼 심과 성에 대한 엇갈린 이해가 항상 맞물리면서 논리적 보완과 견해의 정합성을 모색되었다. 이간은 미발상태에서 본성의 순선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기질의 의미 자체를 축소하였다가 공허하다는 지적에 따라 본성과 직결된 순선한 기의 측면을 부각시켰지만, 두 부류의 심성을 설정했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반면에 한원진은 기질의 존재자체에 치중한다는 비판에 따라 성을 세 단계로 분류하여 기의 존재를 논리적 차원에서 규정하였지만, 오히려 현실성을 담보하지 못한체 리의 순선함만을 주장한다는 반론에 부딪친다. 결국 이간은 주로 본심의 차원에서 심성일치(心性一致)를 주장하였고, 한원진은 이기(理氣) 불리(不離)와 부잡(不雜)의 논리를 통해 기질의 의미를 끝까지 놓지 않는다. 이와같이 ‘기’에 대한 해명과정에서 순수한 마음의 영역을 확대하거나, 기의 영향력을 제어하는 기준으로 리에 대한 강화방안이 당대 지식인들을 격론의 현장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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