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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인간’과 ‘미래의 철학’-완전주의와 행복의 관계를 중심으로
강용수 ( Kang¸ Yong Soo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21 철학연구 Vol.- No.64
이 글은 최근 많은 학자들이 주목하는 니체의 ‘호모 퓨처리스’(Homo futuris)의 도래와 그것과 함께 제기되는 미래의 철학의 가능성과 방향성을 철학적으로 명료화하기 위해 ‘미래의 인간’을 니체의 ‘미래의 철학’에 근거하여 비판적으로 분석하는데 목표가 있다. 이 연구는 ‘미래의 인간과 미래의 철학’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기 위해 니체의 포스트 휴먼, 트랜스 휴먼의 쟁점을 ① 새로운 철학적 인간학 모색, ② 기술공학적 완전주의 비판, ③ 과학기술시대의 불행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완전주의와 진화론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철학은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의 사상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지만, 부단한 자기상승, 역량강화라는 측면에서는 미래의 인간학을 지지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무엇보다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적 인간학과 차이나는 니체의 독특한 인간규정인 ‘미규정성’, ‘미확정성’이 어떻게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의 이념을 지지하는지 살펴보고, 기술공학적인 완전성의 개념을 현대과학에서 경험하게 되는 ‘불행’의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한다. In order to philosophically clarify the possibility and direction of future philosophy raised along with the advent of Nietzsche’s ‘Homo futuris’, which many scholars are paying attention to, ‘future human’ is philosophically expressed in this article. It aims to critically analyze based on the ‘Future Philosophy’. This study focuses on Nietzsche’s posthuman and transhuman issues in order to find the possibility and meaning of ‘future human and future philosophy’: ① seeking a new philosophical anthropology, ② critique of technological perfectionism, and ③ unhappiness in the age of science and technology. I want to deal with Nietzsche’s philosophy contradicts the ideas of posthuman and transhumanism in that it criticizes perfectionism and evolutionary theory, but in terms of constant self-improvement and capacity building, it can be said that there is an aspect that supports future anthropolog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above all, to examine how Nietzsche’s unique human definitions ‘undetermined’, which differ from the existing traditional philosophical anthropology, support the ideology of posthumanism and transhumanism, and complete technological engineering. I would like to criticize the concept of ‘unhappiness’ experienced in modern science.
호스피스 철학의 정초로서 사랑과 공감의 의미 연구 -에디트 슈타인을 중심으로
이은영 ( Eun Young Lee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5 철학연구 Vol.0 No.51
이 글의 목표는 호스피스 철학이란 무엇이며, 왜 현대사회에서 호스피스 철학이 필요한가? 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두 가지 입장을 제시한다. 첫째, 죽음의 의미를 통한 호스피스 철학의 필요성과 둘째, 호스피스와 환자사이의 관계를 통한 호스피스 철학의 필요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호스피스 철학의 이론적 근거를 철학자이자 가톨릭 성인인 에디트 슈타인의 사상과 연결시킴으로써 ‘호스피스 철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초하고자 한다. 종래의 호스피스는 순례자나 병약자를 돌보기 위해 ‘간호’(시간)하는 일과 그들을 편히 쉴 수 있도록 ‘숙박’(공간)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호스피스에 있어서는 순례자와 병약자를 위한 숙박과 간호가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이므로 우리는 이 ‘숙박’(공간)의 개념과 ‘간호’(시간)의 개념을 인간존재라는 바탕에서 철학의 기본범주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이를 ‘호스피스 철학’이라 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러한 논의를 적극 지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요한 요소를 부가하고자 한다, 즉 호스피스에 있어서 순례자나 병약자를 돌보기 위한 ‘간호’(시간)와 그들을 쉴 수 있도록 하는 ‘숙박’(공간)이라는 기본범주를 토대로 간호하는 호스피스와 간호를 받는 환자 사이의 ‘관계’(태도)라는 요소를 추가하여 인간존재라는 바탕에서 재해석하려는 것이며, 이를 ‘호스피스 철학’(Hospice Philosophy)으로 규정짓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공감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바탕으로 호스피스와 환자 사이의 관계를 구체화함으로써 종래의 제시되는 호스피스 철학의 범주에서 좀 더 발전시키고자 하는데 필자의 논의가 있다. 그렇다면 필자는 호스피스 철학을 정초하기 위해 왜 사랑과 공감을 강조하는가?, 왜 이것이(사랑과 공감) 오늘날 호스피스 철학을 정초하기 위한 유효한 대안일 수 있는가? 이다. 우리는 퀴블러 로스가 주장한 죽음을 앞둔 임종자의 마지막 단계인 ‘수용’의 단계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는 임종자의 수용이라는 의미를 감정의 단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마지막 단계는 고통이 지나가고 몸부림이 끝나면 머나먼 여정을 떠나기전에 취하는 마지막 휴식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수용 단계에 들어선 환자는 혼자 있고 싶어 하고 사람이 방문을 해도 이야기를 나눌기분이 아닐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심경을 주변에 있는 가족이나 간호제공자들이 수용하고 있다고 느낄때, 간호제공자와 환자는 상호 소통에 놀라운 영향을 줄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임종환자는 어쩔 수 없는 ‘수용’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내세에 대한 희망 속에서 평온한 죽음을 맞을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죽음을 앞둔 임종환자와 간호제공자 사이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며, 그 소통은 서로가 ‘하나로 느낌’ 내지는 ‘더불어 느낌’과 같은 사랑과 공감을 전제로 했을 때 유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제시하는 사랑과 공감의 의미는 호스피스 철학을 정초하기 위한 큰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 이에 필자는 슈타인의 박사논문 『감정이입의 문제』에서 제시되었던 감정이입(Einfuhlung)의 한 측면인 ‘하나로 느낌’과 ‘더불어 느낌’을 통하여 호스피스 활동의 이론적 근거를 모색하였다. 우선 호스피스는 임종하는 환자의 곁에 있으며, 임종자의 고통스러운 행동을 외적으로 직접 실행하지는 않지만 내적으로 감정이입하면서 함께 함으로써 ‘하나로 느끼게’ 될 수 있다. 임종자의 고통을 하나로 느끼려 하는 호스피스의 태도는 심리적, 정서적으로 환자가 자신의 안정감과 만족감을 가지는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 호스피스는 임종자의 고통에로 자신을 옮겨 놓으며, 임종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에 대하여 ‘더불어 느낌’(Mitfuhlen)으로써 임종자의 호소에 응답하며 임종자로 하여금 친밀감과 가까움이라는 정서를 느끼게 할 수 있다. 감정이입의 한형태로 제시된 ‘하나로 느낌’과 ‘더불어 느낌’의 근저에는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슈타인은 주저『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전반에 걸쳐 감정이 존재에 접근하는 유효한 방법임을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육체적 케어를 돕고 있는 싸나톨로지스트와 영적 케어에 좀 더 집중하는 호스피스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하여 열린 마음을 지녔을 때, 그 의의가 더 드러날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The goal of the passage of hospice What is the philosophy and hospice philosophy in modern society, why do you need? In the face of its two core positions in order to give up on discussions about. First, a hospice by the meaning of death in philosophy and second, the need for hospice patients and hospice thr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philosophy the need for going to present. And in the process, philosopher and a Catholic saint on the philosophical rationale of the hospice where Edith Stein’s ideas and by linking ‘Hospice philosophy’ thatIntends to 10 days of January, the new paradigm. The writer is an active supporter of those discussions and wants. Nevertheless, the potential to add one important element, That is in hospice where pilgrims or an invalid for looking after the ‘Nursing’(Time) and to rest the default based on the category that we are making a ‘Accommodation’(Space)Nurse to receive care and hospice patients between the elements called ‘Relationship’(Attitude) ‘the hospice, and to convince this by adding human being, based in the country twist Philosophy’ (Hospice philosophy) to try to do. Above all, hospice and patients based on empathy and feelings of love to hospice in terms of the philosophy proposed by clarifying the relationship between critical of the more But when my desire to develop the disputed.
삶의 공동체와 문화 공동체와 도덕 공동체인 사랑의 공동체 -후설의 도덕 철학에서
조관성 ( Cho Kwansung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20 철학연구 Vol.0 No.62
삶의 공동체이며 문화 공동체이며 도덕 공동체인 사랑의 공동체를 주제화하는 후설의 도덕 철학적 사유는, 사회 철학과 윤리학과 도덕 교육학을 그리고 철학적 신론이나 (계시 신학적 세계관과 구별되는) 이성 신학적 세계관 등을 포괄한다. 후설은 삶의 공동체와 문화 공동체와 도덕 공동체 등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공동체 삶의 진정으로 좋은 모습을 또는 가장 바람직한 형태를 자기 반성하는 개체 자아의 존재론에 기초하며 자유 의지와 자율성의 주체로서 삶과 행위를 수행하는 개체 자아에서 출발하는 사회적 공동체에서 구한다. 이 점에서 후설은 전체주의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자유 민주주의의 삶의 양식을 관통하는 개인주의에 뿌리를 두는 공동체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후설이 도덕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가장 바람직하며 진정으로 좋은 최고의 도덕 공동체로 주제화하는 사랑의 공동체는, 한편으로 가치 심리주의로서의 가치 주관주의를 거부하면서 가치 객관주의로서의 가치 실재주의를 그리고 이성이 배인 감정의 바른 사용과 지성이 스민 의지의 바른 사용을 곧 실천 이성의 바른 사용을 전제하며 주장하는 가치 감정의 윤리학과 자연법 윤리학 모형과 덕 윤리학 모형 안에서 다른 한편으로 칸트가 내세우는 이성주의 윤리학과 교육학과 도덕 교육학 모형 안에서 움직인다고 글쓴이는 본다. 더 나아가 사랑의 공동체에 관계하는 후설의 도덕 철학적 사유는, 흄이 대표하는 감정주의 윤리학과 칸트가 대변하는 이성주의 윤리학을 넘어서면서 이 두 가지 모형의 윤리학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는 가치 감정의 윤리학의 길을 감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윤리학 모형들 가운데 특히 칸트가 보여주는 이성주의 윤리학 모형으로 기울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후설은 사랑의 공동체를 주제 삼으면서 ①개체 자아가 사회화와 문명화로 그리고 문화화와 도덕화로 향하는 잠재적 이성의 소질들을 선천적으로 소유하며 ②개체 자아는 넓은 의미의 교학상장의 과정이 그 속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이미 그 속에 문명 내용과 문화 내용을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관습과 전통으로 담고 있는 삶의 공동체 속에서 후천적 교육과 노력을 통하여 잠재적 이성의 소질들을 계발하고 완성할 수 있으며 실현해야 한다고 매우 함축적으로 내세운다. 이에 따라서 글쓴이는 본능과 이성의 융합체인 개체 자아의 타고난 잠재적 소질과 성향과 능력에 그리고 이것들의 계발과 완성과 실현에 관한 한 후설이 약한 선천주의의 길과 약한 경험주의의 길을 동시에 가고 있음을 주장한다. 후설은 철학적 신론과 이성 신학적 세계관을 품고 있는 목적론적 세계관의 관점에 서서 사랑의 공동체를 도덕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하나의 보편적 삶의 세계 안에 자리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개체자아가 현실 세계에서 지향하면서 실현하고자 희망할 수 있는 최상의 삶의 공동체와 문화 공동체로 그리고 최고 형태의 도덕적 인류 공동체나 도덕적 세계 공동체로 밝혀낸다. 칸트가 설정하며 주장하는바 형이상학적 초감각계인 예지계에 속하는 목적의 왕국과 다르게 후설이 뜻하는 사랑의 공동체는 현실 세계 밖에 존재하지 않음을 글쓴이는 주장한다. 우리는 현실 세계 안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며 세계 평화 공동체의 유사체로 볼 수 있는 하나의 도덕적 세계 공동체인 사랑의 공동체의 점진적 연속적 발전과 진보에 착안하여 사랑의 공동체의 미완결성을 가리키는 불완전한 현재형에 관하여 뿐만 아니라 최고의 완결성을 함의하는 완전한 미래형에 관하여 말할 수 있으며 하나의 사랑의 공동체나 하나의 평화 공동체의 이 두 가지 형태를 주제화할 수 있다. 하나의 현실 세계 안에 자리하는 평화 공동체나 (이것의 유사체인) 사랑의 공동체의 현재형과 미래형에 주시할 때, 한편으로 현재 세계 안에서 미완성 형태로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 삶의 미래 지평 속에서 바로 눈앞의 이 세계 안에서 완전성을 갖추어 존재할 평화 공동체나 사랑의 공동체의 미래형은 우리가 올려 볼 수 있는 신의 이념을 가리킨다. 이 신의 이념은 특히 도덕화를 충분히 성취하지 못한 현대의 국가시민들과 세계 시민들에게 개체 자아의 내면성 속에 자리하는바 (천사의 소질이나 신을 닮을 수 있는 소질로 특징지어지는) 선으로 향하는 잠재적 이성의 소질로 시선을 내려서 이 선의 소질을 자기 반성 속에서 되돌아보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것을 요구한다. 개체 자아는 자기의 내적 의식의 삶 속에 살아 있는 이 천사의 소질이나 신의 속성에 대한 자기 성찰에서 시작하여 이성이 배인 감정과 지성이 스민 의지의 바른 사용에 따르는 곧 마음을 곱고 바르게 쓰는 실천적 삶과 행위를 실행하면서 신의 이념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보편적인 도덕적 세계 공동체인 사랑의 공동체나 평화 공동체의 실현을 동경하며 염원하고 희망할 수 있다. Diese Abhandlung geht von der uns anschaulich vorgegebenen konkreten Lebenswelt aus. Thematisch kreist sie um die in dieser Lebenswelt durch Habitualisierungen zu stiftenden und verwirklichenden und in einem hermeneutischen Zirkel verbundenen Gemeinschaftslebensformen. Methodisch geht diese Studie, die keine Dekonstuktion, sondern eine Konstruktion der zu behandelnden Thematik beabsichtigt, nicht logisch argumentierend, sondern phänomenologisch auslegend vor. Sie versucht anhand der Werke Husserls die der alltäglichen Lebenswelt entsprechende Lebensgemeinschaft als Kulturgemeinschaft und als Ethische Gemeinschaft bzw. als die von Husserl gemeinte und angestrebte Liebesgemeinschaft aufzuweisen, die im weitesten Sinne als Ethische Weltgemeinschaft auffassen und in Analogie zu der von mir angeführten Friedensgemeinschaft begreifen lässt. Sachgemäss führt diese Zugangs- und Bahandlungsmethode dazu, die Liebesgemeinschaft als den oben angegebenen Titel zu erweisen und zu charakterisieren. Mit Blick auf die Liebesgemeinschaft zielt dieser Aufsatz darauf ab, die vielfältigen moralphilosophischen Implikationen herauszuarbeiten, die sich im weitesten Umfang nicht nur auf Ethik und Pädagogik sondern auch auf Sozialphilosophie und -ontologie sowie auf philosophische Gotteslehre bzw. die am praktischen vernünftigen Glauben orientierte Vernunfttheologie thematisch beziehen. In diesem Artikel werden vor allem folgende Hauptthesen gegebenenfalls explizite oder implizite vertreten: ①Die Person als wertende und handelnde Funktionseinheit von Instinkt und Vernunft ist mit Vernunftanlagen begabt. ②Aufgrund dieser Begabung für die von fremder und eigener Vernunft motivierte habitualisierende Erziehung und Bildung im umfangreichsten Sinne, die auf die volle ganzheitliche Person hinzielt, sollten die individuellen Personen, auf die Lebensgemeinschaft sozialontologisch fundiert ist, in ihrem Gemeinschaftsleben sozialisiert, zivilisiert und kultiviert sowie moralisiert werden ③Die Vernunftanlagen sind anzusehen als Grundboden für die zivilisierte und kultivierte ethische Lebensform bzw. die Kulturgemeinschaft und Ethische Gemeinschaft. ④ Husserls moralphilosophisches Nachdenken über Liebesgemeinschaft, die als lebensweltlicher Bereich des konkreten Apriori betrachtet wird, ist einerseits an der z.B. von Aristoteles und Aquinas stammenden Naturrechtsethik und Tugendethik andererseits an der von Kant begründeten Ethik und Pädagogik (d.h. Moralpädagogik) orientiert. ⑤Die besonders mit Naturrechtsethik und Tugendethik verschmolzene Wertgefühlsethik Husserls setzt den Wertrealismus als Wertobjektivismus voraus, der sich vom Wertpsychologismus als Wertsubjektivismus unterscheiden lässt. ⑥Husserls Wertgefühlsethik, die in sich Wertlehre und Praktik hat, und die als eine dialektische Synthesis von Verstandesethik Kants und Gefühlsethk Humes gilt und für eine universale ethische Weltgemeinschaft bzw. Menschheitsgemeinschaft einsteht, fordert uns auf, im Gemeinschaftsleben dem richtigen mit Vernunft durchfärbten Fühlen und dem richtigen mit Intellekt durchtränkten Wollen (d.h. der richtigen praktischen Vernunft im formalen und materialen Sinne) zu folgen. ⑦Mit Bezug auf die Liebesgemeinschaft und Friedensgemeinschaft, die nicht in einem von Kank konzipierten extramundanen metaphysischen Reich, sondern in einer wirklichen Lebenswelt existieren, können wir von ihrer gegenwärtigen Form und ihrer zukünftigen Form reden. ⑧Die höchste und beste Form der Liebesgemeinschaft und der mit dieser in Analogie stehenden Friedensgemeinschaft, die zusammen als eine universale interkulturelle ethische Menschheitsgemeinschaft ausdeuten lassen könnten, deutet auf Gottesidee hin. ⑨Wenn diese Gottesidee thematisiert wird, sollten wir nicht nach oben auf das Himmelreich bzw. Gottesreich emporblicken, sondern nach unten auf unser inneres Bewusstseinsleben bzw. Seelenleben und die diesem Inneren innewohnenden potentiellen Vernunftanlagen besonders zum moralischen Guten reflexiv zurückblicken. ⑩Dies ermöglicht uns, ein neu gewecktes Leben zu führen, d.h. im Lebens- und Wirkungshorizont für Individual- und Sozialethik sowie universale Menschheitsethik auf richtiges Fühlen und richtiges Wollen bedacht zu leben und die in der wirklichen Lebensgemeinschaft zu realisierende Liebesgemeinschaft und Friedensgemeinschaft zu erhoffen.
김우형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20 철학연구 Vol.0 No.61
This article sheds light on how Liang Qi-chao (1873~1929) envisioned “Chinese philosophy” through the research of national learning (guoxue 國 學). For the first time in the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 he tried to form a “Chinese philosophy” that contrasts with Western philosophy with a consistent stance until the end of his life. He presented a methodology that revealed the characteristics of “Chinese philosophy” through comparison with Western philosophy, and ultimately aimed at integrating it with Western philosophy. Liang Qi-chao maintained his position of being critical of Han learning (hanxue 漢學, philological research of Qing Dynasty) but favoring Song Neo-Confucianism (songxue 宋學). Based on this perspective, he embodied his project of “Chinese philosophy” by interpreting the philosophy of Immanuel Kant (1724~1804) in a subjective way. In addition, he emphasized the ancient origin and the practical characteristic of self-cultivation of “Chinese philosophy” through his criticism of Hu Shi (1891~1962). Liang Qi-chao insists that the study of “Chinese philosophy” should be developed in a way that uncovers the specificity of Chinese thinking from the perspective of national learning, but embraces epistemology from the standpoint of not rejecting scientific knowledge. In conclusion, Liang Qi-chao’s project of “Chinese philosophy” can be evaluated as an original and pioneer one to launch modern Chinese philosophy including contemporary new Confucianism, and has great implications not only for Chinese philosophy researchers but also for East Asian philosophy researchers. 이 논문은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자국 학술 사상에대한 연구로서의 국학(國學)을 통해 ‘중국철학’을 어떻게 구상했는지 조명해 보았다. 그는 철학사상 최초로 말년까지 일관된 입장을 가지고 서양철학과 대비되는 ‘중국철학’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서양철학과의 비교를 통해 ‘중국철학’의 성격을 드러내는 방법론을 제시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서양철학과의 통합을 목표로 삼았다. 또한 그는 한학(漢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되 송학(宋學)을 선호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 같은 관점에 입각하여 그는 칸트(I. Kant, 1724~1804) 철학을 주체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중국철학’적 구상을 구체화했다. 또한 그는 호적(胡適, 1891~1962)에 대한 비판을 통해 ‘중국철학’의 기원과 실천적수양론이라는 특성을 강조하였다. 양계초는 ‘중국철학’의 연구가 국학의 관점에서 중국 고유의 특색을 발굴하되, 과학적 지식을 배척하지 않는 입장에서 인식론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결론적으로, 양계초의 중국철학적 기획은 현대 신유가를 비롯한 근현대 중국철학을 개출(開出)한 독창적이고 선구적인 철학으로서 평가할 수 있으며, 중국철학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철학 연구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김창래 ( Chang Rae Kim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0 철학연구 Vol.0 No.41
철학은 존재하는 것들의 존립의 근거로서의 존재를 추구하는 학문, 존재론이다. 그러고 존재는 모든 존재자가 존재자로 존재하게끔 해주면서 스스로는 존재자가 아닌 어떤 것이다. 그것은 존재자 전체의 단적인 부정으로서의 무이며, 존재자의 계열의 절대적인 끝이라는 한계 개념이다. 바로 이 한계를 사유하는 것이 그 시원 이래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를 탐구해 온 철학의 고유한 과제가 되어왔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함이란 그 본성상 ``끝으로부터 철학하기``이다. 끝이라는 한계개념은 철학하는 자에게 두 가지의 과제를 부여한다. 철학하는 자는 우선 존재자 일반을 단적으로 부정하여 존재자의 계열의 끝에 이르러야 하고, 이 끝에서 존재자의 절대적 부정으로서의 존재 내지 무를 사유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한계에로의 또는 한계에서의 사유 실험``이다. 이 같은 끝으로부터 철학하기가 플라톤과 하이데거의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 또는 저 좋거나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라 좋음 자체와 아름다움 자체를 추구하며 하이데거 역시 이 또는 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절대적 부정으로서의 무를 추구한다, 두 철학자가 추구하는 것은 철학자가 추구하는 것은 ``~것(존재자)``들의 계열의 끝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이다. 철학자가 존재를 추구하는 한, 그는 동시에 존재자의 끝, 존재자로서의 자신이 걷는 철학의 길의 끝, 즉 죽음 역시 사랑하여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플라톤은 철학을 ``죽는 연습``으로 규정하며 하이데거 역시 철학하는 현존재에게 ``죽음에로 미리 달려가 볼 것``을 권한다. 그러나 철학자가 연습하는 죽음, 그리로 미리 달려가 보는 죽음은 실재적인 죽음이 아니라 철학자가 원하는 것은 상상적으로 선취된 죽음이며, 죽음의 순간, 즉 존재자의 끝의 순간에 비로소 가질 수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의 관점이다. 철학자는 죽음을 연습하고 선취하며, 이를 통해 얻은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관조한다. 즉, 자신이 걷는 철학적 사유의 길의 끝(지혜)의 관점에서 철학(애지)의 길을 이해한다. 이렇게 우리가 갖기를 원하되 갖지 못한 것, 갖지 못했기에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 즉 우리의 단적인 타자의 관점에서 지금-여기의 나를 이해하는 것-바로 이것이 애지라는 말의 본래적인 의미이다. Philosophie ist eine Wissenschaft, die den Grund fur den Bestand der Seienden uberhaupt untersucht, die Ontologie. Das Sein als Gegenstand dieser Wissenschaft ist dasjenige, das alle Seiende als Seiende seiend sein laßt und selbst doch kein Seiendes ist. Es ist das Nichts als eine schlechthinnige Verneinung des Seienden im Ganzen und ein auf das absolute Ende der Reihe von Seienden uberhaupt hinweisender Grenzbegriff. Seit dem Anfang der Philosophie als Ontologie ist es ihre eigentumliche Aufgabe gewesen, uber diese Grenze selbst nachzudenken. In diesem Sinne ist das Philosophieren ihrem Wesen nach ``Philosophieren vom Ende her.`` Dieser merkwurdiger Grenzbegriff des Endes fordert jeden Philosophierenden zweierlei Aufgabe auf. Der Philosophierende sollte zuerst durch die schlechthinnige Verneinung der Seienden uberhaupt das Ende der Reihe von Seienden erreichen und an diesem Ende uber das Sein bzw. Nichts als eine absolute Nicht des Seienden nachdenken. So ist die Philosophie als ``Denkexperiment an die oder an der Grenze`` zu bestimmen. Und dieses vom Ende her Philosophieren ist gerade es, was das Wesentliche der Platonischen sowie Heideggerschen Philosophie ausmacht. Platon sucht nie dieses oder jenes gute etwas, sondern das Gute selbst und Heidegger ebensowenig dieses oder jenes Seiende, sondern das Nichts als absolute Verneinung desselben. Was diese beiden Philosophen schließlich sucht, ist nichts als das, was man erst am Ende der Reihe von seienden etwas zu treffen meint, d. i. das Sein. Und sofern der Philosoph dieses Sein als Nichts liebt, kann er auch nicht umhin, das Ende der Seienden, die Grenze des philosophischen Weges, den er auch als ein Seiendes zu gehen hat, d. h. den Tod zu lieben. So ist die Philosophie bei Platon ``sterben lernen`` und bei Heidegger ``Vorlaufen zum Tode.`` Es ist jedoch kein realer Tod, welchen der Philosoph stets zu lernen und zu welchem er vorzulaufen hat. Was er im Besitz zu nehmen sucht, ist kein Tod selbst, sondern ein mittels eines Denkexperiments vorweggenommender Tod und dessen Perspektive, die uns philosophierenden Seienden erst im Augenblick des Todes, am End der Seienden uberhaupt erlaubt wurde. Aus dieser Perspektive des Todes betrachtet der Philosophierende nichts anderes als sein Leben selbst zuruck. Das heißt, er versteht den Weg der philosophia vom Ende desselben her, d. i. von der sophia her. Dieses Sichverstehen aus der Perspektive unseres schlechthinnigen Anderen, was uns fehlt und das wir deshalb liebt-das ist ja der eigentliche Sinn des Wortes ``philo-sophia.``
김재철 ( Jae Chul Kim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2 철학연구 Vol.0 No.46
본 논문은 넓은 의미에서 적용한 "임상철학"(clinical philosophy)의 개념 아래 현대 정신치료의 방법으로 개발된 현존재분석과 실존분석에 대한 수용을 시도한다. 경험적 심리학 또는 정신분석학의 협소한틀 속에서 인간의 전체성을 다룰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고 인간이 가진 고유한 인격성과 고차적인 정신적 차원에서 정신병의 치료를 시도하는 두 분석은 예전부터 영혼을 가꾸고 돌보는 본래의 철학적 치료와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정신치료를 위해철학적 인간학과 철학의 메타-의학적 접근을 적용한 두 분석이 임상적 맥락에 적용될 때 강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임상철학의 성립을 위한 첫 번째 작업으로서 빈스방거의 현존재분석을 고찰한다. 빈스방거의 현존재분석은 "세계기투"에 기초한 정신병의 해석,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에 대한 비판, 규범 및 사랑의 현상학을 통해 새로운 정신치료의 이론적 정초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정신치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빈스방거의 현존재분석이 철학적 학문이론과 주요한 개념들을 어떤 배경에서 수용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철학치료의 이론과 방법을 근본적으로 쇄신할 수 있는 방향에서 그 한계를 비판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In der vorliegenden Arbeit wird es versucht, die Daseinsanalyse und Existenzanalyse als Theorie und Methode fur die Geisteskrankheit unter dem Begriff der "klinischen Philosophie" im weitesten Sinne aufzunehmen. Zugestanden, dass die Ganzheit des Menschen in der engen Rahmen der empirischen Psychologie und der Freudschen Psychoanalyse nicht aufgezeigt werden kann, akzentuieren diese beiden Analyse die hohere Dimension des menschlichen Geistes. In diesem Standpunk gesehen, beziehen sie sich auf die eigene Aufgabe der Philosophie, die von altersher ihr Land der Seele gepflegt und besorgt hat, und zeigen, dass die Synergy-Effekte im Zusammenspiel mit Philosophie und Psychotheraphie herausgebracht werden. Diese Abhandlung wird zum ersten Forschungsarbeit fur die Grundung der klinischen Philosophie die Daseinsanalyse von L. Binswanger betrachten. Seine Daseinsanalyse hat damals zum ersten eine neue Richtung in die philsophische Psychotheraphie mit den Begriffen gezeigt, wie Weltentwurf, Kritik des Unterbewubtseins, Norm bzw. Phanomenologie der Liebe usw. In dieser Arbeit wird es betrachtet, in welchem Hintergrund Binswangers Daseinsanalyse die philosophische Wissenschaftstherie akzeptiert und die Hauptbegriffe angewandt hat, und damit wird es kritisch diskutiert, weche Probleme sie zur Radikalisierung der Theorie und Praxis der philosophischen Theraphie fur die Geistekrankheit haben.
도덕 심리학과 도덕 철학의 이중적 변주 -맹자 심성론 및 수양론의 본질과 특징
박길수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3 철학연구 Vol.0 No.48
이 글은 도덕 심리학과 도덕 철학의 중첩과 통일이라는시각에서 맹자 심성론 및 수양론을 분석하고 검토한 것이다. 선진 유학사에서 맹자 심성론의 가장 독창적인 의의는 유학의 전통적인 덕성과덕행 개념들을 완전히 심성의 범주로 환원하여 내면화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맹자는 협의의 도덕 철학이나 도덕 형이상학의 범주를 넘어서 광의의 도덕 심리학적 관점에서 그의 도덕 철학 내용과 근거를사상과 정당화한다. 이 때문에 그의 심성론과 공부론 안에는 심리학적요소, 특히 도덕 심리학의 내용과 특징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심성론의 전체적인 구도와 내용, 그것의 궁극적 취지와 의의를 온전하게 해명하려면 무엇보다도 도덕 심리학과 도덕철학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새로운 연구와 이해 방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고찰할 때, 맹자의 심성론과 수양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의 도덕 철학이 대체로 도덕 심리학적 토대 위에서 완성되었다는점과, 이 양자의 유기적인 결합 위에서 선진 유학의 심성론을 새롭게정초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행위 주체가 오직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인륜적 사태들을 매개로 하여행위 주체의 주관적 동기와 인식, 그리고 감정과 의지를 부단히 제어하고 배양하는 공부를 통해서만 비로소 유학에서 제시하는 이상 인격과경계를 성취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따라서 맹자 심성론을 연구할 때 도덕 철학과 도덕 심리학의 결합을 도외시한 채 이 가운데 어느한 영역으로 편향될 경우 다음과 같은 폐단이 발생할 수 있다. 곧 그연구 내용과 방법이 주로 도덕 철학의 범위에 국한되는 경우 그 결과도덕 심성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심리 차원에서 갖는 내용과 특징은사상한 채 주로 공허한 추상적 개념과 논리만을 다루기 쉽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로 도덕 심리학적 내용과 의의만을 강조할 경우 유학의 고유한 도덕 철학과 도덕 형이상학적 내용과 특징들을 심리적 경험과 사실성으로 치환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유학의 심성론과 우주론, 그리고수양론이 본래 갖고 있는 내재적 초월의 의의를 무력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맹자의 심성론과 수양론이 내포하고 있는 주요 목적과 내용, 그리고 의의를 보다 전반적으로 고찰하고 해명하려면 무엇보다도 도덕 심리학에서 도덕 철학이나 도덕 형이상학으로 이행해가는 과정 및 이 양자의 유기적인 결합과 통일에 관한 상세한 분석과 검토가 선행되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방식과 이해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을 때에만 선진 유학의 인성론과 수양론의 고유한 특질을 해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이 현대 윤리학에서 갖는 현대적 의의도 설명할수 있다. 本文從道德也捏學與道德哲學的二重結構及耳相互統一的角度上分析 幷揭開孟子心性說的主要內容. 從先秦懦學史上看, 孟子的心性學說所含的最獨特的特徵之一就在於, 他把現成的諸種儒家的德性和德行槪念完全融納於心性這一範疇. 在這個過程當中, 他不僅僅居於狹義的道德哲學, 或者道德性上學的範圍, 而且站住在廣義的道德心理學的立場而論證其理據. 正是由於此, 他的心性說仍有不少的心理學因素, 尤其是道德心理學的內容和要素. 所以, 爲的確조住他的心性說的基本結構和整體內容, 以及타標誌著終極目標和意義, 我們必須兼用道德心理學與道德哲學的硏究方法來알掘出其深層內涵. 由此看來, 孟子的心性說和工夫說所蘊含的最大的思想特點是, 其道德哲學的主要範略和槪念均立脚于道德心理學的諸種因素, 幷在這兩者的有機性統一基礎上重新做出先秦儒家人性學說的奠基. 這就說明, 主體只有經過在以人倫的事情爲中心的日常生活中對他自己的主觀性動機和認知, 情感和意志等的實質工夫, 修養過程, 幷把意識和心里活動提升到更高層的道德意織, 才能達到道德哲學, 或者道德形上學常提的理想人格或最高境界. 因此, 若在分析幷考察孟子的人性論和工夫論的含義中, 把我們的視界全部放在道德哲學或道德形上學的領域的話, 這會導致一些只是憑空對待抽象的 槪念和邏輯的後果. 與此恰恰相反, 若專門討論在耳中的道德心理學的因素, 把懦學的固有的道德哲學與道德形上學的價値和意義歸屬於在一般心理學意義上的經驗和事實的話, 耳結果自然會導向於儒學的心性說 以及宇宙 論, 和修養論的空虛化方向. 有鑑於此, 惟有細察到從道德心理學經過道德哲學到道德形上學的整個進程以及這三者的有機性統一地 點的時候, 我們就在흔明確瞭解先秦儒家的人性論和傅奎論所含的固有的特質, 同時也可以解開其現代性意義. 在這一點上, 孟子的人性說確實爲閥門提供一個最具典型的思想資源和理論광架.
신화(神話)적 사유로 본 북송 성리학에서 "생성"의 의미-<태극도설>과 <원회운세>를 중심으로
주광호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14 철학연구 Vol.0 No.50
이 연구의 목적은 북송 성리학 특히 주돈이(周敦李)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 』중 <원회운세(元會運世)>에서 생성의 의미를 ‘신화적 사유’로 읽음으로써, 발생론과 본체론 분할의 맹점을 극복하고 이 저작들의 수양론적 의미를 복원하는 것이다. 기존의 철학사는 <태극도설>을 우주발생론적 저작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생각의 기저에는 언제나 발생론과 본체론의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 주돈이의 <태극도설>을 발생론적으로만 읽는다면, 규범으로서의 태극-인극과 개별자와의 불연속은 설명이 어렵게 된다. 원형적 규범과 질서는 현재의 속되고 악한 실존적 존재로서의 나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는 주돈이와 소옹에 대한 사상사적 평가에서 고스란히 도드라진다. 철학사에서 주돈이와 소옹은 소위 성리학의 비조(鼻祖)라고 일컬어지지만, 그들은 철저히 천도(天道) 혹은 우주론의 영역으로 한정됨으로써 인도(人道)나 수양(修養)의 영역이 부족하거나 아예 결여되었다고 평가되어 왔다. 그래서 <태극도설>은 주돈이 사상의 종지가 아니라거나, 소옹은 아예 유가가 아니라고 단정되어버렸다. 그러나 과연 이들의 집필 의도가 거기에 있었을까? 규범적이고 실천적인 요구 없이, 우주 창조와 그 변화의 역사를 담백하게 기술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을까? 만일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성리학이고 유가일 수 없다. 그것은 천체물리학이거나 기껏해야 자연철학이다. 과연 주돈이와소옹은 천체물리학자인가? 우리에겐 <태극도설>과 <원회운세>를 이해할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이에 <태극도설>과 <원회운세>를 이해할 새로운 방법으로 필자는 신화적 관점을 제안한다. 신화학자이자 비교종교학자인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의 관점에서 종교적 인간은 각종 의례를 통해 태초의 생성을 재현하고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우주적 온전함·생성력·성스러움을 회복시키려고 한다. 신화적 관점에서 태초의 창조를 반복 재현하는 것은 단순한 모방이나 혼동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주의 창조에 참여하는 성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이다. 엘리아데가 말하는 신화적 사유 즉 성스러움이라는 원형의 상정과 그에의 합일·복원이라는 사유 구조로 이해할 때, <태극도설>이나 <원회운세>는 가치 초월적 천체물리학이나 기계적인 역사연표 혹은 천인합일이라는 단순한 유비적 단계를 뛰어넘어 지금·여기에서 온전함 혹은 성스러움을 회복하고 완성할 수 있다는 실천철학적 함의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양론적 상징체계의 근간이 바로 ‘생성’인 것이다. 本論文的目的就是從神話思維方式來看北宋理學中,尤其周敦李≪太極圖說≫和邵雍≪皇極經世≫之≪元會運世≫中的“生成”的意義, 從而批判分割生成論和本體論的想法而回復兩部文章之修養含義. 壹般哲學史大部分把≪太極圖說≫只從宇宙發生論的立場上看. 不過, 如果只從宇宙發生論的立場看則各不能解釋太極-人極和個人之間的連續性. 原型規範卽太極-人極絶不能解決顯存存在我. 同然, 如果把邵雍的≪元會運世≫只從宇宙歷史年表立場上看, 則不能脫離悲觀的命運論. 那馬, 他們倆不可爲理學大師, 甚至不可爲正宗儒家. 不過, 兩位理學家的眞正著述目的果眞在此? 筆者絶不同意. 其理由之壹乃是依他們的整個著作則他們的風格依然是儒家風貌. 那馬, 這兩部特殊的著作應當再加解釋. 其二, 整個中國哲學史中宇宙發生論和本體論的程序幷非那磨連續. ≪易傳≫的太極、≪老子≫的道、玄學的無等則絶不能解釋爲物質性因素. 其三, 宇宙發生論上的≪太極圖說≫和宇宙歷史年表意義的≪元會運世≫所包含的天體物理學特征絶不符合於兩宋理學的最終目標. 現存哲學史觀點則大部分在二十世紀初與西方哲學比較中所産生的. 故他們特別强調中國哲學中宇宙論、本體論、認識論的因素. 在新世紀, 我們需要新解釋. 從而, 筆者提出從神話思維解釋理學中生成的看法. 神話學者比較宗敎學者Mircea Eliade(1907-1986)認爲傳統時期的人基是宗敎性存在又是象征存在, 故他們通過各種儀式再現最初宇宙的生成, 這意味著回復大自然的生成力、完整性. 從而言之, 以神話思維中看≪太極圖說≫則其眞正目的乃是通過合壹於宇宙生成而達到個人生成力、完整性的完成, 這就是理想人格的完成卽成爲君子. 同然, 從神話思維看的≪元會運世≫的眞正目的乃是通過合壹於宇宙周期性而達到個人生成的現存再現, 這就是邵雍所說的聖人或者心法.
강용수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23 철학연구 Vol.- No.68
3년차로 구성된 이 연구는 기존의 행복론의 문제점과 한계를 분석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니체의 행복감정론을 ① 생명철학에서 수반된 감정 ② 실존철학에서 선택된 감정 ③ 사회철학에서 연대하는 감정으로 나누어 그 실천적 함의를 심화⋅확장하는데 목적이있다. 1차년도에는 생명철학의 관점에서 니체의 행복 철학에 대한 기초연구를 수행하고, 2차년도에는 실존철학의 관점에서 행복에 대한 니체의 이해와 쟁점을 검토하며, 3차년도에는 행복 문제에 대한 니체의 해법을 탐구할 것이다. 이 연구가 생명철학, 실존철학, 사회철학의 3단계접근법을 취하는 이유는 니체의 행복 철학을 다각도에서 통합적으로분석하고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이 연구는 해석학이라는 텍스트 이해의 방법뿐만 아니라 생리학, 의학, 심리학 등 자연과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생명의 역동성을 밝힘으로써 기존의 철학적 이론의 개별적 한계를 넘어 유기적인 통합성을 갖고자 한다. 1차 년도 연구주제를 심화하는 이 글은 좋음과 좋은 삶에 대한 목적론과 공리주의, 쾌락주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니체의 생철학의 관점에서 고통에 따른 불행감정의 필요성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철학자는 왜 배움과 관련된 즐거움에 대해 열성적이어야 하는가? -플라톤 파이돈의 경우
구교선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2020 철학연구 Vol.0 No.61
본고는『파이돈』의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는 배움에 관련된 즐거움에 열성적이라는 말로 자신의 논의를 마무리 짓는(114d-e) 이유를 탐구한다. 이 작업을 위해 본고는 우선 몇몇 학자들의 견해와는달리 철학자가 이러한 종류의 즐거움에 대해 열성적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을 우리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만하고, 또 왜 그가 이러한 언급을 하고 있는가를 하나의 문제꺼리로 삼아 탐구해야만 한다는 점을확인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먼저 본고는 못질 논변(83b-d)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 철학자도 육체적 즐거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고 그래서 그는 감각계가 참된 실재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되고 결국 철학적 삶을 살지 못할 뿐더러 사후에는 하데스에도 이르지 못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위험으로부터자신을 구제하고 철학적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철학자는 가지계야말로 참된 실재라는 믿음을 지켜 내야하는데, 유사성 논변(78b-84b)에 대한분석을 통해 본고는 가지계에 대한 탐구로부터 얻어지는 즐거움은 이러한 믿음을 유지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어서 상기 논변(72e-77a)에 대한 연구를 통해 본고는 이러한 즐거움이 곧 배움에 관련된 즐거움을 가리킨다는 점을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철학적 삶을 살아내기 위해 철학자는 가지계가 참된 실재라는 믿음을 지키는 데 기여하는 배움에 관련된 즐거움에 열성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고는 결론 맺는다. This paper investigates why the philosopher Plato’s Phaedo is eager for the pleasure of learning. First, by analysing Riveting Argument(83b-d), I argue that the philosopher risks losing his correct belief about the true reality which forms the foundation of his characteristic life. This is because, as a body-soul composite, he cannot help experiencing some bodily pleasures which delude him, by suggesting that what is perceptible is real. Then, by examining Affinity Argument(78b-84b), I claim that, unlike bodily pleasures, the kind of pleasure taken in the intelligible helps him to retain his correct belief about the true reality. In view of this, by visiting into Recollection Argument(72e-77a), I contend that the pleasure of learning is the same as this kind of pleasure. Accordingly, I conclude that the philosopher has a sufficient reason to be keen on the pleasure of learning since enjoying this pleasure helps him to retain this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