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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軍需物流 統合運管에 대한 硏究

        南在喆 國防大學校 2000 敎授論叢 Vol.19 No.-

        물류는 미군이 전시에 효율적인 군수지원을 하기 위한 개념이었으나, 전쟁의 위험이 상당히 사라져 이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진 사이, 민간에서는 새로운 이익원으로 인식하면서부터 급속히 발전되어 지금은 오히려 군에서 이를 역수입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상당히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 군은 지금이라도 민간기업과 국가의 물류 발전추세에 발맞추어 이를 적용하지 않으면 평시 국방비의 낭비는 물론 전시에는 작전임무 수행마저 곤란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여 하루 빨리 이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체계적인 교육을 통한 인력의 양성 등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제 군도 국가경제를 고려하여 한정된 국방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라는 국민의 지상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함으로써 국방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제대별 책임경영개념을 도입하여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군수물류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둘째, 물류경영목표는 전・평시를 고려하되, 평시에는 사용부대의 서비스 기대요구와 비용지출 간에 균형을 맞춰 설정하여 기본서비스와 완전주문이나 필요시 부가가치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하며, 전시에는 최상의 서비스를 지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강구하여야 한다. 넷째, 실제 물류작업은 함수관계이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시설위치 선정과 정보구축 및 공유 수송수단 준비, 재고배치, 필요한 만큼 보관과 하역, 포장활동이 수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물류네트워크 설계는 지역적 차이를 고려하여 물류시설의 수와 크기, 위치를 고려 구조를 결정하고 끊임없이 이를 개선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보에 있어서는 고품질의 정보를 획득하여 정확한 예측과 주문관리를 하고 필요시 JIT나 신속대응, 연속공급 등의 통제방법을 강구하여야 하며, 수송은 최소비용의 수송방법과 속도, 비용간의 균형유지 및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재고는 최소비용으로 재고유지를 하도록 지원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소요물자의 20% 미만을 지원하여야 하며, 보관・하역・포장은 물류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 복합적인 창고운영 방법을 강구하고, 파레트 등 물류포장 단위를 대형화하여 기계화 및 자동화된 하역설비로 이용하되 물품의 중간취급 없이 사용부대에 직송되도록 하여야 한다. 다섯째, 물류통합을 위해서는 물류기능인 물적유통과 제조지원, 조달 등을 기본운영영역으로 구분하여 이들간 재고와 정보흐름이 조화를 이루도록 신속대응, 최소편차, 최소재고, 이동통합, 품질, 수명주기지원 등의 목적을 동시 달성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여섯째, 물류설계에 있어서 분석단위는 수행주기이기 때문에 수행주기구조는 물적유통, 제조지원, 조달 등에 필수적인 노드, 수준, 링크, 활동 등을 통합하여 전체 물류통합을 계획 및 관리하여야 한다. 일곱째, 수행주기의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해서 일관성 있는 운영에 중점을 두고 수행주기기간을 단축하는데 노력을 집중하여 재고위험을 감소시키고 회전율을 향상시켜야 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군수물류에 대한 개념을 하루 빨리 우리 군에 도입하여 이를 통해 평시에는 국방비를 절감하고 전시에는 효과적인 군수지원으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이에 대한 강력한 실천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KCI등재

        四家詩人의 詩語論-李書九의 경우를 중심으로

        남재철 한국한시학회 2004 韓國漢詩硏究 Vol.12 No.-

        Saga including Lee, Seo-gu considered language as means for understanding the world. They tired to reach reality by their poetic language. Their innovated language distinguished them from previous pseudo-classicists who were only interested in the classical language of Chinese literature. It was not the classical precedent but reality that counted for Saga. They took common life and scenery of our own country for real thing. They found their subject matter in their everyday life, not seeking famous sight similar to Chinese sight. Through their sharp cognitive faculty for the object, the common turned into the real and the valuable. Such a keen recognition was made possible by means of advanced language ability. That is to say, they could be linguistic determinist. It has special meaning for poet to escape from classical poetic language. That's why it means the innovation of paradigm in making poetic language. The abstract subject matter expressed by pseudo-classical language transformed into concrete subject matter by the new way of view. Finally, realistic trend of literature emerged, getting over previous pseudo-classicism. 이서구를 포함한 사가시인들은 세계를 인식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이 경우 시어는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실재하는 대상과의 일체성 획득을 목표로 구사되게 된다. 이는 예로부터 사용되어 온 전범적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짐으로써 객관적 세계보다는 언어논리 자체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의고주의적 시인들의 태도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사가시인들이 진실로 중시한 것은 고금의 전고가 아니라 '진경'이었다. 그들에게서는 우리네 평범한 삶과 자연이 비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경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중국적인 경승지를 찾을 필요 없이, 자신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생활공간 속에서 시의 소재를 찾았다. 대상 세계에 대한 예리한 인식을 통해서 눈앞의 경물은 그 무엇이든 진경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는 언어의 구사 능력을 적극 향상시킴으로써 객관세계에 대한 예리한 인식 능력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시인에게 있어서 종래의 전범적 시어로부터의 탈출은 그 의미하는 바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이는 시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소재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변화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즉 종래의 전범적 시어를 통해서 표현되어 왔던 추상적 소재들이 새로운 시각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포착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전대부터 만연하여 왔던 의고주의적 시작 경향을 극복함으로써 새롭게 확립되었던 사실주의적 경향의 새로운 문학사조와 대면하게 된다.

      • 李書九 詩에 나타난 經世濟民 의식

        남재철 우리한문학회 2002 漢文學報 Vol.6 No.-

        Lee, Seo-gu(1754~1825) is famous as a member of a literary group which is called Sa-ga and has showed excellent talent as politician for administration to relieve the people's suffering. I intend to write this thesis on the assumption that as his policy had been supported by people, his poems expressing administration to relieve the people's suffering has a important meaning in his poetry. Reading his poetry, we recognize that he had observed many people starve to die by the despotic rule of corrupt officials and we can feel his strong will to relieve the people's suffering. In the poems, he not only expressed his own will for good policy but also gives a advise for good policy to other governor. In his poems, he who had observed the distressed people's life blamed corrupt officials with stinging critical voice. He insisted on laying the ax to the root of evil of corrupt officials, reminding the fact that despotic rule is even much dreadful than a monster. Exposing the frailty of theoretical and obsolete way of thinking of the governing class being indifferent to the poor and distressed, he signified the circumstance in which feudal system was about to drive into catastrophe. 李書九(1754~1825)는 ‘四家’의 일인으로 명성을 떨쳤고, 經世濟民의 정치가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서구는 경세제민을 위한 경륜으로 백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까닭에 경세제민 의식을 시화한 작품들이 그의 시문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전제 아래 본고를 전개하였다. 이서구의 문장관은 첫째 세도의 융성을 통한 시대 문체의 순정, 둘째 의리의 천명을 목표로 하는 주제의 설정, 사실의 기록을 목적으로 하는 소재의 선택으로 요약되며, 이는 경세론적 문장관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시문 가운데서도 정치사회적인 주제의식을 가지고 쓴, 경세제민 의식이 삼투되어 있는 시들은 경세론적 문장관과 동일한 범주 내에서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이서구의 시에는 경세제민 의식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작품이 적지 않다. 그는 탐관오리들의 학정으로 인해 굶어죽어 가는 백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하며 선정을 통해서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시화하고 있다. 그 스스로 목민관이 되었을 때에는 자신의 경륜을 마음껏 펼쳐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선정의 포부를 밝히고 있으며, 목민관으로 부임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선정할 것을 독려하였다.또한 이서구는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진 사회현실을 목도하며 간악한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가혹한 정사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사회현실을 비판하며, 탐관오리들의 극악무도한 해악을 발본색원하여 척결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조선후기 농민들의 참혹한 삶과 그 삶을 도외시하는 사대부들의 관념적 사고가 내포하고 있는 허구성을 여실히 폭로하며, 점차 망국을 향해 치달아가던 당시의 정치사회적 파탄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 KCI등재
      • KCI등재

        孤雲 崔致遠의 晩唐詩壇에서의 位相 - 唐나라 詩人과의 在唐期 交遊樣相을 中心으로 -

        남재철 진단학회 2011 진단학보 Vol.- No.112

        This essay is to study the status of Choe, Chiwon(崔致遠) who went to Tang(唐) at the end of the ninth century as a Shilla(新羅) poet inspecting the aspect of companionship with Tang poets. Choe, Chiwon associated with the persons in various classes corresponding with poems. They can be center or provincial government officials, Jinsa(進士) or Sujae(秀才) who passed the entrance exam for officials but couldn't get the position, female Taoists in Taoism and Buddhist priests. His status as a poet in the poetical cycles at the end of Tang Dynasty can be confirmed more clearly by the companionship with the five representative poets as Dusunhak(杜荀鶴), Raon(羅隱), Gobyeong(高騈), Goun(顧雲) and Janggyo(張喬). By that research, we can ascertain that Choe, Chiwon is not only a great poets in the Korean literature history but also a predominant one in the east Asia literature history including Korea and China. 본고는 중국의 문헌에서 고운 최치원의 시인으로서의 위상을 증언하는 기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최고운이 재당기에 당나라 시인들과 교유한 양상에 대해 점검함으로써, 그가만당시단에서 차지하는 시인으로서의 위상이 어떠한지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최고운은 于愼微, 李員外, 裴瓚, 張義府, 李展과 같은 중앙 및 지방의 다양한 관료뿐만 아니라, 吳巒, 田仁義, 吳瞻, 楊贍과 같은 進士나 秀才에 이르기까지 시를 수증하며 교유를 하였고, 道家의 女道士나 佛家의 스님에게까지 교유 범위를 확대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최고운의 만당시단에서의 시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위상은 만당시단의 최고로 인정을 받아온 大詩人杜荀鶴, 만당시단의 저명한 시인으로서 오활하기 그지없어 그 누구의 시적 재주도 함부로 인정하지않았던 것으로 유명한 羅隱, 회남막부에서 최고운을 館驛巡官으로 발탁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당시단을 대표하는 탁월한 시인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기도 하였던 高騈, 재당기 최고운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만당시단의 저명한 시인이기도 하였던 顧雲, 芳林十哲의 일인으로서 만당시단의 저명한 시인인張喬 등과의 다양한 교유 양상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확인이 되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최고운이 동방한문학의 비조로서 동국문종으로 일컬어지는, 한국한문학사에서의 위대한 시인일 뿐만 아니라, 한중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한문학사의 넓은 시각에서 보더라도 그 위상이 뒤지지 않는 걸출한 시인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 KCI등재

        漢文學을 통해 되돌아보는 三韓統一의 역사(Ⅰ)-高麗 시대까지의 漢詩에 나타난 三韓과三韓統一의 의미를 중심으로-

        남재철 한국한문학회 2019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76

        I noticed that the expression of the unification of three nations rarely showed up, but the expression of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often showed up in the Sino-Korean old books. I reviewed how the terms of Three Nations and Three Hans, the expressions of unification of the Three Nations and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has used and how the meaning of them has changed in old books. Therefore, I concluded that it is more proper to use the term of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than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Nations. I confirmed that the intellectuals in China post Sui and Tang dynasties had regarded not only Baekje and Silla located in the mid and south part of Korean Peninsula(the successor of Mahan, Jinhan and Byeonhan) but also the Goguryeo located in the north part of Korean Peninsula and the Liaotung Peninsula(the successor of Ancient Joseon and the Maek) as the part of three Hans. I studied that the intellectuals in China had recognized the Three Hans as the conception including both regional identity of Korean Peninsula and Liaotung Peninsula and historical identity covering the history of the part, but the term of Three Hans had used in the mid 9th century and the recognition of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established in the late 9th century in Korea. I studied that the poets in Sui and Tang Dynasties had begun using the term of Three Hans in their works and the poet in Song, Yuan, early Ming Dynasties had used the Three Hans as the word of the civilized country preserving sophisticated old culture. And I studied that the poets in Goryeo Dynasty had expressed the pride of civilized country through the word of three Hans, and there had been the establishment of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by Taejo Wang Geon, the founder of Goryeo Dynasty in the basis of the pride. 이 글은 三韓 관련 역대 韓中 漢文學 기록을 검토해보고, 高麗 시대까지 산출된 韓中 漢詩 작품을 상세히 분석하여, 우리 역사에서 三韓과 三韓統一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옛 문헌에서 三國統一이라는 말은 잘 사용되지 않은 반면, 三韓統一이라는 말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어 왔다는 점에 주목하여, 三國과 三韓이라는 말, 三國統一과 三韓統一이라는 말이 옛 문헌 속에서 어떠한 의미로 어떠한 변화를 겪으며 사용되어 왔는지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았다. 이를 통해 三國統一이라는 표현보다는, 현재 시점에서는, 옛 문헌에서 주로 사용한 三韓統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리고 北朝ㆍ隋ㆍ唐代 이후 중국에서는 馬韓, 辰韓, 卞韓 및 이곳에서 계승된 百濟와 新羅뿐만 아니라 (古)朝鮮, 貉 및 이곳에서 계승된 高句麗까지를 모두 三韓의 일부로 인식하였으며, 新羅의 高句麗, 百濟 통합 이후에도 新羅를 三韓으로 인식하였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중국에서는 三韓을 北朝ㆍ隋ㆍ唐代 이후 이미 한반도와 遼東 지역이라는 지역적 정체성과 그 지역의 역사를 아우르는 역사적 정체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인식하였지만, 우리 민족에게서 三韓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시점은 9세기 중반 神武王ㆍ文聖王 시대에 이르러서이며, 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三韓統一 의식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점을 규명하였다. 이러한 三韓統一 의식은 後三國 시대 및 高麗 시대에 그대로 이어졌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北朝ㆍ隋ㆍ唐代에 三韓이란 어휘를 漢詩의 시어로 수용하기 시작하여, 宋ㆍ元代의 漢詩 및 明初의 漢詩에 이르게 되면 三韓을 옛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준 높은 문명국을 표상하는 말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우리 高麗 후기 시인들에게 있어 三韓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민족 역사 전체를 표상하는 말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三韓이라는 시어를 통해 문명국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을 드러냈으며, 이 자부심의 바탕에는 太祖 王建의 三韓統一의 업적에 대한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 韓國의 物流情報管理에 대한 硏究

        南在喆 國防大學校 2002 敎授論叢 Vol.25 No.-

        이제 한 국가의 물류수준은 그 나라의 국가경쟁력과 직결되어 있어 물류부문의 효율성 제고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물류비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약 2배나 높기 때문에 물류부문이 국가경쟁력 약화의 주 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물류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기능들 중에서 아직 선진국보다 물류정보기술 수준이 낮으나, 경쟁력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된 정보통신능력을 물류관리에 효과적으로 접목시킨다면 단시간 내에 물류분야 경쟁력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국내물류산업은 유통시장개방에 따라 그 변혁촉진요인 추출과 이에 맞는 정책적 대응책 수립은 물론이고 국제화 · 세계화에 대응하여 물류네트워크를 조속히 구축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는 물류종합네트워크시스템은 먼저, POS시스템과 연계된 수 · 발주시스템을 자동화한 다음, 수 · 배송, 보관, 하역, 포장, 보험, 통관 등의 업무를 온라인화 · 자동화하고, 수주업자는 운송업자, 창고업자, 자사내 물류부문과 온라인시스템을 구출하되 기업내는 LAN 시스템, 계열기업과 타 관련업체와는 VAN시스템을 설치하여야 한다. 둘째, 물류정보시스템은 물류활동 하나로 통합하도록 구축하되, 6대 원칙을 준수하여 기업의 경영정보요구를 충족시키면서도 기획 및 운영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물류정보시스템은 먼저 전국 VAN망 네트워크운영회사가 유통단계, 기업형태 및 규모에 맞는 물류하부구조를 구척한 뒤 도 · 소매상, 제조업체 등의 참가를 유도하여야 한다. 넷째, 물류기술은 소매상의 창의성과 경쟁력, 소매상 · 공급자간의 신속대응, 최신 전문가시스템을 통한 판매결정 간소화, 고객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분산형 소매네트워크가 바람직하다. 다섯째, 정보기술의 활용은 온라인데이터베이스, 스캐닝, 텔레커뮤니케이션, LAN, 인공지능기술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여섯째, 물류정보는 주요 물류경로기능 및 수행자를 결정한 뒤 마케팅정보 결정, 정보수집자 · 사용자에 대한 전달방법 결정, 잡음요소규명과 제거방법을 강구단계로 개발하여야 한다. 일곱째, 물류정보시스템개발에 포함되는 VAN망, EDI, 수 · 발주온라인, 크레디트 ID카드 등 시스템개발에는 업무제휴나 그룹화를 위해 대형소매상, 소매업적 유통업체가 바람직하다.

      • KCI등재

        隋唐 漢詩에 나타난 遼東에서의 麗隋戰爭과 그 傷痕

        남재철 진단학회 2009 진단학보 Vol.- No.107

        본고는 수당 시대의 한시 가운데 요동에서의 여수전쟁과 그 전쟁이 빚어낸 상처 및 상흔들을 읊은 작품을 찾아내어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여수전쟁은 동아시아 고대사에 있어서 일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한중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이와 관련된 문학 작품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요동에서의 여수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수나라 제2대 황제 양제의 「紀遼東二首」와 비서랑으로서 종군하였던 王胄의 「紀遼東二首」를 통해서, 수나라 양제와 그 관료들의 교만과 허풍으로 가득 찬 임전 태도를 살필 수 있다. 이어 수나라 어떤 백성의 「挽舟者歌」라는 노래를 통해서, 요동에서의 전쟁 이후에 겪어야 했던 수나라 백성들의 치유하기 불가능한 깊은 상처에 대해서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중당시인 왕건의 「渡遼水」와 「遼東行」 및 만당시인 이상은의 「隋師東」을 통해서, 요동에서의 여수전쟁이 남긴 상처가 唐代의 백성들에게도 상흔으로 각인되어 그대로 전이되었던 상황에 대해서도 살필 수 있다. This essay is to find and introduce some works in Su-Dang(隋-唐) Period from the 7th to the 9th century especially, the poems which include Ryeo-Su(麗-隋) War(the war between Goguryeo(高句麗) and Su(隋) dynasty happened in Yodong(遼東) Peninsula) and the injury made by the war. Although Ryeo-Su War is very important event in East Asia history, the enough literary study about that war has not been made yet in academic circles of Korea and China. Through the Kiyeodongisu(「紀遼東二首」) by Yangjae(煬帝)-the second king of Su dynasty in the ancient China and the Kiyeodongisu(「紀遼東二首」) by Wangju(王胄) participating in the war as Biseorang(秘書郞), we can perceive their attitude to the war full of arrogance and exaggeration. And Inspecting the song Manjujaga(「挽舟者歌」) by a people of Su dynasty, we can recognize his incurable injury. Furthermore, through Doyosu(「渡遼水」) and Yeodonghaeng(「遼東行」) by Yanggeon(王建) in Dang dynasty, and Susadong(「隋師東」) by Leesangeun(李商隱) in Dang dynasty, we know the injury made by the war had been remained in the mind of people in Dang Dynasty.

      • KCI등재

        安市城主의 姓名 ‘양만춘’ 考證(Ⅰ) - 姓名의 出處 樣相 檢討를 中心으로 -

        南在澈 동아시아고대학회 2014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35

        본 논문은 唐나라와의 安市城 전투를 승리로 이끈 高句麗의 명장 安市城主의 姓名인 ‘양만춘’의 출처 양상에 대한 논의를 확대・심화함으로써 그 定論을 도출하고자 한 것이다. Ⅱ장에서는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의 출처로 알려져 있는 『唐書演義』와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 을 살펴보았다. 첫째는 『唐書演義』와 관련된 조선 중・후기의 다양한 문헌 기록들을 검토해보았다. 이를 통해 조선의 지식인 중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5년 전부터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서 안시성주의 성명이 ‘양만춘’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경우가 있었고, 임란 발발 이후인 1593년(선조 26)부터는 조선에 출정을 온 명나라 장수들을 통 해 이러한 사실이 더욱 폭넓게 알려지게 되었음이 드러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안시성주의 성명을 ‘양만춘’으 로 기록하고 있는 『唐書演義』라는 책과 아울러 거기에 수록된 내용도 알려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1553년(명종 8)에 명나라 사람 熊鍾谷이 ‘編集’하여 중국에서 간행된 『唐書演義』라는 소설 속에 안시 성주 ‘양만춘’의 양상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이를 통해 조선 중・후기의 문헌 속에 기록된 『唐書演義』가 실제 중국에서 간행되었던 『唐書演義』와 같은 내용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唐書演義』가 안시성주 ‘양만춘’의 성명 출처 가운데 가장 신빙할 만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는 조선 중・후기의 문헌 속에서 『唐書演義』와 더불어 안시성주 ‘양만춘’의 성명 출처로 함께 거론되어 온 ‘太宗東征記’라는 것에 대해 검토해보았다. 이를 통해 ‘太宗東征記’는 명나라 장수 오종도가『唐書演義』를 염두에 두고 그 일부의 내용을 가지고 표현한 것에 불과한데, 윤근수 이래로 조선의 많은 학자들이 이를 책의 제목으로 잘못 이해해왔음을 알 수 있다. 넷째는 『唐書演義』의 산생 시기와 작자를 검토해봄으로써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이 어느 시기 누구에 의 해 최초로 쓰이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1553년(명종 8)에 간행한 것이 현재까지 발견된 『唐書演義』의 가장 앞선 刊本이기는 하지만, 이 간본 또한 기존의 선행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編集’된 것에 불과한 것 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이 1553년(명종 8) 이전에 이미 등장했던 것은 분명하 지만, 어느 시기 누구에 의해 최초로 쓰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단할 수 없다. Ⅲ장에서는 『唐書演義』와 ‘太宗東征記’ 외에도 안시성주 ‘양만춘’의 성명 출처로 거론되는 몇 가지를 더 살펴 보았다. 이를 통해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의 원래 출처는 『唐書演義』임을 한 번 더 확인하며, 양만춘의 성 명 출처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문헌 속에서 거론되는 『餘冬序錄』, 『麗史抄』, ‘世傳’ 등의 자료들은 신빙할 만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study aimed to explore the origin of the name, “Yang, Man-chun," who was a legendary general of Goguryeo(高句麗) and successfully fought the War of Ansi-Fortress(安市城) against the Tang Dynasty in 645. I examined some important aspects associated with Dangseoyeonui(『唐書演義』), a popular version of the history of Tang Dynasty, which has been recognized as the source of the name Yang, Man-chun in chapter Ⅱ. First, I reviewed various books about Dangseoyeonui from the Joseon Dynasty. Through my research, I discovered that some intellectuals in Joseon had been aware of Yang, Man-chun, “the lord of Ansi- fortress"(安市城主) fifteen years before the Japanese invasions of Korea by envoys returning from China. I also found that he was known more widely by some generals of the Ming Dynasty after the invasions. Through the process, Dangseoyeonui and its references to the name of the lord of Ansi-fortress as Yang, Man-chun, had become known to many. Second, I verified how Yang, Man-chun had been discussed in Dangseoyeonui, which was edited by Ung, Jong-gok(熊鍾谷), a writer of the Ming Dynasty, and released in China in 1553. I established that the Dangseoyeonui mentioned in the books of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is the same as the Dangseoyeonui released in 1553 in China. The book is therefore proved to be the most credible source to identify the name of the lord of Ansi-fortress, Yang, Man-chun. Third, I reviewed “Taejongdonggeonggi"(太宗東征記), ”a story"(記) about “the conquest of the East"(東征) by Taejong(太宗), a king of the Tang Dynasty, which has also been mentioned as the source of name, Yang, Man-chun with Dangseoyeonui. Through my review, I found that O, Jong-do, a Ming Dynasty general, had referred to some of the contents in the late part of Dangseoyeonui, on the conquest of the East, as Taejongdonggeongi, which led many scholars of Joseon Dynasty to misapprehend it as the title of the book. Fourth, I examined the first user of the name Yang, Man-chun by inspecting the author and the release date of Dangseoyeonui. I found that although the book was printed in 1553 and is the earliest edition of Dangseoyeonui discovered so far, it is merely an edited edition based on earlier books. Therefore, it is impossible to verify who used the name, Yang, Man-chun, or when it was first used, although it clearly appeared before 1553. I examined more sources on the name Yang, Man-chun besides Dangseoyeonui and Taejongdonggeongi in chapter Ⅲ. I confirm that Dangseoyeonui is the source of the name, and some books, such as Yeodongseorok(『餘冬序錄』), Yeosacho(『麗史抄』), and the “oral tradition"(世傳), mentioned in the books of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are unreliable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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