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펼치기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軍需物流 統合運管에 대한 硏究

        南在喆 國防大學校 2000 敎授論叢 Vol.19 No.-

        물류는 미군이 전시에 효율적인 군수지원을 하기 위한 개념이었으나, 전쟁의 위험이 상당히 사라져 이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진 사이, 민간에서는 새로운 이익원으로 인식하면서부터 급속히 발전되어 지금은 오히려 군에서 이를 역수입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상당히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 군은 지금이라도 민간기업과 국가의 물류 발전추세에 발맞추어 이를 적용하지 않으면 평시 국방비의 낭비는 물론 전시에는 작전임무 수행마저 곤란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여 하루 빨리 이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체계적인 교육을 통한 인력의 양성 등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제 군도 국가경제를 고려하여 한정된 국방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라는 국민의 지상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함으로써 국방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제대별 책임경영개념을 도입하여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군수물류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둘째, 물류경영목표는 전・평시를 고려하되, 평시에는 사용부대의 서비스 기대요구와 비용지출 간에 균형을 맞춰 설정하여 기본서비스와 완전주문이나 필요시 부가가치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하며, 전시에는 최상의 서비스를 지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강구하여야 한다. 넷째, 실제 물류작업은 함수관계이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시설위치 선정과 정보구축 및 공유 수송수단 준비, 재고배치, 필요한 만큼 보관과 하역, 포장활동이 수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물류네트워크 설계는 지역적 차이를 고려하여 물류시설의 수와 크기, 위치를 고려 구조를 결정하고 끊임없이 이를 개선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보에 있어서는 고품질의 정보를 획득하여 정확한 예측과 주문관리를 하고 필요시 JIT나 신속대응, 연속공급 등의 통제방법을 강구하여야 하며, 수송은 최소비용의 수송방법과 속도, 비용간의 균형유지 및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재고는 최소비용으로 재고유지를 하도록 지원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소요물자의 20% 미만을 지원하여야 하며, 보관・하역・포장은 물류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 복합적인 창고운영 방법을 강구하고, 파레트 등 물류포장 단위를 대형화하여 기계화 및 자동화된 하역설비로 이용하되 물품의 중간취급 없이 사용부대에 직송되도록 하여야 한다. 다섯째, 물류통합을 위해서는 물류기능인 물적유통과 제조지원, 조달 등을 기본운영영역으로 구분하여 이들간 재고와 정보흐름이 조화를 이루도록 신속대응, 최소편차, 최소재고, 이동통합, 품질, 수명주기지원 등의 목적을 동시 달성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여섯째, 물류설계에 있어서 분석단위는 수행주기이기 때문에 수행주기구조는 물적유통, 제조지원, 조달 등에 필수적인 노드, 수준, 링크, 활동 등을 통합하여 전체 물류통합을 계획 및 관리하여야 한다. 일곱째, 수행주기의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해서 일관성 있는 운영에 중점을 두고 수행주기기간을 단축하는데 노력을 집중하여 재고위험을 감소시키고 회전율을 향상시켜야 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군수물류에 대한 개념을 하루 빨리 우리 군에 도입하여 이를 통해 평시에는 국방비를 절감하고 전시에는 효과적인 군수지원으로 승리를 보장할 수 있도록 이에 대한 강력한 실천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 KCI등재

        隋唐 漢詩에 나타난 遼東에서의 麗隋戰爭과 그 傷痕

        남재철 진단학회 2009 진단학보 Vol.- No.107

        본고는 수당 시대의 한시 가운데 요동에서의 여수전쟁과 그 전쟁이 빚어낸 상처 및 상흔들을 읊은 작품을 찾아내어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여수전쟁은 동아시아 고대사에 있어서 일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한중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이와 관련된 문학 작품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오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요동에서의 여수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수나라 제2대 황제 양제의 「紀遼東二首」와 비서랑으로서 종군하였던 王胄의 「紀遼東二首」를 통해서, 수나라 양제와 그 관료들의 교만과 허풍으로 가득 찬 임전 태도를 살필 수 있다. 이어 수나라 어떤 백성의 「挽舟者歌」라는 노래를 통해서, 요동에서의 전쟁 이후에 겪어야 했던 수나라 백성들의 치유하기 불가능한 깊은 상처에 대해서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중당시인 왕건의 「渡遼水」와 「遼東行」 및 만당시인 이상은의 「隋師東」을 통해서, 요동에서의 여수전쟁이 남긴 상처가 唐代의 백성들에게도 상흔으로 각인되어 그대로 전이되었던 상황에 대해서도 살필 수 있다. This essay is to find and introduce some works in Su-Dang(隋-唐) Period from the 7th to the 9th century especially, the poems which include Ryeo-Su(麗-隋) War(the war between Goguryeo(高句麗) and Su(隋) dynasty happened in Yodong(遼東) Peninsula) and the injury made by the war. Although Ryeo-Su War is very important event in East Asia history, the enough literary study about that war has not been made yet in academic circles of Korea and China. Through the Kiyeodongisu(「紀遼東二首」) by Yangjae(煬帝)-the second king of Su dynasty in the ancient China and the Kiyeodongisu(「紀遼東二首」) by Wangju(王胄) participating in the war as Biseorang(秘書郞), we can perceive their attitude to the war full of arrogance and exaggeration. And Inspecting the song Manjujaga(「挽舟者歌」) by a people of Su dynasty, we can recognize his incurable injury. Furthermore, through Doyosu(「渡遼水」) and Yeodonghaeng(「遼東行」) by Yanggeon(王建) in Dang dynasty, and Susadong(「隋師東」) by Leesangeun(李商隱) in Dang dynasty, we know the injury made by the war had been remained in the mind of people in Dang Dynasty.

      • KCI등재

        漢文學을 통해 되돌아보는 三韓統一의 역사(Ⅰ)-高麗 시대까지의 漢詩에 나타난 三韓과三韓統一의 의미를 중심으로-

        남재철 한국한문학회 2019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76

        I noticed that the expression of the unification of three nations rarely showed up, but the expression of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often showed up in the Sino-Korean old books. I reviewed how the terms of Three Nations and Three Hans, the expressions of unification of the Three Nations and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has used and how the meaning of them has changed in old books. Therefore, I concluded that it is more proper to use the term of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than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Nations. I confirmed that the intellectuals in China post Sui and Tang dynasties had regarded not only Baekje and Silla located in the mid and south part of Korean Peninsula(the successor of Mahan, Jinhan and Byeonhan) but also the Goguryeo located in the north part of Korean Peninsula and the Liaotung Peninsula(the successor of Ancient Joseon and the Maek) as the part of three Hans. I studied that the intellectuals in China had recognized the Three Hans as the conception including both regional identity of Korean Peninsula and Liaotung Peninsula and historical identity covering the history of the part, but the term of Three Hans had used in the mid 9th century and the recognition of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established in the late 9th century in Korea. I studied that the poets in Sui and Tang Dynasties had begun using the term of Three Hans in their works and the poet in Song, Yuan, early Ming Dynasties had used the Three Hans as the word of the civilized country preserving sophisticated old culture. And I studied that the poets in Goryeo Dynasty had expressed the pride of civilized country through the word of three Hans, and there had been the establishment of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Hans by Taejo Wang Geon, the founder of Goryeo Dynasty in the basis of the pride. 이 글은 三韓 관련 역대 韓中 漢文學 기록을 검토해보고, 高麗 시대까지 산출된 韓中 漢詩 작품을 상세히 분석하여, 우리 역사에서 三韓과 三韓統一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옛 문헌에서 三國統一이라는 말은 잘 사용되지 않은 반면, 三韓統一이라는 말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어 왔다는 점에 주목하여, 三國과 三韓이라는 말, 三國統一과 三韓統一이라는 말이 옛 문헌 속에서 어떠한 의미로 어떠한 변화를 겪으며 사용되어 왔는지에 대해 꼼꼼히 따져보았다. 이를 통해 三國統一이라는 표현보다는, 현재 시점에서는, 옛 문헌에서 주로 사용한 三韓統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리고 北朝ㆍ隋ㆍ唐代 이후 중국에서는 馬韓, 辰韓, 卞韓 및 이곳에서 계승된 百濟와 新羅뿐만 아니라 (古)朝鮮, 貉 및 이곳에서 계승된 高句麗까지를 모두 三韓의 일부로 인식하였으며, 新羅의 高句麗, 百濟 통합 이후에도 新羅를 三韓으로 인식하였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중국에서는 三韓을 北朝ㆍ隋ㆍ唐代 이후 이미 한반도와 遼東 지역이라는 지역적 정체성과 그 지역의 역사를 아우르는 역사적 정체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인식하였지만, 우리 민족에게서 三韓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시점은 9세기 중반 神武王ㆍ文聖王 시대에 이르러서이며, 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三韓統一 의식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점을 규명하였다. 이러한 三韓統一 의식은 後三國 시대 및 高麗 시대에 그대로 이어졌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北朝ㆍ隋ㆍ唐代에 三韓이란 어휘를 漢詩의 시어로 수용하기 시작하여, 宋ㆍ元代의 漢詩 및 明初의 漢詩에 이르게 되면 三韓을 옛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준 높은 문명국을 표상하는 말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우리 高麗 후기 시인들에게 있어 三韓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민족 역사 전체를 표상하는 말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三韓이라는 시어를 통해 문명국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을 드러냈으며, 이 자부심의 바탕에는 太祖 王建의 三韓統一의 업적에 대한 인식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 韓國의 物流情報管理에 대한 硏究

        南在喆 國防大學校 2002 敎授論叢 Vol.25 No.-

        이제 한 국가의 물류수준은 그 나라의 국가경쟁력과 직결되어 있어 물류부문의 효율성 제고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물류비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약 2배나 높기 때문에 물류부문이 국가경쟁력 약화의 주 요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물류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기능들 중에서 아직 선진국보다 물류정보기술 수준이 낮으나, 경쟁력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된 정보통신능력을 물류관리에 효과적으로 접목시킨다면 단시간 내에 물류분야 경쟁력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국내물류산업은 유통시장개방에 따라 그 변혁촉진요인 추출과 이에 맞는 정책적 대응책 수립은 물론이고 국제화 · 세계화에 대응하여 물류네트워크를 조속히 구축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첫째는 물류종합네트워크시스템은 먼저, POS시스템과 연계된 수 · 발주시스템을 자동화한 다음, 수 · 배송, 보관, 하역, 포장, 보험, 통관 등의 업무를 온라인화 · 자동화하고, 수주업자는 운송업자, 창고업자, 자사내 물류부문과 온라인시스템을 구출하되 기업내는 LAN 시스템, 계열기업과 타 관련업체와는 VAN시스템을 설치하여야 한다. 둘째, 물류정보시스템은 물류활동 하나로 통합하도록 구축하되, 6대 원칙을 준수하여 기업의 경영정보요구를 충족시키면서도 기획 및 운영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물류정보시스템은 먼저 전국 VAN망 네트워크운영회사가 유통단계, 기업형태 및 규모에 맞는 물류하부구조를 구척한 뒤 도 · 소매상, 제조업체 등의 참가를 유도하여야 한다. 넷째, 물류기술은 소매상의 창의성과 경쟁력, 소매상 · 공급자간의 신속대응, 최신 전문가시스템을 통한 판매결정 간소화, 고객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분산형 소매네트워크가 바람직하다. 다섯째, 정보기술의 활용은 온라인데이터베이스, 스캐닝, 텔레커뮤니케이션, LAN, 인공지능기술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여섯째, 물류정보는 주요 물류경로기능 및 수행자를 결정한 뒤 마케팅정보 결정, 정보수집자 · 사용자에 대한 전달방법 결정, 잡음요소규명과 제거방법을 강구단계로 개발하여야 한다. 일곱째, 물류정보시스템개발에 포함되는 VAN망, EDI, 수 · 발주온라인, 크레디트 ID카드 등 시스템개발에는 업무제휴나 그룹화를 위해 대형소매상, 소매업적 유통업체가 바람직하다.

      • KCI등재

        安市城主의 姓名 ‘양만춘’ 考證(Ⅰ) - 姓名의 出處 樣相 檢討를 中心으로 -

        南在澈 동아시아고대학회 2014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35

        본 논문은 唐나라와의 安市城 전투를 승리로 이끈 高句麗의 명장 安市城主의 姓名인 ‘양만춘’의 출처 양상에 대한 논의를 확대・심화함으로써 그 定論을 도출하고자 한 것이다. Ⅱ장에서는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의 출처로 알려져 있는 『唐書演義』와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 을 살펴보았다. 첫째는 『唐書演義』와 관련된 조선 중・후기의 다양한 문헌 기록들을 검토해보았다. 이를 통해 조선의 지식인 중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5년 전부터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을 통해서 안시성주의 성명이 ‘양만춘’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경우가 있었고, 임란 발발 이후인 1593년(선조 26)부터는 조선에 출정을 온 명나라 장수들을 통 해 이러한 사실이 더욱 폭넓게 알려지게 되었음이 드러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안시성주의 성명을 ‘양만춘’으 로 기록하고 있는 『唐書演義』라는 책과 아울러 거기에 수록된 내용도 알려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1553년(명종 8)에 명나라 사람 熊鍾谷이 ‘編集’하여 중국에서 간행된 『唐書演義』라는 소설 속에 안시 성주 ‘양만춘’의 양상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이를 통해 조선 중・후기의 문헌 속에 기록된 『唐書演義』가 실제 중국에서 간행되었던 『唐書演義』와 같은 내용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唐書演義』가 안시성주 ‘양만춘’의 성명 출처 가운데 가장 신빙할 만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는 조선 중・후기의 문헌 속에서 『唐書演義』와 더불어 안시성주 ‘양만춘’의 성명 출처로 함께 거론되어 온 ‘太宗東征記’라는 것에 대해 검토해보았다. 이를 통해 ‘太宗東征記’는 명나라 장수 오종도가『唐書演義』를 염두에 두고 그 일부의 내용을 가지고 표현한 것에 불과한데, 윤근수 이래로 조선의 많은 학자들이 이를 책의 제목으로 잘못 이해해왔음을 알 수 있다. 넷째는 『唐書演義』의 산생 시기와 작자를 검토해봄으로써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이 어느 시기 누구에 의 해 최초로 쓰이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1553년(명종 8)에 간행한 것이 현재까지 발견된 『唐書演義』의 가장 앞선 刊本이기는 하지만, 이 간본 또한 기존의 선행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編集’된 것에 불과한 것 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이 1553년(명종 8) 이전에 이미 등장했던 것은 분명하 지만, 어느 시기 누구에 의해 최초로 쓰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단할 수 없다. Ⅲ장에서는 『唐書演義』와 ‘太宗東征記’ 외에도 안시성주 ‘양만춘’의 성명 출처로 거론되는 몇 가지를 더 살펴 보았다. 이를 통해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의 원래 출처는 『唐書演義』임을 한 번 더 확인하며, 양만춘의 성 명 출처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문헌 속에서 거론되는 『餘冬序錄』, 『麗史抄』, ‘世傳’ 등의 자료들은 신빙할 만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This study aimed to explore the origin of the name, “Yang, Man-chun," who was a legendary general of Goguryeo(高句麗) and successfully fought the War of Ansi-Fortress(安市城) against the Tang Dynasty in 645. I examined some important aspects associated with Dangseoyeonui(『唐書演義』), a popular version of the history of Tang Dynasty, which has been recognized as the source of the name Yang, Man-chun in chapter Ⅱ. First, I reviewed various books about Dangseoyeonui from the Joseon Dynasty. Through my research, I discovered that some intellectuals in Joseon had been aware of Yang, Man-chun, “the lord of Ansi- fortress"(安市城主) fifteen years before the Japanese invasions of Korea by envoys returning from China. I also found that he was known more widely by some generals of the Ming Dynasty after the invasions. Through the process, Dangseoyeonui and its references to the name of the lord of Ansi-fortress as Yang, Man-chun, had become known to many. Second, I verified how Yang, Man-chun had been discussed in Dangseoyeonui, which was edited by Ung, Jong-gok(熊鍾谷), a writer of the Ming Dynasty, and released in China in 1553. I established that the Dangseoyeonui mentioned in the books of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is the same as the Dangseoyeonui released in 1553 in China. The book is therefore proved to be the most credible source to identify the name of the lord of Ansi-fortress, Yang, Man-chun. Third, I reviewed “Taejongdonggeonggi"(太宗東征記), ”a story"(記) about “the conquest of the East"(東征) by Taejong(太宗), a king of the Tang Dynasty, which has also been mentioned as the source of name, Yang, Man-chun with Dangseoyeonui. Through my review, I found that O, Jong-do, a Ming Dynasty general, had referred to some of the contents in the late part of Dangseoyeonui, on the conquest of the East, as Taejongdonggeongi, which led many scholars of Joseon Dynasty to misapprehend it as the title of the book. Fourth, I examined the first user of the name Yang, Man-chun by inspecting the author and the release date of Dangseoyeonui. I found that although the book was printed in 1553 and is the earliest edition of Dangseoyeonui discovered so far, it is merely an edited edition based on earlier books. Therefore, it is impossible to verify who used the name, Yang, Man-chun, or when it was first used, although it clearly appeared before 1553. I examined more sources on the name Yang, Man-chun besides Dangseoyeonui and Taejongdonggeongi in chapter Ⅲ. I confirm that Dangseoyeonui is the source of the name, and some books, such as Yeodongseorok(『餘冬序錄』), Yeosacho(『麗史抄』), and the “oral tradition"(世傳), mentioned in the books of the lat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are unreliable sources.

      • 국방물류 발전에 관한 연구

        南在喆 國防大學校 1998 敎授論叢 Vol.12 No.-

        물류의 개념은 원래 군에서 시작하였으나 이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진 사이 민간에서는 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제3의 이익원으로서 인식하면서부터 발전되어 지금은 오히려 군에서 이를 역수입하여 발전시켜야 할 시점에 와있다. 우리 국방도 뒤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국가와 민간기업의 물류 발전추세에 발맞추어 이를 적용시키지 않으면 국방비의 낭비는 물론 전시에는 작전임무수행마저 곤란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하루 빨리 이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체계적인 교육을 통한 인력의 양성 등이 시급한 상황이다. 이제 국방도 국가경제를 고려하여 한정된 국방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라는 국민의 지상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함으로써 국방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도록 제대별 책임경영개념을 도입하여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국방물류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에 대비해야 하며, 둘째는 무엇보다 선결과제는 물류관련 지휘관은 물론 참모 및 실무요원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여 전문인력의 양성에 주력해야 하고, 셋째로 물류관련조직의 보강으로 국방부의 군수국을 물류국으로 확대 개편하고 물류관련 업체와 각군 요원들로 국방물류상황실을 운영하며 병참병과와 수송병과를 물류병과로 통합하는 동시에 수송병과의 기능을 육상, 해상, 공중수송을 통합운영할 수 있도록 개편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국방부 예하에 국방종합물류센터와 군지사지역에 물류 중간기지를 설치하여 모든 군수품이 여기를 통하여 처리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다섯째 물류관련 제도보완으로 재고통제기능을 각군 군수사로만 일원화하고 현재의 보급수준을 대폭 하향조정하여 보급거래는 육군의 사단급과 해군의 함대사, 공군의 비행단과 직거래 방식으로 개선하고 보급방식도 자동보급방식으로 바꾸며 사단의 보급수송근무대가 보급소 분배를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여야 할 것이다. 여섯째로 국방물류 투자비용 절감을 위해서 정부의 물류기지나 물류센터 그리고 민간물류망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일곱째로 국방물류의 각 기능별 개선사항으로는 유닛 로드 시스템을 적용하고 운송시스템은 가용한 모든 국방자원과 정부 및 민간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보완하며 하역시스템은 각종 하역기기를 보완하여 시간과 노력을 절약토록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관시스템은 현재의 단순보관기능에서 보완 '시속 0km의 수송'이라는 개념으로 창고기능을 고도화하고 물류관리에 필수적인 물류정보시스템은 각 기능적 주체들이 물류정보를 효율적으로 수집, 처리, 공급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전산과 통신으로 연결되어야 하며 물류회계시스템은 현제의 자금관리비교평가제도를 대폭 보완하여 현금의식을 갖도록 유가증권이나 쿠폰 등으로 바꾸어 각 제대별로 물류비용이 발생시 물품과 교환할 수 있도록 개선하여야 할 것이다. 여덟째 국방물류의 내용별 보완에 있어서는 방산업체와 군납업체 등은 조달 및 생산물류분야에 원가절감과 물류비용을 줄이도록 하고 국방물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각 제대 보급물류의 경우 단위화에서는 영내 파렛트 풀을 이용하고 하역은 보급품 분류작업제도를 이용하며 재고관리는 재고의 적정화를, 수송에서는 공동수송을 실시하고 정보통신에서는 보급품을 코드화하여 POS시스템을 도입하는 등의 개선이 요망된다.

      • KCI등재

        李德懋 詩에 나타나는 奇詭尖新의 美學

        남재철 한국한시학회 2007 韓國漢詩硏究 Vol.15 No.-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character of Lee, Deok-mu’s Poetry with the keyword of ‘Strangeness and Originality’ which Kim, Taek-yeoung used when he criticize the works by poets who lead the practical science in literature- Lee, Deok-mu, You, Deuk-Gong, Park, Je-ga, Lee, Seo-gu, Lee, Yong-hyu, Lee, Ga-Hwan in the latter period of Chosŏn dynasty. Lee, Deok-mu accepted critically literary theory that Gongan school and Gyeongneung school had made in China. He tried to follow the literary movement of the Practical Science School who had rejected to imitate the typical and flat poem and had intended to make the national and realistic poem. The trifling poetic material making traditional and Korean atmosphere was accepted aggressively and widely in Lee, Deok-mu’s poetry. Such material had been recognized as the inappropriate material by the poets who imitated the typical poem. If the poets imitating the typical poem had accepted trifling material, their poems could have been very ordinary. However Lee, Deok- mu intended to take an inside view for trifling Korean material on the basis of endless love and concern for things Korean. Therefore he has found Esthetics of Strangeness and Originality in trifling Korean material, which has made his poetry a new and fresh style. His poetic language is very fresh and his poetic structure is systematically made. Such a trial has put Esthetics of Strangeness and Originality on the higher level. 본 논문은 金澤榮의 소위 ‘奇詭尖新’이라는 키워드를 매개로 삼아서 李德懋 시문학의 본질적 특성을 규명하고자 시도되었다. 이덕무의 시에 적용되는 기궤첨신이라는 풍격 용어를 정당하게 이해하려면, 우선 시대정신의 변화과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시각, 즉 역사성을 중시하려는 관점이 요구된다. 기궤첨신의 시풍은 과거의 낡은 典範에 대한 강렬한 반성, 그리고 미래의 새로운 전범에 대한 부단한 모색 행위를 수반한다는 관점을 견지할 때에, 이덕무의 시문학이 지닌 기궤첨신의 미학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이덕무는 명나라 公安竟陵派의 문학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擬古主義의 말폐에 빠져 있던 조선의 보수적 시풍을 개혁할 강력한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공안경릉파의 시문학 이론에 무비판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중국인의 얼굴과 조선인의 얼굴이 서로 다른 것처럼 중국인의 시문학과 조선인의 시문학도 그 특성이 같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그 결과 이덕무는 과거의 시도 唐宋人의 시도 아닌, 古文辭派의 시도 공안경릉파의 시도 아닌, 현재의 조선인 이덕무의 기궤첨신한 시풍을 선도하였다. 그가 살던 당대 조선인의 얼굴을 정확히 빼닮은 그러한 시를 창작하였다.이덕무의 시에는 기궤첨신의 미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시에는 조선적 분위기가 넘치는 소소한 소재가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수용되어 있다. 의고주의를 지향하는 시인들은 비록 조선의 것이지만 뭔가 신기하고 장엄한 소재들을 읊어야 했고, 신기하거나 장엄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중국적으로 雅化시켜 읊어야 했다. 그러나 기궤첨신한 시풍을 추구한 이덕무에게는 조선의 산수와 풍경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시의 훌륭한 소재로 인식되었다. 의고주의를 지향하던 시인들이 보기에는 시의 소재로 수용되기에 부적절하다고 인식되던 자질구레한 것들이 모두 시의 훌륭한 소재로 재인식되었던 것이다.또한 이덕무의 시는 그 시적 인상이 각성된 감각에 의해 완벽하게 갈무리되어 있어서 매우 청신한 느낌을 준다. 평범하고 답습적인 시작 태도로 조선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소소한 소재들을 수용하다 보면, 시의 내용이나 인상도 자칫 평범해지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그런데 이덕무는 우리의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바탕으로 해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들 속에 내재된 참다운 경지를 포착해 내고자 하였으며, 이를 선명하고 아름답게 재구성하였다. 그 결과 소소한 소재들이 매우 신선하고 이채로운 것으로 탈바꿈하게 되어, 기궤첨신의 미학을 한껏 구현하게 되었다.또한 이덕무의 시는 참신한 시어로 엮은 노련한 구법의 구사로 인해 기궤첨신의 미학적 수준이 일층 상승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의고주의적 시인들은 제한된 학습범위 내에서 전고를 획득하게 된다. 반면 이덕무는 전고의 학습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혔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전고들을 거의 신기에 가까우리만큼 절묘하고 짜임새 있게 엮어내어서 구법의 노련함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는 조선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소소한 소재들로 엮어낸 시가, 당대 중국의 저명한 평자들도 극찬하지 않을 수 없는 고원한 미학적 수준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 KCI등재

        한문학을 통해 되돌아보는 三韓統一의 역사(Ⅲ): 조선 시대 한시에 나타난 고려의 삼한통일의 의미를 중심으로

        남재철 명지대학교(서울캠퍼스) 인문과학연구소 2021 인문과학연구논총 Vol.42 No.3

        This essay is to study that the aspects and meanings of Joseon intellectuals' perception of the unification of Three Hans by the first King Taejo Wang Geon of the Goryeo Dynasty, which appeared in the of Sino-Korean poetry created in Joseon Dynasty. The intellectuals of the Joseon Dynasty greatly praised King Taejo Wang Geon of the Goryeo Dynasty for his achievements in unification of Three Hans. In the meantime, it was recognized that the later kings did not properly inherit the spirit of Wang Geon's unification of Three Hans, leading to the collapse of the Goryeo Dynasty. This perception of Joseon intellectuals was linked to the perception of necessity that the first King Taejo Lee Seonggye of the Joseon Dynasty was forced to emerge as a new subject of the reunification of Three Hans. It also showed the Joseon Dynasty's own wariness and commitments to properly inherit the spirit of unification of Three Hans made by Lee Seonggye, considering the collapse of Goryeo as object lesson. 이 논문은 조선 시대 한시에 나타난 조선조 지식인들의 고려 태조 왕건의 삼한통일에 대한 인식 양상과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조선조 지식인들은고려 태조 왕건의 삼한통일의 업적에 대해 극도로 칭송하였다. 그러면서 후대왕들이 왕건의 삼한통일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지 못하여 고려 왕조가 패망하게 되었다고 인식하였다. 조선조 지식인들의 이러한 인식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삼한통일의 새로운 주체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성의 인식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망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성계의 삼한통일의 정신을 올바로 계승해야 한다는 조선 왕조 스스로의 경계와 다짐의 의도를 보여주었다.

      • KCI등재

        李書九 說話의 歷史的 背景-說話的 異人化 要因을 中心으로-

        남재철 한국고전문학회 2004 古典文學硏究 Vol.25 No.-

        Lee, Seo-Gu(1754~1825) is famous as a member of a literary group which is called ‘Sa-ga' and showed excellent talent as a politician for administration to relieve the suffering people. Although he was historical person, he was often fabricated as the author of prophetic book or as a legendary person in many narratives. This thesis is to study the cause of transformation from a historical politician to a legendary hero. Because the rumor in which Lee, Seo-Gu had written and circulated a prophetic book was floated in the latter half of the19th century, the rumor about his prophetic book predicting the triumph of revolutionary army could be reproduced in the revolutionary war by populace in 1894. Such a rumor making him the author of a prophetic book has been repeated until now especially in the historical occasion. The rumor was made by populace because Lee, Seo-Gu has been well known as a person with supernatural power who had foretold the birth of Na-Hab, the concubine of a corrupt politician of power in that age. His apprehension about the political crisis and suffering people by the corrupt politician in the future has been transformed as such a prophesy in the subconsciousness of common people. Like common people, Lee, Seo-Gu underwent all sorts of political hardships by the ‘An-Dong Kims', corrupt politician group of power. However, trying to relieve the people's suffering on the basis of excellent statecraft, he was acknowledged as a politician to save them in the consciousness of populace. Such a recognition has been developed to made him a legendary hero with supernatural power. His image as a hero has been accepted actively by the leaders of insurrection of the people in the latter part of the Chosŏn Dynasty for the purpose of instigating and mustering people. 이서구(李書九, 1754∼1825)는 1890년 이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특정 예언서의 저자로 조작된 경우가 빈번하였을 뿐만 아니라, 필기(筆記)나 설화 중에서도 신이한 능력을 지닌 설화적 인물로 묘사된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본 논문에서는 이서구라는 지극히 역사적인 인물이 설화적 공간 속의 이인(異人)으로 변화되게 된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고자 한다.필기나 설화에서 이서구는 안동김씨 김좌근(金左根)의 애첩인 나합(羅閤)의 출현을 예언한 인물로 등장하곤 한다. 아울러 그가 선정을 베풀었던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지역 그리고 그의 은거지인 경기도 포천 지역에는 그의 치적이나 인품과 관련하여 많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설화적 맥락으로만 보면, 그는 사후인 헌·철종 대까지도 백성들에게 예지자 내지는 구원자로 인정받았다.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면, 이서구는 안동김씨 세도정권과 맞서는 위치에 있으면서 백성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 역시도 온갖 수난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탁월한 경륜을 바탕으로 하여 경세제민을 적극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에 의해 자신들을 구제할 수 있는 인물, 청렴한 경세가로 존경받았다. 백성들의 이서구에 대한 인식은 헌·철종 대 이후까지도 계속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탁월한 예지력을 갖춘 설화적 이인으로 수용하도록 했다.백성들의 이서구에 대한 인식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동학농민운동이나 남조선신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백성들에게 예지자이자 구원자로 각인된 이서구의 이미지가 동학농민군을 포함한 변혁운동의 지도층에 의해 적극 활용되었다. 백성들 속에서 이미 설화적 이인으로 각인되어 있던 이서구라는 인물의 이미지가 조선말기 변혁운동의 주체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백성들을 선동·규합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