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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암 이을호의 탈주자학,탈중국적 자주성과 한국사상연구의 시각

          김형찬 ( Hyoung Chan Kim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0 韓國思想과 文化 Vol.54 No.-

          현암 이을호는 중국사상의 기준으로 볼 때 한국사상이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나아가 그러한 기준에서 중국사상의 발전에 기여한 한국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 드러내려 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한국사상이 중국과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려 하였고, 그 독자적 특성을 기반으로 평가의 기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한민족의 뿌리인 동이문화가 중국문화에 뒤질 것이 없다는 당당한 자부심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그는 중국의 수직적 문화와 다른 한국의 수평적 문화, 중국의 도일분수적(道一分殊的) 사유방식과 대조가 되는 한국의 회삼귀일적(會三歸一的) 사유방식을 그 특징으로 제시하였다. 나아가 그러한 한국의 수평적 호혜 문화가 중국의 수직적 종속 문화보다 앞선 것이며, 회삼귀일?이이일(二而一)적 묘합(妙合)의 문화가 서구의 논리적 사고를 넘어서는 차원의 사유방식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을 기반으로 한국 고유의 사상을 `한사상’으로 정의하고, `한사상’의 기준으로 한국사상사를 재평가하였다. 현암의 이러한 평가는 다소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한국사상사의 큰 맥락에서 한국사상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해 볼 때 참고할 만한 좋은 선례가 된다. Hyeonam Yi Eulho tried to reveal how much Korean Thought is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Chinese Thought and suggest the criteria of evaluation on the basis of the independent property of Korean Thought. That was a great contrast to the other scholars that have found the value of Korean Thought by the standard of Chinese Thought and have disclosed which of Korean Thoughts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Chinese Thought by the same criteria. His attempt like this was on the basis of the confident pride that the culture of Dong-I, as the root of the Korean race, is never inferior to the Chinese culture. Therefore, he presented the horizontal culture of Korea that was deferent from the vertical culture of China and the Korean way of thinking uniting the three vehicles into one (會三歸一) that contrasted with the Chinese way of thinking dividing one way to a great number of individuals (道一分殊) as the characteristics. Moreover, he was confident on the idea that the Korean culture of the horizontal reciprocity was one step ahead of the Chinese culture of vertical subordination and the Korean culture of the mysterious combination was the way of thinking that went beyond the logical thinking of the West. Then on the base of these characteristics, he defined the original Korean thought as `One Thought` and revaluated the history of Korean Thought on the standard of `One Thought`. Hyeonam`s assessment like this would be hard to escape from the excessiveness, however it could be a good precedent to refer if we think what should be the criteria of Korean Thought in the grand context of the history of Korean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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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사학(史學)) :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고대(古代) "불교사(佛敎史)" 서술 검토

          박미선 ( Mi Sun Park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 韓國思想과 文化 Vol.59 No.-

          2009년 교육과정 개정안과 2010년 부분 개정안에 따라 2011년부터 기존의 國定 「국사」교과서 대신 6종의 檢定 「한국사」교과서가 고등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다. 본래 2009년 개정안에서는 국사와 세계사를 결합한 「역사」과목과 교과서를 계획했으며, 이 「역사」는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2010년 「역사」를 「한국사」로 급히 변경하였고, 그로 인해 전근대사를 추가적으로 서술해야 했다. 결국 기존 「국사」교과서에 서술된 전근대사 내용을 요약·정리하여 「한국사」 교과서에 수록하게 되었고, 이로써 새 교과서는 근현대사와 전근대사의 불균형, 체제의 비통일성 등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새 교과서에서 고대 불교에 대해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기존 교과서와는 어떤 차별점이 있으며, 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불교는 한국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키워드로, 특히 불교를 수용하여 한국문화의 한 축으로 형성한 때가 바로 고대이므로 불교문화를 제외하고 고대사를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먼저 6종의 검정 교과서를 비교·검토하고, 이를 기존의 국정 국사 교과사와 비교해 보았다. 기존 「국사」는 정치·경제·사회·문화분야로 나누어 서술된 데 비해, 검정 교과서들은 개설적인 서술 방식으로 정치사와 문화사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고대 불교에 대한 서술을 비교해 본 결과, 6종의 교과서는 서술 분량에서 차이가 있었고, 그 원인은 불교미술에 대한 서술 분량의 차이에 있었다. 공통적으로 삼국시대에 비해 남북국시대의 불교 서술이 매우 소략하며, 남북국시대 불교를 다루지 않은 교과서도 있었다. 최근에 신라 말 ``禪宗``에 대한 연구가 늘어나고 있는 경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 결과 새 교과서 또한 삼국의 ``불교 수용``만 집중적으로 서술하는 태도를 답습하고 있다. 또한 「국사」교과서의 내용을 요약하여 새 교과서에 싣다보니, ``불교문화가 발전했다``와 같은 결론만 서술하거나 불교미술의 종류와 명칭을 ``나열``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으로는 학습자들이 역사적 지식을 ``이해``하기란 어려우며, 이해할 수 없는 경우 ``암기``로 이어지게 되고, ``암기``는 곧 학습 부담이 된다. 따라서 내용의 많고 적음을 떠나 ``역사적 판단력 함양``을 역사교육의 목표로 한다면,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나 불교미술의 나열이 아닌 시대적·사상적 배경과 因果관계 등 좀더 ``친절한`` 서술 방식이 필요하다. According to the 2009 National Curriculum Amendment and 2010 Partial Amendment, six authorized ``HANKUKSA: Korean History`` textbooks have been used in high school instead of the existing ``KUKSA: National History`` textbook. The original 2009 Amendment had a plan of making ``YUKSA: History`` subject and textbooks by combining the national and world history, centered on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But in 2010, ``YUKSA`` was changed by ``HANKUKSA`` urgently, which made additional description of premodern history inevitable. As a result, the descriptions on premodern history in the existing ``KUKSA`` were summarized and organized to be included in the new ``HANKUKSA``; therefore, the new textbook showed many problems such as the imbalance between premodern and modern-contemporary history and lack of formation-unity. The present study was performed to investigate how the new textbooks describes the Ancient Buddhism, what kinds of difference they show and what kinds of problem they include. Buddhism is the keyword in understanding Korean history and culture, and it was the Ancient Era when the Buddhism was accepted and became the axis of Korean culture. So, we can neither explain nor understand the ancient history except the Buddhist culture, and that is the reason why Buddhism should be centered on. First, six kinds of authorized textbooks were compared one another and then with the existing national Korean history textbooks. Contents of the existing ``KUKSA`` were described by political, economical, social and cultural aspects, but, on the contrary, authorized textbooks were done by centering on the political and cultural history with the method of introductory description. Comparing the description of Ancient Buddhism, quantitative differences were found in six textbooks, especially, those of Buddhist arts. Commonly, the Buddhism descriptions of North and South States Period were rougher and more negligent than the Era of Three States, and even some textbook has no part of North and South States Period Buddhism. It did not match the recent trend that investigating the Zen of late Shilla is steadily increasing. As a result, the new textbooks followed the old trend again which were concentrated on the intensive descriptions of Buddhism embracement in the Era of Three States. Also, because the contents of ``KUKSA`` were summarized and included in the new textbooks, we could find only the conclusion like ``Buddhist arts were developed`` or the lists of categories and names of Buddhist arts. Such descriptions cannot make learners` understood the historical knowledge. If learners cannot understand the knowledge, they will try to ``memorize`` it, which will burden them. So, if the aim of history education is to ``foster the historical judgement`` regardless of the quantity, more ``kind`` method of description is needed by providing the background of the time and ideology and the causal relationship, instead of the lists of simple facts or Buddhist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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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철학(哲學)) :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700 의사(義士)의 민족정신사적(民族精神史的) 의의(意義)

          김문준 ( Moon Joon Kim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 韓國思想과 文化 Vol.58 No.-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은 율곡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한국 도학의 정맥을 계승하고, 16세기 말인 임란 직전에 義理정신과 務實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중봉의 위대함은 의병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전의 당시 현실 속에서 국가 위기에 대처하는 도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처 양상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중봉은 節義와 學問과 經世를 겸비한 眞儒였다. 그는 학문과 군자를 좋아하고 후세에 도학을 전하고자 헌신한 교육자였고, 국가와 백성을 위해 고심한 경세가였다. 중봉은 道德, 義理와 經世를 일관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修養과 濟民을 실현하기 위하여 時弊를 개혁하고 倭侵에 대비하는 대책을 구체적으로 주장했다. 특히 중봉과 700 義士는 인간 세상의 인도주의가 유린되는 부조리한 시대를 당하여 국가를 구했으며, 국가 존망의 위기와 道의 존망을 같은 문제로 인식하고, 국가와 도의 수호를 위해 殉國, 殉道했다. 그들은 국가와 仁義의 도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국가와 인도를 수호하는 강렬한 저항정신을 발휘하여 영원한 民族精氣가 되었다. 중봉의 의리사상은 김상헌, 김집, 송시열 등 한국도학파의 선비들에 의해 적극 현창되고 계승되었다. 중봉 조헌과 700 義士의 義擧 정신은 한국 선비정신의 정맥이며,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고귀한 인간 정신을 담고 있으므로 이들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더욱 현창해야 할 것이다. 또한 중봉 조헌과 700 義士의 순국 정신은 인의에 기초하여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人道精神을 발휘한 것이므로, 그들의 정신은 동북아의 평화와 세계 평화의 정신적 기초가 될 수 있다. Jo Hoen(趙憲; 1544-1592) was one of the representative korean Sunbee. He was a martyr for his country and spirit of neo-Confucianism. He had succeeded to the thought of Lee Yi(李珥; 1536-1584), succeeding spirit of succession of the korean neo-Confucianism(道統). He had made constant efforts to put justice and righteousness into practice. and had insisted on a far-reaching reformation of the nation. He provided the wide view and many action plans for the political, economic, educational, and national defence reform to help people`s life and prepare war to reject external aggression. When Japan`s invasion(Imjin Hideyoshi Invasion: 1592-1597) occurred, he devoted his life to reject Japan`s invasion at the end of 16`s century. At that time, he raised the army of justice(義兵) and became a leader to reject Japanese invader. He put justice and righteousness into practice and confucian scholarship and fidelity to his homeland. He devoted himself to teaching and working for the nation and its people. He had a understanding his era as a period which humanism was trampled, so had a awareness which was not only the crisis of the nation`s fate and but also the crisis of the Tao(仁義). And He considered protecting his country and the Tao(道) as his duty. He guarded the nation and the people. His spirit had been inherited by the others who succeed to the spirit of Korean neo-Confucianist. The spirit of Sunbee and the patriotic deed of Martyr Jo Hoen and 700 righteous men would be the core of korean traditional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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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 문학(文學) : 대학 글쓰기와 말하기 교재의 효과적인 구성 방안

          임선애 ( Seon Ae Lim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韓國思想과 文化 Vol.72 No.-

          이 연구의 목적은 대구가톨릭대 글쓰기와 말하기 교재의 효과적인 구성방안을 마련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글쓰기, 말하기 교재와 관련된 연구들을 통해서 타 대학들의 글쓰기, 말하기 교육에 대한 동향을 살피고, 대구가톨릭대의 글쓰기와 말하기 교과목이 처한 환경과 교재개발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대구가톨릭대의 글쓰기와 말하기 교재가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 대구가톨릭대는 일찍부터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 국어, 영어, 컴퓨터를 실용중점 교양영역으로 정하고, 사회적 요구도를 충족시키기 위한 준비를 해 왔다. 실용국어의 경우, 이전의 문학작품 해석 중심의 대학국어 교육과는 달리 일상, 학업, 직업에 필요한 글쓰기와 말하기 교육이 주요한 교육 내용이었다. 이런 교육 정책에 맞추어 교재 개발이 이루어졌는데, 『자기표현시대의 글쓰기와 말하기』(2001), 『글로벌시대의 글쓰기와 말하기』(2006), 『대학생을 위한 글쓰기와 말하기』(2013) 등이 그것이다. 『대학생을 위한 글쓰기와 말하기』(2013)의 경우, 장르별 글쓰기와 말하기 실력을 다지는 방향으로 컨셉을 정했다. 한 학기 동안 실제로 학생들이 부담없이 학습할 수 있는 분량을 고려해서 13장으로 정하고, 이론-예시-연습 중에서 연습부분을 대폭 늘리고, 동료와 교수자의 피드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이 글의 2장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 교재는 학생들의 연습 부분과 교수자의 역할을 늘림으로써 학습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교재라고 할 수 있다. 이 교재를 따라 학생들이 부지런히 연습하면, 글쓰기와 말하기 실력이 향상될 수 있는 교재이다. 현재 60명이 수강정원이기 때문에, 교수자와 학생 간의 활발한 교감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글쓰기와 말하기 수업은 소수일 때 그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사실이다. 수강정원의 감소와 좋은 교재가 만나면, 글쓰기와 말하기 교육의 효과는 분명히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The goal of this study is prepared the effectual configuration plan of the writing and speaking text within university. For complete this goal, first, I saw that many university teach writing and speaking through some research about writing and speaking. Second, I survey on environment writing and speaking education of Catholic University of Daegu and a history of textbook development and I set direction to writing and speaking textbook of Catholic University of Daegu. The university inevitable change around the university and the university itself. Now the university apprehend to the flow of society and they bring up man-management that required society. Catholic University of Daegu prepared bring up man-management that required society that they decide general education area as Korean language, English, Computer. The case of Practical korean, they teach about daily life, study, job. According this plan, textbook development. there are 『Jagipyohyeonsidaeui geulsseugiwa malhagi』(2001), 『globalsidaeui geulsseugiwa malhagi』(2006), 『Daehaksaengeul wihan geulsseugiwa malhagi』(2013). The case of 『Daehaksaengeul wihan geulsseugiwa malhagi』(2013), It`s concept is study and job. University writing and speaking is very important. This textbook is made of 13 chapter. It`s order as theory- example-exercise. There are increase exercise and peer or professor feedback. If student study hard with this textbook, they`ll level up their writing and spe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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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 사학(史學) : 조선후기 승군제도의 불교사적 의미

          고영섭 ( Young Seop Ko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韓國思想과 文化 Vol.72 No.-

          조선후기 승군제도는 당시 불교의 사회적 역할, 불교의 사회경제적 실태를 보여주는 주요한 기제였다. 임란과 호란을 전후하여 僧軍總攝制 아래 통솔되는 불교계의 현실에서 僧役은 불교계가 대내외에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조선 중기 이래 불교계는 禪敎兩宗이 혁파된 이래 교단이라는 求心은 상실했지만 승군총섭제를 통해서나마 遠心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원심을 動因으로 삼아 불교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여한 ‘義僧軍’을 통해 어느 정도 구심을 회복해 갈 수 있었다. 17세기 전반에 이르러 승군이 상설 제도화 되어 ‘승군제’로 정착되고, 중반에 이르러 승군제가 확대되면서 팔도도총섭 중심으로 이루어진 求心은 ‘臨濟太古法統說’과 ‘三門修業’ 체계를 수립하는 데에 하나의 動因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계는 高僧碑의 건립과 僧侶文集의 간행을 통해 승려들의 자의식을 형성하고 인식틀을 확보하였다. 아울러 승려에 대한 사회적 지위와 위상이 변모되면서 公人으로서 승려들의 사회적 역할도 보다 적극적으로 요청받기 시작하였다. 승군제도는 불교와 승려의 위상을 높여 불교와 僧人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 주었으며, 불교의 대사회적 존재감을 확장시켜 조선후기 이래의 불교 존립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유교의 통치 이념아래 시설된 승군제도는 내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승군제도는 사찰의 승역 부담을 확대시켰다는 점에서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반면 승군제도는 유교의 통치이념 아래에서 불교의 대사회적 존재감을 확보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승군제도가 참여불교로서의 護國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승려들의 사회적 역할과 역사적 존재감을 표출할 수 있었던 주요한 기제였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두 시각에서 승군제도의 영향과 불교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monk army system was the main mechanism to show the social role of Buddhism and socioeconomic situation of Buddhism. Around Japanese Invasion and Chinese Invasion, in the situation that the army was controlled by system of the director in command of monk army(僧軍總攝制), compulsory labor of monks(僧役) was only the way for Buddhist society to show its sense of being internally and externally. Since the mid Joseon Dynasty when Seon school and Doctrine school were revolved, although the Buddhism has lost the pivot, the order, it has maintained centrifugal force through system of the director in command of monk army. By driving the centrifugal force, the Buddhist society could recover its center through `monk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that participated in Imjin Japanese Invasion and Byeongja Chinese Invasion. In the early 17th century, as the monk army was settled as a permanent system (monk army system), In the mid age, as the monk army system was enlarged, the pivot consisting of the center of the director in command of eight province(八道都摠攝) became a drive to establish ‘assertion on the patriarchate of Imjae-Taego’(臨濟太古法統說) and ‘system of study on the three gates’(三門修業體系). With the motive, the Buddhist society formed the self-consciousness for monk and established the recognition frame by establishing inscription of a priest of virtue(高僧碑) and publishing a collction of works of monk(僧侶文集). Moreover, as the social position and status of monk were changed, the social role of monk as a public man was actively requested. The Confucianist could remove the existing negative recognition about Buddhism and monk through the existence of monk army and role of monk army system. The monk army system improved the social position of Buddhism and monk by raising the status of Buddhism and monk. In addition, it has enlarged the Buddhism`s sense of being to society to become the driving force for the Buddhism existence since the late Joseon Dynasty. Monk army and monk army system could establish the motive to enable Buddhist and Confucianist to recognize each other in a new way. But, the monk army system that was established under the ruling ideology of Confucianism had many problems internally. In addition, there is a criticism in terms of the fact that it enlarged the temple`s burden for compulsory labor of monks. However, there is also a positive viewpoint that it secured the Buddhism`s sense of being to society under the ruling ideology of Confucianism. It should be admitted that the monk army system became the main mechanism to express the monk`s social role and historical sense of being through the reconsideration on the defense of country as engaged Buddhism. The effect of monk army system and its Buddhist historical meaning can be found with two positive and negative viewpoi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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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 문학(文學) : 죽서(竹西)의 시풍(詩風)과 창작 의미

          조연숙 ( Yeon Sook Cho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韓國思想과 文化 Vol.72 No.-

          문학은 인간의 생활과 사상, 감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우리는 문학을 통해 작가의 사상과 개성, 특성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죽서의 한시는 『죽서시집』에 146제 166수의 시가 전하는데, 시 세계가 맑고 차분하며 밝은 시상의 작품이 많지 않다. 죽서 시에 대한 기존 논의에서 죽서 시의 특성으로는 애상적 정조와 생활시의 담박함, 우수와 슬픈 감회, 여성성, 유소풍, 임하풍 등이 거론되어 왔다. 이 중 유소풍과 임하풍은 『죽서시집』의 서(序)와 발(跋)에서 서돈보와 김금원이 죽서의 성품을 서술하며 사용한 용어인데, 이러한 풍모는 그의 시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문학은 작가의 생활이나 사상, 감정을 반영한다는 기본 논리 아래 죽서의 시에 관한 기존 논의를 보완하려는 의도로 죽서의 시풍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죽서의 시 창작 의미에 대해 구명해 보았다. 죽서의 시풍은 크게 선비적 풍모와 은자적 풍모로 나눌 수 있다. 그는 평소 소학과 경사(經史), 옛 작가들의 시문을 탐독하여 학문적 소양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소양을 바탕으로 학문과 작시에 힘써 학문에 정진하고자 하는 선비적 풍모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는 세상과 떨어진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연과 함께 한적한 삶을 구가하는 은자적 풍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음 죽서의 시 창작 의미는 현실적 고뇌와 취흥의 승화 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소실이라는 신분과 병약한 몸으로 평생 그늘지고 외로운 삶을 살며 현실적 고뇌가 밀려올 때 이를 승화하기 위해 시를 지었다. 그리고 술을 접해 기분이 고양되었을 때도 그는 자신의 복잡한 심사와 그 흥을 승화하기 위해 시를 자주 썼던 것으로 보인다. This study studied the poetical style of Jookseo more in depth, and figured the meaning of poetry creation of Jookseo based on the basic logic that the literature reflects life, ideology, and emotions of the writer. The poetical style of Jookseo could be classified into classical scholar-like look and eremitic look. He had academical knowledge by usually reading scriptures, and poetries and proses of old writers. Moreover, he strongly revealed the classical scholar-like look to focus and concentrate on studies and versification. Plus, he well showed the eremitic look which pursues a secluded life with nature in his own space where is apart from the world. Furthermore, the meaning of poetry creation of Jookseo may be observed in 2 ways; realistic anguish and sublimation of conviviality. He had dark and lonely life with a status of concubine, and poor health. Through such life, he wrote poetries when realistic anguish struck him to sublimate it. Also, he often seemed to write poetries to sublimate his complicated mind and the pleasure when he drank and got lif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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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사학(史學) : 고려 경령전(景靈殿)의 건립과 동향

          윤기엽 ( Ki Yeop Yoon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韓國思想과 文化 Vol.69 No.-

          경령전(景靈殿)은 고려 왕실의 태묘(太廟)와 함께 조상숭배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시설이었고, 제사의 한 형태였다. 송(宋) 경령궁(景靈宮)의 영향을 받은 경령전은 선왕(先王)의 진영(眞影, 초상)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공간으로 현종 때 설립되었다. 경령전은 왕궁 내에 진영을 모신 진전(眞殿)의 한 형태로 불교식 예제이기도 했지만, 5묘제(五廟制)로 운영된 까닭에 유교식 예제가 가미된 매우 독특한 방식의 조상숭배였다. 따라서 경령전은 고려 왕실의 조상숭배 형태와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한대(漢代)에 기원을 둔 원묘(原廟)이기도 한 경령전은 현종이 친부모인 안종(安宗)과 효숙태후(孝肅太后)를 봉안하고자 재위 18년(1027) 쯤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경령전은 태묘와는 다르게 왕위계승이 아닌 혈연에 의한 직계 부모를 봉안한 점이 특징인데, 이것이 제16대 예종 때 태조를 비롯해 현 국왕의 직계 4대조(四代祖)를 5실에 모시는 형태로 정착되었다. 경령전의 운영과 기능은 고려의 역사와 더불어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고려중기 왕권 안정기의 경령전은 태조와 국왕의 직계 4대조를 봉안하며 왕실과 국가의 사당으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무인정권기 왕권의 추락과 함께 경령전의 운영이 순조롭지 못했고, 그 기능도 이전에 비해 현저히 축소되었다. 또한 원(元) 간섭기와 고려 말에는 경령전의 기본 형태는 유지되었지만, 그 기능이 크게 저하되어 최소한의 의식이 거행되는 정도였다. 경령전은 부침을 거듭하였지만 고려 멸망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고, 또 조선 초에는 문소전(文昭殿), 광효전(廣孝殿) 등에 영항을 주었다. Gyeongryeong-jeon(景靈殿)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institutions and ritual forms for royal family together with Taemyo(太廟) in Koryeo(高麗) Dynasty. Gyeongryeong-jeon, which affected by Gyeongryeong-gung(景靈宮) of Song(宋) Dynasty in China, was a room for deifying ancestors` portraits and performing ancestral offerings. It was built during the reign of Hyeonjong(顯宗) in Koryeo Dynasty. Gyeongryeong-jeon was a very unique form of ancestor worship because it was Buddhist ceremony by the Jinjeon(眞殿) deifying ancestors` portraits and Confucian ceremony by the system of performing memorial rite in honor of five direct ancestors. Therefore it has been the subject of the study by researchers in order to understand forms and contents of ancestor worship of Korea`s royal family. Probably Kyeongryeong-jeon, which originated in wonmyo(原廟) of Han(漢) Dynasty in China, was in Koryeo Dynasty, was built to enshrine dead parents, Anjong(安宗) and queen mother Hyosuk(孝肅) by king Hyeonjong in 1027 or so. It was one of the notable features of Gyeongryeong-jeon that direct parents was enshrined regardless of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unlike Taemyo. After that time four direct ancestors aside from Taejo(太祖) was enshrined in the five rooms of Gyeongryeong-jeon during the reign of Yejong(睿宗) of Koryeo Dynasty. The operation and function of the Gyeongryeong-jeon had been changed a lot depending on the age in Koryeo. The Gyeongryeong-jeon in the middle of Korea Dynasty played an important function as a shrine of state and royal family with enshrining Taejo and four direct ancestors of present king in the stable period of royal authority. But its operation did not go well and the function was eminently reduced with the decline of royal authority in the regime period of soldiers. And though its basic forms has been maintained in the Won(元) intervention period and the late Koryeo period, a few rituals were performed due to the heavy decline of its function. Gyeongryeong-jeon had been maintained until Koryeo was ruined in spite of all sorts of ups and downs over the history, and Munso-jeon(文昭殿) and Gwanghyo-jeon(廣孝殿) succeeded the one as a shrine for ancestor worship in early Joseon(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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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철학(哲學) : 삼론학에서 공성을 깨닫는 방법

          강찬국 ( Chan Guk Kang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韓國思想과 文化 Vol.69 No.-

          의 동일성을 사유의 원칙으로 삼는 반면 중국 삼론학에서는 두 개념의 차이성에 천착한다. 이 논문의 앞부분에서는 나카무라의 견해에 동의하는 차원에서 삼론학에서 공과 중도 개념의 차이성에 천착하는 이론의 대표적 실례인 三種二諦說을 분석한다. 삼 종이제설의 깃든 理敎釋의 의미는 제일의제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부정성이라 요약되는 바 제일의제인 공의 개념은 스스로의 진리값이 부정됨으로써만 비유비공인 불이중도의 실상을 구현하는 단계적 구조 속의 한 방편적 계기로서 정위된다. 이 논문의 뒷부분에서는 나카무라의 견해를 비판하는 차원에서 공성에 대한 삼론학적 이해가 용수의 원의를 얻고 있음을 주장한다. 삼종이제설에서 나타나는 공성에 대한 깨달음의 내용이란 단순히 제일의제로서 정위되는 공의 개념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제일의 공의 개념을 능동적으로 자기 부정하는 실천 그 자체를 의미한다. 삼론학에서는 용수가 주창하는 공과 중도의 동일성이라는 원칙을 제일의 공에 대한 자기부정적 실천의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According Nakamira Hajime, Chinese Sanlun`s interpretation on the relation between the emptiness(sunyata) and the middle way(Madhyama-pratipad) doesn`t coincide with Nagarjuna`s original meaning. In brief, Indian Madhyamaka has the principle of the identity between the emptiness and the middle way, while Chinese Sanlun inquiries the difference of the two concepts. The first half on this paper is the context of agreeing with Nakamura`s idea. This part is the analysis of San-zhong-er-di(three kind of two truths) theory, which shows the difference of the two concepts. The theoretical focus of the relation between Li(理, logos) and Jiao-di(敎諦, truth to be in accord with Buddha``s teaching) in San-zhong-er-di theory converges on continuous self-abnegation of the highest truth(paramartha-satya). The concept of the emptiness as the highest truth here is comprehended as a methodical concept embodying the concept of the middle way by self-negation. The second half is the context of disagreeing with Nakamura`s idea. This part is an a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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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사학(史學) : 주시경의 삶과 학문의 세계 삼국시대 명문을 가진 소금동불상 분석을 통한 고대인의 불교신앙생활

          박윤선 ( Youn Sun Park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韓國思想과 文化 Vol.69 No.-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현재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소금동불이다. 소금동불은 주로 불상만 독존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들 불상에는 뒤에 광배꽂이가 남아 있어 원래는 광배가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예가 상당수 있다. 현전하는 명문이 있는 소금동불상은 9건에 불과하지만 삼국시대 사람들이 주로 광배에 명문을 기록했던 점을 고려하면 광배를 잃어버린 소금동불 가운데에는 명문을 가진 불상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명문의 내용은 부모나 처 등 근친자의 추복을 기원하는 소원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현재 부모를 위해서 혹은 자신이 부처를 만나 불법을 듣기를 바라는 등 모두 개인적 소원 성취가 조상의 목적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삼국시대 사람들은 소금동불상을 만들면 그 공덕으로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상당히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소금동불은 주로 탑이나 사찰에서 발견된다. 불상이 탑 속에 사리장엄으로써 다른 장엄구와 함께 안치되었거나, 또는 사찰 어딘가에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유점사 본전인 능인보전의 주존으로 예배의 대상이 되어 온 53개의 소금동불상들, 사찰 혹은 금당의 구현인 석굴에 천불이 모셔진 예 등을 볼 때 현세 천불 가운데 하나인 연가7년명 등의 금동불상들이 사찰의 전각에 모셔져 예배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명문 소금동불상은 근친자의 추복을 위해 만들어진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들 추복을 바라는 소금동불상들도 53불이나 천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찰의 전각과 같은 일정한 장소에 모셔져 예경되었을 것이다. 이들 불상 중 석가상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는 사실은 당시 불교신앙에서 석가가 중심적 지위였던 점을, 그리고 명문에서 보이는 불교 이해의 불완전성은 소금동불 조성자들을 비롯한 삼국시대 사람들의 불교이해 수준이 아직 충분하지 못한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Small Gilt Bronze Buddha statues are found in pagodas as parts of the sarira or temples. Considering that the Yoo Jum temple``s 53-Buddha statues are enshrined in Yoo Jum temple as the main Buddha statues and became as an object of reverence and the example of 1000-Buddha statues`` cave of the Long Mun caves temples, the Yeon Ga 7th year``s inscription-Buddha statue and other 1000-Buddha statues have a high probability of being enshrined in a temple. Also the Buddha statues of praying for repose of the deceased, which take up the most part of miniature gilt bronze Buddha statues with inscriptions, were probably taken to a certain place in the temple and worshiped. This is similar to the examples of the 53-Buddha or 1000- Buddha. The reason why the construction of Won Chals(temples for praying for repose of the dead) were popular among the aristocrats is probably same as people without such financial abilities made small gilt bronze Buddha statues and prayed for the dead. These statues were enshrined in the temple and revered. From this we can see that in aristocrats or in peoples of lower social status, praying for the dead by building Buddha statues was popular, although there was a difference in the scale. The primary motive of building Buddha statues was to revere the dead, and the popularity of the Siddhartha statues as objects of wishing can be inferred from its high share of the Buddha stat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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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 철학(哲學) : 동북아제국인 신시배달국의 인효사상(仁孝思想)의 형성

          김익수 ( Ik Su Kim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韓國思想과 文化 Vol.72 No.-

          동북아에서 최초의 제국은 신시배달(神市倍達國)이다. 건국자는 한웅천왕(桓雄天王)인데 한국말(桓國末)의 지위리 한인천제의로부터 신표로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무리3,000명을 지원받아 배달국을 건국한 한웅(桓雄)은 개천하던 날에 조서(詔書)로 한웅육훈(桓雄六訓)을 내렸다. 요컨대 태백산에 신시(神市)를 정하고 배달국을 건국한 한웅천왕이 개천(開天)하던 날에 조칙(詔則)으로 이른 바 백성들에게 환웅육훈을 내려 국책교육화 하였다. 이는 바로 한국(桓國)의 한인(桓仁)의 ‘한인오훈(桓仁五訓)’을 계승한 것이다. 한웅천왕은 즉위와 동시에 신지혁덕에게 명하여 문자(文字)를 만들어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획기적으로 동북아의 문명전환을 가져왔다. 따라서 이때에 ‘한국의 정신’인 홍익인간 정신도 심어주고 우리 고유사상을 가르쳐 확고한 사상적 기초위에 仁孝교육을 국책교육으로 전민교육화(全民敎育化)하니 백성들이 희망을 갖고 서로 남을 크게 도우려는(弘益人間)정신이 넘치게 되어 미래지향적인 꿈을 갖게 되었다. 생각해 보건대 이러한 사상과 교육이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에게 더욱 확충하여 팔조교로 게승되어 전개되고 고조선의 제후국인 요,순을 거쳐 춘추시대의 공자에 인효(仁孝)가 핵심인 육경(六經)을 전숭된 것을 볼때에 유교(儒敎)의 원형(原形)이 된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The first Empire in the Far East is the Sacred-City Baidalguk. The founder was Heavenly Emperor Hanung. He received the protocol from the Heavenly Emperor Hanin in the late Hanguk. He sincerely responded this royal summon and created the Sacred City in Taibaik Mountain and established Baidalguk. At the day the Heavenly Emperor Hanung found the new nation, he announced the royal edict, ‘Six Lessons of Hanung’ as national education policy. This was the inheritance of the ‘Five Decrees of Hanin’ of the Hanin of Hanguk. As soon as he became an emperor, Hanung ordered Sinjihyeokdeok to invent a writing system to educate the people with Sacred Book of Heaven and Samilsingo. It was an epoch moment of the transition of the civilization of the Northeast Asia. Therefore, Hanung implanted a ‘Korean thought,’ the Men, Benefit for All. Hanung educated the people this traditional thought as the solid philosophical foundation for the education of benevolence and filial piety that was the national education policy. As a result, people had future-oriented dream with hopes and the spirit of helping each other. This thought and education became the origins of Confuc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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