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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기 부산의 중심 상점가와 도시문화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경남사학회 2014 역사와 경계 Vol.92 No.-

          원도심의 중심가로 다시 부흥하고 있는 광복동 상점가는 개항 전후 부산으로 몰려든 일본인들에 의해 ‘긴 길’이라는 의미의 장수통(長手通)으로 불리어지던 거리였다. 장수통은 다양한 상점들이 각자의 상점장식과 상품진열 및 손님 유인책을 통해 영업 활동을 전개했다. 장수통의 명물인 야점도 일몰이후 출현하여 주로 생활 잡화를 노상에 늘어놓고 떠들썩한 소리로 손님을 유인하며 번성을 구가했다. 또한 상점가는 가로등, 네온사인, 꽃전차 등 거리의 장식은 물론 공동의 매출 향상을 위한 연합 세일 등 다양한 행사를 정기적으로 펼쳤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연말의 대매출행사와 봄가을의 변천시(辨天市)였다. 특히 변천시는 거리 행렬의 하나마츠리(花祭り) 및 부산상공제(釜山商工祭)와 결합하여 ‘부산의 일본인들’ 이라는 식민주의 지역문화로까지 확장했다. 따라서 장수통 상점가는 새로운 근대적 인간군상이라고 할 수 있는 ‘모던보이’, ‘모던걸’, ‘유한마담’, ‘샐러리맨’들이 할 일 없이 산책하며 구경할 수 있는 근대적 거리로 변모했다. 하지만 이러한 도시문화는 부산의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에 따른 통제경제로 말미암아 상점가는 침체에 빠졌다. 상점가의 각종 경제활동은 축소 또는 폐지되는 반면, 지금까지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메카였던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은 전쟁과 동원에 관계된 정치 선전의 장이 되었다. 결국 1930년대까지 일본인들에 의해 주도된 장수통 상점가의 자본주의 소비문화 및 식민주의 지역문화는 전시체제기 인적, 물적 수탈을 위해 조선인들까지 포섭하는 제국주의 전쟁문화로 수렴되었던 것이다. Reviving as the central area of the origin downtown, the Gwangbokdong shopping district used to be called Nagadori(Naga street), which means a “long boulevard”, by Japanese people that gathered around Busan before and after it opened its port. Along Nagadori, various stores engaged in sales activities through their respective store decorations, product display, and customer attraction measures. One of its specialties, the night market emerged after sunset and was crowded with road shops that usually sold miscellaneous goods, attracted customers with clamor, and contributed to the prosperity of the night market. The shopping district decorated the streets with streetlamps, neon signs, and flower trains and regularly held a variety of events including alliance discounts to promote joint sales. Representing them were year-end grand bargain sale and spring and autumn Bentensi(Benten market), which was in particular combined with the street parade Hanamatsuri(flower festival) and the Commerce and Industry Festival of Busan and expanded to the local colonial culture of “Japanese people in Busan”. The shopping district of Nagadori thus transformed itself into a modern venue where a new modern group of people including “modern boys”, “modern girls”, “leisured women”, and “salarymen” could stroll down and do sightseeing, doing nothing particular. Such an urban culture, however, was for Japanese people in Busan. Entering the latter half of the 1930s, the shopping district fell in recession due to controlled economy under the war regime. All types of economic activities were either reduced or abolished in the district, and Minakai Department Store, which had been the Mecca of capitalist consumption culture, became the place of political propaganda related to war and mobilization. The capitalist consumption culture and local colonial culture of the Nagadori shopping district led by the Japanese until the 1930s eventually converged into the imperialist war culture encompassing even the Joseon people for human and material exploitation during the war re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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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화’와 국내외 자료의 현황 및 활용 방안

          전성현 ( Jeon¸ Sung-hyun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21 항도부산 Vol.41 No.-

          부산은 1876년 개항에 의해 근대 도시로 변모되기 시작해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이라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건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부산의 근현대사 중 일부를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으로 범주화하고 이를 지속가능한 세계유산으로 ‘유산화(Heritagization)’ 하려는 시도는 가치 있다. 즉, 유산을 기존의 문화재보호법 하의 국가, 민족, 지역에만 한정하지 않고 유산과 함께 살아왔고 살아갈 사람은 물론 보편적 인간과 세계로 확장하고자 하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런데 세계유산 등재라는 목적 때문에 유산의 긍정적인 점만 부각시키고 관련 자료만 선별적으로 찾는다는 점에서 유산의 확장과 가치를 제한하고 있다. 더군다나 ‘유산화’의 목적이 ‘피란수도(열전시대)’에서 ‘평화도시(평화시대)’로의 전환이라면 열전의 아픔을 드러내는 기억과 유산을 애써 모른 채할 것이 아니라 전면화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반성적 성찰과 새로운 미래로의 도약을 위해서도 유산의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을 함께 드러내어 유산의 확장된 가치와 내용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피란수도 부산의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모습을 새롭게 조사 발굴하여 그 가치와 의미를 반성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당대의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종합해 교차 분석하는 한편, 새로운 자료는 다시 조사 발굴해야 한다. 유산의 지속가능성은 유산의 범주 확장은 물론 가치의 확장과도 상호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들 자료의 발굴과 수집을 토대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장치를 통해 활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지속적인 국내외 자료의 추가 조사·발굴 및 수집이 이루어져야 한다.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국내외 자료군 별로 키워드 색인 및 해제(번역)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이어서 자료의 원문까지 디지털화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자료군별 데이터베이스를 집대성하는 한편, 유산별 종합 데이터베이스(개요, 내용, 자료)를 구축한다. 궁극적으로는 이와 같은 정형의 데이터베이스는 물론 비정형의 데이터를 모두 망라한 빅데이터 체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Busan began to be a modern city gradually by the opening of the port in 1876, and became the same form as now through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the Korean War. In this sense, the attempt to categorize some of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Busan as 'the heritage of Wartime capital Busan' and to 'Heritagization' it as a sustainable world heritage is meaningful. In other words, it is meaningful to expand the heritage to the universal human being and the world as well as the person who has lived with the heritage, not limited to the nation, state, and local under the existing Cultural Heritage Protection Act. However, because of the purpose of listing the World Heritage, it emphasizes only the positive points of the Wartime capital and restricts the expansion and value of these heritages in that they have only found the facts related to them selectively. Moreover, if the purpose of Heritagization is to switch from the Wartime capital (the heat war era) to the Peace City (the peace era), it is necessary to fully embrace the memories and heritage that reveal the pain of war. For reflection on this and a leap forward to a new future, it is necessary to reveal the positive and negative points of the Wartime capital and to include them in the value and contents of the heritage. Then, it is necessary to investigate and discover the multi-layered and multi-faceted aspects of the Wartime capital and to confirm the value of heritage and heritage that can reflect on its value and meaning. For this purpose, it is necessary to cross-analyze the data that can confirm the facts of the time more specifically, and to investigate new data again. Sustainable Heritagization requires not only expansion of heritage but also expansion of value, so it is necessary to utilize it through institutional devices based on the discovery and collection of these data. First, additional investigation, excavation and collection of domestic and foreign data should be conducted continuously. And the collected data should be indexed and released by data groups. Then, based on the Database that adds the original text of the data, the databases by data group should be made into a digital archive or digital library, and then the Big Data system should be constructed by converting them into comprehensive databases by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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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6년 ‘개항’의 개념적 의미와 역사적 성격

          전성현 ( Jeon Sung-hyun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20 항도부산 Vol.39 No.-

          개항이라는 용어는 1876년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 체결과정에 비로소 사용된 새로운 용어였다. 그렇다면, 이 용어가 지닌 개념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를 위해 개념사 연구방법론 가운데 하나인 ‘의미장’ 분석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미장 분석에 의하면, 개항은 만국공법에 기초한 조약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자유로운 통상, 거주, 통행이 가능한 공간과 그에 따른 외교공간의 출현이 가능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의미는 1876년 개항을 통해 일부 관철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뒤늦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의미는 개항의 개념 속에 지속되었던 것이다. 한편, 1876년 조선의 개항을 둘러싼 조일 간의 조규 체결과정을 살펴보면, 개항의 역사적 성격도 확인할 수 있다. 개항을 규정한 조규 등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일본에 의해 요구되었지만 강제적으로 체결되었다거나, 일본의 힘의 우위 속에서 조선에 불평등하게 체결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측은 이미 그리고 어느 정도 일본의 요구와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대비가 완벽하지 않았더라도 가능한 한 조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 개항을 규정한 조일수호조규와 그 부속 문서들에서는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지도 조선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지도 않았다. 조선의 개항, 즉 부산의 개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개항을 1407년으로 올려봐야 한다는 주장은 그 의미와 성격에서 역사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07년 개항설의 첫번째 근거가 개항 개념의 일반화와 탈시간성이며, 두 번째 근거가 1876년 개항의 강제성과 불평등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한다면, ‘개항’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근대적 개념이며 그 의미도 만국공법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전근대의 역사적 상황을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1876년 개항의 성격을 강제성과 불평등성에 두는 것도 단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입장에서 1876년 개항은 일본의 요구이긴 하지만 최대한 자국의 이해를 보장하려고 하는 움직임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The term ‘open port’ was not used before 1876. In other words, the term open port is ‘modern language’. Then, what is the historical meaning based on the conceptual meaning of this term? It is necessary to look into 'the semantic fields', one of the research methodology of conceptual history. In this way, the open port was made by a treaty based on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萬國公法). Also, it can be said that it has historical meaning that free space of trade, residence, and passage and the appearance of diplomatic space accordingly. Of course, this meaning was partly achieved through the open port in 1876, but the rest was not so and it was done over time. However, such meaning continued in the conceptual meaning of the open port. In addition, the treaty concluded in the period around 1876 was not by Japanese forced force or by unequal conclusion to Joseon, as it has been known so far. The Joseon side had already been aware of Japan's intentions to some extent. Even if there was not enough preparation for him, he responded as actively as possible. Therefore, in the process of signing the treaty surrounding the open port, we tried to ensure our own equality by responding to the unilateral interests of Japan as much as we prepared. The open port was done in the same way. If so, the claim of '1407 Opening Port', which is currently being raised in some parts, is because it misunderstood the conceptual meaning of the opening port and the nature of the opening port in 1876. Again, ‘open port’ is a modern language and its meaning is also based on international law, so it can not be used as a concept referring to the historical situation of premodern times. In addition, the open port in 1876 can not define the personality only in the negative aspect of coercion and inequality. Rather, it can be said that there was a strong movement to guarantee independence and equality from the standpoint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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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租界’와 ‘居留地’ 사이

          전성현(Jeon, Sung-Hyun) 한일관계사학회 2018 한일관계사연구 Vol.62 No.-

          부산의 개항과 개항장에 설치될 일본인 거주지를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은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먼저, 조선과 일본은 개항과 더불어 개항장에 설치된 외국인 거주지를 ‘조계’와 ‘거류지’로 대별하여 사용했다. 일본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류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과 달리 조선은 공식적인 명칭으로 줄곧 ‘조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조계’를 사용하지 않고 ‘거류지’를 사용한 원산과 마산의 경우, 모두 일본 측의 조약문을 그대로 한역한 것으로 이 또한 조선 측이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 일본이 사용한 용어였다. 둘째, ‘조계’와 ‘거류지’의 용어 사용은 단순한 번역의 차이가 아니라 성격의 차이를 내포한 것이었다. 조선이 concession 방식의 ‘조계’ 설정을 주장하고 관철시킨 것은 교섭국 일본의 강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settlement 방식의 ‘거류지’가 추구한 자유로운 거주와 통상을 반대하고 이를 제한하고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었다. 셋째, 일본은 왜관과의 연속선상에서 ‘거류지’를 설정하고 이를 근대적인 자유로운 거주통상지로 확대하고자 했다. 반면 조선은 구래의 왜관이 지닌 거주와 통상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측면을 적극적으로 이어받아 조계를 설정하고 일본의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조치로 활용했다. 끝으로 이상의 의미를 지닌 ‘부산구조계’의 설치는 조선 측의 ‘定界의 防限’으로써 규정되었고 이후 ‘조계’라는 명칭의 고수와 일본인 거주지의 독점 및 확장에 대응하는 경찰소와 감리서 설치, 그리고 조계의 잡거지로의 전환을 통한 각국조계화 등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이 조계의 정리 및 조계 밖으로의 토지침탈과 법제화(조계 밖 10리의 토지영차), 러일전쟁과 이에 따른 조선의 半식민지화, 그리고 1906년 개항장의 행정 일원화에 의한 부산이사청을 설치함에 따라 막을 내렸다. 이때부터 조계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전관거류지’가 공식화되었던 것이다. Joseon and Japan showed differences in their positions around the opening of Busan and the Japanese residence to be installed at the port. First, Joseon and Japan used foreign residents to be installed at the port of opening as ‘Concession’ and ‘Settlement’. In the official Joseon treaty, the name ‘Concession’ has been used consistently. The treaty of foreign residence in Wonsan and Masan, in which the term ‘Settlement’ was used without using the term ‘Concession’, was a Japanese term, not a term used in Joseon. Second, the use of the terms of ‘Concession’ and ‘Settlement’ was not a difference in simple translation, but a difference in personality. It was not by the compulsion of the negotiating country Japan that Joseon insisted and carried out the ‘Concession’ setting of the Concession method. It was a measure to oppose, limit and defend free residence and trade pursued by a Japanese ‘Settlement’ of the settlement method. Third, Japan established a ‘Settlement’ on a continuous line with the Waegwan (倭館) and tried to expand it to a modern, free residential commercial area. On the other hand, Joseon actively succeeded the Waegwan, which could limit residence and trade freedom, and set it as a "Concession". Joseon used the Waegwan as a measure against Japanese colonialism. Finally, the Joseon government established ‘the Busan Port Concession’ to set up and prevent boundaries, and then worked on establishing the Police Station and the Superintendent Office in response to the monopoly and expansion of the Japanese residence, and to be a concession of the nations. Nevertheless, Japan first organized the interior of the concession, and then it invaded the land from outside the concession and legislated it. Furthermore, the concession was closed due to the Russo-Japanese War, the colonialization of Joseon,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Busan Isacheong (釜山理事廳) in 1906.From this time on, the term ‘Concession’ has disappeared and the `all-round Settlement` was formul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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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말기 경남지역 근로보국대와 국내노무동원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경남사학회 2015 역사와 경계 Vol.95 No.-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일제가 전개한 식민지에서의 인적, 물적 자원의 총동원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의 제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특히 조선 안 노동력 동원은 운동 차원에서 비롯되어 법에 의한 근로보국대로 수렴되고 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전황이 더욱 불리해지고 일본마저 전쟁터가 되자 일제는 종래의 근로관계 5법령을 종합하여 隊조직과 개인까지 ‘몽땅’ 동원토록 했다. 이른바 정신 총동원에 의한 ‘근로봉사’에서 생산력 확충의 ‘근로협력’을 거쳐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물자의 조달과 국가총동원에 필요한 업무의 ‘근로동원’으로 귀결되었다. 학생 노동력 동원도 일반의 동원과 함께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일반인과 유사하게 근로보국대에 의해 동원되다가 학교 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중등학교 이상 학교에 별도로 학교총력대를 두고 이를 통해 군사훈련과 노동력 동원에 종사토록 했다. 하지만 1943년부터 내려진 일련의 학생 동원조치들과 1944년 10월 ‘학도근로령’은 ‘근로가 곧 교육’이라는 교육이념 아래 학교보국대로 일원화하고 원칙적으로 1년 전체를 동원하도록 법제화했다. 이때부터 학교에서의 교육은 완전히 사라졌고, 1945년 전시교육령의 제정과 함께 준군사조직인 ‘학도대’로 귀결되며 병력 동원으로 이어졌다. 조선 안 노동력 동원의 흐름은 경남지역에도 거의 그대로 관철되었다. 1938년 부터 중등학교 3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한 학교근로보국대는 점차 늘어났고 이후 국민학교까지 확대되어 1년 동안 수시로 식량 증산과 관련된 피뽑기, 종자채취 등의 작업에 집단 동원되었다. 한편 이 지역에서도 학교총력대가 결성되었고, 1943년부터 학도근로령으로 수렴되던 전쟁 말기에는 아예 학교에서의 수업을 포기하고 통년 동원으로 노동현장에 내몰렸다. 부산은 부두로 말미암아 군수물자의 결전수송을 위한 하역작업에 수시로 동원되었고 군수공장과 포대진지 구축사업 등에도 동원되었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은 후방 군사기지로서 비행장이 많이 건설되었는데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비행장 건설에 집중적으로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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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동해선(東海線) 3선(線)과 지역

          전성현 ( Jeon Sung-hyun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7 石堂論叢 Vol.0 No.69

          일제강점기 동해선의 계획과 건설과정은 조선총독부의 조선 산업개발과 한반도 종관철도라는 ‘제국의 이해’와 함께 3선 연선지역, 즉 강원도, 경상남북도 지역의 개발과 그 수혜로서 원산, 대구, 부산지역의 번영이라는 ‘지역의 이해’가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전시체제에 따른 조선총독부의 철도건설 우선권이 북부조선으로 이동하면서 차일피일 미뤄진 결과, 동해선은 조선의 산업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제국과 지역의 이해에 복무할 수 있는 3선 체제의 지역철도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런데 중부선과 남부선의 연결은 거점 지역 간의 경쟁을 불러일으켜 종속 관계로 재편시키는 등 ‘지역의 이해’도 큰 틀에서는 ‘제국의 이해’ 관계 속 산물이었다. 이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동해선 3선의 운영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우선 동해선은 뒤늦은 개통과 3선 모두 연결되는 간선 형태가 아니라 지선에 그쳤기 때문에 운영 면에서 간선철도로서의 식민지적 역할은 상당히 제약되어 있었다. 5대 간선을 제외하면 여객수송이 화물수송보다 두드러졌는데, 이는 지역교통과 관광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여객수송에서 새롭게 ‘제국의 이해’에 복무하는 ‘관광식민주의’적 역할을 부분적으로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화물수송에서는 북부선을 통한 임산물, 수산물, 광산물의 유출과 남부선을 통한 미곡 등 농산물의 유출, 그리고 전 선로의 공산품 유입이 두드러졌다. 이는 동해선 개통이 지역개발과 문명의 확산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농촌 경제의 도시 종속과 함께 식민지 경제의 제국 종속을 심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The planning and construction process of the Donghae lin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reflected the ‘understanding of the empire’, which was the industrial development and the railroad on the Korean peninsula of the Chosun Governor General. And it reflected the ‘understanding of the local’, which is the prosperity of Wonsan, Daegu, and Busan as the development and benefits of Gangwon-do and Gyeongsang-do. However, after the Manchurian Incident, the Chosun Governor General decided to build the railway to North Korea, and the Donghae line was delayed. As a result, Donghae line has stayed in the three-way local railway that can partly serve the empire and local understanding in industrial development. However, the connection between the Jungbu Line and the Nambu Line led to a rivalry between the base cities and reorganized into subordinate cities. This means that the ‘understanding of the local’ was the product of ‘understanding of the empire’. Although this is limited, the same was true for the operation of the third line of the Donghae line. First, the Donghae line was opened not by the connected trunk line but by separate branch lines, so the colonial role of the trunk line was insignificant in terms of operation. Passenger traffic, however, was more prominent than cargo traffic except for the five trunk lines, which was due to local traffic and tourism. Particularly, it can be said that it was partly responsible for the new role of 'tourist colonization' in passenger transport. On the other hand, in cargo transportation, the outflow of forest products, aquatic products, minerals through the Bugbu Line, the outflow of agricultural products through the Nambu line, and the influx of industrial products from the whole railway stand out. In the end, the opening of the Donghae line is also a process of regional development and the spread of civilization, but as a result, it deepened the subordination of the rural economy or the imperial dependency of the colonial econo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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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자와 조선 - 일제시기 大池忠助의 지역성과 ‘식민자’로서의 위상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 한국민족문화 Vol.49 No.-

          ‘식민자’ 또는 ‘풀뿌리 식민자’로 평가되는 재조일본인 오이케 츄스케는 1856년 쓰시마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인 1875년 부산으로 건너와 대일무역에 종사하면서 친형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무역 및 고리대업은 물론이고 일제의 조선 침탈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며 조선의 출입구인 부산과 오이케여관을 통해 일본군부와 관계를 맺고 토지구매, 군수물자조달을 통해 자본을 확장했다. 개인사업과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오이케는 강고한 인적네트워크도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기반과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확대해 나갔다. 그가 맺은 인적네트워크는 제국주의 일본의 핵심적인 인사인 관료와 군인은 물론, 일본 본국의 재벌 및 경제인, 그리고 조선 또는 부산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 등이었다. 부산에서 쌓은 인적·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오이케는 경제활동과 공직활동을 통해 ‘부산의 오이케’에서 ‘조선의 오이케’로 나아갔다. 우선 그는 개인경영의 11개 부문을 토대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동시에 부산 및 조선의 각종 회사와 조합의 설립과 경영에 뛰어들어 1929년 사망 때까지 부산 및 조선재계의 원로로서 활동하였다. 더불어 지역사회의 ‘공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업회의소, 부협의회(도평의회), 학교조합 3단체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면서 향리인 쓰시마에 입후보하여 당당히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이케는 ‘부산의 오이케’를 넘어 ‘조선의 오이케’로 표상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공한 식민자로 위치 지워졌다. 하지만 식민지에서의 성장과 제국주의 내의 위상은 식민지 조선이라고 하는 공간, 특히 부산이라는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여기서 본국 일본인과 식민지 일본인 간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그 독특한 위치도 드러난다. Considered as a "colonizer" or "Grassroots colonizer," Oike Chusuke, a Japanese colonial settler, was born in Tsushima in 1856 and moved to Busan in 1875 when he became 20. In Busan, he started to build his foundation by the assistance of his elder brother, engaging in trade with Japan. Like most Japanese people that made growth in Chosun, he conformed to the situations of the times including Japan"s invasion of Chosun as well as smuggling and loan sharking and accumulated capital by forming relations with the Japanese military through Busan with its geographical and spatial advantages and Oike Ryokan, purchasing land, and delivering war supplies. He established a solid human network based on his personal business and Busan with its geographical and spatial advantages, further solidifying and expanding his foundation and position. His human network encompassed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soldiers, who were the core figures of imperial Japan, the financial cliques and businessmen of Japan, and Japanese and Chosun people residing in Chosun or Busan. Based on his human and material foundation, he evolved from "Oike of Busan" to "Oike of Chosun" through economic activities and public duties. He first managed his economic activities based on his 11 personal establishments and then got involved in the foundation and management of all kinds of companies and associations in Busan and Chosun around the 1900s. He served the financial community of Busan and Chosun as an elder until 1929 when he passed away. He was also an active, central figure in the chamber of commerce(商業會議所), Pu-council(府協議會), and school corporation(學校組合), which were part of "public duties" during the Japanese rule. His activities of "public duties," in fact, expanded to Japan beyond Busan. In 1914, the Japanese colonial settlers lost their autonomous body after the abolition of the Georyumindanje(居留民團制). Once feeling a need for political activities in Japan in order to promote their stability and expand their foundation in colonized Chosun, they started to advance to the Japanese Imperial Diet. Joining the flow, Oike was elected in his hometown Tsushima and finally advanced to the Japanese Imperial Diet, which is why he was represented as "Oike of Chosun" beyond "Oike of Busan" and positioned as one of the representative successful colonizers in Chosun. However, his growth in the colonized country and his status within imperial Japan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space of Chosun or more particularly Busan. Here, the differences between Japanese people from Japan and those from a colonized country become obvious along with their unique position. They faced their contradictory position between "colonizers" and "residents of colonized land" in reality through the Japanese rule, which is why the contradictions of imperialism also took place within the inside.

        • KCI등재

          일제시기 "만주" 개념의 역사성과 부정성

          전성현 ( Sung Hyun Jeon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0 石堂論叢 Vol.0 No.47

          식민화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조선인들은 부득이 만주로 이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고 이에 대한 식민지 지식인들의 생각은 만주를 둘러싼 개념을 구체화했다. 먼저 단순한 지리적 용어로 사용되면서 황량한 광야로 인식되어 거의 민족의 외부인 망명지로 개념화된 만주는 점차 조선인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조선과 상상적으로 동일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과정의 심화는 만주를 고토로 인식하는 역사상의 상징적 동일시로 확장되고 이를 통해 민족주의적 시각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더불어 점차 만주에서의 민족적 갈등이 출현하기 시작하자 만주를 조선을 대리 표상하는 민족의 수난처로 의미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이러한 인식은 확장되었고 만주라는 개념은 조선과 상징적으로 동일한 민족의 내부로 자리매김하였다. 그 개념화의 중심에는 재만 조선인이 있었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과 괴뢰 만주국의 수립은 기존의 만주 개념의 의미화를 다른 곳으로 밀고 갔다. 즉 문명론과 개척을 통한 만주의 유토피아적 인식이 그것이며 이는 사실적인 측면이 아니라 개념이 사실을 추동한 측면이 강했다. 이에 따라 식민주의를 점차 내면화한 지식인들은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적(의사 제국주의적) 시각을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그 전면에 이제는 자본가들을 내세웠다. 이 지점에서 그동안 만주 개념화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재만 조선인은 점차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또 다시 만주를 둘러싼 개념의 변용이 이루어졌다. 특히 1940년을 전후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시각이 아니라 국제주의적 측면에서 만주를 사유하고자 하는 또 다른 측면의 변화가 엿보인다. 우선, 만주를 ‘왕도낙토’로 만들려고 하는 설립취지인 ‘민족협화’가 수사적이고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순진한 생각임은 만주국의 전개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만주국과 동의어로 의미화된 ‘민족협화’라는 용어는 소속된 민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과의 협조·협력을 통한 국제주의로의 전환도 가능한 이데올로기였다는 점에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 왔다. 특히 ‘자치주의’의 강조가 그것인데 5개 민족의 자치가 구현된다면 민족의 안위는 물론이고 민족 간의 협조·협력을 통한 국제주의로까지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였다. 그렇다면 낭만적 유토피아라고 하는 만주 개념은 의사 제국주의에 기반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심화와 대륙 침략을 원활하게 하는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정치적 수사가 확대되면 될수록 지속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며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을 저지하고 균열을 내는 지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In process of colonialization, Chosun people were continued to unavoidably emigrate to Manchuria, so ideas of colonial intellectual were taken concrete shape surrounding Manchuria. First, Manchuria that realized a national place of exile to a vast wilderness as mere geographical term, begun to imaginative regard as Chosun. In such process, national perspective, regarding Manchuria as chosun`s territory in expanded Imaginary identification, begun to taken place. Meanwhile, in Manchuria national conflict begun to regard Manchuria as Chosun where was a place of national ordeal. Especially, such perspective was expanded for Manbosan affair(萬寶山事件). so the concept of Manchuria was fixed to regard Manchuria as Chosun where was a place of national ordeal. Chosun residents in Manchuria was at center of such conceptualization. But, in September, 1931 the Manchurian Incident and establishment of Manchukuo shifted from existing image of the concept of Manchuria to something else. There was utopian perspective toward civilization and pioneer. There has much of aspect conception be inspire real than real aspect. Therefore, gradually internalized colonialism, intellectuals begun to be strongly show imperialism perspective, and had stand for capitalist in front. In this point, Chosun residents in Manchuria who had performed a cental role of conceptualization, were excluded from discussion. Once again, there was achieved the change of the concept surrounding Manchuria. Particularly, into a whirlpool of war about 1940, there were shown another change of the concep to think of Manchuria in internationalism aspect, not nationalism and imperialism aspect. Above all, National concord that has purposed to make Manchuria to Heaven of Righteous government, don`t only restrictive but also ingenuous idea. But it was meaning in intellectuals of colonial Chosun that was not only maintained nation but also be could changed ideology to internationalism through cooperation and collaboration with nation. Especially, it was that emphasis on autonomism, if it was embodied autonomy of five nations, cooperation and collaboration between nations were possible to change to internation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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