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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하 조선 상업회의소의 철도부설운동(1910~1923)

          전성현 ( Sung Hyun Jeon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08 石堂論叢 Vol.0 No.40

          강제병합 직후 철도부설은 조선의 부원개발과 식민통치기반의 확보 및 지역 경제기반의 확대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관설철도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설철도는 각 지역 경편철도회사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에서의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고자 하는 조선 내 일본인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인 자본가들의 지속적인 설립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지역의 일본인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철도부설요구와 이를 받아들인 조선총독부의 관설철도부설과 경편철도조사 및 보조정책은 경부·경의선의 부설이후 늘어나지 않던 철도 선로를 폭발적으로 늘려 1,000마일 시대로 접어들게 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의 재정독립계획으로 잠시 주춤하던 철도부설 등 조선의 산업개발은 1차 대전의 호황에 직면한 일본자본이 차츰 조선에 진출함에 따라 다시 본격화되었다. 더불어 상업회의소는 「조선상업회의소령」을 통해 일본인 중심으로 재편하고, 조선상업회의소연합회를 조직하여 산업개발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였다. 조선 상업회의소는 특히 평원선의 부설과 지역 경제선인 사설철도의 부설 및 보조금지급을 조선총독부와 일본정부에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상업회의소의 요구와 주장은 평원선 부설 및 사설철도회사의 설립과 면허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곧이어 전후공황이 일본을 덮치자, 조선의 산업개발은 바로 침체에 빠졌다. 더군다나 3.1운동이라는 조선인들의 저항에 직면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안정적인 통치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통치행정비에 더 많은 예산을 투여하였다. 조선 상업회의소는 전후 공황과 3.1운동으로 인한 조선 산업개발의 지연·중지에 대해 논의하는 한편, 그 대응책으로 조선철도망의 속성을 주장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정책 수립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였다. 그들의 요구는 산업조사위원회의 설치로 이루어졌고, 산업조사위원회의 개최로 조선철도망 속성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통치안정화를 위한 치안유지와 본국을 위한 산미증식계획에 몰두하였다. 조선 상업회의소가 요구하던 조선 산업개발은 점차 활기를 띄기는커녕 침체일로에 빠졌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의 철도부설계획을 기다릴 수 없었고, 직접 철도부설계획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의 산업개발을 둘러싼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조선 상업회의소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와 조선사설철도협회와의 논의를 거쳐 `4大 要項` 중 첫 번째인 `철도부설 10개년계획`을 수립하도록 추동하였다. 연합회의 `철도부설 10개년계획`은 남북을 연결하는 경부·경의선(복선)과 동해안선이라는 두 종관철도와 동서를 연결하는 평원선과 경릉선이라는 횡단철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이 계획은 관사철도의 부설과 개량을 주장했던 기존의 요구사항과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국유철도의 선로와 그 필요한 경비를 제시하는 한편, 사설철도의 경우 보급금의 한도를 2배로 증가시켜 제출하고 있는 점, 그리고 장차 부설할 새로운 철도까지 선정하여 구체적인 경비까지 제시한 점에서 진일보한 계획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상업회의소의 `철도부설 10개년계획`은 적극적인 `東上運動`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의 긴축재정과 관동대지진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이후 `4大 要項` 중 철도부설에 그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들의 적극적이고 일관된 정치적 활동은 조선총독부와 일본정·재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향후 조선철도의 중심계획인 `朝鮮鐵道 12年計劃`이 수립될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Immediately after Chosun`s annexation into Japan, Japanese capitalists began to request the construction of railroads in the colony. Accepting the reques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hosun laid state-owned railroads and, through researching existing light railways and taking auxiliary policies, constructed the Gyeongbu Railroad Line. This explosively increased the total railroad length of Chosun to 1,000 miles.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Chosun, including railroad construction, had been stagnated for some period because of the financial independence scheme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hosun. But it began to be driven in earnest as Japanese capitalists who benefited from economic booming brought by the 1st Word War rushed to Chosun. Under this circumstance, Chosun Chamber of Commerce was restructured with a majority of its members consisting of Japanese businessmen in accordance with 「the Ordinances of the Chosun Chamber of Commerce」. Then it organized Chosun Association of the Chmabers of Commerce which in turn actively made requests for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the colony. The regional chambers of commerce and the association insisted that the Pyeongwon Railroad Line and private railroads, which might contribute to regional economy, should be constructed and that government subsidies should be given to the construction. This greatly influenced the construction of the Pyeongwon Railroad Line and the establishment and licensing of private railroad companies. But then, Japan fell to the state of economic panic. In the aftermath of the situation,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Chosun was delayed again. After facing the resistance of the people of Chosun, especially,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hosun invested more budgets to set stronger fundamentals for the sustainable ruling of the colony. The association discussed a possible measure against the delay or suspension of Chosun`s industrial development brought by the post-war economic panic of Japan and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and insisted the rapid construction of railroad networks around Chosun. In addition, it requested the Janapese colonial government to take a policy to fundamental solve problems related to the colonial industrial development. This l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Industrial Research Committee. The meeting of the committee formed a consensus that railroad networks should be built up throughout Chosun as earliest as possible, an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hosun started a preliminary survey for the network construction. But in fact,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devoted itself more to the stable ruling and public order maintenance of Chosun and implementing its plan for increasing rice production for the mainland Japan. This made more stagnated Chosun`s industrial development, requested by the association, rather than promoting it. The association couldn`t wait for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s railroad construction plan any longer, so it made another railroad construction plan of its own. Seeking towards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Chosun, the association consulted with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Chosun and Chosun Association of Private Railroads and finally established `the 10 Years` Plan of Railroad Construction(鐵道敷設 10改年計劃)` as the first of `the 4 main principles(4大要項)` of the colonial industrial development. According to the plan, two south-north railroads, the Gyeongbu·Gyeongeui(double track) and the East Sea Railroad Lines and two east-south railroads, the Pyeongwon and the Gyeongreung Railroad Lines were scheduled to be constructed. Despite `the Dongsang Movement(東上運動)` was actively driven, `the 10 Years` Plan of Railroad Construction` by the association failed to be properly implemented because of the Japanese government`s budget cuts and Kanto Earthquake Disaster. Since then, however, the association put its focus on a few railroads that was most urgently needed according to `the 4 main principles` as above mentioned. Later, positive, consistent political activities by the association contributed to establishing `the 12 Years` Plan of Railroad Construction(朝鮮鐵道 12年計劃)` and considerably completing railroad networks of Chosun which had been driven by the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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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확장의 식민성과 지역민의 동향

          전성현(Jeon, Sung-Hyun) 역사문화학회 2016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19 No.1

          개항을 통해 ‘분리’를 기반으로 한 공간의 ‘외부적 식민화’ 과정을 겪은 부산은 강제 병합에 의해 다시 도시(부산부)가 농촌(동래군)을 ‘포섭’하여 내부적으로도 식민화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 과정은 도시계획을 토대로 한 부역의 확장이었다. 부산부 일본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진행된 도시계획은 애초, 동래군 서면(12개리)으로의 확장을 포함한 계획구역과 구역내 주거 · 상업 · 공업지역의 설정, 그리고 교통 · 항만 · 위생시설(상하수도) 등 이른바 ‘부산도시계획서’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관련 법령의 미비로 뒤늦게 조선시가지계획령의 반포와 1차 부역확장을 포함한 ‘부산시가지계획결정’으로 완성되었다. 새로운 시가지계획은 이전과 달리 제국의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서의 공업지대로 제한되었다. 부산부의 일본인들은 다시 부회와 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공업지구를 동래와 해운대로 확장할 것을 주장했다. 그 결과, 1942년 10월 1일부로 동래읍을 포함한 동래군 거의 전부를 포함하는 2차 부역확장이 이루어졌다. 1, 2차에 걸친 부역확장에 대해 부산부 일본인사회는 동래군으로의 부역확장을 이상적인 도시화의 방향으로 생각하며 지속적인 부역확장을 도시계획의 수립과 함께 요구했다. 그 결과 1차 부역확장을 통해 동래군 서면과 송도를, 2차 부역확장을 통해 동래읍과 해운대 등 동래군의 대부분 지역을 부산부에 포함시키는데 힘을 보탰다. 1차 부역확장의 편입 대상인 서면민은 대다수가 농민인 조선인들로 부산부와의 합병이 끼칠 불이익을 두려워하며 편입을 한시적으로 반대했다. 그리고 서면번영회를 설립하고 스스로 독자적인 발전책과 시가계획을 수립했지만, 결국 부역에 포함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2차 부역확장의 편입 대상인 동래읍민은 조선인을 중심으로 부산부의 부역확장에 대해 독자적인 도시화로 대응했다. 이러한 노력은 읍내의 시구개정사업 등 도시기반시설의 확충과 동래온천의 읍영화를 통해 완성되는 듯했다. 하지만 온천장을 통제하지는 못했고, 역시나 부역확장이라는 거센 파고를 견뎌내지 못했다. 그 결과, 희망사항 몇 가지와 함께 역사 있는 ‘동래’라는 명칭만이라도 남기를 바라며 어쩔 수 없이 부산부에 강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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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말기 경남지역 근로보국대와 국내노무동원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경남사학회 2015 역사와 경계 Vol.95 No.-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일제가 전개한 식민지에서의 인적, 물적 자원의 총동원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의 제정과 함께 시작되었다. 특히 조선 안 노동력 동원은 운동 차원에서 비롯되어 법에 의한 근로보국대로 수렴되고 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전황이 더욱 불리해지고 일본마저 전쟁터가 되자 일제는 종래의 근로관계 5법령을 종합하여 隊조직과 개인까지 ‘몽땅’ 동원토록 했다. 이른바 정신 총동원에 의한 ‘근로봉사’에서 생산력 확충의 ‘근로협력’을 거쳐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물자의 조달과 국가총동원에 필요한 업무의 ‘근로동원’으로 귀결되었다. 학생 노동력 동원도 일반의 동원과 함께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일반인과 유사하게 근로보국대에 의해 동원되다가 학교 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중등학교 이상 학교에 별도로 학교총력대를 두고 이를 통해 군사훈련과 노동력 동원에 종사토록 했다. 하지만 1943년부터 내려진 일련의 학생 동원조치들과 1944년 10월 ‘학도근로령’은 ‘근로가 곧 교육’이라는 교육이념 아래 학교보국대로 일원화하고 원칙적으로 1년 전체를 동원하도록 법제화했다. 이때부터 학교에서의 교육은 완전히 사라졌고, 1945년 전시교육령의 제정과 함께 준군사조직인 ‘학도대’로 귀결되며 병력 동원으로 이어졌다. 조선 안 노동력 동원의 흐름은 경남지역에도 거의 그대로 관철되었다. 1938년 부터 중등학교 3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한 학교근로보국대는 점차 늘어났고 이후 국민학교까지 확대되어 1년 동안 수시로 식량 증산과 관련된 피뽑기, 종자채취 등의 작업에 집단 동원되었다. 한편 이 지역에서도 학교총력대가 결성되었고, 1943년부터 학도근로령으로 수렴되던 전쟁 말기에는 아예 학교에서의 수업을 포기하고 통년 동원으로 노동현장에 내몰렸다. 부산은 부두로 말미암아 군수물자의 결전수송을 위한 하역작업에 수시로 동원되었고 군수공장과 포대진지 구축사업 등에도 동원되었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은 후방 군사기지로서 비행장이 많이 건설되었는데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비행장 건설에 집중적으로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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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자와 조선 - 일제시기 大池忠助의 지역성과 ‘식민자’로서의 위상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3 한국민족문화 Vol.49 No.-

          ‘식민자’ 또는 ‘풀뿌리 식민자’로 평가되는 재조일본인 오이케 츄스케는 1856년 쓰시마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인 1875년 부산으로 건너와 대일무역에 종사하면서 친형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무역 및 고리대업은 물론이고 일제의 조선 침탈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부합하며 조선의 출입구인 부산과 오이케여관을 통해 일본군부와 관계를 맺고 토지구매, 군수물자조달을 통해 자본을 확장했다. 개인사업과 지리적 이점을 토대로 오이케는 강고한 인적네트워크도 형성함으로써 자신의 기반과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확대해 나갔다. 그가 맺은 인적네트워크는 제국주의 일본의 핵심적인 인사인 관료와 군인은 물론, 일본 본국의 재벌 및 경제인, 그리고 조선 또는 부산 거주 일본인과 조선인 등이었다. 부산에서 쌓은 인적·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오이케는 경제활동과 공직활동을 통해 ‘부산의 오이케’에서 ‘조선의 오이케’로 나아갔다. 우선 그는 개인경영의 11개 부문을 토대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동시에 부산 및 조선의 각종 회사와 조합의 설립과 경영에 뛰어들어 1929년 사망 때까지 부산 및 조선재계의 원로로서 활동하였다. 더불어 지역사회의 ‘공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업회의소, 부협의회(도평의회), 학교조합 3단체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면서 향리인 쓰시마에 입후보하여 당당히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오이케는 ‘부산의 오이케’를 넘어 ‘조선의 오이케’로 표상되며 조선의 대표적인 성공한 식민자로 위치 지워졌다. 하지만 식민지에서의 성장과 제국주의 내의 위상은 식민지 조선이라고 하는 공간, 특히 부산이라는 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여기서 본국 일본인과 식민지 일본인 간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며 그 독특한 위치도 드러난다. Considered as a "colonizer" or "Grassroots colonizer," Oike Chusuke, a Japanese colonial settler, was born in Tsushima in 1856 and moved to Busan in 1875 when he became 20. In Busan, he started to build his foundation by the assistance of his elder brother, engaging in trade with Japan. Like most Japanese people that made growth in Chosun, he conformed to the situations of the times including Japan"s invasion of Chosun as well as smuggling and loan sharking and accumulated capital by forming relations with the Japanese military through Busan with its geographical and spatial advantages and Oike Ryokan, purchasing land, and delivering war supplies. He established a solid human network based on his personal business and Busan with its geographical and spatial advantages, further solidifying and expanding his foundation and position. His human network encompassed the government officials and soldiers, who were the core figures of imperial Japan, the financial cliques and businessmen of Japan, and Japanese and Chosun people residing in Chosun or Busan. Based on his human and material foundation, he evolved from "Oike of Busan" to "Oike of Chosun" through economic activities and public duties. He first managed his economic activities based on his 11 personal establishments and then got involved in the foundation and management of all kinds of companies and associations in Busan and Chosun around the 1900s. He served the financial community of Busan and Chosun as an elder until 1929 when he passed away. He was also an active, central figure in the chamber of commerce(商業會議所), Pu-council(府協議會), and school corporation(學校組合), which were part of "public duties" during the Japanese rule. His activities of "public duties," in fact, expanded to Japan beyond Busan. In 1914, the Japanese colonial settlers lost their autonomous body after the abolition of the Georyumindanje(居留民團制). Once feeling a need for political activities in Japan in order to promote their stability and expand their foundation in colonized Chosun, they started to advance to the Japanese Imperial Diet. Joining the flow, Oike was elected in his hometown Tsushima and finally advanced to the Japanese Imperial Diet, which is why he was represented as "Oike of Chosun" beyond "Oike of Busan" and positioned as one of the representative successful colonizers in Chosun. However, his growth in the colonized country and his status within imperial Japan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space of Chosun or more particularly Busan. Here, the differences between Japanese people from Japan and those from a colonized country become obvious along with their unique position. They faced their contradictory position between "colonizers" and "residents of colonized land" in reality through the Japanese rule, which is why the contradictions of imperialism also took place within the 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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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동해남부선의 식민성과 지역정치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경남사학회 2017 역사와 경계 Vol.104 No.-

          ‘제국의 이해’와 ‘지역의 이해’가 결합된 ‘조선철도12년계획’선 중 동해남부선은 1927년 기공되어 1934년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1930년 7월 기공되어 1945년 7월에야 개통되었다. 개통이 늦은 이유는 ‘제국의 이해’에 충실한 조선총독부의 철도 정책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동해선 중 동해북부선에만 관심이 있었고,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에 따라 북선 철도와 중앙선 건설에 집중했다. 이에 남부선 연선 지역은 부산을 중심으로 진정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그 범위를 경상남북도와 강원도 20여개 도읍으로까지 확대하여 진정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뒤늦었지만 부분적인 기공과 개통을 이룰 수 있었다. 노선 결정과 광궤 개축에서는 지역 간의 경합도 전개되었다. 특히 광궤 개량에 따른 남부선과 중부선의 연결은 부산 상권과 대구 상권의 경쟁을 가열시켰다. 그러나 식민지 도시 간의 힘의 차이와 ‘新幹線’ 중앙선의 출현으로 대구 지역의 희생으로 일단락되었다. 결국 조선총독부와 지역, 지역과 지역간에 이루어진 ‘지역정치’에 따라 ‘지역의 이해’는 일부 수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종국에는 ‘제국의 이해’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동해남부선 운영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여객 수송의 경우, 연선 지역의 교통 편의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 하지만 대체로 동해선의 자연과 울산, 경주 등 역사유적지를 유람·관광하는 열차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화물 수송의 경우, 미곡류의 부산진역 집하와 잡곡류의 연선 거점 역 집하는 대도시 부산과 일본을 위한 수송으로 전형적인 조선인 농촌의 희생을 담보했다. 또한 기타 화물 수송의 수위를 차지한 철도용품의 수송은 자원 유출과 대륙 병참선의 건설을 위한 철도 건설이라는 ‘제국의 이해’에 철저하게 복무한 점을 잘 보여준다. Of the "12-Year Plan of the Chosun Railroad", which combines the ‘understanding of the empire’ and ‘the understanding of the local’, the Donghae Nambu Line was built in 1927 and planned to be completed in 1934, but it was opened in July 1930 and opened in July 1945. The reason for the late opening was due to the railway policy of the Chosun Governor General who was faithful to the ‘understanding of the empire.’ The Chosun Governor General was interested only in the Donghae Bukbu Line, and focused on the construction of the Northern Chosun Railway and the Center Line in 1931 under the Manchuria Incident and the Sino-Japanese War of 1937. In the area surrounding the Nambu Line, there was a calm movement centering on Busan, and the range was extended to Kyungsangnam-do, Kyungsangbuk-do and Gangwon-do with more than 20 cities. As a result, it was late but partial construction and opening could be accomplished. In route decision and track reconstruction, there was also competition between locals. In particular, the connection between the Nambu and Joongbu lines due to the improved track has heated the competition between Busan and Daegu. However, the difference in power between the colonial cities and the emergence of the ‘Shinkansen(新幹線)’ Center Line ended with the sacrifice of Daegu. In the end, according to the "Local politics" between the Chosun governor general and the local, local and local, "understanding of the local" was partially accepted. In the end, however, they were forced to base themselves on the ‘understanding of the empire.’ This was also revealed in the operation of the Donghae Nambu Line. In the case of passenger transport, it contributed to the traffic convenience of the railroad area to some extent. However, it was largely devoted to the role of trains to tour the Natural scenery of the Donghae Line and historical sites such as Ulsan and Gyeongju. In the case of cargo transport, it is for Busan and Japan, which collect the rice for the Busanjin station and the Grain for railway station, which secured the sacrifice of a typical Korean farm village. In addition, the transportation of railroad goods, which ranked first in other cargo transportation, shows the thoroughness of service to the "understanding of the empire", such as resource leaks and railroad construction for construction of continental Supply l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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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지방의회’의 ‘정치적인 것’과 한계 - 경남도회를 통한 식민지배와 지역정치의 마주침

          전성현(Jeon, Sung-Hyun) 역사학연구소 2020 역사연구 Vol.0 No.39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 초 지방제도 재개정을 통해 도를 법인화하고 도회를 의결기관화 했다. 이를 ‘관치’에서 ‘자치’로 전환시킨 것이라 주장하지만 도의 수장이며 도회의 의장인 도지사의 권한은 더욱 막강해져, 조선총독부-도로 이어지는 일원적인 지배구조는 여전히 강고했다. 특히, 법인으로 조례와 규칙의 제정까지 도지사가 장악하는 등 ‘관치’가 더욱 강화되었다는 측면에서 ‘자치’에 근접했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지방제도 재개정 중 더 주목할 만한 것은 조선총독부-도로 이어지는 획일적 식민지배기구의 지방통치가 심화하면서 이른바 ‘지방문제’에 대해서는 회피, 무시하는 지배전략을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도의 법인화와 도회의 의결기구화는 아래로부터의 요구인 지방문제의 해결을 지역 자체 인적·물적 자산(도세와 부역)의 부과징수, 재산, 기채를 통해 해결하라는 지방제도 재개정의 또 다른 이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회의 의결사항인 도가 제시한 예산안, 부과징수규정, 그리고 도채와 부역 등에 대한 의안의 심의와 건의서 제출 등은 ‘하의상통(下意上通)’의 과정이었다. 이에 대한 도 당국의 답변과 입장은 식민지배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민족 간 차별 속에 운영된 도회에서는 민족 간 차별을 넘어 도농 간, 산업 간, 지역 간 차별 등을 제기하며 차별철폐와 평등을 요구하는 등 긴장과 갈등의 장이 초래되기도 했다. 이러한 ‘하의(下意)’는 지역 현실의 입장을 반영한 ‘정치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매번 식민권력의 억압과 폭력에 무시·배제당했다. 하지만 ‘하의상통(下意上通)’의 도회과정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배의 항상적인 차별적 본질을 확인할 수 있는 ‘정치적 장’이었다. 물론 도회는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평등’과 ‘해방’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더군다나 도회는 이미 친일적이고 협력적인 기관이었던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The Chosun Governor-General re-established the local system in the early 1930s, and incorporated the province and institutionalized the provincial council. This is claimed to be the realization of local autonomy, but in fact, the authority of the governor became stronger, and the unified governance structure of the Chosun Governor-General-Do was still strong. Furthermore, it can not be said that it is close to "autonomy" because the governor has taken control of the ordinance and the enactment of the rules as a corporation. However, more noteworthy during the re-revision of the local system is that the uniform colonial exhaust system of the Chosun Governor-General-Do has deepened and the ruling strategy that avoids and ignores the so-called "local problem" was utilized. The incorporation of the province and the institutionalization of the provincial council were to solve the local problems, which are demands from the local people, through the taxation, property, issue of bonds, and compulsory labor of the region itself. Nevertheless, deliberations on the provincial council"s bill on budget, collection regulations, issue of bonds, and compulsory labor and submission of various proposals are a process of "the will of the people is delivered to the authorities", and the problems of colonial rule were revealed through the answers and positions of the authorities. In addition, the provincial council, which was operated in national discrimination, raised the discrimination of urban-rural, industries, and local beyond national discrimination, and demanded equality. This was a "The political" reflecting the position of local reality. However, due to its inherent limitations, the council could not achieve "equality" and "liberation" of everyday life as well as "the will of the people is delivered to the authorities". Moreover, the provincial council was already a pro-Japanese and cooperative instit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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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스페리딘이 첨가된 젤란검 지지체에서 연골 재생 연구

          전성현(Sung Hyun Jeon),이원택(Won Taek Lee),송정은(Jeong Eun Song),박현(Hyun Park),최일남(Il Nam Choi),김초민(Cho Min Kim),강길선(Gilson Khang) 한국고분자학회 2017 폴리머 Vol.41 No.4

          젤란검은 글루콘산, 람노오스, 포도당이 1:1:2로 구성된 헤테로 다당류로 생체적합성과 물리화학적 특성이 뛰어나 조직공학 분야에서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으며, 최근 여러 가지 분야에서 각광받는 고분자로 인정받고 있다. 헤스페리딘은 콜라겐 재생과 항염증 효과의 작용이 있는데 본 실험은 헤스페리딘이 연골 재생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기 위해 0.7% 젤란검 수용액에 헤스페리딘을 각각 0, 1, 2, 4 mg씩 첨가하여 하이드로젤 지지체를 제조하였으며, 물리적 특성평가를 위해 압축강도 및 FTIR를 측정하였으며, 연골재생을 평가하기 위해 MTT, Bio-SEM, 및 RTPCR과 같은 실험을 평가하였다. 그 결과, 1 mg 헤스페리딘/젤란검 지지체가 연골 재생효과가 가장 우수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연골재생을 위해 1 mg 헤스페리딘/젤란검 지지체의 다양한 응용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Gellan gum is an FDA-approved heteropolysaccharide, composed of sodium gluconate, rhamnose, and glucose in molar ratios of 1:1:2. It has been widely utilized in tissue engineering because of its biocompatibility and outstanding physicochemical properties such as stability at high temperature transparency, and dynamic elastic modulus. In this study, we prepared 0.7% gellan gum hydrogel scaffolds with different amount (0, 1, 2, 4 mg) of hesperidin to incorporate collagen regeneration and anti-inflammatory effect for cartilage regeneration. The physiochemical and biological characteristics of the scaffolds were evaluated by compressive strength, FTIR, MTT, Bio-SEM, and RT-PCR. Interestingly, the gellan gum scaffold containing 1 mg hesperidin was found to be the most excellent scaffold for cartilage tissue regeneration in terms of compressive strength, cell differentiation, cell viability, and gene exp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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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말기 臨港鐵道와 식민성

          전성현(Jeon, Sung-Hyun)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8 한국민족문화 Vol.67 No.-

          식민지 조선의 철도는 제국 일본과의 연결을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해륙연락수송의 의미가 강했다. 그래서 항만의 건설은 철도의 건설과 연동했고, 항만의 확장은 철도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부산진과 적기만 매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업은 조선총독부, 부산부(일본인사회), 일본인 민간사업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가 뒤섞여 우여곡절 끝에 건설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임항철도 건설은 단순한 국책사업으로서 제국의 이해에 따른 선차연락시설의 완비만이 아니라 부산의 일본인사회가 기대하고 열망하고 있던 항만 배후지인 서면 일대 공업지대의 설치와 발전에 중대한 요건이었다. 따라서 임항철도의 시작은 이들의 이해가 깊이 개입되었다. 이는 크게 철도 노선과 회사 조직을 통해 드러났다. 철도 노선의 경우 2가지 점에서 지역의 이해가 포함되었다. 첫째, 기점에 변경에도 불구하고 기존 계획노선이 수용되었다. 즉, 서면 일대의 공업지대를 우회하는 노선이 그대로 포함되었다. 둘째, 새로 만들어진 공업지대에 입주할 기업들의 수송 편의를 위한 별도의 노선이 포함되었다. 한편, 창립당시 주주는 물론 중역까지 부산지역과 관련된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전시체제와 통제 경제에 따른 늦은 개통으로 인해 점차 지역의 이해보다 제국의 이해로 중심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자재와 조선인 노동력의 원조를 통해 이 철도의 건설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더불어 철도회사의 증자는 지역에 기반을 둔 기업에서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방계기업으로 전환토록 했다. 나아가 요새지대인 적기부두와 적기역 구내시설은 유사시 군용으로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군용부두와 군용역의 기능도 지녔었다. 이는 1943년 애초 철도회사가 계획하고 있던 연장 노선을 조선총독부가 군용선으로 계획하는 한편 기존의 철도를 매수하여 국철로 전환하면서 명확해졌다. 이상과 같이 임항철도는 기업이라는 자본의 이해와 일본인 식민자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이해가 결부되어 ‘지역철도’로서 시작했지만 식민지와 전시체제라는 시대적 상황과 이를 관리감독하는 조선총독부, 국책회사 동척, 그리고 조선군에 의해 ‘군용철도’라는 제국의 이해에 기반을 둔 교통시설로 끝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The colonial Chosun railway had the characteristic of connecting with the empire Japan as the top priority and the meaning of the sea-land contact transportation was strong. Because of this, the construction of the port was linked to the construction of the railway, and the expansion of the port led to the expansion of the railway. However, the construction of the Port Railway connecting Busanjin and Akasaki Bay was the completion of the liaison facilities of the ship and the train according to the understanding of the empire. In addition, it was a crucial requirement for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 of the Seomyeon industrial zone, the port hinterland where Busan"s Japanese society had been expecting and aspiring. Therefore, the beginning of the railway was deeply involved in their understanding. This was largely revealed through railway lines and company organization. The understanding of the area was carried out in two points in the case of the route. First, it was set as a route to bypass the industrial area of the area of Seomyeon. Second, the railway route included a separate route for the transportation convenience of companies to be located in the newly built industrial area. On the other hand, At the time of its establishment, the company was composed of personnel related to the Busan area as well as shareholders and executives. However, due to the late railway opening due to the wartime system and the controlled economy, it gradually began to be transformed into the understanding of the empire, not the understanding of the region. This was started by the Chosun Governor-General"s aid to the materials and the labor force of the Korean people. In addition, the capital increase of the Port Railway Company was transformed into a subsidiary of Japanese Oriental Development Company, a state-owned company. Furthermore, the pier and station facilities in the fortified zone were also functioned as military docks and stations because they were authorized to be used as military in case of emergency. This became clear in 1943 when the Chosun Governor-General planned the extension route originally planned by the railway company as a military railway, while the existing railway was bought and converted into a national rail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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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층 신경망모형을 사용한 미세먼지 PM<sub>10</sub>의 예측

          전성현 ( Seonghyeon Jeon ),손영숙 ( Young Sook Son ) 한국통계학회 2018 응용통계연구 Vol.31 No.2

          본 연구에서는 미세먼지 PM<sub>10</sub>의 4가지 분류 등급인 ‘좋음, 보통, 나쁨, 매우 나쁨’ 그리고 2가지 분류 등급인 ‘좋음 혹은 보통, 나쁨 혹은 매우 나쁨’을 예측하기 위해서 심층 신경망모형을 사용하였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국내 6개 대도시 지역에서 관측한 일별 미세먼지 데이터에 대하여 기존 분류기법인 신경망모형, 다항 로지스틱 회귀모형, Support Vector Machine, Random Forest을 적용했을 때에 비해서 심층 신경망모형의 정확도는 더 높아졌다. In this study, we applied a deep neural network model to predict four grades of fine dust PM10, ‘Good, Moderate, Bad, Very Bad’ and two grades, ‘Good or Moderate and Bad or Very Bad’. The deep neural network model and existing classification techniques (such as neural network model, multinomial logistic regression model, support vector machine, and random forest) were applied to fine dust daily data observed from 2010 to 2015 in six major metropolitan areas of Korea. Data analysis shows that the deep neural network model outperforms others in the sense of accu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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