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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학의 전래와 조선조 지식인의 고뇌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정치학회 1997 한국정치학회보 Vol.31 No.2

          [1] 이 논문은 조선조 후기의 천주학의 전래가 우리의 가치관에 어떻게 수용되었고 어떤 충격을 주었는가를 다루어 보고자 쓰여진 글이다. [2] 한국천주교회사에서의 박해는 유럽에서 전개된 제국주의 다툼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제국이 승리함으로써 파리외방전교회가 득세하게 되고 그 결과로 스페인계의 예수회가 몰락한 교권(敎權)의 교체가 중국과 조선에 파급된 여파였다. [3] 한국천주교회사에서의 신관이나 인간관을 둘러싼 갈등은 서구인들의 미욱한 白色優越主義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종교적 암흑과 무지, 그리고 서구 문명의 이기를 향유하지 못하는 이교도 사회의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우월한 복음의 지참자라고 자부함으로써 갈등을 유발했다. [4] 따라서 조선조의 일련의 종교 박해는 조선조의 야만적 처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당시 선교사들의 책임이다. 같은 교리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풍속이 같을 수는 없다. 제사를 둘러싼 갈등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양보했어야할 실수였다. 순교는 신학적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다고 해서 순교자가 교회의 씨를 뿌리는 것은 아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좀더 지혜로웠더라면 그토록 참혹한 순교의 길을 피하고서도 더 큰 복음화와 선교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조선서학사에는 마테오 릿치가 없었던 것이 비극이었다. [5] 서구 기독교의 신관이나 인간관이 반드시 유교의 그것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교가 가지고 있는 무신론적 입장에는 기독교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여백이 넉넉히 남아있었다. 따라서 기독론은 유교를 비하하거나 부인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마테오 릿치의 補儒論은 지혜로운 선교 전략이었다. 그러나 조선조의 기독론은 유교야말로 파괴되어야 할 偶像이라고 질타했다. 유교와 같은 전통 문화가 파괴되는 것이 곧 기독교의 축복이 될 수는 없다. 유교가 몰락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 기독교가 자리잡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6] 기본적으로 전통 유학자들이었던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서구라파 선교사들이 강요한 하느님과 군주, 하느님과 부모의 택일적 갈등 속에서 고뇌하다가 끝내는 군주와 부모를 택함으로써 박해가 일어났다. 이것은 믿음의 강약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 선교사들이 교리의 해석에서 빚은 실수의 탓이었다. 따럿 적어도 조선 후기의 상황에서 순교자는 위대했고 배교자는 비겁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7] 조선조의 지식인들은 서교와 서학을 구분했어야 옳았다. 문명과 종교를 구분하지 않은 댓가는 그 뒤 문명의 낙후를 수반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야 한다. 종교의 부수적 결실인 자연 과학은 종교유입의 중요한 모멘트가 된다. 꼭 같은 星湖의 門徒이면서도 서학의 종교적 요소를 외면한 채 과학적 측면을 주목했던 무리들은 후기 실학파의 맥을 이었고, 교리적인 문제에 집착한 무리들은 攻西派가 되었거나 배교 또는 순교의 아픔을 겪었다.

        • KCI등재후보

          망국을 바라보는 좌파들의 시선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9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8 No.2

          이 논문은 망국으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를 살았던 좌파 지식인들은 해방의 방략으로 무엇을 고민했고, 미래에 건설될 조국의 모습을 어떻게 구상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쓰여진 글이다. 해방정국의 좌파들이 모두 한국의 역사에 깊은 조예를 가진 역사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역사에 민족의 진로에 대한 답안이 있다고 생각했고, 역사를 통하여 미래 조국의 건설을 설계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더 고뇌에 찬 삶을 살았다. 해방 정국에서의 좌익 사사의 핵심은 민중주의(populism)였다. 그들은 멀리는 동학농민혁명에서,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의 3ㆍ1운동에서 보여준 민중적 역량의 가능성과 좌절ㆍ회한,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대구(大邱)사건과 제주 4ㆍ3사건을 통해서 감지한 민중적 저력에 대한 신뢰감을 바탕으로 한국에서의 민중 혁명의 가능성을 감지했거나 기대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엄혹한 미군정 통치 아래에서 성숙되지 않은 민중 의식은 그들의 꿈을 이뤄주기에는 미흡했다. 식민지 치하에서의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와 밀접한 친화력을 갖는데 그 연결 고리가 독립ㆍ해방이라는 상징적 용어였다. 교조적 맑스주의에 따르면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은 중요 가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교시는 그들에게 심리적 갈등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국가에서는 민족 투쟁이 계급투쟁에 우선한다.'는 코민테른의 교시와 모택동의 국공 합작은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과 계급의 갈등에서 민족의 편에 서도록 이론적으로 정리해주었다. 식민지 시대와 해방 정국에서의 한국 좌파들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는 그리 정교하지도 않았고, 그 필요도(必要度)도 그리 절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회주의에 경도하게 된 이유는 민족 해방과 국가 건설에 대한 대안의 부재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에서의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는 그 자체가 추구해야 할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식민지 지배 체제 아래서 하나의 대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This article was written to depict what did the Korean Leftists think of reasons why the late Chosun Dynasty was ruined, and what device did they consider for the liberation and nation-building. It is interesting to point out that the Korean Leftists in the age of liberation were generally historicists who indulged themselves in the Korean history. They thought that there would be answers for their future way to go and they planned construct their country in accordance with the lesson of history, that made their lives exhausted. The ideological core of the Korean Leftists in the age of liberation was populism. They found some possibilities of the peoples power and reason why they failed in independence movement through the Donhak Peasant Revolution(1894-95), March 1st Movement(1919), Taegu Riots(1945) and Cheju Rebellion(1948). They tried to find and expected the possibility of peoples revolution, but they could not realize their dreams with premature peoples consciousness under the strict rightist U.S. Military regime. Nationalism and socialism under the colonial rule had intimate affinity, link of which was such symbolical terminologies as "independence" or "liberation." According to the orthodox Marxism, the concept of 'nation" was not important value to the socialists. Therefore their catch-phrase such as 'Workers have no their mother-land" or 'Workers of all countries, unite!" caused many psychological conflicts among the socialists. But the doctrine of the Commintem that "national independence is prior to the class struggle under the imperial regime" and gospel from Kuomintang-Communist collaboration in mainland China persuaded the Korean communists in such conflict to stand on the side of nationalism. The understanding of socialism or communism by the Korean leftists under the Japanese rule was neither elaborate nor imminent. But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socialism on account of the absence of proper device for the liberation and nation-building except them. Communism and socialism in Korean society were not themselves basic value that they had to persue, but an alternative under colonial situation under which they could not fmd any other proper substitute.

        • KCI등재후보

          러일전쟁의 한 단면 : 그것은 어떻게 대한제국의 망국과 연관되었나?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20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42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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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 Russo-Japanese War was crash between two countries, Russia, who wanted to launch to Pacific Ocean, and Japan, who wanted to construct bridgehead on the land to swallow the Korean peninsula. Contrary to the Sino-Japanese War, that was a war of Japan, who wanted to escape from the hard time of early capitalism, Russo-Japanese War was a struggle between two countries to obtain the territorial ground on the Korean peninsula. So as to say, Russo-Japanese War was a reluctant and unprepared war for Russia against Japanese sunrising attack on the third land on Korea. [2] A half of the Russo-Japanese War was diplomatic struggle rather than of bayonets. That War was victory of Japanese diplomacy. While the Russia was timid under the feudalism, Japanese under the leadership of count Ito Hirobumi, leading Mutsu Munemitsu, Minister of Foreign Affairs, Kurino Shinichiro, Cosul General in Washington, Komura Jutaro, Viceminister of Foreign Afaires, and Minister of Justice concurrently Plenipotentiary Extraordinary Ambassador, Kaneko Kentaro, were superior to those of Russia in capacity and loyalty, Some of them were Member of “The Japan Club of Harvard University” under the auspices of Theodore Roosevelt. They were core group in Japanese diplomatic circle. [3] The reason of defeat of Russia army derived form the corruption in the Tsar Palace. The War was fighting between the corrupted Romanov Dynasty and Japanese patriotic militia. In spite of many pleads of “better life of the people,” corruption of royal family obstinately oppressed the mass as heritage, under which they lost their willingness morale to fight against Japan. [4] Russo-Japanese War was broken out in the innocent Korea for which was irresponsible. What is worse was that it influenced upon the ruin of Chosun Dynasty(Korea). Korea was really irresponsible for the War. No. At that time Korea was in charge of its own country. Whether was it neutrality or participation in the war on a certain side, Russia or Japan, but King Gojong hesitated and high officials counted their own interests. For them, the destiny of his country was not important. In this respect, the ruin of Korea on account of war between Japan and Russia was Korea's diplomatic fault. Whether of participation on a side or neutrality was not important. What was really necessary was royal resolve and unified decision of Royal Court. But They were not capable neither wise nor patriotic. The first mistake was King's escape to Russian Consulate after the Murder of Queen(1895). [5] Why do we have to reflect the past tragic war? That is because the historical stage of the Russo-Japanese war in 1890-1900s was nothing changed in spite of a century's lag-time. In the long history, a century is not enough to change or improve history fundamentally, so we have to reconsider the historical lesson form the war, reflecting upon this age. After 120 years, Russo-Japanese war has not ended, but suspended. The War is present progressive up to now. [1] 러일전쟁은 태평양의 진출을 노리는 러시아와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한국을 필요로 하는 일본의 이해가 충돌함으로써 벌어진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이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영토의 점유를 중요하게 여겼던 일본의 전쟁인 것과는 달리, 러일전쟁은 영토를 목표로 삼는 제국주의의 충돌이 아니라 영향권을 확장하려는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성격이 달랐다. 따라서 러일전쟁은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두보로서의 한국을 침탈하려는 일본의 기습 공격에 대한 러시아의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다. [2] 러일전쟁에서 전쟁의 절반은 외교였다. 이 전쟁은 일본 외교의 승리였다. 러시아가 아직 탈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정점으로 하여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 주미공사 구리노 신이치로, 외무성 부대신 고무라 주타로,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의 법부대신이자 견미(遣美) 특사였던 카네코 겐타로와 같은 미국 유학 출신 외교관들, 특히 하버드대학교일본유학생회(The Japan Club of Harvard University)의 역량이 크게 작용했다. [3] 러시아의 패인은 부패한 왕조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러일전쟁은 부패한 차르 왕조와 애국주의로 무장한 신흥 일본의 결전이었다. 많은 혁명과 개혁 세력이 등장하여 공익(公益)을 내세우면서 “더 좋은 삶”을 약속했지만, 부패는 늘 유산처럼 민중을 짓눌렀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에게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염치없는 일이다. 부패에 대한 반응은 분노가 아니라 체념이다. 부패한 관리에 지친 민중들은 조국을 위해 싸울 전의나 사기를 잃게했다. [4] 내 나라에서 벌어진 제3국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한국이 멸망한 것은 한국 외교의 책임이었다. 중립이든 참전이든 멈칫거림이 없는 결단이 필요했으나 조선의 왕실은 그렇지 못했다. 문제는 아관파천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어느 쪽이 승리하느냐의 문제는 한국의 멸망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 무렵이 되어서는 어느 쪽이 이기든 한국은 승자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의 운명이 그 지경에 이르도록 지배계급은 왜 지혜롭게 망국에 대처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5]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무대가 되는 1890-190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비록 1세기가 넘은 시차에도 불구하고 크게 바뀐 것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시대의 4국 관계를 보면 러시아·중국·일본에게 주는 한국의 의미가 한국에 주는 그들의 의미를 능가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국제 관계의 비극성도 한국에게만 일방적으로 부과되었다. 우리는 이제 다시 그 시대를 반추함으로써 지금 우리의 위상에 대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러일전쟁의 유산과 교훈은 12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다. 그런 점에서 러일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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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사에서 중화주의의 형성과 맥락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16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15 No.1

          [1] 이 글은 선악의 문제를 떠나서 한국사상사의 중요한 인자를 이루고 있는 중화사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고 이어져내려 왔는가를 살펴보고자 쓴 것이다. [2] 역사적으로 보면 중화사상은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정치(精緻)한 문명, 그리고 주변 국가를 압도하는 국력에 대한 한국인의 경도에서 비롯되었다. 신라시대의 중화인식은 국제관계의 측면이 강하고, 고려시대의 그것은 화하문명에 대한 숭모의 뜻이 있고, 조선 개국에 담긴 중화는 이성계의 주변부 인식과 관련이 있으며, 조선중기의 그것에는 임진왜란 이후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의미가 강하다. [3] 한국사상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중화사상은 부끄럽지만 덮어둘 수만은 없는 백내장(白內障)이었으며 계층이나 시대를 초월하는 한국의 적층(積層)문화였다. 한국사상사에서의 중화주의나 사대의 문제는 김부식(金富軾)이나 화서(華西)학파에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중화는 사대의 중핵(core)이었고 사대는 중화의 과육(果肉)이었다. 한국사에서 개명 문화의 시기 이전에 중화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인이나 지식인은 많지 않았다. [4] 중화사상이 한국사상사를 관통하고 있는 한 줄기였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마치 그것이 한국 사상이 주류였다든가 기본 가치였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는 도전과 응전이 있었듯이 중화주의가 있었고 그에 도전하는 반중화나 탈중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사에서의 중화의 뿌리를 찾는 노력에 못지않게 탈중화의 맥락에 대한 천착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 글은 균형 잡힌 작업이 아니다. 그러므로 탈중화에 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1] This article was written to depict the origins and context of the Sino-centric tradition in the Korean political thoughts, regardless it was stain or not. [2] Historically speaking, Sino-centrism in Korea have originated from the respect for and devotion to the long history, graceful civilization, and dominant power over neighboring states. In Silla age, inclination to China(Tang) was forced by international dynamics, in Goryu age, her intelligentsias were envious to Chinese literary culture, and at the foundation of Chosun Dynasty was based on the inferiority complex of Lee Sung-gye(Taejo) as a marginal man and borderland garrison. In the middle age of Chosun Dynasty Confucian scholars were thankful and felt heavy burden to China(Myung) for their military assistance to rebuild the state during the war with Japan(1592-1598). [2] Sino-centrism in Korea, even though shameful, was an important requisite in traditional society. It was, as to say, a kind of cataract, which can not be hidden, and an accumulated heritage regardless of class and age. It was not only misconception of Kim Boo-shik or Hwa-suh(Lee Hang-ro) School. The Sino-centrism was core of vassal state and vassal state was fruit of Sino-centrism. In the Korean history before the 19th Enlightenment age, there were few politicians and scholars free from Sino-centric bondage. [3] But even if it is true that the Sino-centrism was a stem that constituted the Korean political thought, it does not mean that it was main stream or basic value of Korean thought. As there were challenge and response, there were persistent resistance against Sino-centrism. Therefore there were no following deep and considerate research on anti/ or De-sino-centrism, this article is not relevant one. So I frankly confess that this article is neither perfect nor complete one but a half of it, until I finish my counter part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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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주리론자(主理論者)들의 정치적 고뇌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정치사상학회 2010 정치사상연구 Vol.16 No.1

          [1] 인간은 삶을 이어가면서 얼마나 이성적일 수 있을까? 인간의 삶에서 이성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일까? 이 문제는 동서양의 선학들이 늘 고민하던 문제였다. 서양사에서는 이성에 눈뜬 이 시기를 계몽시대라 하여 근대의 기점으로 삼는데, 문예부흥은 바로 이성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양 사회에서는 이성을 이(理)로 표현하면서 가장 먼저 이에 대하여 고민한 인물은 맹자(孟子)였고, 조선왕조에서 이를 완성한 사람은 이황이었다. 인간의 삶에서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이성을 중요 가치로 생각했던 주리론자들은 이상주의적 당위(Sollen)에 몰두했다. 그런점에서 그들은 주기론자들이 존재(Sein)에 몰두한 현실주의(realism)와 다르다. 그들은 당위가 존재에 앞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이기론이 갖는 정치학적인 의미는 결국 그들이 인간의 삶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로 확대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즉 인간의 삶을 이성이 지배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때 인간을 다스리는 원리는 교화(敎化, edification)가 된다. 그들은 왕도 가르침의 대상이라고 생각했고, 왕학[王學: 聖學]을 완성하는 것이 자신들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주기론자들처럼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기질이라고 보았을 때는 수심(修心: cultivation)이 원리가 되지만 주리론은 계명(啓明)을 중시했다. [3] 주리론은 사대부의 학문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관학의 성격을 갖는 동시에 지배자의 덕목에 몰두했다. 이런 점에서 주리론자들은 신분 질서를 중요시하고 유교적 낙관주의에 기초한 철인왕을 기대하면서 자신들이 그러한 인물의 배출과 그러한 사회의 구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상주의자들이었다. [1] To what extent can human beings be reasonable in their lives? How important is reason in human life? Since ancient times, these were the main topics studied by scholars from both the West and the East. The period when these scholars first encountered this theme was called the age of Enlightenment, and the epoch of modernity; the Renaissance began with the finding of reason. In Oriental society, Mencius tackled the problem of reason (li) first, followed by Le Hwang in Korea. They believed that reason comprised four principles : charity, righteousness, courtesy, and wisdom. They were involved in these principles as idealistic Sollen. In this respect, they were different from the theorists of ether (gi), who engaged in realistic Sein. The theorists of reason believed that reason was prior to ether (emotion). [2] The political implication of the theory of reason is important, because this argument sparked a debate regarding what controls human beings: reason or ether? In the case where scholars believed that human beings are controlled by reason, the means of control is “edification.” On the other hand, if they believe that human beings are controlled by ether, the means of control is the “cultivation of mind.” Theorists of reason believed that monarchs should be taught as human beings, and that teaching monarchs ( sunghak) was their holy duty. When principles control human life, as theorists of reason believed, enlightenment is more important than cultivation. [3] The theory of reason was a science for ruling nobles, and thus, it was regarded as a governmental science and a set of virtues by the rulers. They emphasized the order of social status on the basis Confucian optimism. The theorists of reason expected to be ruled by a philosopher-king, and considered it their political role to develop, teach, and support him. They were steeped in ide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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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세동점기의 서구인과 한국인의 상호 인식

          신복룡 ( Shin Bok-ryong )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4 한국문학연구 Vol.0 No.27

          [1] 이 글은 서세동점기에 만난 서양인과 한국인이 서로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것이 어떤 적실성과 오해를 안고 있으며, 그것이 후대의 그들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쓴 것이다. [2] 한국이 서구 사회에 알려진 것은 고대사로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지만 문헌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서양에 아려진 것은 1668년에 네덜란드에서 발표된 하멜(H. Hamel)의 『조선표류기』였다. 그러나 근대적 외교로서의 통상이 시작된 것은 1860년대 이후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한국에 접근한 이유는 (1) 미국에서의 서부 개척 시대의 여진(餘震), (2) 일확천금을 꿈꾸던 모험가들의 탐험심, (3) 복음 전파라는 이름의 백색우월주의가 작용했다. [3]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대체로 부정적이었지만 한국인들이 미처 몰랐던 부분에 대한 지적도 많다. (1) 한국인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며, 그 바닥에는 관료의 부패와 지배층의 무능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당쟁(黨爭)을 현대적 의미로서의 정당으로 보려는 시각도 있다. (2) 한국인의 인종에 관해서는 한국인들이 집착하고 있는 단일 민족의 이론을 부인하고 있으며, 인성을 게으름, 사치, 방탕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그러한 성격은 지배 계급의 부패에서 오는 체념이지 본성은 아니었다고 본다. (3) 여성의 모습에 대해서는 대체로 억압 받는 존재에 대한 연민을 보이고 있지만, 사대부 여성의 존엄성을 높이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4) 물산은 대체로 풍부하지만 해외 수탈을 꺼리기 때문에 자원을 은폐하고 있으며,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생산성을 높이려는 이욕을 상실하고 있다. (5) 대외 관계에서는 해외 탐험가들의 욕심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공도(空島) 정책을 썼고 해양 진출을 억제했는데 이것이 망국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4] 한국인의 눈에 비친 서양인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한국인들은 외국인에 대하여 배외심이 강하다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인 인식이었으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며, 한국인은 외국인에 대하여 섬뜩한 감정과 호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2) 한국인들은 서구 문명의 이기에 대하여 상당한 경이로움을 가지고 그것은 쇄국과 개국에 양면적인 영향을 끼쳤다. (3) 서구 문명에 대한 경이로움은 부분적으로 중화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런 점에서 서세동점은 한국 민족운동사의 한 획선을 이루고 있다. (4) 서구인들의 조선 상륙은 민간 차원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들」이었지만,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망국의 묵시적 방조자들이었다. [5] 요컨대 서세동점기의 한국현대 외교사는 150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한국 현실에 교훈이 되는 부분이 있다. 특히 대한제국 말기의 혼란과 망국의 교훈은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를 돌아보라'(「論語」, 「學而篇」, ‘子曰 告諸往 而知來者') 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1] This article was written to depict the reciprocal understandings between Koreans and Westerners in the 19th Century, focusing on their relevance, misunderstanding and their influence upon the following history. [2] Before the Middle age, the Westerners knew the existence of Korea, but it was 1668 when the Westerners get concrete informations on Korea through Narrative and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written by H. Hamel. It was after 1860s when Korea opened ports and began trade and communications with Western countries. The reasons why they approached to Korea were: (1) extension of Westward frontiership in the U.S. toward the East (2) adventurist dream for upstart (3) Western-triumphalism under the name of gospel propagation. [3] The features of Korean people reflected in the eyes of Westerners were generally negative. But in some respects, they pointed out what Koreans did not know for themselves. (1) Regarding the political situation, they were pessimistic, due to the corrupted bureaucrats, but the political struggles between sects (黨爭) are positively evaluated. (2) Concerning the racial origins of the Korean people, they denied the theory of unitary blood to which Koreans excessively attached. They described the Korean as lazy, luxurious and dissipated. But, they say, such temper was not natural disposition but outcome of renunciation due to the corruption of the ruling class. (3) The women were generally portrayed as being oppressed and they showed sympathy, but someone praised the integrity of the ladies in aristocrats. (4) Products were fluent, but Koreans hid them in order to keep them from exploitation by foreigners. Korean had not intention to increase the productivity. (5) Concerning the marine policy, Korean people adhered the ‘vacant island policy' and prohibited the advance to ocean. Westerners pointed out that such a closed-door policy caused the fall of the Chosun Dynasty. [4] The features of the Western people in the eyes of Korean can be summarized as followings. (1) According to the general theory of the Korean cognition to foreigners, Korean have xenophobia. But it is not true. Korean are ambivalent to foreigners. In some respect, they have xenophilia. (2) Korean had been astonished by the mechanical instruments from the West, which influenced Korean both to open and to close the ports. (3) Astonishment of the Korean to the Western civilization provided a moment to deviate from the Sino-centrism(中華主義). In this respect, the Western infiltration into Korea drew a line of modern nationalism. (4) On the civilian level, Westerners were good Samaritan to the Korean, but international level, they were passive supporter of the Japanese seizure of the late Chosun Dynasty. [5] In sum, in spite of the time lag of 150 years, the modern Korean diplomatic history during the Western infiltration era, haㅇ significant lesson to the Korean contemporary history. Especially the political situation of today is less different to that of the ruined Chosun Dynasty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refore, ‘when you want to know where you should go,' as Confucius said, ‘look back from where you c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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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8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7 No.1

          이 글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를 통하여 식민지 시대의 이 땅에 파종된 무정부주의의 모습을 천착(穿鑿)하고자 한다. 그가 기초한 『조선혁명선언』과 그 주체인 조선의열단의 노선, 그리고 1927년을 전후하여 그가 마지막 의지처로 생각했던 동방아나키스트연맹에서의 언행과 저작을 통하여 일제 치하에서의 한국 무정부주의의 현실과 이상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에는 당시 식민지지배 아래서의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상적 습합(習合)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그의 사상은 당시 한국에 유입된 양계초(梁啓超)의 영웅주의, 크로포트킨(Count Kropotkin)의 민중주의적 연민과 상호부조론, 고도쿠 슈스이(幸德秋水)의 폭력혁명론, 이석증(李石曾)의 생물학적 진화론 등을 융합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식민지 시대의 무정부주의가 매우 정치(精緻)하고 논리적으로 완성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학통으로 보면 고토쿠 슈스이를 잇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신채호의 폭력혁명론은 그의 사상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업장(業障)처럼 따라 다니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좌절된 후 최후의 방법으로 폭력 또는 테러리즘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잘못된 일도 아니고 비난 받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 투쟁에 대하여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 한국인의 보편적 정서이다. 신채호의 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고 어떻게 다른가에 대하여는 당사자인 신채호도 혼동하고 있고 후세의 평가도 각기 다르다. 신채호도 계급 투쟁이나 평등과 같은 사회주의적 입장을 밝힌 바 있고, 당시 무정부주의자들은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계급 철폐를 주창하는 등 사회주의적 요소를 표방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와 혼재ㆍ혼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식민지시대의 한국의 무정부주의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거부와 혐오감이 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 정확히 권력이나 또는 정치(정부ㆍ국가)에 대한 거부나 혐오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채호를 비롯한 한국의 무정부주의는 정통 논리로부터 다소 빗겨 서 있었다. This paper was written to depict the reality and idea of Korean anarchism under the Japanese rule through Shin Chae-ho's writings such as the Declaration of Korean Revolution, his political line presented at the Korean Gallant Party(Chosun Uiyuldan), and his dialogues and activities at the East Anarchist Union. Shin Chae-ho's anarchism shows the ideological fusion as a means of independence movement. So as to say, he accepted and reconstructed the heroism of Liang Chi-chao, populist sympathy and mutual assistance theory of Count Kropotkin, theory of violent revolution of Kotoku Shushui and biological evolutionism of Lee si-zheng. In this respect, anarchism under the colonial rule, especially in case of Shin Chae-ho, was neither accurate nor logical. While evaluating Shin Chae-ho's theory of violent revolution, which was connected with Kotoku Shusui, it was a karma given to him. When all kinds of ways to win their independence under the colonial rule were frustrated, violence or terrorism as a last resort was not immoral. In spite of that, Korean historiography was not favorable to his theory of violent struggle. How was Shin Chae-ho's anarchism connected with socialism or communism? Not only Shin himself but also scholars of his ideology were confused in understanding them. Shin had urged such a socialist concept as class struggle and equality, and anarchists at that time often refused private property system and class discrimination. It means that anarchism of the time was mingled with and misused as socialism. Considering the above facts, Korean anarchism under the Japanese colonial seizure was essentially not composed of reluctance to the power such as government or state but to the Japanese imperialism. In this respect, anarchism of Shin Chae-ho was slightly deviated from the orthodox anarc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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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정치사상사 연구와 교양 교육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4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3 No.1

          이글은 한국정치사상사 연구가 조락하고 있는 이유에 관한 담론을 담고 있다. 낮은 시장성, 정치사상이 당시의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계성, 한글 전용의 여진(餘震), 사상사에 내포된 종교적 성격과 이로 인한 배타주의, 서구 학풍의 풍미와 이로 인한 국학의 부진 등으로 인하여 정치사상사 연구가 쇠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사상은 만상의 근원으로서의 학문이며, 수기치인의 출발점이자 한국인의 정체성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매우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사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이 글은 한국정치사상사 연구에 난해함으로부터 해방하여 철학적 사변을 극복하고, 우리말로써 자아준거적 사상사를 확립한 통사를 개발한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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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공산주의자의 발생 계기

          신복룡(Shin Bok-Ryong) 한국정치학회 2001 한국정치학회보 Vol.34 No.4

          이 논문은 192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계기와 목적을 가지고 공산주의에 경도하게 되었는가를 탐구하기 위해 씌어진 글이다. 한국인들은 러시아혁명과 코민테른 동방 정책, 3ㆍ1운동이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한 회한과 그 대안으로서의 투쟁 노선의 고뇌,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가 빚은 불만의돌파구, 중국의 공산화와 공산 통일, 해방 정국이라고 하는 특수 상황이 자아낸 혁명적 격정, 그리고 개인의 특수한 체험과 인성 등으로 인하여 공산주의에 경도하게 되었다.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은 대체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으며, 지적인 면에서 고등교육자였고, 청년층이 많았으며, 인성의 면에서는 허무주의적 낭만과 민중적 연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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