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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연구

        김훈래(Kim, Hoon Rea) 명지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2013 미술사와 문화유산 Vol.2 No.-

        고려시대에 조성된 다각(多角) · 다층(多層)의 석탑과 옥신 받침석, 기단에 조각된 연판무늬 등의 조형 양식은 조선 초기에 건립된 석탑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고려 말 원(元)의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경천사지 십층석탑(敬天寺止十層石塔)을 모본으로 한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은 고려시대의 영향을 그대로 차용한 석탑이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조선 초기는 이전 시대의 조형요소를 차용하였지만, 규모면에서는 축소되었고, 기단부의 변화는 조선 초기 석탑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은 조성시기와 층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탑이었다. 지금까지 기존 석탑 개론서와 연구에서는 신륵사의 중창이 시작되었던 성종 3년(1472)과 그 이전에 이미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과 문헌자료만으로는 이 탑의 정확한 조성 연대를 밝힐 수 있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수온의 「보은사중창사액기(報恩寺重創賜額記)」에 의하면 신륵사는 성종 즉위년에 영릉의 능침사찰로 지정한 뒤 고쳐 짓기를 결정하고, 성종 3년(1472) 대대적인 중창에 들어가 “모년모일(某年某日)로써 모회(某會)를 열어 낙성(落成)하였다”라고만 기록, 낙성일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성종 4년(1473)에 대왕대비께서 유사에 명하여 다시 고쳐 짓고 ‘보은(報恩)’이라는 액(額)을 내려 영릉의 원찰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종 3년(1472) 7월에 신륵사의 중수를 시작하지 말 것과 중지를 바라는 상소가 『성종실록』에 집중적으로 실려 있어 이 해에 신륵사의 낙성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 왕실에서 발원,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기년명 탑과 신륵사 다층석탑의 양식비교를 통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음을 고찰하였다. 특히 세조의 발원으로 세조 13년(1467)에 조성된 원각사지십층석탑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하였다. 신륵사 다층석탑 기단부에 조각된 오조(五爪)의 운룡무늬와 장식성을 강조한 연화묶음 우주는 원각사지십층석탑과의 친연성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운룡무늬는 조선 초기 왕실에서 발원하여 조성한 탑과 범종 등에 유사한 형태로 조각된 예를 비교, 고찰하였다. 이 탑의 하대면석에 조각된 고사리형 파도무늬는 예종 원년(1469)에 왕실에서 발원한 〈양양 낙산사 동종〉과 〈남양주 봉선사 동종〉의 하대에 유사한 형태로 조각되어 있어 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신륵사 다층석탑의 양식적 특징과 석탑의 조성과 관련된 문헌사료를 살펴보았다. 이 탑은 성종 4년(1473) 신륵사 중창을 마무리 지으며 편액이 걸린 시기에 극락보전 앞에 세웠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아울러 이 탑의 층수는 남아있는 부재와 체감율, 실측조사보고서 등으로 살펴볼 때 2단의 기단위에 13층으로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향후 이 탑에 대한 연구가 심도 있게 진행되어 건립시기와 층수를 확실하게 밝힐 수 있기를 바란다. The style of stone pagoda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dopted the design elements of stone pagoda in the Goryeo Dynasty. Compared to the pagodas, the size was reduced and the stereobate part was changed at the stone pagoda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construction year and the original number of story of Silleuksa multi-story pagoda are unknown. A number of researches and books inferred that this pagoda was built before the reconstruction of Silleuksa in 1472. According to ?Boeunsa Reconstrudction Record(報恩寺重創賜額記)? by Kim Suon, the reconstruction of Silleuksa was decided after designation as the temple of King Sejong’s Tomb(英陵, Youngnung). The reconstruction began in 1472. The documentation on the reconstruction referred to “Construction completed in __, ___ with ___ assemblage” and “The grandmother of King Seongjong, Queen Junghee, ordered to rebuild Silleuksa and appointed it to the temple of King Sejong’s Tomb in 1473.” However, it is possible that the reconstruction had not begun in 1473 due to the numerous petitions shown in 『Seongjongsillok』 . The Silleuksa multi-story pagoda was affected by the ten-story pagoda of Wongaksa site constructed by the order of King Sejo. The cloud-dragon pattern with five-nail at the stereobate part and decorative lotus pattern at wojoo(隅柱) are significant elements to prove the relationship with the ten-story pagoda of Wongaksa site. It could be assumed that the Silleuksa multi-story pagoda was built in front of Geungnakpojeon(極樂寶殿, main hall) in 1473. The examination of the debris, declining rate and the measurement record indicate that the Silleuksa multi-story pagoda was originally built to thirteen-story one on the two-stereobate 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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