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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燕巖)과 형암(炯菴)의 만남과 교유에 대하여

        권정원 ( Jung Won Kwon ) 韓國漢字漢文敎育學會 2009 漢字 漢文敎育 Vol.22 No.-

        본고는 연암 박지원과 형암 이덕무의 만남과 교유를 통해 백탑시사 문인들 간의 영향관계를 살필 수 있는 선행 작업의 일환이다. 형암 이덕무는 북학파의 일원으로 연암 박지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두 사람의 문학관이 흡사하고 사용한 비평 용어 또한 동일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박지원의 문학관은 `법고창신`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덕무의 문학관 또한 의고와 창신의 `절충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당시 크게 유행하던 명대 전후칠자의 의고주의와 공안파의 창신주의를 절충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논리이다. 그런데 박지원이 법고창신의 문학관을 개진한 것은 1768년이고, 이덕무의 절충론은 1765년의 기록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덕무가 「영處稿自序」에서 힘주어 말한 영兒와 處女의 비평적 이미지는 박지원의 「영處稿序」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물론 박지원의 「영처고서」는 이덕무가 연암에게 보여준 원고에 쓴 것일 터이다. 그러므로 이덕무의 문학관은 박지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박지원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과 이덕무의 만남은 이들이 대사동 「백탑부근」으로 이사한 1768년 이후부터 라고 한다. 박지원이 이곳으로 이사한 것은 1768년 이고, 이덕무가 대사동으로 이사한 것은 1766년 5월 27일 이었다. 그러므로 박지원이 대사동으로 이사한 이후 이들의 교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1768년 이전에 이들이 만났거나 혹은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이덕무의 초기 교유관계는 대체로 서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덕무가 10대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것은 그의 외숙 박순원의 집이었는데, 이덕무의 외가는 반남박씨로 박순원은 박지원과 같은 항렬을 사용하는 인척관계였다. 이덕무의 처남 백동수는 이덕무와 처남매부 사이이자 매우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그는 어린 시절 이윤영에게 『주역』을 배웠는데, 이 시기 박지원 역시 이윤영에게 주역을 배우고 있었다. 즉 1758년 무렵 백동수와 박지원의 교유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덕무가 경제적 도움을 많이 받았던 서상수 또한 1765년 이전에 박지원과 교유가 있었다. 이렇듯 이덕무 주변의 여러 인물들이 박지원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론 당시는 嫡庶의 구분이 엄격했기에 긴밀한 교유가 이루어지지는 못했겠지만, 동시대 같은 서울 도성 내 거주했던 사람들이기에 서로 알고 지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박지원과 이덕무 두 사람의 문집 어디에도 이들이 1768년 이전에 교유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들이 서로를 알고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This paper is part of a preliminary research that examines encounter and personal exchanges between Yeonam(燕巖) Park Ji-won(朴趾源) and Hyeongam(炯菴) Lee Deok-mu(李德懋) in order to understand relationships among members of the White Tower poet coterie. Hyeongam Lee Deok-mu was a member of the Northern Practical Learning School and was largely influenced by ideas of Yeonam because the two had shared views on literature and used same terms for critique. Yeonam`s philosophy of literature can be summarized as `creation of the new based on the old「法古創新」,` and that of Hyeongam can be summarized as `eclecticism「折衷論」` between classical and new style. In was in 1768 that Park Ji-won made a statement on `creation of the new based on the old` as his philosophy of literature, while Lee Deok-mu`s eclectic philosophy can be found in historical records as early as 1765. In other words, Lee`s philosophy was formed even before he met Park Ji-won. The two are known to have met sometime after 1768 when they moved to Daesa-dong(大寺洞). Is there a chance that they met earlier or wielded influence on the other indirectly? Lee Deok-mu`s initial circle of friends mostly consisted of people who were not legitimate member of their families. Lee spent most of his teenage years at Park Sun-won(朴淳源)`s house, who was his uncle on the mother`s side. The clan`s place of origin was Bannam, same with Park Ji-won, and they were distant relatives. Lee was very close with his wife`s brother Baek Dong-su(白東脩), who got acquainted with Park Ji-won around 1758. Also, Lee provided generous financial support to Seo Sang-su(徐常修), who had personal relationship with Park Ji-won before 1765. Like this, many friends of Lee Deok-mu were also acquainted with Park Ji-won. Since the distinction between legitimate and illegitimate children was rather strict at the time, exchanges between the two groups were not active. However, it is not entirely impossible that certain people who lived within the realm of Seoul palace got to know one another. The exchanges between Park Ji-won and Lee Deok-mu took offwith activities of the White Tower poet coterie after 1768. Main members included Park Ji-won, lee Deok-mu, Seo Sang-su, Park Je-ga(朴齊家), Yu Deuk-gong(柳得恭) and Lee Seo-gu(李書九). They often had poem-reading meetings, drank spirits and tea, composed poem and enjoyed music and chat together. They wrote foreword and critique for one another`s writing collections. Sometimes they went on excursions to other provinces and wrote about the scenery and impression of the new place. It is reasonable to think that members of the Northern Practical Learning School influenced one another to create their own literary world rather than to insist that Park Ji-won had sole influence on all of the school members. Influence is more a result of interactive exchanges than one-sided e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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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士小節』의 초학교재로의 변화과정 연구

        權政媛(Kwon Jung Won)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2 동양한문학연구 Vol.34 No.-

        본고는 가훈서로 저술된 『士小節』이 어떤 과정을 통해 초학교재로 자리매김했는지의 경위와 초학교재로 변화할 수 있었던 요인을 살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덕무는 『사소절』의 저술 당시 서문을 통해 ‘자신과 집안의 법칙을 삼기 위해’ 이 책을 저술한다고 명확히 그 의도를 밝혔다. 그러므로 『사소절』은 일차적으로 이덕무와 자신의 집안사람들의 몸가짐을 경계하기 위해 썼다는 점에서 修身書라 하겠고,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가문 대대로 전수할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는 家訓書의 성격을 가진다고 하겠다. 『사소절』에는 이덕무 자신과 집안의 수신의 도리가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이덕무가 향유했던 18세기 서울 중심의 양반 가문의 문화와 의식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사소절』은 이덕무 자신과 집안사람들은 물론 같은 문화를 향유하던 주변인들 사이에서 한정적으로 읽혀졌다. 그러다가 1853년 최성환에 의해 ‘백성의 교화’의 목적으로 간행되면서 公的 성격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후 가정이나 私塾에서 집안의 아동이나 제자를 교육할 때 교재로 사용되거나, 초학교재로 제작 간행되어 판매된 경우를 드물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공식적인 학제 내에서는 『사소절』을 교재로 채택하여 사용했다는 예시를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활자본으로 간행된 이후 보다 널리 유포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다는 사실은 『사소절』의 활용범위가 개인에서 가정으로, 다시 사회로 확대되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사소절』이 초학교재로의 변화를 보인 것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이었다. 이 시기는 근대계몽기라는 이름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의 근대화와 국민의 계몽에 힘썼던 시기였다. 국민의 계몽을 위해 보다 확대된 개념의 아동교육이 이루어졌고, 특히 ‘修身’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국민 계몽을 위한 마땅한 교재가 없었고, 새로운 교재 개발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기존에 있던 유교 텍스트를 근대 계몽의 도구로 활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사소절』 역시 근대계몽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아동 계몽을 위한 수신교재로 적극 활용될 수 있었다. 이는 『사소절』이 시대적 필요성에 부합하는 체재와 내용을 갖추고 있은 데 기인한 바가 크다. 『사소절』은 대상별로 사전ㆍ부의ㆍ동규로 大分하고, 다시 항목별로 細分하고 있어서 교육대상에 따라 활용하기가 용이하고, 제목도 순번도 없이 단문으로 나열되어 있기에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재구성하기가 쉽다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사소절』은 상황에 맞게 실천 가능한 구체적인 예절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수신의 지침서로서는 더없이 좋은 교재라 하겠다. 물론 分編하거나 한문에서 한글로의 문자 체계를 바꾸는 등의 재창조의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이러한 재창조의 과정은 아동교육을 위한 노력임과 동시에 더 이상 한문이 절실하지 않았던 시대적 필요성에 의한 변화의 과정이라 하겠다. 이렇듯 『사소절』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그 성격 역시 변화를 겪게 되어, 18세기에 훌륭한 가훈서로 저술되었지만, 20세기 초에는 근대화 가치를 띤 것으로 재창조되어 국민의 계몽을 담당하는 초학교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This study examines how Sasojeol, a book for family disciplines, came to be used as a textbook for elementary education, and which factors enabled this transition. The author of the book, Lee Deok-mu, had limitations in his social status as a son of a mistress, and had been very cautious about his behaviors throughout his life. He suggested an ideal type of a noble scholar, and endeavored to live up to that standard. Sasojeol is a handbook on how to be a true scholar. In addition to principles and disciplines for self-education and for his family, the book reflects noble-class cultures and mainstream thoughts of the eighteenth century Seoul. The book was read among a small circle of people at first, Mr. Lee’s family and those who shared the same cultural setting. However, Choi Seong-hwan published the book in 1853 with a goal to enlighten Korean people, and the book acquired a wider audience of the public. Rare historical records show that the book was used as a textbook to teach young children and students, and subsequently it was published and sold as a textbook for beginners. It is hard to find records on whether Sasojeol was officially adopted as a textbook for formal education. However, the book became widely distributed and read since it was published in print, indicating that its audience grew from a small circle of families to a larger society. It was between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y that ‘Sasojeol’ came to be used as a textbook for elementary education. It was a period of the so-called modern enlightenment, and great efforts were made to modernize the country and enlighten people. To this end, children’s education became more active, and especially, the importance of self-discipline was newly emphasized. However, adequate textbooks on enlightenment were hard to find, and it was equally hard to write new books. For this reason, in many cases, the existing Confucian texts were used for modern enlightenment. Sasojeol could be widely used as a self-discipline book for children’s enlightenment in this historical context. The book was partly refurbished, by dividing into separate chapters, or changing the letters from Chinese to Korean. This reflected both efforts for children’s education and the particular need of the time that no longer required use of Chinese language. Sasojeol was an excellent family discipline book written in the eighteenth century, and by early twentieth century, it was newly invested with modern values, and became established as a textbook for beginners to enlighten the 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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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耳溪 洪良浩 漢詩의 상하층문학 융합의 일단- 北塞문학을 중심으로 -

        權政媛(Kwon, Jung-won) 한국문화융합학회 2017 문화와 융합 Vol.39 No.5

        耳溪 洪良浩(1724~1802)는 영․정조 시대 문인으로, 內外의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던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관료였다. 그의 관직생활은 비교적 평탄했으나, 정조 즉위년에 홍국영의 세도정치의 횡포로 일시적인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함경도 경흥부사로 좌천되어 北塞에서 3년 동안 재임한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 홍양호는 북관의 산하 곳곳을 기행하면서 북관민의 삶을 목도하고, 그 체험을 근거로 북관 지방의 풍물과 지리, 그리고 북관민의 생활상을 담은 저술을 여러 편 남겼다. 『朔方風土記』, 『朔方風謠』, 『靑丘短曲』과 『北塞雜徭』 등이 그것이다. 본고에서는 홍양호의 경흥부사 재임 기간 중 저술했던 시문집인 『朔方風謠』, 『靑丘短曲』, 『北塞雜徭』를 포괄하여 ‘北塞문학’이라 지칭하고, 이를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홍양호의 북새문학 작품은 북새지방의 풍물과 생활상을 진솔한 필치로 노래하였다. 이를 위해 북새지방 民들이 즐겨 향유하던 민요와 민요풍의 한시는 물론이고, 상층 사대부들이 주 향유층이던 시조와 가사 등도 적극 활용하였다. 이는 홍양호 한시가 상하층 문학을 융합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상하층이 향유하던 다양한 문학 요소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상층의 전유물이었던 한시는 ‘내용의 다양성과 형식의 개방성, 그리고 표현의 토속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한시의 제약과 한시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문화적 결핍을 보충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이런 면에서 홍양호의 북새문학은 한시가 상하층의 다양한 문학 요소를 잘 수용․융합한 결과물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양호의 한시가 民들이 향유했던 문학 장르를 적극 수용하긴 했지만, 이는 엄연히 한시로 대변되는 상층 문학이 하층 문학의 요소를 수용하는데 불과할 뿐이다. 평생 관료로만 살았던 홍양호였기에 民을 아끼고 연민의 정을 느껴서 그들 문학과 융합하는 노력을 했다 하더라도, 이는 궁극적으로 상층문학인 한시를 쇄신하는 한 방편으로 활용됐을 뿐이었다. 결국 홍양호 한시의 이러한 노력은 한시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한 방편이었을 뿐 다양한 계층의 문화교섭을 이루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Hong Yang-ho(洪良浩) was a senior official of the Joseon Dynasty and was a typical official of the Joseon Dynasty. His office life was comparatively stable.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正祖), he was once briefly troubled by tyranny’s Hong Kuk Young(洪國榮). He served as a GyeongHeungBusa(慶興府使) in HamGyeongDo for 3 years. However, During this time, hongyangho traveled to various parts of the city and saw the lives of the people. Based on the experience, he recorded the lives of the scenery, geography and people living in the province of hamgyeong. 『Sakbang-pungtogi(朔方風土記)』, 『Sakbang-pungyo(朔方風謠)』, 『Cheonggu-dangok(靑丘短曲)』, 『Buksae-jabyo(北塞雜徭)』 are like that. The discussion refers to 『Sakbang-pungyo(朔方風謠)』, 『Cheonggu- dangok(靑丘短曲)』, 『Bukssae-jabyo(北塞雜徭)』 as the subject of Buksae- literature(北塞文學) and has been referred to as the subject of discussion. Hongyangho(洪良浩)’s work faithfully recorded the view of the landscapes and living areas of the province of Hamgyong Province. For this purpose, the popular folk songs[民謠], Sijo(時調) and lyrics[歌詞] used by the local folk people were actively utilized. By accepting the folk elements of the rite, Hong yang-ho was able to absorb the diversity of contents and the diversity of speech and the diversity of expressions. He could overcome the limitations of chinese poetry. As a result, the literature on hongyangho literature has been estimated to have accommodated other genres of literature in the gen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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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굉도와 이덕무 문학이론의 同異點 고찰

        權政媛(Kwon Jung-Won)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6 동양한문학연구 Vol.22 No.-

        조선 후기 李德懋(1741~1793)는 명말 공안파 문학이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문학이론에는 공안파의 문학이론이 많이 수용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 문단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안파와 이덕무 문학이론의 거리를 밝히는 작업은 이덕무가 공안파 문학이론을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ㆍ변용했는가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문단에 끼친 공안파의 영향을 살피는 데도 일정 도움이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공안파의 중심인물인 袁宏道(1568~1610)와 이덕무 문학이론의 상동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원굉도와 이덕무의 문학이론은 모두 ① ‘상대주의적 인식론’이 문학의 기저에 깔려있으며, ② ‘자득과 독창성’을 강조하였고, ③ ‘眞 문학’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이덕무 문학이론이 원굉도 문학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양자의 문학이론이 전적으로 동일한 것만은 아니다. 원굉도가 전적인 ‘창신론’을 강조했던 반면, 이덕무는 전후칠자의 의고와 공안파의 창신론의 ‘절충론’을 주장하였다. 즉 원굉도는 전범의 모방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창조해내는 데 큰 의미를 두었지만, 이덕무는 전후칠자의 의고와 공안파의 창신론의 지나 친 점은 버리고 좋은 점을 취하여 이를 통합ㆍ조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터득하여 독창적으로 창조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공안파와 이덕무가 각각 창신론과 절충론을 주장함으로써, 양자가 인식했던 古ㆍ今의 가치와 개성적 문장의 의미에도 차이를 보였다. 공안파가 古의 가치보다는 今의 가치에 보다 비중을 두었기에 고전에 입각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글을 쓸 것을 강조했던 반면, 이덕무는 古를 바탕으로 한 今의 조화를 중시하였고, 고인의 글을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서 자기만의 개성이 발휘된 조화로운 문장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창신론과 절충론의 차이는 이덕무가 원굉도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면 서도 원굉도 문학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주는 일례가 된다고 하겠다. Yi Deuk-Moo(李德懋) was one of the literary men who underwent various influence from Kong-An Pa(公安派) literature theory in the late Joseon. Although Kong-An Pa literature theory is much accommodated from his literature theory, ""Criticism accommodating"" is on the premise as its background. Trying to observe similarity and difference point between Kong-An Pa and Yi Deuk-Moo"s literature theory might be the important clue of apprehending what kind of method Yi Deuk-Moo accommodate and transfigure the Kong-An Pa"s literature theory and develop his own theory. Both Kong-An Pa and Yi Deuk-Moo"s literature theory are identical from these point. ① Relativism epistemology ② Emphasizing selfacquirement and creativity. ③ Professing realness literature, But ① the opinion against an inner-literature and ② practicing literature creation side have a difference point. Namely, Kong-An Pa considers seriously a times characteristic above all, literature was set a high value of the day, inner-literature and Song period literature, recognizes the value. On the other hand Yi Deuk-Moo consider that realness-literature is more important than times characteristic so he evaluated negatively a novel concerning the world of false and emptiness. Also in the side of practicing literature creation Kong-An Pa only emphasized Chang-Sin theory but Yi Deuk-Moo insisted Cheon-Hu-Chil-Cha"s Ue-Go(擬古) and Chang-Sin"s eclectic theory(創新) of Kong-An Pa. Moreover, this eclectic theory show that Yi Deuk-Moo was affected greatly by Kong-An Pa and it accommodated Kong-An Pa literature theory crit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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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靑莊館全書』를 통해 재구한 李德懋 초기 삶의 궤적

        權政媛(Kwon, Jung-won) 대동한문학회 2021 大東漢文學 Vol.66 No.-

        본고는 『靑莊館全書』에 수록된 작품들을 통해 이덕무 초기 삶의 궤적을 살펴보았다. 작품의 저술시기를 考究하여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작품을 통해 살필 수 있는 삶의 특징적 면모를 서술하였다. 李德懋(1741~1793)는 53년 생애를 살았는데, 그동안 71권 33책의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겼다. 이를 통해 그의 전 생애를 살피기엔 지면상 한계가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이덕무 문학의 형성기라 할 수 있는 27세까지의 초기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이덕무의 생애를 살필 수 있는 기초 자료인 <年譜>는 그의 아들 이광규에 의해 정리되었는데, 대체로 39세 검서관 벼슬을 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하지만, 그 이전 시기에 대해서는 대단히 소략하다. 그리고 이덕무는 연암일파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덕무가 연암을 만난 것은 28세 때이다. 따라서 이덕무 28세 이전의 작품은 연암과 무관하게 창작된 것이고, 이는 이덕무의 문학관이 연암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형성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덕무 문학의 형성 배경으로서의 이덕무의 삶을 살피고자 한다면, 연암을 만나기 이전 시기에 대해 보다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본고는 27세까지의 작품의 저술 시기를 고구하여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이를 통해 살필 수 있는 특징적인 삶의 모습을 ‘저술과 교유’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편의상 세 시기로 나눠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7세부터 19세까지로, 이덕무 저술 활동이 시작되었던 시기이다. 이덕무의 유년 시절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외숙 박순원의 집에 우거하던 시기로, 詩作이 시작되었다. 산문으로는 <鵲巢上樑文>과 <戊寅篇>이 있고, 시는 66수 정도가 있다. 저술활동을 시작하는 단계였으므로, 저술의 분량도 많지 않고 질적으로도 높은 수준의 것은 아닌 듯하다. 교유는 內弟박종산, 姨弟 여좌백, 妻男 백동좌, 백동수와 친분이 두터웠다. 둘째, 20세부터 24세까지로, 남산 아래 거주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이덕무의 교유와 저술 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19세까지 박순원의 집에 우거하던 이덕무는 20세에 남산 아래 장흥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교유는 이웃에 거주하던 남홍래, 남명래, 정자성과 이형상, 윤가기, 이명오, 박종산, 서찬수, 이광석, 윤경지 등 詩會를 하던 문인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들은 시회를 열고, 담론을 즐기며, 함께 유람을 하고, 서로 시문과 서문, 기문 등을 주고받는 등 교유도 확대되고, 저술 활동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셋째, 25세부터 27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저술활동이 많지 않았다. 단지 <이목구심서>와 벗들에게 보내는 척독, 그리고 약간 편의 시가 있을 뿐이었다. 이덕무는 1765년 5월 1일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 이전부터 어머니 병간호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목적성을 가진 전문 저술을 하는 것은 형편상 어려웠다. <이목구심서>는 듣고 보고 말하고 느낀 것을 자유롭게 쓴 글이고, 척독은 벗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빠진 이덕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술 활동이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목구심서>에서 이덕무의 일상과 독서, 그리고 벗들과의 교유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교유는 이전 벗들과 지속적으로 이어졌는데, 대부분이 서얼 문인이었다. This thesis examined the trajectory of Lee Duk~moo s early life through the work in Chungjangkwan Junseo . The period of writing of the work was investigated and listed sequentially, and the aspects of life that can be examined through the work were summarized. In this paper, I focused on the early life up to the age of 27, a formative period of Lee Deok~moo s literature. First, The period of writing of the work was investigated and listed sequentially. And I looked at the characteristics of life that can be seen through the work. Especially, I focused on his writing activities. The characteristic aspects of the work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hree periods. First, from 17 to 19 years old. Lee Deok~moo lived in his uncle Park Soon~won s house. During this period, because of Lee Deok~moo began to write works, the amount of works was small and the level was not high. Second, from 20 to 24 years old. Lee Deok~moo lived under Namsan Mountain. During this period, His friendship and writing activities were the most active. Third, from 25 to 27 years old. During this period, there were not many writing activities. There are only Yimokgusimseo(耳目口心書) and a few letters to his friends and a few poems. This is because Lee Deok~moo mother died on May 1, 1765, and he took care of his mother s illness before that. So it was difficult for him to do professional writing with a purpose. Yimokgusimseo is a record of what you hear with your ears, see with your eyes, speak with your mouth, and feel with your heart. And the letter is a message of regards to his friends. Therefore, it was the best writing activity that Lee Deok~moo could do after losing his mother. During this period, His friendship continued to be connected with his former friends, most of whom were seoeol(庶孼) wri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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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湛軒 洪大容의 學問觀

        權政媛(Kwon, Jung Won)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9 동양한문학연구 Vol.29 No.-

        본고는 湛軒 洪大容(1731-1783)의 학문관을 고찰하였다. 홍대용은 洛論의 宗匠이었던 渼湖 金元行(1702-1772)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기에, 그의 학문관은 낙론적심성론을 바탕으로 성립하였다. 홍대용은 心性만을 학문 대상으로 삼던 기존의 성리학적 학문경향에서 벗어나 객관적 事物을 학문 대상으로 삼았고, 특히 人物性同의 이론을 논리적 기초로 하여 人物均의 논리를 끌어냄으로서 利用對象物로서의 物이라는 새로운 物論에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낙론적심성론이 김원행 문하에 있던 학자들의 상수학 연구 분위기와 명물도수지학을 중요시한 노론계의 학문취향,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부친의 지원과 집안의 분위기 등과 맞물려 實用과 實境의 정신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도 관념위주의 지식을 추구하기 보다는 일상생활에의 실천을 중시하였고, 이러한 실천 중시의 학문사상은 日用當行之事와 末節에의 추구로 이어졌다. 홍대용이 학문하는 목적은 바로 ‘진리를 밝혀 일에 실천’하는 것이었다. 학문을 지식의 추구에 만족하지 않고 지식을 활용하여 보다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데 까지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의 범위 역시 실제 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律學이나 數學·科學 등 다방면에까지 확대되었다. 홍대용은 학문 방법에서도 실천적 체험을 강조했는데, 이는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학문을 함에 있어서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의문을 제기할 것[疑問提起], 둘째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깊이 궁구하는 자세를 가질 것[專一窮究], 셋째 자신의 마음으로 남의 뜻을 헤아릴 줄 알 것[以意逆志], 넷째 공평무사한 눈으로 다른 사상의 장점을 두루 받아들여야 할 것[公觀倂受]이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홍대용은 위대한 학자이나 학문만을 추구한 학자는 아니었다. 다방면의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통달하는데 노력하였고, 이렇게 얻어진 지식을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활용하고자 노력한 실천가였다고 하겠다. Hong, Daeyong (1731~1783) is a practical scientist who represents the Study of the North along with Park, Jiwon in Youngjo and Jeongjo period in Chosun Dynasty. His view of learning was established based on Nakron and Human Nature Theory. Therefore, he escaped from the existing Sung Confucianism that only focused on human nature, and also looked into concrete objects. Especially, he accepted Inmulseongdong Theory and spread the Study of the North that claimed to learn Chung’s advanced culture. He took a serious view of practice rather than ideology. This practice-focused view of learning led to Ilyongdanghaeng (one should do whatever that has to be done in a day) and small things. The purpose of Hong’s learning was ‘to find out the truth and use it practically’. He claimed that learning should not stay as knowledge itself but it should be utilized so that people can live a better life. Therefore, his view of learning spread into law, mathematics, and science that can be used in real life. Hong emphasized practical experience in way learning. The four ways of learning are; first, one should have critical attitude and always question everything in learning, second, one should spend all his mind in learning and study thoroughly, third, one should be able to understand others by oneself, and fourth, one should accept strengths of other view of learning with fairness and impartiality. In conclusion, Hong was a great scholar, but not a scholar who only pursued knowledge. He had interest in various types of knowledge and tried to master them. He did not stop at acquiring knowledge. He was a practitioner who tried to solve problems in real life by utilizing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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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무(李德懋)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의 구성과 『청비록(淸脾錄)』에의 활용 양상

        權政媛 ( Kwon Jung-won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6

        본고는 李德懋 『이목구심서』의 구성 방식을 살피고, 그 구성의 특징이 다른 저작에 활용된 양상을 『청비록』의 사례로 살펴보았다. 『耳目口心書』는 이덕무가 지은 수상록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느낀 것을 서술한 글이기에,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대단히 자유롭다. 본고는 『이목구심서』가 대단히 자유롭고 다채로운 글임을 전제하되, 『이목구심서』 전체에서 빈번하게 보이는 구성의 한 방식에 주목하였다. 『이목구심서』는 총 6권, 760여 조목으로 이뤄진 상당히 긴 분량의 글인데, 전반부에는 대체로 일자별로 순차적으로 나열되어 있고, 중후반부에는 특정한 주제와 관련된 일련의 글들이 한 곳에 묶여 나열되어 있다. 본고는 중후반부에서 보이는 방식을 ‘주제별 묶음 구성’이라 명명하고, 『이목구심서』 구성의 하나의 특징으로 삼았다. 이는 『이목구심서』에 혼재된 여러 구성 방식 중 ‘주제별 묶음 구성’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저작의 자료로 활용되기에 용이하다는 점 때문이다. 주제별 묶음 구성의 주제는 ‘역사 속 교훈적 일화, 의학 정보, 여러 문헌에서 발췌한 정보, 시비평’ 등 다양하다. 『이목구심서』의 주제와 관련된 일련의 글들은 주제와 관련된 전문적 저작을 저술할 때 자료로 활용되었다. 본고에서는 분량과 내용면에서 뚜렷한 연관성을 보이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목구심서』의 시비평 내용이 『청비록』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淸脾錄』은 이덕무가 1778년 완성한 시비평서이다. 총 4권, 177항목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은 물론 중국·일본의 역대 고금의 명시와 시인에 관한 시평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이덕무 주변 인물에 대한 시평이 특히 많은데, 이는 다른 비평서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이덕무 주변 인물에 관한 시평은 대부분 『이목구심서』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는 『이목구심서』의 내용이 『청비록』 저술의 자료로 적극 활용되었음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더구나 『청비록』에 활용된 내용은 『이목구심서』 권4에 집중 나열되어 있는 데, 『이목구심서』의 주제별 묶음 구성이 다른 저작의 자료로 활용된 일면이라 하겠다. 『이목구심서』의 내용이 『청비록』에 활용된 양상은 원본 그대로 수록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필요에 따라 일부 내용만 발췌하거나 다른 내용이 추가되거나 각색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는 『청비록』이 전문비평서이기에 저작의 성격에 부합되게 각색되었던 것이다. 즉, 『이목구심서』는 듣고 보고 말하고 느낀 것을 자유롭게 쓴 글이기에 기록성과 사실성에 충실했지만, 다른 저작의 자료로 활용될 경우에는 저술 의도에 따라 적절히 변모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목구심서』 구성의 특징이 전반부의 ‘일자별 순차적 구성’과 중후반부의 ‘주제별 묶음 구성’으로 이뤄졌음을 살필 수 있었다. 이는 『이목구심서』가 일기식 글쓰기로 시작되었으나, 중반 이후부터는 내용 위주의 주제별 글쓰기를 추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목구심서』가 『청비록』에 활용된 양상은 내용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청비록』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반면 『이목구심서』는 자유롭고 즉흥적이다. 이는 『이목구심서』가 듣고 보고 말하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그때그때, 가감 없이 기록한 ‘기록장’의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본고는 『이목구심서』의 구성과 활용 양상을 살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이목구심서』의 저술 의도와 글의 성격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This thesis looked at the configuration of 『Yimokgusimseo』 and application to 『Chongbirok』 by Lee Deok-moo(李德懋). 『Yimokgusimseo(耳目口心書)』 is a essay books written by Lee Duk-moo. This article is a record of what you hear with your ears, see with your eyes, speak with your mouth, and feel with your heart. So it is very free in form and content. This thesis acknowledges that 『Yimokgusimseo』 is a very free writing. But it was focused on the existence of a ‘subject-specific bundle configuration.’ in which a series of articles related to a particular topic are grouped in one place. Because this method is easy to use as data for other writing works. The themes of ubject-specific bundle configuration of 『Yimokgusimseo』 vary. As a representative example, we looked at how the topic of poem criticism in 『Yimokgusimseo』 is being used in 『Chongbirok』. 『Chongbirok(淸脾錄)』 is a book of poem criticism by Lee Deok-moo in 1778. Many of Lee Deok-moo's works are interrelated, but most of them are fragmented and small in quantity. But the correlation between 『Yimokgusimseo』 and 『Chongbirok』 is evident in terms of volume and content. When the contents of 『Yimokgusimseo』 applicate to 『Chongbirok』, most of them are recorded in the original form, but sometimes only some of them are recorded, or other content is added or the content is adapted. So it have a systematic and professional personality. This was adapted to suit the character because 『Chongbirok』 was a professional poem criticism. In conclusion, this thesis confirmed that although Lee Deok-moo’s 『Yimokgusimseo』 is a very free of writing, but there is a ‘subject-specific bundle configuration.’ hat lists specific topics in one place. And It is meaningful in that it revealed through practical examples that this method of composition was actively used in the writing of 『Chongbi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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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新報』 한문기사의 계몽적 역할과 의미

        권정원(Jung-won Kwon)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22 동양한문학연구 Vol.62 No.-

        『조선신보』는 1881년 12월 10일, 부산에서 간행된 최초의 근대식 신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이라 불리는 『한성순보』보다 1년 10개월 정도 먼저 창간되었지만, 일본인에 의해 간행되었기에 한국 최초의 신문이라 불리는 것에는 여전히 유보적이다. 메이지 시대 일본인은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가 빈번하였고, 거주하는 곳곳에서 일본어로 된 신문을 발간하였다. 조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876년 한일수호조약으로 부산항이 개항되었고, 일본인들이 부산에 대거 이주하자 일본인에 의해 신문이 발간되었다. 일본인 상인이 중심이 된 재부산항 상법회의소에서 旬間으로 간행한 『조선신보』가 그것이다. 『조선신보』는 1건의 한글 기사를 제외하고는 일본어 기사와 한문 기사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해외 거주 일본인이 일본어로 신문을 발간하였고, 재조선 일본인이 발간한 초기 신문의 대부분이 일본어 신문이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결국 일본인에 의해 발간된 『조선신보』에 한문 기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뚜렷한 목적성을 전제한 것인데, 한문 기사는 조선인 식자층을 계몽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겠다. 『조선신보』의 지면은 ‘<표지>-<예언>-<목차>-<영사관록사>-<조선신보>-<잡보>-<부산상황>-<원산통신>-<기서>-<물가표>-<광고>’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한문 기사는 전체 기사의 약 36% 정도를 차지하며, <조선신보>와 <기서>에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 <조선신보>와 <기서>는 오늘날 사설과 독자투고란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시사적이고 논리적 주장의 글이 대부분이다. 한문 기사의 실제 내용 역시 부국강병과 국민 계몽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존재로 인식하였기에, 계몽이 필요한 대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조선신보』라는 신문 매체를 통해 조선인을 계몽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신보』는 일본인에 의해 창간되었지만, 조선에서 간행된 최초의 신문이다. 조선에 신문이라는 근대 매체가 全無한 시기에 간행된 것이기에, 여러 역할과 성격을 포괄적으로 담을 수밖에 없었다. 부산에서 간행되었지만 전국을 포괄하는 전국지의 역할을 했고, 상법회의소에서 발간되었지만 경제 기사는 물론 정치 문화 사회의 잡사도 실렸다. 일본인이 발간했지만 일본인은 물론 조선인도 독자 대상으로 삼았으며, 정보와 오락거리 제공의 역할도 했지만 계몽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한문 기사는 조선인 지식층을 독자 대상으로 삼아 ‘계몽’하고자 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조선신보』는 조선에서 간행된 최초의 신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일본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게 된 청일전쟁 이전의 대조선 일본인의 인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특히 본고에서는 『조선신보』의 한문 기사가 조선인을 독자 대상으로 삼아 계몽하고자 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몽의 노력은 조선 침략을 위한 일본의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Chosun Sinbo(朝鮮新報)』 was published by Japanese in Busan in December 10, 1881, Korea’s first newspaper. Busan Port was opened in 1876 under the Korea-Japan Protective Treaty, and newspapers were published by the Japanese when a large number of Japanese immigrated to Busan. 『Chosun Sinbo』 consists of Japanese articles and the Chinese character article, except for one Korean article. The existence of Chinese literature articles in newspapers published by Japanese people in Joseon means that Koreans were targeted as readers. And this is the result of a purpose to enlighten Koreans. In the 『Chosun Sinbo』, the Chinese character article account for about 36% of the total, and are intensively published in the <Chosun Sinbo(朝鮮新報)> and <Giseo(寄書)>. Most of the articles of <Joseon Shinbo> and <Giseo> are current events and an editorial articles. Most of the Chinese character articles are also related to the strengthening of the rich country and the enlightenment of the people.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Chinese character article clearly shows that it contains the intention to enlighten Koreans by targeting them as readers. 『Chosun Sinbo』 is significant in that it is the first newspaper published in the Republic of Korea. In addition, it is very important in that it can examine Japan's position on the Republic of Korea before the Sino-Japanese War, which served as an opportunity for Japan to take the initiative in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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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德懋의 『靑莊館全書』 편집상의 오류에 대한 고찰

        權政媛 ( Kwon Jung-won ) 동방한문학회 2022 東方漢文學 Vol.- No.90

        李德懋는 조선후기 박학으로 널리 알려진 문인으로, 평생을 서적에 몰두한 독서광이었다. 그의 문집 『청장관전서』는 총 71권 32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그의 평생 著作의 기록이자 讀書記이기도 하다. 이는 이덕무의 삶과 사상, 학문과 문학의 대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일 뿐 아니라, 당대 문단에 새롭게 유입된 明末 淸初 서적의 유입과 文風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따라서 학계에서 일찍부터 관심을 받아 影印·國譯되었고, 연구 성과 또한 상당하다. 『靑莊館全書』는 이덕무의 아들 李光葵에 의해 편집·편찬되었다. 이덕무의 문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사후 정조의 명에 의해서 尹行恁의 주관 하에 이뤄졌다. 이때 간행된 것이 『雅亭遺稿』로, 총 8권 4책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덕무 저작의 1/10 정도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50여 권은 본가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광규는 『아정유고』 간행 이후 집에 보관되어 있던 이덕무의 저작을 손수 수집하여 ‘순차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고, 10여 년의 노력 끝에 『청장관전서』를 완성하였다. 그리고는 완성된 원고를 李畹秀에게 교정을 부탁하였고, 이원수의 주도 하에 교정 및 필사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필사 작업에는 20여 명이 투입되었고, 기간 또한 1년여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따라서 문집 분량의 방대함에 비해 교정·필사가 단기간에 이뤄졌기에 편찬 과정에서 편집 및 기록상의 오류가 발생할 여지가 충분하였다. 본고는 『청장관전서』 속 오류를 검토하여 수정 보완하였다. 먼저 편집상의 오류로 1)현재 널리 유통되는 4종의 판본을 비교해서 구성과 체재의 차이의 원인을 밝히고 수정 보완할 자료를 제공하였다. 2)『嬰處詩稿』와 『刊本雅亭遺稿』에 수록된 시와 척독의 배열이 편집의도와는 달리 시기가 뒤섞인 정황이 보이는데, 저술 시기를 밝힘으로써 오해의 여지를 줄였다. 그리고 기록상의 오류로 「연보」에 보이는 일자 표기의 誤記를 바로잡아 제시하였다. 이를 통해 『청장관전서』에 대한 보다 정확한 연구에 작은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Lee Deok-moo(李德懋) was a writer widely known for his literature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he was a lifelong reading book buff. His collection of writings, 『Chungjangkwan Jeonseo(靑莊館全書)』 was translated into Korean as early as possible by the academic community, and the results of the study also accumulated considerably accumulated significantly. 『Chungjangkwan Jeonseo』 was edited and published by his son Lee Kwang-gyu after Lee Deok-moo's death. However, the volume of the work was very large and the transcription was short, so errors could occur. This paper finds errors in the contents of the 『Chungjangkwan Jeonseo』 and corrected them. First of all, poems and Chuck-Dok(尺牘) included in 『Yeongcheosigo(嬰處詩稿)』 and 『Ganbon Ajeongyugo(刊本雅正遺稿)』 were intended to be arranged by time, but they were actually not arranged in a mixture of periods. So, he revealed the time of writing and reduced the possibility of misunderstanding. Second, It found errors to the period of writing in annual report and corrected them. It is hoped that this paper will help more accurate research on Lee Deok-moo and 『Chungjangkwan Jeonseo』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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