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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대한제국기 실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

        노관범 ( Kwan Bum Noh ) 한국실학학회 2013 한국실학연구 Vol.0 No.25

        대한제국기의 실학 개념은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실학 개념과 20세기 한국의 학술적인 ‘실학’ 개념 사이에 있는 중요한 근대 개념이다. 한국 근대의 역사적 현재성을 담고 있지만 지금은 단절되고 망각된 개념이다. 근대 실학 개념의 역사적 복원 작업은 학술적인 ‘실학’ 개념의 역사적 성찰과 한국 근대개념어의 역사적 통찰에 기여할 수 있다. 이 글은 근대적 제도의 형성에 수반된 근대 개념어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대한제국기 대중 매체에 보이는 실학 개념을 분석하되 분석의 초점을 개념의 외연, 개념의 내포, 그리고 개념의 로칼리티에 두었다. 외연의 분석은 한국 근대 실학 개념을 둘러싼 제도적 맥락의 고찰을 중심으로 하였다. 새로운 학제를 수립하려는 국가 교육정책, 새로운 학제에 의해설립된 신식 학교의 신학문 교육, 그러한 신학문의 발원지로서 세계 열강의 교육 기관에서 전수되는 전문적인 학문의 학습 등 다양한 상황에서 실학 개념의 외연이 확장되는 현상을 제시하였다. 내포의 분석은 한국 근대 실학 개념의 학문적 범위와 성격의 고찰을 중심으로 하였다. 근대 교육 기관에서 교수되는 교과 학문 전반이 실학으로 인식 되면서도 근대 문명의 성취와 국가 부강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자연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격치학, 또는 士의 전문학과 農商工의 실업학 등으로 실학 개념의 내포가 응집되는 현상을 제시하였다. 로칼리티의 분석은 한국 근대 실학 개념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성으로서 대한제국의 지역성에 유념을 두었다. 동아시아 근대 개념의 도착지로서 대한제국에 晩淸중국과 明治일본으로부터 실학 개념이 유입된 양상을 살펴보았고, 대한제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들에서 발현되는 실학 개념의 정치적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한국 근대 개념으로서 실학의 역사적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기를 바란다. There are three kinds of concepts of Silhak[實學] in Korea. The first one is on the old word in the traditional Confucianism, the second one on the present academic term in the field of Korean study, the last one on the now-forgotten-but-noticeable word in the modern period of Great Han empire. It is important that we can find modern meanings in the concept of Silhak. The modern concept of Silhak can shed new light on the present academic term Silhak, and also pave new way to the modern history of Korean general concepts. That`s what this article aims at. This article has three parts, each of which is as follows. The first one is the external approach to the modern concept of Silhak. The word of Silhak was accompanied by the modern educational system in Korea. For example, it was so often mentioned on the announcement of the new national educational policy, and subject-teaching or subject-studying in the new established educational institution in and outside the modern Korea. The second one is the internal approach to the modern concept of Silhak. The word of Silhak was used to indicate the modern academic disciplines for the national prosperity and military power. And the central meaning of it was pertaining to natural sciences and academic professionalism on agriculture, commerce, and engineering. The last one is the conceptual approach to modern concept of Silhak. In this case, much interest is in the locality of the modern Korea as the place new foreign concepts of Silhak arrive from the abroad in the East Asia, and also as the place new political concepts of Silhak and its conceptualizations come into existence from the ideological struggle between the different va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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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2: `실학`을 다시 생각한다] 실학(實學)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아니면 애초에 없었던 것인가 -`미래 실학`을 위한 방향 모색

        김상준 ( Kim Sang-jun ) 한국실학학회 2016 한국실학연구 Vol.0 No.32

        `실학`이란 `근대` 그리고 `근대성`과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근대` 그리고 `근대성`이라는 언어가 안정적 통념을 이루고 있다면 `실학` 개념 역시 큰 문제되지 않고 유지돼 간다. 반대로 `근대`에 관한 기왕의 인식, 개념, 이해가 크게 흔들리고 의문에 부쳐지고 있다면, `실학` 개념 역시 같은 상황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현실이 그렇다. 지금껏 자명하게 전제했던 서구주도근대관이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성 논의에서 제기되었던 `근대성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아니면 없는가`라는 의문이 실학 논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실학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아니면 애초에 없는가?` 이 글이 `실학 디플레`라고 부르는 이 해체적 현상은 실학 담론, 개념 자체의 유효성을 의문시하는데까지 이를 수 있다. 이 글은 근대 세계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중층근대론`의 시각에서, 실학 논의의 유의미성과 유효성을 새롭게 제기한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유교사 전반을,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새롭게 이해하는 시각을 얻을 수 있다. 동아시아 유학사, 유교 레짐사에서 실학 또는 실학적 흐름이란 초기근대 동아시아 유교 레짐(regime)의 역동성을 선도해 왔던 선진적 경향을 말한다. 이 흐름을 일이관지 관통하는 핵심 에스프리는 창건 시부터 유교에 내재했던 윤리성과 비판성이다. 유교 윤리성이란 타자(특히 民)의 고통과 불의한 현실에 대한 민감성을, 유교 비판성이란 주권행사의 남용과 폭력성에 대한 경계를 상징한다. 동아시아 초기근대에 나타난 실학의 다양성은 이 핵심 에스프리가 시대와 국면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The concept of `Silhak` is deeply associated with the concepts of `modernity` and `the modern era.` Therefore if the concepts of modernity and the modern era are stable, the concept of `Silhak` is also accepted without questions. However, if the existing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modernity and the modern era is under question, the concept of `Silhak` is also questioned. That is what is happening these days. As the standard Eurocentric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the modernity and the modern era has been seriously questioned and denied, the questions about the validity of the concept of `Silhak` has also been widely raised. As a result, phenomena which I call the `deflation of Silhak studies` are observed. This essay suggests an alternative understanding of the concept of modernity and the modern era―the theory of overlapping modernities―by which the rational core of the concept of the `Silhak` could be preserv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heory of overlapping modernities, the `Silhak` was the Confucian tendencies which led the dynamics of the early modern East Asian Confucian regimes. The core esprit which these tendencies commonly share is the ethical and critical attitude which tried to renovate Confucian regimes for the benefit of the 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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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實學)의 개념과 학술사적·현재적 의의

        이헌창 ( Lee Hun-chang ) 한국실학학회 2018 한국실학연구 Vol.0 No.36

        한자어로서의 실학은 인류의 보편적 도덕인 진리= 道, 역사적 용어로서의 실학 또는 근세 실학은 국가제도, 경제, 과학기술 등 유용한 지식을 기본 내용으로 삼는다. 실학의 사유양식은 실용주의라기보다 보편 도덕을 진리로서 탐구하는 합리성이고, 근세 실학은 합리적 사유를 진전시켜 유용한 지식의 수준을 높이고 내용을 풍부히 하여 근대 학문에 접근하였다. 그래서 근세 실학은 功利와 물리의 논의에 대한 道理의 구속을 완화하고 논리성과 실증성을 진전시켰다. 문호개방 이전 동아시아 학술사의 특성은 유학의 지배, 그 연장선에서 주자학의 주류학풍으로의 부상이라면, 그 세계사적 보편성은 기축시대 인류 보편도덕의 확립의 일환으로서 성립한 유학, 그리고 근대 전환기의 산물로서 근세 실학이다. 후자는 유럽의 초기 계몽주의에 비견할 수 있다. 세계사적 근세에 동아시아 모든 나라에서 학문의 근대화 추세가 나타나 도도한 물결을 이루었는데, 그 학풍을 나타내는 용어로는 근세 실학이 가장 적합하다. 역사적 용어로서의 실학 내지 근세 실학은 유학을 기본을 삼으면서 諸子百家와 서양 학문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改新유학으로 보면, 세계학계에서 동아시아학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의의를 가진다. 조선시대 사상사는 주자학의 지배와 衛正斥邪사상으로의 연결, 그리고 근세 실학의 대두와 개화사상으로의 접속으로 집약할 수 있다. 조선시대 동아시아적 수준의 학문 성취는 주로 근세 실학에서 일어났다. The essence of Silhak, as a Chinese language, is the universal mankind morals. Silhak as a historical term, or the early modern Silhak was open-minded to all philosophers and scholars including Westerners, and reformed Confucianism to enhance its useful knowledges such as institutions, economy, and science and technology. Silhak's way of thinking was rationality which covered pragmatism. And the early modern Silhak relaxed the restraint of Confucian morals on pursuing profits and exploring natural phenomena so as to enhance its useful knowledges. The characteristics of East Asian scholarship before opening doors to Western counties was the domination of Confucianism, and the rise of Neo-Confucianism as mainstream scholarship. And its universality was the establishment of Confucianism which formed a part to pursue the universal mankind morals in Axial Age, and the early modern Silhak as a product of the early modern period. The latter can be compared to the early Enlightenment of Europe. The thoughts of the Joseon Dynasty can be summarized as the domination of Neo-Confucianism, and its connection to the anti-modernization movement on the one hand, and the rise of the early modern Silhak, and its connection to the modernization movement on the other h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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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청(明清) 실학(實學) 계몽사조(啓蒙思潮)와 유형원(柳馨遠) 사상(思想)의 새로운 이론의 관계(關係)

        祁志祥 한국실학학회 2020 한국실학연구 Vol.0 No.40

        중국 학계에서는 관습적으로 “실학”이라는 단어로 청나라 시대 학술의 특징을 개괄한다. 넓은 의미의 “실학”은 당연히 實事求是의 사유방법을 가리킨다. 이것으로 중국 고대 사상계를 비추어보면, 이 방법은 청나라 시기 이전에도 뚜렷하게 존재하여, 중국사상의 발전과 변화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였다. “실학”의 넓은 의미를 이해함에 기반하여, 청나라 시대뿐만이 아니라 명나라 시대까지 모두 “실학”이라는 단어를 써서 포괄할 수 있다. “明·淸 시대 실학계몽 사조”는 “실학”의 중요한 지점이고, 또한 중국 고대 사상사의 중요한 지점이다. 청나라 시대 사상가의 실학 계몽사상은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주제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첫째, 정욕을 존중하면서, 감정에 통달하고 욕망을 이룰 것을 주장했다. 둘째, 인정과 사사로움을 인정하였다. 셋째, 독재 군주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 “實學啓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이 용어는 본체와 작용을 합일하는 표현이므로 明·淸 시대 사상계 전체의 시대적 특징을 개괄하여, 더욱 적확하고, 실제와도 더욱 부합할 것이다. 17세기는 明·淸 교체기로, 중국 사상계의 실학계몽 사조가 주변의 동아시아 국가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일으켰으며, 동아시아 지식인의 사상 변화를 발생하게 하였다. 柳馨遠은 한국 실학사조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며 그의 『磻溪隨錄』은 이 방면에서의 대표작이다. 中国学界习惯用“实学”概括清代学术的特征. 所以广义的“实学”当指实事求是的思维方法. 以此观照中国古代思想界, 这种方法在清代以前就鲜明地存在着, 它贯穿在中国古代思想史发展演变的始终. 基于对“实学”的广义的理解, 不仅清代, 而且明代, 都可以用“实学”去概括. “明清实学启蒙思潮”是“实学”的重点, 也是中国古代思想史的重点. 清代思想家继续明代的实学启蒙方向, 运用“征实求真”的方法, 倡导“经世致用”之学, 进一步掀起了对唐宋唯理主义思想启蒙的高潮. 清代思想家的实学启蒙思想, 集中体现在以下几个问题上:“一是尊重情欲, 主张达情遂欲二是肯定人情怀私三是对独裁君主的批判. 用“实学(用)启蒙(体)”这个体用合一的提法概括明清思想界的整体时代特征, 更为准确․更为符合实际. 17世纪是明清交替之际, 中国思想界的实学启蒙思潮对周边的东亚国家直接或间接地产生了影响, 使得东亚知识分子的思想发生了变化. 其中一个例证就是韩国的“实学”思潮. 而柳馨远就是韩国实学思潮中的一个代表性人物. 他的《磻溪随录》就是这方面的代表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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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실학의 전개양상과 성격

        하우봉 한국실학학회 2018 한국실학연구 Vol.0 No.36

        In the lat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the practical studies was developed around Gyeonggi and Honam area. Both of them are closely related to each other and have influenced and developed from the beginning. Although Yu Hyongwon(柳馨遠) was born in Seoul, he spent 20 years of his life in Jeolla-do Buan where he completed the “Bangyesurok(磻溪隨錄)”, Therefore, in the late Chosun dynasty silhak can not distinguish the connection with Honam area from its occurrence. On the other hand, the late Chosun dynasty silhak was fruitful by being confined by Chung Yakyong(丁若鏞). Jeolla-do Gangjin is the place where his ideas have been fruitful. In this respect, it can be said that Honam was the living and fruitful area of Chosun dynasty silhak. Geungi Silhak(近畿實學) and Honam Silhak(湖南實學) have been closely related to each other since the early formation process, and there have been exchanges from the beginning. But at the same time, they are different and have different characteristics.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equate them. Particularly, it is problematic to recognize Honam Silhak as a large category of Giho Silhak(畿湖實學). Identification of its identity will help expand the implications and outlook of the Silhak. To comp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two, Geungi Silhak centered on Seoul and Gyeonggi-do are open to nature through the western science introduced from the Ching China(淸). They positively embraced new ideas and introduced the theory of systemic reform. In addition, the Bukhakpa(北學派) based on Seoul had a mercantile character to protect the city's self-employed craftsmen and merchants. On the other hand, Honam Silhak has a tendency to be indigenous based on Jeolla-do's regional background. Honam Silhak scholars tried to reform the contradictions of rural society, so they were strong in order to protect the interests of independent self-farmers. Another characteristic of Honam Silhak is the encyclopedic aspect that aims for erudition. Yu Hyongwon, Shin Gyungjun(申景濬), Hwang Yunseok(黃胤錫), Wi Baekgyu(魏伯珪) left a vast amount of writings. As an encyclopedist, they can be evaluated as a practical ideological movement. In particular, their studies are aimed at practicality and welfare, and also have an important meaning in that they lead to Korean studies. 조선후기의 실학은 경기지역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양자는 상호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으며 처음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였다. 조선후기의 실학의 비조인 반계 유형원은 서울에서 출생했지만 생애 후반기 20년 간을 전라도 부안에서 보내면서 반계수록을 완성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실학은 그 발생에서부터 호남과의 연관성을 빼놓을 수 없다. 한편 조선후기 실학은 다산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면서 결실을 맺었다. 그런데 다산의 사상이 18년에 걸쳐 결실을 맺은 곳은 전라도 강진의 다산초당이었다. 근기실학과 호남실학은 반계에 의해 일차 연결되었고, 다산에 의해 다시 집대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호남은 조선실학의 산실이자 결실을 이룬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기실학과 호남실학은 초기 형성과정에서부터 깊은 연관성이 있고 다산에 이르기까지 교류가 이어졌지만, 동시에 다른 점이 있으며, 각기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양자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호남실학을 기호실학이라는큰 범주에 넣어 인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독자성을 밝히는 것이 실학의 내포와 외연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양자의 특징을 비교해 보자면,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근기실학은 청으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사조인 고증학과 서양과학을 통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들은 북학과 서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육경고학, 양명학, 고증학 등을 발전시켰고, 보다 근본적인 체제개혁론을 제시하였다. 또서울을 근거지로 하는 북학파는 이용후생을 중시하며 도시의 자영수공업자와 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중상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이에 비해 호남실학은 전라도 라는 지역적 배경과 풍토를 바탕으로 토착성과 자생성이 강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호남실학은 농촌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기 때문에 독립자영농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중농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다. 호남실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박학을 지향하는 백과전서적 면모이다, 반계를 비롯해 신경준, 황윤석, 위백규 등은 모두 성리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당대의 박물학자 내지 백과전서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신경준, 황윤석, 위백규가 보여준 백과전서적인 박학성은 중요한 실천적 사상운동으로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의 학문은 실용성과 이용후생을 지향하고 있으며, 또 국학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경준과 황윤석, 위백규의 지리학, 언어학, 역사학, 자연과학 등의 연구는 탁월한 성과로서 國學 분야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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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 윤리학과 실학: 도덕수양에 대한 다산의 접근

        단 베이커 한국실학학회 2009 한국실학연구 Vol.0 No.18

        70년이 넘게 실학(實學)이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에 살았던 흥미로운 많은 저술가들에게 적용돼 왔다. 그러나 어떤 사상가들을 ‘실학 사상가’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선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하긴 하지만, ‘실학’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합의가 없는 상태다. ‘실학’이라는 말의 의미가 명료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떤 사상가는 ‘실학 사상가’라고 표식을 붙이며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지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나는 실학개념에 좀 더 정확한 정의를 내리고 싶다. 그 방향으로 향하는 첫 번째 걸음으로 나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보통 다산을 ‘실학’자로 상찬(賞讚)하는 사람들은 그의 정부행정, 토지개혁 그리고 다른 경세문제를 다룬 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한 글들이 실질적인 문제를 언급하고 다산이 실질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유교경전에 대한 다산의 주석 또한 그의 ‘실학정신’의 증거로서 자주 인용된다. 그 주석이 다산 당시 지배적이었던 성리학의 몇 가지 기본 전제에 도전하는 독창적인 사상가의 면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산이 개인의 행동에 대해 쓴 글을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도덕성과 자기 수양에 대한 글은 획기적인 실용성과 인간의 도덕 심리학, 인간의 도덕적 의무에 기초하며 이를 계발하는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다산은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선(善)에 대한 성리학의 수사(修辭)를 넘어 선하게 살려는 인간의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다산은 자신이 설명한 그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기술을 제안하였는데, 그것은 우리의 행동을 언제 어디서나 늘 보고 있는 상제(上帝)를 의식하도록 고무시켜 준 것이었다. 더욱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처방은 일상생활 속의 개인행동에 나타나는 도덕 심리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다산의 구체적인 도덕 처방과 그의 실용신학(實用神學)만으로도, 이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배울 점이 있는 중요한 사상가로서 그를 실학의 일급 사상가로 지칭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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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경세론에서 본 실학

        ( Seong Yun Kim ) 한국실학학회 2013 한국실학연구 Vol.0 No.26

        이 논문은 조선후기 실학의 경세론을 정치의 개념과 방법, 군주론, 왕정론, 윤리론으로 나누어 그 추이를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새롭게 제기한 주요 논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조선후기의 실학은 서구에 비견하자면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에서 절대왕정에 이르는 시기의 사회구성과 유사한 조선의 상황을 배경으로 나타난 유교적 인문주의의 색채를 띤 근대지향적 정치 · 사상운동이었다. 둘째, 실학 경세론의 발전 과정을 그 내용과 성격, 그리고 그것이 주로 영향을 받거나 준거(準據)로 삼은 경전이나 학술사조를 중심으로 대별하면 대체로 ① 『맹자』의 평균주의(平均主義)와 선부후교론(先富後敎論)에 주목한 단계(이이), ② 『주례』를 국가체제 재건을 위한 이론적 준거로 삼은 단계(유형원 · 이현일), ③ 제자백가나 탈성리학적인 견해들을 실질적으로 참용(參用)하면서 주자학의 경세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이론을 구축해가는 단계(성호 · 강화학파), ④ 서구 과학이나 철학 및 청대 고증학 등을 활용하는 한편 정치적 적용을 거치면서 새로운 정치이론을 심화하는 단계(후기실학자)로 나눌 수 있다. 셋째, 실학의 연원은 공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안민(安民)과 부국강병을 지향하던 두 갈래의 물길, 즉 정전제(井田制) 복구를 중심으로 하는 평균주의(平均主義) 사고와 북인계열의 국가중심의 정치적 사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갈래가 한백겸(韓百謙) 등의 평양 기전(箕田) 연구를 기폭제로 하여 하나로 합쳐지면서 실학은 주자학과 구분되는 조선 나름의 개성있는 경세학으로 등장했다. 넷째, 경세론의 맥락에서 볼 때 실학의 가장 큰 특색이자 장점은 평균주의와 국가주의의 강고한 결합에 있다. 실학이 갖는 평균주의 전통은 국가주의가 갖는 전제성(專制性)을 현격히 완화킴으로써 민본적(民本的) 성향이 강한 조선의 왕정이 전제주의로 흐르지 않고 차후 국민국가로 나아갈 수 있게 할 동력으로 잠재해 있었다. 이것은 조선의 근대화가 서구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국가 주도의 근대화를 거친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성찰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실학 연구의 시의성을 높일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다섯째, 실학은 성리학이 주장하는 도덕정치론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민생 복리를 실질적으로 증진시키는 것을 정치로 이해하였다. 성리학의 도덕적 보편주의에 대비되는 이러한 실학의 현실주의 · 공리주의 정치 개념은 먼저 ‘선부후교론’(先富後敎論)의 형식으로 제기되었고, 이후 정치의 개념에 대한 주희의 명제를 비판하면서 정치와 도덕을 분리해 나갔다. 여섯째, 실학은 정치의 방법에서도 예교(禮敎)를 통한 도덕적 감화를 우선하는 성리학의 입장을 비판하고, 법과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도기일체론’(道器一體論)을 표방한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왕도와 패도를 절충하려는 이러한 실학의 정치방법론은 왕패병용(王覇竝用) · 왕패일도론(王覇一途論) · 관맹상제론(寬猛相濟論) · 교법일치(敎法一致) · 교법상보(敎法相補)의 형식을 통해 확산되었다. 일곱째, 조선후기에 통치체제에 대한 새로운 모색 과정에서 군주권은 그 핵심적 요소로 부각되었고, 존군론(尊君論)은 실학의 공리적 정치관이 발달함에 따라 강화되어 갔다. 존왕론에 의해 새롭게 조명된 ‘신(新)군주’의 상은 군사(君師)라는 형태로 먼저 나타났으며, 곧이어 군주가 도학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존군의 논리는 이후 군주를 태극 및 상제(上帝)에 비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절대군주론으로 발전했다. 여덟째, 실학의 왕정론은 다원적 권력을 중앙의 국왕에게 일원화하고 정치적 정통성 또한 국왕이 독점함으로써 이른바 중개세력을 해소하고 국왕의 지배에 복종하는 동질적이고 균등한 국민을 만들어 낼 것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국민국가에 선행하는 절대주의 왕정론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아홉째, 신분제를 부정했던 실학은 사회적 불평등 질서를 옹호하던 오륜의 윤리에 대신하여 『맹자』에 나타난 삼달존(三達尊)을 대안으로 제시했으나, 곧 이어 모든 신민에게 적용되는 통일된 평등 윤리로서 효제(孝悌)를 제시했다. 효제 윤리는 윤휴 등에 의해 이미 제시되었으나 이것을 정치차원에까지 확대하여 크게 선양했던 인물은 영조와 정조였다. 정조의 명덕본심설(明德本心說)을 계승한 정약용은 명덕이 효 · 제· 자(孝悌慈)임을 논증함으로써 그 인간론적 근거를 완성했다. 이 때의 효제는 신분적 · 계급적 지배의 규율로서가 아니라 평등한 개인 상호간에 호혜성 수수의 관계로 재조명된 것이므로 그것이 갖는 사회실천적 의미는 이전과 크게 달랐다. The main points of this thesis can be centered on several points as follows. First, Silhak of the post-Joseon Dynasty, if compare with Western history, was the modern-oriented political and ideological movement float a color of Confucianistic humanism. It came onto the scene in the same situation with the time of the Renaissance and absolutism. Second, Silhak`s progress can be separated as four steps: pay attention to equilibriumism of Mengtzu, make Chou li to standard referred for reconstruction of national structure, criticize orthodox Neo-Confucianism and construct new political theory, deepen new political theory with application of western science and bibliographical study of Chinese classics. Third, Silhak`s origin can be finded out two waterway pointes to wealth and military strength of a nation with utilitarian thoughts : equilibriumism and nationalism. These two waterway put together, Silhak came on stage as the individualistic governing theory. Fourth, The most important distinction and merit of Silhak shall be the steady union between equilibriumism and nationalism. The driving force alive in Silhak`s tradition of equilibriumism behind Korean absolutism not let run away into despotism and will develop to the nation-state later. Fifth, Silhak criticized the bounds of Sung Confucianism`s Moral politics, asserted that politics is the seeking to increase the populace`s wealth. These new political notions evolved the ``separation of politics and morality``. Sixth, In reference to the method of politics, Silhak criticized Confucianism`s political theory and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law and institutions. Seventh, The insistence of respect monarch strengthened with Silhak`s utilitarian thoughts. These insistence of respect monarch took an absolute sovereignty theory. Eighth, Silhak`s royal regime theory had gradually taken on a character of the absolute monarchy theory. King Youngjo(英祖) and Jeongjo(正祖) presented Hyoje(孝悌) as the moral foundation for the absolute monarchy. Ninth, In the beginning Silhak presented Maengja`s Samdaljon(三達尊) instead of Oryun, soon afterwards presented Hyoje(孝悌) as the unified equality ethics. Who enhanced Hyoje(孝悌) ethics was King Youngjo(英祖) and Jeongjo(正祖). The Social practice meanning of Hyoje ethics was different from former times because it was recounted thing not the social standing domination discipline as the mutual benefits relationship between equal per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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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2: `실학`을 다시 생각한다] 실학(實學) 개념들의 통합적 이해를 위한 시론(試論)

        이헌창 ( Lee Hun-chang ) 한국실학학회 2016 한국실학연구 Vol.0 No.32

        이 글에서는 실학이 그 개념들의 통합적 이해를 통해 동아시아의 학문과 근세사를 이해하는 데에 유용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중 한 일 3국에서 유학의 대부분 유파가 실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에서, 실학은 유학에 고유한 성격이었다. 유학은 인류의 보편적 도덕을 탐구하여 그에 입각한 개인적 정치적 실천을 추구한 점에서 실질적인 유용성을 추구하는 학문이어서, 실학이라고 자부하였다. 기축시대 공자의 유학은 예수, 석가 및 그리스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인류 보편적 도덕을 추구하였는데, 실학이라는 용어로 학술 전반의 지향성을 담는 문화는 보편 도덕의 개인적 정치적 실천에 봉사하려는 유학에 고유하게 보인다. 실학의 자부심이 특히 강한 程朱學은 유학을 학문적으로 발전시켰지만, 도덕지상주의를 지향하여 관념적인 철학에 입각하고 사적 물욕을 철저히 부정한 점에서 근대성과는 달랐고, 功利와 物理의 논의를 道理에 종속시켜서 空理空談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다. 명말 이후 중국, 조선왕조, 그리고 도쿠가와 일본에서의 經世致用學, 考證學 등은 국가제도, 경제, 과학기술 등의 유용한 지식에 관한 논의를 진전시켜, 유럽 근대화에 이바지한 계몽주의에 통한다. 경세치용학은 공리와 물리에 대한 도리의 구속을 완화하여, 공리의 경제합리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제시하고 서양 자연과학의 물리를 수용하였다. 한국의 역사학계는 그것을 실학으로 불렀는데, 필자는 유가가 말한 실학과 구분하여 近世 실학으로 부른다. 조선의 이용후생학은 경제 기술론에서 경세치용학을 발전시켰다. 근세 실학은 유학의 修己論과 治人論이 상호작용하면서 발전하는 가운데 대두하였다. 근세 실학을 정책에 구현한 朝臣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세 실학은 국가제도와 경제와 문화역량의 전반적 발전과 병행하였고, 유럽 학문의 자극을 받았다. 근세 실학은 동아시아 근세의 한 측면이었다. 실용에 무관한 진리의 탐구에 소홀한 실학적 사유의 한계로 문호개방 이전 동아시아는 과학혁명을 달성하지 못하고 사회과학이 성립하지 못하였으나, 근세 실학은 문호개방 후 구미 근대학문의 수용을 위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This paper shows that Silhak is a useful concept to grasp scholarship and early modern in East Asia by integration concepts of Silhak of its significant studies. Confucianism was inherently Silhak to pursue universal mankind moral and its individual and political practice. Silhak seemed to be a unique term of Confucian culture. Confucianism of late Ming and Qing China, Joseon Korea, and Tokugawa Japan evolved to develop discourse on institution, economy, and science and technology, which was comparable to useful knowledge of the Enlightenment in Europe. Historians of Korea have called them Silhak, and I call them the early modern Silhak in order to divide from the term Silhak which Confucians used. The early modern Silhak was the product of internal development of Confucianism, backed up by the development of state institution and economy, and stimulated by the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Silhak as a scholar culture had not only a strong point to reform Confucianism usefully, but also an weakness in developing science independent of usefulness unlike the classical Greek culture. Though the paradigm shift for modern science occurred owing to the impact of opening doors to the modern world system, the early modern Silhak built the foundation for accepting modern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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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1 : 심학(心學)과 실학(實學)의 재검토 ; 조선양명학의 실심실학(實心實學)과 조선 후기 실학(實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양명학관(陽明學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중심으로-

        한정길 ( Jeong Gil Han ) 한국실학학회 2014 한국실학연구 Vol.0 No.28

        이 글은 조선양명학의 특성을 ‘實心實學’에서 찾는 것이 어떤 의의와 문제점이 있는지를 규명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근래의 많은 양명학 연구가들이 조선양명학을 실심심학으로 규정하는데, 그것은 위당 정인보의 양명학 연구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 크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위당의 양명학관을 중심으로 조선양명학을 실심실학으로 규정하는 것이 지니는 의의와 문제점을 검토하고,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방안을 살펴보았다. 위당은 조선후기 실학과 구분되는 조선양명학의 특성을 실심실학에서 찾는다. 위당이 양명학을 실심실학으로 이해한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닌다. 첫째는 양명학을 실심실학으로 규정함으로써 實心과 무관하게 학문을 해온 조선의 주자학자들을 비판할 수 있는 논리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둘째는 양명학의 근본정신을 누구라도 쉽게 자기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一眞無假’한 實心에서 찾음으로써 민중들을 보다 쉽게 각성시킬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일체의 판단 준거를 자기 내면의 實心에 둠으로써 사태의 시비선악과 학술의 옮고 그름을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위당의 이러한 양명학관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실심실학’이라는 용어가 양명학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심실학’은 주자학자들이나, 양명학에 대해서 비판적인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실심에 근거한 실학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를 곧바로 양명학자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위당은 ‘조선양명학파’를 서술하면서 실심에 근거한 실학을 한다는 이유로 양명학을 이단으로 비판하는 사람들까지 양명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양명학자가 아님에도 ‘조선양명학파’로 분류하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했다. 양명학을 실심실학으로 규정한 것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곡의 제자들이 자기 선생의 학문을 실심실학으로 규정한 데에 가 닿는다. 하곡에게서 실심은 ‘心卽理’의 心이요, 良知이다. 따라서 하곡의 실심실학은 양명학적 실심실학으로서 양지실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곡의 제자들이 하곡학을 ‘실심실학’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한 것에 따르면 그들이 말하는 實心은 良知가 아니다. 이것은 실심을 양지로 보는 하곡의 견해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하곡의 실심실학은 양명학적 실심실학이지만, 그의 제자들이 말하는 실심실학은 이미 양명학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이 점은 소위 ‘강화학파’, 혹은 ‘하곡학파’로 불리는 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학문 특성을 실심실학으로 묶을 수는 있을지라도 그들 모두를 양명학적 실심실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양명학적 실심실학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실심을 ‘심즉리’의 심이나 양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이런 기준에 입각하여 실심실학을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서 양명학적 실심실학자들을 분류하는 작업을 더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investigate the meaning and problem in finding the characteristics of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from the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Currently many researchers of the Yang-ming studies has stated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a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and that has been influenced mostly from the studies of Yang-ming of Widang Jeong in-bo. Therefore, in this thesis, it will review the meaning and problem of stating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a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based on the Yang-ming study approach of Widang and to look into the plans to supplement it. Widang finds the characteristics of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that differentiates from Practical Learn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from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In terms of Widang understanding the Yang-ming studies a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there are three meanings. First, by stating Yang-ming studies a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it has provided the logical grounding that can criticize the scholars of Chu-tzu that has studied regardless of the sincere mind. Second, by finding the basic spirit of the Yang-ming studies from the sincere mind that can be confirmed easily from oneself, it has provided the way to enlighten the masses. Third, by putting the whole judgement standard in one`s own sincere mind, it has open a way to understand and judge and act on the right/wrong/ /good/evil of the state of affairs and the right/wrong of studies in a subjective way. However, such Yang-ming study approach of Widang has problem. That is, the term of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is not the exclusive property of Yang-ming studie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has been used frequently by Chu-tzu scholars or scholars of the Practical Learni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at were critical to Yang-ming studies. Therefore, even if someone claim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sincere mind, you cannot evaluate him as a scholar of Yang-ming studies. Regardless, by stating the ``the school of Yang-ming Studies in the Joseon Dynasty``, Widang has evaluated the people who criticized the Yang-ming studies as cult just because they pursued practical learning based on sincere mind as scholars of Yang-ming studies. This eventually resulted in categorizing them who are not Yang-ming study scholars as ‘Yang-ming study school of Joseon``. In terms of stating Yang-ming studies a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the origin goes way back to the pupils of Hagok(霞谷) Jeong, je-du(鄭齊斗) as they stated the study of their teacher a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For Hagok, the sincere mind is mind of ‘the mind is principle’ and is Innate knowledge. Therefore,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of Hagok i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Innate knowledge as a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of Yang-ming studies. However, as the pupils of Hagok has stated the Ha-gok Studies a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when you look into the reason, the sincere mind is not innate knowledge. This goes beyond the approach of Hagok that sees sincere mind as innate knowledge. Although the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of Hagok i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of Yang-ming approach, the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that are stated by his pupils has already gone beyond the scope of Yang-ming studies. This goes the same to the so-called ‘Kanghwa school’, or ‘Hagok school’. Although we can group their scholar characteristics into the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we cannot take all of them as Yang-ming study of the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In order to be evaluated as a Yang-ming study of the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the sincere mind should be understood as mind or innate knowledge of ‘the mind is principle’. From now on, based on this standard, we could work more on categorizing the Yang-ming study approach of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among the ones who claims Practical Learning based on the Sincere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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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의 정책사와 근세 실학, 그리고 金堉(1580∼1658)

        이헌창 한국실학학회 2019 한국실학연구 Vol.0 No.37

        ThispaperexplorespoliciesoftheearlymodernSilhakandtheir significances,focusingonKimYuk.TheJoseondynastyhadpolicy achievements, including longevity, better than average among pre-industrial dynasties, but ended in colonization. The early modern Silhak became a school ofConfucianthoughts,inprocessofseekingforpoliciestoimprove impoverished living standards, financial aggravation, and weakening military power in the 16th century, shocked by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It contributed to developing the political system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improving living standards, finance, and military power after the Invasion. The policyachievementsofKimYuk.suchasDaidongLaw(大同法),coinage institution, Siheon calendar(時憲曆) etc, contributed to economical and cultural development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The policy achievements of the Joseon dynasty were supported by Confucianism, Neo-Confucianism, and the early modern Silhak. Though the early modern Silhak which inherited Kim Yuk‘s policy orientation was not inflential in policy decision, it presented policies useful for strengthening national power and preparing the ground for modernization by Koreans, which Neo-Confucians and government could not make or accept. Elites of middle zone between Neo-Confucianism and the early modern Silhak were the central force to have policy achievements, interacting with the early modern Silhak scholars, and were changed into the Enlightenment thoughters early. A significance of Silhak lies in its political practise, and studies on policy can contribute to studies on Silhak. 이 글은 김육을 중심축으로 하여 근세 실학의 정책과 그 의의를 고찰한다. 조선왕조는 전근대 세계에서 평균 이상의 성취를 이루고 長壽하였으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조선왕조의 정책 업적은 先秦 유학, 주자학 및 근세 실학의 이념에 힘입었다. 근세 실학은 조선 초 정치체제의 발전, 임진왜란 후 생활수준, 재정 및 군사력의 개선에 이바지하였다. 16세기 궁핍해진 인민과 재정, 그리고 허약해진 군사력의 개선책을 강구하는 가운데 임진왜란의 충격을 받으면서 근세 실학은 이이-유성룡-김육-유형원에 의해 유학의 한 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김육의 대동법․鑄貨제도․시헌력 등 정책 활동과 업적은 17․18세기 경제적․문화적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김육의 정책 지향을 계승, 발전시킨 근세 실학은 정책적 영향력이 없었지만, 국력의 강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자주적 근대화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에 유효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근세 실학은 시장 육성책, 부국강병책, 외국문명의 개방적 수용론 등으로 주자학 정책론의 약점을 극복하였다. 수도권 관료를 중심으로 하는, 주자학과 근세 실학의 중간지대 엘리트가 근세 실학자와 교류하고 자극을 주고받으면서 정책 업적을 이룬 중심 세력이고, 먼저 개화사상가로 변모하였다. 실학의 중요한 의의는 정치적 실천인 정책에서 찾을 수 있고, 정책사 연구는 실학 연구에 이바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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