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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위(姜瑋)의 연행록(燕行詩)에 나타난 한중(韓中) 지식인의 교류양상

        주승택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6 한국문화연구 Vol.11 No.-

        20세기 동아시아 각국에 근대국가가 설립하기 이전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자국어 이외에도 한문(漢文)이라는 공통문어(共通文語)를 습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외교의 현장에서 마주쳤을 때 통역의 개입 없이도 의사소통에 별다른 지장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필담(筆談)을 통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화답시(和答詩)를 통하여 자신의 입장이나 감정까지도 무리 없이 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또 일정한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있었고 불교나 도교, 중국의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의 사상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과 이해를 공유하고 있었다. 본고는 19세기 말엽 조선을 대표할 만한 시인이자 학자였던 강위(姜瑋, 1820~1884)의 두 차례에 걸친 중국 방문 과정에서 지어진 연행시(燕行詩)와 필담 기록인 담초(談草)를 통하여 두 나라 지식인들의 교류양상을 고찰하여 보았다. 강위는 제1자 중국여행인 1873~1874년의 중국여행에서는 어릴 적 친구인 정건조(鄭健朝)의 수행원 자격이었다. 그리하여 정건조를 수행하여 중국의 양무파(洋務派) 관리인 장세준(張世準)을 만나 국내외 정세에 관하여 여러 차례 필담을 나누었다. 또한 오홍은(吳鴻恩)과 만나서 교류하며 퇴직 고위관료인 그의 부친과 임명을 기다리는 예비 관료인 그의 동생을 소개받기도 하였다. 강위는 자신의 시집인『고환당수초(古歡堂收草)』와 자기의 제자인 이건창(李建昌), 정기우(鄭基雨), 홍기주(洪岐周), 이중하(李重夏) 네 사람의 공동시집인 『한4객시선(韓四客詩選)』의 비평을 장세준과 오홍은의 부친인 오겸복(吳謙福)에게 부탁하였다. 그런데 장세준으로부터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거절당하였고 오겸복은 아들인 오홍은에게 지시하여 자세하게 비평하여 주었다. 강위는 기대와는 달리 중견 관리인 장세준, 오홍은과 교류하는 것으로 제1차 중국여행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1874~1875년에 걸친 강위의 제2차 중국여행은 자신의 제자인 이건창의 수행원 자격이었다. 신분이 낮아 관직을 갖지 못한 강위는 수행원 자격이 아니면 중국에 갈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여행은 19세기 후반기 한국을 대표하는 네 시인 가운데 두 사람인 강위와 이건창이 함께 중국을 방문하는 특별한 경우였다. 그런데 1년 전에 자신들의 시집을 통하여 중국에 이름이 알려진 강위와 이건창은 1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 지식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특히 당시 중국 지식인 사회의 중심인물인 서부, 황옥(黃鈺)과의 교류는 한중 지식인 교류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뜻 깊은 교류였다. 그리하여 박제가(朴齊家), 박제가의 제자인 김정희(金正喜), 김정희의 제자인 강위 3대에 걸쳐서 한국과 중국의 정상급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100여 년의 기간에 걸쳐서 의미 있는 교류의 역사가 쓰여질 수 있었다. 강위의 스승인 박제가와 김정희가 주로 학문과 예술을 주제로 교류한 데 비하여 강위는 문학과 국제정세가 토론 주제였다는 사실은 시대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Before the modern states were established in each countries of East Asia till 20th century, the intellectual people in East-Asian countries had acquired the common literal language of Chinese character as well as their own languages. Therefore, they had little difficulties in mutual communications without interpreters when met together in diplomatic conditions. They could discuss through literal communication and expressed their own standpoint or feelings through 'Hwadapsi(和答詩)', the replying poem, without any trouble. They also had some Confucian educations and considerable knowledges and comprehensions about Buddhism, Taoism or all philosophers and scholars in ancient China in common. In this study, the aspects of intellectual intercourses between scholars in Joseon and Ching are inquired through 'Yeonhaengsi(燕行詩)', poems of travel to Beijing, and 'Damcho(談草)', record of literal communications, written by Gang Wee(姜瑋, 1820~1884), the outstanding poet and scholar at late 19th century of Joseon, during two times of his travel to Beijing. Gang Wee was accompanied with Jung Geon Jo(鄭健朝), his old friend from childhood, as an escort at first travel to Ching from 1873 to 1874. And he met Zhang Shi Zhun(張世準), a government official and a member of Yang Wu Pai(洋務派), and discussed international state through literal communications accompanying Jung Geon Jo. He also met Wu Hong En(吳鴻恩) for intellectual intercourse and was introduced to Wu's father, a retired high-ranking official, and younger brother, a reserved official waiting appointment. Gang Wee asked Zhang Shi Zhun and Wu Quian Fu(吳謙福)(Wu Hong En's father), to comment about his own poetry, 'Gohwandangsoocho(古勸堂收草)' and 'Hansagaeksiseon(韓四客詩選)', poetry of co-work by his four disciples, Lee Geon Chang(李建昌), Jeong Gee Woo(鄭基雨), Hong Gee Joo(洪岐周), Lee Joong Ha(李重夏). But, Zhang Shi Zhun refused for the lack of time, and Wu Quian Fu ordered his son, Wu Hong En to comment in detail. Gang Wee returned from first travel to Joseon, satisfied with the intellectual intercourses just with Zhang Shi Zhun and Wu Hong En. For second travel to China, Gang Wee was accompanied with. Lee Geon Chang, his disciple, as an escort from 1874 to 1875. Due to his low social status, he had no chance to travel to Ching except accompanying as an escort. This travel was very special, as Gang Wee and Lee Geon Chang visit Ching together, for they were two of four outstanding poets at late 19th century in Joseon. They were, however, welcomed enthusiastically by the intellectual people in Ching incomparable with the situation of an year before because they were well known in Ching by their poetries introduced an year before. Especially, the intellectual intercourse between Xu Fu(徐부), Huang Yu(黃鈺) and Gang Wee, Lee Geon Chang was the last significant intercourse between scholars in Joseon and Ching, for Xu Fu and Huang Yu were the important opinion leaders in Ching. With Park Je Ga, Kim Jeong Hee(Park Je Ga's disciple), and Gang Wee(Kim Jeong Hee's disciple), there could be the significant intellectual intercourses between scholars in Joseon and Ching for one hundred years or so. While Park Je Ga and Kim Jeong Hee had the intercourses about scholastic pursuit and arts, Gang Wee discussed literature and international state, and this difference was the result of periodic change.

      • 退溪 李滉의 人間尊重的 思考

        주승택 안동대학교 2001 退溪學 Vol.12 No.1

        李滉(1501~1570)은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교육자이다. 그는 朱子가 완성한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를 당시 朝鮮社會의 현실에 알맞도록 적용시켜서 理氣互發論이라는 독특한 思想體系를 완성하였다. 그의 사상은 理는 發할 수 없다는 朱子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에 후배이자 제자인 寄大升(1527~1572), 李珥(1536~1584)로부터 날카로운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人間의 道德性을 최고의 價値로 내세우고 이를 실천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쓴 그의 一生은 後世의 학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으며 그 결과 學派나 地域을 초월하여 광범위한 尊崇을 받게 되었다.

      • 第七輯 解題: 蒼筠先生遺稿, 臨淵齋先生文集, 聚遠堂先生文集

        주승택 안동대학교 1992 退溪學 Vol.4 No.1

        『蒼筠先生遺稿』는 조선 선조 때 문신인 金箕報의 遺稿集. 김기보는 本貫이 安東으로 字는 文卿, 號는 蒼筠, 또는 金山이라 했으며 중종 10년(1531년)에 태어나서 선조 16년 (1588년)에 卒하였다. 蒼筠은 貫鄕이 安東이지만 南亶掌令을 지낸 증조부 永銖 때부터 서울에 살았고, 조부 瑛은 좌승지, 부친 生洛은 사포서별좌를 지낸 대대로 벼슬하는 집안의 후예였기 때문에 서울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일찍부터 聽松 成守琛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학문보다는 詞章 쪽에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 KCI등재

        性理學 · 韓國文學

        朱升澤 한중인문학회 2008 한중인문학연구 Vol.23 No.-

        本項硏究査明13世紀后期引進來的性理學對16世紀以后韓國文學的影響. 第-章是淮備階段, 追査漢文學在韓國的位相變化, 從資料較少的古代文學以來2,000多年韓國文學的主流是漢文學. 但是I5世紀中期創制訓民正音之后, 慢慢轉變成國文學(HanGeul文學)了. 第二章是考査輿訓民正音的創制相比的性理學的引進對韓圍文學的影響. 性理學的引進是形成道學派與詞章派等文學流派的-個重要的轉杭, 這兩충流派之間難于共存的性質上的差別因起了흔深刻的葛藤. 因此首先詞章派發動四大士禍壓迫了道學派, 但是16世紀中期道學派掌握政權之后, 反而詞章派被受壓迫. 第三章是査看道學派强化在韓國社會的位相, 其體系轉變爲性理學唯一主義, 結果韓國的漢文學也以詩爲中心轉變爲以文爲中心的情況. This study is to research the significance of Sung Confucianism introduced in late 13th century in Korean literature since 16th century. Chapter I is the preparation phase to track the transition of the place of Chinese literature in Korean literature. Chinese literature had been the mainstream in Korean literature for 2000 years of ancient literature in which not many sources are left for us to find: however it changed to Korean literature in Hangeul(Korean alphabets) when Hunminjeongeum was invented in mid 15th century. Chapter II reviews how introduction of Sung Confucianism accountable for a change equally significant to the invention of Hunminjeongeum influenced Korean literature. Introduction of Sung Confucianism brought the formation of two literary schools, Dohak and Sajang, which caused serious tension and conflict due to their different natures that could not co-exist. Initially and historically known as Hungu school, Sajang school oppressed Dohak school to cause four massacres of scholars (in Korean, 'Sadaesahwa'); when Dohak school, historically known as 'Sarim school' in mid 16th century, came into power, Sajang school became the object of oppression under the various names. Chapter III reviews the transition of Chinese literature in Korean literature from poetry-oriented to literature-oriented when Dohak school's social power grew and Korean society became onlyism system of Sung Confucianism.

      • 姜瑋와 黃遵憲의 만남

        주승택 중한인문과학연구회 2002 국제학술대회 Vol.- No.8

        韓國의 姜瑋와 中國의 黃遵憲은 1880년 日本에서 直接 만났다. 19世紀 後반 韓國과 中國을 代表하는 두 사람이 日本 땅에서 만났다는 事實은 무척 象徵的인데 이를 바탕으로 두 사람의 文學세계를 比較하여 보고자 한다. 첫 째, 姜瑋와 黃遵憲도 詩人인 同時에 外交官으로 活動하였던 人物이다. 姜瑋는 1976年부터 1883年 사이에 中國을 세 번, 日本을 두 번 訪問하였고 黃遵憲은 1877∼1894년 사이에 外交官으로 14年間이나 外國에서 生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詩人으로서 名聲은 韓·中·日 三國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한 海外 紀行時나 海外 風物時를 通하여 異國 정서를 自身의 詩世界에 中心 素材로 삼음으로서 獨特한 風格을 지닌 國際적 감각의 詩人들이었다고 評價할 수 있다. 둘 째, 姜瑋와 黃遵憲은 興味있는 思想的 基盤을 共有하고 있는 詩人이다. 姜瑋는 韓國의 北學派를, 黃遵憲은 中國의 春秋 公羊學派를 思想的 基盤으로 하고 있다. 韓國의 開化自强派는 大部分 北學派에서, 中國의 洋務自强派는 大部分 春秋 公羊學派에서 배출되었다. 北學派나 公羊學派는 華夷論的 世界觀을 克復하고 오랑캐라 할지라도 그들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開放的 精神姿勢를 가졌다는 點에서 近代化의 中心勢力으로 떠오를수 있는 共通點을 지니고 있었다. 셋 째, 姜瑋와 黃遵憲은 日本의 明治維新을 모델로 한 祖國近代化論을 共有하고 있었지만 日本의 侵略的 野慾에 대해서는 뚜렷한 對應策을 提示하지 못한 共通의 弱點까지도 共有하고 있었다. 이같은 관점이니 姜瑋와 黃遵憲을 비교 연구한다면 한·중 近代文學의 指向點이 어떤 점에서 共通되고 어떤 점에서 差異가 나는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 朝鮮中期 道學派와 訶章派의 對立樣相 : 허균과 삼용시인을 중심으로

        주승택 안동대학교 1996 退溪學 Vol.8 No.1

        흔히 穆陵盛際라고 불리우는 宣祖 年間 한국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검토되어야 할 시기 가운데 하나이다. 明宗이 後嗣가 없이 죽자 宗室 가운데서 선발된 河城君이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된 宣祖治世는 末年에 壬辰倭亂이 터지기는 하였지만 조선조 500년 기간 동안 文運이 가장 熾盛했던 시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문화의 융성은 어떤 한두 사람의 특출한 천재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 아닌 만큼 그 배경이 되는 사회, 역사적 요인에 대한 고찰이 먼저 요청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학 쪽에서 축적된 업적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인데 특히 李泰鎭 교수가 발표한 일련의 업적이 유익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 16세기 士林派의 성립 배경과 성장 과정을 고찰한 이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사림파라 불리우는 일단의 선비계층이 새롭게 형성된 것은 농업기술의 발달과 긴밀하게 연관된 사회변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곧, 한 사람의 선비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글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데, 교려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이 같은 여건은 대토지 소유자인 귀족층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러다가, 고려말엽인 14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농업기술의 발달은 윤작을 통하여 지력을 보존해야 했던 保閑法의 제약을 벗어나 점차 기술 집약적인 連作常耕法의 보급으로 地方의 中小地主들까지도 교육을 통한 신분적 상승을 꾀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新進士類들은 자신들과 유사한 사회적 배경 아래서 배태된 朱子學을 자신들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易姓革命에 성공하게 된다. 일단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후 일정한 기간이 지나자 이 신흥 사대부세력도 다시 신ㆍ구 양파로 분열하게 되는데, 고려말엽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조선왕조의 건국 및 太宗ㆍ世祖의 政變을 통하여 功臣 또는 戚臣으로서 世閥을 형성한 기성세력(勳舊派)과 지방에서 꾸준히 실력을 닦고 있다가 成宗 年間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세력(士林派)사이에 필연적으로 긴장과 갈등이 야기되기 시작하여, 마침내 四大士禍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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