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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무연구(實務硏究) : 재한화교(在韓華僑)의 법적지위(法的地位) 문제(問題)에 관한 소고(小考) -특히, 국내법 적용상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박상순 ( Sang Soon Park ) 법조협회 2006 法曹 Vol.55 No.11

        재한화교는 이 땅에서 태어나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 교육받으며, 우리말을 쓰고 우리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소위 준내국인화(guasi-nationlized)한 상태이면서도, 결코 동화되지 않고 자기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민족적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는 매우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우리사회의 한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듯 하면서도 ``주변인`` 내지는 ``경계인``으로서 완전한 법적 지위를 향유하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1992년 한중 수교이후 중국대륙에서 건너온 중국인들까지 체류하게 됨으로써 이들을 포함한 중국인에 대한 법적 지위 문제가 복잡하게 되었다. 재한화교의 국제법적 문제는 곧 대만에 대한 지위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대만의 지위문제가 복잡한 것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대만을 소유하고 있었던 실체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며, 특히 한중수교 이후 대만과의 외교관계단절에도 불구하고 국내에 체류하던 이들 화교에 대한 법적 지위 문제를 심도있게 검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이들은 미수교국 국민의 지위하에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만정부(사실은 중화민국정부)에서 발급한 중화민국 여권을 가지고 대한민국에 출입국하고 있고, 영주자격에 의거 영주권을 부여받아 체류하는 등 일반외국인보다 월등한 특혜와 법적 처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행 법령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 중국인에 대한 개념정의를 보다 명확하게 하고, 가칭 ``대만관계법``과 같은 특별법을 제정하여 실질적인 법적 처우를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사회가 지향하는 열린사회 내지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 걸맞는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외국인 포용정책을 추진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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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대(1863-1894) 성균관 과시 운영 연구

        정지연 교육사학회 2023 교육사학연구 Vol.33 No.1

        This study focuses on grasping the significances of the operation of the Seonggyungwan-Guasi(成均館 課試) by examining its concrete aspects during King Kojong's reign(1863-1894). Chnunchudogi(春秋到記), Jeolilje(節日製) and Hwanggamje(黃柑製) as the Regualr Guasi(定例的 課試) were conducted by the existing rules, but the scale of the benefits was expanded. Each Jeolilje was given the intrinsic role with Hwanggamje. Hwanggamje’s status was on a par with Dogijesul(到記製述)’s in regard to the level of the benefits. Ilchajeongang(日次殿講), Ilchajesul(日次製述) and Eungje(應製) as the Irregular Guasi(非定例的 課試) were shown King Gojoing’s period’s characters. Especially in Tongbangwe(通方外) Ilchajesul and Gwanhakyusangeungje(館學儒生應製) were awarded the benefits including Baccalaureat(小科) and Civil Service Examination(大科). And their number of the benefits usually was one hundred that it was much more than the other kinds of Seonggyungwan-Guasi’s. The characters of the Seonggyungwan-Guasi in King Gojong(高宗)’s period appeared from Gojong’s 24th year(1887). Those were the expanding number of the benefits and the diversification of the benefits corresponding to Baccalaureat. Through these the more candidate not only who lived nearby the capital but also in the provinces could take the part in the Seonggyungwan-Guasi and Joseon Dynasty could select the person who it needed. 본고는 고종대 성균관 과시를 정례적 과시와 비정례적 과시로 구분하고 각 과시의 시행 빈도 및 시행 기간, 은사규모, 은사종류, 응시자 수 등을 검토함으로써, 고종대 성균관 과시 운영의 특징을 파악하였다. 고종대 정례적 과시 중 춘·추도기, 절일제 및 황감제는 헌종‧철종대 이래의 규정을 준수하되 은사 규모가 이전 시기보다 확대되었다. 고종대 늘어난 소과 관련 은사는, 절일제 및 황감제에서는 고종21년(1884) 이래로 소규모로 내려졌다. 또한 절일제 및 황감제는 응시자 수, 은사의 규모나 직부전시의 부여에서 차이가 있어, 각각에 고유한 역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일제 및 황감제에서 은사자 규모가 가장 큰 것은 삼일제였으나 직부전시의 은사를 일정하게 가장 많이 내린 것은 황감제로, 황감제는 은사와 관련해서는 그 위상이 도기제술과 비슷하였다. 국왕의 의지가 실시 여부에 주요했던 비정례적 과시 중 일차전강이나 의례참반유생응제는 고종대에 은사자 규모가 확대된 것 외에 별다른 특징을 보이지 않았다. 고종대 과시 운영의 특징은 다른 비정례적 과시들에서 주로 보여진다. 고종14년(1877)에 처음 시행된 일차제술은 고종17년(1880)부터는 응시대상을 통방외로 확대하고 고종24년(1887)부터는 시행 횟수나 시행 시기가 일차전강과는 분리되어 운영된다. 일차제술에서는 대개 100명에게 은사를 내렸으며 대과와 소과의 은사를 모두 아우르는 은사를 내리곤 했다. 고종11년(1875)에 시행된 시작된 관학유생응제도 대부분 통방외로 시행하면서 일차제술과 거의 동일한 규모와 종류의 은사를 내렸다. 고종24년(1887) 이후에는 이 두 과시 외에 지역유생응제와 왕세자 관련 특정연령유생응제에서도 100명 이상의 은사자 및 소과 및 대과를 아우르는 은사가 내려졌다. 고종24년(1887)부터 주요하게 나타나는 고종대 성균관 과시의 특징은 은사자 수의 확대와 은사 종류의 다양화, 즉 소과 관련 은사의 부여다. 이 과정에서 정례적 과시 및 비정례의 의례참반유생응제는 성균관 과시 운영의 안정성과 고정성을 담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차제술 및 관학유생응제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비정례적 과시에서는 대과와 소과를 아우르는 은사를 내리면서, 소규모의 식년시·증광시를 성균관 과시로 시행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를 통해 성균관이나 사학이 관리하는 유생 혹은 근기(近畿) 지역의 유생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생들에게 보다 많은 성균관 과시 응시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고, 국가에서는 필요한 인재의 후보군을 보다 신속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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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종․철종대 성균관 과시 운영 연구

        정지연 한국교육사학회 2019 한국교육사학 Vol.41 No.3

        This study aims to grasp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 of the operation of the Seonggyungwan(成均館)-Guasi(課試) by examining its concrete aspects during King Heonjong’s reign through King Cheoljong’s reign(1834-1863). During this period, Ilcha-jeon’gang(日次殿講), a regular oral test, was seldom administered. Jeolilje(節日製), Hwanggamje(黃柑製), a regular written test, and ChunChuDogi(春․秋到記), a regular written and oral test, were more commonly implemented. Eungje(應製), an irregular written test, was also often implemented. The special benefits(恩賜) of the Seonggyungwan-Guasi were expanded during King Cheoljong’s reign than King Heonjong’s. During King Heonjong’s reign through King Cheoljong’s reign, the Seonggyungwan-Guasi was implemented according to the rules. Especially during King Cheoljong’s reign, the differences between the parts of the Seonggyungwan-Guasi became weaker. This was because the level of special benefits and the style of the written test of Seonggyungwan-Guasi were similar during King Cheoljong’s reign. As a result, during King Cheoljong’s reign, the Seonggyungwan-Guasi operations were quantitatively expanded in comparison to King Heonjong’s. 본고는 헌종․철종대(1834-1863) 성균관 과시 운영의 실제를 검토하고 그 운영상의 특징 및 변화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헌종․철종대 강서 과시는 춘․추도기 전강이 가장 높은 위상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봄과 가을의 춘․추도기 전강은 대부분 결행없이 시행되고 최고은사로 1명에게 직부전시를 내리는 법규대로 운영되었다. 통독 역시 법규대로 1년 11차 시행을 기준으로 하여 운영되었지만, 해당 은사 및 관․학의 기재생(寄齋生) 보충과 관련하여 강서 응시자 중심으로 운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일차전강은 헌종대 전반(前半)에는 시행되지 않다가, 헌종이 친정을 시작한 7년(1841) 이후로 헌종8년(1842)부터는 적게는 1년에 1번, 많게는 1년에 5번 정도 시행되었다. 철종대에 일차전강은 시행되지 않았다. 헌종․철종대 제술 과시는 정규 과시인 절일제 및 황감제, 춘․추도기 제술은 결행없이 대부분 시행되었으며, 비정기 과시인 응제도 시행되었다. 헌종대의 응제는 주로 황단참반유생응제로 시행되었는데, 철종대는 황단참반유생응제 외에도 각종 응제를 시행하였다. 철종대는 헌종대와 마찬가지로 성균관 과시가 안정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이전 시기에 비하여 제술 과시에서 최고은사가 비슷해지고 은사가 확대되며 시제가 동일화되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철종대는 제술 과시 간 위상이나 성격의 차이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과시에 의한 직부전시자 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헌종대 성균관 과시는 이전 시기의 운영 규정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반면 철종대 성균관 과시는 규정에 의하기보다는 최고은사가 상향 조정되고 은사가 확대되는 등 양적으로 확장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 KCI등재

        숙종대 성균관 과시 운영 연구

        정지연(Cheong, Ji-Yeon) 한국교육사상연구회 2017 敎育思想硏究 Vol.31 No.3

        본고에서는 조선후기 과시가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가는 숙종대의 성균관 과시 운영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숙종대 성균관 과시는 시관, 응시생, 상급 등은 규정대로 운영되었으나 시행 자체는 순탄하지 않았다. 정부의 유고나, 시관인 대제학이나 대사성이 유고하거나, 유생들의 공관으로 인하여 과시를 시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시행여부는 과시에 따라서도 차이가 났다. 정기과시를 오랫동안 시행하지 못할 때는, 특명과시를 활용하여 그를 보완할 수 있었다. 숙종대 전반에는 특명과시를 활용하여 과시의 시행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드러나지 않는다. 숙종대 후반에는 특명과시를 활용하여 시행 일자가 정해져 있는 과시의 시행을 보완했다. 삼일제가 시행되지 못하는 시기에는 특명제술을, 전강이 실시되지 못하는 시기에는 친림전강이나 ‘도기 유생전강’을 실시하였다. 과시의 은사는 제술 시험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친림전강과 ‘도기유생전강’의 경우는 후대로 갈수록 은사의 상급이 높아지고 인원도 확대되었다. 은사 중 직부전시는 식년시, 증광시, 별시에 사용하게 했던 반면, 직부회시와 급분은 식년시에만 사용하게 했다. 후대에는 식년시 시기가 뒤로 미뤄지면, 그 사이 시행된 과시에서 직부회시나 급분의 은사를 받은 이들이 당해 식년에 은사를 사용하도록 해서 은사자들을 배려했다. 숙종대 성균관 과시는 시관의 유고, 유생들의 상황, 혹은 국가의 행사로 인해서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적어도 숙종대 후반에는 그것 역시 규정 안에서 보완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과시를 시행하지 못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시행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보완책을 사용한 것이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concrete aspects of the operation of the Seonggyungwan-Guasi(課試) during King Sukjong s reign(1674-1720). During King Sukjong s reign, the Seonggyungwan-Guasi was operated according to the rules of the examiners, entrants and special benefits(恩賜). But it was not usually implemented, because there was another occasion of the dynasty in the day of Seonggyungwan-Guasi, or the examiners had the other official works, or the entrants protested against the government. King Sukjong was able to order a special Seonggyungwan-Guasi implemented for the supplementation. This supplementation was not used during the first half of King Sukjong s reign, but it was during the latter half. King Sukjong made entrants perform a special writing test after the fixed writing tests in a festive day(節日製) were not implemented for a long time. Also he made entrants perform a special oral test about Confucian classics after the fixed oral tests in the palace(殿講) were not implemented for a long time. Using this system, the special benefits improved over time and the way of using the benefits improved for the entrants. During King Sukjong s reign, the Seonggyungwan-Guasi sometimes was not implemented. But, at least, during the latter half, there were some effort for the supplementation. Because it was thought of the problem that the Seonggyungwan-Guasi was not implemented for a long time.

      • KCI등재

        순조대 성균관 과시 운영 연구

        정지연 교육사학회 2019 교육사학연구 Vol.29 No.1

        This study focuses on examin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 operation of the Seonggyungwan-Guasi(課試) by examining its concrete aspects during King Soonjo's reign(1800-1834). Ilcha-jeon'gang(日次殿講) was an oral test seldom implemented during King Soonjo's reign, except during the Crown Prince’s proxy period(1827.2.-1830.leap4.). Jeolilje(節日製), Hwanggamje(黃柑製), a written test, and ChunChuDogi(春‧秋到記), a written and oral test, were more commonly implemented. After Soonjo's 20th year as king, all candidates, even those who didn't boarded at Seonggyungwan, could take the written tests of Seonggyungwan without restriction. The special benefits(恩賜) were awarded to candidates based upon their grades. During the Crown Prince’s proxy period, Ilcha-jeon'gang as well as the other written tests were implemented without skipping. The Crown Prince elevated the class of the special benefits of Jeolilje and Eungje(應製) as a irregular writing tests. In Soonjo's 11th year as king, there were many disasters. King Soonjo tried to encourage the candidates by implementing irregular Seonggyungwan-Guasi. During King Soonjo's reign, the Seonggyungwan-Guasi was implemented by the rules. The Seonggyungwan-Guasi was operated consistently, but the written tests were regarded as more important than the oral tests. Due to this, the benefits of boarding at Seonggyungwan became weaker, and there was no the directivity of the policy maker. 본고는 순조대(1801-1834) 성균관 과시 운영의 실제를 검토하고, 그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차전강은, 왕세자의 대리청정 기간(1827.2.18-1830.윤4.22)에는 추행 등으로 결행이 없었지만 그 이외의 기간에는 거의 시행되지 못하였다. 춘‧추도기의 제술과 강서, 황감제 및 절일제는 국상이나 재해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순조대 내내 안정적으로 시행되었다. 순조20년(1820)부터는 모든 절일제가 통방외로 시행되었다. 제술 시제는 부(賦)가 빈번히 출제되었으나, 원점유생 절일제에 비하여 응시자가 확대되는 춘‧추도기 제술이나 황감제, 통방외 절일제에서는 상대적으로 표(表)의 출제가 많았다. 은사는 춘‧추도기와 황감제에서는 일반으로 직부전시 이하의 은사가, 절일제에서는 직부회시 이하의 은사가 내려졌다. 왕세자 대리청정 기간에는 기존의 황감제나 절일제뿐만이 아니라 일차전강이 결행없이 시행되었고, 원점유생 응제 및 여타의 응제가 시행되었다. 대리청정 기간에는 일차전강의 실시, 기존의 응제 및 절일제 은사의 상향 조정으로 직부전시자 수가 늘어났다. 순조11년(1811)에는 다른 시기와 달리 왕명에 의한 비정기적인 응제와 응강이 빈번하게 실시되었다. 당해는 재해가 연이어 발생했던 시기로, 순조는 비정기의 과시를 자주 시행하면서, 유생들의 동요를 가라앉히고자 하였다. 순조대 성균관 과시는 순조11년(1811)의 특정 기간을 제외하고는, 전 기간에 걸쳐 규정에 의한 운영을 견지하였다. 과시에 따른 은사의 등급이나 제술 과시의 통방외 결정 여부도 일관되게 운영되었다. 과시 운영의 규정은 대부분 정조대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으며, 이것은 왕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통방외 제술 과시가 증가하였고, 춘‧추도기 전강이 거의 유일한 강서 과시가 되었다. 다만 이러한 변화에 이전 시기와 같은 정책결정자의 지향성 등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 KCI등재

        17세기 과시제도의 형성과정

        최광만 ( Kwang Man Choi ) 교육사학회 2012 교육사학연구 Vol.22 No.2

        이 글은 조선후기 교육제도에서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하는 과시제도의 형성과정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조선후기 과시제도의 재구조화 과정이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있는?과시등록?을 기본 자료로 하되, 조선후기적인 과시제도가 규정되어 있는 ?속대전?을 개념틀로 삼아서 분석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후기의 과시제도는 1639년(인조17) 소학고강의 신설로 인한 공도회의 실시, 1655년-1659년(효종6-10) 사학합제의 시행과 공도회의 분리 그리고 1663년(현종4) 성균관 과시를 비롯한 제반 과시규정의 정비의 단계를 거쳐 확정되었다. 이후 몇 차례 부분적인 조항이 변경되기는 하였지만, ?속대전?의 규정으로 정착되기까지 큰 변화는 없었다. 둘째, 조선후기 과시제도는 변화된 교육환경에 대응하는 교육정책, 즉 소학교육 강화정책, 재가유생 중심의 학교운영 정책에 영향을 받으면서 강화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이후 과시제도가 확립되면서 18세기에는 조선후기의 중요한 교육제도로서 교육현실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셋째, 과시제도의 확립은 조선후기의 교육을 조선전기처럼 학교제도와 과거제도만으로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향후의 연구는 변화된 조선후기의 교육환경에서 과시제도가 미친 영향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This study aims at discovering the formative process of the National Encouragement Examination System(Guasi Jedo, 課試制度) of Joseon Dynasty in 17th century. The primary sources are Guasi Deungrok(課試謄錄) and Sok Daejeon(續大典). The results are as followings. Firstly, the important phenomena of the process are the implementation of the So-Hak(小學) test in 1639, the establishment of the Sahak Hapje(四學合製) in 1655-1659 and the comprehensive modification of the examination system in 1663. Secondly, the examination system was connected with the educational policy in 17th century. And the examination system became an important composing element of the educational system in the latter period of Joseon Dynasty. Lastly, the National Encourgement Examination System is a distinctive component of the Joseon Dynasty educational system. It is not found even in the Chinese educational system. So it is important to approach the traditional education of Korea taking into consideration of the examination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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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과시 규정의 변화

        최광만 교육사학회 2018 교육사학연구 Vol.28 No.1

        This study aims at tracing the change of the rules of School Examination(Guasi, 課試) in Royal Codes for the foundation of the research about the education and selection system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the 2nd Royal Code(Sok-Deajeon, 續大典) shows the rationalization of the rules of School Examination. The adjustment of examination schedules and the foundation of penalty articles are the typical aspects of it. Second, the 3rd Royal Code(Deajeon-Tongpyeon, 大典通編) shows the establishment of the rules of School Examination. But it also includes some new rules which preannounce the 19th century’s School Examination. They are about the new school examinations, the change of taking the civil examination and the emphasis on the literature tests. Third, the 4th Royal Code(Deajeon-Huetong, 大典會通) is basically identical with the 3rd Code. But it accelerates the tendency of the emphasis on the literature tests. 본 연구는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에 나타난 과시 규정의 변화를 고찰하는 내용이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속대전』의 규정은 과시가 관행에 따라 진행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를 해소하고, 과시의 현실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현실화 조치는 제재 규정을 정비한 데에서도 확인된다. 둘째 『대전통편』의 과시 규정은 외형상 『속대전』과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큰 변화가 있었다. 즉, 과시의 교육적 효과를 제고하기 위한 규정을 신설하였고, 춘추도기와 응제를 사실상 별도의 과시로 분리시켰으며, 과시에서 얻은 은사를 식년시 이외의 과거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셋째 『대전회통』의 과시 규정은 기본적으로 정조 대의 규정을 명문화한 내용이다. 『대전통편』의 규정을 바탕으로 하면서, 정조 말까지 신설된 몇 개의 규정을 부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대전통편』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경향이 더욱 분명해지는 모습이 보이는데, 그것은 제술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점이다. 법전의 과시 규정에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들은 각 시기의 과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향후 조선 후기 과시의 제도적 의미와 영향을 고찰하기 위해서 실제 운영방식과 효과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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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명종대 문과정시 시행 연구

        정지연 한국교육사상학회 2019 敎育思想硏究 Vol.33 No.2

        This study investigates the process of the conduct of Munkwa(文科) Jeongsi(庭試) during King Jungjong's(1506-1544) and Myeonjong's(1544-1567) reigns. Jeongsi refered to the irregular written test of Guasi(課試) during King Jungjong's reign. King Jungjong attempted to promote Gwan・Hak(館・學) by implementing Jeongsi. Furthermore, he implemented Byeolsi(別試) as a civil service examination exclusively for Gwan・Hak's candidates. Initially the courtiers opposed the policy because it was for the minority. They changed their attitude after King Jungjong's 29th year(1534) as they decided to agree that it was good for the promotion of Gwan・Hak. Munkwa Jeongsi in King Jungjong's 37th year(1542) and King Myeongjong's 14th year(1559) was conducted exclusively for Gwan・Hak's candidates. With the addition to these two irregular civil service examinations, Jeongsi had gained another meaning of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in addition to the Guasi as an encouragement test. Though 12 successful candidates in Munkwa Jeongsi in 1559 were much more than the number in 1542, there was not any argument. This was because Munkwa Jeongsi for Gwan・Hak's candidates was accepted as an effective way to promote Gwan・Hak. 본 연구는 중종(1506-1544)・명종대(1544-1567)에 문과정시가 시행되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정시는 중종대에 비정기적인 제술 과시를 가리키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중종은 관・학의 진흥을 위하여 관・학 유생에 대한 과시인 정시를 시행하고 직부전시 이하의 은사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관・학 유생에 대한 정시를 과거인 ‘별시’로 이름하고 급제를 내리기도 했다. 소수의 관・학 유생만을 대상으로 과거를 시행하는 것에 대하여, 대신들은 지속적으로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대신들의 반대는 중종29년(1534) 「권학절목」을 반포한 이후부터는, 과거를 유생들의 거관 및 청강을 장려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긍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중종37년(1542)과 명종14년(1559) 문과정시 응시자는 모두 관・학 유생들이었다. 이전까지 관・학 유생에 대한 과시의 의미만 있던 정시는, 두 과거를 통해서 문과로서의 의미도 추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시는 여전히 과시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명종14년(1559) 문과정시는 이전에 관・학 유생에 대한 과시에서 은사를 받은 이들에 대한 과거로, 12명에게 급제를 내렸다. 이 과거의 급제자 수가 소수의 응시자 수에 비해 많았음에도 당시에 별다른 논란이 없었다. 이것은 관・학 유생의 과거가 유생들의 학업을 장려하고 교육을 진흥시키는 주요한 방편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 KCI등재

        선조-인조대 문과정시 제도화 과정 연구

        정지연(鄭智連)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2019 아시아교육연구 Vol.20 No.3

        본 연구는 선조-인조대(1567-1649) 문과정시의 시행을 검토함으로써 그 제도화 과정의 특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선조-인조대 문과정시는 국방의 위기와 관련하여 주로 무과의 대거를 이유로 시행되었고, 그 외에 ‘별시’나 알성시를 대체하여 시행되곤 하였다. 인조대는 이 외에 과거에 응시하려는 유생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문과정시를 실시하곤 했다. 선조-인조대 문과정시는, 이전의 과시로서의 정시에 비하여, 일정이 일찍 결정되고 응시자도 확대됐다. 문과정시는, 다른 과거를 위해 서울에 모인 유생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설행하는 것이 아닌 이상은, 무과 대거에 의한 것이든 경사에 의한 것이든 그 시행이 적어도 한 달여 전에 결정되었다. 선조-인조대 문과정시의 전체 급제자 수는 ‘별시’에 비하여 적었고, 이 경향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과거의 시행 횟수는 선조-인조대는 ‘별시’가 정시보다 자주 시행되었지만, 효종대 이후로는 문과정시의 간편성으로 인하여 ‘별시’나 알성시에 비하여 정시가 자주 시행되게 되었다. 이처럼 효종대 이후 다른 과거에 비하여 정시의 시행 횟수가 증가한 것은 선조-인조대 문과로서의 위상이 정립되었기에 가능했다. 정시는 선조-인조대의 시행을 통하여 과시에서 과거로 제도화되었고 그 결과 과거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This study aims to understand the characters of the institutionalization of Munkwa(文科) Jeongsi(庭試) by investigating its process of the conduct during King Seonjo"s reign through King Injo"s reign(1567-1649). Munkwa Jeongsi was frequently implemented during King Seonjo"s reign through King Injo"s reign and became a confirmed type of Munkwa. The reasons for its implementation were the simultaneous operation with MuKwa(武科), the substitution of the other Munkwa, and the consolation of the candidates. The schedule of Munkwa Jeongsi was announced earlier for the candidate of all countries than Guasi(課試) Jeongsi, the test for encouraging students studying at Gwan‧Hak(館‧學, Seonggyungwan(成均館) and its four-affiliated schools(四學)). The number of successful candidates who passed the Munkwa Jeongsi was fewer than that of Munkwa Byeolsi(別試). This tendency continued even after King Injo"s reign. After King Injo"s reign, the frequency of the implementation of Munkwa Jeongsi became much more than that of Munkwa Byeolsi. This was because its process was simpler than the other Munkwa, and its status as Munkwa became confirmed during King Seonjo"s reign through King Injo"s reign.

      • KCI등재

        정조대 일차유생전강 운영 규정 변화 연구

        정지연 ( Cheong Jiyeon ) 한국교육사학회 2018 한국교육사학 Vol.40 No.3

        본고는 정조대 일차유생전강의 운영 규정의 변화를 고찰하고 그 운영 양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정조대 일차전강에서는 정조6년(1782)부터 성균관과 사학, 즉 관·학의 재임을 일차전강에 참여하게 하고 이어 이들의 자원일경 강서를 시행하였다. 정조7년(1783)에 강서 시험이었던 일차전강에 제술시험을 겸행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 응시대상을 성균관의 생원·진사로 하는 상재생응제로 시행하였고, 정조15년(1791)부터는 일차전강일에 일반적으로 상재생응제를 겸행하도록 하였다. 정조12년(1788)부터는 당월에 시행하지 못한 일차전강은 추행(追行)을 통해 1년 6번의 시행 횟수를 대부분 채우면서 안정적으로 시행하였다. 정조13년(1789)부터는 일차전강에 응시하는 일반 유생의 응강서적도 자원일경으로 조정하였다. 정조16년(1792)부터는 6월의 일차전강을 혜경궁 홍씨와 원자의 생일인 6월 18일에 일차제술로 바꾸어 시행하였다. 정조대 관·학 재임의 자원일경 강서에서 초점이 된 이들은 사학 재임으로, 정조는 재위 말까지 일차전강에서 사학 재임을 중심으로 한 관·학 재임의 자원일경 강서를 시행하지만, 사학 재임의 강서 소양에는 만족하지 못하였다. 정조는 일차전강에 참여하는 생원·진사에 대해서는 재위 말이 되면 강서와 제술 능력을 겸비하게 되었다고 만족한다. 이것은 일차전강이 안정되게 시행되는 정조대 후반에 상재생응제 겸행이 일반화되고, 일반유생의 응강서적이 자원일경으로 조정되고, 일차전강에서의 은사가 높아진 것에서 나타난 결과다. 정조대 일차전강일의 상재생응제나 일차제술은 후대로 갈수록 성균관에 거재하지 않는 생원·진사도 응시하게 하면서 응시자를 확대하였다. 정조는 일차전강의 응시대상, 시험 경서의 수, 시험 과목 등을 변화시키면서 유생들의 공부 경향을 조정하려 하였다. 일차전강 운영 방식의 변화에는 정조가 의도가 작용했지만, 그 변화의 결과가 늘 정조의 의도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정조가 장기간 사학 재임의 공부 경향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바꿀 수 없는 경향이라는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조대 일차전강을 통해 유생들의 공부 경향 변화가 일정부분 가능했던 것은, 일차전강의 안정적 시행과 일관된 정책에 기인한 바가 컸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changes to and aspects of the operation of the fixed oral test in the palace (Ilcha-yusaeng-jeon'gang, 日次儒生殿講) during King Jeongjo's reign(1776-1800). There were five major changes. The first was to require the representatives of Seonggyungwan(成均館) and its four-affiliated schools(四學) to choose one of the Three Classics (三經) and complete an oral test over it (Jawon-Ilgyeonggang, 自願一經講). The second was to add a new written test to evaluate Saengwon(生員)·Jinsa(進士) of Seonggyungwan writing ability and to determine which student excelled at writing (Sangjesaeng-eungje, 上齋生應製). The third was an instatement of a new rule that required all six annual oral tests to be taken without exception. The fourth was allowed all examinees to choose one of the Three Classics to be orally tested over. The fifth was to replace the oral test in June with a written one (Ilcha-yusaeng-jesul, 日次儒生製述). King Jeongjo attempted to improve the representatives of four-affiliated schools' knowledge of Confucian Classics by requiring them to choose one of the Three Classics, but, in the end he was not satisfied with their level of competence. Saengwon·Jinsa of Seonggyungwan became good at both the oral test and the written test of Confucian Classics. This was a result as the addition of the written test, the modification of the number of Classics tested, and the improvement of special benefits(恩賜) in the fixed oral test. The number of the examinee in the fixed oral test in the palace was increased by implementation of the written tests. King Jeongjo changed the examinees and the number of Confucian Classics tested, standardized the requirement to complete all annual oral tests and substituted a written test for one of the oral test. By his continuous interest, King Jeongjo achieved his own goal in 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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