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펼치기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교키와 일본의 오대산문수신앙

        최복희(崔福姬)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2011 일본불교문화연구 Vol.- No.4

        교커에 대한 연구, 즉 '교키론(行基論)'이라고 일컬어지는 연구는 매우 많은 성과물들이 축척되어 있다. 전전(戰前)의 교카연구로는 다이쇼초기에 씌어진 우메하라스에지(梅原末治)의 「교키사리병기(行基舎利甁記)에 보이는 그 성씨와 향년에 대해서」 대표적이다. 한편, 전후(前後)의 교키연구의 출발점이라고 해야 할 기타야마시게오(北山茂夫) 의 「교카론」은 전후 연구사에 기점적(起点的) 의미로서만 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 연구는 이른바 '민중'의 입장, 즉 당시 율령반전민(律令班田農民)의 입장에서 행한 고대정치연구의 일환으로서 교키를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그 문제의식이야 말로 더욱 중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노우에카오루(井上薰)의 『교키(行基)』는 교키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방면에서의 접근은 물론, 치밀하면서도 폭넓은 실증작업을 통해 교키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이 연구는 '교키연구의 기초문헌'으로 불리고 있다. 교키는 불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 즉 정치ㆍ일본고대사ㆍ불교문화ㆍ사회복지ㆍ국문학 방면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교키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키연구는 교카와 오대산문수신앙과의 관련이다. 그것은 오대산문수신앙의 일본잔래가 교키의 문수화산설(文殊化身說)이나 바라문승정문수치우설(婆羅門僧正文殊値遇説) 속에 그 교리와 함께 구체적인 설화의 형태로서 답습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에는 교키관한 설화가 다른 승려들의 기술보다 많다' 『일본영이기』의 교키관련 설화는 교키 사후에 형성되었다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키가 행한 설법이 설화가 아니라 그 사적(事蹟)이 설화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사에다젠쇼우(朝枝善照)는 "『일본영이기』의 교기설화는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제된 교키전(行記傳)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전혀다른 소전에 의한 것이라는 점, 교키연구에서 참고해야할 점이다."라고 술하고 있다. 『일본영이기』 중에 「삼보를 믿고 공경하여 현보를 얻은 이야기」가 교키의 문수화신(文殊化身)에 관한 설화이다. 아사에다젠쇼우는 "이 설화는 오오토모(大伴)씨에 전승된 야스노코에 관한 자료를 참조해, 성무 천황, 동대사건립, 교키의 불교포교 등을 연결하고 있지만, 교우카이가 살았딘 시대에는, 이와 같이 일본에 오대산 불교문화, 즉 문수신앙이 전래되어 민중에 이해되기 시작해, 교카의 '문수반신설'이 성립하게 되었다 한국의 오대산과의 관련성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교키의 오대산설화, 여기에는 이미 성덕태자 성무천황, 오대산문수-교키의 일련의 전설이 완성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統緣起)』의 동대사를 중심으로 믿어온 전설에 연계하는 것이다. 교키는 '교키보살'로도 불렸다. 이에 대한 시대적 배경으로, 8 세기 일본에는 승명(僧名)에 보살칭호를 더하여 불렀던 것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또 민중을 위해서 이타행을 행하는 승려들은 자신들을 '보살' 또는 '화주(化主)' 라고 자칭하고 집단을 이루기도 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속일본기(續日本記)』와 『일본영이기』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교키에 대 한 칭호는 '교키보살'로 불리 기 시 작하다가 차차'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바꿔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삼보회(三宝絵)』에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교카와 바라문승정과의 교류에 대한 설화의 성립에 관하여 코네야마다카코(米山孝子)는 "교카, 바라문승정의 교류사실 교키문수화신설이나 오대산신앙의 유포, 바라문승정의 고승전화 등 다양한 요소가 접합하여 『보살전래기(菩薩傳來記)』 설화가 『삼보회』로 거슬러 올라가 성립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교키의 문수화신섣은 요사다야스오(吉田靖雄)도 지적한 바와 같이, 경전 등에 의한 문수의 종교적 역할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이는 데, 그것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바라문승정래조설(婆羅門僧正文殊値遇説)은 사상이라기보다는 『불정존승타라니경(仏頂尊勝陀羅尼經)」 서문 등으로 널리 알려진 오대산 문수치우(文殊値遇)의 설화의 「형(型)」에 따라 본조목적(本朝目的)이 가미된 형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行基に対する研究、すなわち'行基論' とも言える研究はかなり進んでいる。 戦前における行基研究は、大正初期に書かれた梅原末治の「行基舎利瓶記にみえたるその姓氏と享年について」が早い例である。 戦後の行基研究の出発点ともいうべき北山茂夫の「行基論」は、戦後の研究史の起点的意味合いのみで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るのではない。この研究の重要性は、働く民衆の側、つまり当時の律令班田農民の立場に立って行った古代政治研究の一環として行基を研究対象に設定きれた、その問題意識にこそあるといえよう。 井上薫の『行基』は、行基に関する全てといってよいほどの問題が論ぜられ、多方面にわたって精緻な分析と、旦つゆきとどいた実証作業に支えられて、行基の生涯が跡づけられている。今日この研究をきして'行基研究上の基礎文献'と呼ばれている。 行基が仏教のみでなく、各方両の分野において、所謂、政治ㆍ日本古代史ㆍ仏教文化ㆍ社会ff1副止、きらには国文学までも研究されていることは、行基は日本の肯代において重要な人物からである。 きて、この論文において何よりも重要な行基研究の一つは、行基と五台山文殊信仰との関連である。それは、五台山文妹信仰の伝来は、行基の文殊化身説や婆羅門僧正文殊値遇説の中にその教理と共に具体的な説話の型として踏襲されているのを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まず、『日本霊異記』には、行基に関する説話が、他の僧侶との記述より比較的に多く記されている。『日木霊異記』での行基にまつわる説話は、彼の死後に形成されたと考えられていることが一般的である。ここで大事なのは、行基のなした説法が説話ではなく、その事蹟が説話になっていることである。しかし、朝枝善照は" 「日本霊異記』の行基説話は、「続日本紀』に記載される行基伝に影響をうけていない、全く別の所伝によるものである点、行基研究上からも参考すべきものである。"と述べている。 『日本霊異記』の中で「三宝を信敬し、現報を得る紘一」が、行基の文殊化身に関する説話である。朝枝善照は"この説話は大伴氏に伝承された大部屋栖野占に閲する史料を参照し、聖武天皇、東大寺建立、行基の仏教伝道などを結び付けているが、景戒の時代には、このように、日本に、五台山仏教文化、すなわち文殊信仰が伝来し多くの民衆に理解きれていてはじめて、行基の「文殊反化」説が成立することになる。韓国の五台山との関連性も検討すべきであろう。"と言っている。 行本の五台山説話、ここにはすでに甲徳、太子一聖武天皇、五台山文殊一行基の一連の伝説が完成している。これは、『三国仏法伝通縁起』に東大寺を中心に久しく信じ伝えた伝説に連繋するものである。 行基は'行基菩薩'とも呼は、れた。この背景には、8世紀の日本では、僧名に菩薩号を付した呼び方が盛行していた、つまり、民宋利益の利他行をもって、「菩薩」や「化主」と呼称され、自称した一群の僧尼が存在していたのである。 『続日本記』と『日本霊異記』の記録を検討してみると、行基に対する称号は、'行基菩薩'と呼ばれはじめてから、'文殊菩薩の化身'というように変化していったと考えられる。 最後に、『三宝絵』に初見する行基と婆羅門僧正との交流の説話の成立について米山孝子は、"行基、婆羅門僧正の交流事実、行基文殊化身説や五台山信仰の流布、婆羅門僧正の高僧伝化など、様々な要素が長合して「菩提伝来記」の説話が『三宝絵』に遡って成立していたのである。"という。 行基の文妹化身説には古同靖雄氏の指摘されるように、経典等による文殊の宗教的役割が大きく影響していると思われるが、それに対応して作られた新たな婆羅門僧正来朝説は、思想というよりも、「仏頂尊勝陀羅尼経』序文などで、広く知られた五台山での文殊値遇の説話の「型」に従って、来朝日的がはめ込まれたような形になっていることが分かる。

      • 교키와 일본의 오대산문수신앙

        최복희(崔福姫,) 한국일본불교문화학회 2011 일본불교문화연구 Vol.- No.5

        行基に対する研究、すなわち'行基論' とも言える研究はかなり進んでいる。 戦前における行基研究は、大正初期に書かれた梅原末治の「行基舎利瓶記にみえたるその姓氏と享年について」が早い例である。 戦後の行基研究の出発点ともいうべき北山茂夫の「行基論」は、戦後の研究史の起点的意味合いのみで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るのではない。この研究の重要性は、働く民衆の側、つまり当時の律令班田農民の立場に立って行った古代政治研究の一環として行基を研究対象に設定きれた、その問題意識にこそあるといえよう。 井上薫の『行基』は、行基に関する全てといってよいほどの問題が論ぜられ、多方面にわたって精緻な分析と、旦つゆきとどいた実証作業に支えられて、行基の生涯が跡づけられている。今日この研究をきして'行基研究上の基礎文献'と呼ばれている。 行基が仏教のみでなく、各方両の分野において、所謂、政治ㆍ日本古代史ㆍ仏教文化ㆍ社会福祉、きらには国文学までも研究されていることは、行基は日本の肯代において重要な人物からである。 さて、この論文において何よりも重要な行基研究の一つは、行基と五台山文殊信仰との関連である。それは、五台山文殊信仰の伝来は、行基の文殊化身説や婆羅門僧正文殊値遇説の中にその教理と共に具体的な説話の型として踏襲されているのを見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 まず、『日本霊異記』には、行基に関する説話が、他の僧侶との記述より比較的に多く記されている。『日本霊異記』での行基にまつわる説話は、彼の死後に形成されたと考えられていることが一般的である。ここで、大事なのは、行基のなした説法が説話ではなく、その事蹟が説話になっていることである。しかし、朝枝善照はII 「日本霊異記』の行基説話は、「続日本紀』に記載される行基伝に影響をうけていない、全く別の所伝によるものである点、行基研究上からも参考すべきものである。"と述べている。 『日本霊異記』の中で「三宝を信敬し、現報を得る縁」が、行基の文殊化身に関する説話である。朝枝善照は"この説話は大伴氏に伝承された大部屋栖野古に関する史料を参照し、聖武天皇、東大寺建立、行基の仏教伝道などを結び付けているが、景戒の時代には、このように、日本に、五台山仏教文化、すなわち文殊信仰が伝来し多くの民衆に理解きれていてはじめて、行基の「文殊反化」説が成立することになる。韓国の五台山との関連性も検討すべきであろう。"と言っている。 行本の五台山説話、ここにはすでに聖徳太子一聖武天皇、五台山文殊行主主の一連の伝説が完成している。これは、『三国仏法伝通縁起』に東大寺を中心に久しく信じ伝えた伝説に連繋するものである。 行基は'行基菩薩'とも呼ばれた。この背景には、8世紀の日本では、僧名に菩薩号を付した呼び方が盛行していた、つまり、民宋利益の利他行をもって、「菩薩」や「化主」と|序称され、白称した一群の僧尼が存在していたのである。 『続日本記』と『日本霊異記』の記録を検討してみると、行基に対する称号は、'行基菩薩'と呼ばれはじめてから、'文殊菩薩の化身'というように変化していったと考えられる。 最後に、『三宝絵』に初見する行基と婆羅門僧正との交流の説話の成立について米山孝子は、"行基、婆羅門僧正の交流事実、行基文殊化身説や五台山信仰の流布、婆羅門僧正の高僧伝化など、様々な要素が接合して『菩提伝来記』の説話が『三宝絵』に遡って成立していたのである。"という。 行基の文殊化身説には古田靖雄氏の指摘されるように、経典等による文殊の宗教的役割が大きく影響していると思われるが、それに対応して作られた新たな婆羅門僧正来朝説は、思想というよりも、『仏頂尊勝陀羅尼経』序文などで、広く知られた五台山での文殊値遇の説話の「型」に従って、来朝日的がはめ込まれたような形になっていることが分かる。 교커에 대한 연구, 즉 '교키론(行基論)'이라고 일컬어지는 연구는 매우 많은 성과물들이 축척되어 있다. 전전(戰前)의 교카연구로는 다이쇼초기에 씌어진 우메하라스에지(梅原末治)의 「교키사리병기(行基舎利甁記)에 보이는 그 성씨와 향년에 대해서」 대표적이다. 한편, 전후(前後)의 교키연구의 출발점이라고 해야 할 기타야마시게오(北山茂夫)의 「교키론」은 전후 연구사에 기점적(起点的) 의미로 서만 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이 연구는 이른바 '민중'의 입장, 즉 당시 율령반전민(律令班田農民)의 입장에서 행한 고대정치연구의 일환으로서 교키를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그 문제의식이야 말로 더욱 중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노우에카오루(井上薰)의 『교키(行基)』는 교키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방면에서의 접근은 물론, 치밀하면서도 폭넓은 실증작엽을 통해 교키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이 연구는 '교키연구의 기초문헌'으로 불리고 있다. 교키는 불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 즉 정치ㆍ일본고대사ㆍ불교문화ㆍ사회복지ㆍ국문학 방면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교키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키연구는 교키와 오대산문수신앙과의 관련이다. 그것은 오대산문수신앙의 일본전래가 교키의 문수화산설(文殊化身說)이나 바라문승정문수치우설(婆羅門僧正文殊値遇説) 속에 그 교리와 함께 구체적인 설화의 형태로서 답습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먼저,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에는 교키관한 설화가 다른 승려들의 기술보다 많다' 『일본영이기』의 교키관련 설화는 교키 사후에 형성되었다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키가 행한 설법이 설화가 아니라 그 사적(별원)이 설화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사에다젠쇼우(朝枝善照)는 "『일본영이기』의 교기설화는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제된 교키전(行基傳)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전혀 다른 소전에 의한 것이라는 점, 교키연구에서 참고해야할 점이다."라고 술하고 있다. 『일본영이기』 중에 「삼보를 믿고 공경하여 현보를 얻은 이야기」가 교키의 문수화신(文殊化身)에 관한 설화이다. 아사에다젠쇼우는 "이 설화는 오오토모(大伴)씨에 전승된 야스노코에 관한 자료를 참조해, 성무 천황, 동대사건립, 교키의 불교포교 등을 연결하고 있지만, 교우카이가 살았던 시대에는, 이와 같이 일본에 오대산 불교문화, 즉 문수신앙이 전래되어 민중에 이해되기 시작해, 교카의 '문수반신설'이 성립하게 되었다. 한국의 오대산과의 관련성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교키의 오대산설화, 여기에는 이미 성덕태자-성무천황, 오대산문수-교키의 일련의 전설이 완성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삼국불법전통연기(三國佛法傳統縁起)』의 동대사를 중심으로 믿어온 전설에 연계하는 것이다. 교키는 '교키보살'로도 불렸다. 이에 대한 시대적 배경으로, 8세기 일본에는 승명(僧名)에 보살칭호를 더하여 불렀던 것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또 민중을 위해서 이타행을 행하는 승려들은 자신들을 '보살' 또는 '화주(化主)'라고 자칭하고 집단을 이루기도 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속일본기(續日本記)』와 『일본영이기』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교키에 대 한 칭호는 '교키보살'로 불리 기 시 작하다가 차차'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바꿔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삼보회(三宝絵)』에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교키와 바라문승정과의 교류에 대한 설화의 성립에 관하여 코네야마다카코(米미孝子)는 "교거, 바라문승정의 교류사실 교키문수화신설이나 오대산신앙의 유포, 바라문승정의 고승전화 등 다양한 요소가 접합하여 『보살전래기(菩薩傳來記)』 설화가 『삼보회』로 거슬러 올라가 성립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교키의 문수화신설은 요사다야스오(吉田靖雄)도 지적한 바와 같이, 경전 등에 의한 문수의 종교적 역할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이는 데, 그것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바라문승정래조설(婆羅門僧正來朝說)은 사상이라기보다는 『불정존승타라니경(仏頂尊勝陀羅尼経)」 서문 등으로 널리 알려진 오대산 문수치우(文殊値遇)의 설화의 「형(型)」에 따라 본조목적(本朝目的)이 가미된 형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KCI등재

        근대기독교신문과계몽사상

        김성은(Kim, Sung-eun)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2016 일본연구 Vol.26 No.-

        일본 최초의 기독교신문 '칠일잡보'(七一雑ñ)는 1880년 창간된 기독교계 종합잡지'리쿠고잡지'(六合雑誌)의 명성에 눌려 그동안 그 가치를 부분적으로 밖에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1986년도 시사대학에서 수행한 공동연구를 통해 최초의 기독교 계정기간행물로서 이른바 기독교계 저널리즘의“원천” 혹은“씨앗”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리고'칠일잡보'의 발행기간중전기에는개화론이나시사, 해외사정등의 기사가 많았던 반면, 후기에는 교의에 관한 변증 등 복음전도를 위한 내용으로 신문색채가 바뀌었다는 점,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성격의글이 혼재되어있었다는 점이 선행연구에서 지적되어왔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근대 일본 신문의 역사에 등장하는 “대신문”('蜷Vキ)과 “소신문”(小新キ)이라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칠일잡보' 지면의 형식변화를 살펴보고자 했다. 즉 칠일잡보의 발행기가 근대 일본에서 이른바 ‘정론(政論) 위주의 대신문과 오락 위주의 소신문’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성격의 신문이 공존하던 시기인 것에 주목하여 신문의 두 가지 성격이 교차하는 양상을 통해 칠일잡보의 계몽사상과 편집방침의 변화를 설명한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면변화내용을 일반 신문과 비교하였다. 즉 근대일본에서 일반신문의 발달역사는 대신문과 소신문의 이중구조속에서 대중신문으로 통합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과는 반대로, '칠일잡보'는 대신문과 소신문의 특징을 절충하여 출발했다가 대신문과 소신문의 역할분할로 진행되었다는점을 밝힘으로써, 이것을 일본기독교가 갖는 특징이자 한계로 파악했다. Shichiichi Zappo, the first Christian newspaper in Japan, had been recognized for its value only partially under the shadow of Rikugo Zasshi, an all-around Christian magazine created in 1880. A joint study at Doshisha University in 1986, however, helped the newspaper establish its position as the “origin” or “seed” of so-called Christian journalism as the first regular Christian publication in Japan. Under the goal of analyzing the paper changes of Shichiichi Zappo, this study set out to explain changes to the newspaper form in the dual structure of “Oshinbun” and “Koshinbun” in the history of modern Japanese newspapers. Paying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newspaper was published during the coexistence of two different types of newspapers, which were “Oshinbun based on reasonable arguments” and “Koshinbun based on entertainment,” in modern Japan, the investigator explained the changes to the nature and publication intention of the newspaper through the crossing patterns of the two types. Those changes to its paper were then compared with those of general newspapers. It was highlighted that Shichiichi Zappo started by negotiating between Oshinbun and Koshinbun in their characteristics and moved toward the division of roles between them in opposition to general newspapers, which were integrated into popular newspapers in the dual structure of Oshinbun and Koshinbun, which reflects the characteristics and limitations of Japanese Christianity.

      • KCI등재

        의미 · 통사적 분석을 통한 일본어의 종결동사문과 대응하는 한국어의 비교고찰

        박용일(Park, Yong Il) 동아시아일본학회 2015 일본문화연구 Vol.0 No.55

        본고에서는 하나의 일본어 종결동사문에 대응하여 두 개의 한국어가 나타나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 사실은 두 개의 일본어 종결동사문과 두 개의 한국어가 대응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제시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일본어 종결동사문에 대응하여 나타나는 (7b)의 한국어는 사건종결의 의미가 나타나고, (7c)와 같은 한국어는 행위종결의 의미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동시에 (7a)와 같은 일본어 종결동사문에도 사건종결과 행위종결의 두 가지 의미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 다음 (7a)와 같은 일본어 종결동사문이 복문구조와 단문구조의 두 개의 통사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하였다. The results of this paper suggest that two Japanese sentences correspond with two Korean expressions in the perfect verb tense. However, two Korean expressions corresponding with one Japanese sentence in the perfect verb tense did not seem to be supported in the current study. To present this fact, this paper argues that the Korean in (7b) corresponding with the Japanese in the perfect verb tense can be considered as the event perfect. The Korean in (7c) can be interpreted as containing a meaning of action perfect as well. Also, the study observed that the action perfect in Japanese, like (7a), can grasp an event perfect meaning, as well as an action perfect at the same time. This paper also specified that the perfect verb tense in Japanese, like (7a), can have two syntactic structures, both bi-clause and mono-clause.

      • 阿斯顿的韩国文学与日本文学研究举例

        聂,友军,(NIE Youjun) 강원한국학연구원 2016 국제한국학저널 Vol.1 No.-

        威廉·乔治·阿斯顿是英国乃至整个西方世界第一个派驻朝鲜的公使,此前此后他居留日本二十余年,对韩半岛与日本的历史、文学、语言乃至 现实社会都有仔细的观察与深入的研究。阿斯顿的论文《朝鲜通俗文学》与译文《崔致远》从不同向度对韩国文学予以展示与评述。他的日本文学观则 比较全面且颇为直观地体现在《日本文学史》一书中,相关论述线索清晰,叙述简洁。阿斯顿采用整体观照、个案分析与纵横对比相结合的方法,彰显韩国文学与日本文学各自不同侧面的特性,并着意探寻特性背后的成因。阿斯顿特别注意文学语言因适应社会发展与时代需要而体现出的生命力,亦充分关注韩国文学与日本文学对外来影响的接受与吸收。比较而言,阿斯顿对日本文学的研讨要全面、具体、深入得多,也更强调日本文 学自主吸取中国文学营养成分的能动性,及其适当改造中国文学加诸它的 影响;却无形中遮蔽了韩国文学不同于中国文学的独特之处,对韩国文学 的原创性以及改造、融合中国文学与文化因素的分析也不够充分。追根溯源,阿斯顿对韩语与日语的不同掌握程度直接影响了他对韩国文学与日本文学的定位与判断。 William George Aston (1841-1911) , a British diplomat and scholar, served as the United Kingdom’s consul-general in Korea from 1884 to 1885, who was the first consul-general sending to Korea from the whole western world. Before and after his stay in Korea, he lived in Japanfor more than 20years. He was an expert in the languages, literature, history and social reality of both Korea and Japan. In his thesis “Corean Popular Literature”(1890) and a translation article entitled “Chhoi-Chhung”(1900), Aston reveled different aspects of Korean literature, and he also gave his comments among the words and between the lines. As for his view on Japanese literature, it is concentrated in his book A History of Japanese Literature (1898), a general literature history with a tight system and grand architecture. The book boasted to have a clear and concise narrative clue, and had influenced scholars henceforth both in and out of Japan.Following the path of literature evolution, much attention of Aston’s was paid to literary language, and its adaption to the social development and the needs of times. Through combining the methodology of whole contemplation, case study and both vertical and horizontal comparisons, Aston highlighted the characteristics of Korean literature and Japanese literature in different aspects. He also took pains to explore the causes of such different characteristics. The acceptance and absorption of foreign influence, mainly from China, accomplished by Korean literature and Japanese literature was focused on as well. Aston studied Korean literature less thoroughly than he did in Japanese literature. Consequently, Aston had underestimated the value of Korean literature, especially its originality. Most probably that is because Aston had mastered the Japanese language far more fluently than the Korean language.

      • KCI등재

        근대 일본 기독교 신문과 계몽사상 『칠일잡보(七一雜報)』를 중심으로

        김성은 ( Kim Sung-eun ) 고려대학교 일본학연구센터 2016 일본연구 Vol.26 No.-

        일본 최초의 기독교 신문『칠일잡보』(七一雜報)는 1880년 창간된 기독교계 종합잡지『리쿠고잡지』(六合雜誌)의 명성에 눌려 그동안 그 가치를 부분적으로밖에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6년 도시사대학에서 수행한 공동연구를 통해 최초의 기독교계 정기간행물로서 이른바 기독교계 저널리즘의 “원천” 혹은 “씨앗”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리고『칠일잡보』의 발행 기간 중 전기에는 개화론이나 시사, 해외사정 등의 기사가 많았던 반면, 후기에는 교의에 관한 변증 등 복음전도를 위한 내용으로 신문 색채가 바뀌었다는 점,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성격의 글이 혼재되어 있었다는 점이 선행연구에서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근대 일본 신문의 역사에 등장하는 “대신문”(大新聞)과 “소신문”(小新聞)이라는 이중구조를 가지고『칠일잡보』 지면의 형식 변화를 살펴보고자 했다. 즉 칠일잡보의 발행기가 근대 일본에서 이른바 ‘정론(政論) 위주의 대신문과 오락 위주의 소신문’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성격의 신문이 공존하던 시기인 것에 주목하여 신문의 두 가지 성격이 교차하는 양상을 통해 칠일잡보의 계몽사상과 편집방침의 변화를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면 변화 내용을 일반신문과 비교하였다. 즉 근대 일본에서 일반신문의 발달 역사는 대신문과 소신문의 이중구조 속에서 대중신문으로 통합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과는 반대로, 『칠일잡보』는 대신문과 소신문의 특징을 절충하여 출발했다가 대신문과 소신문의 역할 분할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이것을 일본 기독교가 갖는 특징이자 한계로 파악했다. Shichiichi Zappo, the first Christian newspaper in Japan, had been recognized for its value only partially under the shadow of Rikugo Zasshi, an all-around Christian magazine created in 1880. A joint study at Doshisha University in 1986, however, helped the newspaper establish its position as the “origin” or “seed” of so-called Christian journalism as the first regular Christian publication in Japan. Under the goal of analyzing the paper changes of Shichiichi Zappo, this study set out to explain changes to the newspaper form in the dual structure of “Oshinbun” and “Koshinbun” in the history of modern Japanese newspapers. Paying attention to the fact that the newspaper was published during the coexistence of two different types of newspapers, which were “Oshinbun based on reasonable arguments” and “Koshinbun based on entertainment,” in modern Japan, the investigator explained the changes to the nature and publication intention of the newspaper through the crossing patterns of the two types. Those changes to its paper were then compared with those of general newspapers. It was highlighted that Shichiichi Zappo started by negotiating between Oshinbun and Koshinbun in their characteristics and moved toward the division of roles between them in opposition to general newspapers, which were integrated into popular newspapers in the dual structure of Oshinbun and Koshinbun, which reflects the characteristics and limitations of Japanese Christianity.

      • KCI등재

        1880년 전후 일본 소신문에 나타난 왜관 및 재조일본인에 대한 표상

        이선윤(Lee, Sun Yoon) 동아시아일본학회 2015 일본문화연구 Vol.0 No.54

        본 논문은 일본 근대 초기 대중신문인 소신문(小新聞) 중 1880년 전후의 『요미우리신문(??新聞)』과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왜관(和?) 및 재조(在朝)일본인 기사를, 19세기 후반 근대적 저널리즘의 급속한 확대와 함께 진행된 타자 인식을 통한 국민통합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한 것이다. 소신문의 대외관련 기사는 정론신문인 대신문(大新聞)의 문체와 달리 흥미 위주의 연재물에 가까운 필치로 그려졌다. 부산 왜관의 보도, 특히 1879년 4월 15일 동래에서 일어난 양국인들 사이의 물리적 충돌에 대한 기사는 『아사히신문』?에 삼 일에 걸쳐 연재될 만큼 주목을 끌었다. 양 신문 기사에는 공격에 관한 상황 분석이나 해석이 전무하여 당시 왜관 환경의 급변에 의한 조선인들의 당혹감은 전달되지 않는다. 위 기사에는 이유 없이 일본인을 공격하는 위협적 타자로서의 조선인과, 충돌 사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움직이는 단합된 일본인이 대조적으로 표상되어 있다. 폐쇄적 왜관의 시대를 벗어나 개방된 공간으로 나온 재조일본인 사회의 계층적 다양성 또한 이 시기 기사를 통해 조명되었다. 독자는 이러한 미디어 읽기 과정에서 조선이라는 ‘위치’에 관한 감각을 형성하며 ‘일본’의 대중으로 효율적으로 통합되었다. This study focuses on the articles published in modern Japanese tabloids, Koshimbun(Asahi Shimbun and Yomiuri Shimbun), about Waeguan and the Japanese residents in Chosun. It analyzes the articles around 1880 before the images of Chosun as a target of colonization or of Japanese residents in Chosun were established. The Japanese tabloid articles were written in colloquial expressions and were thus easily understood and quickly spread. The foreign reports in the newspapers formed the foreign perspective among the people, and created a national consciousness. Japanese residents in Chosun encountered several armed conflicts against the locals. The suggestiveness of the violence combined with the public interest in foreign affairs were generated through reports in the news. As a result, the image of the Japanese actively operating in the “locality” of Chosun was established. Acknowledgement of Chosun as a threat, as well as the systematic and aggressive operations set in place to counter this threat, can be observed in the articles of this era.

      • 일본의 외국 관광객 재방문 요인

        제옥경 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20 사회과학논총 Vol.19 No.-

        관광산업은 한 나라의 경제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으며, 외화 획득 및 지역의 고용 기회에도 기여하는 것으로 간주 된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관광 산업은 여러 요인이 있기 때문에 국가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와중에, 최근 일본을 방문하는 관광객 수가 사상 최대 규모인 것은 눈에 띈다. 특히 관광산업 중에서도 관광객의 재방문을 늘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한국에 비해 일본의 재방문율이 매우 높아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본 연구는 일본을 방문하는 관광객의 재방문 요인을 분석함을 목적으로 한다. 일본의 최근 10년 간 데이터를 이용해 일본의 관광정책, 음식문화, 쇼핑(면세정책), 자연문화 활용, 소비의식 변화라는 5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일본의 관광정책은 아베 내각의 관광정책 면에서 보면 국내 사정을 감안하여 미래적으로 관광산업 대국을 목표로 한 것이 긍정적인 작용으로 나타났다. 이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각각 일본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 재방문 증가에 기여 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재방문자가 먹는 체험의 기대에 맞추어 미슐랭을 일본의 전통적인 요리를 소개하는 창구역할로 이용하여 관광 목적지에서 먹는 체험을 국제화시켜 관광객을 유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 번째로 외국인에 대한 소비세 면제와 면세점을 늘려 소비 성향이 큰 품목을 갖춰 관광객들이 불편 없이 일본에서 쇼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네 번째로 재 방문객은 일본 특유의 자연경승지를 원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이 점을 고려하여 지방의 여관과 풍경을 활용하여 그 체험을 하게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관광객의 행동(소비)의 흐름이 '소유'에서 '경험'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에 눈을 돌리고, 그에 따른 관광객의 요구 변화에 맞춘 정책과 노력을 펼쳐온 것이 재방문을 늘린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観光産業は一国の経済の成長に大きな影響を及ぼすと捉えら、外貨の獲得、地域の雇用の機会にも貢献していると見なされる。しかし、国際社会で観光産業は様々な要因があるので、国によってまったく違う様相が示されているうちに、最近までの日本を訪れる観光客が過去最大であったのは目立つのである。特に、観光産業の中でも観光客の再訪問を増やすのは非常に重要なことだが、韓国に比べ日本のリピータ-率は大変上ったのも注目すべである。本研究は、日本を訪問する観光客のリピーターの誘引要因を分析することを目的とする。日本の最近10年間のデータを用いて、日本の観光政策、食文化、ショッピング(免税政策)、自然文化の活用、消費意識の変化という5つの側面から探って見た。日本の観光政策は、安部内閣の観光政策の面から見ると国内事情を考え合わせて未来的に観光産業大国を目指したのがよく働いたのが分かった。これは中央の方から地方の方にそれぞれの日本のイメージを作られたのが再訪問の増加に寄与したと思われる。次には、リピーターのたべる体験の期待にあわせて、ミシュランを日本の伝統的な料理を紹介する窓口の役割に用いられて、観光目的地で食べる体験を国際化させて観光客を誘引することと思われる。三番目に、外国人に対する消費税の免除と免税店を増やすとともに、消費傾向の大きい品目を備えることによって、観光客が不便なく日本での買い物をする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四番目に、リピーターは、日本特有の自然景勝地を希望する傾向が強いので、この点を考慮して地方の旅館と風景を活用して、その体験をさせたのである。最後に、日本が観光客の行動の流れが 「もの」 から 「こと」 へ移っていることに目を向けて、それによる観光客のニーズの変化にあわせた政策と努力をしてきたことが、再訪問を増やされた要因であったと思われる。

      • KCI등재

        『奉使日本時聞見錄』을 통해 본 조일문사 간의 필담과 그 의미

        황현우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24 石堂論叢 Vol.- No.88

        종사관 자격으로 무진사행(1748)에 참여했던 조명채는 ‘報告’와 ‘復命’의 의도를 목적으로 한 사행록 『봉사일본시문견록』을 저술하였다. 특히 조명채는 조선 문사와 일본 문사 간의 필담 내용을 미야케 타케시(三宅斌), 막부 유관인 린케(林家) 문인, 나카무라 란린(中村蘭林)이라는 세 그룹을 중심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통신사 부사 서기 유후는 오사카(大坂)에서 이즈미(和泉) 지역의 어린 문사 미야케 타케시와의 필담에서, 그에게 의복·석전·학교 등 여러 예악제도에 관해 질문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서 그의 독서목록의 파악을 통해 그의 학문적 지향에 대해 확인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일본 학술 문단의 상황에 대한 질문을 통해 주자학 존숭 의지에 대해서도 확인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통신사 문인들은 에도(江戶)에서 막부 유관인 린케(林家) 태학두 부자와 함께 나카무라 란린이라는 일본 문사를 함께 만나게 된다. 조선 문사들은 막부 유관인 린케(林家)와의 필담을 통해 그들이 오랫동안 무사정권의 문형을 세습하며 무사안일하게 그들의 명예만 지키려 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 문인들은 주자학을 통해 동류의식을 형성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문 실력이 날로 떨어지고 있다고 여겼으며, 오히려 고학파 계열 문인들보다도 못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조명채는 린케의 시문 실력과 일본 문단, 막부에서의 영향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 상황을 사행록에 기록하였다. 오히려 조명채는 후에 고학파를 따르는 이단으로 치부된 나카무라 란린과의 필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명채는 란린과의 필담에서 그가 통신사에게 일본 고서의 목록들을 제시하여 일본에 중국·조선에도 전하지 않는 고서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도 하며, 삼국의 역사서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도 한다. 이를 통하여 조선 문사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조명채는 그의 과시를 평가절하하기도 했지만, 중화문명을 흠모하며 삼국의 역사서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명채는 필담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고증을 중시하는 고학파의 성향을 드러낸 란린에 대해 최종적으로는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조명채는 『봉사일본시문견록』을 통해 ‘미야케 타케시’라는 幼學을 통해 일본의 국속을 탈피하고 예악문명을 실천하는 일본인의 존재를 포착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통신사 문인들은 주자학적 이념과 질서를 통해 일본을 예악문명으로 교화시키겠다는 입장으로 그들을 바라봤고 이를 사행록에 남겼다. 그리고 막부 태학두인 ‘린케(林家)’와의 필담을 통해 오랫동안 무사정권의 문형을 세습하며 무사안일하게 그들의 명예만 지키려 하는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나카무라 란린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존숭하는 자로 인식하지만, 나중에는 이토 진사이를 따르는 고학파로 인식하고 있다. 일본 문단에서 경서 및 조선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통해 점점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고학파에 대해 의심과 비난 위주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통신사 문인들이 겉으로는 란린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실력에 대해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경계하고 탐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명채의 『봉사일본 ... Cho Myoung-chae(曺命采), who participated in the Mujin-Sahang(戊辰使行), wrote a meandering book, Bongsailbonsimungyeollok(奉使日本時聞見錄) , with the intention of 'reporting' In particular, The contents of the writing between Joseon and Japanese writers are recorded centering on three groups: Takeshi Miyake(三宅斌), Rinke(林家), and Ranrin Nakamura(中村蘭林). In a written conversasion with Takeshi Miyake, a young literary man in the Izumi area of Osaka, Yufu(柳逅) of Joseon asks questions about various institutions. In the following question, he shows an attempt to grasp his academic orientation through his reading list. It also shows an attempt to confirm the will to honor Zhu Xi(朱子) through questions about the situation of the Japanese academic literature. In Edo(江戶), Joseon writers met a Japanese literary man named Ranrin Nakamura with the shogunate-related father and son Rinke(林家). In their written conversations with the shogunate-related Rinke, Joseon writers describe them as those who have long succeeded in the form of the samurai regime and try to keep their honor carelessly. Joseon writers did not necessarily have a positive view of them just because they formed a sense of similarity through Neo-Confucianism(性理學). They thought that their poetry skills were falling day by day, and rather they were evaluated as inferior to those of the high school. Cho Myung-chae recorded this situation after learning that Rinke's poetry skills and influence in the Japanese literary world and the Japanese regime were becoming weaker. Rather, Cho Myoung-chae records in more detail his writing stories with Ranrin Nakamura(中村蘭林), who later followed the ancient studies. Cho Myoung-chae also shows off that there are old books in Japan that were not delivered to China and Joseon by presenting a list of old Japanese books to the news agency, and shows that they are trying to gain recognition from Joseon literature. Although Cho Myung-chae played down his display, he admired Chinese civilization and recorded an important interest in the history books of the three countries. However, as the writing progressed to some extent, Cho Myoung-chae became aware of Lan Lin, who expressed a tendency to value archaeology. Cho Myoung-chae's Bongsailbonsimungyeollok has the following meanings. Joseon writers, who had not recognized Japanese writers as counterparts of literary exchanges, recognized them as counterparts of literary exchanges to some extent through their writings and tried to find the possibility that Japan could be edified from them.

      • KCI등재

        복문으로 나타나는 일본어 「知る」문과 한국어 「알다」문의 통사구조와 재구조화현상

        박용일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2021 비교일본학 Vol.51 No.-

        본 연구는 복문으로 나타나는 일본어의 [知る]문과 이와 대응하는 한국어 [알다]문의 심층구조, 기능적 구조 그리고 표층구조의 특징으로 단문화현상을 고찰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어의 [知る]문과 이와 대응하여 나타나는 한국어 [알다]문은 술어의 의미역으로 인해 심층구조에서 복문구조로 생성되지만 이들 구문들이 어떤 통사적 기능을 보이냐에 따라서 컨트롤구조와 상승구조로 구분할 수 있음을 명시하였다. 즉, [こと] 보문소를 취하는 일본어의 [知る]문과 [일] 보문소를 취하는 한국어 [알다]문은 상승구조이며, [の] 보문소를 취하는 [知る]문과 [것] 보문소를 취하는 [알다]문은 컨트롤구조임을 명시하였다. 이와 같은 통사구조를 제시하기 위하여 본 고찰에서는 관용표현이 이들 구문에서 어떠한 해석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의미해석을 이용하였다. 또한 일본어의 [知る]문과 한국어 [알다]문의 표층구조에서는 모두 단문구조가 갖는 통사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분열문현상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이들 구문에서 재구조화현상이 관찰된다는 사실을 명시하였다. This study examines the syntactic structures and restructuring phenomena of the “siru” sentences in Japanese and the corresponding “alda” sentences in Korean that appear in complex sentences. More specifically, the study shows that although the “siru” sentences in Japanese and the corresponding “alda” sentences in Korean are formed as complex sentences in the deep structure due to the semantic role of the predicates, such syntactic structures can be divided into control structures or raising structures depending on the syntactic roles they perform. In a nutshell, the “siru” sentences in Japanese that take the complementizer of “koto” and the “alda” sentences in Korean that take the complementizer of “il” are of an raising structure, whereas the “siru” sentences that take the complementizer of “no” and “alda” sentences that take the complementizer of “geot” are of a control structure. To present such syntactic structures, this study focuses on the semantic phenomenon related to how idiomatic expressions are interpreted in such syntactic structures. In addition, this study shows that restructuring is observed in these syntactic structures, by demonstrating, through the incidences of cleft sentences, the fact that both the “siru” sentence in Japanese and the “alda” sentence in Korean show in their surface structure such syntactic phenomena as are found in simple-sentence structures.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