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학위유형
        • 주제분류
          펼치기
        • 수여기관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지도교수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 출범과 전망

        장천소 동의대학교 대학원 2016 국내석사

        RANK : 248719

        본 연구는 중국 주도로 설립되는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AIIB)’의 출범과 그 전망을 분석한다. 21세기들어 미국과 더불어 G2로 성장하여 지구촌의 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2013년 인도네시아의 발리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APEC) 정상회담’에서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AIIB)’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이미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2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과 일본 중심의 기존 금융제도 이외의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기에, 주변국과 지구촌의 관심을 크게 일으키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AIIB)’의 설립 배경 및 목적과 설립 준비 과정, 설립 구조를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AIIB)’의 발전과 성공여부 및 그 영향을 전망한다.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AIIB)’가 그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국제금융질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해 보인다. AIIB의 설립을 미국과 중국의 대결로만 보는 시각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은 모두 이를 부인하고 양자가 상호 보완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김용 세계 은행 총재는 세계은행 (World Bank)이 AIIB와 혁신적인 방식으로 협력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중국도 AIIB가 주요 다자간 은행과 협력 보완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본 논문은 AIIB의 설립 배경과 설립과정을 자세하게 분석할 것이다. AIIB의 지배구조 문제와 투명성 문제를 함께 분석함으로써, AIIB 설립과 발전과정에서 중국은 물론 아시아 이웃국가들과 한국에 미치는 영향을 전망한다.

      • 중국 신형대국외교 담론과 정책의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 : 아시아 차원을 중심으로

        우완영 성균관대학교 2018 국내박사

        RANK : 248719

        중국 신형대국외교의 성격을 분석하고 담론과 정책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것은 시진핑 시기 중국외교의 목표와 방향을 파악하는 데 효과적이다. 특히 신형대국외교가 본격화되는 것을 계기로 중국외교가 적극성(assertiveness)을 넘어 공세성 (offensiveness)으로 발전했고, 세력전이 양상이 본격화되면서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대중국정책에서의 봉쇄정책을 주문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이러한 논의의 적실성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데 있다. 우선 신형대국외교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의 틀을 수용하고 있고 현 상태로는 중국의 주변지역 내에서 핵심이익을 보장받기 위한 방어적 현실주의(defensive realism)의 성격에 주목했다. 왜냐하면 빠른 성장(fast growth)에도 불구하고 질적 발전(qualitative development)을 이루지 못하는 등 종합국력의 한계가 있다. 따라서 중국의 팽창의지와 무관하게 글로벌 투사능력(global capability reach)은 제한적으로 보았다. 둘째, 중국의 주변지역인 아시아차원에서도 세력전이 현상이 본격화되기는 어렵다. 비록 이 지역에서 이중위계체제(dual hierarchy system)가 작동하고 있으나, 미국이 여전히 기준권력(default power)를 유지하고 있고 아시아 안보질서에서도 역외 균형자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관철시키고 있다. 중국도 이러한 미국의 정책투사에 대해 수동적으로 적응해 왔고 심지어 미국의 재균형을 ‘경제적 균형’으로 보고 이를 환영하기도 했다. 또한 비동맹 정책원칙을 고수하면서, 동반자외교(partnership diplomacy)를 통해 대미 균형을 시도하며 경제와 금융영역에서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경제 질서를 부분적으로 약화시키거나 상쇄(offsetting)전략의 차원으로 보았다. 실제로 적극적 반균형(anti-balancing)보다는 선택적 수용과 배제의 방식을 통해 이슈별로 반응한다고 보았다. 셋째, 중국이 설계하는 지역공동체 구상도 담론과 제도경쟁의 양상을 지니고 있으나, 기존질서의 대체재(substitute goods)는 아니라고 보았다. 즉 중국의 운명공동체는 실제 외교정책에서는 아시아 지역에 집중된 개념이며, 신안보관, 실제적 이익을 담보할 수 있는 의리관(義利觀), 아시아의 가치를 공유하는 인문공동체로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는 포용적 개방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중국 예외주의의 차원으로 해석했다. 즉 중국과 아시아 국가들의 빠른 부상과 선진국의 경제침체로 인해 권력분산(power diffusion)이 나타나는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과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전략적 의도를 주목했다. 이를 보다 발전시킨 인류운명공동체도 중국적 세계를 완성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기존 공동체의 왜곡에 대한 중국적 방안으로 볼 수 있다. 넷째, 신형대국관계가 강대국으로서의 외교와 강대국과의 외교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으며, ‘인류운명공동체’의 아시아적 차원인 ‘아시아운명공동체’와 신형대국외교는 함수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즉 ‘신형대국외교’는 대국간 관계뿐만 아니라 강대국과 약소국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고 강대국관계와 주변외교 사이의 상호작용의 특징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한 다양한 정책투사 형태를 경험적으로 분류했다. 물론 중국의 대외정책에서 대미정책을 가장 중시하고 있으나 ‘주변외교의 합이 강대국 외교보다 크다’고 보았고 중국외교의 내포와 외연을 동시에 관리하면서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보았다. 다섯째, 신형대국관계를 통해 미중 양국이 국가이익을 둘러싸고 협력하고 충돌하는 한반도 정책의 함의를 발견했다. 한국은 미국의 지역동맹체제에 깊이 편입되어 있고 중국의 핵심이익과 직결된 지리적, 전략적 주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향후 경성안보이슈(hard security issue)에서의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고 사드배치 문제도 한국의 전략적 선택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전형적 사례로 보았다. 이렇게 보면 중국의 공동체 구상에 대한 매력공세가 강화될 가능성이 있고 미국은 역외균형자(offshore balancer)로 한국을 한·미·일 안보협력의 틀 속에 묶고자 할 것이다. 이로부터 미중관계의 협력이나 갈등과 무관하게 한반도 문제는 점차 종속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다만 이러한 신형대국관계, 신형대국외교가 아시아 지역의 차원에서의 전개하는 정책담론인 ‘아시아운명공동체’나 ‘인류운명공동체’는 주변국가의 역사적 기억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정책과 주변국가의 수용 사이에는 여전한 간극이 있다. 이런 점에서 신형대국외교와 아시아 운명공동체 논의는 일종의 잠정적이고 일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 한국의 루쉰 수용과 현대중국의 상상

        최진호 성균관대학교 2017 국내박사

        RANK : 248719

        본 논문은 한국 루쉰 수용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한국에서 루쉰이 의미화되는 과정을 밝힘으로써 한국의 근대성을 가늠해 보는 작업이다. 한국의 루쉰 수용자들은 루쉰과 중국이 대면했던 역사적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한국의 정치적· 역사적 조건을 반추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루쉰의 사상적· 문학적 위상에 대한 관심은 동아시아의 지평에서 수평적 참조 체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루쉰에 대해 일관된 연구의 흐름이 형성될 수 없었다. 한국의 정치적· 역사적 조건이 루쉰의 전면적인 수용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특히 냉전의 영향은 한국이 루쉰 수용의 폭과 양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성에도 불구하고, 루쉰은 편린의 형태로나마 ‘현대중국’의 상징으로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수용된다. 비록 루쉰이 한국에서 전면적으로 사유되지 못했다 해도 한국에서 루쉰과 현대 중국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루쉰에 대한 단편적 논평들 속에 현대 중국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관심과 지지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에서 본다면 한국 루쉰수용의 계보 탐구는 한국 근대성에 있어 ‘현대중국’이 갖는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이다. 본 논문은 식민-해방기, 냉전기, 탈냉전기로 나누어 루쉰 수용을 재맥락화했다. 먼저 식민-해방기는 한국 루쉰 수용의 원점에 해당한다. 식민지 시기 한국의 지식인들은 5·4 운동과 사회주의와 관련해서 루쉰의 위상을 문제화한다. 정내동이나 김태준, 가라시마 다케시, 이육사등 식민지 시기 한국의 중국 연구자들은 ‘루쉰전변’을 축으로 루쉰의 사상과 문학의 본질을 논했다. 이들은 1930년 전후의 중국 사회의 분기를 ‘계몽’과 ‘혁명’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동시에, 이에 기반 해 현대중국에서 루쉰의 위상을 다룬다. 이때 ‘루쉰상(魯迅像)’은 혁명과 계몽, 그리고 비판을 축으로 구성된다. 해방기 한국 사회에서는 ‘중국혁명’에 대한 중층적 관심이 생겨난다. 동시에 루쉰에 대한 이해 역시 다각화된다. 그리고 해방 직후 좌우 연대와 합작이라는 이념지형 속에서 중국과 루쉰에 대한 공통의 탐구 가능성이 열린다. 정치적·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신문화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을 한국 현대사의 현장으로 불러들여 새로운 현실감각을 획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냉전의 대립 구도의 강화 속에서 ‘혁명좌파 루쉰’의 형상은 은폐되고 자연주의적 휴머니스트 루쉰의 형상만이 언표 가능해 진다. 둘째 냉전 시기의 경우 ‘중국에 대한 상상’이 루쉰에 대한 금기와 허용을 결정했다. 반공 체제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루쉰을 사회주의에서 분리시켜 냉전의 통념 속에서 수용한다. ‘중공’을 전체주의 국가이자 근대의 이탈로, ‘자유중국’을 ‘자유진영’의 수호자이자 근대화의 모범으로 상상하는 조건 속에서 루쉰을 ‘중공’에 적대적 사상가· 문학가로 계열화한다. 루쉰을 ‘자유’와 ‘순수문학’의 계보 속에서 ‘자유중국’의 일원으로 계열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냉전체제의 완화와 함께 공적 담론 체계에서 은폐되었던 ‘붉은 루쉰’이 재등장한다. 리영희의 경우 냉전 세계 체제의 변화를 인식하고 루쉰과 현대중국의 재인식을 통해 이 변화에 대응하고자 한다. 그는 루쉰을 사유의 지반으로 삼고 현대중국에 ‘내재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폐쇄성을 해체하고자 했다. 셋째 냉전 해체기에서는 ‘현대중국’에 대한 지적 관심이 재고된다. 그리고 루쉰과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관련성이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한다. 물론 198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의 지배권력은 여전히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요했다. ‘중국혁명’에 대한 지적 관심은 이런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과 ‘중국혁명’을 한국 사회의 변화의 동력으로 번역하려는 흐름과 결합한다. 중국혁명에 대한 직접적 소개가 제한된 상황에서 의식화된 지식인들은 루쉰과 ‘현대중국’을 이를 위한 우회적 통로로 활용하고자 한다. 1980년대 후반 냉전해체와 동아시아 지역간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한국 사회에서 ‘지역’이 지닌 비판성이 의제화된다. 한국 사회의 변화가 ‘지역’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의식 속에서 ‘동아시아론’이 부각되었다. 중국은 직접적인 소통으로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호명된다. 중국의 위상 변화 속에서 루쉰은 동아시아 근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수용된다. 즉 루쉰은 보편적인 지식인이 아니라 비서구적 지식인 혹은 동아시아 지식인으로 형상화된다. 말하자면 7,80년대의 민주화담론과 좌익담론에 대한 내부적 반성과 90년대 아시아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지적 모색 속에서 루쉰이 수용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에서의 루쉰 수용의 폭과 형태는 한국의 중국에 대한 이해와 결합되어 결정되었다. 즉 한국에서는 루쉰을 ‘현대중국’의 상징으로 수용했다. 현대중국은 지속적인 체제 전환의 과정 속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현대중국을 한국 사회에 접목시키는 사상 자원이 루쉰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루쉰은 중국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포괄적인 통로였다고 할 수 있다. 반봉건(反封建)과 반제(反帝)의 휴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주체적 자각의 상징에 이르기까지 루쉰은 복합적 형상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현대중국’을 한국 사회에 포섭하려는 역사적· 정치적 조건 속에서 루쉰의 면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본 논문에서 한국의 루쉰 수용이 현대중국의 사상과 문학의 수용만이 아니라, 현대중국을 한국의 사상자원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었음을 밝혔다. 루쉰이 지닌 상징성을 규명하는 것은 현대중국이 한국 지성계에 가졌던 비판적 의의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서구-일본이라는 제국의 창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비서구와의 소통을 통해 당대 한국의 근대성과 전망을 문제화하고자 했다. 한국에 있어 현대중국과 루쉰의 수용은 비서구와의 연대 혹은 교통을 의미했다. 이는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비판적 담론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루쉰 수용의 역사성과 현장성을 밝히는 것은 루쉰을 둘러싼 인식론적 틀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이는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루쉰을 연구하는 것과 연동된다.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루쉰을 바라본다는 것은 각 지역과 시대의 루쉰 연구가 지역, 시대의 어떤 요구와 맞물려 전개되었는지에 주목하여 루쉰을 재맥락화하는 작업이다. 루쉰을 경유할 때, ‘동아시아’는 공통성의 공간이 아니라 차이의 공간이다. 루쉰의 수용사를 통해 동아시아의 개별 공간 사이의 균열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균열의 근거를 사고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개별 국가들은 루쉰을 거의 동시적으로 수용했지만, 그 수용 양상은 상이했다. 그러나 동시에 루쉰이라는 문제적 인물을 둘러싸고 이들 사이의 다양한 균열점들이 교차한다. 이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에서 루쉰은 논쟁적 작가였으며, 앞으로도 논쟁적 작가로 남을 것이다.

      • 판보이쩌우(潘佩珠)의 민족의식과 아시아 인식의 역정

        송방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9 국내석사

        RANK : 248687

        이 글의 목적은 판보이쩌우의 일생에 걸친 정치역정과 논저를 통해 베트남 반 프랑스 민족주의가 아시아 각 지역의 혁명운동과 조우하면서 부단히 자신을 확장하고 새로운 길을 탐색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판보이쩌우는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이고, 베트남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은 물론 국민계몽운동을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추진해 온 인물이었다. 19세기는 세계는 제국주의가 팽배한 시기였고, 여러 서구 열강들이 세계 곳곳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이 시기에는 한자 문화권에 속한 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정치이데올로기 및 문화에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1858년에 베트남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1884년에 완전히 점령했다. 8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베트남을 식민지로 통치하였다. 이전시기의 베트남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고 베트남 지식인들 또한 대부분 한자를 사용하였다. 프랑스 식민정부는 1919년에 베트남의 과거시험 제도를 폐지하고 1936년에 한자의 사용도 폐지했다. 베트남뿐만 아니라 아시아 약소국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각 약소국의 지식인들은 혁명의 길로 가게 되었고, 민족혁명을 위해 각지에서 분주하게 활동했다. 특히 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일본 도쿄로 모이기 시작하여 혁명 활동을 도모했다. 다행히 그들은 한문에 능통하여 서로 교류에 지장이 없었다. 그들에 있어 민족해방을 우선할 것이냐 근대문명의 수용을 우선할 것이냐 하는 근본적 견해 차이가 있었다. 판보이쩌우는 민족해방을 우선시하였지만, 일본에서 추방당함으로써 ‘동유운동(東遊運動)’이 실패하게 되었고 일본의 원조를 통해 군주제를 실현하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판보이쩌우의 생각도 군주제에서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판보이쩌우는 무장투쟁에 기대를 걸기도 하고 사회주의에 기대를 걸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투쟁 방법에 따라 갈래가 나눴던 것은 동아시아 다른 국가의 독립운동사에서도 낯설지 않은 광경들이라고 할 수 있다. 판보이쩌우는 초기에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무장투쟁으로 프랑스를 물리치고자 근왕운동(勤王運動)을 참가하거나 무장봉기 등 여러 차례의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1900년 이후의 판보이쩌우의 독립운동은 비록 유교적 관념이나 무력투쟁의 측면 등에서 이전 시기의 근왕운동과 맥을 같이 했지만 많은 면에서 베트남민족주의운동의 흐름에 있어 큰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는 특히 1900년에서 1908년 사이 유신회와 ‘동유운동’ 등을 통한 그의 활동에서 잘 나타나는데, 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을 위한 시도, 해외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한 새로운 민족주의운동 조류의 인식, 그리고 그를 통한 베트남의 민족의식의 고양 등이 새로운 변화의 주된 내용이었다. 한편 일본에서의 경험을 통해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접하면서 점차 그의 대일(對日)관에 변화가 생겼고, 그는 점차 중국과 일본의 급진적 혁명파들과도 접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교류와 그의 정치적 입장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사상적 발전이나 전환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중국과 일본의 혁명파 내부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았고, 어떤 사상 또는 집단이건 간에 그것이 베트남의 독립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경우, 접촉하고 필요한 것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 글로벌 금융위기와 중국의 전략 : 제도주의적 접근을 중심으로

        이승주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09 국내석사

        RANK : 248671

        본 논문의 연구 목적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발생 후 나타난 중국의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중국이 다자주의 전략을 추구하는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1970년대 이래로 중국은 급속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냈고 이러한 경제력에 걸맞는 국제정치에서의 위상을 획득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중국의 증대된 힘과 영향력은 세계 여러 국가의 두려움과 우려 또한 불러일으켰다. 중국 지도부가 오랫동안 “화평발전”의 전략을 추구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특수한 상황이 ‘중국 위협론’을 다시 발생시켰다. 많은 학자들은 미국의 힘이 점차 쇠퇴할 것이며 동아시아지역에 투사된 미국의 영향력 또한 감소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 지역에서의 중국의 보다 증대된 역할을 예상할 수 있다. 본 논의는 지역 통합체의 구축과정의 맥락에서 중국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1997년 이래로, 동아시아 통화위기를 극복하고 동아시아 지역에 발생하는 지역 금융문제들을 다루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존재해왔다.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아시아통화기금 등이 이 지역의 구성원들에 의해 설립된 다양한 시도의 결과물이다. 중국 또한 이러한 지역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편, 중국의 기본 외교정책은 이웃국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중국 위협론”을 불식시키는 것이다. 중국은 주변국들에게 책임감을 지닌 우호적인 국가로 인식되어야 한다. 중국은 자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 다자주의 제도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중국은 경제적 성장을 지속해야만 한다. 위협적인 외교 정책은 이러한 성장을 저해할 것이고, 이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지도력의 유지를 위협할 것이다. 중국 지도부는 중국의 부상뿐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은 국내 안정을 증진하기 위해 주변 주역의 “우호적인 국제환경”을 창출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써 지역 다자주의 협력을 시도했다. 중국 지도부는 미국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며, 자국의 경제적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미국에 의해 이끌어지는 현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본 논의는 중국의 부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은 세계 경제에서 적극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지도적 역할은 아시아 지역주의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중국의 행위를 위협으로 인식하는 ‘중국 위협론’은 재점검되어야 한다 The research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consider how we understand China's behavior that appears after global finance crisis and what China is aim at by pursuing their multilateral strategy. Since the late 1970s, China has accomplished a rapid and sustained economic growth and tried to get a proper position with China's economic power in world politics. But China's growing power and influence could also arouse fear and anxiety in the world. That's why that chinese politicians and intellectuals have long advocated the strategy of "peaceful rise" or "peace and development". However, the special circumstance, global finance crisis made 'China threat theory' rebirth. Many scholars anticipate that U.S. power may recede gradually in the coming years and reduce their influence towards East Asia. In that process, it will cause China to play a greater role . This study examines China in the context of regional community building process. Since the second half of 1997, there have been various endeavors to overcome the currency crisis and to manage regional financial problem in the East Asia. Such as Chiang Mai Initiative, the Asian Monetary Fund are outcomes of the various endeavors developed by the constituent members of the region. China has also participated in the East Asia community. By the way, China's basic foreign policy is to keep friendship and partnership relation with neighboring states and appeasing "China threat theory". China have to assure its neighbors that it would be a responsible and benign power. Therefore China is developing a more active attitude toward participation in regional multilateral institutions in order to achieve its goal of improve its image. Besides, China have to sustain its economic growth. A confrontational foreign policy could disrupt that growth, and threaten the Communist Party's hold on power. China's leadership appears rational, calculating, and conscious not only of China's rise but also of its continued growth. Therefore China tried to regional multilateral cooperation as an important way to pursue a "favorable international environment" in neighboring areas to promote domestic construction. China's leadership is not inclines to challenge the United States, and its focus remains on economic development and winning acceptance as a great power. This could lead to the conclusion that China won't be a threat to new liberalism order leaded by U.S. I argue that the rise of China is an undeniable fact, but it can not be a threat. China is actively pursuing their own interests in world economy. Also, the leadership role of China are enormously important in the process of Asian regionalism. Therefore the 'China threat theory' that perceive China's behavior as a threat have to be checked again.

      • SOCIOECONOMIC PROGRESS, CULTURE AND THE CONFUCIAN VIRTUES. : 사회경제적 발전(發展), 문화(文化) 그리고 유교미덕(遺敎美德)

        라젠 세종대학교 2007 국내석사

        RANK : 248655

        Abstract (Korean) “아시아의 경제적 기적” 에 대해서 서양의 학자들은, 서양의 자본주의와 다른 모델은 매우 성공적이기 힘들다는 기존의 공통된 신념에 대해 다시 재평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아시아의 경제적 모델들은 서양의 경제적 발전을 따라가기 부족하다는 기존의 오래된 생각은 최근 들어 재고 되어야했다. 이러한 논쟁의 열기는 동아시아의 경제적 발전을 규명하기 위해 신교도들과 서양의 경제적 발전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유사한 연결이 동아시아의 사회경제적 발전에도 존재하고 있는지를 문제 삼았던 맥스 웨버(Max Weber)의 통찰력 있는 관측을 부활시켰다. 새롭고 성공적인 경제 시스템들의 다양함이 최근 세계에, 특히 동아시아에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수준의 접근과 분석이 더 필요하다는 근거이다. 세계적인 경제발전을 일으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매우 광범위하게 검토되어 왔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이러한 논쟁들은 경제발전의 문화적 측면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최근 급진적인 발전을 보이는 중국과 ‘네 마리의 작은 호랑이들’의 놀랄만한 성장들을 따르기에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성공적인 발전을 위한 그 특성들은 복잡하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며, 관념적이고, 제도적, 그리고 문화적인 기원들이다. 이 논문은 이러한 요소들의 유교문화, 경제적, 그리고 지리적요인의 조짐으로서의 상호보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요소들을 균형잡고 종합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이 논문의 목적은 문화와 경제적 발전의 관계를 살펴봄에 있는데, 특히 동아시아에서 발견되는 유교적 미덕의 중요성이 어떻게 신뢰와 사회자본을 증식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하여 동아시아가 경제기적이라 불리는 발전의 기회들을 잡을 수 있었는지를 살펴봄에 있다.

      •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동북아지역의 경제통합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이곤 배재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248655

        2008년 금융위기가 지나간 뒤 미국의 경제는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을 했고 많은 회사나 기업들이 부도위기에 처해 있다. 현재 미국은 경제성장을 위한 자극이 급격히 필요한 상황이다. 최근 미국경제는 아시아에 점차적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고 이러한 배경하에 미국은 당당하게 TPP에 가입하였다. 한편으로 TPP는 아시아지역의 경제발전에 기회를 가져다 준 동시에 새로운 도전과 위협도 공존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은 TPP에 가입함으로써 아시아지역의 정치와경제에 영향력을 넓히고 아시아지역에 또 다시 주목을 돌렸다. 본 논문은 TPP가 동북아 지역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 분석 한다. 또한 한국, 중국, 일본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였으며 비교분석방법을 통하여 동북아지역의 경제협력 상황에 대해 새로운 구조와 과거의 구조하에 지역협력은 어떠한 장점과 결점이 있는지를 분석한다. TPP와 기타 주요 지역무역협정에 대해 비교하고 TPP가 한국, 중국, 일본의 경제와 비경제 방면에 대한 영향을 분석한다. 경제방면에서 만약 한국이 TPP에 가입할 경우에 거시경제지표를 개선할 수 있고 GDP와 수출입 무역액이 성장할 것이다. 만약 중국이 TPP가입이 가능하다면 중국의 대외무역에 유리하고 만에 하나 가입하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국제 시장경쟁에서 고립되는 것을 피면해야 한다. 일본이 TPP에 가입할 경우 해외시장의 확장과 본국의 경제발전에도 유리하며 비경제방면에서는 TPP의 가입은 동북아지역의 경제발전에 유리하다 앞으로.TPP가 가져다준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이며 어떻게 더 좋은 경제협력을 위해 어떠한 전략을 세워야 하고 진행할 것인지가 차후의 지역경제발이 직면하게 될 중요한 문제가 될것이다.

      • 가라시마 다케시(辛島驍)의 경성제대시기 中國 現代文學論 연구 :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 所在 評論을 중심으로

        주미애 성균관대학교 2018 국내석사

        RANK : 248655

        East Asian countries have changed and developed by comparing themselves to and competing with other countries through mutual contact. In the literary field of expression, multilayered functions and purposes indicated in the literary works of others have been frequently discovered by interacting with them. Particularly in the 1920s and 1930s, Joseon intellectuals in the colonial era engaged in various attempts to break free from the imperial literary world while also internalizing that world through their contact with Chinese literature that originated from China’s May Fourth/New Culture Movement. Meanwhile, in the Shina (支那) Language and Literature Department at Keijō Imperial University, which was a national university established by Imperial Japan in their colony during the same period, China was perceived as a different entity and studied separately under the active sponsorship and with the assistance of the Japanese Governor-General of Korea. This was done for the purpose of engaging in mainland studies, which was in line with the founding purposes of the university. In the 1930s, China began to understand literature in a new way based on the idea of realism, which broke down old customs, and accordingly, the academic aim of Keijō Imperial University also shifted from “classical” to “contemporary.”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focus on Karashima Takeshi (辛島 驍), who is a Japanese professor with the Shina (支那) Language and Literature Department at Keijō Imperial University and the leading scholar of Chinese studies. This study also aims to examine his personal and academic relationships and how his political disposition, as a Japanese person in Joseon researching contemporary Chinese literature, appears in the study of “contemporary Shina (支那) literature” at the time. To this end, this study explored his theory about contemporary Chinese literature through his works published in Chōsen oyobi Manshūsha for about 11 years during his tenure at Keijō Imperial University, from the late 1920s to the early 1940s. First published under the title Chosen in 1898, a total of 414 issues (46 issues of Chosen and 398 issues of Chōsen oyobi Manshūsha) of Chōsen oyobi Manshūsha were published over 43 years until the cessation in 1941. Chōsen oyobi Manshūsha assisted the mainland studies of Imperial Japan by building the identity of the Japanese community in colonial Joseon as the “pioneer of Joseon and Manchuria and leader of expansion into the mainland.” Karashima published a total of 34 reviews or critiques in this magazine, and the contents and topics of his works are used organically at various times and places, for example, as course materials in the Shina (支那) Language and Literature Department at Keijō Imperial University, as scripts at Kyeongseong Broadcasting Corporation (JODK), or as public lectures. Karashima’s studies are characterized by 1) changes in academic views on Chinese literary studies and the accumulation of extensive basic data, 2) contemporary research subjects, and 3) a shift in time from the time of “classical literature” to that of “modern literature” and a corresponding shift in methodology used to study the two types. However, his research perspective and the characteristics of his studies are limited by strict “imperialistic characteristics.” Therefore, this study examines the Chinese contemporary literary theories of Karashima, a man who has served as a government official and as a professor of a national university established by Imperial Japan in its colony of Joseon. This study also investigates the perception that Japanese people living in Joseon have about China and Joseon, based on the writings that Karashima published in the magazine Chōsen oyobi Manshūsha. This study is significant because it examines the research topics of Chinese literature studied by Imperial Japan based on the perspective of Asiacentrism; the fact Chinese literature was accepted by Imperial Japan; and the contemporary Chinese literature that Joseon studied for reference. Furthermore, the study is significant because it identifies new elements related to the connection of East Asian knowledge and culture and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 culture, by tracing the acceptance and exchange of knowledge and various aspects of culture between colonial Joseon and semicolonial China. Finally, this study also sheds light on the geographical and social complexity and variations in Chinese literature as studied by Japanese people living in a colony of Imperial Japan. 동아시아권의 각 나라는 서로간의 접촉을 통해 대상을 참조하기도 하고 경쟁하면서 변천・발전해 왔다. 그 중 文學이라는 표현의 場에서는 타자의 문학과 교류하며 그 안에 내포된 다층적인 기능과 목적들이 끊임없이 발견되어 왔다. 특히 1920・30년대는 중국의 5・4 신문화 운동에서 비롯된 중국 문학과의 접촉을 통해 식민지기 조선 지식인들은 제국 문단을 내면화하면서도 그 제국 문단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을 窮究했던 시기로 존재하고 있었다. 한편 동시기 제국 일본이 식민지에 세운 官學인 경성제국 대학 支那어문학과 내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적극적 후원과 보조 하에 중국을 하나의 他者로 인식하여 그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목적은 경성제국 대학의 설립 취지와도 相通하는 ‘대륙연구’에 있었다. 1920년대를 거쳐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중국 내에서도 구습을 타파한 현실주의에 입각한 문학의 재인식 형상을 나타내고 있었던 바, 경성제대 내 학문적 지향 역시 ‘古典’ 중심에서 ‘現代’중심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그러한 對중국 연구의 중심적 주체자로서 경성제국 대학 ‘支那어문학과’ 일본인 교수 가라시마 다케시(辛島 驍)에 주목하여, 그의 人的・學術的 관계망과 함께 중국 현대문학 연구자로서 在朝일본인이 가진 정치성이 당시 ‘現代支那文學’ 연구에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에 있다. 이를 위해 1920년대 후반부터 1940년 초반까지 경성제대 재임기간 동안인 약 11년에 걸쳐 게재한『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내 그의 언설들을 통해 그가 가진 중국 현대문학론에 대해 탐색해 보았다.『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는 1898년『조선(朝鮮)』이라는 제호로 간행을 시작한 이래 1941년 종간하기까지 43년간 총 414호(『조선(朝鮮)』 46호,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398호)가 간행된 잡지로 식민지기 在朝일본인 사회가 ‘鮮滿 개척과 대륙진출의 급선봉’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며 일본 제국의 대륙 연구를 뒷받침했던 대표적 언론 매체이다. 이곳에 가라시마는 총 34편의 평론을 싣게 되는데, 그 내용과 주제들은 경성제대의 支那어문학과 수업 자료를 비롯하여 京城방송국 방송원고 및 대중 강연의 주제 등 다양한 시・공간에서 유기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가라시마의 현대 지나 문학 연구의 특징으로 첫째 중국 문학 연구에 대한 학문적 시각변화와 방대한 기초자료의 축적, 둘째 연구 대상과의 동시대성, 셋째 ‘고전 문학’에서 ‘現代 문학’으로의 시기와 방법론적 전환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연구적 시각과 특징 기저에는 투철한 ‘帝國性’이라는 한계가 존재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논문은 帝國 일본이 植民地 조선에 세운 官學의 교수이자 官僚로서 활동해 온 가라시마의 중국현대문학론을 살펴봄과 동시에 在朝 일본인의 중국인식과 조선인식 등을 잡지『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에 게재한 그의 글을 통해 살펴보는데 목적하였으며,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이 참조항으로 삼던 중국의 당대 문학과 아시아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제국에 의해 選取된 중국 문학의 수용과 연구 양상에 대한 고찰 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또한 식민지에 처한 조선과 반식민지의 중국 간의 지식문화 수용과 교류, 식민지에서 제국 일본인이 연구하는 중국 문학 등의 지리적・사회적 복합성과 이질성을 추적함으로써 동아시아 지식문화 연결과 근대 문화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새로운 요소를 발굴하는 데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문화냉전기구의 형성과 변동 연구, 1954~1968 : 한국 지식인의 문화적 자율성 모색을 중심으로

        최진석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9 국내박사

        RANK : 248639

        이 연구의 목적은 전후 한국 사회의 문화냉전 관련 제도들과 한국 지식인의 관계를 검토함으로써 이 시기 한국 지식인들의 문화적 자율성 모색 시도들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1954년부터 1968년까지 존속했던 학술·예술·문화 제도들 및 한·미 문화냉전기구들의 문화 사업과 그에 관계된 한국 지식인들의 문화 활동을 검토함으로써 냉전기 한국 지식인의 문화적 실천 양상을 확인하고자 했다. 전후(戰後) 한국사회의 문화적 지형은 기존 학술·예술·문화 제도의 재건 및 확충과 새로운 제도 및 법제의 설립을 통해 전전(戰前)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변모했다. 대학·신문·잡지·학회·예술인단체 등 전통적인 지식인제도는 압도적인 양적 팽창을 거두었으며, 한국 정부 역시 문교·공보 관계부처의 산하기관 및 관련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지식인의 영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으며 각종 미국 문화냉전기구들도 1954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후 한국 지식인들은 지식인의 영역과 관련되어 있는 각종 관·민 제도 및 미국 문화냉전기구들 사이를 오가며 각 제도의 사업에 참여하거나 관계했다. 다양한 제도 및 기구들을 통한 한국 지식인들의 문화적 실천은 한편으로는 한국 지식인들이 한국 사회와의 관계를 설정·조율하는 과정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양측이 한국 사회에 적용하려 했던 서로 상이한 냉전의 규범들을 지식인들이 스스로 실천·전유·저항함으로써 한국 고유의 냉전문화를 창출해내던 과정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1968년 이후 한국 사회가 미국적인 냉전 자유민주주의 문화로부터도 이탈하여 보다 폐쇄적인 반공병영국가로 변질되기 시작하기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연구는 한국 민간 학술·예술·문화제도, 한국 정부기관, 미국 문화냉전기구 등 1950,60년대의 각종 제도 및 기구와 한국 지식인의 관계 양상을 ‘문화냉전’의 구도 속에서 고찰한다. 여기서의 문화냉전이란 상대방이 자국 특유의 문화적·사상적 가치와 규범들을 이해하고 납득하여 내면화하게 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문화 활동을 의미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공식·비공식적인 정부기구들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이 연구들은 문화냉전 수행을 위해 설립된 각종 기구들을 문화냉전기구라 통칭했다. 이 연구에서는 한·미 문화냉전기구들의 활동이 문과대학·잡지·학회·예술인 단체 등 민간 부문에서의 지식인 제도 또는 개개별 지식인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폈다. 이러한 작업은 냉전기 한국 지식인들이 각종 제도·기구를 통해 동시대 사회·국가·세계체제 등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파악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또한 이 연구는 각종 문화제도·기구를 통해 국가나 냉전 체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지식인들이 그 제도·기구 내 활동을 통해 정치권력의 억압·영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지식인만의 자율적인 지적 영역을 보존하고자 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특히 이 연구의 후반부에서는 언론인·예술가·학자 등 각 분야의 한국 지식인들로 구성되었던 문화자유회의 한국위원회(1961.4~1968.3)의 활동과 동시대 한국 지식장 내 위치에 대해 점검함으로써 1960년대 한국 지식인들의 문화적 자율성 모색에 대해 검토했다.

      • (A) Study of the Mongolian policy toward its migrants in South Korea

        Dugarjav, Batjargal 세종대학교 대학원 2012 국내석사

        RANK : 248623

        논문요약 대한민국에서 거주하여 살고있는 이민자들에 대한 몽골정부의전략 Batjargal Dugarjav 아시아연구학과 세종대학교 대학원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 선진국, 또는 발전해 나가는 후진국들의 정부가 중점을 둘만한 발전 전략중의 하나가 외국에 나가서 일하게끔 보내는 것입니다. 몽골인들은 1990년대 부터 대한민국에 이민오기 시작하였고 현재 총 몽골 인구의 2%가 대한민국에서 생활을하고 있습니다. 지난 21년간 2십만명의 몽골인들이 대한민국에 입국 하였었고, 현재는 삼만육천칠십사명이 대한민국 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온바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살고있는 몽골인들은 노동자, 대학생, 국제결혼 한 사람으로 크게 3 가지로 나뉘고 있습니다. 현재 노동자들 중에 대부분이 불법으로 체류를 하고 있습니다. 2000년에 개인중개 회사들이 소수의 사람들을 계약직으로 외국에 일하러 보냈던 시기이고, 2001년에는 외국에 계약직으로 보낼 수 있는 법을 정부에서 만들어 많은 중개 회사들에게 인재를 외국에서 데려오거나, 보낼 수 있는 권력을 주었던 시기이고, 2004년에는 두 나라의 정부가 법적으로 계약직 노동법을 만든 시기입니다. 저는 이번 연구를 통해서 대한민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몽골 노동자들에 대하여 몽골정부가 현재하고 있는 생각을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연구의 중심적인 목적은 대한민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몽골인들에 대하여 몽골정부가 세우고 있는 전략과 그의, 거기다가 저의 생각까지 더해서 최대한 선명하게 쓰려고 노력 하였습니다. ABSTRACT It is witnessed in the capitalist development process that the labor export policy has remained one of the major strategies of economic development, in both developed and developing countries. Mongolian started to migrate to Korea in the 1990s and now more than 2% of the Mongolian population travels to South Korea. Over these 21 years, more than 200,000 Mongolian people have visited South Korea and 30,674 people have lived in South Korea. The majority of registered Mongolians in South Korea include, workers students, and spouses. There were many young people in Mongolia willing to work in South Korea and many of these workers first tried working without official contracts. The official labor force migration is divided into three periods: 2000, when first time companies started to send small amounts of labor forces to Korea under official contract, 2001 a new law called the “law of sending labor force abroad and receiving labor force and specialist from abroad” came into effect and gave the Mongolian government permission to send workers to many companies, 2004 an official agreement between the two countries governments were made regarding sending labor forces through one official channel. This paper mainly examines the Mongolian workers situation in South Korea, the Mongolian government’s policy toward its migrants abroad, and the changes made to this policy. The purpose of this writing is examine policy changes for Mongolians living and working abroad and why these changes occur.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