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의 역리적(易理的) 서면인식(書麵忍識)에 대한 일(一) 고찰(考察)

        전상모 한국유교학회 2012 유교사상문화연구 Vol.50 No.-

        雅亭 李德懋는 易理의 관점에서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규명하고 이와 더불어 지식인으로서의 시대적 임무를 바르게 실현하려고 노력한 ‘행역의 주체’였다. 아정은 인간의 순수함을 되찾고 상고의 이상사회를 전범으로 삼아, 자연의 운행원리와 조화를 이룬 삶의 태도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역리적 우환의식을 견지하고, 서체 연변과 서예 조형의 진전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글자의 자형이 변하게 원인을 풍속의 변화에서 찾았고, 국가의 흥망성쇠도 자체의 변혁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이는 예술로서의 서예가 아니라 문자의 공능적 기능을 더욱더 중시하는 사유라 하겠다. 아정의 역미학적 서예 실천 양상은 대체로 상고적 취향, 陽剛의 중시 등에 있었다. 그는 선험적 가치인 ‘古를 일상생활을 통해 경험적 가치로 전환시키면서 자신의 개별적 행위를 인간 본연의 소박하고 진실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성격으로 귀결시켰다. 또 아름다움은 무절제한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규율에 적합한 절제가 있는 표현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는 역리적 도덕인격의 고도의 完善과 完美를 뜻하며, 동시에 우주생명의 운동ㆍ변화의 정일성과 순수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컨대 아정은 인간 본연의 보편적인 가치를 자신의 학문관과 예술관을 일관하는 내용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특성이 부각된다. 다시 말해 그는 내향적인 德性의 수련과 외향적인 窮理의 체현을 함께 수행하였다고 하겠다. 雅亭李德懋是站在易理的觀点査明事物的本質, 与此同時作爲知識人, 正直實現世代任務而努力的‘行易的主体’。 雅亭要找回人類的純眞, 以理想社會爲典范, 維持与自然的運行原理協調的生活態度。堅持易理的憂患意識. 對書体演變和書藝造型的進展具有否定的認識。 在風俗的變化中找到文字的字形變化原因, 國家的興衰也在變革的角度上觀察。由于這不是藝術上的書藝, 而是更重視文字的功能的理由。雅亭的易美學書藝實踐樣態大体上在于尙古情趣, 陽剛的重視等。他通過日常生活把先驗价値 ‘古’轉換爲經驗价値, 把自己的个別行爲歸結于爲了体現人類本來的朴素而眞實的价値的性格。而且忍爲美麗不是在于无節制的表現而是一种合規律的、重視 有節制的表現。這是表示易理的道德人格的高度完善和完美, 同時是指宇宙生命 的運動. 變化的全一性和純粹性. 總之, 雅亭的特点在于把人類本來的普遍价値用自己的學問觀和藝術觀一貫的內容追求的問題上。換句話說, 可以說是他幷行修行內向德性的修煉和外向的窮理的体現。

      • KCI등재

        湛軒 洪大容의 書畵認識에 관한 연구–淸朝 문사들과의 지식소통을 중심으로–

        전상모 한국양명학회 2013 陽明學 Vol.0 No.35

        조선후기를 통틀어 유학 본연의 전인적 학문, 실천적 학문에 가장 근접한 인물을 들자면 단연 湛軒 洪大容(1731-1783)이다. 그는 연행에서 嚴誠․潘庭均․陸飛 등 문장 예술의 인사와 만나 “天人性命의 근원” “朱陸道術의 구분” “進退消長의 기미” “出處榮辱의 분수” 같은 것을 토론하다 마침내는 結爲兄弟하였다. 담헌이 항주 문사들과 주고받은 필담과 편지는 우정과 문화교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가치가 있다. 본고는 필담과 편지를 통한 지식소통과 서화에 대한 미학적 인식을 대비하여 살펴본 것이다. 담헌은 性命은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몸소 실천하는 것이 바로 性理라고 여겼다. 그는 시문․서화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데 시문이나 서화가 하찮은 것이 아니라 시문이나 서화보다는 古學이나 實學이 實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담헌의 인식론은 주자를 계승하여 格物窮理를 실천하였다. 이러한 인식론을 견지하고 천주당의 벽화를 체험하면서 남당의 벽화는 서양의 기하학적 투시법의 원리로 이해하였고, 북당의 벽화를 보고서는 ‘畫妖’라고 하였다. 이는 동시대 인물들의 감흥과 놀라움 일변도의 평가에서 벗어나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체험이라 하겠다. 담헌의 出處觀은 禮에 합당한가의 여부에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繪事는 無道한 시대를 만나 군자가 은거를 실천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가치를 평가하면서도 서화로 세상에 드러남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항주 문사들과 담헌과의 友道는 예술사와 사상사로 그 지평이 넓어졌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담헌이 생각하는 벗은 서로 責善하고 輔仁하는 것으로서 君臣․父子와 함께 五倫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뜻에서 담헌은 시문과 서화보다는 문장과 덕행에 힘쓸 것을 권면하였다. 그러나 담헌은 항주 선비들의 척독을 첩으로 만들어서 그 수택을 만져보면 마치 본인을 보는 듯하고, 비록 천만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침저녁으로 만난다는 생각에 즐거워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다고 하면서 정신적인 미적 향수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였다. 담헌의 연행 이후 그의 사우였던 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이 잇따라 연행에 나섰고 조선․청조 문인들의 지식소통과 문화교류의 폭을 더욱더 확장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서화가들은 북학파 문사들의 지식소통과 문화교류를 교훈삼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고 지역과 나라를 초월하여 지식과 문화교류의 폭을 더욱더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

      • KCI등재

        한국 근대서예 연구(3) − 1920년대 전반기의 서예(1919-1924) −

        전상모 동양철학연구회 2023 東洋哲學硏究 Vol.116 No.-

        본 연구는 3⋅1독립운동 이후부터 일제가 ‘문화정치’ 수단의 하나로 개최한 ‘조선미술전람회’가 확고히 자리잡은 1924년까지 한국 근대서예의 실상을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진단했다. 시대 사상적 배경은 ‘문화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문화운동’은 사실상 ‘자본주의 문명의 수립’을 지향했다. 그런데 ‘문화운동’이 진행될수록 이 운동이 현실 속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정신개조’ ‘민족개조’였다. 이는 구한 말부터 일본인들이 주장해온 ‘조선민족열등론’과 조선 신지식인들이 거론하던 ‘폐습개혁’이 발전한 것이다. 이처럼 문화운동은 ‘선실력양성 후독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실력양성’ 즉, ‘자본주의 문명의 수립’에 매몰되었다. 이론활동은 서화협회회보 창간사를 분석해 보았다. 김명식은 ‘實體華用’의 입장에서 ‘東西文明對等論’을 주장했고, 김돈희는 ‘舊本新參’의 이념에 기반했다. 창간사를 쓴 사람들 대부분이 친일변절자들이었다. 그런데 민족문화를 계승하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민족주의자일 것이고, 총독부의 사업에 암묵적으로 협력했다는 점에서는 친일세력일 것이다. 이들의 정체성과 서화관을 이해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서예교육 기관은 협회⋅연구회 부설, 개인 교습소가 있다. 협회나 연구회의 사업목적 실현을 위한 서화교육 기관은 오래가지 못하고 ‘선전’에 입상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내부적인 갈등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개인이 설립한 교습소는 개설자의 영리 목적이 대부분이었는데 상당히 근대적인 부분도 있었고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가 큰 단체도 있었다. 설립 주체가 누구였든 친일귀족을 주변에 두었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예술교육 활동마저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20년대 초반 전람회시대가 도래했다. 우려와 격려 속에 출발한 ‘서화협회전’은 당시 언론들로부터 ‘민족성’을 담아낼 것을 주문받기도 했다. 그러나 횟수를 거듭할수록 언론들도 ‘협전’에서 점차 멀어져갔고 회원들도 돈과 명예를 쫓아 ‘선전’에 경도되기 시작했다. 일제가 개최한 ‘선전’은 식민지 문화정책의 좋은 수단이 되었고 전국의 저명한 서예가들이 응모했으며 점점 참여 인원도 늘어갔다. 그리하여 조선서단의 중심이 점차 총독부의 관할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본 연구를 통해 그간 단편적으로만 이해해 왔던 소위 ‘문화정책’ 시행기의 한국 근대서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나아가 침체된 한국 전통서예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In this study, I examined the reality of Korean modern calligraphy from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until 1924, when the Joseon Art Exhibition held by Japan as a means of cultural politics was firmly settled, and diagnosed its problems.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ideological background of the times, the cultural movement aimed at establishing capitalist civilization, and as it progressed, the meaning of this movement was mental reform and national reforms. It is a development of the Korean national inferiority theory that the Japanese have been advocating since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and the practice reform that Joseon's new intellectuals have been talking about. In this way, the cultural movement advocated independence after nurturing basic skills, but in reality, it boiled down to cultivating skills, that is, establishing capitalist civilization. Regarding theoretical activities, I analyzed the inaugural article of the Bulletin of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 Kim Myeong-sik argued for the theory that Eastern and Western civilizations are equal from the standpoint of taking advantage of China based on reality, and Kim Don-hee argued for the ideology of considering the new based on the old. Most of the people who wrote the inaugural article were pro-Japanese traitors. However, they were probably nationalists in that they tried to inherit national culture and might be pro-Japanese due to their implicit cooperation with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s project. It may be the point where we can understand their identity and view of calligraphy and painting. Calligraphy education institutions were academies affiliated with associations, research societies, or private institutes. Calligraphy and painting education institutions with business goals did not last long. They degenerated into a means to win the Joseon Art Exhibition or were closed down due to economic difficulties or internal conflicts. Most of the private institutes were established for profit, but some were modern, and some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local culture. Regardless of who founded it, pro-Japanese aristocrats were involved, and I wonder if they should have been involved in fine arts education activities as well. The exhibition era arrived in the early 1920s. The Exhibition of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which started with concern and encouragement, also published a bulletin, albeit a brief one. At the time, the media requested that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capture ethnicity as an ethnic group. However, as years went by, the media gradually moved away from the Exhibition of the Calligraphy and Painting Association, and the members began to focus on the Joseon Art Exhibition that brought them money and fame. The Joseon Art Exhibition held by the Japanese Empire became a great tool for colonial cultural policy. Renowned calligraphers from all over the country applied, and the number of participants gradually increased. The center of the field of Joseon Calligraphy began to fall into the hands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 hope this study will help understand Korean modern calligraphy during the so-called cultural policy implementation period. Furthermore, I hope that it will help find a way forward for Korean traditional calligraphy, which is gradually losing its luster.

      • KCI등재후보

        李漵(玉洞) 學藝精神의 家學的 淵源

        전상모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문화와예술연구 2013 문화와예술연구 Vol.2 No.-

        玉洞 李漵(1662-1723)는 평생 학문과 예술로 살다간 近畿南人 실학자였다. 그의 가문은 李繼孫에 이르러 문학으로 起家하였고, 증조 李尙毅 대를 거치면서 문벌가문으로 성장하였고, 영조 이후로는 이서 형제의 학인들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을 형성․발전시킨 유서 깊은 가문 이다. 먼저 이서 학문정신의 가학적 연원을 살펴보면, 증조 李尙毅는 中 正과 自得을, 조부 李志安은 『大學』과『中庸』을, 부친 李夏鎭은 敬의 수양태도, 博學의 추구, 聖經의 객관적 수용 등을 강조하였는데, 中正의 정신, 自得의 정신, 誠敬의 수양, 독서를 통한 다양한 분야의 관심은 이서 학예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이다. 이서가 가르침을 받은 중형 李潛은 自得을 중시하였으나 『弘道遺稿』에 나타나 있는 이서의 학문은 철저한 성리학자의 면모이다. 이서 예술정신의 가학적 연원을 살펴보면, 증조는 道本文末적 사유를 견지하였으나 서예로 이 름이 있었고, 從祖 李志定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초서의 대가로 그 의 시는 仙趣가 있다. 그의 서예는 從姪 李夏鎭과 從孫 李漵형제에게 가전되었다. 부친은 唐宋古文과 中唐의 詩를 지향하고, 서예는 鍾繇 와 王羲之를 추구하였다. 이서의 가학연원과 관련하여 선조들의 使行 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부친이 중국에서 가져온 다량의 장서 와 서화는 이서의 서예성취와 서학형성에 큰 바탕이 되었다. 요컨대 이서가문은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六藝를 익히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 들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대대로 수양과 실천을 중시한 생활태도, 독 서를 통한 박학적 학문태도, 詩書를 위주로 하는 예술관은 이들의 공 통된 경향이다. 이서는 이전까지 문학으로 성가하였던 집안을 경학으로 전환하고, 다양한 관심 분야와의 유기적 결합이나 새롭게 접하는 분야를 發明함 에 있어 절대적 가치기준으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학예정신은 분명 선대의 가르침인 자득정신과 성경사상의 실천적 측면이 어느 정도 작 용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자신이 새롭게 발명함으로써 가 학의 새로운 전통을 열었다고 하겠다. 李漵(号玉洞,1662-1723)是一生从事学问和艺术的近几南人派 实学家。他的家族从李继孙起开始为学,至其曾祖父李尚毅一代,已成 为豪门贵族。朝鲜王朝的英祖之后,以李漵兄弟等“学人”为中心形成并 发展成为底蕴十分深厚的家族。 首先,了解一下李漵的学问精神中家学的渊源,就会发现其曾祖父李 尚毅奉行着“中正”与“中得”,其祖父李志安则信奉《大学》与《中 庸》,其父李夏镇强调着敬的修养态度、博学的追求和圣经的客观接受 等方面,而诸如中正精神、自得精神、诚敬的修养、读书等各个方面, 形成了李漵学艺精神的基础。虽然曾经教授李漵学问的兄长李潜重视着 “自得”,但是在《弘道遗稿》中,李漵完全展现出了一个性理学者的风 范。对李漵艺术精神的家学渊源进行探究就会发现,其曾祖父坚持着一 种道本文末式思维却闻名于书法;其从祖父李志定作为朝鲜中期草书的 大家,其诗却有着一种“仙趣”,他的书法则传于其从侄李夏镇和从孙李 漵兄弟。在李漵的家学渊源中,其先祖的出使具有着很深的意义。尤其 是其父从中国带来的大量藏书及藏画,对于李漵书法的成就和形成奠定 了很坚固的基础。总之,李漵的家族成员从小就学习家学六艺,并以此 为基础形成了各自的艺术世界。他们重视修养和实践的生活态度、读书 以达博学的为学态度、以诗为主的艺术观世代相传,是他们的共性。 李漵将其家族以前以文学为主的家道改为经学,并将与其它重要方面 的有机结合或是新领域的发明作为绝对的价值标准。他的这种学艺精神 可以说是受到了其先祖自得精神和诚敬思想中实践部分的影响。然而, 他自己新创的领域则开辟了其家学新的道路。

      • KCI등재

        우복 정경세의 도학적 문예인식

        전상모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16 한국학논집 Vol.0 No.62

        우복은 주자성리학과 퇴계학을 계승한 정통 성리학자이다. 그는 리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비판하고 리와 기의 차이점을 구분할 것을 강조하면서 리본기말적理本氣末的 사유를 견지하였다. 격치론格致論의 격물格物과 물격物格에 대한 이해는 퇴계의 리도설理到說을 계승하여 격물과 물격을 각각 손님을 청하는 것과 손님이 오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사칠론四七論에 있어서는 사단四端을 칠정七情의 일부로 보지 않고, 양자를 구분해서 보려는 입장에 선다. 공부론에 있어서는 존양存養은 정시靜時의 공부만이 아니라 정시와 동시動時를 겸한 통체공부라고 한다. 그리고 경서에 대한 세밀한 탐구과정을 거쳐 궁극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도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문예론을 전개하였다. 대개의 도학자들이 그러하듯 우복 역시 사화詞華와 사장詞章은 폄시하고 질실質實한 학문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문文을 논하는 일은 대절大節을 실천했는가의 여부를 살핀 연후에야 가능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도학자로서 ‘시詩는 작은 기예技藝인데 그것에 나의 심력心力을 헛되이 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 말은 시작時作을 완물玩物로 보고 자신의 본연의 공부를 해치지 않겠다는 것이지, 시작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예禮라고 여겼으며, 여기서의 예는 곧 천리天理의 반영인 것이다. 그의 사자寫字에 대한 인식은 ‘마음을 오로지 하는 것(專心)’으로, 이러한 인식에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의 시각이 담겨 있다. 더 나아가 궁리진성窮理盡性하고 심성도야心性陶冶를 통해 자기를 완성한다는 일종의 성리학적 심성론心性論의 측면에서 서예를 보는 것이다. 우복은 ‘예禮’를 ‘문文’과 ‘실實(質)’의 양 요소의 조화로 보았다. 마음의 덕성과 몸의 정제가 서로 상보相補함으로써 완전한 인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자가 소식이 그린〈죽석도竹石圖〉에 주자朱子가 제한 발문을 전언傳言하면서 대나무의 외형적 문文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대나무에 대해 주자가 언급한 군자적 이미지만을 말하였다. 대나무 그림은 ‘문질빈빈文質彬彬’의 함의를 이해하는 데 좋은 본보기이므로, 그가 대나무 그림을 중시한 것은 주자와 마찬가지로 소식의 죽군竹君과 석우石友와 같은 지조와 자태를 본받고자 한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우복은 자신의 도학적 사유를 문예론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성인들의 정신경계와 도학의 이상세계를 담아내는 것이 참다운 문예라고 여겼다. Ubok was an authentic Neo-confucianist who succeeded to Chu Hsi’s Neo-confucianism and Toegye study. He criticized the theory that Principle and Material force are the same and insisted on the thought of Libenqimo(理本氣末, Principle as an essence and Material force as an end) by emphasizing to distinguish the difference between Principle and Material force. His comprehension of Gewu(格物, investigation of things) and Wuge(物格, things’ reaching) in the theory of extension of knowledge by investigation of things has been succeeded Toegye’s theory that Principle reaches. And he compared them to inviting a guest and a guest’s coming. In terms of the theory of four-seven, he did not regard four clues as a part of seven emotions but looked at two things separately. He also considered that preserving mind and cultivating nature was not only a study in a static time but also a study of the whole body which combined studies in a static time and a dynamic time. Moreover, he thought that he could reach an ultimate stage through the process of a detailed study on Confucian classics. He has developed his literary theory based on this kind of Neo-confucian thought. Ubok, as most of Neo-confucianist did, disparaged poetry and prose and emphasized an essential and sincere study. Also, he believed that it was possible to discuss about literature only after seeing whether or not to practice a great fidelity. He, however, as a Neo-confucianist, said that it was not necessary to make an effort to write poetry because poetry was a trivial art. This word showed that he regarded writing poetry as amusements and did not want it to disturb his true study, but it did not mean that he denied writing poetry itself and was not able to write poetry. He considered all the people’s actions as a Propriety, which reflected the Principle of Heaven. His theory of writing characters was ‘Zhuanxin(專心, to fix his mind on it)’. The comprehension of ‘Zhuanxin(專心)’ contained the perspective that calligraphy reflected the person’s character. Furthermore, it was to see calligraphy from the perspective of Neo-confucian theory of Mind and Nature that completed himself through investigating Principle, fulfilling Nature and cultivating Mind and Nature. Ubok considered Propriety as the harmony of Form and Essence. It means that a person could attain a complete personality as virtue of mind and refinement of body complement each other. When he conveyed Chu Hsi’s postface of Sushi’s painting of bamboos and stones, he mentioned not an external form of bamboos but an image of man of virtue of bamboos that Chu Hsi told. A painting of bamboos is a good example to comprehend the implication of ‘Wenzhibinbin(文質彬彬, the harmony of Form and Essence)’. The reason why he emphasized a painting of bamboos, as Chu Hsi did, was to emulate the fidelity of bamboos and the figure of stones in Sushi’s painting. In short, Ubok considered that a genuine literary art should reflect the spiritual boundary of sages and the ideal world of Neo-confucianism by applying his Neo-confucian thought on his literary theory.

      • KCI등재

        雅亭 李德懋의 易理的 書藝認識에 대한 一 考察

        전상모 한국유교학회 2012 유교사상문화연구 Vol. No.

        雅亭 李德懋는 易理의 관점에서 인간과 사물의 본질을 규명하고 이와 더불어 지식인으로서의 시대적 임무를 바르게 실현하려고 노력한 ‘행역의 주체’였다. 아정은 인간의 순수함을 되찾고 상고의 이상사회를 전범으로 삼아, 자연의 운행원리와 조화를 이룬 삶의 태도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역리적 우환의식을 견지하고, 서체 연변과 서예 조형의 진전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글자의 자형이 변하게 원인을 풍속의 변화에서 찾았고, 국가의 흥망성쇠도 자체의 변혁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이는 예술로서의 서예가 아니라 문자의 공능적 기능을 더욱더 중시하는 사유라 하겠다. 아정의 역미학적 서예 실천 양상은 대체로 상고적 취향, 陽剛의 중시 등에 있었다. 그는 선험적 가치인 ‘古’를 일상생활을 통해 경험적 가치로 전환시키면서 자신의 개별적 행위를 인간 본연의 소박하고 진실한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성격으로 귀결시켰다. 또 아름다움은 무절제한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규율에 적합한 절제가 있는 표현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는 역리적 도덕인격의 고도의 完善과 完美를 뜻하며, 동시에 우주생명의 운동․변화의 정일성과 순수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컨대 아정은 인간 본연의 보편적인 가치를 자신의 학문관과 예술관을 일관하는 내용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특성이 부각된다. 다시 말해 그는 내향적인 德性의 수련과 외향적인 窮理의 체현을 함께 수행하였다고 하겠다.

      • KCI등재

        한국 근대서예 연구(2) - 1910년대의 서예(1910-1918) -

        전상모 한국양명학회 2022 陽明學 Vol.- No.67

        본고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된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 동화주의 문화정책에 맞서 서화가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에 대해 분석한 논문이다. 일제가 행한 일련의 행위는 동화주의 관점에서 식민지 문화 재편이라는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이 시기 동화주의에 대응한 민족문화 보존론과 그 활동은 직접적인 독립론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학활동의 양상은 서화의 사회적 효용이나 동도서기적 서화문명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주장이라도 친일매국세력과 결탁했다면 달리 해석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모두 효용론이나 문화론 따위를 말할 때 오세창의 민족문화론은 설파했다. 국망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다시 새길 일이다. 당시 서예가들의 동태를 오세창을 중심으로 한 민족인사들의 활동과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일인사들의 활동으로 나누어 살펴본 결과 민족인사들 사이에도 粹雜이 섞여 있었으며 친일인사들 활동에도 민족인사들과의 인연이 작용하고 있었다. 교육기관은 점차 근대화가 진행 중이었다. 초기의 도사학교는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변모해 가는 과도기적 단계에 불과했으며 정규학교의 수업은 허울에 불과했다. 사설 교육기관의 효시인 서화미술회는 총독부와 이왕가 그리고 이완용의 계산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후 완전한 사설 교육기관들은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서 존재했을 뿐 민족문화 창달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시기 각종 전람회와 휘호회는 일제의 식민통치 수단으로 이용되었는데 총독부와 이왕가가 후원했던 ‘서화미술회’가 동원되었다. 창덕궁 어전휘호회, 조선물산공진회의 참가가 대표적이다. <시문서화의과대회>는 형식은 민족문화 보존이었지만 경비는 총독부가 후원함으로써 민족정신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전람회를 통해 서화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고 판매되고 또 그것에 열렬히 호응하는 대중의 존재는 분명히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 시기 기억해야 할 일은 황실이나 총독부의 도움 없이 순수 민족 서화단체인 서화협회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1910년대 한국 근대서예의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동시에 20세기 한국 서예의 근간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 KCI등재

        한국철학 : 동계조구명(東谿趙龜命)의 서화비평(書畵批評)에 관한 연구 -장자적 사유를 중심으로-

        전상모 동양철학연구회 2011 東洋哲學硏究 Vol.68 No.-

        東谿趙龜命(1693-1737)은 18세기 전반기의 대표적인 문사이자 문예이론가였다. 그는 文藝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道文分理論를 주장하 였으며, 서화비평에 대해서도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주학 중심의 폐쇄적인 학술 풍토에서 벗어나 노장 및 불학 등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러한 주체 자각적 사유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학사상을 구축하였으며, 그의 문예작품과 문예이론에는 장자적 사유가 많다. 동계는 ``倣古``를 하든지, ``創新``을 하든지, 그 선택 준거는 ``適意``에 있다고 한다. 그가 제시한 ``適意論``은 행위의 주체를 중시한 사고라 할 수 있다. 특히 동계의 문화의식은 객관세계의 사물현상에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상대적 세계관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차별성을 밝히는 문제로 전이되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로 전이된 상대적 세계관은 중국에 대한 사대적 세계관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이 된다. 그는 중국보다 늦게 건국되었기 때문에 더 늦게 쇠한다고 하는 소옹의 논리를 내세워, 우리나라가 중국보다 더 낫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모화적 태도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였다. 과거나 현재가 후진상태라고 언제까지 ``小中華``를 부르짖으며 자족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가 조선의 문풍을 일소하기 제기한 ``適意``도 모화사상으로부터의 탈피하고자 하는데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는 상대적 세계관이 있다. 요컨대 동계는 유·불·도 합일이라는 학술 사상의 개방적·진보적·역동적 자세의 연장선상에서 장자의 상대적 사유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학술 사상적 기반위에서 ``倣古而適意. 創新而適意``라는 適意論的創新精神을 고취하고, 개성의 해방을 강조하는 독창적인 미학사상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미학사상이 민족적 서화비평으로 표출된 것이다.

      • KCI등재

        한국 근대 서예 연구(1) — 19세기말⋅20세기초의 서예 —

        전상모 동양철학연구회 2022 東洋哲學硏究 Vol.112 No.-

        This study is an attempt to dispel misunderstandings by analyzing the modern Korean calligraphy of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which had been perceived as retrogressive and pessimistic. The bureaucrats and intellectuals who took the initiative through the Gabo Reform of 1894 promoted cultural enlightenment. Whether they insisted on independence through strenuous efforts(自强獨立) or taking the old as the basis ad referencing the new(舊本新參)', the culmination of the cultural enlightenment they pursued has in common: establishing a civilized modern state. The ideological tendencies that bureaucrats and intellectuals held in social and historical conditions directly affect the aesthetic and critical activities of those around them. The most notable people during this period are Oh Sechang and Ahn Jungsik. The editorial cartoon, composed of Oh Sechang's writings and Lee Doyeong's drawings, reflected the worldview of those who wanted independence through strenuous efforts. Ahn Jungsik, Oh Sechang, and Kim Gyujin, who dominated the central calligraphy group, were representatives of the field of calligraphy and painting at that time. In terms of the reform of calligraphy, they sometimes cooperated, but they mostly took different stances and tended to be passive. By the way, there were great calligraphers in each region. Some of them went down to the province after being recognized on the central stage, and others devoted themselves to calligraphy and painting by keeping their distance from the central calligraphy group. After the Gabo Reform of 1894, Korea laid the foundation for modern school education. Although there were laws on the subject of writing practice, there were no textbooks and no historical material for textbooks. However, writing practice was a major subject because it was included in the elementary school end-term exam subjects. Since the colonialist education policy implemented by the Japanese Residency-General of Korea was based on civilization education and realistic education, the writing practice education in the Department of the Korean Language is literally about learning and writing characters, not calligraphy education. Until the late period of Joseon, there were no national or public primary education institutions in Korea, only Seodang by the private sector. It is significant that Calligraphy Education Center, a private art education institution operated from July 1907 to January 1908, attempted comprehensive art education, although it was a short period. In this paper, I have looked into articles and discourses published in newspapers and magazines as well as works about Korean modern calligraphy from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o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I hope that this paper will clear up any misunderstandings in the past. Furthermore, I believe it will help find the way forward for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calligraphy, which is gradually falling into the shade. 본 연구는 그동안 퇴행적이고 비관적으로 인식해 왔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한국 근대서예를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그 오해를 불식하고자 시도한 논문이다. 갑오개혁을 통해 개혁의 주도권을 장악한 관료⋅지식인들은 ‘文明開化’를 추진했다. ‘自强獨立’을 주장했든, ‘舊本新參’을 주장했든 그들이 추진한 ‘문명개화’의 정점에는 ‘문명적 근대 국가 수립’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역사적 조건에서 관료⋅지식인들이 견지했던 사상적 경향과 노선은 주변 사람들의 미적 활동이나 비평 활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오세창과 안중식이다. 오세창의 글과 이도영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시사만평은 자강독립론자들의 세계관을 비추는 것이었다. 이 시기 중앙서단에 군림했던 안중식과 오세창⋅김규진 등은 당시 서화계를 대표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개혁의 노선을 두고 서로 힘을 합치기도 하고 길을 달리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비평으로, 때로는 교육을 통해서 나약한 서화가의 길을 걸었다. 이 무렵 각 지역에서도 거목들이 버티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중앙무대에서 인정을 받고 향리에 내려간 경우도 있었으며, 아예 중앙서단과는 거리를 둔 채 초연히 서화에 매진하고 있는 거목들도 많았다. 갑오개혁 이후 우리나라 근대 학교 교육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습자교과에 대한 법규는 있었으나 전하는 교과서는 없을 뿐 아니라 교과서에 관한 어떠한 사료도 없다. 그러나 소학교 학기말 시험 과목에 습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주요교과임에는 분명하다. 통감부가 실시한 식민지주의 교육정책은 소위 ‘文明’的 교육과 實學主義적 교육에 바탕을 둔 모범교육이었기 때문에 국어과에서의 습자교육은 그야말로 국어과 안에서의 문자를 익히는 측면의 書法 즉 ‘書方’이 이루어졌을 뿐 ‘書藝’적인 측면에서의 書法敎育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는 한말에 이르기까지 국공립 초등교육기관이 없었으며 단지 민간의 힘에 의한 서당이 있었을 뿐이었다. 1907년 7월 개설한 사립 미술교육기관인 교육서화관은 1907년 7월에서 1908년 1월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계몽적 차원에서 종합예술교육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본고에서 19세기말⋅20세기초까지 한국 근대서예를 작품뿐만 아니라 신문이나 잡지에 실려있는 기사나 담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본 논문을 통해 그간의 오해가 풀렸으면 한다. 나아가 점차 빛을 잃어 가고 있는 한국 현대서예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데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