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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한국 문헌의 ‘울릉도 · 우산도’ 기술과 그 계보에 관한 고찰

        유미림(Yoo Mirim) 동북아역사재단 2016 東北亞歷史論叢 Vol.- No.52

        이 글은 한국 문헌(文獻)에 ‘울릉도·우산도’에 관해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그 계보를 고찰한 것이다. 한국의 관찬 문헌에서 ‘우산도’가 처음 보인 것은 『고려사』이며,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 『증보문헌비고』로 이어졌다. 사찬 문헌에서도 관찬 문헌의 내용이 계승된 데다 ‘울릉도 쟁계’ 관련 기술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대부분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래 한 섬이다)은 계술했지만, 『세종실록』의 내용(우산과 울릉은 별개의 섬이다)은 계술하지 않았다. 반면 신경준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인 “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본래 한섬이라고 한다”는 내용을 고증했다. 그 결과 문헌에 보인 삼봉도나 우산도가 울릉도와는 다른 섬이며 일본 호칭 ‘마쓰시마’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신경준과 동시대인, 그리고 후대인들은 신경준의 설을 수용했고, 이로써 18세기에는 우산도와 울릉도가 별개라는 ‘2도’설이 정착했다. 한편, 지도 제작이 증가하면서 문헌상의 우산도와 지도상의 우산도가 일치하지 않는 괴리현상이 빚어졌다. 이러한 불일치는 19세기 말 울릉도에 대한 일본인의 호칭 ‘마쓰시마’가 유입되면서 심화되었다. This article examines how Korean documents described “Ulleungdo-Usando” and the genealogy of those documents. “Usando” is first found in Goryeosa (History of Goryeo),a Korean government publication and subsequently in Sejong sillok jiriji (The Book of Geography in the Annals of King Sejong), Sinjeung Dongguk yeoji seungnam (Revised and Augmented Edition of the Survey of the Geography of Korea), Dongguk munheon bigo (Comprehensive Study of the Written Records on Korea), Mangi yoram (Handbook of State Affairs for the Monarch), and Jeungbo munheon bigo (Revised and Enlarged Edition of the Comprehensive Study of the Written Records on Korea). Also, the content from this book appeared subsequently in individual publications, and there were additional depictions of the Ulleungdo Incident. However, intellectuals in the late Joseon Dynasty succeeded to their predecessors’ view regarding the content in Sinjeung Dongguk yeoji seungnam (Usando and Ulleungdo are originally one island), but did not accept the view of the content in Sejong sillok jiriji , where Usan and Ulleung are two separate islands. However, Sin Gyeong–jun conducted historical research regarding the following content from Sinjeung Dongguk yeoji seungnam, “Someone says that Usan and Ulleung are originally one island.” As a result, he discovered the fact that Sambongdo(Three Peak Island) and Usando, as shown from the documents, are different islands, and are not Ulleungdo, but was matched with the Japanese name “Matsushima.” Sin Gyeong–jun, himself, his contemporaries, and later generations accepted his view, which led to the rootage of the “Usan–Ulleung Two Islands Theory” in the eighteenth century. However, as publication of atlases increased there appeared a gap between the location of Usando in books and on maps. This phenomenon of estrangement became more intensified because “Matsushima,” the Japanese term for Ulleungdo, was used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 KCI등재

        동해의 무루구세무와 부룬세미

        권정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2009 일본학연구 Vol.27 No.-

        There are records about Ulrundo and Dokdo on Korean documents such as 『Koryosa geography』․『Sejong record geography』. From those records we can say, people knew about two islanda in those days. But Japanese claim, Korean did not know about the existense of Dokdo until 1904, because there are different views about Ulrundo and Dokdo on Korean documents. However We can declare that their opinions is not true through the discovery of Japanese ancient document『The report on Takesima』. On this record, Korean knew about the exsistense of two islands Mugurusemu(Ulrundo) and Burunsemi(Dokdo) in The East Sea. These contents correspond with Korean records.

      • KCI등재

        중·근세 조선인의 島嶼 경영과 경계인식 고찰

        손승철(Son, Seung-cheul) 한일관계사학회 2011 한일관계사연구 Vol.39 No.-

        울릉도와 독도 근해는 신라시대부터 우산국으로 기술되면서,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영토로 인식되었고, 1141년부터는 명주도의 관리구역이었다. 『高麗史』에 의하면 東界 울진현의 행정구역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350년대에 왜구의 침입하면서, 울릉도는 동해안 지역을 약탈하기 위한 중간 거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강원도를 비롯한 동해안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탈은 계속되자, 울릉도가 왜구침탈의 중간거점이 되는 것을 방지하는 조처로 "居民刷出"을 했다. 그런데 이러한 "居民刷出"이 일인사학자들에 의해 조선의 해양정책으로 규정되어 "空島政策"이란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대마도에서는 일본인의 울릉도 이주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태종은 일본인의 울릉도거주를 허용하는 것은 越境이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즉 일본인의 이주를 청한 것이나, 越境이어서 안된다고 한 것은 일본이나 조선의 울릉도에 대한 경계인식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울릉도 관리를 위해 "武陵等處按撫使"와 "武陵島巡審敬差官"을 파견하였고, 17세기 말 "안용복사건"을 계기로 搜討制가 제도화되어 1894년까지 지속되었다. 결국 "공도정책"이란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거민쇄출"도 울릉도를 경영하는 하나의 시책이었다. "居民刷出"을 시행하면서 조선에서는 按撫使 - 敬差官 - 搜討官을 파견하여 울릉도에 판한 도서경영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다. 한편 于山國이 于山과 武陵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우산과 무릉이 一島인가, 二島인가 하는 문제이다. 『고려사』나 『세종실록』에는 우산과 무릉이 두 섬으로 기술되었는데, 『신증여지승람』에는 한 섬으로 되어있다. 이 사료는 조선왕조가 동해의 도서에 대해 어떠한 영토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一島說"과 "二島說"의 혼란은 『동국문헌비고』에 의해 완전히 "二島說"로 정리된다. 이는 1696년 안용복 도일사건이후 벌어진 조일간의 "울릉도쟁계"의 결과 나타난 영토인식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于山國은 于山과 武陵이며, 두 섬으로 되어있고, 于山은 독도, 武陵은 울릉도"라는 사실이 모두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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