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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혜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6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학술세미나 자료집 Vol.8 No.1
요즘 이순신을 폄훼하는 풍조의 기본 논리가 되고 있는 ‘원균 명장론’은 두 장수의 육진 시절에 대한 역사의 왜곡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육진 시절의 두 장수의 행적에 대해서는 현재 오해와 왜곡이 만연한 상태여서, 당시 원균은 빠르게 승진하던 명장이었던 반면 이순신은 미관말직으로 전전하던 이름 없는 무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역사의 실체와 전혀 다르다. 실제로는 육진 시절부터 이미 이순신은 원균보다 빠르게 승진하고 있던 무장이었다. 특히 이순신은 국가를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선조 16년(계미년)의 니탕개란 진압전에서 적군의 수뇌부 3인 중 제2인자였던 우을기내를 유인하여 처단함으로써 전쟁 종식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탁월한 무장이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을 앞두고 불온한 일본측의 전쟁 움직임에 대응하여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조 22년 1월에 비변사의 요청에 의해서 조정의 대신과 중신들이 뛰어난 무장감을 추천할 때, 이순신은 현직 병조판서인 정언신과 이조판서 이산해에 의해서 추천되었지만 원균은 아무에게서도 추천받지 못했다. 현재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역사적 근거로 삼는 것은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선조 29년 10월 21일의 어전회의’에서 나온 조인득의 발언으로서 “소신이 일찌기 종성에서 그(원균)를 보았는데, 비록 만군(萬軍)이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하려는 뜻이 있었고 행군이 매우 박실(朴實)하였습니다(雖有萬軍, 有橫突之意, 行軍甚朴實).”라는 말인데, 그것을 근거로 “원균은 만군 앞을 횡돌하던 맹장이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록의 원문에 있는 ‘뜻’을 ‘행동’으로 바꿔치기한 오역에 따른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원균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자가 원균이 육진 시절에 뛰어난 무장이 아니었음을 명확하게 증언한 사료도 있다. 김응남이 원균을 위해서 선조에게 건의한 것이 『선조실록』 선조 29년 5월 7일조에 실려 있는데, “원균은 보장(步將:육군의 장수)이 아니라 수장(水將:수군의 장수)의 재주를 지닌 무장이니 수군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원균 명장론’은 이처럼 부당한 역사 왜곡에 의해 날조된 허구일 따름이다.
송우혜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04 이순신연구논총 Vol.- No.2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한 사람의 무장인 동시에, 우리 민족이 지닌 ‘위기관리능력’의 극대치를 가장 극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준 영웅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찬연했던지, 적이었던 침략자 일본의 무사들과 그 후예들조차 숭앙하는 우상이자 전설이 되었다.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국가적 위기에서 그가 보여준 ‘이순신적’인 힘과 의지와 순발력은 어려울 때마다 우리 민족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운 긍지이며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지 않았다. 우리 역사와 문학에서 이순신이 어떻게 평가되어 왔는가. 시대에 따라 변해간 평가의 주요 흐름을 짚어본다.
송우혜 순천향대학교 2006 이순신연구논총 Vol.- No.6
The recent controversy that 'Won Gyun was a great commander' has rised from the distortion of history about the period of six regions(六鎭) in Hamkyoung-do (咸鏡道) when Yi Sun Sin and Won Gyun were in their military services. Those who allege that Won Gyun was a great commander insist that "During that time, Won Gyun was a famous commander who had been winning speedy promotions, while Yi Sun Sin was merely a petty positioned military officer." But this is not true. Such assertions have no true grounds in history what so ever. Yi Sun Sin was an outstanding military commander who rapidly climbed up the chain of command much faster than Won Gyun. In the 16th year of the King Seon Jo's reign (AD 1583), Yi Sun Sin obtained a brilliant reputation for his bravery during the war that Ni-Tang-Kae's rebellion caused in six regions of Hamkyoung-do. It was in that war that Yi Sun Sin won a great military merit by decapitating Wu-Eul-Ki-Nae, who was one of the highest leaders of the enemy troops. The death of Wu-Eul-Ki-Nae ended that war and the nation freed from the faced severe crucial situation. Hence when King Seon Jo wanted to select some excellent commanders to defend the nation from the attack of the foreign invaders before the outbreak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Yi Sun Sin was recommended by the powerful vassals in parliament while none recommended Won Gyun. Also in USeon Jo Sil LokCaMIOJ, there is a historical document attested clearly by his own ardent supporter that Won Gyun was not an excellent army commander during the period of six regions. In the wartime of Im-jin-woe-ranU&dililiL), Won Gyun was expelled from the navy to the army because he was in serious discord with Yi Sun Sin. Then Kim Eung Nam, the deputy premier, for the sake of Won Gyun made a strong proposal to the king like the following, "Won Gyun should be back to the naval forces since he is a man of good capacity as a naval commander not for army."( 『Seon Jo Sil Lok』, 1596. 5. 7.) As mentioned above, by such the obvious corroborative facts it is evident that the controversy of 'Won Gyun being a great commander' is a forgery which was fabricated by groundlessly distorting of the truth of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