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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任那日本府’의 파견 주체 재론

        白承忠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0 한국민족문화 Vol.37 No.-

        ‘임나일본부’의 파견 주체, 출현 배경, 그리고 그 성격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 주제들이다. 모두 ‘야마토 왕권’의 관련성 여부가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파견 주체에 대해서는 수정된 ‘야마토 왕권 파견설’이 대세인데, 야마토 왕권이 ‘임나일본부’를 파견하고 제왜를 통할한 주체로 보았다. 그러나 일찍이 이와는 정반대의 시각에서 ‘임나일본부’와 야마토 왕권을 분리하여 백제 혹은 제왜ㆍ재지왜인 중심으로 접근한 백제 파견설, 제왜파견(출자) 재지왜인설, 기타설 등이 제기되었다. ‘임나일본부’의 파견 주체에 대한 각각의 창의적인 시각이 돋보이지만, 어느 견해도 정설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 ‘임나일본부’ 자료의 근간인 『백제본기』와 『일본서기』는 후대 천황제 관념 하에 야마토 왕권 중심으로 편찬된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남가라 소멸과 ‘磐井의 亂’ 이후 ‘임나일본부’ 활동기인 계체ㆍ흠명대에 신라와 백제에 파견된 ‘왜사’를 야마토 왕권과 무관하게 보는 논자는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 야마토 왕권 파견설을 비판한 제설의 의문점이 있다. ‘임나일본부’는 『백제본기』와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출자의 혼란을 가져오고, 파견과 귀국 과정도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야마토 왕권 파견설을 비판한 제설은 야마토 왕권과 ‘임나일본부’가 직접 관련된 기록이 없다는 점을 결정적인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만, 『백제본기』의 특징인 백제 중심의 ‘가야부용관’과 자료 누락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고, ‘임나일본부’ 중심으로 전개된 백제-안라-신라-야마토 왕권 4자 관계의 실상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검토하지 않은 약점을 노정했다. 5세기대 제왜 지방호족이 주도한 ‘지역정권’의 독자적인 대 한반도 교섭은 인정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가 활동한 6세기 전반은 한반도 남부지역과 일본열도 공히 고대국가의 발전기로서, 두 지역 간의 외교관계는 대표 정치체인 신라ㆍ백제ㆍ가야와 야마토 왕권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렇다면 동일한 시기에 활동한 ‘임나일본부’와 ‘재안라제왜신등’ 역시 야마토 왕권과 관련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다. ‘임나일본부’는 출자의 다양성과 재지성 그리고 친신라 외교활동 등의 특징을 가졌지만, 일단 남가라 소멸 이후 변화된 야마토 왕권의 대 한반도 외교의 ‘표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 KCI등재

        ‘임나일본부’와 주변제국

        백승충 부경역사연구소 2022 지역과 역사 Vol.- No.51

        본고는 ‘임나일본부’ 활동의 중심국인 안라는 물론 당시 안라와 밀접한 이해 관계가 있으면서 가야 진출을 두고 경쟁하고 있던 신라와 백제 등 주변 제국의 동향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임나일본부’는 곧 ‘안라일본부’이고, 안라와 함께 단기간에 친신라 활동을 펼친 점이 특징이다. ‘임나일본부’는 「백제본기」에서 처음 보이는데, 이들에 대한 백제의 비판적인 인식은 자국의 안라 진출 및 ‘가야부용관’과 무관하지 않다. ‘임나일본부’는 일반 왜사와는 구분되는 독자성이 강한 이질적인 집단임은 분명하다. 그 특징으로는 ①파견과 귀국 관련 사료가 없는 점, ②출자가 다양하고 왜 왕권과의 관계가 모호한 점, ③안라가 주된 활동 지역이고 친신라 가야인의 영향을 받아 친신라 활동을 전개한 점, ④‘재안라제왜신’과는 차별성이 보이는 점 등이 있다. 신라가 낙동강 하류의 남부가야 3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본격화하자 인접한 안라는 ‘안라회의’(529) 이후 자구책으로 친신라 외교정책을 폈다. 또한 교섭의 거점으로 안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왜도 ‘임나일본부’를 통해 여기에 동참했다. 따라서 530년대 남부가야의 정황은 신라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는 가운데 안라와 ‘임나일본부’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등 ‘이중외교’를 전개한 까닭에 종래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온한 상태였다. 그러나 540년을 전후하여 백제는 신라와 우호관계의 복원을 시도하는 한편 안라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적어도 일본서기 의 서술로 볼 때, 백제의 이 같은 계획은 왜 왕권과 함께 ‘복건임나’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남부가야 3국 병합 등 낙동강 하류 진출, 동남해 제해권의 장악, 그리고 안라와 ‘임나일본부’의 친신라 활동 등은 백제의 안라 진출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백제가 두 차례의 ‘임나복건회의’(541·544)에서 안라와 ‘임나일본부’에게 강조한 것은, 근초고왕 이래 우호 관계가 깊고 더 이상 무도한 신라의 속임수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었다. 백제는 ‘복건임나’를 빌미로 안라에 진출하고, 대 고구려 적대감을 내세워 전례 없는 백제-신라-안라-왜 왕권 연합 라인의 구축을 추진했다. 다만 선결 과제로서 친신라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안라와 ‘임나일본부’를 신라로부터 분리하여 외교적으로 고립시켜야 했다. 540년대 후반 백제가 한강고토회복 계획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자 한강유역 진출을 꿈꾸고 있던 신라는 ‘나제동맹’ 차원에서 적극 동조했고, 왜 왕권도 ‘고구려 밀통’(548)을 계기로 더 이상 실익이 없는 ‘이중외교’를 철회했다. 이로써 안라와 ‘임나일본부’의 친신라 활동은 실패하고, 남부가야에서도 그 입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백제가 이 같은 성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특히 여러 면에서 ‘임나일본부’와 비교되는 ‘왜계백제관료’의 역할이 컸다. 550년대 전반 안라에는 ‘임나일본부’ 대신 친백제적인 ‘재안라제왜신’만 보인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mprehensively examine the trends of the neighboring empires that have interests as well as Alla, the central country of the ‘Imnailbonbu’ activity. ‘Imnailbonbu’ also appears as ‘Allailbonbu’, but considering the circumstances at the time, such as the motive and scope of the activities, its nature is not so simple and difficult to define. As the premise, several points are noted. Although there is controversy regarding the dispatching entity of ‘Imnailbonbu’, it is acknowledged that it is a heterogeneous group with strong uniqueness that is distinct from general Wai envoy. There are several characteristics identified in the relevant sources. ①The fact that there are no historical documents related to dispatch and return, ②The amount of investment is varied and the relationship with the royal authority is ambiguous, ③The fact that Alla is the main activity area, ④The fact that the pro-Silla activities were conducted together with Alla, ⑤「Baekje Bongi」 These are the fact that it is called for the first time in ⑥ and that it has nothing to do with 'Jaeallajewaisin'. What Baekje emphasized to Alla and the ‘Imnailbonbu’ at the two 'Imna Reconstruction Conference' is that Alla and the ‘Imnailbonbu’ have a deep friendship since King Geunchogo, and since Silla is a martial artist, do not fall for the tricks of Silla anymore and stop pro-Silla activities. is to do Baekje aimed to restore the Han River homeland, and actively sought to advance into Alla under the pretext of 'Reconstruction Imna' and to restore the Baekje-Alla-Wai royal power union line. Controlling the Close Silla activities of Alla and the ‘Imnailbonbu’ was a priority. In the mid-540s, when Baekje emphasized the goal of restoring the homeland of the Han River and hostility to Goguryeo, Silla, who had been wishing to advance into the Han River, actively sympathized with the 'Naje alliance', and why the king was no longer using the 'Goguryeo intrigue' claimed by Baekje as an excuse. He gave up 'double diplomacy', which had no practical benefit. As a result, the Close Silla activities of Alla and the ‘Imnailbonbu’ were no longer possible, and they lost their position. In the first half of the 550s, in Alla, instead of ‘Imnailbonbu’, only ‘Jaeallajewaisin’ is seen, but it is safe to say that they were entirely pro-Baekje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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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于勒의 망명과 신라 大樂의 성립

        백승충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7 한국민족문화 Vol.29 No.-

        In the 6th century, according to King Ga-Sil's direction, for the purpose of standardization in Gaza's Song, Woo-Reok composed 12 music which was made of 9 minor country's name and 3 dance music. But the real aim of the Woo-Reok's 12 music's composing was creation of a sense of unity in Gaza which was faced from the outside plunder. In 540's, Woo-Reok, the best musician in Gaya and a member of pro-Silla group, took refuge in Silla. King Jin-Heong of Sills installed him in Gook-Won area, the bridgehead in northward advance. The Sills country's ceremonial music originated in Gaza's. In spite of Silla's traditional music, the named Hzsng-Ak, was in existence, Gaya's music was a superior than Silla's. When Queen Jin-Deok was on the throne, Silla country's ceremonial music accomplished. But, King Jin-Heong's reign period, that was referred to emphasize important divide in the history of Silla country's ceremonial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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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安羅.新羅의 ‘接境’과 ‘耕種’ 문제 - ‘任那日本府’ 출현 배경의 한 측면 -

        백승충 부경역사연구소 2010 지역과 역사 Vol.- No.27

        『日本書紀』欽明紀には、8世紀代‘倭の蕃国觀’に即した対新羅対認識と天皇の一生の課題とした‘復建任那’の正当性を叙述している。‘任那日本府’は名目上 㖨己呑․南加羅․卓淳 ‘三国’の‘再建’のために、530~540年代の前半安羅に派遣されたヤマト王権のメッセンジャーであったが、実質的な派遣の目的は安羅とともに行った親新羅活動にあった。百濟は安羅と‘任那日本府’の親新羅活動を牽制するために㖨己呑․南加羅․卓淳 ‘三国’の滅亡原因を新羅に内応したものといった。しかし、新羅と‘接境’した安羅は百濟の希望とは違って、親新羅政策を追求するなど自救策を講じた。‘安羅会議’および‘磐井の乱’平定の以後、安羅に派遣した近江毛野臣に表出されたことは、安羅とヤマト王権の外交方向が‘任那日本府’登場の糸口となった。ヤマト王権は南加羅に続き安羅まで新羅に倂合されて、‘拠点’を喪失することになる状況を憂慮した。これに、安羅とともに親百濟一辺倒から脱離して、新羅とも交涉するなど二重外交を行った。安羅と‘任那日本府’は新羅との‘接境’地域で親新羅活動を展開したが、こちらでの‘耕種’できるかどうかに対する論議は安羅․任那日本府․ヤマト王権と百濟との両陣営の外交的な葛藤の表出に違わ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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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라(安羅)·신라(新羅)의 ‘접경(接境)’과 ‘경종(耕種)’ 문제 -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출현 배경의 한 측면 –

        백승충 부경역사연구소 2010 지역과 역사 Vol.- No.27

        『日本書紀』欽明紀には、8世紀代‘倭の蕃國觀’に卽した對新羅對認識と天皇の一生の課題とした‘復建任那’の正當性を敍述している。‘任那日本府’は名目上 㖨己呑·南加羅·卓淳 ‘三國’の‘再建’のために、530~540年代の前半安羅に派遣されたヤマト王權のメッセンジャ一であったが、實質的な派遣の目的は安羅とともに行った親新羅活動にあった。 百濟は安羅と‘任那日本府’の親新羅活動を牽制するために㖨己呑·南加羅·卓淳 ‘三國’の滅亡原因を新羅に內應したものといった。しかし、新羅と‘接境’した安羅は百濟の希望とは違って、親新羅政策を追求するなど自救策を講じた。‘安羅會議’および‘磐井の亂’平定の以後、安羅に派遣した近江毛野臣に表出されたことは、安羅とヤマト王權の外交方向が‘任那日本府’登場の絲口となった。 ヤマト王權は南加羅に續き安羅まで新羅に倂合されて、‘據点’を喪失することになる狀況を憂慮した。これに、安羅とともに親百濟一邊倒から脫離して、新羅とも交涉するなど二重外交を行った。安羅と‘任那日本府’は新羅との‘接境’地域で親新羅活動を展開したが、こちらでの‘耕種’できるかどうかに對する論議は安羅·任那日本府·ヤマト王權と百濟との兩陣營の外交的な葛藤の表出に違わ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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