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김동택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7 社會科學硏究 Vol.25 No.2
이 논문은 근대 한국의 정치체제 변혁 논의를 검토하고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특징들을 제기하고 그것이 갖는 함의를 도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오늘날의 관점에서 당시 정치체제에 관한 논의를 판단하고 규정하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인식과 대응 방식을 추적하여 그들이 어떠한 가능성들을 검토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며, 그것의 맥락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당시 출판되었던 대중매체들을 활용하려 한다. 대중매체는 동시대인들에게 가장 많이 읽혔고 또 공적인 논의의 장이기도 했다. 또 이들 대중 매체를 통해 당시 지식인들의 활발한 글쓰기가 이루어졌던 까닭에 당시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이후부터 3·1운동 이전까지 조선과 대한제국을 근대화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다양한 정치체제 논의들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군주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였다. 이는 단순한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특히 고종은 스스로를 적극적인 정치행위자로 규정하고 궁극적으로 무한 군권을 지닌 절대군주제를 추구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근대화를 구상했다. 따라서 정치체제 변화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는 반드시 왕권을 변수에 놓아야만 했다. 그러나 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은 기본적으로 왕권을 제한하는 방식 즉 의회설치, 입헌 등의 방식으로 통해 왕권을 제한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은 지속적인 정치적 긴장을 발생시켰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점은 어떤 경우이든 왕권 자체를 부정하려는 논의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정치 변동에서 나타나는 지속적인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에 의한 국권 찬탈을 황제의 주권 포기로 간주하고, 황제가 주권을 포기하는 순간 국민이 그 주권을 계승한다는 논리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인민주권, 국민주권 논의가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논의를 확산시킨 세력은 주로 재외 한인 운동세력들이었다. 왕권을 부정하는 이러한 급진성은 해외 한인단체가 갖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의미를 갖는 것은 이를 통해 독립을 요구하는 3·1운동이 발생할 수 있는 자원이 되었으며 3·1운동은 새로운 주권체로서 민족 혹은 한국 국민을 규정하는 논의가 하나의 정치체제로 틀을 갖추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3·1운동 이후 한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논의와 운동은 왕권에 대한 부정, 인민주권, 결정적으로 민주공화국의 설립요구를 한국 근대 정치체제 논의에서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임시정부들과 임시 헌법의 탄생은 근대국민국가형성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