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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에 표현된 1920년대 의상의 조형성 연구 : 아카데미 영화제 의상 디자인 수상작 중심으로

        윤지영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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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는 한 세기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인류의 첫 전쟁을 경험한 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급격하게 변화, 발전하는 시기였다. 특히, 복식의 역사에서 살펴볼 때 1920년대 의상은 나폴레옹 시대의 나타났던 엠파이어 스타일 이후 가장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동시에 시대의 요구와 정신이 가장 잘 반영된 복식이다. 이에 본 연구는 1920년대 시대상이 반영된 그 시대의 복식의 특징을 고찰하고, 후대 우리가 과거의 의상을 영화라는 종합 예술 매체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재조명했으며 각 영화 의상을 통해 관찰되는 1920년대 의상의 조형성과 조형미에 대해 연구해 보았다. 연구를 위한 방법으로는 우선 1920년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과 그 시대 복식, 대표적 디자이너를 고찰해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197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영화 중, 1920년대의 문화를 영상화하면서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한 작품을 선정해 각 영화에서 보여지는 의상을 분석해 보고 그 의상을 통해 보여지는 조형적 미의식에 대해 연구해 보았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의상을 분석한 결과 첫째, 각 영화마다 그 시대 의상의 특징을 영화 주제에 맞춰 충실하게 재조명해 내고 있었다. 둘째, 각각의 디자이너에 따라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의 차이점이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남녀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1920년대 상류사회의 삶을 의상을 통해 로맨틱하고 엘레강스한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표현 해내고 있었다. '불의 전차'에서는 남성 의상을 중심으로 영국풍 남성복의 클래식한 멋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카고'는 재즈의 리듬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을 리메이크한 영화인만큼 율동적인 아름다움을 의상을 통해 영상화하고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비즈 장식과 디자인의 의상이 섹시하면서도 화려하게 표현되고 있었다. 셋째, 각 영화마다 의상에서 보여지는 디자인 요소의 차이점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표현되는 조형성의 다양함을 관찰할 수 있었다. 넷째, 각 영화마다 1920년대 의상을 통해 표현된 기능적 우아미, 장식적 고전미, 율동적 역동미, 입체적 단순미의 다양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관찰할 수 있었다. 다섯째, 시대 의상의 조형성과 조형미가 현대의 의상에서 반복되어 표현되어지며 이는 새로운 유행을 창조한다. 즉 패션은 시대에 따라 반복되어짐을 알 수 있었다. 위의 연구를 통해 1920년대의 의상이 상징하는 내적 의미와 미적 아름다움이 후 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 의상을 통해 재현되어,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우리들에게 영화라는 비주얼한 매체의 경험을 통해 그 시대의 미의식을 간접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선과 실루엣, 형과 디테일, 재질감과 색채 등의 조형 요소를 통해 영화 의상에 표현된 1920년대의 조형미는 첫째, 아르데코 시대의 기능주의를 바탕으로 한 심플함을 기본으로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한 기능적 우아미, 둘째, 비즈와 자수, 리본 등의 장식 디테일을 통해 고전적이고 클래식한 멋을 표현한 장식적 고전미, 셋째, 재즈와 광란의 시대인 1920년대의 다이나믹한 움직임이 의상에 비주얼하게 표현된 율동적 역동미, 넷째, 아르데코 시대의 구조적 개념인 입체주의가 단순화된 조형미로 의상에 표현된 입체적 단순미로 나타나고 있음을 고찰할 수 있었다. 각각의 디자이너들이 영화 의상을 통해 표현하려했던 것은 단순히 1920년대의 옷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시대상과 그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과 철학을 담고자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디자인이란 단순히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요구와 새로운 정신을 담아 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계기였다. 또한 현대를 풍미하고 지배하는 디자인이란 모두 과거에 바탕을 두고 반복되며 재창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나라 현실에서 아직은 인식이 부족한 영화 의상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외국의 사례처럼 정확한 고증을 통해 그 시대의 사상과 철학을 담아 내는 전문화된 인력과 여건이 형성되기를 바라며 본 연구가 우리 나라 영화 의상 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920's was the period of sudden change and development in mentally and materially after experienced The First World War in the beginning of new century. 1920's costume presented well the needs of the times and spirits as showing a huge variety after Empire style in Napoleon age. The point of this study is to research the character of 1920's clothes which reflects the phases of the times and how dose the next generations have presented the past clothes in the way of cinema which is a composite art and studied about aesthetic of 1920's clothes through cinema costume. The way of study, first I summarized the 1929's social and culture environments, clothes and designers. Base on this, I selected the movies which described 1920's culture and wined the Academy award for costume design which was made after 1970's. After analyzed the costume in the movies visually and studied the aesthetic of costume. As the result of visual analysis of the cinema costume which is based on 1920's clothes. First, each movie showed completely the character of 1920's clothes as meets the theme of movie. Second, each designer emphasized on the different factors. In 'The Great Gatsby' as focusing on the leading characteres, expressed the life of high society through the costume with the romanticism and elegance. 'The Chariots of fire' showed the classicism through British man's wear. 'Chicago' which is the musical movie based on jazz rhythm pictured rhythmical beauty gorgeously through various beaded clothes. Third, in each cinema costume, there are difference in designing elements and diversity in shape. Fourth, each movie, there are various aesthetic which is represented as functional elegance, decorative classicism, rhythmical dynamics and cubistic simplicity through 1920's costume. Fifth, designing elements and aesthetic of 1920's clothes has been repeated in today's clothes and created new fashion. Through this study, mental meaning and beauty of 1920's clothes has been reproduced through today's cinema costume which give us a chance to study indirectly an aesthetic sense of 1920's via cinema which is a visual media. The 1920's aesthetic of clothes which is expressed through line and silhouette, shape and detail, texture and color is First, functional elegance which is represented as simplicity based on functionalism of Art Deco, Second, decorative classicism which expresses classic beauty through beads, embroideries, bibbons etc. Third, rhythmical dynamics which is presented as dynamic movement visually through costume, Fourth, cubistic simplicity which expresses cubisim through clothes. In these movies, each designer wanted to express not only 1920's clothes but also the trends of the times and the spirits of the age. Design is not just to make a new shape but the process to present the request of the times and the new spirits. Also, today's fashion is based on the past and has been repeated and recreated. I hope that professional experts and conditions which express spirits and philosophy of the age through accurate research will be encouraged and this study is to help the growth of Korean cinema costume design.

      • 1920년대 잡지에 나타난 명사구 내포문 연구

        고나경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202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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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구는 1920년에 간행된 3종의 잡지인 『개벽』, 『별건곤』, 『삼천리』를 대상으로 명사구 내포문의 형태‧통사적 특성을 공시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추가적으로 1920년대 이전과 이후의 명사구 내포문과도 비교하였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20년대 잡지에서 명사화 구성은 기능, 제약, 분포와 변천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기능 면에서 1920년대도 명사화 어미 ‘-(으)ㅁ’, ‘-기’나 ‘-ㄴ 것’ 구조로 나타난 명사화 구성에 격조사 혹은 보조사가 결합하여 문장 성분으로 기능했다. 이때, ‘-기’ 명사화 구성은 주어, 목적어를 나타내는 조사가 수의적으로 생략되어 나타나거나, 어간말음 ‘ㅎ’ 혹은 ‘-하다’류 용언이 명사화 어미 ‘-기’와 결합할 경우 축약된 ‘-키’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다음으로, 1920년대 명사화 구성의 제약 양상은 상위문장 서술어 결합, 시제어미 결합, 높임법 결합 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ㄴ 것’ 명사화 구성은 관형화 구성의 구조를 취하여, 상위문장 서술어 결합에서 제약 양상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1920년대 명사화 구성의 분포와 변천을 살펴보았다. 원래 명사화 구성은 선어말어미 ‘-오/우-’의 규칙적인 결합을 기반으로 ‘-(으)ㅁ’이 가장 우세했으나, 16세기부터 선어말어미 ‘-오/우-’가 소멸하면서 ‘-기’가 활발하게 나타났다. 또한 17세기에는 ‘-ㄴ 것’ 구조가 등장하여 명사화 구성으로 기능하며, ‘-(으)ㅁ’이 더욱 축소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변화 양상은 1920년대 잡지에서 1925년부터 ‘-기’와 ‘-ㄴ 것’의 분포가 ‘-(으)ㅁ’을 뛰어넘으며 나타났다. 이때, ‘-기’는 비슷한 수준으로 빈번하게 나타났고, ‘-ㄴ 것’은 ‘-(으)ㅁ’이 감소하는 만큼 증가하는 반비례 형상을 보인다. 이를 통해 ‘-ㄴ 것’이 ‘-(으)ㅁ’을 대체하며 분포를 확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1920년대 잡지에서 관형화 구성은 유형, 제약, 변천을 살펴보았다. 관형화 구성은 관형절과 내포문 명사의 관계에 따라 관계화 구성과 보문화 구성으로 나누는데, 1920년대 잡지에서 관형화 구성 또한 관형화 어미나 내포문 명사의 종류에 상관없이 관계화 구성과 보문화 구성으로 나타났다. 이어서, 관형화 어미에 관련한 제약 양상은 시제어미 결합, 높임법 결합, 내포문 명사에 따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형화 구성은 주체‧대상법이 소멸하고, 관형화 어미 ‘-ㄴ’과 ‘-ㄹ’로 나타나며, ‘관형절+내포문 명사’ 구조가 보편화 되는 등의 변화를 보였는데, 1920년대 관형화 구성 또한 이러한 양상이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이미 관형화 구성은 현대국어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aims to identify the morphological and syntactic characteristics of noun phrase embedded sentences from a synchronic perspective. The focus of this study will be on three magazines from the 1920s: 『Gaebaek』, 『Byeolgungon』, and 『Samcheonri』. Furthermore, a comparison was made between noun phrase embedded sentences before and after the 1920s. The content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we examined the function, restriction, distribution, and diachronic changes of nominalization compositions in the 1920s magazines. Firstly, in terms of function, nominalization compositions that appeared in the 1920s with nominalization endings such as '-(으)ㅁ', '-기', or '-ㄴ 것' structures functioned as sentence components when combined with a postposition. In this case, in '-기' nominalization compositions, the postposition is omitted from the subject and object, so they can function as sentence components. The nominalizing ending '-기' was used as a shortened '-키' when the stem endings 'ㅎ' or '-하다' were combined. Next, there are constraints on nominalization composition. We have identified, in nominalization compositions, the predicate of a superior sentence, as well as the combination of tense endings, honorifics. However, in the case of the '-ㄴ 것' nominalization composition, we did not find the predicate combination of a superior sentence. Then, we analyzed the distribution and diachronic changes of nominalization composition in the 1920s. Originally, the distribution of nominalization compositions was dominated by the nominalization ending '-(으)ㅁ', which regularly combines with the prefinal ending '-오/우-'. However, as the use of the prefinal ending '-오/우-' disappeared in the 16th century, '-기' became the more commonly used form. In the 17th century, the '-ㄴ 것' structure emerged as a nominalization composition, which further reduced the use of '-(으)ㅁ'. This pattern of change began in 1925 when the distribution of '-기' and '-ㄴ 것' surpassed that of '-(으)ㅁ'. At this time, the usage of '-기' was similarly frequent, while the usage of '-ㄴ 것' was inversely proportional, increasing as the usage of '-(으)ㅁ' decreased. This allows we can see that '-ㄴ 것' has replaced '-(으)ㅁ' and expanded its distribution. Next, we examined the functions, restrictions, and diachronic changes of adnominal composition in the 1920s magazines. There are two types of adnominal composition: relativisation composition and complementation composition. The type of composition depend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dnominal clause and the head noun. Similarly, relativisation composition and complementation composition also appeared in magazines in the 1920s. This is true regardless of the type of adnominal endings or head nouns with which they combine. Next, constraints related to the adnominal ending were identified, including the combination of tense ending, honorifics, and head nouns. Lastly, the adnominal compositions show changes such as the disappearance of the subject-object method, the use of adnominal endings '-ㄴ' or '-ㄹ', and the universalization of the 'adnominal clause + head noun' form. The adnominal composition of the 1920s also exhibited the same characteristics. In other words, it can be said that a 1920s adnominal composition has the appearance of a modern Korean adnominal composition.

      • 1920년대와 영화 시카고의 의상분석

        김현주 건국대학교 디자인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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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예술이 걸음마를 떼던 20세기초, 배우들에게 의상은 바로 연기의 연장이었으며, 무성영화 연기에서 장면에 걸맞는 옷을 고르고 갈아입는 것은 역할을 해석하는 작업 그 자체였다. 또한 영화제작에 전문 디자이너가 고용되기 시작하면서 영화에서 영화의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영화 의상은 영화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본 연구의 의의는 영화 시카고에 나타난 의상을 분석하여 1920년대 의상을 연구하는데 있으며, 영화의상에서 동시대 의상을 어떻게 재현하였고 현대 의상과 어떻게 접목시켰는지를 분석하여 영화의상에 있어서의 학문적 자료를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에서는 영화 시카고 의상을 고찰하기 위해서 192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 시대의 의상을 분석하여 시카고 의상과 비교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화 시카고 의상은 이러한 1920년대 복식에 비해 더 관능적이고 노출이 심한 무대의상을 보여주고 있다. 무회들의 의상은 의상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여성들의 중요한 부분만을 가린 의상이 많고 두 여주인공 역시 가슴이 훤히 보이는 V넥에 허벅지가 다 보이도록 컷트 해놓은 원피스를 입고 격렬한 댄스를 선보이며 노래를 부른다. 스커트를 컷트 해놓은 것을 보면 술 모양을 본 따서 만든 것인데 이것은 1920년대에는 나타나지 않은 스타일로 현대의 유행하는 스타일을 가미한 형태이다. 둘째, 1920년대와 영화 시카고의 일상복을 보면 1920년대 스타일은 보이쉬한 스타일로 남성으로 착각할 만큼 활동적인 의상을 입었다. 크로쉐 모자에 진주를 길게 늘어뜨린 악세사리를 착용하였고 네크라인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에 반해 영화 시카고의 일상복은 대부분 법정과 감옥에서 나타나는데 여성적인 면을 더 강조하였다. 록시의 헤어스타일을 보면 1920년대 헤어스타일이 숏트 컷트 스타일 이 나타났듯이 그녀도 짧은 단발에 웨이브를 넣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지만 1920년대 스타일보다는 긴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셋째, 남성들의 복식은 1900년대부터 지금까지 큰 차이가 없었으므로 지금의 남성 복식이나 1920년대의 복식이나 별 다른 스타일의 변화가 없었다. 본 연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움직이는 화면을 정지시켜서 봐야하는데 그 순간을 포착하기가 어려웠고, 조명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의상의 색상도 어두운 편이어서 의상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의 의상을 자세히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공연의상을 제시하였다는 점과 한정된 계층의 복식의 분석에까지 접근하였다는 점, 그리고 영화의상에서 영화와 의상 연구에 앞으로의 선행자료가 된다는 점에 그 의의를 지니고자 한다. In the early 20C when motion picture arts was taking its first steps, costumes were the extension of acting to actors and choosing and changing into clothes that fit the scenes of silent films was itself the work of analyzing the role. Also, as specialized designers started getting hired for movie production, film costumes came to take a significant portion in expressing films. The significance of this study is in studying the costumes of 1920s by analyzing the costumes appeared in the movie Chicago, and the purpose of the study is on analyzing how the costumes of the period were revived and how they were grafted into modem costumes to present scholastic reference in the aspect of costume history. In this study, the backgrounds of the period of 1920s was looked into in order to study the costumes in the movie and the costume of the period was analyzed for comparison analysis with those in Chicago. Chicago, First, the stage costumes in Chicago are more sensual and skimpier than the costumes of 1920s. The stage costume costumes barely cover the private parts of women, which is hardly thought to be a stage costume, and the two female heroines wear dresses with low cut V necks that exposes the cleavage and short skirt that shows off most of their thighs while they are singing and dancing fiercely. The skirt is cut in the shape of a fringe that did not appear in the 1920s and this is the style that is flavored with the one that is in trend in the modem era. Second, looking at the everyday clothes of 1920s and Chicago, they are in boyish style, that is so dynamic that it makes one mistaken f a - a male. They wore crochet hats and pearl accessories that hung low and necklines appear to be various. In contrast to this, the everyday clothes in Chicago appear mostly in the court and prison scene and they emphasize more of the feminine side. When looking at Rows hairstyle, she is showing short cut bob with wave as short cut style appeared in 1920s but it is longer than that of the 1920s. Third, since mens costumes did not show much difference since 1900 till now, there was not much difference in style between the current mens costume and that of the 1920s. The most difficult part in this study was that it required to stop the moving picture to have a look at them, which was difficult to catch the right timing an costumes were not scene clearly as the lighting was dim overall and the colors of the costumes were comparatively dark. However, I would like to sustain the significance of this study for the fact that stage costumes that were not covered in detail in 1920s costume, approached to the analysis of costumes for a limited class and that this study will be the preceding reference for the studies on the costumes of 1920s that will come in the future.

      • 1920년대 시의 '님'지향성 연구

        허수진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1998 국내석사

        RANK : 247807

        본 연구는 '1920년대시의 님지향성 연구'로 시적화자의 님에 대한 대응태도와 형상화된 님의 의미고찰을 목적으로 하였다. 먼저 Ⅱ항에서는 님시편들의 이해를 들기 위한 객관적 자료 수집으로 '님'에 대한 어의 및 의미론적 고찰을 진행하였다. '님'은 사모의 대상이되, 평범한 사랑과 사모의 대상이 아니라 全生命的인 사랑과 연모의 대상으로서 표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고전시가에서 '님'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 용례를 이성적 대상과 충군지정의 대상으로 나누어 통시적으로 살펴 보았다. 이성적 대상으로서의 '님'은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표출과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별의 정한을 드러내고 있으며, 충군지정 대상으로서의 '님'은 임금(군주, 왕)에 대한 충성과 丹心을 다짐하고 있다. Ⅲ항에서는 1920년대의 특수한 사회, 역사적 상황 속에서 님시편이 두드러지게 된 원인을 찾아보고 님지향성의 대표 시인인 김소월, 변영로, 한용운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작품 속에서 '님'이 어떤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지 대응태도와 그 의미에 대해 살펴 보았다. 소월시에 나타난 님에 대한 시적화자의 대응태도를 살펴보면 님과의 이별상황(혹은 상황의 가정 → 님不在로 인한 그리움의 증가 → 그리움의 감정치 복잡다양한 정서로 轉移(설움, 미련, 방황 등) → 부재의 상황을 이겨내고 님과 합일하려는 '나'의 노력의 양상(꿈의 통로 이용, 이상화된 세계 설정, 죽음을 각오한 헌신적 태도)으로 나타남이 확인되었다. '님'의 의미는 현실적, 구체적 존재로 아내, 어머니, 숙모, 동급생 오순 등으로 넓게 볼 수 있고, 추상적, 관념적 존재로는 '상실된 조국'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주의 시에 나타난 님에 대한 시적화자의 대응태도를 살펴보면 님과의 이별 상황 →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거 지향적 태도, 꿈을 통한 재회의 시도, '날개' 등의 방법을 이용한 도달의지의 표출)으로 나타나고 있다. '님'의 의미는 수주의 첫 번째 아내였던 이흥순과 사회,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여 '상실된 조국'으로 볼 수 있다. 만해시에 나타난 님에 대한 시적화자의 대응태도를 보면 님과의 이별 상황 → 이별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꿈을 통한 재회의 시도, 기다림 - 영원성을 지닌 종교적 차원까지 승화됨, 죽음을 통한 님과의 합일)으로 나타나고 있다. '님'의 의미는 첫 번째 아내 전정숙, 서여연화보살과 같은 현실적, 구체적 존재와 1920년대 시대상황과 만해의 개인 체험을 고려해 상실된 조국, 불타·불교적 진리의 추상적, 관념적 존재로 형상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Ⅳ항에서는 1920년대 님시편의 특징을 ① 이별의 미학 추구 ② 꿈을 통한 재회의 시도 ③ 여성편향적 태도 ④ '님'의미의 다양성 의 네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이상으로 1920년대 시에 나타난 님지향성 연구를 진행시켰는데 이의 문학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문학의 전통성을 찾는데 그 의미가 있다. 한국 시가 문학에서 '님'을 주제로 한 작품은 고대가요를 출발로 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전통을 가지고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물에 빠져 죽은 남편을 애도하는 「公無渡河歌」 를 시작으로 고려가요, 악장, 시조, 가사, 신체시를 거쳐 1920년대에 이르게 되면 '님'지향성은 두드러진 양상을 띠게 된다. 이것은 '님'이 단순한 연인의 의미가 아니라 최고 애정 표출 대상으로 우리 민족의 情恨을 담아내는 역할을 담당했기에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개인과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 갈구와 희망의 대상으로 '님'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님'에 대한 연구는 고전시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우리 문학의 전통성을 찾는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둘째, 1920년대의 사회·역사적 상황과 시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가하게 한다. 1920년대는 민족의 자주권 회복을 위한 전민중적 궐기인 3·1운동의 좌절 이후의 시기였다. 3·1운동 이후 표면적으로는 문화정책을 추구했지만 그 저변에는 우리 민족에 대한 더욱 강화된 식민통치의 억압이 진행되었다. 역사적인 상황과 이를 반영하는 문학을 연관지어 보면 1920년대 시인들은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대적 여건하에서 조국의 상실을 '님'상실이라고 하는 비유의 틀 속에 표출하려 했던 것이다. '조국 부재'라는 암울한 현실속에서 '님'과의 연관을 통해 절망, 슬픔 그리고 희망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또한 사회적 상황과 관련시켜 보면, 개화 이후에 물밀듯이 들어온 서구 문물을 준비됨이 없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혼란스러운 정서의 표출이 님지향성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소재의 사용이나 과거 유년 시절의 친구, 놀이 등을 등장시키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다시 돌아가고픈 염원을 반영하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는 과정과 깨달은 후의 감정을 표출한 시편들은 1920년대 시인들이 갖는 新·舊 문화사이의 혼란스러움과 그로 인한 좌절, 절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볼 때 '님'지향성의 시들은 단순한 애정표출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1920년대 일제 식민지하에서 '조국상실'이라는 민족의 현실과 新·舊 가치관의 혼란을 수용해야 했던 당대 시인들의 감정표출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1920년대 '님'지향성은 시에서 드러나는 한 양상이라고 보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 역사가 반영된 총체적 이해 속에서 해석될 때 온당한 자리매김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님'지향성은 다른 시대와는 구별되게 1920년대에 두드러진 양상을 이루고 있는 것일뿐, 이후에도 그 흐름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각 시대별의 '님'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며 개인과 집단의 정서 표출의 대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192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의 '님' 지향성을 고찰해보는 것은 차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 1920년대 조선 지식인의 중국 담론 연구 : 만주, 상하이, 베이징 담론을 중심으로

        주효뢰 韓國外國語大學校 國際地域大學院 2018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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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existing research on colonial Korea normally use the units of analysis of "Korea - Japan/the West". Much attention has been paid 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lonizer and the colonized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olonized ethnic groups has rarely been mentioned. When they met, how did they understand and represent each other under the order of colonial empire? As a step towards answering this questions, this study aims to discuss how Korean intellectuals understood and represented the former suzerain as well as the semi-colonized China through exploring traveler's journals and editorials on China based on their travel to Manchuria, Shanghai and Peking in the 1920s. The Korean Intellectuals maintained their sensitive senses in China after the May Fourth Revolution of 1919 to contemplate the past and the present of this place while at the same time, trying to reflect their own identity issues. In this way, self-contemplation as well as facing others at the same time leads to more serious contemplation of their own country After Sino-Japanese War in 1894, the traditional 'suzerain-dependency' relations between China and Korea has been replaced by the relationship of 'the colonized - semi-colonized'. Especially as a result of the reception of the theory of civilization, modern Koreans’ perceptions toward China were drastically changed. According to Korean modernist intellectuals, distancing Korea from China was an important aspect of developing Korea's modern national identity. In this respect, Post-Sinocentrism was one of the key characteristics of modern Korean nationalism. Yet another important stream of the geopolitical vision of Korean intellectuals of the late nineteenth-early twentieth century was the belief in China-Japanese-Korean alliance for the sake of both deterring Western powers. The Great Han Empire fell in 1910, and The Qing Empire in 1912. Korea and China had the historical extinction of the monarchy in common nearly at the same time. Korean confusianism-intellectuals had much interest in the Chinese political situation. Some of them showed the strong aspiration for the revival of the Confucian Chinese Empire, for that was thought to be the absolute way to the Korean independence from the Japanese domination. While the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exiled in China had a clear understanding that China's marginalization was shared by Korea and that its victimization by Japanese imperialism. Their positive interest in the Xinhai Revolution laid the foundation for future alliances by such Korean nationalist emigres nationalists and the Kuomintang(KMT, Chinese Nationalist Party) and also between China-based Korean communists an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in the late 1920s-1930s. At the same time, because of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the Korean immigrants in Manchuria had increased rapidly. Korean nationalist intellectuals considered this region to be historical Korean territory that had once been ruled by the medieval kingdoms of Parhae and Koguryŏ, and they considered it the goal of the Korean nation to restore its lost territory. Various and concrete analyses about China began to appear on modern journals published in Korea since the 1920s, as a result of the colonial government's relaxation of media control in the Cultural Rule Period. The ultimate goal of these analyses was focused on overcoming the circumstances in colonized Korea. The idea of Manchuria as part of Korea's ancient lands became widespread in the 1920s. Manchuria was emphasized for the purpose of recovering national origins of Korean as it was historically and geographically tied to the Korean nation. However Manchuria in reality failed the Korean intellectuals' expectations. They saw Korean peasants' poverty-stricken under the oppression of Chinese officials and local people with their own eyes. As a result, Manchuria was depicted as a symbol of violent and an uncivilized region. Meanwhile, Korean intellectuals described the Chinese as ‘victimizers' as well as ‘the same victims of Japanese imperialism' through the filter of ‘Korean people'; On the other hand, they represented the Chinese as ‘uncivilized sick man’ through the filter of ‘civilized individual' with a complex feeling of sympathy combined with revulsion. In this sense, Manchuria was the space where Korean tried to recovery the national origins, and also the space where experienced self-loss and self-disruption due to the difference of the degree of civilization between Japan and China. As can be seen from the Manchuria discourse, some Korean intellectuals chose Japan as the model of modernity and chose to pursue the modern without the senses of subject. In other words, they were trying to accept the colonial modernization led by the Empire of Japan. Shanghai, the international city in the 1920s, was a space that clearly showed both the bright and dark side of Western modernity. Therefore, for the Korean intellectuals, it was the place intertwined with the intersection of the understanding of both the West and the East, as well as the the space for imagining the possibility of the East Asian modernity through China. In the Shanghai discourse, the Western modernity was usually set as the standard of civilization. Meanwhile, the Korean intellectuals sought to escape from the colonial reality of Korea through the imagination of being cosmopolitan. On the other hand, some intellectuals, with the awareness of identity as 'Asian', faced the darker side of Western modernity and the contradiction in capitalism in Shanghai. As a result, they began to look for the East Asian modernity as an alternative modernity to overcome the Western modernity. Some intellectuals including long-term residents such as Korean students and correspondents sought to find possibility of the East Asian modernity through anti-imperialism movements in China as well as the foundation of the Nanking National Government in 1927. However, this imagination about 'East Asia' was ultimately replaced by a new East Asian modernization called "Dae-Dong-a(The Greater East Asia)", which was originally introduced by Japanese imperialists from the end of the 1930 's. It eventually presented the impossibility of East Asian modernity. Peking, the city full of history and culture heritage in the 1920s, was a space where traditional China and modern China coexist. According to the Peking discourse, Some of the Korean intellectuals have got rid of the linear modernization theory and explored the possibility of the Korean modernity through the thinking of the Chinese modernity. Some national news media attempted to critically accept the outcomes of the Chinese Revolution which presented a perception that Koreans needed to hold their own independent viewpoints on modern China. They were paying an attention with acute observation to the process of the Chinese Revolution. And they were viewing that the Chinese Revolution could be a chance creating the joint revolutionary changes in East Asia, especially the chance of Korea's independence. At the same time, Lee Dongkok and some other intellectuals had deep interest in the value and spirit of the Chinese New Cultural Movement. Their observation about modern China was rather far away from discourse which totalitarianize and emotionally disregard China from a perspective of an outsider without any effort to meet the fundamentals of the country. Meanwhile, they refused to follow the trajectory of the reception of modernity via Japan/the West as many Korean intellectuals did, but groped for a way to receive it via China. Therefore, China has provided a reference system to understand and approach to social reconstruction in Korea. This was the result of the 'inter-Asia' perspective, that China was not merely an object of understanding, but a 'method' or 'reference object' based on an equal perspective. In conclusion, Firstly, the 1920s could be regarded as a time that Korean intellectuals showed a broad and multi-layered perception of China unprecedented in the early modern period. The different placenesses of Manchuria, Shanghai, Peking were important external factors that shaped the multi-layered perception of China. Secondly, the intellectual geography of Korea in the 1920s, when various ideologies such as theory of social evolution, theory of class struggle, complementary theory, etc. were mixed since the failure of March 1st Movement, was the internal factor that formed the multi-layered perception of China. Thirdly, Korean intellectuals' perception of China was highly variable and fluid which changed with the changes in the external political situation. This was because their perception of China was in fact a projection of the desire for national independence of Korea. Fourthly, by examining the Korean intellectuals' perception of China in the 1920s, four different path choices - such as Japanese modernization, Western modernization, East Asian modernization, and Korean modernization- were discovered in order to modernize Korea. Fifthly, the Korean intellectual discourse on China was characterized by the discourse of resistance against the cultural hegemony of the colonial authorities as well as the modernity itself. The Korean intellectual discourse on China in 1920s was ultimately a way-finding for modernization as well as political independence that they had to achieve. Unfortunately, they have not been widely accepted by the Korean people at the time. Today, the discovery of these forgotten intellectual heritage will be the practical value of understanding the intellectual history of modern Korean. 식민지 조선과 관련된 기존의 연구는 ‘제국–식민지', 또는 '조선 - 서구/일본'이라는 양자 간 관계에 치중하고 식민지 조선과 다른 식민지/(半)식민지와의 관계를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다. 식민지기에 늘 서구/일본이라는 거대한 타자에 의해 바라보이기만 했던 조선인은 과거의 종주국이자 현재의 (半)식민지 중국을 바라보는 주체로 변했을 때, 그들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본 연구는 1920년대 신문∙잡지에 게재된 기행문, 기사, 논설 등 텍스트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글들에 투영된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에 대한 인식을 추적해 보았다. 본 연구는 단순히 조선 지식인의 ‘중국 인식’에 대한 고찰에 그치지 않고 이들의 중국 인식의 저변에서 작동하고 있었던 근대 의식, 민족 인식, 동아시아/세계 인식 그리고 자아 인식의 특징을 살펴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청일전쟁 이후 조∙중의 관계는 전통적 조공관계체제 하에서의 수직적인 '종주국 – 조공국'이라는 층위로부터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주변부이자 약소민족이라는 수평적인 층위로 자리매김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인의 중국 인식도 근본적으로 변모되었다. 독립된 민족으로서의 조선의 주체성을 구축하고 문명개화를 꾀하기 위해 '탈중국'은 그 필수작업이 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초기 조선의 민족주의는 '탈중국형 민족주의'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새로 탄생된 대한제국이 힘이 약했을 때 외세를 대항하기 위해 한중일 동양삼국이 제휴해야만 백인종인 서구세력에 대항한다는 동양연대론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였고 1912년 청이 멸망한 것은 조∙중 양국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역사의 격변이었다. 나라를 잃은 조선의 유교 지식인은 독립을 위하여 중국의 현재와 미래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중의 일부 유림들은 중국에서 유교적인 중화제국이 부활하여 전통적인 조∙중관계를 회복하고 여기에 입각해 일본의 패퇴와 조선 독립을 일으키자는 간절한 소망을 발산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신해혁명에 대한 독립운동가들의 긍정적인 인식과 반제적 중국연대 의식은 1920, 30년대 조선 민족주의자와 국민당, 또한 조선 공산주의자와 중국 공산당 간의 폭넓은 연대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일제강점기에 들어 조선인의 만주 이주가 대폭 증가함에 따라, 국토가 상실된 상황에서 한반도 밖에서 민족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만주에 관한 고토의식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1920년대에 들어 문화통치 시기가 열리면서 식민 권력의 정치사상적·물질적 규제와 통제를 최대한 피하고 그나마 자유롭게 언론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다른 시기에 비해 유난히 많고 폭넓은 중국 담론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분석의 궁극적 목적은 대개 식민지 현실의 타개에 그 방향이 맞추어져 있었다. 만주에 대한 고토 인식은 1920년대에 들어 조선인들에게 폭넓게 수용되었다. 조선 지식인들은 조선 민족의 ‘희망의 땅'으로서의 만주를 열망하였으며, 단순한 타국체험을 넘어 민족 공동체의 생존과 결부된 측면에서 만주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현실에서의 만주는 혐오와 공포가 교차되는 ‘수난의 공간'이자 ‘미개한 땅'으로 묘사되게 된다. 그들은 때로는 ‘조선인'이라는 시선을 통해, ‘가해자’나 ‘연대의 대상’로서의 중국인을 인식하고, 때로는 ‘문명인'이라는 의식을 통해, ‘미개한 병자’로서의 중국인을 형상화시키면서 ‘연민 어린 미움’이라는 양가적인 인식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만주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민족의 뿌리를 두고자 하는 공간이자, 확연한 중·일 간 '문명' 차이 대비 속에서 자아 상실과 분열을 경험하게 된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만주 담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일부 조선 지식인들은 일본을 근대의 모델로 삼으면서 주체없는 근대를 추구하고자 한다는 경로를 택하였다. 즉 일본이 주도하는 식민지 근대화를 저항없이 받아들이고자 한다는 입장이었다. 1920년대의 국제 도시 상하이는 서구적 근대의 명암을 극명하게 보여준 공간이었다. 따라서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동·서양 인식이 경합하는 장이자 중국을 통해 동아사적 근대를 상상하는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상하이 담론을 통해 서구적 근대를 유일한 문명의 기준으로 설정하면서, 코스모폴리탄이라는 상상을 통해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벗어나고자 한다는 경로 선택을 확인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부 지식인들은 상하이에서 서구적 근대에 동반된 식민성과 자본주의적 근대의 모순을 직시하면서, '동양인'이라는 자각을 가지며 서구적 근대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동아시아적 근대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일부 유학생과 특파원 등 장기 체류자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당시 중국에서 진행되는 반제 실천, '신흥 중국'의 출범 등을 통해 동아시아적 근대의 가능성을 읽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193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일제가 내세운 '대동아'라는 새로운 동아시아적 근대에 의해 대체되었으며, 동아시아적 근대의 불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1920년대의 베이징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전통과 현대가 더불어 숨쉬고 있는 '두 개의 중국'과 직면하는 공간이자, 중국적 근대를 사유함으로써 단선적인 근대관을 벗어나 서구/일본적 근대와 구별되는 주체적인 조선적 근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공간이었다. 1920년대에 조선 민족지 언론인들은 중국 내전과 혁명을 보도하기 위해 직접 현장에 뛰어든 근본적인 원인은 외신을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인 '조선적 시각'으로 현대 중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혁명의 추이를 날카롭게 주목했는데 중국혁명이 동아시아 공동의 변혁과 식민지 조선의 해방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와 동시에 이동곡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서구/일본 등 근대의 타자라는 참고체계를 중국으로 바꿈으로서 후진국 근대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중국적 근대을 통해 모색하고자 하였다. 중국적 근대를 이해하고 해독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전통에 타협하지 않으면서 서구/일본적 근대를 모방하는 몰주체적인 근대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이러한 문제 의식과 사유는 중국을 단순한 인식의 대상이 아닌, 평등한 눈높이에서 '방법' 또는 '참조 대상'으로 삼는다는 '인터-아시아' 시각의 소산이었다. 결론으로 첫째, 1920년대는 조선 지식인들이 근대 이후 유례없는 폭넓고 다층적인 중국 인식의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던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주, 상하이, 베이징 등 지역이 지니는 상이한 역사적 장소성은 1920년대 조선 지식인의 다층적 중국 인식을 형성하게 한 중요한 외부적 요인이었다. 둘째, 3.1운동 실패 이후 사회진화론·계급투쟁론·상호부조론 등 다양한 사상이 혼재된 1920년대 조선 지식계의 사상적 지형은 동시기 다층적인 중국 인식을 형성하게 한 내부적 요인이었다. 셋째, 1920년대 조선 지식인의 중국 인식과 동아시아 인식은 정세 등 외부적 환경에 따라 상당히 가변적·유동적 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은 조선의 민족 독립을 희구하는 차원에서 식민지 민족의 자기 관심의 반영으로 중국과 동아시아를 조명한 결과였다. 넷째, 1920년대 조선 지식인의 중국 인식에 대한 고찰을 통해 당시 조선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데 일본적 근대, 서구적 근대, 동아시아적 근대, 조선적 근대 등 상이한 네 가지 경로 선택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중국 담론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문화통치 시기에 식민 당국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맞서는 저항 담론이자, 근대에 대한 비판 담론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조선 지식인들이 현대 중국에 대한 성찰과 근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대중적 확산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늘날 이러한 망각된 사상적 자원에 대한 발굴이야말로 조선 근대 지식인들의 사상적 유산이 지니는 현재적·실천적인 가치가 될 것이다.

      • 1920년대 중국 신문학의 여성 문학장 연구

        洪成花 고려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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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중국은 여성들이 역사의 지표 위로 그 형상을 처음 드러냈던 시기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중국 사회와 문화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여성의 변화, 즉 여성들의 근대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5·4시기 여성 해방 담론에서 정작 당사자인 여성은 담론의 타자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기존의 남성적 문화구조 내에서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의 변화야말로 시대의 변화를 예증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여성 해방은 근대화의 역정 속에서 분명히 하나의 도덕적 지침이자, 일상을 재조직하기 위한 구호가 되었다. 신문학 시기 신여성의 등장 그 자체는 근대적 사회 변동의 산물일 뿐 아니라, 당대 사회 제도와 문물의 변화를 둘러싼 담론의 중심에 놓여져 있었다. 1920년대 여성 작가들의 창작에서는 근대적 의미를 지닌 여성 개체가 점차 생성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5·4 시기 여성 작가들은 근대 의식을 가진 1세대 여성 작가이며, 5·4시대에 역사 무대에 등장하여 여성의 목소리를 내고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더불어 사회·정치·경제·문화의 대전환 시대에 직면하여 여성의 과거·현재·미래의 상태에 대해 상상을 하였다. 여성 작가들의 상상과 그 방식은 분명히 시대·사회·정치 등 요소의 영향을 받았기에, 다채롭고 다양한 여성 세대가 나타났다. 1920년대 여성 작가의 글쓰기는 현대 여성의 글쓰기 시대의 ‘유년기’라고 할 만하며, 현대적 삶의 원초적 형태를 제시하고, 여성 개인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본 논문은 신문화운동이 중국 근대 여성의 삶에 미친 파장을 추적하고, 중국 신문학장 내에서 신여성이 1세대 여성 작가로 등단할 수 있었던 계기를 고찰하고자 했다. 중국 여성 문학 연구자 멍위에(孟悅)와 다이진화(戴錦華)에 따르면“5·4시기 중국의 1세대 여성 작가들은 젠더의 문화 대변인으로서, 공교롭게도 문화의 파열로 인하여 언어, 청중과 더불어 토론장을 획득했다는 사실은 중국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여성 작가들이 왜 단체로 역사의 지표 위로 떠오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연구를 신문학 여성 문학장의 틀 안에서 살펴보고자 했다. 본 논문의 연구 범위는 1920년대에 등단하여 많은 주목을 받은 여성 작가와 그 창작에 관한 것으로, 주로 천헝저, 빙신, 루인, 펑위안쥔, 링수화, 쑤쉐린, 스핑메이, 딩링 등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1920년대 전반 문학장에서 이 집단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살펴보고, 이들 작품의 가치와 중국 현대 문학사에서의 위상을 가늠해 보고자 했다. 본론의 내용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Ⅱ장에서는‘신여성’의 태동과 출현이라는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발생학적인 관점에서 신여성을 분석하고, 1920년대 중국 여성 문학을 형성한 역사적·문화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자 했다. 1920년대 여성 작가에 있어서 중국 여성의 역사와 현황은 이들 담론의 출발점이자 본 논문의 배경이기도 하다. 비록 신문화운동으로 중국 지식인 여성들이 남성 지식인의 담론권을 공유하게 되었지만, 상당 기간 여성들은 진정한 자기 명명권을 얻지 못했다. 따라서 제Ⅲ장에서는 신문학 문단과 여성 담론의 등장을 고찰의 중점으로 삼고, 1세대 여성 작가들의 신문학 문단에서 현대 여성 문학장을 구축해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했다. 제Ⅳ장에서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젠더 서사의 분석을 통한 젠더의식의 구축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했다. 따라서 근대 젠더의식 및 젠더담론의 수립 과정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근대 여성 작가의 젠더서사와 젠더의식이 어떻게 구축되어 가며, 어떤 한계점에 봉착했는지에 대해 탐색하고자 했다. 제Ⅴ장에서는 1920년대 여성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다루었던 가정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일부 급진적인 여성 작가는 가정에서 여성 주체가 어떻게 효과적으로 구축되었는지에 대한 탐구가 드러나지 않고 서사적으로 가정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동시에 비주류의 여성 작가들, 즉 가족에 대해 이성적으로 사고한 부류들도 있다. 본 장에서는 더 나아가 신여성의 새로운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탐색하고자 했다.

      • 노가미 야에코(野上彌生子) 「마치코(眞知子)」론 : 1920년대 일본 여성 지식인들의 '가족(家) 제도'와 '프롤레타리아 사상'의 한계성을 중심으로

        김영란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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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作品「真知子」は、イギリスの女流作家ジェーン·オースティンの代表作「傲慢と偏見」をモデルにして執筆された作品で、オースティンの‘リアリズム’に影響を受け、大正デモクラシー期の1920年代、当時の日本の女性知識人たちが経験した日本社会の矛盾や限界性を作品の中で、それぞれの人物たちに生き生きと形象化させ、主人公とこれらの人物たちとの共存と対立の構図を使って、1920年代の女性知識人の限界を写実的に描写している点が特徴である。したがって、本論文では、この作品を通じて、1920年代当時の日本の女性知識人たちが経験した封建的な'家(イエ)制度'という矛盾を把握すると同時に、彼らにとって、当時流行していた'プロレタリア思想'とはどのような意味だったのかを総合的に分析し、加えて教養主義の作家弥生子特有の視線を通し、その克服の過程も一緒に見てみたい。 第1章では、'母、姉の夫の山瀬、兄'の人物を通して、1920年代まだ残っていた封建的な'家(イエ)制度'の矛盾を把握し、さらにこのような'制度'という枠組みで、1920年代、新たに登場した日本の女性知識人の限界を分析してみた。第2章では、'倉子婦人と娘の富美子、米子'の人物を通して'階級'の限界を振り返ってみた。特に本論文で注目した点は、'遺産階級'社会で主に行われるガーデンパーティーや音楽会、慈善会の真知子自分の'受動的空間移動'と、'無産階級'である米子の家、セツルメント活動地域などの真知子自分の'能動的空間移動'の対立にあった。これによって、真知子自身の'脱階級'の意志を見ることができた。第3章では、1920年代の日本の知識人の青年たち、特に女性知識人たちにとって、当時盛んに流行していたプロレタリア運動の意味は何だったのかを、主人公真知子と社会主義思想家関の結婚と別れの過程を通して分析した。特に本論文では、主人公の真知子が関の'外見'や'言葉'によって、徐々に彼に好奇心を持ち始めたこと、また、どのような'意識せずに歳月を過ごすことの無為と空虚'の恐怖に現在の東京帝国大学で'社会学'を専攻しているという点に着目し、1920年代当時の日本の女性知識人たちにとって、プロレタリア運動とは、結果的に一種の'手段'として作用してい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最後に、関との愛が失敗に終わり、北海道の姉みね子夫婦の家で偶然と出会った河井との打ち解けた会話を通して彼に'人間としての誠実さ'を感じさせるのに、このような結末を通して真知子自身が最終的には'階級'、'思想、理念'という問題から派生している'偏見'を壊した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た。 さらに、作品「真知子」を通して作家弥生子が、'個人の幸福'と'ロマンチックな結婚'を夢見る真知子自身がいくつかの限界のにもかかわらず、作品全体での ‘死より生’ を選ぶようにすることで、その肯定的に克服する方法を適切に実践していることを知ることができた。本論文では、作品「真知子」を通して大正デモクラシー期の1920年代の日本の女性知識人たちが経験した封建的な'家(イエ)制度、階級、思想、理念'の限界を取扱うと同時に、このような教養主義の作家弥生子の肯定的な生活の方法に基づいて、その克服の過程を中心に作品を分析してみた。さらに、本論文をきっかけに、今後の国内での野上弥生子の研究の基礎を固めることを期待してみる。 작품 「마치코」는 영국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을 모델로 하여 집필된 작품으로, 오스틴의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아 다이쇼 데모크라시기의 1920년대 당시 일본 여성 지식인들이 겪는 일본사회의 모순점과 한계점을 작품 속에서 각각의 인물들로 생생하게 형상화시키며, 주인공과 이러한 인물들과의 공존 및 대립구도를 통해 1920년대 여성 지식인들의 한계를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 작품을 통해 1920년대 당시 일본 여성 지식인들이 겪었던 봉건적 ‘가족(家) 제도’라는 모순을 파헤침과 동시에 그들에게 있어서 당시 유행하던 ‘프롤레타리아 사상’ 이란 어떤 의미였는가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더불어 교양주의 작가 야에코 특유의 시선을 통한 그 극복 과정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제1장에서는 ‘어머니, 형부 야마세, 큰 오빠’의 인물들을 통해 1920년대 여전히 잔재하던 봉건적 ‘가족(家) 제도’의 모순을 파악하고 나아가 이러한 ‘제도’라는 틀에서 1920년대 새롭게 등장한 일본 여성 지식인들의 한계를 분석해보았다. 제2장에서는 ‘쿠라코 부인 모녀, 요네코’의 인물들을 통해 ‘계급’의 한계를 되짚어보았다. 특히 본 논문에서 주목했던 점은, ‘유산계급’ 사회에서 주로 열리는 가든파티나 음악회, 자선회에 대한 마치코 자신의 ‘피동적 공간이동’과, ‘무산계급’인 요네코의 집, 세틀먼트 활동 지역 등에 대한 마치코 자신의 ‘능동적 공간이동’의 대립에 있었다. 이것을 통해, 마치코 자신의 ‘탈계급’에 대한 의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제3장에서는 1920년대의 일본 지식인 청년들 특히 여성 지식인들에 있어서 당시 한창 유행하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주인공 마치코와 사회주의 사상가 세키의 결혼과 이별의 과정을 통해 분석해보았다. 특히 본 논문에서는, 주인공 마치코가 세키의 ‘외모’나 ‘말’에 의해 점차 그에게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과 또 어떤 ‘의식 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의 무위와 공허’에 대한 두려움으로 현재 동경제국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1920년대 당시 일본 여성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란 결과적으로 일종의 ‘수단’으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마지막으로, 세키와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고 홋카이도의 언니 미네코 부부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가와이와의 허물없는 대화를 통해 그에게 ‘인간으로서의 진실함(人間としての真実)’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결말을 통해 마치코 자신이 결국에는 ‘계급’, ‘사상, 이념’이라는 문제로부터 파생되는 ‘편견’을 깨트렸음을 알 수 있었다. 나아가 작품 「마치코」를 통해 작가 야에코가, ‘개인의 행복’과 ‘로맨틱한 결혼’을 꿈꾸는 마치코 자신이 여러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에서 ‘죽음보다는 삶’을 택하게 하는 것으로 그 긍정적 극복 방법을 적절하게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작품 「마치코」를 통해 다이쇼 데모크라시기 1920년대 일본 여성 지식인들이 겪어야 했던 봉건적 ‘가족(家) 제도, 계급, 사상, 이념’의 한계들을 다룸과 동시에, 이처럼 교양주의 작가 야에코의 긍정적 삶의 방식에 기반하는 그 극복 과정을 중심적으로 작품을 분석해보았다. 나아가 본 논문을 계기로, 앞으로의 국내에서의 노가미 야에코 연구의 초석을 다지는 것을 기대해 본다.

      • 『동아일보』를 통해 본 1920년대 중국의 배일운동

        전혜영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2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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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동아일보』 기사를 바탕으로 192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배일운동의 시기별 특징을 정리하고 『동아일보』의 보도 태도 및 인식을 분석하였다. 1920년대의 중국 배일운동은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정세와 국내 상황으로 인해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동아일보』의 기사 및 사설을 통해 1920년대 중국의 배일운동이 가지는 특징과 함의가 국내외적 상황에 따라 시기별로 다르게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초반의 배일운동은 산동문제 해결을 주장하며 촉발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회를 개조⋅계몽하여 사회 전반의 모순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문화운동의 성격으로 확대되어 갔다. 배일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전국학생연합회, 상해학생연합회와 같은 학생단체로 지식인 계층이었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침략적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중국 사회에 점차 확산되어 갔다. 1921년∼22년에 열린 워싱턴 회의로 산동문제가 해결되자 중국 배일운동은 21개조 조약을 폐기하려는 움직임으로 집중되었다. 1924년에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1924∼27년의 배일운동은 반제국주의 운동의 성격을 띠었으며, 반제국주의 일반에 대한 이권회수운동으로 질적 변화를 보였다. 이권회수운동은 여순⋅대련 회수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로 확장되었으며, 그 대상 또한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전반으로 넓어졌다. 노동운동 또한 활발해졌다. 5⋅30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은 반제국주의 운동의 성격을 띠며 전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본격적인 북벌이 진행되자 중국 중남부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배일운동이 완화되는 추세를 보였던 반면 북중국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만몽정책으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이 계속되고 있던 만주 지역에서는 관의 주도로 일본 화폐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 관 주도적 배일운동의 성격은 1920년대 후반이 되면 더욱 뚜렷해진다. 4⋅12쿠데타 이후, 1920년대 후반에 일어난 배일운동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 의미와 함께 당파적이며, 관 주도적 성격을 가졌다. 북벌군의 전선이 산동지역으로 확대되자 일본군은 만몽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산동으로 출병하였다. 1⋅2차 산동출병과 동방회의 개최는 중국인들의 배일 감정을 고조시켰으며, 제남사건으로 배일의 열기는 폭발하였다. 4⋅12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배일운동을 통제하려 하였다. 그것은 봉천파 장작림도 마찬가지였으며, 이 시기 공산당 및 소련 또한 민중운동의 헤게모니 장악과 일본 세력 견제를 위해 배일운동을 지원하였다. 『동아일보』의 중국 기사는 일본 통신사의 보도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특정 기사 또는 사설 및 기획연재를 통해 『동아일보』만의 보도 태도나 인식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의 중국 배일운동 보도는 1920년대 전 시기에 걸쳐 만주 지역에서의 배일운동 기사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 만주는 조선에서 이주해 간 재만 조선인들의 터전이었으며, 경제적으로 조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언론의 입장에서는 주요 관심 지역이었다. 1920년대 초반의 글 중에는 ‘문화’와 ‘평화’를 앞세워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중국인들의 과격한 배일운동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 내용이 많다. 즉, 일본을 ‘동문동종’과 ‘공존공영’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격렬하게 일어나는 중국 배일운동을 동양평화에 이롭지 못한 움직임이라고 보았다. 이는 이 시기 『동아일보』 집필진이 식민지인이면서도 제국주의적 인식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1924년 이후가 되면 사회적 분위기, 필진의 변화로 인해 이러한 인식에 변화가 생긴다. 이 시기 『동아일보』의 집필진은 배일운동을 대체로 각성한 민중에 의한 애국적이고 반제국주의적 운동으로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가 되면 ‘동문동종’과 ‘공존공영’이라는 인식 그 자체를 부정하고, 제국주의에 대항한 반제국주의의 동맹과 연대에서 민족 운동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4⋅12쿠데타 이후 중국 배일운동은 국민정부나 봉천파에 의해 통제되는 경향을 보였지만, 『동아일보』 필진은 배일운동에서 드러난 민중의 힘과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당시 중국의 배일운동으로 인해 만주의 동포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민중을 친선 및 연대의 대상으로 인식하였다. 민중운동에 대한 기대 그리고 중국 및 피압박 민족의 반제국주의 연대에 대한 『동아일보』의 인식은 중국이 통일을 완수한 1928년까지 유지되었다.

      • 1920년대 동인지 문학 연구 : 『창조』, 『폐허』, 『백조』를 중심으로

        진설아 중앙대학교 2005 국내석사

        RANK : 247727

        1920년대는 3.1 운동과 문화운동 시대의 개막으로 인하여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과 함께 시작하였다. 이 때, 창조(創造), 폐허(廢墟), 백조(白潮)는 ‘예술’과 ‘미’라는 초월적인 가치를 선택하며 1920년대 문단에 등장한다. 그리고 정체성 확립에 대한 요구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동인지 문학은 ‘배제’와 ‘부정’이라는 수단으로 자신들 문학의 성격을 설명하고자 한다. 동인들의 일본 체험과 새로운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1920년대의 상황은 동인지 문학의 근대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동인지 문학이 갖고 있는 근대에의 욕망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극단적으로 분리된 형태로 존재한다. 물질적인 형태의 근대는 식민지 현실로부터 주어진 까닭에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이에 동인지 문학에 있어 근대란 오직 정신적인 것으로만 이해 가능하다. 결국 이와 같은 모순된 욕망에 대한 추구는 환상(幻想)과 이상(理想)의 전도 현상을 불러온다.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비참한 현실의 상황은 이들에게 현실을 잊게 만들었으며 환상으로 현실을 대체하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상(理想)과 환상(幻想)의 경계에서 동인지 문학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의 상황에 대한 대응 양상에서 동인지 문학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동인지 문학이 끊임없이 초월의 가치를 얻기 위해 싸우는 과정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다. 실현 불가능한 것과의 끊임없는 투쟁 안에서 비로소 비극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환상과의 싸움을 그치지 않는 동인지 문학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의 ‘사람’으로서의 면모와 ‘비극’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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