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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後期 面里任의 役割과 地位

        박이정 慶星大學校 敎育大學院 2003 국내석사

        RANK : 247807

        조선후기 面里制나 面里운영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 초부터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조선후기 면리운영의 담당자였던 面里任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그것도 대개는 조선후기 면리제나 향촌사회 권력구조변동 등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부수적으로 면리운영의 담당자인 면리임에 대해 언급한 정도였다. 그 결과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의 면리임의 위상이 보다 종합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못하였다. 특히 선행연구들의 대상 시기가 17세기나 18세기, 또는 19세기에 한정되어 조선후기 守令의 향촌통제 첨병이었고, 面里운영의 담당자이자 賦稅운영의 말단 책임자였던 면리임에 대한 좀 더 총체적인 이해와 정리가 필요로 하였다. 따라서 본고는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먼저 조선후기 면리임이 어떠한 명칭으로 불리워졌으며, 향촌내에서 담당하였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으로 어느 계층이 면리임직을 수행하였고, 이들이 부세운영을 중심으로 한 향촌운영을 통해 수령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또 民과 在地兩班層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파악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향촌내에서의 면리임이 차지하는 위치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먼저 조선후기 面里의 새로운 지역적 편제의 진행과 함께 그 명칭과 직능은 더욱 다양화 · 세분화되어, 17세기 「五家統事目」에서 보이는 都尹 · 副尹이외에 風憲 · 約正 · 勸農 · 有司 · 尊位 · 里正 · 都將 · 譏察將 등 다양한 명칭의 직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명칭들은 지역적으로 다양한 편차와 함께 명칭간의 혼용현상을 보였는데, 이는 새로운 면리편제의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후 점차 확실해져 가게 된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면임 · 이임이라는 명칭을 그 자체로 쓰는 곳도 많았다. 명칭의 다양성과 함께 면리임의 역할도 다양화 · 체계화되어 갔는데, 官令전달 · 戶口파악 · 租稅의 분급과 징수 등 제반 행정적인 역할뿐 아니라, 농민의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勸農과 생산수단의 관리기능, 그리고 재지세력을 견제하고 장악하기 위한 鄕風敎化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기초적인 裁決權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면리임의 역할은 19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민정보고와 관령전달 그리고 부세수취 등 행정적인 쪽으로 한정되어 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면리임직이 점차 평 · 천민의 직임으로 고정화되어 간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면리임층은 향촌의 부세운영을 담당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노정시키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田政에서의 隱漏結의 발생, 實結의 확정과 結價算定과정에서의 작폐, 養戶 · 防結, 그리고 閑丁代定시 수뢰행위와 그로 인한 闕額 · 加徵 · 勒徵, 還穀분급과정에 있어서 작간에 의한 책환과 逋欠, 民庫田 등 잡역세운영에 있어 작폐 등으로, 이는 黃口 · 白骨 · 族徵 · 隣徵을 야기시켜 民들의 몰락을 초래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 전시기에 걸쳐 면리제를 통한 지방지배정책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중 하나는 재지양반층을 면리기구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양반층은 면리임이 중앙권력의 대행자인 수령의 감독과 침책을 받는 입장이었고, 직능도 일반민의 직역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班常간의 차별론을 내세워 면리임에의 임용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양반층의 謀避로 인해 대개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면리임은 '양민중 부유한 자' 즉 饒戶富民 중에서 담당하여 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이러한 면리임직을 통해 役을 모피하고 나아가 수령권과의 결탁을 통해 자기 성장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에 이르면 면리임직은 거의 모두 이들 서민계층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면리임 특히 면임은 수령에 의해 차임되는 官任的 존재였지만, 수령과의 관계로 볼 때 이들은 관임으로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면리임은 주로 수령의 지시를 받아 各里를 감독하고 조세수취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수령에게 직접 부림을 당하는 下手人的인 지위에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수령과 유착관계를 맺지 못한 경우 오히려 침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면리임의 지위는 지역에 따라 특히 재지양반층의 세력정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양반층이 별로 없었던 北關 등의 지방에서는 風憲이 道를 論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양반토호세력이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던 호서지방 등에서는 閑丁에서 빠진 자가 향소나 양반가에 투탁해 있는데도 면임과 관리가 감히 두려워해 색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특히 18세기 말 19세기 단계에 있어 면리임이 향촌사회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역시 이 시기 새로운 계층에 의해 장악되어 간 鄕所(鄕任)와 함께 수령과 吏 · 鄕층 중심의 수탈구조의 하부주체로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 면리임이 담당하였던 역할과 지위에 대해 간략히 고찰하였다. 그런데 향촌운영의 실태는 면리임만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留鄕所(鄕任)나 鄕吏와의 관계, 더불어 지역에 따라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在地兩班층과의 관계가 특히 부세운영과 관련시킬 때 보다 천착이 요구된다. 그것을 통해 부세운영상에 있어 면리임의 역할과 향촌사회에서의 지위가 보다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조선후기 면리임의 역할과 지위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보다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역 사례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 같다. 본고는 그렇지 못한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에 조선후기 면리임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하나의 경향성만을 파악하는데 그쳤다. Myun Lee Im(面里任) was diversified and fractionized with progress of reorganization of the Myun Lee(面里) in the late Chosun Dynasty. It had kept not only the various administrative role of a messenger, a census, the tax collection and so on, but also had played the role of encouragement of agriculture, the control of productive means and the enlightenment of public moral, and had preserved a fundamental authority to decide. The role of Myun Lee Im, but, is likely to be limited gradually to the administrative part, and it is considered that the position of Myun Lee Im would have a relation with the fact that it was becoming, little by little, as a post of the common people and the lower people. It seems that the riches among law-abiding citizens(良民) was generally in charge of the position of Myun Lee Im from the middle of 18th century, because of an artifice of Yangban Class(兩班層). They attempted to shirk their services through Myun Lee Im and moreover they tried to plan their own growth through the collusion with the chief magistrates. Myun Lee Im, specially Myun Im(面任) was an official being which was nominated by the chief magistrate, but when seeing with relationship with the chief magistrates, they had a somewhat limited power as an official being. Myun Lee Im mostly had received the instruction of the chief magistrate, had controlled each Lee(里) and had taken charge of taxes receiving. Therefore they was a kind of subordinate whom the chief magistrates directly employed. Specially, if they did not enter into a relation with a chief magistrate, they rather had become the target of pillage. There was also a difference little by little in a position of the Myun Lee Im according to the area, specially according to the degree of the power of Yangban Class. Nevertheless the position of Myun Lee Im at the local societies in Chosun Dynasty, in particular in the later of 18th century and the 19th century, could be considered as a sub-subject of plundering structure in which a chief magistrate and li-Hyang(吏-鄕) Group were a leader.

      • 조선의 상속관행에 관한 연구 : 17~18세기 삼남지방 분재기 사례를 중심으로

        배상훈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박사

        RANK : 247807

        이 논문은, 선행 상속연구의 두 관점(국내의 사회문화이론과 서구의 경제요인이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새로운 이론틀을 설정한 후, 17-18세기 분재기 사례를 통해 조선 후기 상속관행의 본질과 후기 사회의 특성에 대해 살펴본 연구이다. 이 연구의 최초 문제제기는 17-18세기 분재기 사례에 나타나는 ‘분할상속의 지속’이다. 즉 기존 연구의 주장들과는 다르게 조선 후기에도 장자상속으로의 변화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오히려 많은 경우 분할상속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기존 사회문화요인 연구가 후기 ‘분할상속의 지속’을 설명하는데 미흡한 면이 있다고 보고 이 이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후, 이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력을 가질 수 있는 서구의 경제요인 이론을 비판적으로 도입하여, 상속관행의 변화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구성했다. 이를 위해 경제요인이론의 대표적인 지표를 기술수준(技術水準), 농업집약도(農業集約度)로 설정하고 적합한 가설을 세운 후 비교문화사례연구의 기초 통계자료를 통해 그 타당성을 검증했다. 즉 구조에서 찾아진 상관관계를 통해 이론적 가설을 수립하고 이를 통해 조선 후기 상속관행 변천에 대한 적용가능성을 모색해 보았다. 이와 같은 적용가능성을 통해 조선 후기 상속관행이 인류사적 보편성과 어떤 지점에서 접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고, 그에 따른 결과로서 조선 후기의 상황적 특수성을, 구조주의에서 유래한 ‘중층성’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탈진화론적인 관점과 탈합리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이런 연구 방향 즉 ‘사실의 제시’가 아닌 ‘구조와 인과성을 지향’하는 연구가 새롭게 시도되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인 학자와 김두헌 등에 의한 몇몇 연구를 보면, 이러한 전망이 선도적으로 제시되어있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진화론적인 도식에 얽매여, 사실을 이론에 종속시키는 우를 범했다. 또한 해방이후 이러한 오류를 극복하고자 했던 한국의 학자들도 또 다른 극단 즉 실증주의와 민족주의에 빠져버렸다. 이후 분재기를 통한 상속연구가 도입되어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되었기는 했지만 여전히 실증주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현재 상속연구의 모습은 몇몇 시도들이 중간 시기 이루어졌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과학적인 총체적 전망이 부재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진화론과 합리주의, 실증주의를 모두 비판·극복하고자 하는 기획으로 구조적 중층성과 19세기 분기론(중국중심론)을 도입했다. 또한 자료적인 측면에서 (문숙자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하여) 지금까지 발견된 거의 모든 분재기를 분석했으며 여기에 더하여 관련된 문집, 일기류, 실록 등을 인용했다. 아울러 보편적인 상속을 살펴보기 위해 인류학자 머덕과 화이트의 민족지자료를 통계에 활용했다. 이 연구의 또 다른 의미는, 상속관행의 변화와 관련된 조선 후기의 사회 성격을 ‘인벌루션(involution)’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설명한 점이다. 이 개념은 경제사학자들에 의해 자본주의 원시적 축적 혹은 원공업화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지만, 노동집약적 경영형태가 매개하는 (사후분재에서) 생전분재로의 변화 현상을 비교적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개념은 ‘소농사회’에 비판과 아울러 조선 후기 사회가 어떤 형태의 변화전망을 가지는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직까지 이 개념은 엄밀한 사례 검토와 실증 그리고 이론적 완성도가 부족하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보다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는 조선 후기 상속관행을 보다 총체적이고 사회구조적인 관점에서 살펴봄으로써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진일보된 전망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에는 식민지 근대성과 ‘자본’의 형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설과 전망이 있었다. 즉 상속과 관련된 물적인 사회이동을 고찰하면,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주의 형성·발전을 상속과 관련”시킨 하바쿡의 결론에 비슷하게라도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연구자의 역량을 포함한,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그러한 점은 논문에서 자세하게 논증해 내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본 논문은 일정정도 미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논문의 이러한 기획 의도를 서두에 제시하는 것이 논문의 독해에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 朝鮮中期 樓亭記 硏究

        안세현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박사

        RANK : 247807

        본 논문은 樓亭記의 장르적 특성을 고려하여 분석 방법을 모색하고, 한국 누정기의 역사적 전개 양상 속에서 조선중기 누정기가 지니는 주제의식, 서술방식, 문체의 특성을 구명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한 예비 작업으로 먼저 누정기의 장르적 특성을 규정하고 누정기에 나타난 공간 인식과 서술 방식을 분석 시 고려할 점으로 제시하였다. 다음으로는 신라 최치원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누정기의 시대별 창작 양상을 (1)신라 최치원~고려후기, (2)15~16세기 중반의 두 시기로 나누어 개괄하였다. 조선중기 누정기의 전개 양상은 李山海(1539-1609), 崔岦(1539-1612), 柳夢寅(1559-1623), 許筠(1569-1618), 任叔英(1576-1623), 張維(1587-1638), 李植(1584-1647) 7인을 선정하여, 주제의식과 서술방식 및 문체의 측면에서 작품 양상을 살펴보았다. 7인은 文才가 뛰어난 문장가라는 점, 조선중기 누정기의 특성을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 조선중기 내에서 선조 연간, 광해군 연간, 인조 연간을 대표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선정한 것이었다. 이산해는 산수 경물을 정치적 좌절에서 오는 우수를 해소하고 극복하는 방편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성리학적 자연인식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표현적 측면에서 이산해 누정기의 특징은 산수유기에서 보는 것과 같은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경물 묘사에 있었다. 최립의 누정기에는 玩物喪志에 대한 경계를 보이면서도, 심미 주체의 자유로운 산수 경물의 감수를 허용하는 일견 모순된 태도가 나타났다. 서술방식에서 최립 누정기의 가장 큰 특징은 누정의 이름과 관련된 의론이 주류를 이루며, 의론의 방식이 문답 구조를 통해 논쟁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이었다. 유몽인 누정기는 기문 청탁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풍유를 통한 권면의 방식으로 당대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독특한 주제의식을 보여주었다. 또한 유몽인은 누정기의 창작에 『장자』를 비롯한 諸子書의 사유와 구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압운을 하거나 고사를 다용하며 변려문과 같은 행문을 보여주는 등 형식적으로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였다. 허균의 누정기에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을 상당히 직접적이고 강개하게 드러나 있었다. 서술방식에서 건물 주인과 허균 자신과의 경험을 삽입하거나 신이한 인물과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소설적 필치로 서술한 점은 주목할 만하였다. 임숙영의 누정기에서는 귀래자를 보내는 안타까운 심정을 증서류 산문과 같이 강개한 구법을 볼 수 있었다.또한 임숙영은 누정기에서 『장자』의 역설적 사유를 가져와 현실을 비판하거나 『포박자』의 문체를 차용하여 독특한 구법을 구사한 것은 특기할 만하였다. 장유는 정치적 동류 집단의 거소에 붙인 누정기에서 동지들을 위로하며 陰陽의 待對原理에 입각하여 『주역』의 순환론적 우주관을 『장자』와 사상적․논리적 충돌 없이 결합시킨 점이 특이하였다. 또한 장유는 우언적 성격을 보여주는 「신명사기」와 「신루기」를 남겼는데, 「신명사기」는 조선전기 일련의 心性 寓言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특히 15세기 南孝溫의 「屋賦」에서 영향 받은 바가 컸다. 「신루기」는 『장자』에 연원을 둔 상대주의적 사유를 보여준다는 점, 議論 위주의 서술을 전개한다는 점, 『장자』 「제물론」의 구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에 지어진 여타 문인들의 「신루기」와 달랐다. 이식은 주자학적 이념의 철저한 실천을 강조한 문인답게 누정기에서도 성리학적 의식을 강하게 보여주었는데, 『노자』나 『장자』 등 諸子書의 구절이나 고사를 가져다 쓰는 조선중기 누정기의 일반적인 경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서술방식과 문체에서 이식 누정기만의 특징은 史傳體 형식을 본뜬 인물 기사와 간결하면서도 치밀한 구성에 있었다.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조선중기 누정기의 특성을 공간․자연 인식, 주제 의식, 서술방식, 문체의 방면에서 정리하였다. 먼저 조선중기 누정기에는 정치현실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누정을 세속과 격절된 개인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누정에 대한 공간 인식의 변화는 자연 인식의 변화를 수반하였다. 玩物喪志에 대한 경계가 전대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며, 특히 장자적 자연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주제의식적 측면에서 조선중기 누정기의 특징은 불우한 처지에서 오는 우수를 표출하거나 당대 현실을 비판하는 경향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조선중기 누정기에 나타난 불우의식은 주로 붕당의 대립이라는 당대의 정치 구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선중기 누정기에 나타난 불우의식이나 불만의 표출 양상을 크게 네 가지로 나타났다. 중앙 정계인 세속과 자신의 거처 공간을 대립으로 설정하여 전자를 부정한 곳으로 후자를 평안한 곳으로 보며 자위하는 경우, 『주역』의 순환론적 세계관을 통해 현재의 암울한 상황이 극에 달하면 좋은 때가 올 것이라며 위로하는 경우, 중앙 정계나 당대 현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며 강한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경우, 인생 자체를 무상한 것으로 보아 현실적 우수와 불만을 초극하려는 경우가 그것이었다. 서술방식에서 조선중기 누정기는 전반적으로 의론이 확대되었고 문답법을 활용한 논쟁적 의론이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조선중기에 들어 누정기 내부에서 다양한 변화가 시도되었는데, 문답법을 활용한 논쟁적 의론의 확대는 서술방식에서 누정기의 변화를 모색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조선중기에 들어 붕당의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정치적 반대파의 비판에 대한 방어기제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누정기에서는 문답법을 활용한 논쟁적 의론이 그 방법의 하나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조선중기 누정기가 보여주는 형식적 변화의 모색과 다양한 기법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첫째는 조선중기 누정기에는 산수유기의 산수 경물 묘사 방식, 낙척자에게 주는 증서류 산문에 쓰이는 강개한 구법, 인사잡기나 소설에 주로 사용되는 사건 중심의 기사, 史傳體 형식의 인물 기사 등, 여타 장르의 문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둘째는 押韻을 하고 四六騈麗文과 비슷한 行文을 보이며, 『포박자』 「行品」편의 구법을 차용하는 등, 구법의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 경우였다. 셋째는 당송고문 이외에 『논어』, 『맹자』, 『장자』 등 先秦古文 텍스트의 사유와 구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문체에 변화를 준 점이었다. 특히 조선중기 누정기에 보이는 『장자』 유행의 배경으로 선조가 『장자』를 酷好했다는 점, 『장자』가 科文 창작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 등을 제시하여, 조선중기 산문에서 『장자』의 수용이 반드시 외재적 요인에 의해서만 활성화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중기 누정기에 빈번하게 보이는 『주역』과 『장자』 활용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먼저 광해군 연간에 지어진 누정기에서 『주역』을 빈번하게 인용한 것은 정치적으로 좌절된 처지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주역』을 통해 위로받는 한편 삶의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 의식의 반영으로 이해하였다. 다음으로 조선중기 누정기에서 『장자』가 불우함에서 오는 우수를 해소하거나 사회에 대한 비판에 활용되었다는 것은, 『장자』가 문학 학습을 위한 텍스트로 활용되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를 통해 당대의 문인들이 『장자』가 담지하고 있는 사유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본 논문은 한문산문의 분석 방법을 정립하고 한국산문사의 구도와 변화를 구명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며, 나아가 문화사 연구로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 조선총독부의 급성전염병 예방 대책 변화 - 수인성 전염병을 중심으로

        백선례 한양대학교 대학원 2021 국내박사

        RANK : 247807

        이 논문에서는 일본이 식민지 조선 통치의 정당성 부여에 적극 활용했던 근대 의학, 그 중에서도 급성전염병 예방 대책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급성전염병 중에서도 식민지 조선에서 많이 발생하였던 수인성 전염병에 집중하였으며, 이에 대한 예방대책을 크게 두 가지 줄기, 즉 백신접종과 깨끗한 물의 공급으로 접근하였다. 식민지시기에 두 가지 방법이 어떻게 병행되었고 변화되었는지 추적하고자 하였다. 먼저 예방접종, 백신과 관련해서는 의료 인프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예방접종은 식민지 조선에서 전염병 방역의 주체였던 경찰들이 전문 인력을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검병적 호구조사를 통해 환자를 찾아내고, 환자를 격리시키며 주변의 교통을 차단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백신을 접종할 의료 인력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는 한 총독부 방역당국이 목표로 하는 예방접종 수치를 달성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중반 이후로 예방접종자 숫자가 증가했던 것은 방역 당국이 예방접종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였고, 최대한 의료 인력을 동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역반(防疫班)을 조직하여 예방접종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니거나 도시 내 주요 시설을 접종장소로 활용하는 등의 방식은 상대적으로 의료 인력이 집중되어 있는 도시 지역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여전히 도립병원과 자혜의원, 혹은 한지(限地)의사와 공의(公醫) 등에 의존해야 했던 지역에서는 예방접종 접근성을 높이기 쉽지 않았으며, 전염병 발생에 한발 앞선 예방 대책이 시행되기 어려웠다. 이렇게 식민지 조선의 의료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염병 예방대책에서 점점 예방접종을 강조했던 것은 상하수도 문제, 즉 깨끗한 물의 공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 상수도를 통한 깨끗한 물의 공급이 좀처럼 진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시행할 수 있는 전염병 예방대책은 예방접종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깨끗한 물의 공급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들에서 지적되었듯이 예산의 문제로 상하수도 부설이 예정대로 진척될 수 없었다. 또한 기존에 부설된 상수도 시설의 경우 오래된 시설을 개선하거나 규모를 확장하는 작업이 진행되기도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염병 유행시 발생 원인으로 상수도 시설이 지목되는 경우도 생겼다. 특히 1928년 경성의 장티푸스 유행에서 식민지 조선 최대의 상수도 시설인 경성 수도가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수질을 둘러싼 경성부 당국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사이의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한편, 상하수도 부설의 우선순위가 아닌 지역, 곧 농촌 지역에서는 1930년대 초반 농촌진흥운동의 흐름을 타고 우물 개량 작업이 진행되었다.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 우물 개량 작업이 ‘조성주의’에서 ‘자력갱생주의’로 바뀌면서 주민들의 참여가 강제되었다. 주민들에게 가외 노동을 알선하여 그 돈으로 우물 개선에 필요한 경비를 메꾸게 하고, 실제 우물 개선 작업 또한 주민들의 노동력으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주로 주민들의 노동력에 기대어 진행된 사업이지만 한편으로는 상수도 부설은 꿈도 꾸기 어려운 농촌 지역에서 우물 개조 사업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게 조선총독부의 급성전염병 예방 대책을 백신과 깨끗한 물의 공급 두 가지 방면에서 접근하면서 백신과 상하수도로 대표되는 근대적 의학지식(기술)과 위생시설이 지니는 한계를 살펴볼 수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일차적으로는 당시에 도입된 의학지식과 시설이 불완전하고 불확실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근대적 방역체계의 구축을 강조하였지만 근대적 의학지식과 시설이 그들이 내세운 것만큼 완벽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조선 내에서 끊임없이 급성전염병이 발생하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불완전함과 불확실성은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질 수 있었다. 즉, 불완전한 면이 여전히 존재하더라도 깨끗한 물의 공급과 예방접종은 균형을 맞추어 시행되어야 전염병예방에 좀 더 효과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상수도 시설은 도시지역, 특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우선적으로 부설되었고, 여전히 많은 조선인들은 상수도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전염병예방대책은 예방접종으로 점점 집중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방주사 제일주의는 깨끗한 물의 공급, 즉 상하수도 설비가 정비되지 않는 한 한계가 있었으며 전염병예방의 근본책이 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상하수도 시설 및 예방접종의 시행착오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보다 일본인들이 우선순위가 되었으며, 조선인들은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식민지 조선의 방역체계의 결과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역시 급성전염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This study examined the modern medicine actively used by Japan to legitimize the colonial rule of Joseon, with a focus on the measures taken to prevent acute infectious diseases. Among various acute infectious diseases, the study focused on water-borne infectious diseases that occurred frequently in colonial Joseon, and the preventive measures mostly involved vaccination and the supply of clean water. This study aimed to track how the two methods were simultaneously conducted and how they changed during the colonial period. First, there were limitations due to the unresolved issue of medical infrastructure in regard to vaccination and vaccines. Vaccination was a field in which professional personnel could not be replaced by the police, who were in charge of epidemic prevention and control activities in colonial Joseon. Consequently, the Government-General's quarantine authorities could not meet their vaccination goals, unless sufficient medical personnel could be procured to administer the vaccines. Despite these circumstances, however, the number of vaccinated persons increased after the mid-1930s because the quarantine authorities had devised various methods to increase the accessibility to vaccinations and organize medical personnel. Nevertheless, methods, such as organizing a quarantine team to find people in need of vaccination or using major facilities in the city as a vaccination site were only possible in urban areas where there was a relatively dense population of medical personnel. It was difficult to increase accessibility to vaccinations in areas that still had to rely on provincial hospitals, Korean Medicine doctors, and public doctors. Although the medical infrastructure of colonial Joseon was insufficient, the increasing emphasis on vaccination to prevent infectious diseases was closely related to the water supply and sewage problem, namely, the supply of clean water. In a situation where the supply of clean water through waterworks had not progressed in colonial Joseon, the only preventive measure for infectious diseases tha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ould implement for Koreans was vaccination. As pointed out in previous studies, it was difficult to install water supply and drainage systems as planned due to budgetary issues. Furthermore, it was difficult to improve existing waterworks structures or facilities that were outdated. Under these circumstances, water supply facilities had been identified as the cause of outbreaks of infectious diseases. In particular, during the typhoid epidemic of Gyeongseong in 1928, there was a dispute between the Gyeongseong Ministry of Health and the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Medical School over water quality when Gyeongseong Waterworks, the largest water supply facility in Joseon, was cited as the cause of the outbreak. Meanwhile, well improvement work was being carried out following the Rural Revival Movement in the early 1930s in areas that were not listed as a priority for laying water and sewage systems, namely the rural areas. In particular, since the principle of well improvement work was changed from “building” to “self-renovation” in the mid-1930s, residents were coerced to participate. Overtime, work was arranged for the residents, and the money from this work was used to cover the expenses required to improve the wells. Moreover, the well improvement work was also carried out with the labor of the residents. While this project was primarily implemented by relying on the labor provided by the residents, the well remodeling project was able to achieve practical results in rural areas where it was difficult to even dream of laying water supply. By approaching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s measures to prevent acute infectious diseases from two aspects–vaccines and supply of clean water–it was possible to examine the limitations of modern medical knowledge (technology) and sanitation facilities represented by vaccines and water and sewage systems. The primary aim of this paper was to reveal that the medical knowledge and facilities introduced at the time were incomplete and uncertai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emphasized the establishment of a modern quarantine system; however, since modern medical knowledge and facilities were not as impeccable as they had advertised, acute infectious diseases were still constantly occurring in Joseon. In addition, such imperfections and uncertainties could have been pronounced due to the colonial setting. Specifically, a supply of clean water and vaccination should have been distributed in a balanced manner to effectively prevent infectious diseases despite the imperfections. Nonetheless, in colonial Joseon, waterworks facilities were preferentially installed in urban areas, especially in areas where many Japanese dwelled, and many Koreans thus still could not receive the benefits of waterworks. As a result, preventive measures against infectious diseases in colonial Joseon were increasingly concentrated on vaccination. However, this vaccination-first principle had limitations without the supply of clean water or the maintenance of water and sewage facilities, and it could not be established as a fundamental measure to prevent infectious diseases. Furthermore, in the process of improving water and sewage facilities and vaccinations by trial and error, the Japanese citizens were prioritized over the Koreans, and the Koreans could not actively participate in the discussion process. As a consequence of this quarantine system in colonial Joseon, not only the Koreans but also the Japanese could not be free from acute infectious diseases.

      • 재일조선아동문학 연구 : 서사문학에 나타난 인물 유형 분석을 중심으로

        박종분 춘천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202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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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구는 재일조선아동문학 중 아동소설과 동화의 인물 유형을 분석하여 재일조선인 공동체 의식이 어떻게 아동들에게 계몽·교육되었는가 밝히고 이를 통해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살펴본 연구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의 결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건너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살게 된 사람들이다. 재일조선아동문학은 재일조선인 어른이 조선어로 쓴 아동문학을 말한다. 재일조선아동문학의 시작은 해방 후 재일조선인들이 아동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국어강습소’의 교재에 실린 글들이다. 초기(1945∼1954년)의 글들은 전문작가들이 없어 교육을 목적으로 교원들이 쓴 동요, 동시, 동화, 우화들이었다. 중기(1955∼2000년)에는 아동 잡지들이 창간되면서 질과 양적인 면에서 발전했다. ‘새 세기’(2000년 이후∼)에는 아동들의 체험 세계와 통일 등 주제 면에서도 넓어졌으며 중편소설과 같은 비교적 큰 작품들이 창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일조선아동문학은 조선어로 쓰이는 한계가 있고 일본에서 조선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줄어들고 있어 작가나 독자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연구는 재일조선아동문학 중에서 일본 조선대학교 서정인 교수의 논문에 첨부된 목록을 기초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을 대상으로 하였다. 먼저 대상이 된 작품들을 우리나라와 재일조선인 아동문학가들의 분류를 포괄할 수 있는 ‘환상성’을 기준으로 동화와 아동소설로 분류하였다. 인물 유형 분석에서는 동화와 아동소설에 나타난 공간과 인물의 역할을 고찰하여 특수한 사회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이 그들의 공동체 의식을 작품 속 인물을 통해 아동들에게 어떻게 계몽하고 교육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동화에서는 ‘환상’과 ‘환상 ⇌현실’의 공간으로 나누어 인물 유형을 알아보았다. 환상의 세계에서는 자기 확신과 자신감이 없는 인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어려움을 함께 이겨나가는 재일조선인 공동체의 이념을 실현한 인물형과 주변의 도움으로 시련을 극복하여 자기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자기가 원하던 삶을 찾는 충족형 인물 유형이 있었다. 또한, 재일조선인 공동체가 중요시하는 협동과 배려를 실천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하다가 곤란을 겪게 되는 자기 중심형 인물 유형을 보여주어 아동들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세계에서는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세우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가치 대변형과 자기 잘못을 통해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 상황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고 뉘우치는 경험 성찰형 인물 유형이 있었다. 아동소설에서는 가정과 조선학교로 공간을 나누어 인물 유형을 고찰하였다. 가정에서는 조부모와 부모가 살아온 역사를 긍정하고 따르며 조선사람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가치 수용형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행동하다가 주변 인물들의 영향으로 지향을 넓혀가는 관계 확장형 인물 유형이 있었다. 조선학교에서는 자기 정체성이 확고하여 조선사람으로 떳떳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범형과 자기가 처한 상황을 고민하는 갈등형 인물 유형이 있었다. 재일조선아동문학에 나타난 인물 유형들은 사회적으로 특수한 상황에 놓인 재일조선인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조선사람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지님과 더불어 어느 사회에서나 건강하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인물들이다.

      • 朝鮮王陵 連池의 立地 및 空間構成에 관한 硏究

        김흥년 고려대학교 생명환경과학대학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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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Study on the Location and Spatial Organization of Lotus Pond in the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Name : Kim Heung-Nyeon Department: Graduate School of Life & Environmental Science (Major in Landscape Architecture ), Korea University. Thesis Advisor : Prof., Dr. Sim Woo-kyung ABSTRACT 「KangReungJi」 on Lotus pond in the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in World heritage "Lotus pond in front of All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and according to 「ChunKwanTongGo」at least of twenty lotus pond in royal tombs. but now Except for Jereung hureung on the north korea, only 9 lotus pond existing in south korea. Lotus pond in the Joseon Dynasty's Royal Tombs was created for both the protection of feng-shui methods as well as the encirclement of the territory. In acturial aspect, it acted as reservoir for water supply, fire extinguision, and a place to rest and et cetra. Thus, although they were historically relavent and important, the remanents of lotus ponds are either unrecognably damaged or destroyed. In the mean time, Lotus pond related study is progress favorably preceding researchs about symbolism and analysis, feng-shui methods analysis, objective validity of hydroponics institution, morphological characteristics, drainage management, waterproofing for lotus pond in the royal place, Buddhist temple, byeolseo ,commoner's house but as it is they are nonexistent. accordingly, this study is research about location of Lotus pond in the Royal tombs and space organization to provide preliminary data. For this purpose this study is refer to the「ChunKwanTongGo」and the other Literature. also go foward with survey research for Seoul, Gyeonggi, Kangwon city based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this study's conclusion are as follows First, we can see most of Joseon Royal Tombs made Lotus Ponds but great deal of Ponds are lost compare to those recorded. Furthermore, we have confirmed much of remaining Ponds are transformed. Second, Royal Tombs' Lotus Ponds' are located Tombs' entrance. It seems Lotus Ponds are for Tomb surrounding's scenic view and have symbolic meaning of protection of Tombs' energy with role of water resource that needed for Tombs' care and rest place. Third, form of Lotus Ponds made in Joseon Dynasty are mostly Bangjiwondo with a circled island in the middle of the pond and wondo without a island. Forth, by documents, it is understood that ponds with island are recorded as 'little island'. Therefore it is unreasonable to judge all Joseon Royal Tombs Ponds are Bangjiwondo. Separated concrete study should be proceeded hence Ponds' restoration and repair. Fifth, we can presume Joseon Royal Tombs' Lotus Ponds' gardening by documents. Kind of plants planted at that time are lotus, pine tree, Japanese cypress and other flowers and mainly pine tree is planted in the island. Sixth, gardening around existing Jeseon Royal Tombs' Lotus Ponds have standardized distribution because there are formed with decorative plants rather than native plants. Seventh, it is presumed small platform and arbor were made around Royal Tombs to be used as a resting place. Eighth, compare Royal Tombs' Ponds to bower for water, water means new birth and revival, which reflects belief of after-life. Therefore it can be explained ponds mean permanency of Joseon Dynasty. Nineth, land around Royal Tombs' Ponds' was fact that decided water proofing, water level regulation and shape of Lotus Ponds. Ponds were made by stone work method which covered land with stones after ponds were dug up or a mud wall method which built up soil higher than ground level. Tenth, Royal Tombs' Ponds' water supply methods were receiving over Lotus Ponds' dam, over dam and underground pipes, from drain pipe of the roof and use of spring inside Lotus Ponds as source. Drain methods were over Ponds' dam andr by underground pipe. This study is about nine Joseon Royal Tombs' Lotus Ponds' locational specialty, surroundings, space organization and gardenings based on those recorded by documents and site study. Henceforth concrete and substance study should be conducted by systematic document research and site study from Joseon Dynasty Geonwolleung of King Taejo, The Founding Ruler to Yureung of Emperor Sunjong, The 27th last Ruler and that will be left for later work. key words : Joseon Dynasty's Royal Tombs, Lotus pond, ChunKwanTongGo. 조선왕릉 연지의 입지 및 공간구성에 관한 연구 성명 : 김흥년 고려대학교 생명환경과학대학원 환경생태공학과 조경학 전공 지도교수 : 심우경 교수 국문초록 조선 왕릉 연지에 관한 문헌자료를 보면 “조선시대 모든 능 앞에는 蓮池가 있었다.”라고 「康陵誌」에 기록이 있고 「춘관통고」에도 왕릉에는 20개의 연지가 있는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으나 북한에 소재한 제릉과 후릉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왕릉의 연지는 숭릉, 세종 영릉, 단종 장릉, 광릉, 효릉, 태릉, 덕종 장릉, 융릉, 건릉, 고종 홍릉 등 9개소이다. 조선 왕릉에서의 연지는 능역의 경관적 위요성과 풍수론에 의한 裨補次元의 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능역관리에 필요한 용수공급, 화재에 대비한 방화수 확보, 휴식 공간 제공 등 왕릉의 역사성과 관련이 깊은 중요한 요소임에도 현존하는 왕릉 연지는 그 원형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되었거나 멸실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동안 연지에 관련한 학술적 연구는 궁궐, 사찰, 별서, 민간주택 등 陽宅 공간에 조성되어 있는 연지를 대상으로 상징적 의미와 해석, 풍수적 원리 해석, 수경시설의 객관적 가치, 형태적 특성, 入․排水管理, 防水工法 등 선행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음에도 실상 왕릉 연지에 관한 연구는 전무한 상태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조선왕릉 연지의 입지 및 공간구성에 관한 기초 연구 자료를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이에 조선 정조대에 편찬한「춘관통고」와 능지, 산릉도, 항공사진 등 문헌적 고찰을 통해 왕릉의 연지 규모, 형태, 시설물과의 이격거리, 연지의 명칭, 연지조성, 식생, 기능 등 조선왕릉 연지의 조성과 경관특성에 관해 구명하고 서울, 경기, 강원지역에 소재한 조선 왕릉 중에서 춘관통고에 서술되어 있는 연지가 현존하고 있는 英陵, 莊陵, 光陵, 泰陵, 孝陵, 章陵, 崇陵 등 6개소와 연지 터로 남아 있는 健元陵, 禧陵 등 2개소 왕릉을 연지를 대상으로 현황실측, 촬영, 인터뷰 등의 현황조사․분석을 통하여 조선왕릉 연지의 입지 및 공간구성 특성에 대하여 고찰한 것으로 집약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왕릉은 대부분 연지를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기록상 남아 있는 것에 비하면 많은 연지들이 멸실되었고 현존하고 있는 연지도 변형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연지의 입지는 능역의 진입공간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는 능역의 풍수이론에 따른 背山臨水의 裨補的 차원에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조선시대는 전체 왕조에 걸쳐 조성한 연지의 형태는 연지 중앙에는 圓島를 조성한 方池圓島와 섬이 생략된 方池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넷째, 문헌상에서 연지 안에 섬이 있는 경우는 ‘小島’라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됨에 따라 모든 조선 왕릉 연지가 方池圓島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으므로 향후 연지복원․정비 시에는 구체적인 개별적인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 문헌을 통해 조선왕릉 연지의 식생구조를 추정해 볼 수 있는데 당시 식재했던 식물은 蓮, 松, 檜, 雜花 등이며 섬에는 주로 소나무를 식재하였고 필요시 연지 주변에 는 소단과 정자를 만들어 휴식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곱째, 현존하는 조선왕릉 연지의 식생은 향토수종 보다는 대부분이 조경수를 분양 받아 식재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인위적인 遷移로 인하여 왕릉 연지 주변의 식생 대부분이 획일적인 식생 분포를 보이고 있다. 여섯째, 왕릉에서 연지는 능역의 경관적 위요성과 능 관리에 필요한 수자원적 기능, 경관 및 휴식기능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蓮池는 풍수지리에 의한 능침의 혈을 보 호하는 裨補的 의미를 담고 있으며 물은 새로운 탄생과 사후의 재생을 상징하는 것으 로 사후에도 생전의 삶을 영원히 누리길 바라는 繼世思想을 담고 있는 즉, 조선 왕조의 영속성을 의미한다고 해석 할 수 있다. 여덟째, 연지의 지안은 물을 가두는 방수보호기능과 수위조절, 연지 형태를 결정짓는 요소로 이러한 지안의 조성기법은 땅을 파 연지를 조성한 후 지안 사면을 모두 자연석 으로 쌓은 石築방법과 지면 보다 높게 흙을 쌓은 土築 방법이 있다. 아홉째, 연구대상지 연지의 입수 유형은 연지 둑 위쪽으로 입수되는 방식, 둑 위쪽과 암거수로관로 입수되는 방식, 석루조를 통해 입수되는 방식, 연지 내 샘을 자체수원을 이용한 방식 등이며, 배수 유형은 지안 둑 위쪽으로 배수되는 방식, 암거배수관을 통해 배수되는 방식 등이다. 본 연구는 문헌상에 기록된 내용과 현지조사를 중심으로 조선왕릉 연지 9개소에 입지특성, 주변 환경, 공간구성, 조영특성에 대하여 고찰한 것으로 향후 이러한 특징을 갖는 조선 왕조 제 1대 태조의 건원릉에서 제 27대 순종의 유릉에 이르기까지 전체 왕릉 연지에 대해서 보다 체계적인 문헌조사 및 현지조사를 통한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될 것으로 판단되며, 이는 추후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주제 어 : 조선왕릉, 연지, 춘관통고

      • 朝鮮 對明 貢女에 대한 小考

        Xu, Fan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7807

        “貢女”란 명칭은 元나라 때에 시작되었다. 1271년 쿠빌라이가 元나라를 건립한 이후, 고려는 이미 실제로 방대한 몽고제국 통치하의 일부분이 되었다. 元은 고려에 대해 부단히 압력을 행사하고 통치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매년 元은 고려에 대량의 공물을 진상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주요한 貢物로는 金, 銀, 布匹, 人參, 海東靑등이 있었고, 이러한 일반적인 공물 이외에도 “貢人”(고려 환관과 고려 여인) 도 있었다. 그 중 고려 여자는 贡品의 일부분이 되어 몽고에 進獻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貢女이다. 貢女 문제는 元대(1231年)시작하여 清초(1650年)까지 지속되었다. 1231년 몽고제국의 판도를 확대하고 있었던 元 太宗 窝阔台은 고려왕조를 정복하기 위해, 고려에 대한 제1차 대규모 군사행동을 개시하였고, 이와 동시에 몽고는 최초로 고려에 사자를 파견하여 童男•童女를 進貢할 것을 요구하였다. 貢女문제는 元의 번성기와 明의 전환기, 清의 쇠락기를 거쳐 결국 끝이 났다. 清 초1650년,淸 섭정왕 도르곤이 조선에 청에 貢女를 보낼것을 요구하였으나, 貢女가 조선에서 清으로 가는 도중에 도르곤이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으로 공녀현상은 결국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본 논문은 조선 대명의 공녀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조선 대명 공녀는 “사대외교”의 산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명간의 관계의 조정 역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조선 대명 공녀를 연구하였다. 제1장에서는 조선 대명 공녀의 배경과 특점을 밝히고자 한다. 세부적으로 명 때 공녀가 형성된 시대적 배경을 공녀를 처음으로 요구했던 영락제의 특수한 심리배경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제2장에서는 두 부분은 구성하였다. 제1부분은 총 7차례 있었던 공녀를 검토하여 당시 공녀의 역사상을 재구성해 나가고자 한다. 제2부분은 여성학의 각도로 보는 훌륭한 여성의 역사를 찾으려고 한다. 공녀중의 대표적인 인물인 3명 여성의 역사를 밝힐 것이다. 권귀비, 한노로, 김흑 3명 공녀에 대한 개인 연구를 통해 그 당시의 공녀들이 정치의 도구뿐만 아니라, 자기의 의지, 사상, 재능을 가지고 살았던 여성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제3장에서는 중한 관계사의 각도로 들어가서, 공녀가 당시의 명나라와 조선에게 정치적, 문화적으로 끼친 영향을 통해 공녀가 중한관계사와 중한교류사에서 도대체 어느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재 규명할 것이다. 사실 정치적으로 공녀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당시의 밝지만은 않았던 명과 조선에 관계를 조금은 완화시켰다. 한편 공녀에 의해 명과 조선관계에 있어 중요한 신흥세력이 발생하였다. 그 세력은 바로 공녀의 친족과 환관세력이다. 두 세력은 명과 조선관계에서 아주 긴 시간 동안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양 국가에 정치적인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공녀들은 중국에 문화적인 영향도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음식, 복식 등 방면에서 500년 전의 “한류열풍”을 사료를 바탕으로 그 당시의 실상을 기술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공녀의 역사와 그들이 차지했던 역사적 지위를 재 조명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한다. 필자가 공녀의 역사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관점으로 보면 어두운 측면이 있지만, 공녀와 이런 현상의 출현은 그 당시의 역사, 사회, 심리 등의 배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단지 비관적으로 공녀의 역사를 볼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공녀가 명과 조선의 교류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지 깊이 조사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료조사와 분석을 통해서 공녀는 양국 우호적인 교류관계의 발전을 촉진시켰고, 당시 명과 조선의 정치, 문화, 외교 교류 등 다방면에서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중한교류사 연구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한다.

      • 조선후기 사행가사의 세계 인식과 문학적 특질

        김윤희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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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조선후기 사행가사를 연구함에 있어 내재적 분석에 국한되었던 기존의 관점을 지양하고 동아시아 관계사에 기반한 입체적 접근과 한문기록과의 상관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개별 작품들의 세계 인식과 문학적 특질을 보다 선명하게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이상에서 논의된 주요 내용을 정리하고 전망적 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삼도록 하겠다. 사행가사는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의 외교적 체험이 소재가 되어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창작&#8228;향유된 일련의 작품군으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단편적인 작품론으로는 해명되지 않았던 인식의 지층과 문학적 특질의 제양상은 통시적 고찰의 시야에서 보다 선명하게 확인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작품들에 발현된 중화주의나 화이관이 대타적 자국 인식의 기제가 전제된 관념이라는 점에 유의하여 그 현상적 변모보다는 작품이나 시기에 따라 斷續的으로 발현된 양상에 주목해 보았다. 또한 기존의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작품들의 창작 원리를 논증함으로써 자신의 사행록이나 관련 기록들을 토대로 재구성한 사행가사의 문학적 관습과 그 지속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17세기 사행가사의 전반적 특징은 중화주의와 관련하여 형성된 화자의 인식이 서정적 층위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인데 중국과 일본에 따라 그 발현 양상과 문학적 질감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17세기 중반의 작품인 <장유가B>는 ‘중화회복’에 대한 열망이 실제적 공간 인식에 투사되어 대명의리론에 기반한 감정적 진폭이 확인되는 작품이다. 중화의 공간을 夷狄(淸)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심정적 고뇌가 탄식과 회고의 정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남용익은 자신이 연행 도중 창작한 한시의 주요 구절들을 차용하며 체험의 서정적 결을 보완&#8228;심화해 나갔다. 반면 <장유가A>에서 일본은 중화의 주변국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화이관이 부분적으로 발견될 뿐 대체로 경험론적 시선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견문의 교술적 나열을 지양하고 초월적 상상력에 기반하여 창작함으로써 가사문학으로서의 심미적 특질이 구현되고 있었다. <장유가B>와 마찬가지로 남용익은 자신의 한시 작품들 중 환상적 미감이 발견되는 구절들을 참조&#8228;재배열함으로써 사적인 향유에서의 정서적 몰입과 효용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한 것이다. 그런데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청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선 집권층은 ‘중화계승’의식을 통해 자국 인식을 강화하게 되며 이러한 대외 인식의 변모가 17세기 후반의 사행가사인 <서정별곡>, <연행별곡>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장유가B>에 비해 자국의 공간을 인식하고 표상하는 비중이 강화되었으며 대명의리론에 기반한 탄식과 회고 의식은 감소되고 있는 것이다. 청을 비난하며 중화의 회복을 염원하는 구절도 확인되지만 <장유가B>에 비하면 부분적이며 청나라 문물을 가시적으로 인지&#8228;표상하거나 개별적 시각에서 풍경을 포착하여 감흥을 표현하는 등의 변모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후기 대청 인식의 구도와 사행가사의 문학적 표상이 상응하며 변모한 현상을 확인케 하는 일차적 사례인 것이다. 또한 <연행별곡>은 자신의 <연행일기>를 토대로 창작된 정황이 확인되는 바 일기의 인상적인 장면들이 선별되어 가사문학의 서사 내에 속도감 있게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행가사 작품들은 일기나 한시 등을 토대로 서사적 축을 설정하고 주요 감흥을 보완함으로써 문학적 미감을 생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안정된 율격과 분량을 유지하며 가창 및 음영되었던 이 시기 가사문학의 존재 기반과 유사하지만 그 창작 원리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지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18세기 사행가사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주요 특징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인식이 점차 개방됨에 따라 對他的 자국 인식도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 초는 대청 관계가 안정됨에 따라 조선의 외교 구도도 실질적인 변화를 보이는 시기이다. 북벌론이 주장될 만큼 중화 회복의식과 명분론에 집착했던 17세기 중&#8228;후반의 서인 집권층은 점차 청나라의 현실적 위력을 감지하게 되며 강희-옹정-건륭으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정치&#8228;문화적 안정으로 인해 연행사들은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인식&#8228;수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대내적으로는 존주론과 정통론이 강화되며 명나라 역사서가 본격적으로 저술되는 등 중화 계승국으로서의 자존적 의식을 강화한다. 기자의 계보를 추적하고 마한정통론이 대두되는 것은 물론 이 시기 연행을 다녀온 이들의 작품 속에 북방고대사 회복에 대한 소재도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모는 17세기 후반의 <연행별곡>과 <서정별곡>에서도 확인되었으며 18세기 전반의 <임자연행별곡>도 유사항 양상을 보인다. <임자연행별곡>의 내용을 보면 북방 영토에 대한 회고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명분론의 관념성과 배타성은 약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연경의 문화적 풍경에 대한 관심과 구체적 사물을 포착한 어휘의 특성은 19세기 사행가사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前兆的 표상으로서의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 이처럼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 대청 사행가사의 경우 북방 고토를 인지&#8228;회고하는 방식으로 중화계승의식이 발현되어 있었지만 18세기 중반의 작품인 <일동장유가>에서는 자국의 문화적 우월감과 화이론적 관념이 작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동장유가>의 화자가 일본의 물질적 번영을 찬탄하고 자국의 열세를 인정하는 등 이적국을 중화의 세계로 포섭&#8228;소유하고자 열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화이관의 수치적 변화나 동향을 파악하기보다는 그 이면에 내재한 실제적 의식을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일동장유가>의 창작 맥락을 살펴본 결과 전대의 작품들처럼 &#985172;동사록&#985173;이라는 자신의 일기를 저본으로 재구성된 작품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자족적 향유의 차원을 넘어 가내 독자를 상정하여 창작된 작품인 만큼 과장이나 허구적 장면화로 자신의 능력적 우월함을 과시하는 내용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인식의 개방 및 전달 욕구가 강화되면서 김인겸은 자신의 일기를 가사 작품에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으며 사행가사의 통시적 흐름에서 보면 이는 형식적 전변을 보이는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한문일기를 국문가사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대화체의 활용, 율격적 이완, 세밀한 묘사 등과 같이 전달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문체 특질들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특징은 19세기 사행가사 작품들에서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일동장유가>의 형식적 전변은 문학사적 연속성을 확인케 하는 지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이후에는 서세동점에 따른 근대화에 따라 사행가사에 투영된 세계 인식도 시기별, 국가별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우선 19세기 전반의 대청 사행가사인 <무자서행록>의 경우 청나라와 조선을 ‘大國-小國’의 구도 하에서 이해하며 긍정적 대청관을 견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19세기 전반의 연행사들 기록에서 대체적으로 확인되는 논리이기도 하며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을 전후한 시기에 청은 엄격하게 정보 누설을 차단했기 때문에 조선 연행사들은 청의 약화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자서행록>의 화자는 자신을 ‘편방’에 위치한 ‘고루한 소국’의 ‘촌계’로 지칭하고 있어 <일동장유가>과 비교했을 때 관념적 인식 기제가 더욱 약화되고 대타적 자의식의 현실성이 강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부분적으로 중화회복에 대한 열망이나 중화계승적 자부심도 발견되지만 산문기록인 &#985172;부연일기&#985173;와 비교했을 때 문학적 상상이 투사된 논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면 의식이 지향하는 영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는 이러한 사행가사의 효용성은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창작&#8231;향유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일부이며 <무자서행록>의 전반적 특성은 ‘遊覽誌’로 규정할 수 있을 만큼 흥미성과 전달성이 강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대의 <일동장유가>와 마찬가지로 가내 소통을 전제로 창작되는 과정에서 전달의 효용성과 수용자의 흡인력을 제고할 수 있는 층위에서 연경에서의 체험 소재가 재조정되어 배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동장유가>의 경우 일기의 서사를 유지하면서 매일의 경험이 폭넓게 수용되고 있는 반면 <무자서행록>은 ‘遊覽’의 범주에서 소재가 선택되어 집중적으로 묘사된 경우가 많았고 靜態的 대상들은 사실적 정보들이 나열되면서 장면이 확장되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측면이 부각되는 부분에서는 산문기록의 서사가 파열되는 양상이 발견될 만큼 ‘遊覽’ 의식이 강화되어 이국 체험의 재현에 대한 강렬한 문학적 욕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독자들이 <무자서행록>을 ‘가지 않아도 볼 수 있는 萬物圖’로 이해&#8228;수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창작 의식 때문인 것이며 이는 산문기록이나 한시와 다른 층위에서 체험을 구성하고자 한 사행가사의 차별적 영역을 선명하게 확인케 하는 사례이기도 한 것이다. <무자서행록>의 이러한 특징은 이후 <병인연행가>에서도 발견되는데 기존에는 두 작품의 차별적 영역이 고찰되지 않아 <병인연행가>의 대청관도 대체로 긍정적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병인연행가>의 창작 맥락과 동아사아 관계사를 고려한 결과 <병인연행가>에는 오히려 부정적 대청관이 내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순학은 연행 도중 목도한 서양 세력에 대해 위협을 느낀 후 작품을 창작했기 때문에 <무자서행록>에 비해 자국 인식의 측면이 강화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대명의리론이 강하게 발현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홍순학은 삼사 신분이었던 만큼 <병인연행가>에서는 대명의리론이 주된 의식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전대의 <장유가>나 <임자연행별곡>과 같이 대타적 자국 인식이 강화된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은 기존에 화자의 보수적 세계관이나 관습적 표현으로 간주되면서 그 의미 실질이 제대로 분석되지 못하였다. <병인연행가>를 살펴보면 <무자서행록>처럼 연경에 대한 ‘유람지’로서의 특질을 보이고 있고 그 비중도 상당하기 때문에 이 지점들에서 화자의 주된 세계 인식을 추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들에서 <병인연행가>와 <무자서행록>의 상호텍스트성이 발견되고 있는 문학적 현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병인연행가>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외교적 주체로서의 체험이 반영된 부분은 산문기록을 저본으로 삼고 흥미로운 소재나 장면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무자서행록>을 참고한 정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군집화된 소재별 분류와 확장적 첨가의 방식 등을 통해 <병인연행가>는 보다 진전된 문학적 구성의 전략과 형상화의 특질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전대의 사행가사 작품들과 비교해 본다면 시각적 재현과 관련된 장면이 독립적인 층위에서 이해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무자서행록>과의 상호텍스트성이 확인되는 지점들은 <병인연행가>의 화자가 실제로 목도하거나 경험한 장면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찰자의 시각적 체험이 <병인연행가>&#61778; 세밀한 묘사를 가능케 했다는 기존의 전제적 인식은 재고될 필요가 있으며 경험 세계에 가치 부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셔유견문록>을 보면 근대화된 문물을 경탄의 층위에서 묘사함으로써 경험 세계에 압도되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전단계적 현상을 <무자서행록>과 <병인연행가>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병인연행가>와 동일한 연행 체험을 토대로 창작된 <북행가>는 문학적 소재 및 질감에서 상당한 이질성이 발견되어 흥미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국 인식’이나 ‘연경의 문물’에 초점을 두지 않고 지극히 사적인 시선에서 소재를 선별&#8228;형상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사행가사의 소재적 ‘변이’로 인식되었던 기존의 시각을 본고에서는 소재의 ‘확장’으로 규정하여 그 문학적 특질과 의의를 해명해 보았다. 그 결과 <북행가>는 여행의 여정과 화홍과의 애정을 교차되면서 문학적 흡인력이 생성된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사행이라는 공식적 목적을 소거했을 때 남는 여행의 설렘과 아쉬움이 기녀와의 만남과 이별이라는 감정적 동요의 체험과 교묘히 결합되면서 사행가사가 표상할 수 있는 문학적 특질이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대의 작품인 <일동장유가>에도 ‘기녀’가 등장하지만 대부분 관찰자적 시선에 포착된 부수적 인물형들인 경우가 많았지만 <북행가>에서는 서사 과정의 중요한 축에 기녀들이 배치되면서 그들과의 관계나 감정선이 중시되고 있다. 이념에 종속된 시선이나 외국 문물의 재현이라는 층위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인간의 감정에 주목함으로써 이를 극적 장면화의 수법과 서사적 연속성의 방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흡인력으로 인해 <북행가>는 경북 상주의 규방 문화권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소통&#8228;향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에 오면 본격화된 서세동점으로 인해 청 문물에 대한 적극적 호기심은 많이 감소하게 되며 사행기록도 관습적으로 반복되거나 퇴행되는 양상을 보이는 만큼<북행가> 이후 새로운 대청 사행가사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병인연행가>는 여러 이본들이 확인되고 <무자서행록>의 필사년도가 1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만큼 새로운 연행가사가 창작되지 않더라도 독자층의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한 정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세계로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목도하게 된 일본과 서구 체험의 경우 각각 한 편씩의 사행가사가 발견되고 있다. <유일록>과 <셔유견문록>은 ‘중화’에서 ‘근대’로 세계 인식이 전변되는 양상을 확인케 하는 사행가사 작품들인 것이다. 사행 도중 을미사변, 아관파천, 단발령 등과 같은 격변적 사건들을 접하게 된 <유일록>의 화자는 근대화된 일본의 위력과 상대적인 조선의 약세를 완전하게 자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일본의 기계 문명이나 군사, 세금제도 등을 긍정하고 있으며 교육과 일부 제도는 ‘본받아야’ 한다는 논리까지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부정적 대일관은 대체로 ‘풍속’의 범주에 한정되어 발현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존에 <유일록>의 주된 대일 인식으로 부각되었던 화이관은 근대성 이외의 논리에서 부분적으로 발현되는 관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일동장유가>의 경우 발현된 화이관이 대타적 자국 인식과 상응하는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유일록>에서의 적절한 대응 논리를 형성할 만큼의 의미 실질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중화주의를 구심점으로 동아시아와 일본을 인식했던 <일동장유가>의 경우와는 달리 <유일록>의 화자는 근대성에 경도됨으로써 문물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수용하는 논리를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청 사행가사인 <무자서행록>, <병인연행가>와 비교해 보더라도 ‘유람지’의 성격에 해당하는 부분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지만 <유일록>의 경우 ‘근대적 문물’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심화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풍속의 범주를 넘어 자료에서 추출된 지식적 층위의 담론들까지 확인된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선명하게 확인된다. 또한 &#985172;범사록&#985173;과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그 창작 원리를 규명해본 별과 대체로 한문일기의 서사를 수용하되 전달 및 기록의 욕구가 발현되는 부분에서는 장면이 확장되고 있었다. <무자서행록>이나 <병자연행가>와 문학적 특질의 유사성이 확인되는 바 창작 원리를 고려함으로써 그 동인을 해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 전변의 지점들을 세밀하게 살펴본 결과 장면의 유기적 연속&#8228;확장을 위해 다른 날짜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분산&#8228;재배치되는 현상과 장면 단위 내에서도 소재들이 재배열되어 체계적 구성이 강화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장면의 실제성과 전달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정연한 구조 내에 세밀한 묘사를 보완하는 등 <유일록>도 &#985172;범사록&#985173;을 토대로 창작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문학적 특질을 확보하게 된 사행가사임을 알 수 있었다. <일동장유가>도 &#985172;동사록&#985173;을 토대로 창작되었지만 자신의 체험과 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층위에서 과장 및 허구의 논리가 적용된 양상을 확인되었다. 그러나 <유일록>은 이미 자국의 열세를 인지한 상황이므로 근대적 문물과 관련된 장면에서는 내용이 보완&#8228;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사행가사에 투영된 대외 인식의 주된 관념이 중화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이러한 양상은 동시기 대영 사행가사인 <셔유견문록>에서 더욱 명확하게 발견된다. 특히 잔존하는 중화적 사고로 일본에 대한 이적관이 부분적으로나마 확인되는 <유일록>과 달리 영국의 경우 근대화의 구심점으로 설정되어 찬탄의 시선만이 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대와 달리 동아시아를 벗어난 외교 체험이 소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중화주의가 근대적 세계관으로 교체되는 轉變 양상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일록>에도 근대적 문물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 전제되어 있지만 중화주의적 가치관으로 인해 발현된 이적관과 자국의 열세에 대한 한탄도 대타적 자의식의 기제로 표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셔유견문록>에서 확인되는 자국 인식의 구심점은 ‘근대성’이며 영국을 ‘제나라’로 환치하여 이해할 만큼 근대적 세계에 대한 맹목적 동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당시의 패도적 국제 관계를 분쟁&#8228;종식케 하는 권력의 주재자로 영국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조선이라는 약소국이 구원될 수 있기를 염원하는 당시 지식인의 내적 반응이 투사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02년은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이 가시화되던 시기였으므로 당시의 대영 체험과 그 인식 속에는 자국의 부국강병에 대한 열망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셔유견문록>도 &#985172;서사록&#985173;을 저본으로 삼되 근대적 세계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감흥을 감각적으로 재현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985172;서사록&#985173;을 변환하는 과정에서 화자는 허구적 요소를 첨가하여 조선과 영국의 친밀한 관계를 상정하는 등 인간적 내면이 형상화된 문학적 공간을 발견할 수 있는 가사작품으로서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작품의 주된 표현 특질을 보면 관념적 인식이 거의 작동하지 않아 역동적인 문체로 근대적 세계가 감각적으로 재구성되어 있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상적 장면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서사가 파열된 지점은 물론 감각적 재현을 위해 율격이 이완되어 있는 사례들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회정 과정에서 화자는 시&#8228;공간을 압축한 듯한 자신의 체험을 속도감 있는 문체로 표현하는 등 전대의 사행가사 작품들과 확연하게 변별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현전하는 마지막 사행가사인 <셔유견문록>은 전대의 작품들과 유사한 문학적 창작 원리를 보이지만 세계관적 전환이 여실히 확인되고 그 과정에서 변화된 문학적 특질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후기 사행가사를 통시적으로 고찰함에 있어 동아시아 관계사와 중화&#8228;화이관에 내재한 대타적 자국 인식의 측면을 고려함으로써 단편적 작품 분석이나 평면적 비교의 한계적 시각이 극복될 수 있었다. 또한 개별 작품들의 창작 원리가 해명되어 사행가사 작품들이 문학적 특질과 그 의의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주지하듯 전근대 지식인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차원이 가장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는 것은 자국의 경계 밖에서 사유하게 된 계기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리고 낯선 공간의 이동에 따른 다양한 체험들은 시적 주체의 시선이 유연해짐에 따라 상당히 넓은 편폭으로 수렴되어 국내 기행가사가 담당할 수 없는 층위의 경험과 어휘들로 구현된다. 이 과정에서 이념적 단일성은 물론 서사적 인과성도 유지되지 않으며 인식과 구조의 이러한 이완 양상은 작품의 장편화는 물론 문체 특질의 변화와 직접적 상관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행가사의 특질이 변모하게 되는 동력 내지는 주요 표지로서 사행가사의 변모 양상은 큰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행가사의 창작 및 향유와 관련된 기록들을 고찰함으로써 작품들의 실질적 창작 동인과 수용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대나 창작 주체에 따라 정서적 환기, 기억과 재현의 매개체, 향유층의 추체험, 의식적 열망의 대체물 등 다양한 문학적 기능이 발현되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이는 ‘여행자 문학’의 시각과도 조응되며 낯선 세계에서 촉발된 자아의 내면이 시대에 따라 양상을 달리 하며 국문시가와 접속했음이 사행가사를 통해 확인된다. 기존에 사행가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이러한 시각은 내재적 분석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작품들이 실질적으로 내포했던 당대의 사회&#8228;문화적 의미를 고찰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본고의 논의는 조선시대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20세기 이후 기행을 소재로 창작된 국문시가 작품들과의 비교&#8228;분석도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학 양식은 일정한 역사성 위에서 형성&#8228;변모하는 ‘세계 인식의 질서’이며 새로운 시대에 따라 경험의 표현도 변화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근대 매체나 새로운 형식과 관련된 단절이나 연속의 지점들을 보다 세밀하게 살펴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단절적 지층이 반성적으로 조망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사행을 소재로 한 국문시조 및 국문 사행록, 기행가사 등을 통해 공시적인 층위에서의 심화된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이본들이 발견되는 작품들의 경우 면밀한 고증을 통해 필사 및 향유의 실태를 규명해 보아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작품들을 새롭게 분석할 수 있는 의미망이 생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고전시가는 민족의 언어로 당대인들의 절실한 내면이 형상화되어 있고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 울림에 공감하고 향유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아름답다. 본고의 논의를 토대로 고전시가의 미학적, 성찰적, 현재적 의의를 더욱 선명하게 규명하기 위한 확장적 연구가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 1930년대 詩에 나타난 植民地 朝鮮語의 位相 : 金起林·鄭芝溶·白石을 中心으로

        李謹華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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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1930년대 시어가 어떻게 선택되고 배치되었는가를 통해 식민지 조선어의 위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조선의 근대화와 민족적 전통성의 확립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 문학의 주요한 과제였다. “근대 문명의 번역과 표상성의 획득”, “과거의 호명과 역사성의 기입”, “조선어의 개성화와 시어의 물질성”은 1930년대 시어 형성의 세 가지 주요 국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1930년대 문학은 문명의 번역이라는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고 민족의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서 안정감과 균형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시어의 표상성과 역사성 위에서 질료로서 조선어의 고유한 영역이 발견되었다. 문명과 전통, 근대성과 역사성이라는 간섭과 배제의 작동 원리를 거쳐 1930년대 문학적 전통과 조선어의 고유한 영역이 창출되었다. 비판적 계몽주의와 문화적 민족주의의 길항 관계 속에서 조선어 문학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을 근대적 예술가로 독립시킬 수 있었다. 김기림, 정지용, 백석은 주체와 타자, 내부와 외부 등의 이항 대립적 문제를 문학의 언어를 통해 매개하려는 실험 의식을 보여주었다. 정지용이 ‘문명’과 ‘전통’ 사이의 균형과 절제를 통해 초월적 문학 공간을 확보하였다면, 김기림은 식민과 낙후의 원인을 ‘전통’에서 찾았으며 ‘문명’을 조선 문학의 새로운 양식으로 삼았다. 백석은 ‘문명’과 ‘전통’의 혼재와 균열 그 자체를 근대 문학의 출발로 삼았다. 정지용이 과거를 통해 현재를 견인하려고 하였다면 김기림은 미래를 선취하기 위해 과거를 부정하였고, 백석은 현재와 소통하는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이식된 근대의 봉합 지점을 지우려고 하였다. 세 시인의 서로 이질적인 기질과 취향이 만들어내는 거리는 생산적인 논의의 장을 만들어주었다. 이들의 시어 선택과 배치 속에는, 문학과 사회 담론의 관계를 의식하고 이 점을 중개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Through poetic words of 1930s, this paper could find out that various linguistic spectrums and influences played a certain role in the formation and establishment of literary language. Also this paper confirmed that the recognition on and attitude to language and society found in poets of 1930s became an important source for the formation of literary ideas. The translation of modern civilization and achievement of symbolic characters, calling-over the past and recording the historicity, and personalizing Joseon language and materialistic characters of poetic words are three important aspects in the formation of poetic words in 1930s. 1930s literature was formed on the unstable base of translating civilization in the process of Joseon's modernization, however it could secured the stability and balance by turning away its eyes to the inside of a nation. And then the peculiar realm of Joseon language as a material was found on symbolic characters and historicity of poetic words. Going through the operating principle of interference and exclusion of civilization and tradition, modernity and historicity, literary tradition of 1930s and peculiar realm of Joseon language was created. Within the antagonistic relation between critical enlightenment and cultural nationalism, literature written in Joseon language could set the elite of colonized Joseon on their feet as modern artists. Poets of 1930s formed cultural feeling of solidarity by developing a peculiar quality of Joseon language, replaced social ideas and secured a materialistic realm of Joseon language as a literary language.

      • ?조선말 표준발음법?(2016)의 규정 연구

        NAN JUNQUAN 아주대학교 202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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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중국 조선족사회에서 제정한 중국 조선어의 현행 표준 발음법에 대한 연구로서, 남북한의 표준 발음법과의 비교를 통하여 차이점이 있는 규정에 주목하여, 차이점이 있는 부분을 제시하고 논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비교에 앞서 중국 조선어에서 표준 발음법이 만들어지고 발전한 역사를 보여주었다. 시기는 크게 광복 전과 광복 후, 그리고 자체 규범이 만들어진 후로 나누었다.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의 정착과정부터 시작하여 어문 규범의 유입 및 북한의 어문 규범의 영향에 대해 서술하였으며 자체 규범이 만들어진 후로부터 지금까지의 발전 상황을 보여주었다. 북한의 영향을 받아 「조선말 표준발음법」의 구성은 대체로 북한의 「문화어발음법」과 비슷하지만 세부적으로는 차이점이 있는데, 차이점은 성격에 따라 분류하여 제시하였다. 「조선말 표준발음법」은 최근에 빈번하게 수정하게 수정되었는데, 언어 교육 현장과 언어생활에 혼란과 부담을 주지만,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어와의 원활한 교류의 수요에 의한 결과물로 보인다. 중국 조선어의 현행 표준 발음 규범은 「조선말 표준발음법」(2016)이다. 이해를 위하여 이전 규범인 「조선말 표준발음법」(2007)과 차이가 있는 규정과 규범의 구성방식에 대해 논의하였다. 차이가 있는 규정은 대부분 불합리한 규정을 수정한 것이다. 구성 방식의 차이점으로는 예외 규정에 대한 표기를 남북한의 표기 방식을 참고하였고, 중국 조선어의 어문 규범의 수정으로 자모의 배열순서, 띄어쓰기와 같은 것이 이전 규범과 차이점이 생겼다. 그리고 총칙에도 변화가 있는데, 본 연구에서는 총칙의 변화에 대해 논의하였고, 지금의 총칙으로는 여러 문제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수정해야 할 것을 지적하였다. 3, 4장에서는 「조선말 표준발음법」(2016)의 규정을 한국의 「표준 발음법」의 규정과 비교하였다. 3장은 음운 관련 규정에 대한 비교이고, 4장은 음운현상에 관련된 규정의 비교이다. 그리고 서로의 규범에서 찾을 수 없는 규정은 5장에서 따로 논의하였다. 이런 비교를 통하여 중국 조선족 사회와 한국의 표준 발음 규정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일부 규정의 부족한 점을 밝혀냈고, 「조선말 표준발음법」(2016)의 해설서에서 해석한 문법현상의 오류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비교해 보면 조항의 구성은 차이가 많지만 세부적인 서술 방식은 「표음」과 비슷하게 변화하였다. 허용 발음의 설정, 예시의 활용 방식 등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다른 점은 「조선말 표준발음법」(2016)에서는 한자어의 독음을 그대로 발음하려는 취지이고, 「표준 발음법」에서는 한자어의 현실 발음이 변화한 경우는 현실 발음을 기준으로 발음하려는 취지이다. 그리고 서로가 인정하는 문법체계가 다르기에 사용한 문법용어와 음운현상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 이 외에 두 규범에 적용된 맞춤법이 다르기에 맞춤법에 의한 차이점도 있다. 此论文通过比较中国朝鲜族社会制定的现行朝鲜语标准发音法和朝韩两国的标准话发音法,找出有差别的规定并研究差别点为目的。 为了更好的做比较,先展示了朝鲜语在中国的发展过程和朝鲜语标准发音法的制定历史。历史时期大致分为了光复前期,光复后期,自主规范期等三个时期。叙述了朝鲜族从韩半岛移居到中国的过程和语言规范的流入和朝鲜制定的语言规范给予的影响。【朝鲜语标准发音法】因受到了朝鲜的语言规范的影响,规范的结构大致跟朝鲜的语言规范相似,但也存在差别。根据性格分类展示了有差别的规定。近期多次修正了【朝鲜语标准发音法】。频繁地修改语言规范对语言教学环境和大众的语言生活造成不便。但是这种频繁地修正是为了迎合跟韩国交流的需求。 中国朝鲜语的现行标准发音规范是【朝鲜语标准发音法】(2016)。 为了更好地理解【朝鲜语标准发音法】(2016)先跟【朝鲜语标准发音法】(2007)做了比较。找出了有差异的结构和规定。有差异的规定的大部分是修正了之前不合理的规定。结构上的差异展示在以下几个方面。第一是新的规范采用的例外规定的标记参考了朝鲜和韩国的例外规定标记方法。第二是因受到了新的书写法的影响在字母的排列顺序和空写规则有别于之前的规范。第三是总则上出现了变化,但是现行的总则还是存在一些问题。 第三章和第四章比较了【朝鲜语标准发音法】(2016)和韩国的【标准发音法】 。第三章是音韵方面的比较,第四章是音韵现象的比较。另外有些规定在对方规范里是不存在的。这种规定分类到第五章一并研究。通过这种比较可以确认相互规定的差别点,并且找出了一些规定不足之处。还有对【朝鲜语标准发音法】(2016)的解说集里的误区做了批判。比较后可以看出朝鲜语的标准语规范跟韩语的标准语规范在结构上有所区别,但是规定的细节上跟韩国的叙述方法有些相近部分。比如许容发音的设定,例子的使用方式等比较相似。但是在汉字音的读法上,【朝鲜语标准发音法】(2016)尽量是维持汉字音,但是韩国的标准语发音法中,尽量采用了已经产生变化的现实生活中的汉字音读音。,还有因两国认准的语法不一样,导致了使用的语法用语不一样,而且对音韵现象的理解也产生了差异。除了这个差异之外,还有两国的书写发不一样导致的差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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