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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명학에서 윤리주체의 건립과 그 실현의 문제

        한정길(韓正吉) 한국양명학회 2001 陽明學 Vol.- No.5

        송명유학은 우주원리와 상통하는 인간의 본성실현을 통하여 인륜세계를 건립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특정적이다. 그럼에도 그 내부에는 본성실현의 방법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주자와 양명의 견해이다. 주자는 본성실현을 위해서 사물의 이치에 대한 탐구가 필수적이라고 본 반면에 양명은 마음에서의 공부만으로도 가능하다고 본다. 양명은 용장에서 심체가 우주와 인생의 대본임을 체득한다. 그 마음은 하나의 도덕적 자각능력으로서의 양지이다. 양지는 도덕정감과 도덕의식의 통일체이며, 천리와 명각의 통일체이다. 그것은 사물에 감통하여 그에 적합한 행위양식을 창출해낸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자사와 물욕을 지니고 있으며, 양지는 이들 사욕에 의하여 가리워질 수 있다. 따라서 내 마음의 양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해야 한다. 양명은 치양지를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방법으로 제출한다. 양명은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을 모두 치양지 공부로 통일시키며, 의념이 연관되어 있는 구체적인 사물에서 내 마음의 양지를 실현할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곧 자기의 본성실현과 구체사물의 특수성에 맞는 행위양식이 실현됨을 의미한다.

      • KCI등재

        王守仁의 中和說 연구

        한정길(韓正吉) 한국양명학회 2007 陽明學 Vol.0 No.18

        이 글은 陽明 王守仁이 중화문제를 처리하는데 나타난 그 특성과 사상사적 의의를 밝힌 것이다. 양명은 감정의 未發과 已發을 마음 작용의 前後ㆍ內外의 서로 다른 상태나 단계로 이해하는 기존의 견해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유행하는 마음의 본체와 그 작용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미발과 이발을 마음의 본체인 未發之中과 그 작용인 中節之和, 즉 ‘中和’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양명에게서 마음의 본체는 바로 良知이다. 따라서 ‘중화’문제는 곧 양지의 본체와 작용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 中和가 마음의 全體大用이 되는 것이 바로 大本과 達道이다. 양명은 미발이발과 중화를 양지의 체용으로 바꾸어 논의함으로써, 주자학에서와 같은 靜養動察의 공부가 필요 없이 오직 마음이 유행하는데 나아가 사욕을 제거하고 그 본체를 실현하는 ‘心上工夫’만으로도 致中和가 가능한 이론체계를 갖추게 된다. 양명은 계신공구와 신독을 모두 사욕을 제거하고 본체를 실현하는 공부로 통일시키고, 그것을 다시 致中和와 致良知의 공부로 요약한다. 中和를 하나로 파악하는 양명은 戒愼恐懼를 致中공부로, 愼獨을 致和공부로 이해하는 주자학적 관점을 비판하고, 그것들을 모두 致良知의 공부로 통일시킨다. 치양지는 양지본체가 유행하는 과정에서 자사와 물욕 등에 의해 가려진 것을 제거하여 본래의 밝은 상태를 회복하는 공부이다. 뿐만 아니라 그 것은 天性을 실현하는 공부이기도 하다.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을 밝게 드러내고 있는 양지에 따라 행위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본 성실현의 문제가 완전히 致良知의 문제로 전환된 것이다. 양명은 치중화를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지점인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생육되는 경지에 대한 풀이에서도 심학적 특징을 드러낸다. 그는 ‘天地位’와 ‘萬物育’을 하나의 일로 파악하고 그것들을 모두 내 마음 가운데의 일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마음의 본체인 양지의 감응으로 말미암아 천지만물이 일체가 된다고 보는 그의 철학적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 중화 의 실현은 곧 본성실현이다. 양명은 본성실현을 통하여 열리는 성인의 경계를 자기완성과 타자완성이 이루어지는 경계로 이해한다.

      • KCI등재

        한일합병과 시선의 정치학

        한정선(韓程善) 동양사학회 2005 東洋史學硏究 Vol.93 No.-

        This paper revisits Japanese political cartoons that represented the moment of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Since the formation of the new Meiji government, the ‘Korea problem’ was at thc heart of Japanese foreign affairs. When the problem was finally solved in the form of annexation, Japanese society expressed its excitement and enthusiasm through the cartoon media. By examining how the moment of annexation was captured and caricatured in Japanese society, I argue that there was the growing popular will to empire at the social level. In analyzing the cartoons on annexation, I classify them into five recurring patterns of imagination. They are the metaphors of light, train, animal, gender, and heroes. By imagining Japan-Korea relations through these five metaphors, the Japanese populace came to the consensus that enlightened and technologically advanced Japan must lead Korea into the modern world. To rationalize and justify Japan's leadership over Korea, the cartoons visualized an animalized and feminized Korea. By arbitrarily recollecting past heroes of foreign invasions and associating them with the annexation, the cartoons attempted to render annexation continuity with Japan's own past. Developing a distinctively Japanese but unmistakably modern style of visual representation, the cartoons on the Korean annexation contributed in creating a visual culture that molded Japanese will to empire.

      • KCI등재후보

        慶州 九皇洞 三層石塔 舍利莊嚴具의 再照明

        한정호(韓政鎬) 한국미술연구소 2006 美術史論壇 Vol.- No.22

        1942년 경주 狼山 동편에 위치한 구황동 삼층석탑 해체ㆍ수리 과정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장엄구는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유입을 계기로 야기되는 신라 사리장엄 방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이다. 사리함의 명문에 의하면 692년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탑이 건립된 이후. 700년 신목태후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서 702년에 효소왕이 승하하자, 성덕왕 5년(706)에 불사리 4과와 全金彌陀像 1구, 『무구정경』 1권을 추가로 봉안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 706년에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봉안한 배경에 대해『무구정경』의 ‘낡은 탑을 중수(修造佛塔)하는 功德’에 의거하여 성덕왕이 선대 왕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의도로만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건립된지 불과 14년 밖에 경과되지 않은 석탑을 낡은 탑〔塔〕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문헌자료를 통해 706년에 시행된 석탑 중수의 배경에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삼국사기』권 제8성덕왕조의 기사를 통해 당시 신라사회는 705년에서 706년 사이에 발생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백성들의 피해가 극에 달하였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성덕왕이 사리장엄구를 추가로 봉안한 배경에는 先祖에 대한 追福供養은 물론, 신라에 새롭게 유입된 『무구정경』의 威神力을 빌어 자연재해로 인한 국난 극복의 의도가 강하게 내포되어 없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구황동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 대해 품목별로 납입 시기를 살펴본 결과, 사리용기를 비롯한 유물들은 대부분 성덕왕대에 추가로 봉안된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692년 초창 당시에 납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은 금제여래입상이 유일한 것으로 판명됨에 따라, 초창당시의 사리장엄 방식이 금제여래입상을 중심으로 봉안되었을 가능성과 사리장엄구와 공반되는 불상의 성격에 대해 살펴볼 수 없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사리함에 기록된 납입품 가운데 무구정경은 1942년에 수습된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대나무 편들에 결부시켜, 付簡의 형태로 제작ㆍ봉안되었던 것으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무구정경』1권은 종이에 묵서된 寫經으로 별도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대나무 편에 기입된 經文은 다라니경 전체가 아니라 99벌 혹은 77볼 寫書한 6종의 陀羅尼呪 가운데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끝으로 706년에 추가 봉안되었던 금제아미타좌상 1구와 사리함 명문에 기술된 6寸 크기의 全金彌陀像 1구와의 관련성이다. 지금까지 논란을 빚고 있는 6寸 크기의 불상에 관해 여러 異說이 제기되었다. 사리함의 명문에 명시된 6寸은 周尺을 기준으로 금제여래좌상의 크기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구황동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에서 발견된 2구의 불상 가운데 명문에 기록된 ‘6寸 크기의 全金彌陀像’은 그동안 양식사적 접근을 통해 거론되어온 금제여래좌상임이 재확인되며, 아울러 신라에 周尺이 통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It is very important the reliquary discovered inside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Goowhang-dong in Cyeoungju that shows the change of practice with Buddhist relic woship as the introduction of R?mivimalavi?uddhaprabh?n?ma-sutra in Silla. The reliquary was engraved in 692 A.D.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Goo-wangdong was bolt to play for the repose of King Sinmoon by the King Hyoso and the Queen Sinmok, King Sinmoon's wife, then the Queen Sinmok who demised in 700 A.D. Also, the King Hyoso who demised in 702 A.D. This is next to the four pieces of the Buddha's bodily relic, one of the statues of Amitabha which is made of gold, one of the R?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were enshrined in by the King Sungduk, in 706 A.D. Therefore, we can think that the reason of adding to a re-liqury was to pray for the repose of the late king, based on the teaching R?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the charity of repairing a old pagoda. It is difficult that the three-story pagoda at Goowhang-dong has been only fourteen years since it was built thinking the age old pagoda. Therefore, in 706 A.D., the repairing of the stone pagoda can be another reason. On investigation, we can see that lots of people perished by famine and drought between 705 A.D. and 706 A.D. in Silla. It is the reason of adding to be enshrined a reliquary by the King Sungduk that pray for the repose of the late king and overcome a national crisis, through natural disaster and the power of the R?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We studied the time which reliquaries discovered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Goowhang-dong was buried. As a result, the majority of the main relics including reliqaury proved to be enshrined in the stone pagoda the King Sungduk period. Also, the stone pagoda was built first, 692 A.D. and Standing Buddha made of gold turned out the only relic buried at that time. So we can exam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liquary and Standing Buddha made of gold. The Ra?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in the buried items of being engraved a reliquary has relation to bamboo pieces which was written letters and missing since it was discovered, in 1942. It may be manufactured and enshrined as bamboo book form. But, according to witness's evidence at that time, one Ra?mivimalavi?uddhaprabh?n?ma-dh?ran?-sutra can be enshrined separately and The Sutra which was recorded of bamboo pieces cam be a part of charm copied ninety-nine or seventy-seven set, not all dh?ran?. Finally, the Buddhist statue of six Chon(寸) solved the exchange of Buddhist statue's size by calculating the measure of being reflected, In result, the size of Buddhist statue, six chon(寸) equal the size of the seated Buddha made of gold by JooCuck(周尺) Therefore, The Amitabha statue which is made of gold of six Chon(寸) size in the two Buddha statue of being discovered the stone pagoda was reconfirmed seared Buddha made of gold and it is a very important example that may be of use Joochuk(周尺) in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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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陽明의 ‘未發’觀과 良知體用論

        한정길(韓正吉) 한국양명학회 2009 陽明學 Vol.0 No.23

        이 글에서는 송명리학의 주요 논제인 ‘未發’ 문제에 대한 王陽明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왕양명이 ‘주자의 미발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주자가 미발 탐구를 통하여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왕양명의 미발관의 특징은 무엇인지’, ‘미발 문제에 대한 왕양명의 해결 방식이 지닌 의의는 무엇인지’ 등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주자의 미발설에 대한 왕양명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思慮未萌?知覺不昧’의 미발상태를 ‘자기 중심성이 탈락한 순일한 의식의 상태’인 ‘未發之中’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미발상태는 자기중심적으로 흐를 수 있는 氣가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에 불과할 뿐, 사욕이 없는 순수한 도덕본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발시의 존양공부를 통해서는 已發之和를 확보하기 어렵다. 또 하나는 ‘미발시에 지각자는 있지만 지각되는 것은 없다’고 봄으로써 미발시의 본체체인이나 성찰공부를 근본적으로 막아버렸다는 점이다. 미발시에 도덕본체에 대한 체인이나 성찰공부가 없다면 도덕실천 역량이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주자의 미발설은 도덕본체[본성]를 실현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되기에는 문제가 있다. 주자학의 미발규정과 미발시의 존양공부에 대한 양명의 비판이 가능한 것은 그가 미발을 주자학에서와는 전혀 달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명은 ‘미발’과 ‘이발’을 주자학에서와 같이 마음의 어떤 상태나 국면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지 않고, ‘마음의 본체[心體]’와 ‘마음의 작용[心用]’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양명은 끊임없이 활동하면서 만물을 창생하고 주재하는 本性[理]을 ‘마음의 본체[心體]’로 삼고, 그것을 ‘未發之中’으로 규정한다. 心體는 私欲이 없는 순수한 천리[心卽理]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의지함이 없는 ‘未發之中’ 일 수 있다. 그 心體[未發之中]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일반인들은 私欲이 심체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미발지중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다. 따라서 사욕을 제거하는 공부가 요구된다. 이 공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心體가 스스로 자신을 체인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양명은 心體가 이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 능력이 바로 良知이다. 양명은 天性이 스스로를 환하게 드러내는 밝은 능력[明覺]을 ‘良知’로 규정한다. 양지는 바로 ‘天性과 明覺’의 통일체이다. 이것은 심체 자체가 스스로를 환하게 드러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 것으로서, 良知를 心體로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良知가 未發之中으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마음의 본체인 양지가 미발지중으로 규정됨으로 해서 양명은 양지 체용일원의 틀로 미발이발에 관한 기존의 다양한 언급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본성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그 이론적 토대를 良知論을 통해서 마련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① 사려 발생의 시간적 선후를 의미하는 未發?已發의 개념과 心體로서의 未發=未發之中=良知의 맥락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 ② 未發之中이 본체 곧 양지로서 의미되는 맥락과 수행의 결과로서 도달되는 심의 경계로서 의미되는 맥락을 구분해 주었다는 점, ③ 心體와 心의 動靜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드러내주었다는 점, ④ 未發之中과 已發之和의 관계를 양지의 체용 관계로 설명한다는 점, ⑤ 中和를 실현하는 공부를 致良知 공부로 통일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 등의 이론사적 의의를 지닌다. 왕양명의 미발론이나 중화론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드문 이유도, 왕양명철학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양지론으로 전환되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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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격조사는 핵이 아니다

        한정한(韓政翰) 형태론 2010 형태론 Vol.12 No.2

        이 글은 지난 2008년 형태론 10권 3호에 실린 『다시 격조사는 핵이다』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쓰인 글이다. 필자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정한(2003)에 실린 『격조사는 핵이 아니다』에서 이미 밝혔지만, 임동훈(2008)에서 새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답함으로써 격조사에 대한 그간의 진전된 연구 성과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임동훈(2008)에서 새로 제기한 문제들은 세 가지였다. 차례대로 논의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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