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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몸의 정치학

        오진경(吳鎭敬) 한국미술연구소 2005 美術史論壇 Vol.- No.20

        몸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다루어졌던 전통적 주제 중 하나이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관념적이고 내재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형식주의 모더니즘 미술이 주류 미술동향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몸에 대한구체적인 관심은 한동안 미술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중심주의적인 모더니즘 미술도 1950년대와 60-70년대를 거치면서 팝아트나 네오-다다, 누보 레알리즘, 해프닝 등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제 미술에서는 기성 오브제나 내러티브한 문학적 요소 그리고 일상적인 몸짓 등 모더니즘 미술이 배척했던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요소들이 작품의 중요한 구성요소이자 주제로서 다시 부활되었다. 마침내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바디 아트라 불리는 선체를 활용하는 작업이 중요한 미술장르의 하나로 자리 잡았고,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몸을 표현대상이나 수단으로 삼는 미술이 가장 두드러진 경향의 하나가 되었다. 이제 미술가들에게 있어 몸은 자연에 속한 것이기보다는 사회의 코드를 따르는 문화적 산물로서,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의미화 방식을 느낄 수 있는 일차적이고도 구체적인 체험의 장소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가장 효과적인 표현수단이 된 것이다. 몸은 특히 여성주의적인 작업을 하는 여성미술가들에게 좋은 표현수단이 되었는데, 루이 즈 브루주아(Louise Bourgeois)나 신디 셔면(Cindy Sherman) 키키 스미스(Kiki Smith) 등과 같은 미술가들의 작업은 그 좋은 예이다. 서구의 페미니스트 미술가들 못지않게 한국의 여성 미술가들의 다양한 방식으로 몸을 다루면서,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성별 이데올로기와 의미의 재생산 과정을 날카롭게 분석하였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이 몸을 통해 여성주의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몇몇 한국 여성미술가들의 작품을 시대적으로 고찰하면서, 작가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여성의 몸을 쟁점화하고 있으며, 그 서술구조는 어떤 점에서 시대성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을 고찰한 것이다. 필자는 1960년대 후반 아방가르드적 해프닝에 참여하면서 사회를 향한 비판과 도전의 수 단으로 자신의 몸을 제공했던 정강자나, 심선희의 작품에서 부분적이긴 하나 여성주의적인 의도를 읽을 수 있다고 보았기에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후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 중반에 오면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여성주의적 작업이 ‘여성미술’ 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80년대의 여성미술은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적인 특수성을 반영하면서 , 민족주의나 사회계급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추었던 민중미술과 그 시각을 같이 하였던 운동이다. 따라서 여성마술에 재현된 여성이미지는 여성의 다양한 정체성을 나타내기보다는 저임금의 여성근로자, 어머니, 아내라는 극히 제한된 전형으로 나타나며, 작품 속에 재현된 여성의 몸은 대부분 사회의 지배계급으로부터 억압당하는 하층계급의 여성들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이불, 이융, 김난영 등의 여성미술기들은 몸을 정체성의 메타포로 보면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선언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1980년대 여성미술에서의 몸의 표현이 보다 당시 한국의 정치 사회적인 특수성 을 반영하는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하였다면, 1990년대의 여성미술기들은 일정한 양식에 머물거나 직설적인 서술방식을 거부한다. 이 신세대 여성미술가들은 몸을 기괴한 형태로 변형 시키거나 분절시키고, 통속적이고 키치적인 재현을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방식은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이 낯설음을 통해서 기존의 사회가 여성의 몸에 대해 지녔던 신비주의적이거나 유미주의적인 기대와 환상을 여지없이 전복시켜버린다. 1960년대 말 이후 1990년대까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궤적을 더듬어보면, 시대가 변하고 그에 따른 문화적 코드가 달라지면서 한국 여성주의미술 속에 등장하는 몸의 표현방식이나 그 함축의미도 함께 변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대적 어법은 다를지라도 여성주의 미술가들이 한국 사회에 내재한 성별 분리적인 사고와 제도에 도전하기위하여 몸의 정치학을 지속적이고도 창의적으로 수행해왔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점이다. 몸의 정치학이야말로 여성 주의미술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하나의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한 강한 추진력이었기 때문이다. Body has been one of the most traditional themes in western art throughout the ages. However, display of the artist's body remained largely repressed under the Modernist regime. The body has served for over two centuries as the 'phobic object' of artistic Modernism, threatening to undermine or even feminize the transcendent Cartesian subject. The resurging interest in the neglected realm of Body Art however, surfaced with the emergence of art practices such as Neo-dada, Pop Art, Nouveau Realism, Happening and Body Art in the fifties, sixties and seventies. Challenging the preconceptions of Modernism, these movements reinstated body as an important artistic theme as well as a medium of expression. Especially in the 1990s, the medium of body became particularly useful to many female artists who focused on issues related to identity and gender ideology. For these artists, motif of the body was often a socio-political signifier rather than something naturally given. Like many female western artists working with the medium of body (Louise Bourgois, Cindy Sherman, or Kiki Smith to name a few), a number of Korean female artists considered the motif of body in multifarious manners seeking to act against the oppressive dominant ideology and the process of cultural meaning-making in the Korean society. Accordingly, this paper intends to analyze in a chronological manner, the works of Korean female artists utilizing their own bodies as a basic medium of feminist expression, and to reveal the ideological narratives and cultural underpinnings from which signifying bodies are produced. In order to select objects of discussion, the discussion on the conception of Korean feminist art seems inevitable. Interpretations may vary depending on scholars, but I argue that at least some feminist intention could be found from Jung Kang Ja's avant-guardian happenings in 1967 which used the body as a medium for social critique and resistance During the 1970s, art forms using body as a medium of expression were dominated by conceptual performances mostly executed by male artists. Although we find some activities of the female artists during the time, considering their works as feminist is quite questionable. Therefore, the discussion will be lead to the feminist works of the mid-80s which grew parallel to the Minjung Misul movement. Feminist art of the 1980s has grown out of the unique socio-political situation of Korea. In conjunction with Minjung Misul, feminist art of the time emphasized nationalism and social disparity between class status rather than issues related to gender ideology. Women's bodies represented in these works were often unsexualized images of women such as poorly-paid laborers, generous mothers or faithful wives. Here the images of women functioned as a metaphor for the victimization of the country and elicited both anger and sorrow. The image also functioned as a tool to promote patriotism and social morality. Unlike the feminist body images in the 1980s, works form the late 1980s to the 1990s problematized the question of sexual difference. The works existed as a probing investigation of the female identity which was in a constant state of fluctuation. The discourse on the body was neither monolithic nor politically specific as in the earlier decade, but rather exhibited many elements, having no coherent form or linear narrative structure. They ironically combined the effort to prove the subjectivity of the body with the effort to deconstruct identity. Among the artists who deal with the performance idiom in a serious and concerted manner, I analyzed works of Lee Bul , Lee Yum, and Kim Nanyoung. As such, the current study demonstrates a continuous feminist discourse in art from the late 1960s through the 1990s. The process involves continually rethinking the conditions of the Korean art world and the status of Korean women and feminist art criticism within that sphere. Whether being the object of expressio

      • KCI등재

        최순우(崔淳雨) 선생의 공예 연구

        최응천 ( Choi Eung Chon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8 강좌미술사 Vol.51 No.-

        최순우 선생의 공예 분야의 연구 성과는 비록 개설의 성격이지만 최초로 우리나라 공예 분야를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시대별로 정리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을 소개한 미술서적이 전무하였던 당시 상황에서 한국 공예에 관한 소개서를 일본에서 출간한 공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 여기에 일찍부터 한국 목공예품이나 민속공예품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주목받지 못했던 분야의 저술을 남겼고 『韓國의 木漆家具』라는 역저를 출간하여 조선시대 목공예품을 비롯한 나전칠기를 민예품의 차원을 떠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당당한 예술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선생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미술사의 업적은 도자기와 회화 부분에서 단연 돋보이며 특히 국립박물관의 조사 성과를 토대로 초기 고려청자 요지를 밝힌 것도 주요한 업적이다. 白磁 大壺를 ‘달 항아리’, 玉璧底 굽을 ‘햇무리 굽’ 이라는 도자 관련 용어를 우리말로 고쳐 부른 것도 선생의 천부적인 어휘력과 탁월한 미감에서 창출된 것이다. 선생의 고려나 조선의 도자기 논고를 제외한 공예 관련의 단편 논문은 5 편 정도가 확인되며 주로 고려 범종에 관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일찌감치 선생 역시 한국 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틈틈이 조사하여 자료를 남기고자 했음이 파악된다. 나머지 글들은 대체로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된 비교적 짧은 글들이지만 여기에 선생이 지닌 평소의 미의식과 탁월한 식견, 나아가 일반 독자들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여 한국 공예의 우수성을 소개한 점은 공예사 분야의 숨은 성과로 판단된다. 지면상의 한계와 학술 논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글 중간 중간에 드러나는 전문가적 식견은 선생의 평소 여러 분야에 노력을 경주한 학문적 깊이가 느껴진다. 논문의 성격을 띤 글들이 주로 회화와 도자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에 비하여 공예에 관한 글들은 수필이나 에세이 성격을 지닌 단편적인 글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공예 분야의 글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미술사학자들이 추구하지 못했던 다양한 분야의 공예품을 고대부터 조선시대라는 통시대에 걸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선생이 지닌 통찰력과 타고난 심미안을 통해서 가능했지만 평생을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한국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기울였기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선생은 그동안 외국인과 일본인이 지녔던 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구체적이고 명쾌한 우리의 시각으로 한국미술을 설명하고 한국 공예의 특질과 아름다움을 도출해내는데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미를 일본과 미국 유럽에 알리고자 국립박물관 재직시절 기획하고 총괄하였던 <한국미술 오천년>전시는 가난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5000 년이라는 유구한 문화를 지녔음을 전 세계에 알린 훌륭한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바로 이 전시의 중심에서 한국 문화재를 세계 속에 알린 가장 훌륭한 문화 외교관이셨다. Research accomplishment in the craft history field of Choi Sun-woo is introductory in nature, but it is the first time that the Korean arts fields were organized by period from Three Kingdoms Period to Joseon era. In a situation with the absence of an art book introducing Korea, he would publish introducing books about Korean crafts overseas in Japan. Early on, he focused on Korean woodwork and folk crafts, and left the books in a field that was not very noticeable to upgrade them to the representative artworks of our country beyond simple folk art crafts. Among his accomplishments related to craft history are conspicuous in ceramic history studies. It is also one of the major accomplishments that based on the survey results of the National Museum, he clarified the kiln site of the early Goryeo celadon, and revised the ceramics related terms 'Dalhangari' and 'Haetmurigup' in Korean. The short articles related to crafts, except for his papers on ceramics, are about five, and it is understood that the contents of Goryeo bells mainly recognized the importance of Korean bells early at the time. The rest of the articles related with crafts are relatively short essays published in newspapers and magazines, but the point that his aesthetic sense, excellent insight, and easy-to-understand explanations for everyone in general, introduced the excellence of Korean crafts is a hidden achievement in the field of craft history. Although it is not an academic paper, his works reveal the depth of the profession through the contents of the expert’s opinion. It is noteworthy that the arts of various fields, which were not pursued by other scholars of art history, have been interested from ancient times to the Joseon period. It was because of his insight and innate aesthetics that he spent his entire life at the National Museum, so that he could express his deep affection for Korean cultural assets. Away from Korean art, which was depicted by perspectives of foreigners, through our concrete and clear vision, he devoted his life to deriving the qualities and beauty of Korean crafts. The exhibition of “Five Thousand Years of Korean Arts”, which was planned and organized by him when he worked at the National Museum to inform the beauty of Korea to Japa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is an excellent opportunity to show the world that Korea was a cultural nation with a 5000 year old culture. He was the greatest cultural diplomat who informed the world of Korean cultural assets in the very center of this exhib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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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순우 선생의 석탑과 석조 미술사 연구

        소재구 ( So Jaegoo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8 강좌미술사 Vol.51 No.-

        최순우(崔淳雨, 1916-1684) 선생은 평생을 국립박물관에 재직하면서 국립박물관의 초석을 다진 분이다. 또한 한국 미술사학계의 원로학자로서 수많은 연구논문과 글을 남겨 온 국민과 후학들에게 우리의 전통 문화예술이 간직해온 위상을 일깨워주었던 선구자이다. 선생이 남겨 놓은 수백 편의 글 중에서 석조미술에 대한 논고는 극히 드물다. 아마도 당시의 사회에서 한국 전통 미술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공예와 회화 및 조각 분야에 많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지 결코 석조미술에 식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 된다. 그 예로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등에 대한 논고를 읽어보면 한국불탑 조성의 발자취와 그 시대적 특징을 조목조목 정리하는 가운데에서 선생의 식견을 피력하고 있어 이 분야에도 상당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석조건축이나 석조미술 분야의 연구 대상물 중에서도 조형적 창의성과 조성기법이 탁월한 작품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예로 불국사 석조기단의 특수한 설계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에 보이는 부조 장식과 석사자를 응용한 기둥 등을 언급한 내용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30 여 년이 지난 지금도 불국사 다보탑의 조형적 분석과 미술사적 해석이 전무한 상태이며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도 조성시기의 편년에 약간의 진전이 있었을 뿐 탑 조형의 해석에는 설득력 있는 연구가 미진한 상태이다.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서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조형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으며 어떤 진전의 이행이 있었는지조차도 뚜렷이 밝혀진 바가 없다. 심지어 통일신라시대에 들어 석탑의 기단이 어떤 연유에서 2 층 기단으로 정형화 되었는지도 연구된 것이 없다. 선생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불국사의 대석단(大石壇) 또한 그 조성 연원과 조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도 학계에서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겨져 있다. 이 글에서는 선생이 관심을 가졌던 대표적인 석조문화재인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불국사 대석단에 대하여 필자가 갖고 있는 새로운 시각의 조형적 분석을 실험적 차원에서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의 사자형 석주 조형의 연원을 고대 중국의 석비상의 사자장식 대좌의 조형에서부터 검토하였으며 불국사의 대 석단은 중국 및 아시아의 남방 수변건축에서 그 조형의 연원을 찾아보았다. 이와 더불어 불국사 다보탑과 석굴암 본존상의 조형이 의미하고 있는 통일신라 전성기의 남방 선진문화 도입의 양상도 풀어보았다. 우리는 석탑의 석조미술사를 연구해오면서 석조물 구조의 변화에만 골몰하여 모든 석조문화재의 조성시기의 연구에만 치중하였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조형의 의미를 분석하고 조형적 특징이 보여주는 시대적 문화양상을 역사적으로 재해석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몇 가지 더 조형적인 재해석이 요구되는 석조분야의 장식기법에 대하여 새로운 의견을 피력하였다. Director General Choi Sun-woo(崔淳雨, 1916-1684) is the founder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nd he spent his entire life at the National Museum. And also as a senior scholar in Korean art history, he is a pioneer who have left countless research papers and writings that our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have been preserved. But his work on stone art history is rare. Perhaps it was because there was a lot of interest in Korean traditional art culture in the society at the time, focusing on craft, painting and sculpture. I do not think that he was not interested in stone art at all. For example, in his treatise on the stone stupas, he explained the footsteps of the creation of the Korean stupa and characteristics of the each period. He was also considerable interest in this area. Among the objects of study in stone architecture and stone art field, he was especially interested in works with excellent formative creativity and creation techniques, for example, the special design of the stone foundation on the Bulguk-sa Temple and the relief and lion decoration on the three-storied stone pagoda of Hwaeom-sa Temple. However, even after more than 30 years since he left the world, there has been no formative analysis of the stone art and architecture in Bulguk-sa Temple. The lion-decoration stone stupa in Hwaeom-sa Temple has also made some progress on the study of construction period, but there is little persuasive research on the interpretation of the meaning of the molding. In addition, there was no research on the clear relationship between the stupa of the Mireuk-sa Temple-site and Five storied stupa of the Jeongrim-sa Temple-site of Baekje. Even in the Unified Silla period, there is no study on how the base of the stone stupa has been stylized to the double floor. The grand stone base of Bulguk-sa Temple, which he did not care for his praise, is still left unsolved. In this paper, I tried the experimental analysis of my new perspective on the lion-decoration three-storied stone stupa of the Hwaeom-sa Temple and the grand stone base of Bulguk-sa Temple which he was interested in. For example, the lion-decoration three-storied stone stupa of Hwaeom-sa Temple were examined from the molding of the lion-decoration pedestal of the ancient Chinese stone statue and I researched the formative origin of the grand stone base of Bulguk-sa Temple in the southern waterside architecture of China and Asia. In addition to this, on the aspect of the Dabo-tap stupa of Bulguk-sa Temple and the prime statue of Seokgul-am Temple, I also suggested introduction of the advanced culture of the southern advanced Asia and China in Unified Silla period. Finally, I gave a new opinion on the decoration technique of the stone art field which requires some more formative reinterpret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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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회화사와 그림의 國籍 문제: 高麗·朝鮮時代 傳稱 회화작품에 대한 재검토

        장진성 한국미술연구소 2010 美術史論壇 Vol.- No.30

        동아시아회화사라는 학문적 영역의 구축을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과제가 있다. 동아시아회화사라는 미술사적 개념이 동아시아 삼국의 회화적 발전을 거시적인 차원에서 파악하는데 필요하다면 먼저 왜 이러한 학문적 범주의 설정이 필요하며 아울러 그 내용은 무엇인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중국회화사, 한국회화사, 일본회화사를 단순히 기계적으로 통합하여 동아시아회화사라는 범주를 만드는 것은 동아시아회화사를 구성하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규명하지 못할 경우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회화사라는 학문적 범주를 정확하게 설정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중국, 한국, 일본의 회화 전통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국적이 불분명한 회화 작품을 연구할 때 동아시아적 시각은 절대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현재까지 국적이 모호하고 회화사의 일반적인 흐름에서 이탈한 ‘境界性 그림’들은 상당수 존재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정확하게 동아시아 삼국 중 어느 나라의 그림들인지 확정하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특히 국적이 모호한 그림들 중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그림으로 전칭되는 작품들이다. 현재 한국 그림으로 전칭되는 작품들 중 상당수는 어떤 특정한 이유에서 한국 그림으로 전칭된 작품들이 아니다. 전형적인 중국 그림도 아니며 일본 그림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경우 한국 그림으로 추정되어 왔다. 즉 非전형적 중국 및 일본 그림=한국 그림이라는 매우 기이한 등식이 성립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해당 작품을 면밀하게 살펴볼 경우 이 등식의 恣意性을 곧 발견하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한국 그림으로 전칭되어 온 작품들을 중심으로 그림의 국적 규명에 있어 동아시아적 시각의 필요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동아시아회화사라는 거대 범주를 설정하기에 앞서 동아시아 삼국 모두에 관건이 되는 ‘경계성 그림,’ 특히 한국 그림으로 전칭되어 온 작품들을 통해 동아시아회화사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고연휘(高然暉) 필 <하경산수도>와 <동경산수도>, 京都國立博物館 소장의 <하경산수도>와 <동경산수도>, 京都 相國寺 소장의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는 모두 중국의 지방 화가가 그린 그림을 한국 그림으로 오인하는 과정에서 국적이 혼동된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고연휘 필 <하경산수도>와 <동경산수도>의 경우 고연휘에 대해서는 원대 미법산수화의 대가인 고극공(高克恭, 1248-1310)의 자(字)인 ‘언경(彦敬)’이 고연휘의 ‘연휘’로 와전(訛傳)되었다는 의견, 즉 고언경과 고연휘는 같은 인물로 고극공이 고연휘로 잘못 알려졌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어 왔으며 아울러 고연휘의 경우 중국 측 기록에 보이고 있지 않아 한국 화가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모두 신빙할 수 없는 추정에 불과하며 고연휘는 중국측 문헌기록에 보이지 않는 일전(逸傳) 화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편 고연휘 필 <하경산수도>와 <동경산수도>의 경우 양식적으로 대진(戴進)의 화풍을 기초로 다른 절파화가들의 화풍이 혼합되어 있는 양상을 보여준다. 즉 <하경산수도>와 <동경산수도>는 절파계 그림으로 대진과 15세기 절파화풍을 바탕으로 했지만 양식적으로 매우 퇴화(退化)된 양상을 보여주며 <동경산수도>에서 볼 수 있듯이 후기 절파적 특징도 포함하고 있어 대체적으로 16세기 전반 경... The concept of East Asian painting is of great importance in understanding the artistic interaction among China, Korea, and Japan. It is significant to examine the complex ways in which Chinese, Korea, and Japanese paintings shared the common styles, techniques, themes beyond their indigenous developments. The shared commonness of East Asian painting, however, poses an important problem: the issue of nationality for a group of paintings. There are, in fact, numerous paintings that have nationality problems. It is sometimes extremely difficult to decide the country to which those paintings belong. This essay examines the paintings that have long been considered Korean paintings. Summer Landscape and Winter Landscape, now in the Konchi-in, Kyoto, attributed to a certain Yuan-period painter Gao Ranhui, has been thought to be Koryŏ-period paintings. The name of the painter is not mentioned in any Chinese textual source. His name is found only in Japanese texts. There has been a debate over the nationality of Gao Ranhui and the landscapes. Gao Ranhui has been considered the same person as the eminent painter Gao Kegong. He has been even assumed to be a Korean painter of the Koryŏ period. In style, Summer Landscape and Winter Landscape is close to paintings by Dai Jin, Zhu Duan, Xie Huan, and Li Zai in terms of style, composition, and the depiction of rocks and trees. While the landscapes show clearly some of the stylistic hallmarks of the Chinese Zhe school, there is no extant Korean painting that is similar in style to them. In all likelihood, Summer Landscape and Winter Landscape were painted by a Chinese local painter who was active in the first half of the sixteenth century, working in the manner of Dai Jin and later Zhe school masters. Summer Landscape and Winter Landscape, currently in the Kyoto National Museum, have also been attributed to a certain sixteenth-century Korean painter. There is no evidence for such attribution. It is only based on the belief that these paintings do not appear to be Chinese. The assumption is that if these paintings are not Chinese, they are probably Korean. This is, in fact, a groundless conjecture that does not have any solid evidence. The composition of Winter Landscape is, however, shows a striking similarity to that of Winter Landscape by Dai Jin, now in the Kikuya family collection. There is none of the characteristics of sixteenth-century Korean paintings found in the Kyoto National Museum landscapes. Both landscapes appear to have been painted by a Chinese local painter emulating the styles of Dai Jin. Winter Landscape in the Sokokuji Temple, Kyoto, is another case. It has been attributed to either the Yuan dynasty painter Zhang Yuan or a certain Yuan-period Chinese painter working in the styles of Li Tang and Xia Gui. It has also been attributed to a certain Korean painter of the late Koryŏ or early Chosŏn period. The composition and brushwork of Winter Landscape are close to those of Winter Landscape of the Khōtō-in landscapes attributed to Li Tang and Fishing Village in Evening Glow by Muqi, now in the Nezu Museum. Many issues of nationality in East Asian painting remain unresolved. It is time to rethink and reexamine paintings whose nationality is still question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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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수영 박사의 한국 범종 연구와 성과

        최응천 ( Eung Chon Choi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4 강좌미술사 Vol.43 No.-

        황수영 선생이 평생에 걸쳐 집필한 한국 범종 관련된 자료소개나 논문은 대략 29 편 정도이다. 물론 여기에는 같은 종류의 범종을 중복해서 다른 곳에 소개하거나 여러 편을 묶어 고찰한 논고도 포함된다. 범종의 제작 년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한국 범종의 기원과 형태 문제를 다룬 3 편의 글과 統一新羅鍾5 편, 高麗時代鍾18 편, 朝鮮時代鍾3 편과 연구 현황을 다룬 1 편이 확인된다. 그 가운데 高麗時代鍾연구가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統一新羅鍾의 경우 일찍부터 알려져 왔고 많은 연구 현황이 이루어지 반면에, 당시 새롭게 알려지기 시작한 개인 소장 高麗鍾이나 새로이 출토된 高麗鍾은 선생 외에는 잘 파악할 수 없었기에 우선적으로 소개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범종 연구사에서 더욱 돋보이는 성과는 우리나라 최고의 鍾인 上院寺鍾이 安東에서 옮겨 진 것을 밝혀 上院寺鍾의 원 소재지 문제를 다룬 논문과 3 년 만에 소실된 禪林院址鍾의 현황과 명문, 출토 상황 등을 자세히 밝혀놓음으로써 자칫 사라질 뻔 하였던 統一新羅鍾의 귀한 사례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한 세 편의 논고, 實相寺鍾의 중요성을 고찰한 글들을 통해 統一新羅美術에서 新羅鍾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부각시킨 일이다. 또한 일본에 소재한 한국 범종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여 틈나는 대로 그들을 소개하고 명문을 실어 자료로 활용토록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성과는 .韓國金石遺文.에 다시 정리되어 간행됨으로써 한국 범종 연구에 가장 중요한 기초 자료집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아울러 선생에 의해 설립되어 이후 한국 범종 연구의 중심이 된 韓國梵鍾硏究會(현 梵鐘學會)와 .梵鐘.지의 창간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미술사에서 유독 한국 범종 연구를 독립된 분야로 연구될수 있도록 가치를 정립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여기에 미술사에서 범종 연구지나 범종연구회의 경우 일본보다 한국이 훨씬 앞설 수 있게 된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한 공로의 하나이다. 이처럼 한국 범종 연구에 있어 선생이 이룩한 한국 범종 관련의 업적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더욱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Dr. Hwang Soo Young wrote 29 research papers including introduction of materials for Korean Buddhist bell throughout his lifetime. There are three articles which was dealing with the problem of the origin and form of Korean Buddhist bell, five articles related to Buddhist bells of Unified Silla dynasty, eighteens articles related to those of Goryeo dynasty, three articles related to those of Joseon dynasty, one article about the research status. Among the 29 research papers a study on Buddhist bells of Goryeo dynasty have accounted for most quantities. The outstanding achievements in his study about Korean Buddhist bell is to highlight the meaning and value of Buddhist bell of Unifed Silla dynasty through three articles related to the original location Buddhist bell of Sangwonsa temple, three articles about status, inscription, and excavated situation of Seonrimwon temple bell destroyed by fire, and one article dealing with the significance of Silsangsa temple bell. Also he appreciated the significance of Korean Buddhist bells located in Japan, and introduced them ever put to excellent advantage in resources. It is re-published from 『韓國金石文(Korean epigraphs left by a deceased)』 that played the most basic role for researching Korean Buddhist bells. Also the foundation of Research Group of Korean Buddhist Bell(now The Association of Korean Buddhist Bell) and journal Beomjong(Korean Buddhist bell) established by him played important role in boosting value as an independent field in Korean art history. In additionResearch Group of Korean Buddhist Bell and journal Beomjong became the important momentum to lead in studying Buddhist bells. Thus, his achievements of studying Korean Buddhist bell have the important significance and value than any other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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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革美術 연구에 관한 몇 가지 문제

        鄒躍進 한국미술연구소 2008 美術史論壇 Vol.- No.26

        본 논문은 문혁미술 연구 중 몇 가지 문제에 대한 반성과 사고이다. 그 문제들은 ‘문혁과 문혁미술의 관계’, ‘마오쩌둥(毛澤東) 시대 미술에서 문혁미술의 위상’, ‘문혁의 기간과 문혁미술의 기간’, ‘문혁미술의 기본 성격과 특징’, ‘문혁의 성격, 기원과 문혁미술’ 등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만 한 발 더 나아가 문혁미술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본문 중에는 상기 문제들에 대한 필자의 인식이 근거하는 방법과 입장 역시 간단히 논술하였다. 문혁미술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아직 초보 단계에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문혁미술 연구에 대한 진정한 학술적인 관점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문혁과 문혁미술에 대한 여러 가지 태도, 견해와 의견은 지극히 명확할 뿐 아니라, 두 단계의 큰 발전을 거쳤다. 다시 말하자면 1980년대 지식문화계에서 정치계까지 문혁과 문혁미술에 대한 태도는 거의 철저히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단순한 부정보다 그 역사의 복잡성에 대해 사고하게 되었다. 이것은 1990년대 이후 문혁과 문혁미술 연구에 일어난 중대한 변화였고, 그 중 중요한 상징적 변화는 바로 1990년대 출현한 ‘자유주의와 신좌파 간의 논쟁’이었다. 1990년대의 이 논쟁은 사실 시장경제가 시작된 이후 중국 사회에 일어난 급속한 변화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런데 이 반성 중에는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견해를 언급하고 있었으므로 문혁과 문혁미술에 관한 문제 역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즉, 1990년대 해외에서 돌아온 중·청년 학자들은 마오쩌둥 시대의 가치에 대해 새로운 사고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제는 1980년대 문혁에서 막 벗어나 문혁과 문혁미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던 것과 달리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있으며, 문혁과 문혁미술에 대한 의의 역시 훨씬 복잡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서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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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洋美術史學의 형성과정에서 역사관ㆍ문화적 가치관

        후지하라 사다오(藤原貞郞),안재원(번역자) 한국미술연구소 2005 美術史論壇 Vol.- No.20

        20세기 초에 일본미술사를 확립한 일본의 미술사가는 자국의 미술사를 기반으로 하여 문화적 판도를 확장하고, 한국ㆍ중국의 미술을 포함한 동양미술사를 구상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歐美의 오리엔탈리스트와 미술사가는 새롭게 개시하여 성과를 올린 고대중국의 고고학을 중심으로 한 동양미술사를 구상하고 있었다. 일본은 주로 전통적으로 전해온 중국의 서화골동을 대상으로 한 동양미술사를 인습적인 미적 가치관에 따라서 형성하려고 하였다. 한편 구미 각국은 고고학적 지식에 의해 새롭게 발견한 미술품을 대상으로 형식학을 방법론적 중심으로 한 양식사로서의 동양미술사를 지향하였다. 고유의 문화사적 배경을 가지고 서화골동을 애호 하는 동양적 가치관의 표상으로서의 미술사와 서양의 근대적 학문으로서의 미술사학은 동양 미술사 구상의 기원에서 일본과 구미 간의 역사관과 방법론에 대한 알력을 품게 되었다. 중국미술 연구가 국제적인 확장을 보인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서 동양미술사 편찬의 기원에 있어서의 일본과 구미의 알력은 서로 경합하고 반발하고 또 서로 이용하면서 복합적인 단층을 잇달아 만들어 갔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고고학적 고대를 고전적 규범으로 하는 서양의 미술사 이념은 皇統의 일관성을 전제로 하는 역사관과는 양립할 수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고대의 고고학과 중세 이후의 서화 중심의 미술사관을 분리시키게 되었다. 구미와의 경합 내지 반발로부터 동양주의의 발로로서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은 서화 연구가 미술사의 중심을 노리게 되는 한편, 구미가 전개한 고고학적 성과를 일본의 미술사관과 접촉할 수 없게 하여, 구미를 통한 연구자들에게 학문적 열등감을 품게 하였다. 실제 구미의 고고학ㆍ미술사는 중국의 고대로 눈을 뜨게 하고, 양식분석에 의한 많은 공헌을 가져왔다. 드디어 그 성과를 배경으로 해서 1930년대에는 일본의 단독 무대였던 회화사 연구에도 구미의 미술사가가 참가한다. 고대 그리스 연구의 성과를 중국 고고학에 응용한 것처럼 르네상스 회화의 연구의 성과를 동양의 회화에도 응용하려고 한 것이다. 체계적인 방법론을 기본으로 한 구미의 양식사관은 일본이 괴리시킨 고대미술과 중세미술을 일관된 역사적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 역사관을 배경으로 일본의 동양미술사와 미적 가치관을 비판하는 것도 나타난다. 동양미술사학의 기원과 초창기에 관찰된 일본과 구미의 단층은 구미의 학문적 미술사의 우수성을 보여 준 것도, 일본(중심)적 미술사관의 (정치적) 오류를 보여 준 것도 아니며, 동양 미술을 둘러싼 미적 가치관의 소유권과 학문적 패권을 건 경합의 소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지금도 잔존하는 이 단층을 우리들은 안이하게 해소 내지 와해시키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국제적 경합 속에서 국경도 학문적 범주도 넘어서면서 분단화된 복합적인 20세기의 귀중한 역사적 현상으로서 다루고 싶었다. 국제화되고 국민주의가 대두한 오늘날, 그리고 학문의 보편주의도 인습적인 미적 가치관도 신뢰할 수 없게 된 오늘날, 동양미술사라는 학문사를 다시 묻는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일 것이다. After having established the basis of Japanese art history in the early 20th century, Japanese art historians attempted to expand the domain of their art history, envisaging the creation of the Far Eastern art history including Chinese art and Korean art. In almost the same period, on the other hand, the Western orientalists and art historians started shaping another Far Eastern art history with the archeology of ancient China as its axis. The archeology of ancient China was begun in this period and was bearing fruit. The Western countries focused on ancient Chinese archeological objects discovered by their archeological survey in situ, envisaging the Far Eastern art history as a history of style using the formal analysis as a methodological base, whereas Japan tried to create the Far Eastern art history in accordance with Japanese conventional esthetic and cultural values, giving high priority to the Medieval Chinese pictures. Thus, at the dawn of the Far Eastern art history, there brought about the gap in historical perspectives as well as in methodology between the Oriental art historiography conceived by Japan and that projected by the Western countries. From the 1920s to 1930s, in the period when studies on Chinese art had been internationally developed, the conflict between Japan and the Western countries sequentially produce complex faults while they were competing, opposing and exploiting each other. From the viewpoint of Japan, the ideal of the Occidental art history, which regarded the archeological ancient era as a classical model, was incompatible with the Japanese historical perspectives considering the unbroken imperial line as the premise, inevitably isolating the prehistoric archeology from the art history mainly centering on the calligraphic works and paintings after medieval times. The studies on calligraphic works and paintings, which enjoyed a privileged position as the evidences of the Asia-centrism because of the rivalry with and the opposition to the Occident, were dominant in the art historiography. On the other hand, even Japanese art historians familiar with the Occidental culture failed to connect the archeological results developed by the Western countries to the Japanese art historical perspectives, and as a result, suffered from an academic inferiority complex. In fact, the archeology and art history established by the Western, focusing on ancient China, greatly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Chinese art history. Then, in the 1930s, with the results of studies on ancient China, the Occidental art historians started taking up the studies on Chinese painting history that had been exclusively dominated by Japan until then. They wanted to apply the results of Renaissance painting studies to the Far Eastern paintings as they had applied the results of their studies on ancient Greece to the Chinese archeology. The occidental stylistic historical view based on a systematic methodology allowed the ancient art and me medieval art to be successfully put on the same historical perspective line, which had been isolated by Japan. From such a historical view, some Western art historians began criticizing the Far Eastern art history and the esthetic value established by Japan. The faults between japan and the Occident, observed in the origin and pioneer days of the Far Eastern Art historiography, exhibit neither the superiority of the Occidental academic art history nor the (political) erroneousness in japan (-centric) art historical perspectives; they should be regarded as the results of competition for the propriety light for an esthetic value and academic hegemony in the field of Far Eastern art. We are going to deal with the faults, possibly still existing even today, as a precious historical phenomenon in the 20th century in international conflicts rather than as a problem to be solved or settled. In this age of internationalization with the contradictory emergency of nationalism, the age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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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革美術 연구에 관한 몇 가지 문제

        저우웨진(鄒躍進),이보연(번역자) 한국미술연구소 2008 美術史論壇 Vol.- No.26

        본 논문은 문혁미술 연구 중 몇 가지 문제에 대한 반성과 사고이다. 그 문제들은 ‘문혁과 문혁 미술의 관계’, ‘마오쩌둥(毛澤東) 시대 미술에서 문혁미술의 위상’, ‘문혁의 기간과 문혁미술의 기간’, ‘문혁미술의 기본 성격과 특징’, ‘문혁의 성격, 기원과 문혁미술’ 등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만 한 발 더 나아가 문혁미술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본문 중에는 상기 문제들에 대한 필자의 인식이 근거하는 방법과 입장 역시 간단히 논술하였다. 문혁미술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아직 초보 단계에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문혁미술 연구에 대한 진정한 학술적인 관점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문혁과 문혁미술에 대한 여러 가지 태도, 견해와 의견은 지극히 명확할 뿐 아니라, 두 단계의 큰 발전을 거쳤다. 다시 말하자면 1980년대 지식문화계에서 정치계까지 문혁과 문혁미술에 대한 태도는 거의 철저히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단순한 부정보다 그 역사의 복잡성에 대해 사고하게 되었다. 이것은 1990년대 이후 문혁과 문혁미술 연구에 일어 난 중대한 변화였고, 그 중 중요한 상징적 변화는 바로 1990년대 출현한 ‘자유주의와 신좌파 간의 논쟁’이었다. 1990년대의 이 논쟁은 사실 시장경제가 시작된 이후 중국 사회에 일어난 급속한 변화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런데 이 반성 중에는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견해를 언급하고 있었으므로 문혁과 문혁미술에 관한 문제 역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즉, 1990년대 해외에서 돌아온 중ㆍ청년 학자들은 마오쩌둥 시대의 7에에 대해 새로운 사고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제는 1980년대 문혁에서 막 벗어나 문혁과 문혁미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던 것과 달리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있으며, 문혁과 문혁미술에 대한의의 역시 훨씬 복잡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서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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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카운티미술관 < 신흥사(神興寺)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유경희 ( Kyung Hee Yu ) 한국불교미술사학회(한국미술사연구소) 2015 강좌미술사 Vol.45 No.-

        미국 LA 카운티미술관(The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는 소장품 가운데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불화가 있다. 불화의 하단에는 畵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불화는 1755년 조성되었으며 한국의 강원도 설악산 神興寺에 봉안되었던 < 신흥사 영산회상도 >로 밝혀졌다. < 신흥사 영산회상도 >는 1950 년대까지 설악산 신흥사 極樂寶殿 안에 불상 뒤에 後佛畵로 봉안되었다. 원래 신흥사가 위치한 지역은 한국전쟁이 있었던 1950 년대 초반 치열한 격전지였으며 군인들의 집결지였다. 1951 년부터 54 년까지 이 지역에는 미군정이 설치되었고 여기서 통신장교로 있던 폴뷰포드팬처는 이 일대를 카메라에 담았는데 그가 찍은 사진에는 < 신흥사 영산회상도 >가 신흥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모습이 실려 있다. 1960 년대 이후 불화는 신흥사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불화가 미국 LACMA 에 부임해온 한국인 큐레이터에 의해 6 조각으로 나눠진 상태로 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불화를 보존처리 계획이 수립되었고 한국의 서화보존처리 전문가인 박지선교수와 정재문화재연구소가 2010 년부터 12 년까지 불화의 복원을 맡았다. 잘라진 면들이 잇대어 한 폭의 불화로 다시 만들어져 현재 < 신흥사 영산회상도 >는 LACMA 한국실을 대표하고 있다. 불화의 도상은 석가모니가 인도 영취산에서 깨달은 바를 설법하고 있을 때 그의 주위로 모여든 여러 인물들을 그린 靈山會上圖 이다. 가로로 긴 구성을 취하는 이 불화는 석가의 깨달음과 그의 설법을, 안정감 있는 구도위에 한 폭의 불화로 완성하였다. 채색은 원봉안처를 떠나 수리과정에 이르기까지 변색과 박락 등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면서도 파스텔톤의 중간색을 사용하여 차분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준다. 화기에 의하면 불화의 조성은 청허 휴정의 법맥을 잇는 월저 도안의 문중 승려 계통이 후원하였고 그 중심에는 용암 체조라는 승려가 있었다. 제작 화승과 계보에 대해서는 많은 과제가 남아있지만 불화의 존재를 통해 수화승 다음으로 나오는 화승 七惠의 불화 제작이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보살의 인물의 특징 등에서는 18 세기 불화승 의겸의 특징이 엿보이는데, 이는 칠혜와 함께 <봉선사 괘불>을 조성한 각총과 의겸과의 화연관계를 통해이 불화와의 상관성까지 유추해보았다. 또한 불화에 기록된 화기를 통해 불화와 왕실과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L.A County Museum of Art 에 한국실을 대표하는 소장품으로 주목받는 이 불화는 조선18 세기 중반 강원도 신흥사에 봉안되었던 <영산회상도>로 18 세기 중반 강원 지역에서 조성된 영산 회상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The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hereinafter LACMA) in the United States holds in its collection one of the finest examples of Korean Buddhist painting. Through the inscription on the bottom of the painting, it has been identified as the Preaching Sakyamuni Buddha painted in 1755 that had formerly been enshrined in Sinheungsa Temple on Seoraksan Mountain in Gangwon-do Province in South Korea. This Preaching Sakyamuni Buddha was hung behind the Buddha statue in the Geungnakbojeon Hall(Hall of Paradise, in Sinheungsa Temple until the 1950s. In the early 1950s, during the Korean War, fierce battles were fought and soldiers were concentrated around the area of Sinheungsa Temple, and the US forces were also stationed in the region. Paul B. Fancher, who was a US signal officer at the time, had taken a number of photos of the region, one of which captured the Preaching Sakyamuni Buddha placed inside the Geungnakbojeon Hall at Sinheungsa Temple. The painting unfortunately disappeared from the temple in the 1960s and only reappeared in 2010 at LACMA. A Korean curator who had been newly appointed to LACMA in 2006 found the painting cut into six pieces in storage at the museum. LACMA soon planned a restoration project for the Preaching Sakyamuni Buddha and commissioned specialists from Korea, including Professor Park Chi-Sun and other conservation experts from the Jeong-Jae Conservation Center in Seoul. The painting underwent a complex treatment process from 2010 through 2012. The six fragments of Preaching Sakyamuni Buddha have now been mended and are on display as a single large painting representing the arts of Korea at LACMA. The painting depicts Sakyamuni preaching to a large assembly on Vulture Peak in India. The painting is wider than it is high and portrays the enlightenment and preaching of Sakyamuni through a stable composition. The original paint was significantly discolored and flaked, but the painting’s main colors ? green and red ? were maintained while the restoration added neutral tints of pastel colors, yielding a bright and serene atmosphere. According to the inscription, the monks following Monk Woljeo Doan, a proponent of the Buddhist doctrine of Monk Cheongheo Hyujeong, were patrons of this painting, and Monk Yongam Chejo was a central figure in its production. There remains much to investigate regarding these monk-painters and the school’s followers, but this paper focused on identifying the career of the monk-painter Chilhye, whose name appears in the inscription after the head monk-painters. The Bodhisattvas in the painting feature characteristics typical of the monk-painter Uigyeom from the 18th century. This trait suggests that the painting could be related to the large hanging painting at Bongseonsa Temple, which was painted by Gakchong and Uigyeom. Moreover, the inscription on the painting assists in investigating the relations of the royal court with the painting. The Preaching Sakyamuni Buddha at LACMA, which had formerly been enshrined in Sinheungsa Temple in Gangwon-do Province since the mid-18th century, i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Buddhist paintings on the theme of Shakyamuni preaching to the assembly on Vulture Peak produced in the 18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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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통합 미술사의 구상과 과제: ‘동양미술론’과 ‘동양미술사’를 넘어서

        홍선표 한국미술연구소 2010 美術史論壇 Vol.- No.30

        ‘동양미술론’과 ‘동양미술사’는, 서세동점에 따른 동아시아 질서 개편에 편승하여 부상된 근대 일본의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반발과 위기의식에 수반되어 대두한 국수주의를 확산하여 ‘동양’을 하나의 지정문화적인 권역으로 이용하고 규정하기 위한 새로운 인식 틀과 지식 관념으로 생성되고 구상된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동양의 맹주’로서 미학 및 미술사적으로 ‘서양’과 대등하게 대립하면서 다른 ‘동양’에 대한 발전성과 우월성을 입증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이론과 학문으로 체계화되고 제도화되었으며, 이러한 일본 중심 동양주의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더불어 권역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장시켰다. 이와 같은 ‘동양미술사’는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의 패망으로 ‘동양맹주’의 지위를 잃게 되고 제국주의적 욕망이 심판받게 되면서, 자국을 제외한 아시아의 외국 미술사로서 재영역화 되어 각 나라별로 구획하여 다룬 것을 병렬해 놓은 형태로 정형화되었고, 이러한 유형이 해방 이후 한국에서도 표절되거나 번역되거나 직접 집필되며 정착되었다. 이와 같이 근대 일본의 국수적인 자국 중심주의에 의해 타자화되고, 동아시아 각국의 일국사적 집합에 머물지 않는 통합공간으로서의 동아시아의 미술사를 하나의 분석 단위로서 주체적· 총체적으로 구성하기 위해서는, 근대적=이념적인 ‘동양’을 초극하고 ‘동아시아’로 재구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동아시아’는 지리적 근린국으로 유·불·선 사상과 한문 등을 공유하며 ‘천하동문’의 관계를 이루었던 중국(대만)과 한국(북한)·일본을 가리킨다. 사상적 ·文語的 공통성과 함께 수묵·채색 등의 재료와 ‘百工技藝’의 장르, 제재 및 기법을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상호 직접적인 교류를 지속하며 같은 하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던 ‘共戴天’의 나라 ‘동양삼국’의 문화적 권역을 통칭하는 것이다. 한·중·일 지역에서 전개 된 동아시아 미술사의 전모를 통합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동양미술사’에서 벗어나고, 국민국가의 일국주의적 사관의 협애한 구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적 시각’을 진전시켜 선사시대에서 현대까지의 동아시아 미술의 변천상과 발전상을 세 나라 미술사의 통사적 지식을 취합하여 거시적으로 파악하고 유기적으로 이해하여 총체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 긴요하다. 먼저 세 나라 미술사의 시기구분론을 비교 분석하여 통합 미술사의 통사적 구성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데, 선사에서 현대에 이르는 연대기적 흐름이 ‘非同步’ 즉 불균등하기 하기 때문에 변화상의 공통적 내용을 단위화하고 이를 단계화하여 논의하는 것이 방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조형 활동이 태동된 원시 단계에서 시작하여 작품의 창작(생산)및 소비와 관련하여 형성된 미술의 주제적· 기능적 단위가 문화 담당층의 사회사적 변동과 결부하여 고분미술, 종교미술· 궁중 및 관용미술· 문인미술· 市井미술· 시민미술 등으로 발전해 온 과정을 시대성으로 단락화하여 논의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좀 더 쉽게 추구하기 위해 기존의 ‘미술’적 분류로 전공화된 회화(서예), 조각· 공예· 건축 등으로 나누어 논하고 이를 취합하여 체계화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세 나라의 역대 왕조 또는 정권은 이들 항목을 추진한 단계적 유형 또는 유파로서 다루고, 그 안에서 유파의 시기별·분파별 양상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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