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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에서 발생한 눈물주머니 낭종- 5예

        이주향,문상원,신용운,이윤정,Ju Hyang Lee,Sang Won Moon,Yong Woon Shin,Yoon Jung Lee 대한안과학회 2010 대한안과학회지 Vol.51 No.5

        Purpose: To report the clinical findings and the treatments of patients with dacryocystocele, presenting as an uncommon mass in the medial canthal area of adults. Case summary: Five patients, diagnosed with dacryocystocele, complained of epiphora and mucopurulent discharge and were found to have a medial canthal mass. Four of these patients presented with symptoms of acute dacryocystitis. One patient underwent repeated endonasal dacryocystorhinostomy (endonasal DCR) with silicone implantation, but the epiphora returned a few months after the treatment. The patient then received external dacryocystorhinostomy (external DCR) with silicone implantation. Two patients experienced recurrence after the first endonasal DCR and, therefore, received repeat endonasal DCR with silicone implantation via a maximum excision of the enlarged lacrimal sac. One patient underwent external DCR with silicone implantation due to acute inflammation with chronic dacryocystitis, and one attempted conservative treatment after refusing any surgical procedure but suffered a relapse. In the surgical cases, no patients experienced recurrence after the final procedure, and they all had a favorable course during the 6 to 14 months of follow-up. Conclusions: Dacryocystocele in adults always requires a surgical procedure. Additional maximum excision of the lateral wall of an enlarged lacrimal sac could be performed to reduce the possibility of recurrence. J Korean Ophthalmol Soc 2010;51(5):75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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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아는 자의 고통에 대한 니체의 해석- 니체는 왜 오이디푸스와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에 주목했을까?

        이주향 한국니체학회 2010 니체연구 Vol.18 No.-

        In der <die Geburt der Tragödie> sieht Nietzsche beinahe alle Protagonisten als Erscheinungen eines grosses Gottes, Dionysos an. Dionysos leidet unter dem Schmerz von “principii individuationis”. Aus dieser Sicht versucht diese Abeit auf die Frage zu antworten, unter welchem Grund Ödipus und Prometheus die Erschnungen von Dionysos sind. Nietzsche stellt den Schmerz von Prometheus als “Schreck und Angst der Existenz” auf, der sich nicht gegen den Angriff des Adlers von Zeus verteidigt und sein Schicksal unberührt erträgt. Es gilt die intuitive Deutung des der Tragödie zugrundeliegeden Pathos. Nietzsche erzeigt diesem Pathos den “wahren” Dionysos. Nur der grosse Mensch als ein Erschnung eines grosses Gottes kann die Schmerzen der Existenzen ertragen. Dieser grosse Mensch ist der Selbstherrschender und der Herr vom Leben. Ödipus beginnt als der Herr der Ruine mit der Reise nach dem “Selbst”. Am Anfang weiss er nicht, wer er sei. Deshalb unterzieht er sich den grossen Schmerzen, die aus der Selbsttäuschung folgen. Im Prozeß zur Selbsterkennung erringt er sein eigentliches Leben. Prometheus tritt in den unendliche Schmerz hinein. Er muss die Stafe davon erleiden, dass er die Menschen nach seiner Form schafft und das himmlische Feuer für sie stieht. Nietzsches Augenmerk verlagert sich bei der Suche nach dem Vorbild eines “anderen” Leben. Nur wer die Schmerzen des wahren Dionysos ertragen kann,kann die neue Kultur schaffen. Diese Arbeit versucht die Quelle der Schmerzen der grossen Menschen mit Hilfe des Auslegung der Schmerzen von Ödipus und Prometheus zu erforschen.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오이디푸스나 프로메테우스를 포함한 그리스 무대의 유명한 인물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공 디오니소스가 가장한 인물들로 본다. 니체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개별화의 고통을 몸소 겪고 있는 신인데, 오이디푸스나 프로메테우스는 어떤 점에서 디오니소스의 현현들인가?니체는 제우스의 독수리에게 공격당하는 인간의 위대한 친구 프로메테우스의 고통, “실존의 경악과 공포”라 할 수 있는 무서운 운명을 고스란히 겪어내는오이디푸스의 고통에 주목한다. 그 모두는 모두 고귀한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고귀한 인간이란 노예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주인이 되는 인간이다. 사실우리는 삶의 주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오이디푸스 왕의 사제의 말처럼폐허의 주인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왜 고귀한 인간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며 오이디푸스에 주목했을까?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폐허가 된 줄도 모르고 폐허가 된 인간이 자기가 가진모든 것을 내주고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오이디푸스의삶이고, 자신에 귀 기울이며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든 대가로 기꺼이 끝나지 않은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간 자가 프로메테우스다. 니체는 프로메테우스의고통 속에서 인간의 자존을 보며, 신에 대한 모독으로 설명되는 프로메테우스의행위를 찬양한다. 니체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본 모독의 힘은 무엇이었을까?필자는 니체를 따라 프로메테우스 이야기가 고통을 감당하려는 의지와 용기 없이 스스로의 문화를 쟁취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논문은 사멸의 고통을 겪고 있는 오이디푸스와 창조의 고통을 겪고 있는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고통이 어떻게 삶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삶의 증거가 되는지,고귀한 인간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반추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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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D BOOK』을 통해 본 자기 생명 체험, 차라투스트라에 닿다 - 니체와 융의 자기 생명살기

        이주향 한국니체학회 2013 니체연구 Vol.23 No.-

        삶 혹은 운명이 특정한 사람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은 고유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은 결국 자신을 체험할 뿐이라고 한다. 자기자신을 체험하는 자에게는 사건과 내면이 분리되지 않는다. 본보기를 따라 사는 삶을 거부한융이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신성한 책으로 언급한 이유는바로 그리스도의 삶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예수의 삶이 고유했음을 본 융은 그리스도의 힘을 “예수그리스도가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살며누구도 본받지 않았다”는 데서 찾고 있다. 융에 따르면 아무도 가지 않고 그누구도 따를 수 없는 길을 가느라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고 피를 흘려야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매력이자 마력은 예수가 걸어갔던 무서운 고독의길, 길 없는 길에 있는 것이다. 융은 자신의 생명을 살지 못하고 남의 생명을 모방하는 자를 원숭이에 비유한다. 그는 인간의 역사에서 영웅의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것도 모방욕구때문으로 본다. 상호모방을 통해 평균적인 기대에 부응하며 사는 삶을 원숭이같은 모방이라고 하는 융은 민주주의적 취향과 예절을 갖춘 평균인을 증오하는니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새로운 구원은 언제나 그 전에 잃어버린 것의 복구라고 하는 융은 예수 자신이 피 흘리는 인간 제물을 먹는 관행을 복구했는데,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예수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한다. 융은 인간 제물을 먹는 관행은 이미 고대에 행해진 관행이었으나 예수의 경우 그 고유성은 사랑의 법아래서 제물을 먹는관행을 복구했다는 점이라고 한다. 나는 이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예수가 말한 사랑의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교회 내에서 왜곡된방식으로 유통되는 값싼 “이웃사랑”이 아니다. 제물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은자기생명에 이르는 길에 바쳐야 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비의를 숨기고 있는것이다. 그 속에는 자기생명에 이르는 길의 고독과 무서움과 신비가 모두 들어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이웃 사랑에 앞서 자기 자신을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선포한 바로 그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제물로쓰는 그 광기를 모르고는 자기생명에 이르지 못한다. 광기는 정신이다. 니체에 이어 융은 생명 자체가 광기로 가득하고, 그 바닥은완전히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았다. 『RED BOOK』은 융의 인생을덮친 광기의 춤이라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비견될 수있겠다. 나는 니체와 융이 ‘자기생명 살기’를 사유하고 실천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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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적 허무주의를 넘어서 있는 니체의 광인에 관한 고찰

        이주향 한국니체학회 2014 니체연구 Vol.25 No.-

        Nietzsche’s Nihilism was the logic and attitude of the fall of absolute values,which were showing powerful strength before modern society. If today, where theabsolute values are ruined, is Nietzsche’s Nihilism meaningless?Lee Jin Woo says that Nietzsche’s Nihilism is a thorough introspection abouthistory. But even though the modern situation became substance where theexisting value system is crumbling, I believe Nietzsche’s Nihilism is providing animportant view which can not be locked on the paradigm of modern philosophy. Because, even though Nietzsche’s Nihilism was starting at the thoroughintrospection of history, it is a serious introspection about ultimately going againstlife. Nietzsche was paying attention to the value of brevity. I think Nietzsche’sNihilistic view came from a discernment which means nothing is eternal andunchangeable truth does not ultimately exist. Nietzsche was influenced by Turgenev, and it is told that he was influenced byRussian Nihilism. So, first in this thesis, we will examine in what ways Bazarov ofTurgenev, by whom Nietzsche was influenced, and the madman of Nietzsche arehow different and how similar. After that we will review philosophical Nihilism inwhich Nietzsche is writing negatively ,Turgenev’s resistant Nihilism, and whatNihilism is in finality while reviewing the Nihilism of Korean scholars. And I agreewith the stance of Jung Dong Ho, who wrote actively Nietzsche’s Nihilism into the concept of universe Nihilism and saw futility as an ontological situation withwhich humans are faced. I think what Nietzsche sought through madman was freedom, rather thanNihilism, and the situation of futility is the rite of passage humans have to face inorder to become free men. 니체의 허무주의는 근대 사회 이전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절대적 가치들을 몰락케 하는 논리요, 태도였다. 그렇다면 절대적 가치들이 몰락한 현대에 니체의허무주의는 무의미할 것인가? 이진우는 니체의 허무주의가 역사에 관한 철저한성찰이기 때문에 허무주의의 탈역사화는 니체에게서 보여졌던 비판적 성격을완전히 박탈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기존 가치체계가 붕괴되는 근대적상황이 질료가 되는 했어도 니체의 허무주의는 시대적 상황이 창출해낸 근대철학의 패러다임에 가둘 수 없는 중요한 시선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허무주의가 역사에 관한 철저한 성찰에서 시작했어도 그것은 궁극에서는 삶을 거스르는 것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나는 궁극에서 니체가 본 허무주의는 “우주 운행방식인 영원회귀에서 불변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항구적인 것은 없다는 통찰”이라는 정동호에 동의한다. 나는 궁극의 허무주의는 『금강경』에 나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의 정신처럼 탈역사화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능동적 허무주의의 탈역사화는 니체에게서 보여졌던 비판적 성격의 특징이 실존적인 것임을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다. 니체는 투르게네프를 좋아했으며, 러시아 허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우선 니체가 좋아한 투르게네프의 바자로프와 니체의광인이 어떤 점에서 닮았고 어떤 점에서 다른 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 학자들의 허무주의를 검토하면서 니체가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철학적허무주의와 투르게네프의 저항적 허무주의, 그리고 궁극의 허무주의가 무엇인지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니체의 능동적 허무주의를 우주 허무주의라는개념으로 다시 쓰며 허무를 인간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상황으로 본정동호의 입장에 동의하며, 그것이 바로 『불설비유경』의 안수정등(岸樹井藤)의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니체의 광인이나 밧줄을 타는 인간이 자유를 본 능동적 허무주의자라고생각한다. 나는 니체가 궁극에 추구한 것은 허무주의라기보다 자유라고 생각하며, 허무의 상황은 인간이 자유인이 되기 위해 마주하게 되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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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죄’ 개념에 대한 니체의 비판과 ‘죄’ 사유의 긍정적 실천

        이주향 한국니체학회 2008 니체연구 Vol.14 No.-

        Our Christianity has internal problems very much. No matter what people say, the exclusive attitudes come from inflexibility of the doctrines. They emphasize that every human being is born as a sinner. And it also emphasizes that no one can be saved until they believe in Jesus Christ, the only savior. So they must depends on the name of God. They totally lives for the one and only God. Hence they even takes the historical eyes upon the God. Those who takes refuge in God can not possibly have self-esteem or even their own will. Under the heaven, what is sin? In other words, what is sin in Christianity? Debating on the sin is very important because it helps us to understand our lives. In Christianity, the wrath of God was started by our sin. The wages of sin is death. Then, who commits a sin? According to the Christianity, the one who commits a sin is not a certain person, but it is actually the whole universe. Christianity takes refer from Paul’s confession through the Bible. It says that ‘there is no one righteous, not even one.’ Why there is no righteous one? It can be explained by taking example of our ancestor Adam and Eve. Adam and Eve had taken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Nietzsche gives a symbolical meaning into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Nietzsche said that we must take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One who has tasted the fruit will be able to compromise the conflict between good and evil. having taken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was the original sin. The original sin is the start of our lives life. "Sin" is the life itself. 특유의 교조성과 배타성과 공격성으로 성큼성큼 성장해간 우리의 기독교는 외적인 성장만큼이나 내적인 문제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한국 교회의 배타 성은 누가 뭐래도 교리의 경직성에서 유래한다. 기독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점, 구원자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그 누구도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의존하는가? 생사화 복(生死禍福)을 의존한다. 삶을 의존하고, 죽음을 의존한다. 현재를 의존하고, 미래를 의존하며, 따라서 과거까지 의존한다. 그 결과 역사적 시선을 의존하며, 역사적 실존을 의존한다. 모든 것을 의존한다. 모든 것을 의존하기 때문에 자기 의 열정이 없고, 자기의 가치가 없고, 자기의 의지가 없고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 그런 인간의 도덕은 노예도덕일 수밖에 없다. 도대체 죄란 무엇인가? 아니, 한국의 기독교에서 죄란 무엇인가? 죄에 대한 논의가 중요한 것은 궁극에서는 죄와 관련된 그리스도교적 상징체계가 현재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데 있어 본질적이라 믿기 때문이다. 만일 ‘죄’를 둘러싼 그리스도교의 상징체계가 아무 것도 아니라면 본질적인 면에서 우리들의 논의 는 시간낭비다.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상징체계를 덕지 덕지 오염시키는 오염원을 살펴 제거하려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오염원에 의해 병들어있는 기독교적 상징체계를 살려내는 길일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죄는 신의 진노의 대상이다. 로마서는 그 대상으로 악행과 탐욕과 악의 등을 들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죄를 짓는가? 기독교에 따르면 그들은 특정한 어떤 이가 아니라 세상사람 모두이다. 기독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바울의 명제 를 강조한다. 도대체 왜 의인은 없고 모두가 죄인일까? 그들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원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신화는 단순하지도 유치하지 도 않다. 선악과 신화에 중요한 상징성을 부여하는 니체는 안티 크리스트 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본질상 뱀이다, 하와이다. 여자에게서 세상의 온갖 악이 나온다. 따라서 여자에게서 지식도 나온다. 여자를 통해서야 비로소 인간은 인식의 나무 를 맛보는 법을 배웠기에.” 왜 니체는 여자를 본질상 뱀이라 했을까? 유혹자이 기 때문이다. 유혹자는 악으로 표상되지만, 그 악의 탄생으로 비로소 선악의 대극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악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선을 과시하 고 않고, 선악의 현실성이 도덕규범 속에 내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인식의 나무를 맛본 자는 스스로 선악의 주인이다. 안티크리스트 에서 여자를 뱀이라 했던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 에서 그 뱀을 신이라 부르고 있다. “자기 일의 끝에 인식의 나무 아래 뱀으로서 누워있던 것은 바로 신 자신이 다.” 신 자신이 뱀으로서 누워 있다는 것은 신이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모두 가지 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삶 전체로 선과 악 사이의 모순과 갈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선악의 대극 은 신적인 것이고 그러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 로 인식의 나무를 맛본 행위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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