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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두 시대’‧‘상대’의 고지성 취락의 형성과 전개 양상

        이유표 고조선단군학회 2023 고조선단군학 Vol.52 No.-

        본고는 중국 ‘중원지역’의 ‘이리두 시대’와 ‘상대’ 유적을 중심으로 중국의고지성 취락이 어떤 조건하에서 형성되었고, 시대에 따라 어떤 전개 양상을보이는 지를 초보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먼저, 기후환경에 따라 사람들이 당시 생활에 적합한 지대를 찾아 이동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기원전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나타난 황하의 개도로 인해, 이리두 시대에는고지성 취락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다가, 기원전 1600년부터 기온 하강으로 인해 상대 초기에는 건조한 기후가 지속되자 고지성 취락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기원전 1400년경부터 나타나는 습윤한 기후로 인해 상대 후기에는 고지성 취락이 다소 증가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목적 외에도 교통과 운수, ‘자원’의 획득과 방기라는 요인 또한 고지성 취락의 형성과 폐기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교통과 운수라는 측면에서는 하칠원 유적과 동룡산 유적이 대표적이고, ‘자원’의 획득과 방기라는 측면에서는 동하풍 취락과 원곡남관(원곡상성) 유적이 대표적이다. 특히후자는 자원의 획득을 위해 형성되었지만, 기원전 1400년경을 전후해서, 자원의 고갈 혹은 자원 생산의 상대적인 비효율성 등으로 인해 결국 폐기되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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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개혁개방’ 이전, 고대 농민전쟁에 대한 인식 ‒양보정책론을 중심으로‒

        이유표 역사교육연구회 2023 역사교육 Vol.165 No.-

        모택동은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에서 농민폭동과 농민전쟁을 역사 진화(발전)의 진정한 동력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농민 폭동(혹은 전쟁)이 성공하더라도, 봉건 통치 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이른바 ‘양보정책’론을 내세웠다. 즉 농민 폭동(혹은 전쟁)이 ‘지배계급’에 압박을 주어 그들로 농민들에게 어느 정도 양보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논쟁의 여지도 있었다. 바로 ‘지배계급’의 ‘농민’에 대한 ‘압박’보다 ‘지배계급’의 ‘양보’에 초점을 맞추면 역사 진화(발전)의 주체는 ‘농민’이 아닌 ‘지배계급’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지지하는 것은 봉건 지배 계급을 지지하는 반동으로 규정되었고, 이 비판론은 계급투쟁론과 맞물리면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맹목적인 폭력성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폭력적으로 되었는가? 이는 이른바 ‘신중국’ 성립 이후, 중국공산당은 다소 보수적인 새로운 통치이념을 설정해야 했지만, 여전히 급진적인 혁명 이데올로기를 계속 강조한 것에서 기인한다. 투쟁 대상에 대한 어떠한 행위도 계급투쟁론을 반영하는 혁명 이데올로기에서는 정당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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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서 출토 상말주초 족씨(族氏) 명문(銘文)에 대한 일고찰

        이유표 동북아역사재단 2019 東北亞歷史論叢 Vol.- No.63

        As is well known, there have been a number of excavations of Central plains-style bronze ritual vessels stemming from the late Shang/early Zhou period at the ruins of the Liaoxi (遼西) region since the 1950s. Some scholars interpret these excavations as an active advance of Cental plains culture to this region. However, it is a conclusion drawn based on a few fragmentary materials and leaves much room for discussion. A great proportion of the bronze ritual vessels excavated in the Liaoxi region have clan insignias (族氏 銘文), from which it can be inferred that they were fabricated by adhrents from the Yin-Shang dynasty, given that the people of Zhou did not leave clan insignias, as demonstrated by Zhang Mao-rong (張懋鏞) in his hypothesis that the Zhou people do not use clan insignia (周人不用族徽說). Over the long period during which the Yin-Shang dynasty was gradually replaced by the Zhou dynasty, the Zhou court implemented various policies to control the Yin adherents. First, it appointed Yin- Shang royal families to control Yin adherents. Second, it displaced the Yin adherents to Zongzhou (宗周) or Chengzhou (成周) to control them directily. Third, it appointed feudal lords to control the Yin adherents dispersed across the Zhou territory. It was in this context that Central plains-style bronze vessels of the late Shang/early Zhou period are found in the Liaoxi region. Classification of the related clan insignias shows how the Yin adherents moved northwards when various feudal lords, such as Wei (衛), Xing (邢), Yan (燕), were given the authority to rule them. It also gives clues leading to the assumption that bronze vessels came to the northern regions through the interactions between various clans. This is also indicative of temporary success of Zhou’s advance into northern regions. However, Zhou’s northern campaign seems to have failed towards the middle of the Western Zhou period, judging from the absence of Central plains-style cultural remains in and around Beijing (北京). It is presumably due to the resistance by the Upper Zhangjiayuan culture (張家園上層文化) and the Weiyingzi culture (魏營子文化) that thrived in the Northern Hebei (河北) and Liaoxi region, respectively. In other words, excavations of Central plains-style bronze ritual vessels of the late Shang/early Zhou period in the Liaoxi region may be ascribed to the defence of indigenous culture against the intrusion of Central plains culture rather than to the active advance of Central plains culture to the Liaoxi region. 주지하다시피, 1950년대 이후로 중국 요서지역에서는 商末周初 중원계 靑銅 禮器가 적잖이 출토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중원문화의 적극적 요서 진출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몇몇 단편적 자료만 가지고 내린 결론으로, 재론의 여지가 남아 있다. 요서 출토 청동예기는 族氏 銘文이 새겨진 것이 많은데, 張懋鏞 선생이 ‘周 人不用族徽說’에서 밝힌 바와 같이, 周族은 대체로 족씨 명문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요서 출토 청동예기는 殷遺民이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상주 교체기, 주왕실은 은유민을 통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여러 정책을 시행하였다. 첫째, 殷商 王族을 책봉하여 은유민을 통제하게 하였고, 둘째, 은유민을 周의 도읍인 宗周 혹은 成周로 이주시켜 周王이 직접 통제하였으며, 셋째, 諸侯를 각지에 冊封하여 은유민을 통제하게 하였다. 요서 출토 상말주초중원계 청동예기의 출현 또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관련 족씨 명문을 정리한 결과, 衛·邢·燕 등 제후가 책봉될 때 여러 은유민들이 북쪽으로이동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었고, 여러 족씨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청동기가 북쪽으로 흘러들어왔을 가능성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주의 북방 진출이 일시적으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의 북방 공략은, 서주 중기 이후 좌절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북경 및 그 주변에 중원문화유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하북 북부에 있었던 張家園上層文化와 요서지역에 있었던 魏營子文化의 대응에 결국북방 진출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곧 요서지역에서 商末周初 중원계 靑銅禮器가 출토된 것은, 중원문화의적극적인 요서 진출이라기보다는 중원문화의 진출에 대한 토착문화의 대응이라는 요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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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이 기억하는 고대 아시아:최광국 아시아고대사 의 특징과 한계

        이유표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22 東洋學 Vol.- No.89

        This article discusses the purpose and composition of the writings of Asian Ancient History written by Choi Kwang-guk, a professor of history at Kim Il-sung University in North Korea, and its characteristics and limitations. The author set the scope of ‘Asian Ancient History’ as the time when the struggle between the ‘slavery owner’ and the masses (including slaves) unfolded. The author suggested the purpose of this book to explore the development of Asia’s own history from the perspective of ‘de-westernism’. In this context, the author constructed a chapters according to the rise and fall of the ‘slavery owner society’. And the last chapter presents the influence of Asia on the development of Western history. In this respect, this book has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However, due to the lack of references, there are limitations such as the ups and downs of content description, excessive interpretation (e.g., interpretation of the “nine squares” system), and the use of unverified literature. 본 논문은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최광국 교수가 집필한 아시아고대사 의 저술 목적과 구성, 그리고 그 특징과 한계에 대해 토론한 것이다. 저자는 ‘아시아고대사’의 범위를 ‘노예소유주’와 인민대중(노예를 포함한)의 투쟁이 전개된 시기로 규정하면서, ‘탈서구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아시아 나름대로의 역사 발전 단계를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는 ‘노예소유자사회’의 흥망성쇠에 따라 장절을구성하면서, 마지막 장에서 서구 역사 발전에 대한 아시아의 영향을 제시하였다. 바로 이러한 면에서 본서의특징과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문헌의 부족으로 인한 내용 서술의 부침, 자료의 과도한 해석(예컨대 서주 시기의 ‘정전제’),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사료를 직접적으로 인용한 한계가 엿보이는 것이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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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不其簋를 秦器로 볼 수 있는가 ― 不其簋 명문 재검토 ―

        이유표 중국고중세사학회 2018 중국고중세사연구 Vol.48 No.-

        不其簋盖为传世器,其器身一直未见,只存其盖,现藏中国国家博物馆。等到1980年,该器身终于在山东省滕县后荆沟现身,现藏滕州博物馆。器身内壁有铭文151字(重文3字),记载了不其受命与猃狁作战,获得战胜的经过。该器是其作器者“不其”为其“皇祖公伯”而作,正与秦庄公“其”与其祖父“公伯”相合,而且不其与猃狁的战役,看成秦庄公征伐西戎之战,因此不少学者认为不其簋是秦国第一铜器。 但是笔者认为其尚存讨论的余地。首先,不其簋的玁狁不一定是《秦本纪》中的西戎。秦的故土,秦和犬丘皆位于今甘肃省天水一带。猃狁在“太原”,今宁夏固原地区,他们常常骚扰周邦,出没在宗周附近,尚未见在今天水一带活动。此外,不其簋的战役,在战争类型上,属于“却退战”,如果猃狁在天水一带活动,周王不能及时派兵救援。因此笔者认为不其簋的猃狁,并非《秦本纪》中的西戎。 其次,应该要注意该铭文的记述方式。不其借伯氏之语而表扬不其之功。这跟其他铭文自卖自夸相比,更加提高可信性。这也许在伯氏为中心的集团上,为了巩固自己的地位,采取这种方式。这就旁证不其隶属于伯氏的事实。但是我们应该要考虑秦的地位。秦在秦仲时已成为大夫,就是直接接受周王的册命。如果秦庄公是不其,在战术上可以接受伯氏之命,但他不会隶属于伯氏,没有理由从伯氏领赏赐。而且,该铭用几个字来记述猃狁的内侵ㆍ击退ㆍ反击ㆍ击退的过程,颇为鲜明。秦成为大夫不久,编撰如此有水平的铭文,笔者认为不可思议。因此笔者不同意不其簋为秦器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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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周 금문에 보이는 ‘周公’ 사적

        이유표 중국고중세사학회 2022 중국고중세사연구 Vol.65 No.-

        本文梳理与周公有关金文,和传世文献结合,考察西周时期的周公史迹。经过研讨提出一些意见。第一、周公为周初的执政大臣,具有“符号性”和“象征性”。西周时期的金文和同时代的传世文献所示的周公,专指一人即“周公旦”。以此可知,“周公”一词所持的特殊内涵。第二、周公为杰出的军事战略家。从卿盘、禽簋铭文等所载周公亲自帅军征伐商、奄、薄姑等的记忆,与《尚书》《逸周书》等文献所记所谓“周公东征”,可互相见证。第三、对“周公摄政说”献疑。周公替年幼的成王摄政七年,在传统时代当作毋容置疑的历史。不过,如今参照金文资料,可以发现商榷的余地。“周公摄政”的前提为成王年幼。《尚书》一些篇章称成王为“孺子”、“冲子”、“冲人”等,使人产生对成王年幼的形象。不过,清华简、《逸周书》等文献中可见武王与周公的对话中,称周公为“冲人”、“幼子”。据此可以推测,《尚书》中的“冲子”、“冲人”、“孺子”,并非专指孩子。那么“成王年幼”的形象也值得讨论。而且,从小臣单觯、禽簋等铭文可知,所谓“周公东征”战役的统帅并非周公而是成王,这也可以旁证成王应非年幼。第四、有的学者根据柞伯鼎铭文“周公……广伐南国”和《史记・鲁周公世家》“周公奔楚”故事,提出周公既东征”又“南征”的意见。不过,“广伐”一词,在西周金文中,均表示非周势力征伐周朝,因此柞伯鼎铭文中“广伐”的主语,应该不是周公,至于“周公奔楚”的“奔”,难于理解为“征伐”。因此,尚未能证明“周公南征说”。第五、《春秋左氏传・僖公二四年》,以“凡、蒋、邢、茅、胙、祭”归于“周公之胤”。其中凡、邢、胙,为也簋盖、邢侯簋、柞伯鼎等铭文等所证,提高了文献记载的可信度。那么“蒋”也属于“周公之胤”,蒋兑簋铭文中的“文祖□公”之“□公”,应该是“周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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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古今 漢字의 形・意적 괴리— ‘巳’와 ‘司’를 사례로 —

        이유표 수선사학회 2022 史林 Vol.- No.81

        汉字出现于公元前十三世纪,至今已有大约3000余年的历史。随着时代的变化,虽然其语法结构上没有什么变化,但是汉字本身已经经历了很大的变化。因此只看古文字难以识别其形意。虽然如此,有些汉字还保存着古文字的形态,如甲骨金文中的“”和“”,能够类推识读为“巳”和“司”。那么这种形态上的类推关系,能够保证训诂上的类推关系,这是一个值得讨论的课题。为了解决这个问题,需要探讨“巳”和“司”的古今意义上的异同关系。第一,“巳”的主要用例为“地支的第六位”。不过,这种用例在战国时期才产生的,之前指“地支的第六位”的倒是“子”字。第二,甲骨金文中的“巳”主要用于动词,意思为“祭祀”,后来以后起字“祀”为替代。此后起字“祀”还用于纪年单位,如“王五祀”、“王廿祀”等。这种用例应来源于商代的“周祭”制度。第三,“司”的主要用例为“主持”、“操作”、“官治”等。不过,在古文字中持有这种意义的是“()”字。“司”的最早的用例为“祭祀”,还用于其引申义“继承”为不少。这两种用例,后来为“祠”、“嗣”替代。第四,至于“”,学界一般认为“从司聲”的形成字。不过,“”的早期形态为“”,就是“从从”,“口”为后来添加。如此看来,疑为“”字本身与“司”无关。总之,“巳”和“司”,虽然字形上与古文字相类,不过其意义上与古义不同,因此这种形态上的类推关系,不一定能够保证意义上的类推关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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