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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 이상 고령 위암환자들의 수술치료 성적에 의한 임상적 특성
이연아,정귀애,민영돈,Lee, Yeon-Ah,Jung, Gui-Ae,Min, Young-Don 대한위암학회 2005 대한위암학회지 Vol.5 No.4
목적: 최근 평균수명의 증가로 고령자에서 위암 진단율이 증가하고 있으며, 수술방법 및 수술 전후 환자관리법이 발전함에 따라 수술적 치료의 적용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저자들은 고령 위암환자들의 임상적 특징 및 수술에 따른 합병증 및 치료효과를 비고령군과 비교하여 고령 위암환자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대상 및 방법: 조선대학교병원 외과에서 1995년 3월부터 2002년 2월까지 위암으로 수술적 치료를 시행 받은 706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의무기록 확인을 통한 후향적 방법을 사용하여 고령군(75세 이상)과 비고령군(75세 미만)을 임상적 특성, 수술의 근치도 및 술 후 합병증, 전체생존율에 따라 비교하였다. 결과: 임상적 특성에 해당하는 성별, 위암의 위치, 암의 침윤도, 림프절 절제범위, 조직학적 병기에서 고령군과 비고령군 간의 통계적 유의성은 없었다. 수술의 근치도와 수술 후 조기합병증의 발생 빈도에서도 두 군간의 통계적 유의성은 없었다. 결론: 위암발현 양상은 고령군과 비고령군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수술적 근치도, 술 후 합병증, 전체생존율에서도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위암환자의 수술적 치료의 적용에서 고령은 제한인자가 아니며, 위암수술 후 예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Purpose: The incidence of gastric neoplasms is increasing in the elderly population, and a rational method of treatment for gastric cancer in the elderly is needed to improve survival. The purpose of the present study was to clarify whether the patient's age is an independent prognostic factor and to determine clinicopathological characteristics in the elderly. Material and Methods: Curative or palliative surgery for gastric cancer was carried out on 706 patients in Chosun University Hospital from March 1995 to February 2002. They were divided into the following two groups: elderly group (75 years or older) and control group (under 74 years old). The clinicopathologic features of these patients were reviewed retrospectively, and a multivariate analysis was performed. Results: There was no difference in clinicopathological appearances between the two groups, and the postoperative morbidity and mortality rates were similar in the two groups. The two groups showed similar survival rates. Conclusion: In this study, age was not a prognostic factor in surgery for gastric cancer. In the elderly, an oncologically correct surgical procedure can safely be prosecuted with satisfactory early and late results.
이연심(李姸心)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4 한국민족문화 Vol.51 No.-
본고에서는 문헌 및 고고 자료를 바탕으로 안라국과 야마토 정권의 인적ㆍ물적 교류 양상과 더불어 양국의 교역로에 관해서 검토해 보았다. 안라국은 5세기 이후 대가야와 함께 가야제국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가야제국의 대왜교역체계 재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가야제국의 대왜교역체계가 다원화되면서 안라국도 그 이전시기보다 적극적으로 대왜교류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즉 5세기 이후 안라국은 독자적인 대왜교역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양상은 6세기 전반까지 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6세기 전반 『일본서기』에 안라국에 관한 기록이 다수 확인된다는 것과 함안 지역에 왜계고분이 확인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6세기 전반 안라국 외곽지역에서 확인되는 왜계고분은 당시 안라국에서 활동한 왜계인물인 ‘임나일본부’와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서 안라국과 야마토의 정권의 교역에 있어서 물적 교류뿐만 아니라 인적 교류도 함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5세기 이후 안라국은 일본열도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는데, 문헌 및 고고 자료를 바탕으로 안라국의 대왜교역로에 관해서 검토해보았다. 5세기 이후 안라국은 진동만을 이용하여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직접교역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즉 당시 안라국의 대왜교역로는 진동만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北部九州를 거쳐 瀨戶內海를 이용하여 畿內로 들어가는 경로였다고 할 수 있다. 안라국과 야마토 정권의 교역은 점차 증가되면서 물적교류 뿐만 아니라 인적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안라국과 야마토 정권의 인적 교류의 산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 왜계고분과 안라국에서 활동한 왜계인물이다. 그렇다면 안라국과 야마토 정권의 인적 교류는 기존의 교역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안라국에서 활동한 근강모야신의 귀국 과정 등을 감안하면, 안라국의 또 다른 대왜교역로로서 함안-진동만-남해안-동해안연안-福井縣-近江-畿?로 상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