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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韓國思想과 文化 Vol.67 No.-
This paper was analyzed about the examples of filial sons, daughters and virtuous women in Changneong(昌寧) province. Also the inflow of the morality of Confucianism into the Changneong area and the regional aspects have been investigated. Toward the latter part of the Chosun Dynasty, the number of filial sons and virtuous women increased. When the cases of filial sons have been classified, they turned out to be various. Among the classified cases, the most example of filial sons was filial sons during Im-jin- wae - ran(壬辰倭亂). The family background and social status of filial sons were distinct. Regarding the types of rewards awarded, Chung-ryo(旌閭) or Chung-mun(旌門) which were most frequent, and the next frequent was gup-bok(給復),bok-ho(復戶), Jeung-jik(贈職). On the other hand, the most example of virtuous women is the case of killed oneself to protect one's chastity from being violated by Japanese pirates during Im-jin- wae - ran. The social status on the most of the virtuous women was literati's wives(幼學의 妻). The reward was given in the form of Chung-ryo(旌閭) or Chung-mun(旌門). 본 연구는 조선시대 창녕지역에서 배출된 인물들과 효자, 효녀, 열녀의 사례들을 실증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창녕지역의 유교윤리 보급과 그 지역적 특성을 고찰한 것이다. 경상도 창녕은 본래 비자화군(比自火郡)(비사벌, 比斯伐)이었으나 고려 태조 때 지금의 이름인 창녕(昌寧)이 되었다. 조선시대 이 지역 인물로는 성석린(成石璘, 성여완의 아들), 성석용(成石瑢, 성석린의 아우), 성석인(成石因, 성석용의 아우), 성사재(成思齊, 성유득의 아들), 성엄(成揜, 성석인의 아들), 성억(成抑, 성엄의 아우), 성개(成槪, 성석용의 아들), 성염조(成念祖, 성엄의 아들), 성봉조(成奉祖, 성염조의 아우), 조석문(曺錫文), 성임(成任, 성염조의 아들), 성간(成侃, 성임의 아우), 조효문(曺孝門, 조석문의 당숙), 성건(成健, 성엄의 손자), 성준(成俊, 성엄의 손자), 성현(成俔, 성간의 아우), 성희안(成希顔, 성찬의 아들), 성담년(成聃年, 성개의 손자), 성몽정(成夢井, 성담년의 아들), 성운(成雲, 성개의 증손자), 성세정(成世貞), 성세순(成世純, 성세정의 아우), 장계이(張繼弛), 성세창(成世昌, 성현의 아들), 성수침(成守琛, 성세순의 아들), 성혼(成渾, 성수침의 아들), 성윤(成倫, 성세정의 아들), 이장곤(李長坤), 성안의(成安義), 성수경(成守慶), 손인갑(孫仁甲) 등이 수록되어있다. 따라서 인물들 거의 대부분이 창녕성씨 인물들로 수록되어 있어 매우 주목된다. 마치 창녕성씨 가계도를 보는 것 같으며, 이들 창녕성씨 대부분은 중앙과 지방에서 높은 벼슬을 함으로써 창녕성씨 가문이 명족(名族)으로 성장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창녕 지역의 효자, 효녀 사례들을 정리해보면, 임란 때의 효행 사례가 적지 않음으로써 임란 때의 창녕지역의 인명 피해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3대에 걸쳐 효자가 나온 장씨(張氏) 집안이 주목된다. 장시행(張是行)과 그의 아들 장익정(張翼楨) 그리고 손자 장만(張滿) 형제는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 모두 한결같이 단지효행(斷指孝行)을 하였고, 부모 사후에는 여묘살이를 했다. 효녀는 1명에 불과하며 효녀 백이랑(白二郞)은 만호(萬戶, 종4품 무관)의 딸이다. 포상내용으로는 정문(旌門) 또는 정려(旌閭)가 대부분이고 그 외에 증직(贈職), 복호(復戶), 급복(給復) 등이 보인다. 창녕지역 열녀들의 사례를 정리해 보면, 도적으로부터 남편을 구하고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자결한 경우, 남편이 병사하자 합장되고자 목을 매어 따라죽은 경우, 남편이 물에 빠져죽자 남편의 시체를 껴안고 함께 죽은 경우, 남편이 죽은 후 재가하지 않고 수절한 경우, 임진왜란 때 절개를 지키려다 피살되거나 물에 빠져 자결한 경우 등이 있다. 여기에서 임진왜란 때의 열녀 사례가 가장 많이 보여 창녕지역 여성의 피해를 엿볼 수 있다. 신분이 밝혀진 열녀의 신분으로 유학(幼學)의 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포상내용을 보면 열녀 모두가 정문, 정려의 포상을 받았음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