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 「사이 ㅅ」硏究

        朴富永 朝鮮大學校 敎育大學院 國語敎育學會 1983 國語敎育論叢 Vol.4 No.-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사이ㅅ'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말하고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를 중심으로 현행 '사이ㅅ' 표기와 실제발음을 고찰해 보았다. 그리고 현재 출판된 각종 국어사전들을 보면 1936년의 '표준말 모음'에 의하여 표기하지 않고 사전 편찬자의 나름대로 표준말을 잡아서 표기했기 때문에 각 사전의 표준말이 일치되지 않는 것이 많다. 또한 발음도 각기 달리 정하고 있어서 국어교육에서 박음교육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가운데 표기와 발음에 있어서 가장 문제되어 온 것이 '사이ㅅ' 이었던 바 필자는 이에 주안점을 두고 고구한 결과를 나름대로 제안하려 한다. (1) 필자는 형태소로서의 'ㅅ'을 '격어미 ㅅ'이라 하고 '사잇소리의 ㅅ'을 사잇소리라 하였는데 혹자는 '사이ㅅ'을 한결같이 형태소로 보는 태도를 취하였는데 격어미의 기능을 하는 'ㅅ'은 형태소로 보되 복합어 사이에 개재된 '사이ㅅ'은 음성기호로서의 ㅅ으로 보는 입장이다. (2) '사이ㅅ'은 그 기능면으로 볼 때 문법적 관계의 기능과 음운관계의 기능이 있지만 복합어 형성에 있어서 사잇소리는 음운관계의 기능으로 보아야 한다. (3) 속격어미가 생략되어도 하등의 의미차이가 없는 말(여자대학, 돼지고기)은 사잇소리를 붙일 필요가 없고 철자발음과 실제발음의 구별이 확실하지 못한 낱말은 'ㅅ' 중간에 삽입시켜 쓰고 표음식 표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4) 교과서에서 '사이 ㅅ'표기에 대한 혼란상의 유일한 예가 된 '시점(고Ⅱ-149) 과 싯점(중2-1-62)'이 있다. 표준말을 보면 "시점(고Ⅱ-149), 요점(고Ⅰ-301, Ⅲ-134) 허점(고Ⅲ-25) "이 있고 '사이ㅅ'이 개재된 낱말에는 "촛점(중3-1-82), 잇점(고)Ⅱ-297)"이 있는데 현실발음은 〔시쩜〕,〔요쩜〕,〔허쩜〕이 일반적이므로 이와 동형성을 지닌 '초점, 이점' 도 '촛점' '잇점'으로 되어 있는 만큼 "시점, 요점, 허점"은 "싯점, 욧점, 헛점"으로 표기하는 것이 표기의 기억상 타당하리라 본다. (5) '사이ㅅ'을 표기함직한 "과자점, 모자점, 코노래, 코방귀, 혼자말, 머리말"등은 표준말 사정에서 그렇게 규정하였기 때문에 '사이ㅅ'이 개재되지 않은 표기로 나타나 있으나 이 말들은 세대간의 발음차이가 심한 말로 젊은 세대간에는 '사이ㅅ'을 붙여 발음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표준발음으로 고정시키기에는 시기가 빠르나 고려의 대상이 된다. (6) 거의 접미사화한 '군'(꾼)과 결합된 복합어(나무꾼, 막벌이꾼 ······)을 제외하고는 각 사전에서 한자어원의 말에 '사이ㅅ'을 붙이지 않은 것을 원칙처럼 하고 있으나 수많은 한자어 가운데는 이미 국어화하여 그 기원을 추적하기 어렵고 한자어에 익훅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는 그 낱말이 한자어인지 고유어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한자어에도 'ㅅ'을 붙여 표기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으로 볼 때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군'은 '꾼'으로 표기함이 일반화된 신정이며 또한 뜻의 구분이 잘되기 때문에 〔+human〕의 의미자질을 갖춘 낱말은 '꾼'으로 표기하는 것이 삼리적인 방법일 것이다. (7) "단옷날, 단춧구멍, 자줏빛, 낙숫물, 찻바퀴, 수렛바퀴" 등은 'ㅅ'은 개입 여부와 관계없이 의미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사전의 표기대로 'ㅅ'의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되며 '해님'은 존칭접미사 '님'이 붙을 때에는 대개 그 앞에 있는 고유명사 사이에 '사이ㅅ'이 개재되지 않는 동형성을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나 '해님'의표준말 또는 표기는 현실성이 없다. 또 표준말 재사정 시안에 표기된 "수염소, 수양······"등의 '수'에도 'ㅅ'을 개재시켜 표준말로 삼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8) 사잇소리의 이상적 표기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시도되었던 종성의 완급상대를 들수 있으나 곧 'ㅅ'으로 통일되어 현대 맞춤법 동일안에까지 그 맥이 이어졌는데 'ㅅ'의 단일표기에는 물론 이의는 없으나 앞의 말이 모음으로 끝났을 때 사잇소리 표기는 후두긴장음을 부활하여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다. 이상과 같이 학교현장에서 실시되고 있는 국어교육에서 문제되어 왔던 '사이ㅅ' 표기의 한 부분이나마 방향을 제시하고 'ㅅ'의 개입 여부에 따라 뜻의 분화면을 둘어 보면서 어떤 것이 보다 효과적이고 현상적인 표기법인가를 논해 보았다. 앞으로 '사이ㅅ' 표기에는 더 많은 합리적인 이론이 나와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하루 속히 보완해야 할 것이다.

      • KCI등재

        법인당 벽안 대종사의 생애와 종단관

        박부영 대각사상연구원 2011 大覺思想 Vol.15 No.-

        법인당 벽안 대종사는 통도사 출신 승려로, 1962년 설립한 신생 종단 조계종이 안정적으로 정착하는데 공이 많은 인물이다. 벽안은 국가의 국 회에 해당하는 조계종 중앙종회 초대 2대 3대에 걸친 10여 년 동안 모 두 세 차례에 걸쳐 의장을 역임했다. 이는 50년 조계종 역사상 유일하 다. 재직 기간 동안 그는 법을 제정하는 권한을 지닌 중앙종회 의장으로 서 신생 종단 조직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한 법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가 종회의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탁 월한 의사진행 능력, 승려로서 훌륭한 품성, 뛰어난 행정력 때문이다. 그의 이런 능력은 출가하기 전부터 형성됐다. 벽안은 봉건시대 한국사 회 엘리트들이 필수적으로 배우는 유학에 밝은 유학자였다. 그는 유학을 통해 공부하는 학생을 귀하게 여기는 자세, 스승과 선배에 대한 존경심, 아랫사람에게 겸손한 품성을 배우고 몸에 익혔다. 출가 이후에도 이같은 자세와 마음은 계속 유지돼 유학자와 선사(禪師)의 품성을 고루 갖출 수 있었다. 이 논문은 제자들의 증언과 신문 기록, 종회 회의록 등을 통해 나타난 벽안의 생애와 사상, 종회의장으로서 역할을 규명한 첫 번 째 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Beopindang Beokyan Daijongsa is a Buddhist Priest who made significant contributions to settling the new Jogye Order, which was founded in 1962. Buddhist Priest Beokyan was invited to the Joongang Religion Meeting of the Jogye Order and took charge of the 2nd and 3rd chairman for consecutive three times over about decade. He was the first Buddhist Priest who carried out his duties as a chairman, in history of the Jogye Order maintained for a half century. While taking charge of the chairman of the Joongang Religion Meeting, who had the right to the law constitution, he took the active initiative to constitute the law indispensable for stabilizing and prospering the new religious sectors. His excellent ability in communication and administrative sectors and his good character as a Buddhist Priest made him work as the chairman for a long time. Actually, he developed his ability stated above, before he left his home for a Buddhist temple and became a Buddhist monk. Buddhist Priest Beokyan was a Confucian scholar who was very well- informed to Confucianism as one of compulsory academic studies that every Korean elite group in the Feudal Age was supposed to study. While learning Confucianism, he came to have a habit of showing love and respects toward student learners, mentors and seniors. And, he can learn a lesson from juniors how important it is to have a modest attitude. After becoming a Buddhist monk, he continued to show such attitude and left the impression as a good and moral Confucian scholar. In this regard, this research thesis is very significant in that this thesis opens the first chapter to clarify Beokyan's life, ideas and roles as the religious chairman based on newspaper articles or religious section minutes and disciples' testimony on him.

      • KCI등재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