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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明用 대전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1993 社會科學論文集 Vol.12 No.1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金龍濟의 문학은 당대의 현실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다. 일제하 암혹기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도구로 하여 일제에 항거했으며 6' 25때에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반공자로 국가에 헌신했다. 또한 ‘친일문학’은 지하 민족운동을 위한 ‘위장 친일’이었다는 주장을 받아 들인다면 그의 생애는 일관된 민족시인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시를 쓰면서도 문학성을 버리지 않았고 그 시적 대상은 무산계급운동에만 있지 않고 일제에 탄압받는 민족과 자유를 박탈한 일제에 두었다는 사실은 그의 문학에서 간과할 수 없는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문학적 성과가 ‘친일’ 여부에 관계없이 긴 문학 생활 중 일제말기의 짧은 ‘친일’로 인하여 흔적없이 매몰될 때 이것은 지난 악몽의 역사를 망각하는 결과이며 문학사적으로 그가 ‘친일’이라는 오점을 남긴 것 이상으로 더 큰 문제를 잉태하게 될 것이다. 그가 “나는 의식·무의식 중에 좌익적 民族詩만을 양산하였다. 이 특질은 좌익 시대에도, 친일시대에도 민족시인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다만 시대적인 風調로는 프로시인, 친일시인의 탈을 쓰지 않올 수 없었다. 좌익 시대에는 유행적으로 그랬고, 친일 시대에는 정치적 위장으로써 그랬던 것이다"라는 발언과 大村益夫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민족주의 문학의 방편이고, 친일문학의 지하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위장된 사고방법이었다"고한 발언은 그의 ‘친일’에 총체적 상황의 파악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제시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에 대한 공식된 ‘친일’은 당연히 보류되어야 할 줄 생각된다. 더구나 그것은 당대를 살았던 모든 문인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가 젊어져야 할 과오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과거의 아픈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 문학을 미학적·내재적 측면에서만 보는 즉 편향적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학적 관점인 발생론적·원인적으로 깊이 洞察하여 動因올 규명할 때만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고민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