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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칼 라너(Karl Rahner),김태균(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20 神學展望 Vol.- No.211

        코로나19 사태로 시작한 2020년이 저물어 가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경제적 차이나 권력의 유무 등으로 인한 신분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또한 종교인과 비종교인,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역시 평등하다는 사실도 증명해 주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코로나19 사태는 견디기 힘든 삶의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이들 중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를 시대의 소음으로 오해할 만한 모습들을 보여 주는 이들도 있었다. 올해의 성탄은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맞이하는 축제일이다. 과연 ‘사회인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중의 감정’으로 성탄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탄생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칼 라너가 40여년 전에 행한 성탄 특강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데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예수의 탄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라너는 다음의 네 가지 관점에서 성탄에 대한 묵상을 시도한다. 첫째,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Chritologie von unten)의 관점 아래에서 우리가 과연 ‘성탄절’을 예수의 탄생으로 믿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탄생(한 인간의 시작)을 예수의 삶에서부터 이해하고자 할 때 성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둘째, 라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이해하는 성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마침’(Ende)은 ‘시작’(Anfang)을 계시해 주기 때문이다. 셋째, 그렇다고 해서 이 묵상들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영원하신 하느님 말씀의 강생에 대한 전통적이며 교도권적 성탄절 신학에 대해 침묵하거나 혼란스럽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라너는 우리가 스스로 고유한 실존을 완성해 가는 가운데 만나는 성탄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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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의 경쟁과 디지털 미디어 그리고 일본의 근접한 적들

        고이치 이와부치(Koichi Iwabuchi),김태균(번역자)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2017 아시아리뷰 Vol.6 No.2

        중국과 한국의 경제성장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전후 세계 자본주의의 팽창은 아시아 경제와 (상업화된) 문화의 부상을 가져왔다. 반면, 지난 20여 년간 일본사회는 소위 거품경제의 붕괴 이후 경제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악전고투해왔다. 일본의 미디어 문화가 세계적으로 호응이 높아지면서 일본의 문화적 힘이 증가해왔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등장과 문화시장의 팽창은 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시장의 생산력을 증가시켰고, 특히 한국의 문화시장은 일본을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는 일본, 중국, 한국의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경쟁관계가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이러한 경쟁관계는 역사적 문제들에 대한 정치적 갈등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은 1990년 중반 이후 미디어 문화의 동아시아 지역 내순환 및 소비의 활성화로 문화적 교류기 상당한 수준으로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일본에서의 증가하는 반중, 반한 감정이 (반한 감정의 증가는 재일한국인들에 대한 혐오연설을 야기하기도 한다) 동아시아의 문화적 교류를 억제하고, 최소한 이것을 압도하게 되는지를 논의한다. 이 글은 동아시아 내의 경쟁관계의 증대가 일본의 상대적인 쇠퇴, 사회경제적인 막연한 좌절감,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급증과 복잡하게 얽혀서 혐오 표현의 대상으로서 근접한 적에 대한 공격과 추격을 형성해왔음을 주장한다. The substantial expansion of global capitalism in the post-Cold War context has accompanied the ascent of Asian economies and (commercialized) cultures as mostly exemplified by China and South Korea. In contrast, Japan’s experience has been marked by struggles with economic slump after the collapse of the so-called bubble economy. Nonetheless, Japan’s cultural power has been growing as Japanese media culture has been received favorably internationally. However, the advent of capitalism and the expansion of cultural markets have enhanced the production capacity of other Asian countries as well and South Korean counterparts have even surpassed those of Japan. Accordingly, we have observed the intensification of economic and cultural rivalry between Japan, China and South Korea and the rise of inter-Asian antagonism and the “othering,” joined by political contestation over historical issues. This paper discusses how the rise of anti-Chinese and Korean sentiments in Japan, which also generates hate-speech movements against resident Koreans, overwhelm, if not suppress, East Asian cultural exchange. This is considered within the social context of regional circulation and consumption of media cultures which has considerably advanced East Asian cultural exchange since mid-1990s. It will be argued that growing East Asian rivalry with the relative decline of Japan, the vague sense of socio-economic frustration, and the upsurge of digital media communication have been complicatedly conjoined to engender the attacks and search for proximate enemies as the object of animosity.

      • KCI등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속적 의미

        칼라너(Karl Rahner),김태균(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5 神學展望 Vol.- No.190

        다가오는 12월 8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0.11-1965.12.8)가 폐막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50년 동안 교회는 공의회의 개혁과 쇄신을 뜻하는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정신을 이어받아 내적으로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살아가고 ‘인류의 빛’을 반사하는 선명한 거울이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외적으로는 타종교인들과 무신론자를 포함한 다른 모든 이들과 더불어 인류의 공동선을 증진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이 모든 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져다 준 변화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맞이하여 공의회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은 분명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라너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속적 의미”라는 논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다시금 성찰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라너는 공의회의 의미를 간략히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세계 교회’, ‘세상과의 관계’, ‘공의회 신학’, ‘교회 일치적 반전’ 그리고 ‘보편적 구원낙관주의’ 등으로 요약하고 있다. 라너가 공의회의 의미에 대하여 정리하면서 논문의 말미에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며 다가온다. “[제2차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교회는 비로소 세계 교회로서 자신을 드러냈으며, 세상을 향하여 교회사의 모든 굴곡들과 교회 미래의 모든 어두움들이 하느님과 그분의 의지에 의해 포용되었다고 선포한다. 나아가 하느님은 당신의 근원 없는 사랑을 통하여 자기 내어줌(Selbstmitteilung) 안에서 스스로를 세상의 근원이요 힘이며 목적으로 계시하시며, 역사의 자유 안에서 이 모든 것을 관철시키신 분이라고 선포한다. 교회는 이 공의회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하였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계 교회(Weltkirche)가 되었기 때문이고, 이러한 세계 교회로서 오늘날 세상을 향하여 예수가 선포한 복음의 핵심을 과거보다 조건 없이 용감하게 새로이 선포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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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하느님과 철학자들의 신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ger),김태균(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8 神學展望 Vol.- No.202

        신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인간에게 첫 번째 질문이면서 동시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는 태동과 더불어 자기 앞에 펼쳐져 있는 그리스 철학이라는 광대한 바다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스 철학과 마주하면서 그리스도교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제기될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본 문제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교가 신앙하는 ‘하느님’과 철학이 증명을 통해 존재를 긍정(또는 요청)하는 ‘신’ 은 동일한 분인가 아니면 서로 다른 신들인가 하는 질문이다. 라칭거는 기초신학 교수로서 행한 첫 번째 강의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철학적 신 개념과 그리스도교 이전의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신 개념을 살펴보고 이어서 성경에 나타나는 계시의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관을 설명한다. 이어서 철학과 신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정립을 시도한다. 라칭거에게 철학과 신학은 서로 대립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이는 다음의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신앙은 철학적 신론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완성시킨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동일한 분이시다”(12쪽). 신앙의 하느님과 철학자들의 신에 대한 질문은 고전적 질문이면서 동시에 신학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핵심 주제로서 언제나 새로운 질문이기도 하다. 라칭거는 이 문제를 “신학적 원칙들의 세계안에서 신학이 당면하는 핵심적 근본 문제로서 어렵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기초신학의 과제”(13쪽)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모습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그분이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지속해야 할 신학의 소임”(25쪽) 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학의 소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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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론

        에머리히 코레트(Emerich Coreth),김태균(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22 神學展望 Vol.- No.216

        20세기 형이상학의 대가로서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의 철학 교수였던 에머리히 코레트(Emerich Coreth, 1919-2006)는 신에 대한 질문은 철학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에서 유래한다고 하였다. 그는 2001년 『철학사상 안에서의 신』(Gott im philosophischen Denken)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무신론이 신을 부정한다면, 이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무신론은 역설적이게도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적’ 무신론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무신론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삶의 공간 안에서 그리고 그 조건 안에서 태어났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무신론의 모든 형태들은 “신 부정으로 유도하는 왜곡되거나 단축된 신관념에 근거한다. 이에 대한 원인은 비록 잘못된 관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신앙인들 스스로가 일방적인 신앙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제공하였다. 무신론은 이러한 관념들의 왜곡된 의미를 밝히고, 본질적으로 신이 의미하는 것들에 대한 곡해들을 해명하고 그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는 철학적 사고를 요구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에서는 코레트의 『철학사상 안에서의 신』 가운데 무신론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제7장을 번역하였다. 제7장에서 코레트는 19세기부터 비롯된 ‘고전적 무신론’과 그에 뿌리를 두고 있는 20세기의 ‘실천적 무신론’에 대해, ‘학문과 그 발전이라는 이름 안에서의 무신론’, ‘인간과 인간의 자유라는 이름 안에서의 무신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동체와 사회 정의라는 이름 안에서의 무신론’이라는 세 가지 근본 형식으로 환원하여 설명한다. “신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어 삶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Gott im philosophischen Denken,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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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인들의 교회

        칼 라너(Karl Rahner),김태균(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5 神學展望 Vol.- No.189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공동선 실현을 위한 자기 희생과 개인적인 편안하고 조용한 신앙생활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교회는 한편으론 사회교리를 통하여 사회 정의와 공동선 구현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근본적으로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거룩하다’는 성(聖)과 속(俗)을 인위적으로 구분하려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프란치스코 교종의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복음의 기쁨?? 49항)라는 고백은 무척 듣기에 거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라너의 ‘죄인들의 교회’라는 글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성찰하고 묵상하도록 인도한다. 라너에 따르면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은 죄를 짓는 나약한 인간(죄인)이기에 그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이라는 미명하에) 행하는 행위 역시 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짓는 죄는 바로 교회의 죄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거룩함에 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거룩함의 원천이신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설립하시고 성령께서 교회 안에 함께 하시고 활동하시기에 교회는 본질적으로 거룩하다. 이것이 우리가 ‘거룩한 교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근본 내용이다. 그러므로 라너에 의하면 ‘교회가,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세상의 일에 관여하여 행동하는 것은 거룩한 교회를 더럽히는 것이고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이다’라는 사고는 결코 그리스도교적인 생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뒤로 하고 교회라는 철옹성 안에 숨어서 천국만을 바라보며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라’는 생각이 비그리스도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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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간을 성녀 엘리사벳 앤 씨튼과 함께

        안토니 F. 치폴로(Anthony F. Chiffolo),김태균(번역자)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 2018 神學展望 Vol.- No.203

        엘리사벳 씨튼(‘마더 씨튼’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짐) 성녀는 미국 태생으로는 처음으로 성인이 된 인물이다. 그녀는 부유한 성공회 집안의 딸로 태어나 마찬가지로 성공회 명문 집안의 사업가(윌리엄 메기 씨튼)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낳은 평범한 여인이었다. 병에 걸린 남편의 치유를 위해 이탈리아로 휴양을 떠난 그녀는 그곳에서 틈틈이 성당을 방문하여 기도를 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 미사 때 사제가 들어 올린 성체를 보는 순간 그녀는 하느님 현존을 강렬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 체험이 그녀를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남편을 하느님께 떠나보낸 후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다른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녀들과 함께 1805년 바클레이 거리에 위치한 성 베드로 성당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 그 후 그녀는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게 되는데, 이것이 미국의 가톨릭 학교 체계의 근본이 되었다. 마더 씨튼은 하느님 섭리에 신뢰하며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과부로 살아가면서 순간의 은총으로 평범한 일상에서의 성화가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준 여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원성 안에서 몸소 성체성사를 산 여인이다. “교회의 딸들이 되십시오”라는 짤막하고 간결한 그녀의 유훈은 교회의 자녀라는 사실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인가를 새삼 일깨워 준다. 이 짧은 묵상 기도는 마더 씨튼 영성의 핵심을 잘 드러내 준다. ‘하느님 안에서의 확신’과 하느님을 향한 ‘기도’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기쁨’을 묵상하면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신앙’을 깨닫도록 인도한다. 그리하여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과 ‘거룩한 은총의 사슬’로 굳게 맺어지는 신앙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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