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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민(Park Jong-min) 한국고전번역원 2008 民族文化 Vol.- No.31
국장도감은 왕의 옥체를 빈전에서 산릉까지 운구하는데 필요한 상구류와 제구, 각종 관련 기물을 제작과 보수, 개칠을 통해서 마련하는 실무를 담당하였던 기관이다. 국장도감은 지휘체제 상 총괄조직과 실무조직으로 나누어서 유기적으로 운용하였다. 총괄조직은 국장을 전체적으로 조율하면서 최종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각 방을 관리하고 감독하였다. 국장도감은 실무부서로서 일방과 이방, 삼방을 두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소속 관리들을 임명하여서 국장과 관련한 소장업무를 추진하도록 하였다. 각 방 소속 관리들은 실무자로서 다양한 상구류 마련과 각종 제의 등으로 국장을 체계적인 조직 바탕 위에서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해당 관리들은 당상의 결재를 받아서 국장에 필요한 각종 업무를 실제로 수행하여서 국장을 원활하게 마무리 지으려 노력하였다. 각 방의 실무자들은 직접 현장을 방문하여서 원재료와 그 상태를 확인 하였으며, 타부서와의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이루었다. 그들은 의사결정과 정과 업무추진과정을 합법적인 행정절차에 따라서 추진하였으며, 이후에 일련의 과정을 세세히 기록하고 관리하였다. 대행왕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면서 오직 국장을 잘 마무리 짓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국장도감은 체계적인 조직과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하여서 국장업무의 효율성 증대시켰다. 국가와 국장도감 관리들은 국장을 통해서 일정부분 상보적 관계를 유지 하였다. 관리들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운영을 통해서 국장을 원활하게 마무리 지었으며, 국가는 관리들에게 물질과 인사보상으로 화답하였다. 즉, 성공적인 업무수행과 이에 대한 보상으로 국가와 관리들은 일정부분 상보 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국장도감 소속 관리들의 심도 있는 유교적인 소양과 의례에 대한 기본적인 식견으로 명분과 실질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조선시대 <왕실의례지킴이>이었다. The Gukjangdogam was in charge of readying various implements for the national funeral in Joseon. They used in carrying the dead of the king and his wife, his closely related objectives, etc from the Binjeon to the royal tomb. The Gukjangdogam had basically three suborganizations; Ilbang and Ibang, Sambang. They had the public servants eqipping with the Confucian culture in depth. They carried on their own business without a failure and tried to finish the national funeral. Each was a man of business as well as a specialist in his field at that time. They carried on their business as well; the admission of a supervisor and the visit on the spot, the systematic co-relationship among others. They trid to finish the national funeral very well in following the administrational process as well as exposing the king’s authority. So the Gukjangdogam was willing to build the systematic rganization and co-relationship. A country sustained the the mutual-assistant relationship with the public servants in charge of the Gukjangdogam. The public servants efforted to finish without a failure. A country compensated for the materials and the promotions in return for their succesive business. there wee the mutual-assistant relationship between a country and the public servants. The public servants of the Gukjangdogam had the Confucian culture in depth and the basical knowledge towards the Confucian ceremony. Both could be satisfied with the practice and the justice in the national funeral in Joseon.
이욱 종교문화비평학회 2018 종교문화비평 Vol.34 No.34
1919년 1월 22일에 사망한 고종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거행되었다. 조선시대 국왕의 상례는 왕이 숨을 거둘 때부터 발인(發靷), 우제(虞祭) 등을 거쳐 상복(喪服)을 완전히 벗는 담제(禫祭) 때까지의 연속된 과정 모두를 포괄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상례에서국장은 상례의 전체 과정이 아니라 임시 기구는 장의괘(葬儀掛)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의식만을 가리켰다. 본 연구는 이 장의괘에서 주관한 의식들을 고찰하였다. 당시 일본은 고종의 장례식을 통상의 국장식에 조선의 옛 관습을 더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여기서국장식은 일본식(日本式)을 의미하였다. 당시 일본의 황실 및 황족의 국장은 불교식에서벗어나 신도식(神道式)으로 새로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고종의 국장은 1913년에 사망한다케히토 친왕의 장례식을 준용하여 준비하였다. 장의괘 주관으로 거행되었던 고종 국장의 중요 의식은 ‘국장봉고의(國葬奉告儀)’, ‘사뢰의(賜誄儀)’, ‘매장 전(前) 영구(靈柩) 앞에서 거행하는 제의’, ‘영거(靈輿) 발인의(發引儀)’, ‘장장제의(葬場祭儀)’, ‘매장 후 권사(權 舍; 임시 건물)에서 거행하는 제의(祭儀)’, ‘매장 후 묘소(墓所)에서 거행하는 제의’ 등 7가지였다. 조선시대의 국장과 비교할 때 다른 점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고종의 지위 변동에 따른 사제(賜祭) 형식이다. 고종이나 그의 지위를 계승한 상주(喪主)는 주권을 가진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장은 국왕의 승하에 따른 애통과 왕권의 계승까지를 포괄하지못하였다. 반면 일본 천황이 그 죽음을 애도하여 내려주는 제사 형식이 국장의 중요한부분을 차지하였다. 둘째, 공식적 일본식 장례와 비공식적인 조선식 장례의 이원화이다. 위 7가지 의식은 철저하게 일본식으로 진행되었다. 지데(しで, 四手, 紙垂), 사카끼(榊, さかき, Cleyera japonica) 등과 같이 일본 장례식에 보이는 의물(儀物)이 등장하였으며 신도(神道) 복장을 한 제관(祭官)이 의식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망자를 위한 음식도 달랐다. 전통적 의장은 대여(大輿)와 그 주변을 둘러싼 삽선(翣扇), 그리고 상복(喪服) 등이 전부였다. 음악의 사용 역시 조선의 상례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조선식은 동대문 밖 발인 행차와 능에서 거행하는 의식을 주도하였다. 셋째, 전통과 근대의 관점에서 볼 때 고종 국장의 중심 의식인 장장제의(葬場祭儀) 는 근대적 의식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훈련원터에서 거행된 장례식은 근대적 장례식을 일본식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발인 행렬에서 책보(冊寶) 대신 훈장(勳章)이 등장한 것이나 장례식장에서 철도레일로 대여를 옮기는 것 역시 근대적 모습이다. 이러한 형식들을 통해 조선식은 구관습적인 것인 반면 일본식은 근대적인 것으로인식되어졌다. 그러나 망자에 대한 추모의 정을 전통적 의식으로 표출하지 못한 조선 사람들에게 고종의 국장은 식민지 백성의 처리를 대변하는 것이 되어 반일(反日)의 감정을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The funeral for Emperor Gojong 高宗 (1852~1919; r. 1863~1907), who passed away on January 22, 1919, was held as a state funeral. During the Joseon Dynasty 朝鮮 王朝 (1392~1910), the traditional Confucian funerals for the monarchs were consisted of the whole processes, started from the king’ s actual decease up to the barin 發靷 (departure of the funeral cortege for the graveyard), uje 虞祭 (sacrificial ceremony held after internment), and damje 禫 祭 (sacrificial ceremony held in the 27th month after decease), when complete removal of the mourning dresses. In the funeral for the Emperor Gojong, however, “state funeral” was referred as not to the entire funereal process but only to the official ceremony, supervised by a temporary government agency which was called the Jang’euigwae 葬儀掛 (Funeral Bureau). My study examines the rituals supervised by this Jang’euigwae. At the time of Gojong’ s death, Japan decided to hold this funeral by adding to its own customary “state funerals” processes of old Korean customs. Here, the “state funerals” was meant Japanese-style funerals. In this period, the state funerals for the Japanese imperial family were being newly created according to the Shinto style, eschewing the traditional Buddhist style. Gojong’s funeral was accordingly prepared with the appropriate application of the funeral for Prince Arisugawa Takehito 有栖川宮威仁 親王 (1862~1913). The number of main rituals of the state funeral for Gojong held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Jang’euigwae amounted to seven: gukjang bonggo’eui 国葬 奉告儀 (rituals announcing the prospective execution of a state funeral); saroe’eui 賜誄儀 (rituals bestowing a posthumous title on the deceased); rituals held in front of the yeonggu 靈柩 (hearse) before burial; yeonggeo barineui 靈輿 発引儀 (rituals for the hearse’s departure for the grave site); jangjang je’eui 葬場 祭儀 (grave site rituals); rituals held in a gwonsa 権舎 (temporary building) after the internment; and the rituals held at the tomb after burial. The three differences had been held for Gojong’s state funerals, comparing to those of the Joseon Dynasty. First, the form of saje 賜祭 (sacrificial rites bestowed by the monarch on his subjects) had been changed due to the shifting of Gojong’s status. Because both the late emperor and the sangju 喪主 (chief mourner), supposedly to succeed the former’s status, were no longer inherited the sovereign monarchs, the state funeral was not encompassed the state-grief, stemmed from the emperor’s death or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On the contrary, this sacrificial ceremonies “bestowed” by the Japanese emperor, simply expressing the condolences for Gojong’s death took up the major part of the state funeral. Second, Gojong’s funeral was divided into two: an official, Japanesestyle funeral and an unofficial, Korean-style one. The seven rituals mentioned above were held in the thoroughly Japanese manner. Ritual objects used in Japanese funerals such as shide 紙垂 (zigzag-shaped paper streamers) and the sakaki 榊 (Cleyera japonica) were used, and jegwan 祭 官 (officiants), who were wearing the Shinto costumes officiated the ritual procedures. The food offerings for the deceased were differed as well. The only traditional Korean rituals included were the dae’yeo 大輿 (large bier) and the sapseon 翣扇 (large ceremonial fans) surrounding it as well as the mourning dresses. The sound of music likewise was something never heard before in the traditional Korean funerals. In contrast, the only performances according to the Korean emperor’s funeral processions were held outside Heung’injimun 興仁之門 (also known as Dongdaemun 東大門 or “East Gate”) and the other traditional rituals were held at the limited imperial tomb site. Third, viewed from the traditional and the modern perspectives, jangjang je’eui, which were the central rit...
박종민,Park, Jong-min 국립문화재연구원 2006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Vol.39 No.-
상장례 중 발인절차에서 각종 물품과 시신을 운반하는 상구를 이용하여, 상주들은 예를 원활하게 치루고자 노력한다. 이미 조선시대 초기에 "세종실록"과 "국조오례의"를 통해서, 이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반백성들이 지켜야 할 예서의 수준을 넘어선 국가의례의 표준서이다. 조선 중후기를 넘어오면서, 국가가 정한 국장의례 규정에 따라서, 국장도감은 운반상구류를 제작하여서 사용하였다. 그 예로 대여 견여 요여 채여 연 가자 등을 제작하여서 국장에 실제로 사용하였다. 이와 관련하여서, 조선 중기 이후에 일련의 실제 국장과 그에 소요된 기물들을 기록한 책인 의궤를 살펴볼 수 있다. 본 글은 "선조국장도감의궤", "인조국장도감의궤", "정조국장도감의궤", "순조국장도감의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를 참고서로 활용하여서 조선 중후기 국장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운반상구류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운반상구류의 준비와 제작과정, 활용상황, 그 변화에 이르기까지 국장도감의궤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았다. 조선시대 왕실의례는 곧 국가를 대표하는 의례이어서 개인의 기호에 따라서 좌우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 왕실이 한 국가의 상징이자, 실질적인 권력이 나오는 곳이었기 때문에, 왕실의례는 한 국가의례로서 전형을 보여주어야 했다. 운반상구류가 대행왕의 옥체를 실은 재궁, 왕실의 권위와 왕통을 상징하는 물품 등을 운반하기 때문에, 국장도감은 세심한 배려와 함께 신중을 기하였다. 이는 이러한 물품들이 살아서 이 땅을 지배하였던 왕 같은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발인 시에 단순한 운반상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왕과 동격 선상에 있는 상징적인 물품들이다. 정형성을 유지하였던 국장용 운반상구 역시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당시 현실적인 여건으로 다소의 변화가 일어났다. 왕실의례가 전례의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변화를 가져왔다면, 사대부 및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상구류 제작 또는 사용에서도 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조선시대의 국장용 상구류 변화에도 관심을 기여야 한다. The chief mourners do their best to carry the dead and various things related to him in the departure of a funeral procession. "Sejongsillok" and "Gukjooryeui" had already written the national funeral supplies for carriage in detail in the early of Joseon period. But they were the standard book of national ceremony. The Ilbang of Gukjangdogam made the national funeral supplies for carriage in the late of Joseon; Daeyeo, Gyeonyeo, Yoyeo, Chaeyeo, Gaja etc. "Gukjangdogamuigye" explained these in detail; size, materials, made-place etc. I used "Gukjangdogamuigye" published in the late of Joseon to explain the national funeral supplies for carriage. Because Kingdom's ceremony in Joseon was representative to the country, it couldn't depend on an individual taste. King was the symbol of a nation and the star tin point of the political power at that time. So its ceremony was to show people the representative example as a national ceremony. The national funeral supplies for carriage carried the dead of King and various things related to him. Gukjangdogam managed them carefully. People thought that the mean of these things was equal to King's authority at that time. So these weren't the mere national funeral supplies for carriage, the symbolic instruments equal to King.
일제강점기 국장(國葬)의 양상 및 성격-음악을 중심으로
이수정 민족음악학회 2022 음악과 민족 Vol.- No.64
일제강점기 조선왕실은 이왕가라는 이름으로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순종의 장례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장의(葬儀)로 거행됐어야 했는데, 일본에 큰 공을 세웠을 때 부여되는 ‘국장(國葬)’이 부여되었다. 실권이 없는 식민지의 왕인 순종에게 부여된 국장은 일본의국가 장례를 뜻하는 것으로, 1919년 고종과 1926년 순종의 장례에서 실행되었다. 다만 식민지 조선의 관습을 거스를 수 없어, 국장은 조선식 전통장례도 활용하였다. 고종의 국장은 일본식 국장을 기본으로 하고, 조선의 구식장례를 혼용하는 방식으로 거행되었는데, 순종 국장은 조선식 장례를 기본으로 하고 일본식 국장을 혼용하는 방침으로 바뀌었다. 순종 국장은 고종을 기준으로 삼았고, 조선 관례에 따른다는 방침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고종때와 다른 양상을 보여준 것이다. 일본식 국장 절차를 축소했을 뿐 가장중요한 절차와 내용은 일본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 거행된 두 번의 국장은 일본 황가와 내각에서 주도했기 때문에 이왕가는 어떠한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다. 본 연구에서는 순종의 장례에서 볼 수 있는 두 개의 의식인 조선과 일본식 장례 절차와 음악을 살펴보았다. 조선식 국장은 승하에서 발인, 부묘의까지 약 3년간 각종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왕직에 빈전과 혼전, 산릉, 부묘주감을 설치하여 의례를 진행했으며, 빈전, 인산, 산릉, 혼전, 부묘는 전통방식에 따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장의 가장 마지막 의식인 부묘의에 연주된 종묘제례악의 곡명이 <보태화지곡>·<향만년지곡>으로 바뀐 점을 알 수 있었다. 부묘 행차시에 고취악으로 <태평춘지곡>이 연주되었는데 이왕직아악부에서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와 다른 점은 종묘에서 환궁할 때가 아닌 종묘로 행차할 때 고취했다는 점이다. 일본식 국장은 절차가 간소화되어 사뢰의(천황이 보내온 조문를 낭독하는), 발인, 영결식이 있었다. 발인과 영결식에서는 일본식 장의물품이 사용되었다. 국장에서는 해군군악대와 육군의장병이 <슬픔의 극>·<울려퍼지는 나팔소리>·<목숨을 버리고>같은 장송곡을 연주하였다. 또 일본군과 의장병 수천명과 조포와 조총발사, 대규모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일본의 위력이 전면에 드러나도록 배치하였다. 고종 때와 달라진 점은조선과 일본의 장례 제도를 분리하여 거행한 반면, 순종 국장은 ‘성빈전의-성복의-사뢰의-견전의-발인의-봉결식의-침전성빈전의-하현궁의-반우의’라는 새절차를 만들었는데, 양국의 국장 절차를 혼용한 것이었다. 또 엄순헌귀비, 이희공, 이준공 같은 왕족과 일제에 의해 작위를 받은신흥 귀족의 장례는 어떻게 거행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왕족과 귀족의 장례는 절차와 규모에 차이가 있을 뿐 국장과 같은 양상이었다. 이런 ‘조선상류’의 장례는 일본의 영향하에 거행되면서 한일양측의 장례를 혼용하였다. 조선식 장례와 발인을 하되, 일본식 의물도 사용하고 일본군 의장병의 장송곡 연주하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을 마쳤다. 이러한 방식으로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거행된 일제강점기 장례 풍속에 본보기가 되어대중의 장례 풍습에 영향을 주었었다.
이현진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1 泰東古典硏究 Vol.27 No.-
왕실의 상장례(喪葬禮)와 관련한 연구가 최근 진척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국왕의 국장 전반을 보여주는 연구는 아직 없다. 그 때문에 관찬 자료 및 의궤, 등록 등 각종 자료를 통해 영조의 국장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말에 도입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전거로 하면서, 사례(士禮) 위주인 《주자가례》를 제후례에 맞게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및《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흉례조가 정비되었다. 유교적 예제의 실천이 점차 강조되면서 불교적 요소들이 배제되어 갔으며, 고려부터 내려오던 역월제(易月制)도 삼년상제(三年喪制)로 변화되어 갔다. 조선후기에는 《속오례의》의 편찬을 거쳐 1758년에 영조의 명에 따라 편찬된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으로 왕실 상장 의례가 정비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치러진 영조의 국상은 《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등 세 관찬 자료를 통해 날짜별로 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밖에 국장 당시 작성된 국장, 빈전, 혼전, 산릉, 부묘도감의궤 및 등록, 일기류를 통해 관찬 자료에서 드러나지 않는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1776년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승하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가 국상을 주관했다. 복(復), 거애(擧哀), 역복(易服), 설빙(設氷), 목욕(沐浴), 습(襲), 반함(飯含), 영좌(靈座) 설치, 소렴(小歛), 소렴전(小歛奠), 대렴(大歛), 성빈(成殯), 대렴전(大歛奠)・성빈전(成殯奠), 성복(成服), 사위(嗣位), 세 도감 설치,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 차정, 시호(諡號)・묘호(廟號)・전호(殿號)・능호(陵號) 결정, 산릉자리 결정, 재궁 전체 가칠(加漆), 재궁 상자(上字) 친서(親書), 재궁 결과(結裹), 상시책보(上諡冊寶), 계빈(啓殯), 계찬궁(啓欑宮), 조전(祖奠), 견전(遣奠), 발인(發引), 봉사(奉辭), 노제(路祭), 산릉 성빈(成殯), 하현궁(下玄宮), 망곡례(望哭禮), 입주전(立主奠), 초우제(初虞祭), 반우(返虞), 반우지영(返虞祗迎), 재우제(再虞祭)~칠우제(七虞祭), 졸곡제(卒哭祭), 연제(練祭), 상제(祥祭), 담제(禫祭), 부묘(祔廟)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영조의 국장 절차에서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되었다. 첫째, 영조의 국장이 1758년본 《국조상례보편》을 근거로 치른 최초의 국장이라는 점이다. 둘째, 국장 기간 내 《명의록(明義錄)》과 《속명의록(續明義錄)》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자, 영조-진종-정조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표방하고 각종 절차가 있을 때마다 신하들이 입시한 가운데 정조가 직접 거행함으로써 취약한 왕권을 직・간접적으로 회복하고자 노력한 점이다. 셋째, 국장 기간 중 국왕을 비롯하여 집권 세력의 정치성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국장 담당자 및 배향 공신의 선정이다. 영조 국장에서는 여타 국장과 달리 국장을 총괄하는 총호사의 교체가 빈번했으며, 정조의 의지로 송시열(宋時烈)을 효종의 배향신으로 추배(追配)하고 노론계 신임의리를 대표하는 김창집(金昌集)을 영조의 배향신으로 선정했다. 넷째, 영조・정성왕후가 추존된 아들 내외(진종・효순왕후)와 같은 날 함께 부묘되었는데,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조의 국장은 겉으로 보기에 여타 국왕의 국장들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지적한 몇 가지 특징들은 다른 국장에서 보기 어렵고, 그로 인해 여타 국장보다 훨씬 역동적인 측면이 많았다. Examined in this article are the procedures that were prepared for the late King Yeongjo's funeral, which took place shortly after successor King Jeongjo ascended to the throne. Many materials, such as several chapters inside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 couple of Eui'gwe(儀軌) Ritual Protocol Manuals, and a variety of Deung'rok(謄錄) Documents generated by several governmental offices, were consulted for this work. King Yeongjo died on March 5th, 1776, and successor King Jeongjo immediately commenced overseeing of the preparations for the funeral. The National funeral(國喪) for King Yeongjo continued for total of 27 months, and proceeded as dictated by a manual titled Gukjo Sang'rye Bo'pyeon(國朝喪禮補編: Supplemented Edition for the National Funeral Manual) which had been published earlier in 1758 by the order of King Yeongjo himself. During the National funeral, a couple of political incidents that complicated the proceedings occurred, but King Jeongjo involved himself in every step of the preparation, and conducted several crucial stages of the ritual himself as well. As a result, he was able to establish a perfectly justified line of succession from King Yeongjo to the late King Jingjong(眞宗) and to himself. His efforts greatly contributed to the stabilization of his own authority, and to the successful completion of a National funeral which turned out to be quite dynamic than any other funerals in history.
이현진(Lee, Hyeon-jin)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11 泰東古典硏究 Vol.27 No.-
왕실의 상장례( 禮)와 관련한 연구가 최근 진척되고 있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국왕의 국장 전반을 보여주는 연구는 아직 없다. 그 때문에 관찬 자료 및 의궤, 등록 등 각종 자료를 통해 영조의 국장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말에 도입된 《주자가례( 家禮)》를 전거로 하면서, 사례( 禮) 위주인 《주자가례》를 제후례에 맞게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세 종실록오례( 禮)》및《국조오례의(國 禮 )》의 흉례조가 정비되었다. 유교적 예제의 실천이 점차 강조되면서 불교적 요소들이 배제되어 갔으며, 고려부터 내려오던 역월제( )도 삼년상제( 年 )로 변화되어 갔다. 조선후기에는 《속오례의》의 편찬을 거쳐 1758년에 영조의 명에 따라 편찬된 《국조상례보편(國 禮 )》으로 왕실 상장 의례가 정비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치러진 영조의 국상은 《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 록》등 세 관찬 자료를 통해 날짜별로 진행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밖에 국장 당시 작성된 국장, 빈전, 혼전, 산릉, 부묘도감의궤 및 등록, 일기류를 통해 관찬 자료에서 드러나지 않는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1776년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의 집경당에서 승하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가 국상을 주관했다. 복( ), 거애(擧 ), 역복( ), 설빙( ), 목욕( ), 습( ), 반함( ), 영좌( ) 설치, 소렴( ), 소렴전( ), 대렴(大 ), 성빈( ), 대렴전(大 ) 성빈전( ), 성복( ), 사위( ), 세도감 설치, 고부청시청승습사(告 ) 차정, 시호( ) 묘호( ) 전호( ) 능호(陵 ) 결정, 산릉자리 결정, 재궁 전체 가칠(加 ), 재궁 상자( ) 친서( ), 재궁 결과(結 ), 상시책보( ), 계빈(啓 ), 계찬궁(啓 宮), 조전( ), 견전(遣 ), 발인( ), 봉사( ), 노제(路 ), 산릉 성빈( ), 하현궁( 宮), 망곡례( 哭禮), 입주전( ), 초우제( ), 반우( ), 반우지영( ), 재우제( )~칠우제( ), 졸곡제 ( 哭 ), 연제( ), 상제( ), 담제( ), 부묘( ) 등의 순서로 진행되 었다. 영조의 국장 절차에서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되었다. 첫째, 영조의 국장이 1758년본 《국조상례보편》을 근거로 치른 최초의 국장이라는 점이다. 둘째, 국장 기간 내 《명의록( )》과 《속명의록( )》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자, 영조-진종-정조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표방하고 각종 절차가 있을 때마다 신하들이 입시한 가운데 정조가 직접 거행함 으로써 취약한 왕권을 직 간접적으로 회복하고자 노력한 점이다. 셋째, 국장 기간 중 국왕을 비롯하여 집권 세력의 정치성이 현저하게 드러 나는 부분이 국장 담당자 및 배향 공신의 선정이다. 영조 국장에서는 여타 국장과 달리 국장을 총괄하는 총호사의 교체가 빈번했으며, 정조의 의지로 송시열( )을 효종의 배향신으로 추배( )하고 노론계 신임의리를 대표하는 김창집(金 )을 영조의 배향신으로 선정했다. 넷째, 영조 정성왕후가 추존된 아들 내외(진종 효순왕후)와 같은 날 함께 부묘되었는데,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영조의 국장은 겉으로 보기에 여타 국왕의 국장들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지적한 몇 가지 특징들은 다른 국장에서 보기 어렵고, 그로 인해 여타 국장보다 훨씬 역동적인 측면이 많았다. Examined in this article are the procedures that were prepared for the late King Yeongjo s funeral, which took place shortly after successor King Jeongjo ascended to the throne. Many materials, such as several chapters inside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 couple of Eui gwe( 軌) Ritual Protocol Manuals, and a variety of Deung rok(謄錄) Documents generated by several governmental offices, were consulted for this work. King Yeongjo died on March 5th, 1776, and successor King Jeongjo immediately commenced overseeing of the preparations for the funeral. The National funeral(國 ) for King Yeongjo continued for total of 27 months, and proceeded as dictated by a manual titled Gukjo Sang rye Bo pyeon(國 禮 : Supplemented Edition for the National Funeral Manual) which had been published earlier in 1758 by the order of King Yeongjo himself. During the National funeral, a couple of political incidents that complicated the proceedings occurred, but King Jeongjo involved himself in every step of the preparation, and conducted several crucial stages of the ritual himself as well. As a result, he was able to establish a perfectly justified line of succession from King Yeongjo to the late King Jingjong( ) and to himself. His efforts greatly contributed to the stabilization of his own authority, and to the successful completion of a National funeral which turned out to be quite dynamic than any other funerals in history.
이지선 한국국악학회 2019 한국음악연구 Vol.66 No.-
This paper examines the rites and music performed in the state funeral of Emperor Gojong which was conducted in Japanese style. Emperor Gojong’s state funeral was held for about a month in Shinto style in which every rite was accompanied with music drawing distinctions from the traditional state funeral of Joseon. The music performed in the state funeral are gagaku and the westernized Japanese military music. Gagaku, the symbol of the Japanese imperial household, was the most appropriate music for the service to the State Shinto which displayed clearly the change in the style of a funeral from that of the Buddhism, with the westernized military music revealing the aspect of modern state that Japan had claimed to be. Gagaku was performed by the musicians sent from Japan of the Imperial Court Music Orchestra and Gyeongseong Shinto Shrine, and the Japanese military music was performed by the naval band, the western music band of the Royal Music Institute of Yi Household, and the trumpeters of the army and navy honor guards. The music was organized as the same form as in the state funeral carried out in Japan throughout the starting of the funeral procession, beginning with the Japanese military music followed by gagaku and closing with Japanese military music. The Japanese music performed in this state funeral played its role to give auditive impression that the Emperor Gojong’s funeral was one of the Japanese imperial family’s or the Japanese vassal of merit’s. The Emperor Gojong’s state funeral in Japanese style is found to have corresponded to that of Japan in all aspects including the Japanese imperial order, authorities, rites and specific procedures, organization of the funeral cortege, the types of music, instruments and the music bands dispatched. This certainly reveals the fact that the Japanese empire intended to realize the ‘Korea and Japan are one-policy’ even in the ‘funeral’ of the Korean emperor by reproducing the Japanese state funeral in Korea. 이 글은 고종의 일본식 국장을 중심으로 각 의식의 절차와 음악의 양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고종의 일본식 국장은 국장봉고의를 시작으로 사뢰의․구전제의․영여발인의․장장제의․권사제의․묘소제의까지 약 한 달간 신도식(神道式)으로 거행되었다. 이중 사뢰의를 제외한 모든 의식에서 음악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전통적인 조선의 국장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다. 사용된 음악은 ‘가가쿠(雅樂)’와 서양식 ‘일본 군악’이다. 일본 황실의 표상인 가가쿠는 국가신도의 제사에 가장 적합한 음악으로 불교식에서 신도식으로 바뀐 상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고, 서양식 군악은 일본이 표방하고 있던 근대 국가로서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국장에서 가가쿠는 ‘신찬주악(神饌奏樂)’과 ‘도악(道樂)’으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연주곡은 일본 본토 국장의 용례와 같이 모두 겨울․북쪽․검정을 상징하는 반섭조의 당악 6곡이 사용되었고, 악기는 신찬주악의 경우 삼관(笙․篳篥․笛)과 삼고(太鼓․羯鼓․鉦鼓), 도악의 경우 삼관으로만 편성되었다. 의식 중 국장봉고의는 경성신사 소속의 악사가 맡은 것으로 추정되고, 나머지는 모두 궁내성 악부의 악사들이 담당한 것으로 확인된다. 일본은 대상(천황․황태후의 상)과 국장(황족․공신의 상)을 악대의 규모에 의해 차별화했는데 고종 장례에 파견된 악사 수는 국장 중에서도 가장 작은 규모로, 이를 통해 일제가 고종의 국장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일본 군악은 해군군악대, 이왕직양악대, 육해군의장대 나팔수에 의해 2곡이 연주되었다. 발인행차에서의 음악구성은 ‘일본 군악-가가쿠-일본 군악’으로, 본토에서 치러진 국장의 경우와 동일한 형태이다. 국장에서 연주된 일본음악은 단지 의식에 수반되는 요소라는 측면을 넘어 고종 황제의 국장이 일본 황족 혹은 공신의 상이라는 점을 청각적으로 명확하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고종의 일본식 국장은 일본 천황의 칙령, 장의기구, 각 의식과 세부 절차, 발인행차의 구성, 사용된 음악의 종류, 악곡, 악기편성, 파견된 악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일본의 국장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의 국장을 조선에서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대한제국 황제의 장례를 통해서까지 내선일체를 구현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17세기 후반~18세기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재원 조달과 규모
나영훈 ( Younghun Na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5 大東文化硏究 Vol.91 No.-
都監은 ‘일이 있으면 설치하고, 일이 끝나면 폐지하는’ 임시적 성격을 지닌 관서였다. 이 제도는 상설관서가 처리하지 못하는 다양한 임시 사안을 처리하기 위한제도로서 조선시대에 상당히 중요한 제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그간 도감제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따라 본 연구는1674년에서 1776년까지 설치된 國葬都監을 통해, 도감의 재정 운영의 일면을 검토하고자 한다.조선후기 국장도감의 재원은 그 조달 방식과 물종에 따라 ‘인건비’와 ‘현물’로 양분할 수 있다. 조선후기 국장도감의 ‘인건비’는 산릉도감을 통해 分定받았다. 산릉도감의 인건비 조달은 중앙에서는 진휼청을 중심으로 한 재정아문과, 어영청을 중심으로 한 군영아문, 그리고 사복시와 사옹원 등에서 조달되었으며, 지방에서는 각감영과 병영, 수영 등을 통해 마련하였다. 국장도감은 이러한 재원의 출납을 호조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이때 마련된 ‘인건비’ 규모는 산릉도감의 ‘인건비’ 규모인대략 55,000냥의 7~11% 수준인 5,000냥을 전후하는 액수였다. 국장도감에 조달된인건비는 대부분 장인과 모군의 역가로 사용되었지만, 일부에서는 발인시의 반전가나 賞格을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국장도감은 국장의 진행을 위한 輦轝와 명기·복완·의장·제기 등을 제작해야 했으므로, 여기에 소요되는 현물 자재 역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물품이었다. 국장도감의 자재는 중앙의 각 경관서와 군문에서 현물을 직접 납품받는 형식으로 조달받았다. 다만, 石材나 木材와 같이 규모가 큰 물종의 경우에는 지방에서 ‘卜定’을통해 마련하였다. 국장도감의 자재는 『탁지준절』 등을 통해 공가로 환산하여 추산한다면 대략적인 재정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영조국장도감의 총 물종은 585종으로, 1,051건에서 61.6%인 647건의 가격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비용은 26,859냥 정도로 추산되었다. 조선후기 국장도감의 재원 조달과 규모를 통해, 국장도감이 재정적으로 상당한 효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도감은 그 인원이 대부분 겸직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관사를 기존 상설관서의 관사를 빌려서 사용하였으며 비품을 무상으로 대여하여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 재정 절감 효과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절감 효과는 도감이 오랜 기간 존속될 수 있었던 원인의 하나일 것으로 생각된다. Dogam(都監) was offices that had the "Install If there is work, and abolition to When you have finished work" temporary nature. This system, as a system for processing an extraordinary cases, where its permanent offices is not processing, played a very important institutional role in the Joseon Dynasty. Is a situation which is not also performed basic studies on Dogam(都監) also in that it. Thus, in this study, through the ``Dogam(都監) for state obsequies`` that has been installed from 1674 to 1776, to try to consider one side of the fiscal management of Dogam(都監). Financial resources of ``Dogam(都監) for state obsequies`` in Joseon Dynasty can be divide in "personnel expenses" and "kind" in accordance with the procurement methods and species. "Personnel expenses" of ``Dogam(都監) for state obsequies`` was receive through ``Dogam(都監) for build the Royal Tomb``. The cost procurement of ``Dogam(都監) for build the Royal Tomb`` was raised in financial offices such as jinhyul-cheong(賑恤廳), the military offices such as Uyoung-cheong(御營廳) and Sabok-si(司僕寺) in the middle. it has been raised in Gamyoung(監營), Byungyoung(兵營) and Suyoung(水營) in rural areas. Scale of "personnel expenses" that have been procured for state obsequies was amount of back and forth about 5,000nyang(兩). Since ``Dogam(都監) for state obsequies`` was necessary to manufacture a variety of ceremony of for the progression of state obsequies, actual material being used was also treated important. Materials of ``Dogam(都監) for state obsequies`` was raised in a format that can receive delivery in kind at the center of each offices and the Gunmoon(軍門) directly. However, in the case of species large scale as stone and wood was raised in rural areas. Materials of ``Dogam(都監) for state obsequies`` can confirm the approximate financial scale if estimated by converting the Gong cost(貢價) using "Takjijunjul(度支準折)". The total species of ``Dogam(都監) for state obsequies of King Youngjo(英祖)`` in 585 species, but was able to confirm the 647 reviews price information is 61.6% in the 1,051, the cost was estimated to be 26,859nyang(兩). Through Funding and size of the ``Dogam(都監) for state obsequi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Dogam(都監) for state obsequies`` was able to know that it has been a financially fairly efficient operation. Dogam(都監), a civil servant(官員) has been appointed almost concurrent positions, using borrowed official residence permanent offices the official residence, in that they were used to lend the equipment at no charge, to know the financial savings it can. These economic cost savings, would also be considered to be one of the causes that could Dogam(都監) to survive more than a thousand years.
장혜지 조선시대사학회 2023 朝鮮時代史學報 Vol.- No.106
본고는 첫째, 조선 왕조와 대한제국 전 시기를 통틀어 유일한 태후인 명헌태후라는 인물, 둘째, 국장 진행 과정, 셋째, 국장 과정을 기록한 의궤 등 3가지 요소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목표이다. 먼저 명헌태후의 국장 조문에 관해서는 명헌태후 국장 의례의 절차와 의식, 그리고 명헌태후 국장의 외국사신의 조문 사례를 살펴보았다. 국장 절차에 따라 행해지는 주요 의식 진행에 따른 장소의 변화를 통해 대한제국의 상례 공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명헌태후 국장에서의 외국사신 조문 사례는 당시 대한제국 대내외적 상황에 따른 일본 정부의 대응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일본 정부는 명헌태후의 국장을 국제 관례상 필요한 절차임을 넘어서 한일의정서 체결을 위한 양국 관계 완화의 수단으로 고려하였음을 파악했다. 다음으로 명헌태후 국장 의궤의 편찬과 구성에 관해서는 황제국의 상장례 정비와 『[효정왕후]국장도감의궤』의 구성과 특징으로 살펴보았다. 황제국 상장례의 정비는 史禮所의 설치 및 사례소에서 편수를 진행한 『大韓禮典』의 용어 및 내용상의 변화 등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 수년이 지났음에도 전례대로 황실 상장례가 진행되고 변화상 역시 반영된 부분이 있었음을 명헌태후의 국장과 『[효정왕후]국장도감의궤』를 통해 확인하였다. 국장도감의 설치 및 의궤의 편찬은 『[효정왕후]국장도감의궤』 내 「時日」과 「財用」을 통해 국장도감 업무 개시일부터의 인원수 및 인원 변화, 국장 경비 등을 통해 설명하였다. 『[효정왕후]국장도감의궤』의 특징은 발인반차도에 반영된 변화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였으며, 의장 및 복장 등의 변화 양상을 통해 고찰할 수 있었다. This study aims to draw the historical importance and examine the academic value of Hyojeong Wanghoo Gookjang-dogam Uigwe( [孝定王后]國葬都監儀軌 ), which is the record of the royal funeral of empress dowager Myoungheon (明憲太后, 1831~1903) during 1903~1904. Furthermore, this study also aims to find out the settlement process of imperial rite and differences between Kingdom of Joseon(朝鮮王朝) and Daehan Empire(大韓帝國). In 1897, King Gojong(高宗) proclaimed Daehan Empire. This significant change of the national system required the significant change to the existing national rates, and starting compilation of Daehan-yejeon( 大韓禮典 , 1898) was the result. Up to now, the evaluation of it was lukewarm, but it needs to be reconsidered because it indicated the great will of Gojong to reorganized the imperial rates which fit to the new empire, although it was incomplete. During Daehan Empire period, three imperial funerals were held, the funeral of Empress Myoungseong(明成皇后) in 1897, of Empress dowager Myoungheon(明憲太后) in 1903, and of Crown prince Min(純明孝皇后 閔氏), therefore, three Gookjang-dogam Uigwes were complied. Among them, Hyojeong Wanghoo Gookjang-dogam Uigwe( [孝定王后]國葬都監儀軌 )is noteworthy because of three reasons. First, Empress dowager Myoungheon was the one and only person who was called and recorded as ‘太后’ during Joseon to Daehan Empire period. Secondly, her funeral has its own meaning because the year of 1904 was the inflection point to Daehan Empire. During 1904, the war between Japan and Russia broke out and ‘Han-il UIjeongseo(韓日議定書)’, which was the unequal treaty between Daehan Empire and Japan was contracted. Lastly, her funeral was the one and only ceremony which not only kept the form of Uigwe compiled at Joseon period, but also reflected new changes of imperial rates.
박종민,Park, Jong-min 국립문화재연구원 2007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Vol.40 No.-
국장은 한 국가를 상징하였던 왕의 장례식이다. 국장에 필요한 상구류를 마련하여서 원활하게 치루어야 하기 때문에, 각 방에서 제작한 각종 상구들은 그 자체로 상당히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임금의 옥체를 실은 제궁을 직접 운구하는 대여와 견여는 국장에서 소중히 다루어야 할 핵심적인 상구이다. 대행왕을 살아있는 것 이상으로, 모든 사람들은 국장에서 그를 엄숙하게 모셔야 했다. 그러나 국장도감에 소속된 각 방에서 제작한 상구들은 대행왕과 직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거나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왕권계승과 같은 왕통과 관련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발인은 왕의 마지막 권위를 드러내는 장이며, 시간이다. 따라서 국장도감은 대행왕의 발인을 살아서 행차하는 것같이 진행하였다. 이를 통해서, 왕의 현세와 내세를 동일한 선상에서 서 있다는 인식하에서 발인을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살아서 왕의 행차 시에 활용하였던 다양한 각종 기물들을 흉례인 국장 발인 시에도 유사하게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이를 입증할 뿐만 아니라 생사관도 엿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국가는 공권력으로 다양한 공장 분야와 많은 공장들을 동원하여서 정해진 기간 내에 다양한 상구들을 마련하여서 국장을 치루고자 하였다. 서울과 경기지역을 포함해서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공장들과 신분이 비천할지라도 일정 수준의 기술을 지니고 있는 공장들을 국정도감으로 불러들였다. 기술과 노동력 제공에 상응하는 급료와 보상하고 받음으로써, 국가와 공장은 지속적으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 각방에 소속된 공장들은 기존 상구를 활용하였고, 새로운 제작과 보수를 통해서 국장용 상구를 정성을 다해서 마련하였다. 조선시대 국장은 공장들의 '기술 잔치'일 뿐만 아니라 '기술의 총합체'라고 말할 수 있다. A national funeral was a ceremony for king symbolizing a country in Joseon. The Gukjangdogam had three practical affairs: ibang and ibang, sambag. Each practial affairs was ready for various implement and finished a national funeral very well. So various important. The Daeyeo and the Gyeonyeo which carried directly the dead from a palace to a burial in the national funeral was a chief implements to handle with careful. All people had to carry heartily him as a Daehaewang which means a previous king. But three practical affairs belonging to the Gukjangdogam made various implements directly or indirectly related in a Daehaengwang and symbolized has authority. They were related in succeeding to the throne. The departure of a funeral in Joseon was a space and a time to appear his authority. The Gukjangdogam progressed it like going in and out the palace in the life. We knew it was ready for the departure of a funeral equalizing to the life and the death. The Gukjangdogam made the best of various implements using in going in and out the palace in the departure. We saw the Confucian view about living and dying through the implements used in the departure. The Gukjangdogam assembled many technicians around the country. They had to make various implements as high-level technicians at certain hour under the supervision of officials. The Gukjangdogam payed and compensated for their labors. There is an indissoluble connection between them. The technicians belonging to three practical affairs were ready for the implements for a national funeral: newly-made and repair, existed-implements use etc. So a national funeral can be called 'the feast of techniques' as well as complexity of techniques' in the Jo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