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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양악작곡가들이 상상한 국민음악: ‘국민’과 ‘민족’ 사이에서

          김은영 민족음악학회 2019 음악과 민족 Vol.0 No.58

          이 글은 1950년대의 음악계에 대한 고찰이다. 해방 후 일제잔재의 청산과 민족국가 수립을 염원하며 제기된 민족음악론은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냉전의 논리로 변화하고 있었다. 분단 후 남한에서는 1948년 정부수립을 기점으로 국민가요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국민가요의 내용은 국민국가의 건설과정에서 국민에게 요구되는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1949년 공보처는 박태현, 윤용하, 이흥렬 등 우익 입장의 작곡가들이 쓴 국민가요를 당선시키고 학교 및 군대에 보급시킨다. 그러나 이 시기에 주창된 국민음악은 일제강점기 국민개창운동을 재활용한 것이다. 전쟁은 과거 제국에 봉사하던 음악가들이 남한의 악단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전시체제하 만주에서 제국의 후생음악에 봉사하던 이흥렬, 박태현, 김동진 등은 한국전쟁 중에는 종군 문화반원으로 활약하며 호전적인 이승만 정권의 충실한 문화선전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편, 피난지 부산에서는 ‘전시작곡가협회’가 결성되어 전시(戰時)동요작곡과 가극 등을 창작하였는데 이들의 주요 목표는 군당국과 긴밀히 결합하여 전선에서 일어난 일을 음악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전시작곡가협회 작곡가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는 국민개창운동추진회에서 활동하며 재즈와 왜색 유행가 대신 국민가요 창작과 보급에 앞장선다. 국민가요 작곡가들은 멸공과 북진을 강조했던 정권의 정책에 충실히 따름으로써 남한 악단의 중심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주요작곡가들에 의한 국민가요 창작은 이후 남한의 악단에서 전개될 이분법적 분단음악사의 시작이 된다. 특히, 우익진영 음악가들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와 북진통일,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많아 정권의 구미에 맞았다. 이들에 의해 창작된 국민음악은 호전적 성격의 노래가 많았는데 이와 같은 편중된 정치성이 순수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개창운동에 참여한 음악가들이 이와 같은 이분법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운영, 윤이상의 이후의 삶은 1950년대 그들의 활동이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굴절되어 나타난 시대적 산물이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민족음악을 위한 열망은 1980년대의 민족음악론으로 다시 제기되었고 이와 같은 역사를 통해 ‘민족’과 ‘음악’을 연결하고 융합하려고 노력하면서 당대의 시대정신에 민감했던 선배 음악가들의 고뇌와 실천이 과거의 역사로만 남지 않게 하는 것은 변화된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음악인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새로운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This paper will be an attempt to examine the music scene of the 1950s in Korea, the era of anti-Communism and the Cold War. A discourse on national music that was raised during the period of liberation led to the music history of the Cold War in the course of division and the Korean war. The attempt to attain national Integration by achieving the national state was taking place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in 1948, when ‘Kukmingayo(songs for the nation)’ were created and disseminated. These songs called ‘Kukmingayo’ or ‘Aegukgayo(songs for patriotism)’ were produced by recycling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and national music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urthermore, a song of the national memorial day was made by the government and music was attempted to emphasize nation than ethnic over the people, such as anti-communism and patriotism. The Korean war, meanwhile, was a golden opportunity for musicians who served the Japanese empire to settle down reliably in the South Korean music scene. Lee Heung-ryul, Park Tae-hyun and Kim Dong-jin began to play a more active role in cultural propaganda for the North Korean regime. On the other hand, in Busan,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was formed to create wartime children’s song and lyric plays. Besides, they were combined closely with the military authorities to produce music. their goal has been embodied in the formation of the ‘Military Composers Association.’ Composers of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have been active in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since the mid-1950s. Also, they have been taken the lead in distributing national songs that could achieve national unity instead of jazz and Japanese-style songs. However, such activities were the beginning of a dichotomous divided Korean music history based on the premise of anti-communism and division. These activities were led by right-wing composers who faithfully followed the positions of the then regime. In particular, the combination of anti-communism, northern unification and pro-Americanism under Rhee's government was reflected in the creation of musicians. Christian musicians, especially those who defect from North Korea, were perfectly matched by the regime and were hiding their militant and divided music history under the slogan of purism. Nevertheless, not all musicians who participated in this dichotomy agreed. The later lives of Na Un-young and Yun I-sang, who have acted in the ‘Wartime Song Writers Association’ and the national singing campaign, could indicate the fact that their activities in the 1950s were reflected in refraction in the context of the times. Desires for national music was re-collected into the national music theory of the 1980s, and through this history, it would be a task given to all musicians living in this changed era. Moreover, it could be a new age spirit to ensure that the suffering and practice of senior musicians who were critical to the zeitgeist of the times did not remain the only history of the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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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亞洲音惡文化的多元性 : 印度, 中國, 菲律賓音惡現狀的比較硏究 중국·인도·필리핀 음악현상의 비교연구

          陳自明 민족음악학회 2002 음악과 민족 Vol.24 No.-

          아시아대륙은 동아시아·남아시아·동남아시아·서아시아 그리고 중앙아시아 등 다섯 개의 큰 음악문화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환경·인종·민족·언어·문자·종교, 역사와 문화의 다름으로 인하여 음악도 백화가 만발하듯 다양하다. 아시아의 모든 음악문화를 비교하여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방대한 작업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3개 음악문화지역중의 3개 나라를 선택하였다. 중국(동아) ·인도(남아)와 필리핀(동남아)의 음악현상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겠다. 중국과 인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명고국이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낙후하였고 서양 강국의 괴롭힘과 압박을 받았다. 인도는 약 2백년동안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정치에서 압박을 당하고 경제에서는 착취를 받았으며 문화와 종교에서까지도 억압당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전통문화·종교·음악·춤은 기적과 같이 보존되었다. 나라가 독립한 후 더욱더 활기차게 번영하여 새로운 발전을 가져와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풍금·바이올린·기타·만돌린·클라리넷·색소폰 등과 같은 서양의 악기들은 인도인들이 채용한 후 점차적으로 자기들의 심미관념에 맞게 개변한다. 연주의 테크닉, 표현의 수법, 그리고 얻은 효과까지 예전의 면목을 찾아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인도의 전통음악·전통악기와 잘 융합되어 완전히 일체가 되었다. 사람들도 하여금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악기의 외형은 변함이 없으나 악기의 영혼은 이미 완전히 인도의 것이 되었다. 당연히 인도도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이것들은 영화음악에 나타나는데 음악과 춤은 인도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영화음악의 기조는 인도적인 것이다. 이는 멜로디·창법 그리고 악기 모두가 인도(印度)화된 것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서양악기를 사용한 것도 있다. 화성은 서양의 것을 따온 것이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오늘의 인도에서 전통적인 음악과 춤은 전 사회의 중시와 존중을 받고 있다. 이 전통음악과 춤은 계속 이어져 갈 뿐만 아니라 아직도 활기차게 발전하고 있다. 인도의 대통령은 매년마다 친히 10명도 넘는 걸출한 음악가·무용가·극작가·문학가에게 큰 상을 수여한다. 근년에 인도도 서양 유행음악의 충격을 받기 시작하였지만, 인도전통음악의 앞날은 여전히 낙관적이다. 중국도 반식민지로 전락하여 열강들의 유린을 받았다. 중국인들은 이 아픔을 기억하여 서양의 장점을 따라 배워 나라를 진흥시키려 했다. 20세기 초에 점차적으로 학교에 음악학과를 설립하였는데 이를 "학당악가"(學堂樂歌)라고 한다. 학당악가의 가사는 대부분이 애국주의의 내용이었고 멜로디는 구미, 혹은 일본의 유행가곡의 곡조를 사용하였다. 학당악가의 발전에 따라 서양음악과 서양악기·오선보·수자보·음악이론·화성 등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20세기 20년대에 중국은 전문음악학원을 설립하였다. 몇십 년의 발전을 걸쳐 중국은 서양음악을 배우는 면에서 아주 큰 성과를 얻어 교향악단·오페라단·발레단 등을 설립하였다. 또 서양음악을 기초로 하고 여기에 중국민족음악의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써 중국 근·현대의 새로운 음악을 형성하였다. 다른 한 면으로 종류 많은 중국전통음악의 역사는 유구하다. 희곡·설창·기악·민요·가무(歌舞) 등 종류가 매우 풍부하다. 이 중 곤곡(崑曲)은 UN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정하였다. 중국소수민족의 음악과 춤은 그들의 신앙,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오늘까지 활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전통음악은 서양음악과 달라서 자기만의 특색이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주·객관적인 원인으로 중국의 전통음악은 중국 현대사회에서 약세에 처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전통음악을 살리려고 전통음악을 정리·연구하는 일을 많이 해 왔다. 그러나 다수의 청소년관객들은 유행음악과 서양음악에 더 열중하는 판에 큰 도시에서의 전통음악의 지위는 작은 도시나 시골에서보다 낮다. 필리핀은 동남아의 섬나라이다. 근대 필리핀은 선후로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였었다. 1946년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스페인의 음악문화는 필리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넓은 중부지역은 더욱 그렇다. 필리핀의 합창이 발달되어 있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서양악기, 예를 들어 파이프오르간·피아노·바이올린·기타 같은 악기들은 일찍 유입되었다. 필리핀의 민족음악학자 마싸이다는 전국소수민족지역을 다니면서 필리핀의 민족음악을 발굴·정리하였다. 부활한 필리핀의 민족가무는 필리핀민간예술제에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그러나 총괄적으로 필리핀의 음악주류(主流)는 서양음악과 서양음악의 영향 아래에 있는 근·현대 필리핀의 새로운 음악이다. 인도·중국·필리핀 이 3나라의 음악현상에서 볼 때 이들의 음악은 서로 다르다. 아시아 나라 중 3가지 상이한 유형이다. 서로 다른 유형을 형성한 기초와 원인을 무엇인가. 이는 그 나라의 국정(國情)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근거로 탐구하여야 한다. According the nature environment and cultural background, the whole Asia continent can be divided to five musical culture area; East Asia, South Asia, Southeast Asia, West Asia and Central Asia The music of these areas are different and like all flowers vying for beauty In full bloom. In this paper I selected three countries to make a comparative study about their present situation. India has a old civilization, it was a colony nearly 200 years, but their tradition music have preserved and become prosperous today China also has a aid civilization but was absorbed in the western music, so Chinese people especially younger generation like westernized music and popular music than Chinese traditional music. Philippines music were westernized, but the minority people preserved their traditional music. These different phenomenon are very interesting for us and attract ethnomusicologists to do research work. 亞洲大陸可分爲東亞、南亞、東南亞、西亞和中亞五大音樂文化區, 由於自然環境、人種、民族、語言、文宇、宗敎、曆史和文化的不同, 在音樂上也呈現出百花齊放、千姿百態的景象。如東亞包括中國、朝鮮、韓國、日本、蒙古五國, 南亞由印度、巴基斯坦、孟加拉、尼泊爾、斯里蘭잡等國組成、東南亞則由印度尼西亞、 馬來西亞、菲律賓、新加坡、文莢、泰國、緬甸、越南、老과、柬포??十國組成, 西亞則由諸多的阿拉伯國家伊拉克、敍利亞、黎巴??、旦約、沙特阿拉伯及海灣國家組成, 中亞由阿富汗、哈薩克斯坦、烏玆別克、土庫曼斯坦、達吉克斯坦、吉爾吉斯斯型組成, 伊朗、土耳其雖較고西, 但從民族、語言、曆史來考慮, 타們的文化與中亞關采更密切。 對整箇亞洲的音樂文化進行比較硏究, 是箇宏大的工程, 在此文中我選取三箇音樂文化區中的三箇國家 ; 卽中國 (東亞)、印度 (南亞) 和菲律賓 (東南亞) 的音樂現狀, 進行些客觀的比較, 爲進一步進行硏究、探討這些問題提供些線索和思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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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양 문화 극복 차원에서 살펴본 윤이상 음악의 정체성

          한인숙 ( Insook Han ) 민족음악학회 2018 음악과 민족 Vol.0 No.55

          윤이상 음악의 음악 철학을 간단히 살펴본 후, 중요 연구 자료들을 토대 로그의 음악이 동양 철학사상 즉, 한국 전통음악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항을 그의 중요 작곡 기법 상에서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동·서양의 융화를 추구하는 예술 행위 면에서 드뷔시 음악 특성을 윤이상의 음악과 비교해 봄으로써 그 두 작곡가의 작품 정체성을 동·서양 문화 극복 차원상에서 비교, 고찰해 보았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몇몇 동·서양 현대 음악 작곡가들의 작품 성향과 이 종 문화 극복 사항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써 윤이상 음악이 현대 음악 역사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위 사항을 동·서양의 문화 결속 농도에 따라 작곡가들의 음악 정체성을 두 가지 이론으로 즉, -‘융화형’과 ‘복합형’- 윤이상의 음악 정체성과 비교 검토해 보았다. 더 나아가 작곡가들의 음악 정체성도 음악 사회학적으로 생각해 보았는데 이러한 고찰을 통해 한국 전통음악과 서양 현대음악의 결속이라는 차원에서의 작곡 미학상의 문제점과 남겨진 과제도 추출해 보고자 했다. This work deals with questions of interculturality and cultural identity of an East Asian composer's, Isang Yun’s, music. Firstly, it focuses on the philosophy and thought of Isang Yun, in which it is trying to observe his technique and aesthetics of composition from an intercultural perspective, and through questions of cultural identity and authenticity in his compositions. By comparing the music of French composer Claude Debussy to the one of Isang Yun, in the context of interculturality, one should try to view the cultural differences of Debussy's music and that of Yun’s through the questions of cultural identity. In the same way, contemplate a Chinese composer’s, Chou Wen-chung’s, and a Japanese composer’s, Toru Takemitsu’s, music as those of East Asian provenance. Finally, it seems that these composers operate within the integration/ subjugation tension field, to result in a dominant discourse, and ultimately in hybridization, defined as a balanced coexistence of multiple discourses. This field of tension, moreover, cannot be separated from the already mentioned questions of cultural identity and authenticity. However, the scholarly comprehension of the western musical's acceptance of the eastern culture discloses a strong contrast. For this reason, culture must be viewed from both standpoints, “etic” and “em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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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과 아시아

          이경분 ( Kyungboon Lee ) 민족음악학회 2017 음악과 민족 Vol.0 No.54

          윤이상은 1967년 서베를린에서 남한으로 강제 연행되어 고문을 받고 간첩혐의에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독일에서 세계적 음악가로 자리를 잡았지만,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망명음악가로 일생을 마감했다. 유럽작곡계에 진입하여 성공한 아시아 최초의 작곡가로서 윤이상의 현대 음악사적 업적은 ‘동아시아적 전통을 서양 예술음악의 언어로 재용해’했다거나 ‘아시아음악문화와 서구 음악문화의 본질적 특수성을 연결’시킨 것으로 칭송된다. 그의 위대함과 중요성이 거론될 때 윤이상 음악의 원천인 한국음악은 항상 ‘아시아’라는 상위개념 속에 용해되는 경향을 가진다. 그의 음악세계에서 아시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윤이상 스스로 자신의 음악에서 아시아적인 것을 ‘중국과 한국의 궁정음악 언어만이 아니라, 도교나 불교적 특성을 담은 신화적 소재나 조형예술 소재들 전체를 지칭’한다. 하지만 윤이상이 말하는 아시아에 일본은 들어있지 않다. 그의 음악세계에서 일본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는가? 본 논문에서는 윤이상의 창작세계에서 아시아의 의미를 살펴보고, 윤이상과 일본의 관계를 조명하여, 이것이 그의 디아스포라적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서술하고자 한다. The most important achievement of Isang Yun in the Western contemporary music history is regarded as “translator of the Asian music aesthetics into Western music language”. Yun himself has often defined the origin of his music world comes from Chinese and Korean traditional music aesthetic. However, Japanese music seems not to have any place in his music world. Also in the interviews and lectures of Isang Yun Japan has been seldom appeared in the context of Asian music. On the contrast to this fact, the musicians among the Asian countries which Yun had the most familiar relationship with were the Japanese. And Yun has had twelve Japanese music students in his Berlin period, while Korean students were only few. Which role has Japan played in the music world of Isang Yun? This study explores meanings of ‘Asia’ in Yun’s Music world and the his relationship to Japan. To conclude, this article examines the question whether and how his diaspora life could be connected with a meaning of ‘Asian master’ which Yun might prefer to ‘Korean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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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왕직양악대의 활동이 근대음악사회에 끼친 영향

          이수정 민족음악학회 2019 음악과 민족 Vol.0 No.57

          It is about 118 years since western music band started playing music in Korea. During the Korean Empire, which took up the early phase of the western music band introduced to the country, it was installed in the name of the Military Band in 1900 and in the name of Imperial Music Band in 1907. An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it was maintained under the name of Yiwangjikyangyakda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During the Korean modernization, the Military Band of the Korean Empire and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operated as official music bands of the court. In this respect, they carried major significance for the courtly music, but they have yet to be properly studied. Their activities played a tremendous role in distributing and nurturing the western music in the Korean court music and popular music. The musicians, who were trained in the Military Band and the Western Music Band, engaged in the music activities with the bands of schools of different academic levels and private bands, thus playing a major part in distributing and nurturing the western music bands including brass band and propagating the western music. And the studies so far have focused on the western music bands between 1890 and 1910 when the western music was introduced to the country, and light has been shed on the creation of the western music band, the composition of musical instruments, and the repertory and its importance. However, they just touched on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in a cursory manner and never mentioned its activities. This study has examined the historical development, the operation, the performance, and the significance of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Following the Korea-Japan Annexation, its role was reduced, and the band could not perform its functions related to the military band and the national band. However, the western music band was responsible for officially receiving the western music into the country and was in charge of the events of the country and the royalty as part of the courtly band. The activities of the Yi Royal Household Western Music Band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suffered further distortion than the Military Band during the Period of the Korean Empire. It has been pointed out that the band had to perform Kimigayo, the Japanese national anthem, the Japanese military music, and Japanese musical works at Pagoda Park, Changgyeonggung, and Gongjinhoe during the colonial period. 우리나라에서 양악대가 음악 연주를 시작한 지 올해로 약 118년이 되었다. 서양 악대 도입 초창기인 대한제국에서는 1900년 군악대, 1907년 제실음악대(帝室音樂隊)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이왕직양악대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제국 군악대, 제실음악대와 이왕직양악대가 궁중의 공식적인 악대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궁중음악 변천에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의 활동이 궁중음악계와 대중음악계에 서양음악의 보급과 육성에 기여한 역할은 지대하였으며, 군악대와 양악대를 통해 배출된 음악인들이 각급 학교 밴드부와 사립 악단에서 음악활동을 하여 브라스 밴드를 비롯한 서양식 악대의 보급과 육성, 서양음악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그간의 연구는 양악 도입기에 해당하는 1890년-1910년의 양악대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집중되었고, 양악대의 창설, 악기편성, 연주곡목 및 중요성 등이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왕직양악대에 대해서는 부수적으로 간단히 언급하는 데에 그치고 있으며, 활동 내용은 거의 언급된 적이 없다. 본 연구는 이왕직양악대의 역사적 전개과정 및 조직체계, 운영 방식, 공연 활동 등을 살펴보았다. 이왕직양악대는 1911년 활동을 시작하여 1919년 해산되기까지 활동 기간이 매우 짧지만, 양악사장, 양악사, 양악수장, 양악수의 체제를 갖추고, 40-50명 내외의 악대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서양식 악대는 대한제국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정식으로 서양음악을 수용하면서 궁중악대의 일부로서 국가와 왕실의 행사를 담당하였다. 이왕직양악대는 대한제국 군악대의 전통을 이어 이왕직 장시사에 소속되어 의식에서의 음악을 담당했다. 하지만 국가 음악으로의 기능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부터 국권이 침탈되면서 역할이 축소되어 군대 음악 또는 국가 음악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본궁내성과 조선총독부의 감시하에 이루어졌던 이왕직양악대의 활동은 대한제국기 군악대보다 더 왜곡되었고, 친일적인 행적을 보여주었다. 식민지하 탑골공원, 창경궁 및 공진회 등에서 일본국가인 「기미가요」와 일본 군대음악 및 일본음악을 연주해야 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대중적인 공간에서 벌어진 음악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서양음악적 이미지를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형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서양음악의 유입과 확산은 다방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양악대의 활동이 당시 한국음악계에 서양음악의 표상이 될 수는 없다. 군악대와 양악대를 통해 배출된 음악인들이 서양식 악대의 보급과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음악적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는 점은 인정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왕직양악대와 같은 관속(官屬) 음악인의 활동은 서양음악의 성장 과정이기도 하였지만, 식민지적 근대의 비주체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조직적 한계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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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실용음악학과 커리큘럼 연구

          양우석 ( Yang Woo Seok ) 민족음악학회 2018 음악과 민족 Vol.0 No.56

          한국의 실용음악교육의 역사는 1988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30년이 되었다. 실용음악은 현재 가장 인기 있는 학과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보컬 전공은 602:1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음악산업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 대학의 실용음악교육은 연주 중심적 교육의 한계에 와있다. 특히 이미 세계 10권에 진입한 한국 음악산업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새로운 커리큘럼을 전공으로 개설해야 한다. 본고는 연구의 결론으로 대학의 실용음악교육이 음악산업의 빠른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며 다양한 음악산업 인력을 배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5개 전공을 제안하였다. 한국의 대학 실용음악교육은 뮤직 프로덕션, 레코딩 엔지니어링, MIDI 및 사운드 디자인, APP, 뮤직 비즈니스를 기준으로 특성화된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음악산업 발전과 세계적 경쟁력 확보에 창조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History of applied music in Korea has turned 30 years now in 2017 beginning from 1988. Applied music has become one of the most popular subjects, and particularly, the competition for majoring vocal music reaches 602:1. However, the applied music education at universities of now that cannot interact with music industry has reached the limit of performance-focused education. A new curriculum should particularly be extended to a major that can positively respond to the progress of music industry of Korea which has now been within top 10 in the world. The result of above analysis was compared to those of Canada, USA. and Japan in order to develop more objective curriculum. The performer-centered practical education period has settled down as a leading characteristic of applied music education in Korea passing through until now. In this study as a conclusion of research, 5 majors were proposed as a detailed method to raise various man forces for music industry in order for applied music education of universities to quickly respond to rapid change of music industry. Much expectation is taken so that applied music education at universities of Korea will creatively contribute to development of music industry now here and to securing competition ability in the world while forming characterized curriculum of its own based on aforesaid 5 majors including Music production, Recording engineering, MIDI and sound design, APP, and Music bus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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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성 사고기법을 활용한 한국음악사 교육방법 개발 연구

          강혜인 ( Hyein Kang ) 민족음악학회 2018 음악과 민족 Vol.0 No.55

          본 연구는 창의성 사고기법을 활용하여 한국음악사 교육 방법을 개발한것이다. 본 연구에서 제시하는 한국음악사 교육의 목적은 첫째, 창의성 사고기법을 수업에 적용하여 한국음악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다. 둘째, 한국음악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음악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다. 셋째, 사고기법을 활용하여 창의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여, 음악을 즐기고 활용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한국음악사 교육 내용 범위는 음악사 전체를 개관하는 수업과 삼국시대, 조선시대, 근현대의 시대별 내용을 포함하였다. 교육 방법은 교사가 제안한 과제를 창의성 사고기법을 적용하여 학생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였으며, 사고기법은 <사고모자기법>, <브레인라이팅기법>, <마인드맵기법>, <속성열거법> 등을 활용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 방법적 측면에서 사고기법의 활용은 유용하였다. 사고기법은 주어진 개념과 과제에 대하여 치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색다른 방법과 관점을 제시하여 학생들의 한국음악사에 대한 재미와 호기심을 유발하는데도 효과가 있었다. 사고기법 활동을 음악적 글쓰기 작업으로 정리하고 발표하는 것도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한국음악사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기초로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글로 창작해 봄으로서 스스로의 음악적 사고를 보다 구체화하고 확장시키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develop a method of teaching Korean music history using creativity thinking technique. The objectives of the Korean music history education presented in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it is interested in the history of Korean music by applying the technique of creativity thinking to class. Second, it recognizes the value of music based on understanding of Korean music history. Third, it has an attitude of expressing its own ideas creatively and enjoying and utilizing music by using the technique of thinking. The scope of the contents of Korean music history includes the class which covers the whole history of music and the contents of the three kingdom era, Chosun era, and modern era. The method of teaching was to ask the teacher to solve the problem by using the creative thinking technique. The thinking technique used in this study is < Brain writing > < attribute listing > < Thinking Cap > < Mind map >. As a result of the study, it was useful to use the thinking technique in terms of method. Thinking techniques helped me to think carefully about given concepts and tasks. It was also effective in inducing students' fun and curiosity about Korean music history by presenting different methods and perspec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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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한국전쟁 70주년 학술대회 발표논문: 이종태의 해방전후 음악활동 고찰

          이수정 민족음악학회 2021 음악과 민족 Vol.- No.61

          Lee Jong-tae was a music educator, composer, conductor, and soldier. Lee, an intellectual and a graduate of Japanese Music School(日本音樂學敎) in 1930, worked actively as a musician before liberation. After liberation, he gave up his career in music and joined the army and was appointed as a brigadier general. As if reflecting the dramatic convulsion of his life after the liberation, historical evaluations on Lee have conflicting arguments. Lee as a musician was listed in the pro-Japanese Biographical Dictionary as a result of activities as a pro-Japanese and working with war cooperation organizations. On the other hand, Lee as a soldier had a successful career, being commended for his service by the Minister of National Defense in 1958, and receiving an Order of National Security Merit, Cheonsu Medal in 1966. As this research is the first to study Lee, we examine Lee's musical activities, and take a brief contemplation on projects he put parts in as a commissioned consultant of Iwangjikyangyakbu (Yi Royal Household Music Band). Lee as a musician worked in all areas including Western music, court music, and music education. He was a member of dozens of music organizations, and worked in a colonial government organization. Under a war footing, he distinguished himself in pro-Japanese groups and thereby entered major musical circles. Furthermore, after joining the Yi Royal Household Music Band, he participated in the project of the Staff(stave) transcription as an expert of court music during ten years of his incumbency as an editor of omnifying court music (‘A-akumbopyeonchansamuimsichoktak ’ 雅樂音譜編纂事務臨時囑託). He also actively supported the pro-Japanese activities of the Yi Royal Household Music Band by rearranging Kimigayo and Umiukaba to be playable for court instruments. His decision to change his stance after liberation was surprisingly quick. In the early 1947, when the Korean military and military band were formed, he joined the army at the age of 42. He became a military band master in the eighth regiment and after the recapture of Seoul in 1950, he participated in establishing the KAS (Korean Army Arts Service 陸軍軍藝 隊). Since then, he was unable to actively engage in music due to his status as a soldier. However, he did not stop interacting with musicians until 1970, revealing his presence at international music festivals. Since 1961, when he was serving as the head of the National Cemetery, he cooperated with the National Gugak Center to hold Confucian ceremonies in the National Cemetery on Memorial Day. It is desperately necessary to criticize Lee's pro-Japanese activitie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and reflectively view the fact that Lee has never been discovered until now and is still presently being treated as a man of national merit. 이종태는 음악교육자·작곡가·지휘자·아악 전문가이자, 군인이다. 1930년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인텔리로서 해방 이전에는 음악가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해방 후에는 모든 음악 경력을 접고 군대에 들어가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해방을 기점으로 격변한 인생사를 반영하듯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반되게 나타나 있다. 음악인 이종태는 친일 및 전쟁 협력 단체에서 활동한 행적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물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반면, 군인 이종태는 1958년 국방부장관 공로표창, 1966년 보국훈장 천수장을 받으며 승승장구하여 현재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어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묻혀있다. 음악인 이종태는 서양음악, 궁중음악, 음악교육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였다. 수십개의 음악 단체에 소속되었으며, 식민지 관변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중동학교, 중앙불교전문학교, 경성고등음악학원, 이화여자전문학교, 이왕직아악부에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경성관현악단, 영미합창단 등에서 지휘를 하였다. 1930년 <소년>이라는 작품을 작곡한 이래, <내일>·<그리운 소년>·<우리들은소년>·<김소좌를 생각함>·<총후> 등의 친일 작품을 양산하였다.『 보통학교조선어독본』을 토대로 음악 레코드를 제작하거나, 경성방송 ‘군가공부’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전시 시국 가요를 교육 보급시켰고 강연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또 이왕직아악부에 10여년을 재직하면서 서양음악 교육과 오선보 채보사업에 관여하며 아악 전문가로 행세하고, <기미가요>와 <우미유카바>를 아악기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하는 등 이왕직아악부의 친일활동을 지원하였다. 일제강점기 음악계에서 보여준 활동 내용과 양상은 놀라운 정도이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이종태는 해방이 되자, 초창기 대한민국 군대와 군악대가 만들어질 당시 42세의 나이에 군에 입대하였다. 군예대 창설에 관여하였고, <상이군인의 노래>·교향시<조국찬가>·교성시<광복10년> 등을 군대 내의 음악 행사를 맡기도 하였다. 군인이라는 신분 제약이 있어 일반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군대 내에서 승승장구하였다. 태세전환에 성공하면서 친일 행적은 감추어져 국가유공자로 대접받았으며 사후에 부인인 스즈키 미사호(鈴木美佐保)와 나란히 국립묘지에 묻혀있다. 한국근현대사에서 친일청산을 하지 못했던 과오를 이종태라는 인물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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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과 동시대 한국 작곡가에게 끼친 드뷔시의 영향에 대한 비교 연구

          지형주 ( Hyungjoo Chi ) 민족음악학회 2018 음악과 민족 Vol.0 No.56

          본 논문은 윤이상과 동시대 한국의 작곡가 중 이상근, 나운영에게 끼친 드뷔시의 영향을 살펴본다. 이들의 음악은 지역적, 시대적 차이를 떠나 모두 ‘민족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드뷔시는 유럽에서 나머지 세 작곡가는 한국에서 동시대의 조성적 경향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드뷔시는 이국적 정서로 자신만의 음향을 통해 프랑스적 민족주의 음악을 만들어내었다. 한국 작곡가들에게는 한국에서 이국정서가 된 조성음악을 이탈하여 민족주의적 음악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이를 위해 한국 전통음악의 현대화 작업이 필요하였고, 여기에 드뷔시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의 작곡가들은 드뷔시 이후에 나타나는 유럽의 표현주의적이고 무조적인 극단적 현대기법으로 작곡 경향이 바뀌는 듯 했다. 그러나 독일에서 활동한 윤이상은 중심음 기법을 기반으로 하는 ‘음색음악’ 작곡으로 자신만의 독자적 음악세계를 형성하여 드뷔시의 음악과 비교가 되었다. 국내에서 활동한 이상근과 나운영도 20세기 중반의 현대음악의 물결을 탔으나 결국 민족주의 음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특히 나운영의 작품세계에서 민족적인 것은 한 번도 포기된 적이 없다. 그는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무조적 현대를 지향했던 작곡가였으나 ‘토착화’가 우선이었다. 나운영은 끈질긴 노력과 열성으로 드뷔시의 음악어법과 맞닿아 있는 ‘투영법’이나 ‘병행법’ 같은 한국음악적 이론을 창출해 내었다. 드뷔시식의 음향들은 한국으로 돌아와 현대화된 옷을 입고 ‘새야화현’이 되고 ‘번짐음’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드뷔시음악은 세 작곡가가 민족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주요한 음향기법이 되어 한국 음악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게 되었다. This paper examines the influence of Claude Debussy on Isang Yun and his Korean contemporary composers Sang-Geun Lee and UnYoung La. Their music has a commonality of ‘nationalization’, apart from regional and time differences. Debussy created French nationalistic music through his own acoustics with exotic atmosphere from Asia and non-Euorpean conturies. For Korean composers, there was a task to set up nationalistic music by deviating from tonal music which became an exotic sentiment in Korea. Three Korean composers seemed to change their compositional tendencies with expressive, atonal and avantgarde music after Debussy. However, Yun in Germany created his own unique style with ‘sound-mass music (Klangkomposition)’ which is comparable to Debussy’s. Lee and La in Korea who influenced by the modern music of the mid-20th European trend came back eventually to the establishment of Koreanization. For example La created the Korean musical theory such as ‘projection’ and ‘parallelization’ which are associated with Debussy's musical idioms. As a conclusion, Debussy’ music has become a major acoustic technique for three Korean composers to fill the gap between Koreanization and modernization, contributing to establishing the identity of Korean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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