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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 운동이 갖는 현대 시민운동의 교육적 가치

        조의령,전일균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22 敎育問題硏究 Vol.35 No.3

        본 연구는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 운동이 갖는 현대 시민운동의 교육적 가치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913년 출범한 흥사단은 민족주권회복운동의 지도자를 찾고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왔다. 흥사단 운동의 교육적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 선행연구와 문헌 분석을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흥사단이 갖는 현대 시민운동의 교육적 가치는 첫째, 시민이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고 민주시민으로서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둘째, 공동체 내에서 서로 협동하며 연대감을 기르고 양성평등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셋째, 투철한 역사의식을 갖고 세계화 시대에 시민성 문제를 담론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로 논의되는 것이며, 최종적으로 다문화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세계평화의 추구에 그 의의가 있다. 현대 흥사단 운동은 현대 시민운동에 영향을 끼쳤으며, 흥사단의 정신을 이어받아 정의로운 리더십과 평생교육을 지향한다. 이처럼 흥사단 운동은 현대에도 높은 교육적 가치를 드러내고 있으며, 미래 비전의 수립과 현대 시민운동의 근간으로 꾸준히 발현되고 있다. 이러한 흥사단 시민운동의 가치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교육적 실천이 매우 중요하며, 이러한 가치가 과거, 현재를 거쳐 미래 시민운동의 밑바탕으로 꾸준히 작용되어야 할 것이다.

      • KCI등재

        일제강점기 常山 金度演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

        오대록(Oh Dae-Rog)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38

        金度演은 京畿道 陽川郡 陽東面 鹽倉里(현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서당교육·사립태극학교·보성중학교에서 전통교육과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형성하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본유학을 떠난 김도연은 동경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 등 반일적 성향을 띤 유학생 단체에 참여하였고, 곧 주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하였다. 김도연의 이러한 활동은 곧 구체화 되었다. 2·8독립운동이 그것이다. 김도연과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기위해 임시실행위원 11명을 선출하였다. 더불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운동을 위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1919년 2월 8일 조선유학생학우회 임원선거를 명목으로 학생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백관수가 등단하여 「선언문」을 발표하고, 다음으로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역사적인 2·8독립운동이 거행된 것이다. 2·8독립운동을 통해 김도연과 유학생들은 당시 그들이 가졌던 국제정세 인식과 항일정신, 그리고 독립의 의지를 강하게 보여주었다. 2·8독립운동 이후 김도연은 학업과 보다 자유로운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미국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가 미국유학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2·8독립운동으로 인한 수감생활과 그 속에서 겪은 고통, 그리고 출감 이후 활동에 대한 제약 때문이었다. 또 하나는 기독교와 흥사단의 영향에 의해서였다. 동경유학생 시절 기독교에 귀의하고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한 인연으로 김도연은 웰치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웰치는 김도연에게 웨슬리안 대학의 입학추천서를 작성해주었고, 입학을 직접 주선해주었다. 이와 더불어 1921년 3월 김도연은 흥사단에 가입하였다. 비록 미국 유학 이후 흥사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미국사회에 정착하는데 있어 기독교와 흥사단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22년 미국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한 김도연은 계속해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아메리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약 10여년의 기간 동안 김도연은 학업과 더불어 학생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북미한인유학생총회(북미대한인유학생회)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기관잡지 『우라키』 창간에도 참여하였다. 이와 함께 김도연은 민족운동과 미주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유미한인산업협회', '재미조선문화회'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한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더불어 '뉴욕한인교민단' 참여와 '대한인동지회' 가입, 그리고 『삼일신보』 창간에 참여하면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대한인동지회에 가입하면서 김도연은 그의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을 맞았다. 이처럼 김도연은 젊은 시절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면서 민족운동과 해외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투신하였다. 김도연의 이러한 활동은 한 개인의 민족운동(독립운동)이 그 시대(시기)적, 지역적 환경변화, 그리고 인적관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보여 지며, 이 역시 독립운동사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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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인 申彦俊의 중국에서의 民族運動

        국지훈(Guk, Ji-hoon)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55

        이 논문은 국내와 중국 상해지역의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신언준(1904~1938)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활동과정을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는 천도교인으로서 1918년 오산학교에서 수학했으며 3·1운동에도 참여했다. 1923년에는 상해로 망명하여 항주의 영문전수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한 뒤, 이어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오송 국립정치대학과 동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1924년에는 상해에서 윤자영, 조덕진, 최충신 등과 함께 청년 독립운동단체로 청년동맹회를 발기 조직하였다. 또한 그 해 인성학교 학감에 인준되기도 했다. 1926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이 전민족대당체를 건립하자고 하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촉발하자, 신언준은 상해지역 학생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주요섭 등과 함께 그 해 10월 청년동맹회와 화동한국유학생회 등 상해지역 학생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상해한인학우회를 결성했으며, 이후 상해한인청년회 발기에도 참여했다. 1927년에는 당시 대독립당 결성을 추진하고 있던 조상섭을 보증인으로 하여 흥사단원동위원부에 입단하였다. 그는 원동위원부의 문건 작성, 통역, 강연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신언준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상해『中央日報』논설위원,『世界新聞』亞洲부장을, 1929년부터는『東亞日報』의 상해와 남경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세계동향을 분석 보도하고 중국 언론인 및 정계인사들과의 관계 속에 임시정부와 한국 교민들을 위한 여론을 형성해갔다. 특히 그는 한중관계에 대해 유심히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31년 7월 2일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가 만주와 국내에서 한중 민족 간에 이간질로서 만주침략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따라서 그는 이와 같은 보도를 생생하면서도 신속정확하게 국내는 물론 중국 언론에 보도했다. 무엇보다 그는 남경 국민정부 외교부를 직접만나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음은 물론 한중관계 속에 조선인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만보산 사건 이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윤봉길 의거와 안창호 체포 사실을 중국 언론은 물론 국내에 보도했다. 그리하여 중국여론이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해야 한다는 데로 모아졌다. 그 결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적 지원과 군사적 협조를 얻게 되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국 독립운동이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때 특히 1933년 봄, 김구와 장개석 회담을 계기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의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김구를 도와 중국 정부와 교섭하고, 언론을 통해 지원 여론을 확산시킨 역할을 했다. 또한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한 연락원으로서 많은 한국 청년들이 입교할 수 있도록 이바지했다. 신언준은 언론을 통해 민족의 의사대변, 민족운동의 지원, 사상과 문화의 발전, 언론자유의 획득 등의 목표를 지향하며, 민족의 의식화를 고취시켰던 민족언론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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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사단 운동의 특징과 교육사적 의의

        박의수 ( Eui Soo Park ),이순복 ( Soon Bok Lee ) 안암교육학회 2012 한국교육학연구 Vol.18 No.3

        이 논문의 목적은 100년의 역사를 지닌 흥사단 운동의 특징과 교육사적 의의를 고찰하는 데 있다. 먼저 흥사단 운동의 변천과정을 4단계로 나누어 간단히 살펴본 후에, 흥사단 운동의 특징을 이념, 목적, 조직, 운동 내용 및 방법 등 다섯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 흥사단 운동의 교육사적 의의를 생각해보았다. 연구 결과로 드러난 교육사적 의의를 요약하면 첫째, 수난의 역사 속에서 창립 당시의 이념과 목적을 일관되게 지키면서 다양한 사회교육 활동을 전개해 왔다는 역사성 자체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 둘째, 무실역행과 건전인격이라는 인격가치를 핵심 가치로 추구하면서 한 세기를 이어왔다는 점이다. 이는 점수 따기에 골몰하여 인간은 뒷전으로 밀려난 오늘의 교육 현실에서 교육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셋째, 창단 당시부터 지금까지 시대적 상황과 주어진 여건에 맞는 다양한 유형의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천해 왔다는 점이다. 특히 아카데미를 통한 청소년 사회교육 운동은 양적?질적 측면에서 현대 한국 교육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넷째, ‘신성단결’과 ‘동맹수련’이라는 흥사단 고유의 수련방법은 미래 평생학습사회의 사회교육 방법 개발을 위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섯째, 흥사단 특유의 조직체계와 프로그램 및 수련방법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물들도 적지 않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재가 다양한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research the characteristics and significance of Heungsadan which has a hundred years tradition in the history of Korea education. First, the background of establishment and the historical process of Heungsadan was investigated and the study of the ideas, aims, the types of activities and educational programs was continued. As results of this study, the significance of Heungsadan in the history of Korea education are as follows; First, a hundred years history of Heungsadan itself is very significant. The original ideas and aims of Heungsadan have been kept and various activities for adult education in the suffering and difficult course of Korean history. Second, Heungsadan has kept the truth and exertion and healthy character as humanistic value. That makes us rethink the essentials of education. What is the core value of education? Third, Heungsadan has given various social education programs for adults and youths out of school. Especially Heungsadan Academy programs for youths is very significant in the history of Korea education. Fourth, ``Holy Alliance`` and ``Allied Discipline`` as Heungsadan`s original method of discipline will give many suggestions for lifelong learning society in the future. Finally, Heungsadan with the unique organizational system and curriculums and methods has produced a large number of talented person in various fields of Korea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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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의 안창호 이해와 그 문제점 - 『도산 안창호』를 중심으로 -

        박만규 ( Park Man-kyu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8 역사학연구 Vol.69 No.-

        1947년에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는 해방 후 최초의 안창호 전기로서 안창호와 그의 사상에 대한 인식의 틀을 우리 사회에 최초로 제시한 책이었다. 발간된 지 이미 70년이 넘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판을 거듭해 계속 보급되면서 안창호를 이해하는 데는 거의 원전이라 할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다. 그 책이 갖고 있는 큰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이라도 본격적인 내용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는 『도산 안창호』에 나타난 이광수의 안창호에 관한 인식의 문제점을 크게 세 가지로 보았다. 첫째는, 이광수가 독립운동 지도자 안창호의 폭넓은 활동을 도덕적 인격수양으로 한정한 점이다. 그 이유는 이광수 자신이 일제에게 투항한 다음 국내에서 전개한 비정치적인 수양운동을 합리화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둘째는, 일제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던 안창호의 독립운동이 정작 『도산 안창호』를 통해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안창호가 한말의 신민회운동에서 강조했던 민주공화국가 건설이나 독립전쟁의 준비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또 안창호가 3.1운동 후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제시했던 독립운동 구상에 대해서도 제대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대신 임시정부가 심한 파벌싸움 끝에 약화되어 전혀 독립의 전망을 주지 못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이 역시 그 자신이 임정을 배반하고 국내로 탈출한 사실 때문으로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문제되는 것은 1920년대 후반의 혁명적 독립운동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는 사실이다. 대신 그는 안창호와 흥사단과 스스로를 일체화시킴으로써, 안창호를 대다수의 국내 대중들에게 자신과 같은 민족개량주의자 또는 자치운동자로 잘못 각인시켰다. 독립운동가 안창호에게는 너무도 치명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셋째는, 이광수는 안창호가 마치 한국 민족과 역사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것처럼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단지 이광수 자신이 갖고 있는 잘못된 민족관과 역사관일 뿐이었다. 안창호는 실제로는 우리 민족의 자질에 대해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며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비록 지금은 일시적으로 고난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에 대해서까지 비관하지는 않았다. 어떤 인물에 대한 기록이건 상당한 정도로 작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도산 안창호』의 경우는 그것이 너무 심한 사례로 생각된다. 안창호의 활동 전체에 비추어 보면 매우 중요한데도 누락된 부분이 많은 것은 저술 당시의 여건이 어려웠기 때문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술되어 있는 부분마저도 과장과 축소가 많고 왜곡이 심해서 어디까지가 안창호의 실상이고 어느 부분이 작자인 이광수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만들어낸 허상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읽는 이들의 한국근대 역사에 관한 폭넓은 배경 지식과 세밀한 주의가 요구되는 이유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도산 안창호』를 통해서는 안창호와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광수가 자신의 틀 내에서 이해하고 자신의 처지와 의도에 따라 만들어 낸 안창호를 보게 되는 위험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창호의 본 모습은 한국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서 사상과 운동의 양면에서 우리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데 있다. 하지만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는 이런 그의 전모를 전해주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온전히 그리기에는 대표적 친일파로 지탄받는 이광수 자신의 생각과 삶이 너무 크게 굴절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Dosan Ahn, Chang-ho』, the first post-independence biography of Ahn, Chang-ho written by Lee Gwang-soo in 1947, provided Korean society for the first time with the frame of understanding Ahn, Chang-ho and his thoughts. After more than 70 years of the first publication, the book, with continuous editions, is accepted as nearly a classic and still occupies the central place in understanding Ahn, Chang-ho. Given this great influence of the book, a thorough examination into its contents must be made. This thesis presents three problems in Lee, Gwang-soo,s understanding of Ahn, Chang-ho, which are illustrated in 『Dosan Ahn Chang-ho』. The first problem is that Lee, Gwang-soo limited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leader Ahn, Chang-ho’s activities over wide spectrum within character building in moral terms. The reason why Lee, Gwang-soo did so is that Lee himself wanted to legitimize his nonpolitical character building movement he had started after accepting the Japanese rule. The second is that one cannot see in 『Dosan Ahn Chang-ho』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activities of Ahn, Chang-ho, the leading activi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There are no mention of democratic republic building and preparation for an independence war that Ahn emphasized while in Shinmin Society that he established in late Chosun dynasty period. Also, the book rarely mentions the design of independence movement that Ahn presented while leading the Provisional Government after the 3.1 Movement. Instead, it depicts the Provisional Government as if it have been weakened due to its inner factionalism and failed to provide any prospect for the independence. This can also be explained by Lee Gwang-soo’s betrayal of and escape from the Provisional Government. Above all, the revolutionary independence movement of the late 1920s is entirely omitted in 『Dosan Ahn Chang-ho』. Instead, Lee, Gwang-soo indentified himself with Ahn, Chang-ho and Heungsadan, thereby conveyed an incorrect impression to the public that Ahn, Chang-ho was a national-improvementalist or home-rule activist like Lee himself. This has brought a fatal blow to reputation of Ahn, Chang-ho as an leading independence movement activist. The third problem is that Lee, Gwang-soo described as if Ahn, Chang-ho has had a highly negative recognition of Korean people and history, which is far from the truth. Rather, it more reflected what Lee, Gwang-soo had in mind about Korean people and history. Ahn, Chang-ho had a faith in the disposition of Korean people, and did not take a pessimistic view of the future of Korea, despite the present sufferings. It would be inevitable for the author to be influenced by his own view to some extent in describing a certain figure. But in the case of 『Dosan Ahn Chang-ho』, the author’s subjective views and judgement are too much involved. Large part of works that are very important when considered in Ahn’s whole activities are left out. One may try to understand this omittance by considering the difficult surroundings of the time, but even in the part that Lee recorded, exaggeration, understatement, and distortaion are common, which makes readers have difficulty in distinguishing facts on Ahn’s works from what the writer made from his false images. This is why readers need to be equipped with close attention and background knowledges on Korean modern history. Or, they could not avoid the danger of seeing Ahn, Chang-ho created by Lee Gwang-soo who reflected his own position, intention and limitation. Ahn, Chang-ho was one of the leading figures who headed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both ideological and practical ways. 『Dosan Ahn Chang-ho』 written by Lee, Gwang-soo, however, is too far from showing this feature. This problem can be attributed to the fact that Lee, who was blamed as a pro-Japanese and had a distorted life and ideology, found it difficult to fully accept and describe Ahn, Chang-ho the way he is,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leader who devoted himself to the historical demand of the time.

      • KCI등재

        康永昇의 미주독립운동 노선과 방략

        연효진(YEON Hyo-jin) 한국근현대사학회 2021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96 No.-

        이 글의 목적은 일제강점기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강영승의 활동과 그의의를 밝히는 데 있다. 강영승은 1888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학업을 위해1905년 하와이로 이민 갔다. 그는 1909년 대한인국민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미주에서 한인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22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에 당선되어 한인들의 권익보호는 물론, 재미한인들의 교육활동에 주력했다. 강영승은 1929년 안창호의 대혁명당 조직 구상에 깊이 공감하여 흥사단에 입단했고, 1938년 대혁명당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방략을 「혁명운동건의서」로 제시했다. 「혁명운동건의서」는 국민회, 흥사단, 중국후원회 등 강영승의 폭넓은 독립운동 활동과 그의 전공인 법학과 교육활동, 교회 등의 경험들이 더해져 강영승만의 독특한혁명운동방략이 구체화된 것이었다. 하지만 「혁명운동건의서」는 보수적인 국민회에 This paper carefully examines Kang Young Seung’s strategies and his service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fter joining 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KNA) in 1909, he devoted himself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Kang believed in An Chang-ho’s idea of the Wide Independence Party and thus joined Heungsadan in 1929. In 1938, Kang published ‘Proposal for Revolutionary Movement.’ Though the proposal was rejected by KNA, it reflected his extensive experiences in legal, educational and religious fields. He was expelled from Heungsadan due to internal conflicts but continued his work in other organizations.

      • KCI등재

        유길준의 인맥에 대한 연구(1907~1914)

        마스타니 유이치(Masutani Yuichi) 고려사학회 2017 한국사학보 Vol.- No.68

        유길준은 일본에서 동아청년회에 관여하였다. 동아청년회 및 일한동지회에 소속하는 일본인들은 일진회 및 대한협회에 반대하고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유길준의 인맥 또한 이와 같은 경향을 보였다. 유길준이 유일하게 참여한 기존 자강운동 단체인 대동학회는 그가 귀국 전부터 교류하던 일한동지회가 관여한 단체였다. 유길준은 귀국 후 독자적으로 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흥사단 활동은 이미 활동하고 있던 교육 지도자들과 거리를 두고 전개한 활동이었다. 한성부민회 역시 유길준이 독자적으로 전개한 활동이었다. 1909년 1월 한성부민회에 대한협회 인사들이 참여하였는데, 결국 유길준과 뜻을 같이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유길준의 인맥은 1910년 및 1912년의 일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자강운동 세력을 이끄는 윤효정,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과 같은 인물은 유길준의 주소록인 『지우록』과 『조문록』, 『유길준 일기』에 나타나지 않았다. 유길준은 망명에서 귀국한 후 새롭게 등장한 젊은 운동가들에게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인 자강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산업계 인사들을 포섭해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Yu KilChun was involved in Tonga Ch’ŏngnyŏnhoe in Japan, Tonga Ch’ŏngnyŏnhoe and the Japanese affiliated with Ilhan Tongjihoe tried to start their independent movement and Yu KilChun’s personal connections show the same tendency as well. Daedonghakhoe, the only strenuous efforts movement organization which Yu KilChun participated was an organization involved with Ilhan Tongjihoe which he interacted before returning from abroad. After his return, he developed his own Enlightenment Movement. Heungsadan activities kept their distance from the existing leaders. Hansŏngbuminhoe also was Yu KilChun’s independent activity. January 1909, Personnel from Taehanhyŏp"oe participated in Hansŏngbuminhoe and they couldn’t get together. Those personal connections have been verified his 1910 and 1912 journal. The leaders of the Enlightenment Movement such as Yun Hyochŏng, Chang Chiyŏn, Sin Ch"aeho, Pak Ŭnsik didn’t show in Chiurok(Records of close acquaintances), Condolence book, and Yu Kilchun’s Journal. After his return from asylum, Yu KilChun tried to develop his independent Enlightenment Movement not joining new activists thus tried to construct network with industrial personnel.

      • KCI등재

        일반논문 : 미군정하 흥사단 계열 지식인의 냉전 인식과 국가건설 구상

        장규식 ( Kyu Sik Chang ) 한국사상사학회 2011 韓國思想史學 Vol.0 No.38

        흥사단 계열은 20세기 전반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지식인 집단으로, 해방후 미군정에 대거 진출하여 각종 정책을 입안하면서 자유민주국가 건설의 기초를 놓았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8·15해방을 민주주의 연합국의 승리로 주어진 해방으로 인식하고, 민족의 자아혁신과 실력양성을 통해 완전독립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완전독립을 위한 민주건국의 요체로 자아혁신을 통한 신생활운동을 제창하였다. 국민 의식수준의 향상이 없이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하다는 공통된 인식에서였다. 그러나 자유의 사회적 허용 기준, 해방정국의 우선 과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등의 문제를 놓고는 내부에 도산우파와 도산좌파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의 입장 차이가 나타났다. 예컨대 조병옥·정일형 등은 자유 수호를 우선의 가치로 내세워 반공주의를 정당화하고, 가능지역의 총선거를 통한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지지하였다. 반면 김붕준·오기영 등은 만인의 도덕적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앞세워 냉전적 반공주의를 비판하고, 남북좌우가 통일단결하여 완전독립을 이루는 것이 우선의 과업임을 강조하였다. 해방후 흥사단계는 냉전 구도의 형성을 전후해 반공 우선이냐 통일 우선이냐를 놓고 입장이 나뉘기는 했지만, 자유주의 원리에 입각한 민주국가의 건설이라는 대원칙에는 의견을 같이하였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개인과 시민사회의 우위를 내세우고, 의회주의와 정당정치에 입각해 견제와 균형을 기조로 하는 민주정부의 수립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국민들의 민주주의 경험이 부재한 현실을 돌파하기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 계몽을 특히 강조하였다. 다음으로 경제건설과 관련해 그들은 실력양성론의 맥락에서 생산증대를 통한 자립경제의 건설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견지에서 전문경영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한편으로, 민주적 노동조합을 육성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경제의 민주화를 도모하려 하였다. 미군정하에서 흥사단계 지식인들에 의해 입안된 제반 정책의 큰 틀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대체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단절의 부분 또한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대의정치 원칙을 강조한 흥사단계와 동원정치 전략을 구사한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편차와 연동되어 있었다. The Young Korean Academy was a representative of liberal intelligentsia groups in Korea in the first half of the 20th century. They laid the foundation of a liberal democratic state by implementing various policies from the diverse offices in the American Military Regime in South Korea post-World War II. In this process, they recognized the national liberation as a result of the victory of the democratic alliance and argued for a movement toward complete independence, through the self-innovation and self-improvement of the Korean people. In addition, they proposed the New Life Movement through self-innovation as the essence for the democratic foundation of the country and complete independence. This was based on the shared belief that democratization is impossible without improvement of the consciousness of the people. However, there emerged internal divisions, separating Dosan Rightists from Dosan Leftists, when faced with such issues as the social perimeter to tolerate freedom, the imminent tasks in the post-liberation space, and establishment of a separate government in the South. For example, Dosan Rightists such as Cho Byung-ok and Chung Il-hyung justified anti-communism, presenting protection of freedom as the primary goal, and supported establishment of a separate government in the South, after a general election in areas where it was possible. On the other hand, Dosan Leftists such as Kim Boong-joon and Oh Ki-young criticized Cold War anti-communism, arguing for everyone`s moral and ideological freedom, and emphasized that the most imminent task was to have a complete independence through unified solidarity of the North and South, Left and Right. Although members of the Young Korean Academy group were divided on the question of the relative importance between anti-communism and unification around the time of the formation of a global Cold War structure, they shared a main principle of the foundation of a democratic country based upon the principle of liberalism. They strove to construct a democratic government that placed individuals and civil society over state, and that followed the principle of the checks and balance of parliamentary and party politics. They emphasized education of democracy to counter the lack of democratic experience of the people. Next, in the area of economic development, they emphasized the development of a self-sufficient economy through production increase, following the theory of capability enhancement. While respecting the self-management of professional managers in the context of liberalism, the Young Korean Academy group also tried to promote economic democratization by developing a check and balance between capitalists and labor through democratic labor unions. A large portion of the various policies proposed by the Young Korean Academy intellectuals during the American Military Regime were continued by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But a certain discontinuity also exists, because of the difference of the views on liberal democracy held by the representative politics-oriented Young Korean Academy group and mass mobilization-favoring Syngman R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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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도산 안창호와 춘원 이광수의 관계

        박만규 ( Man Kyu Park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7 No.-

        한말 일제시기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아직도 그 평가를 두고 이론이 있는 인물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를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로 평가한다. 그러나 학계 일부에서는 그를 민족개량주의자 내지 자치론자의 대부로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 인식의 바탕에는 춘원 이광수(1892-1950)와의 긴밀한 관계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춘원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다방면의 업적을 남겼지만 일제시기 변절한 끝에 반민족친일파의 대표적 인물로 전락했던 인물이다. 어쨌든 끝까지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보냈던 도산과 독립운동가에서 자치론자로 변화했던 춘원은 1919년 5월 말 처음 만난 뒤부터 1938년 3월 도산이 타계할 때까지 20여 년간 깊은 유대를 지속하였던 각별한 사이였다. 여기서는 특히 도산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춘원이 상해를 이탈하여 국내로 들어와, 도산과의 부단한 연계아래 흥사단의 국내 조직(=수양동맹회, 수양동우회, 동우회)을 만들고 그 활동을 주도하던 1921년 4월부터 1937년 5월까지의 16년 동안에 주목하였다. 이 시기 춘원은 일제와 내통했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품 활동과 동아일보 편집국장 및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며 사회 유지로서의 명성을 더할 수 있었다. 반면 도산은 귀국을 감행해 버린 춘원을 용인하고 지원함으로써 국내에도 흥사단 조직을 만들려던 염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자신의 실제 정체성과는 달리 국내 대중들로부터 민족개량주의자 내지는 자치운동자들의 배후 인물로 낙인찍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는 그가 춘원과 동일시된 데서 온 결과인데 비단 당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그의 사후에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그런 선입관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굴레가 되었다. Ahn, Chang-ho(1878-1938) was one of the leaders of nationalist movement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received a dubious evaluation on his accomplishments from descendants. Of course he was perceived as a dedicated patriotic person of independent movement, but also evaluated from some historians as an advocate of reformism and as a theorist of autonomism. The reason for that kind of evaluation comes from his intimate relationship with Lee, Gwang-soo(1892-1950) who was a typical renegade and pro-Japanese sympathizer. Both of them continued their friendship from 1919 to 1938 for 20 years. Lee, Gwang-soo departed from independent movement in Sanghai and came back to the homeland. Later on he helped to develop the inland organization of Heungsadan by keeping contacts with Ahn, Chang-ho, and led an active campaign from 1921 to 1937 for 16 years. Even though Lee Gwangsoo was suspected of his secret communication with colonial Japanese bureaucrats, he kept his reputation as a leading man of noble status while serving the editor of Donga-Ilbo and a vice president of Chosun-Ilbo. Ahn, Chang-ho also could make an inland organization of Heungsadan with the help of Lee, Gwang-soo. However, Ahn, Chang-ho got a bad reputation as an autonomist or a man of advocating reforming the character of Korean people. This was because he was acknowledged as same as Lee, Gwang-soo. And people are still identifying him with the same kind of perception and prejud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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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 안창호와 춘원 이광수의 관계

        박만규 호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7 No.-

        Ahn, Chang-ho(1878-1938) was one of the leaders of nationalist movement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received a dubious evaluation on his accomplishments from descendants. Of course he was perceived as a dedicated patriotic person of independent movement, but also evaluated from some historians as an advocate of reformism and as a theorist of autonomism. The reason for that kind of evaluation comes from his intimate relationship with Lee, Gwang-soo(1892-1950) who was a typical renegade and pro-Japanese sympathizer. Both of them continued their friendship from 1919 to 1938 for 20 years. Lee, Gwang-soo departed from independent movement in Sanghai and came back to the homeland. Later on he helped to develop the inland organization of Heungsadan by keeping contacts with Ahn, Chang-ho, and led an active campaign from 1921 to 1937 for 16 years. Even though Lee Gwangsoo was suspected of his secret communication with colonial Japanese bureaucrats, he kept his reputation as a leading man of noble status while serving the editor of Donga-Ilbo and a vice president of Chosun-Ilbo. Ahn, Chang-ho also could make an inland organization of Heungsadan with the help of Lee, Gwang-soo. However, Ahn, Chang-ho got a bad reputation as an autonomist or a man of advocating reforming the character of Korean people. This was because he was acknowledged as same as Lee, Gwang-soo. And people are still identifying him with the same kind of perception and prejudice. 한말 일제시기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도산 안창호(1878-1938)는 아직도 그 평가를 두고 이론이 있는 인물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를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로 평가한다. 그러나 학계 일부에서는 그를 민족개량주의자 내지 자치론자의 대부로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 인식의 바탕에는 춘원 이광수(1892-1950)와의 긴밀한 관계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춘원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다방면의 업적을 남겼지만 일제시기 변절한 끝에 반민족친일파의 대표적 인물로 전락했던 인물이다. 어쨌든 끝까지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보냈던 도산과 독립운동가에서 자치론자로 변화했던 춘원은 1919년 5월 말 처음 만난 뒤부터 1938년 3월 도산이 타계할 때까지 20여 년간 깊은 유대를 지속하였던 각별한 사이였다. 여기서는 특히 도산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춘원이 상해를 이탈하여 국내로 들어와, 도산과의 부단한 연계아래 흥사단의 국내 조직(=수양동맹회, 수양동우회, 동우회)을 만들고 그 활동을 주도하던 1921년 4월부터 1937년 5월까지의 16년 동안에 주목하였다. 이 시기 춘원은 일제와 내통했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품 활동과 동아일보 편집국장 및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지내며 사회 유지로서의 명성을 더할 수 있었다. 반면 도산은 귀국을 감행해 버린 춘원을 용인하고 지원함으로써 국내에도 흥사단 조직을 만들려던 염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자신의 실제 정체성과는 달리 국내 대중들로부터 민족개량주의자 내지는 자치운동자들의 배후 인물로 낙인찍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이는 그가 춘원과 동일시된 데서 온 결과인데 비단 당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그의 사후에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그런 선입관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굴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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