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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독립운동사연구』50집 간행(1987~2015)의 성과와 연구사적 의의

          박걸순(Park, Geol-sun)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5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51

          1987년 개소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그해 8월부터『한국독립운동사연구』를 발행하여 28년 만인 2015년 5월 제50집을 발행하였다. 그간『한국독립운동사연구』에는 모두 214명의 국내외 연구자가 참여하여 550편(부록 60편 포함 61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연 면수는 23,908쪽, 연 발행부수는 54,450부에 달한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수록 논문의 경향성은 한국근현대사의 연구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주제별 연구는 인물, 일제 침략·식민지 지배정책사, 독립운동단체 순인데, 이들 논문이 전체 수록 논문의 40.8%나 차지하는 것은 학계의 연구경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독도영유권 문제, 해외지역의 독립운동도 꾸준한 연구경향을 보이며,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와, 한국민족주의와 역사인식 등 주제가 새롭게 등장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국내 지역의 독립운동사와 자료연구가 급속히 활성화되는 것은 발전적 양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의 중요 주제인 3·1운동과 의병·위정척사운동은 급격히 퇴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는 28년의 역사를 통해 한국근현대사 관련 양대 학회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와 함께 한국근현대사연구를 대표하는 ‘3대 학술지'라 평가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유사 성격을 지닌 일반 학회와는 차별화 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논문집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강화하여, 학계를 선도하는 가장 권위와 공신력을 인정받는 논문집으로 발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여 논문집을 보다 다양하고 일관성 있게 구성해야 한다. In May, 2015, the Institute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of Independence Hall of Korea issued the 50th volume of its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after 28 years since the first volume in August, 1987 when the Institute was established. Total 214 researchers home and abroad published 550 papers(610 when 60 appendixes are included) in the Journal whose annual number of pages was 23,908 and whose annual number of issues published was 54,450. The tendency of papers published in the Journal was the research histo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Korea itself. The research topics went through the order of figures, Japanese invasion and history of Japanese colonial ruling policies, and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The papers on those topics accounted 40.8% of the entire papers published in the Journal, which clearly shows the research trends of the academia. There was also a consistent research trend in the topics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ownership of Dokdo, and independence movements in foreign countries. An emerging trend of topics includes the issue of Japanese history textbooks and the nationalism and historical awareness of Korea. A developmental pattern was especially observed in the rapid activation of researches on the history and materials of independence movements in Korea. It was shameful, however, that there was a swift decline in the researches on March 1 Movement(3·1運動) and also Uibyeong(義兵) and Wijeongcheoksa Movement(衛正斥邪運動), two of the major topics in the history of independence movements.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has emerged as one of the three major journals on the researches on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Korea along with the other two published by two prominent societies on the subject in the course of its 28-year-old history. It is, however, tasked with reinforcing its status as a collection of dissertations issued by the Institute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differentiated from other general societies of similar nature and evolving into a journal recognized for its authority and public confidence to lead the academic circles. It is thus needed to make mid and long term plans and organize the Journal in a more diverse and consistent fash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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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학계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동향과 전망(2016~2019)

          김태국(Jin, Tai Gou)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73

          중국 내 한국학은 중국의 개혁개방 40여 년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그 가운데 한국사는 점차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중국 학계는 한국독립운동사에 주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중국과 한국이 연합하여 공동의 적이었던 일본 제국주의 등 열강의 침략에 맞섰기 때문이다. 둘째는 중국과 한국의 연합 항일 투쟁사는 한반도를 둘러싼 현재와 미래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 2019년까지 중국 학계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 독립운동가, 중국과 한국의 군사협력, 중국 미디어에 비친 한국 독립운동, 중국 공산당과 한국 독립운동의 관계, 중국 동북지역의 한국 독립운동 등 다양하다. 이러한 중국 학자들의 연구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중국의 지지와 성원으로 한국독립운동이 가능했다는 점이 많이 강조되었다. 둘째, 그들은 양국의 공동 항일의 당위성을 발견하는데 주력하였다. 셋째, 그들은 한국독립운동의 최종 목표인 자주독립에 대한 중국의 견해와 승인을 부각하고자 했다. 중국 학자들이 연구 논문에 중국 측의 입장과 관점을 많이 반영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다음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양국 공동항일전선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역할과 위상을 좀 더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 둘째, 양국 공동항일전선 구축에 따른 대외적인 상징성과 효과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셋째, 한국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인들에게 내비친 항일 이미지를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Korean studies in China grew rapidly over 40 years of reform and opening up in China. Among them, the proportion of Korean history is gradually increasing. In particular, Chinese academia is paying attention to the history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reasons can be summarized in two ways. At first, it was in line with the invasion of the great powers such as Japanese imperialism, which was a joint enemy of China and Korea. Second, the history of the combined anti-Japanese struggle between China and Korea has important present and future implications for the Korean Peninsula. From 2016 to 2019, Studies of the history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Chinese academia diverse such as the 3·1 movement an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Korean independence activists, military cooperation between China and Korea,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Chinese media,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hinese Communist Party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developed in the northeastern region of China. The study of these Chinese scholars has several characteristics. First, it was emphasized that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was possible with the support and support of China. Second, they focused on discovering the justification for a joint protest between the two countries. Third, they tried to highlight China's view and approval of independent independence, the final goal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t may be natural that Chinese scholars have tried to reflect the Chinese side's position and perspective in their research papers. However, I would like to point out some of the following problems. First, the role and status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must be evaluated in a more objective and positive way on the joint anti-Japanese front of both countries. Second, it is necessary to actively review the external symbolism and effects of the establishment of a joint anti-Japanese front between the two countries. Third, the anti-Japanese image that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as shown to the Chinese must be religh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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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무관학교와 한국독립운동

          한시준(Han See-Jun)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40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6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서 설립되었다. 설립 주최는 신민회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경술국치 직후 회의를 통해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이에 의해 이회영 6형제를 비롯하여 이동녕·이상룡 등의 인사들이 서간도로 이주하고, 그곳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약 3, 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신흥무관학교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갖는 의미를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신흥무관학교 설립자들이 보여준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정신이다. 이회영 6형제를 비롯하여 이동녕·이상룡 등 서간도로 이주한 인사들은 기존의 기득권과 영예를 모두 버렸다. 뿐만 아니라 전재산을 팔아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바쳤다. 이들의 헌신적인 희생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사회지도층이 보여준 노블리스 오블리쥬 정신의 표본이 된다. 둘째, 신흥무관학교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독립전쟁론'이란 독립운동의 전략을 정착시켰다. 신민회 인사들은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가 일제가 중국·미국·소련 등과 전쟁을 하게 될 때, 이들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생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한국독립운동의 전략이었다. 셋째,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이후 독립운동에서 주요한 지도자로 역할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0여 년 동안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이 만주와 중국대륙에서, 그리고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많은 졸업생들이 1920년 청산리대첩에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만주지역에서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중국관내에서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그 핵심간부로 활동한 것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넷째, 신흥무관학교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전통을 세웠고, 그것은 해방 때까지 계속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에 문을 닫았지만,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사업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한 것으로 비롯하여, 1940년대까지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업이 계속 추진된 것이다. Sinheung Military School was established in Samwonpo, Yooha-hyeon, West Jiandao in June, 1911. Its establishment was sponsored by the members of Sinminhoi (a secret society for Korea's independence). They decided to establish the base for independence movement abroad and train an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at a meeting right after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According to their decision, the figures like Lee, Hoi-young and his 5 brothers, Lee, Dong-nyeong, Lee, Sang-ryong and others emigrated to West Jiandao and established Sinheung Military School there. Since then, Sinheung Military School graduated about 3,500 students till 1920. The meaning of Shinheung Military School in the history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can be summarized into four items as follow ; The first one is the spirit of noblesse oblige shown by the founders of Shinheung Military School. The figures like Lee, Hoi-young and his 5 brothers, Lee, Dong-nyeong, Lee, Sang-ryong and others who emigrated to West Jiandao gave up all their vested rights and honors. In addition, they sold all of their belongings and donated them to the establishment of Sinheung Military School. Their devotional sacrifice is the model of the spirit of noblesse oblige shown by the people in the leadership class in the history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econdly, Sinheung Military School settled the strategy of independence movement which is called "the theory of independence war" in the history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e leading figures of Sinminhoi established Sinheung Military School with the thought that when Japanese imperialism would begin to fight a war with China, America and Russia, the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would join the war with them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and then win our independence. This was the strategy for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irdly, the graduates of Sinheung Military School played a leading part in independence movement afterwards. For about 10 years Sinheung Military School graduated 3,500 students. They played a leading parts in various fields in Manchuria and China till Japanese imperialism's defeat in 1945. Many graduates participated in Cheongsan-ri Military Campaign. Organizing the Joseon Revolutionary Army and the Army for Korean Independence, they carried out an armed struggle against the Japanese military. Also the people who established Joseoneuiyongdae (an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and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and actively worked there as core leading members were the graduates of Sinheung Military School. Fourthly, Sinheung Military School formed tradition to train the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and its tradition continued till the liberation of Korea in 1945. Although Sinheung Military School closed in 1920, even since then, the work to train the staffs of the army for national independence continued. As the Korea government-in-exile established the Military Academy to train the staffs of the Army for Korean Independence, the work to train the Army for Korean Independence was continuously underway by 19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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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2015년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의 동향과 과제

          조규태(Cho, Kyu-tae)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53

          이 글은 2014~2015년 독립운동사연구의 동향을 검토하여 그 성과를 확인하고 독립운동사 연구의 발전을 위한 몇 가지의 과제를 제시한 글이다. 먼저 국내외의 독립운동사 연구의 동향과 시군별 · 부문별 독립운동사 연구의 동향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독립운동사 연구의 발전을 위한 여섯 가지의 과제를 제시하였다. 국내의 독립운동사 연구는 의병, 애국계몽운동, 헤이그특사와 순국투쟁, 비밀결사, 3 · 1운동, 의열투쟁, 사회주의계 독립운동, 신간회, 민족문화수호운동과 강제동원에 대한 투쟁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중에서 특히, 의병, 유림계의 3 · 1운동인 파리장서운동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많이 이루어졌다. 국외의 독립운동사 연구는 중국 관내지역, 만주지역, 노령지역, 미주 · 일본 등지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행해졌다. 이 지역 중에서 중국 관내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가장 많았다. 중국 관내지역의 독립운동 중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하였고, 위생 · 의료 및 기념식과 같은 사회문화사적 검토가 시도되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진보적 인물을 비롯한 미주지역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의 성과가 컸다. 이에 비해 무장투쟁의 현장인 만주지역과 노령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였다. 도 · 시 · 군별 독립운동사 연구는 경북지역, 안동시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가장 왕성하게 행해졌다. 그리고 부문별로는 여성독립운동, 아나키즘계 독립운동, 교과서의 독립운동 서술 등의 주제가 다루어졌다. 이처럼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2014~2015년의 독립운동사 연구는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비해서 그 수효가 적다. 이는 독립운동사 연구자의 은퇴와 노령화, 그리고 연구자들이 사회 · 문화사 분야로 연구의 주제를 변경한 탓이다. 앞으로 독립운동사 연구의 발전과 활성화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첫째 무장독립운동의 현장이었고, 희생이 많았던 만주 · 노령지역의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둘째 일치된 결론에 도달하지 않은 주제와 사건에 대해서는 콜로키움이나 학술회의를 통해 명확한 결론을 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셋째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사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넷째 독립운동을 진압한 일제의 기관과 조직과 직원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 신문이나 일제의 정보문서와 행형자료 외에 독립운동가가 생성한 회고록과 문집과 문서 등을 디지털화 해서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사진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 관리하고 서지학적 연구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This is a paper to review the trend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researches and to look into tasks for the development of researches. In this paper, I intend to review the researches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done in internal and external places, and check out the searches by regional group and theme. Themes of internal independence movement researches done in 2014~2015 were righteous army, national enlightenment movement, Hague envoy and suicide struggle, secret society, the first of March movement, patriotic struggle, socialist independence movement, Shin-gan-hoe, national culture protection movement and resistance against compulsory mobilization, and etc. Especially, righteous army, letter to Paris movement of the first of March movement by Confucian scholars were studied much more than others. Themes of external independence movement researches had differences in places, which were main land of China, Manchuria, Russia, America and Japan, etc. Among these, there were plenty of researches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nd the researches of the Korean American independence movement in America were the second in number. And the social and cultural history researches like medical treatment and ceremony have been done. But the researches of independence movement in Manchuria and Russia were unsatisfactory in number. Among the researches of independence movement in province, the researches of independence movement in Kyung-book were most frequent. And among them in cities, those of Andong were most frequent. In researches by theme, the researches of Anarchist movement and women movement were enacted. But the researches of independence movement have been reduced in 2014~2015 than 1990's and 2000's. These are down to retirement and aging phenomenon of researchers, and to changing of research theme. From now on, to develop independence movement researches, we must fulfill several tasks as follows. First we must make a study about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Manchuria and Russia, where were typical sites of armed struggle. Second we must make a conference and homogenize different views. Third we must increase the researches of socialist independence movement. Fourth the researches of the organization, agency, and officers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must be fulfilled. Fifth biographies, and memoirs, and documents of patriots must be collected and digitalized to be used easily. Sixth we must collect and organize photographies, and do bibliographic study about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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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버트(Homer B. Hulbert)의 在美 한국독립운동

          홍선표(Hong, Sun-pyo)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55

          헐버트는 구한말 시기 육영공원의 외국인 교사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은 후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며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하였고 외국인으로서 처음으로 광무황제의 특사로 임명받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평가는 주로 경술국치 이전까지의 활동에 국한되어 있어서 그의 전 생애, 특히 미국에서의 활동에 대해선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했다. 본고는 헐버트에 대한 기존 연구 성과에서 소략하게 취급되었던 미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 중점을 두었다. 헐버트는 미국에 정착한 이후 여생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는 강제 ‘병합'을 시도한 일본의 저의를 폭로하였고 한국의 기독교를 탄압해 기독교의 정신과 민주주의 사상을 한국인에게 확산시키는 것을 막으려는 일본의 음모를 규탄하였다. 을사늑약(‘Eulsa Treaty') 당시 루즈벨트 전 대통령의 대한정책의 과오를 들추어내 조미조약을 근거해 맺어진 한미 간의 신의를 저버린 미국의 배신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같은 비판은 미국 정부로 하여금 더 이상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고 식민 상태에 있는 한국의 독립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원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한국 독립을 돕기 위한 헐버트의 활동은 미국의 언론과 의회,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활동, 그리고 한국친우회와 한미협회 등을 통해 활발히 추진되었다. 또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며 김규식)의 외교활동을 적극 도왔다. 이승만과 함께 영문 잡지 The Orient 의 발간에 참여였고 워싱턴DC에 개최된 한인자유대회에서 장차 한국의 독립이 머지않았음을 역설하며 한인들을 격려하였다. 이같은 그의 활동은 해방 때가지 미국 내 어떤 한인 독립운동가들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역동적이고 지속적이었다. 헐버트의 한국독립운동은 미국 사회에 한국 문제를 끈질기게 제기한 미국인이 거의 드문 상황에서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다른 어떤 것보다 특별하고 소중하다. 이런 연유로 지금까지 그를 구한말시기 국권회복운동의 인물로 한정해왔던 데서 벗어나 한국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당당히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Hulbert was a foreign teacher of The Royal English college. He had studied Korean history and culture since he had had special bond with Korea. He also was appointed the first foreigner envoy by Emperor Gwangmu to restore national rights of Korea. As the estimation about his activities were mostly limited to those of the national humiliation times, the activities for all his life, especially in America were never arranged well. This manuscript set importance on his Independence Movements for Korea in America which had been roughly treated on the existing research performances. Hulbert devoted his remaining years for Korean independence after he settled down in America. He exposed Japan's real intention toward the compulsory ‘colonization of Korea' and censured Japan's plot which tried to stop the spread of christianity and democracy suppressing Korean christianity. He also criticized sharply about the act of betrayal that broke the faith between Korea and America based upon Korean American Treaty raking up the then president Roosevelt's mistakes in foreign policy toward Korea during the ‘Eulsa Treaty'. The criticism like this is for American government not to follow the same bad methods as before and to support independence of Korea which was in the state of colonization. The activities of Hulbert to help Korean independence were actively pursued through 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 The Korean American Council and the lectures aimed at American media, congress and general public. He also aggressively helped diplomatic activity of Kim, Kiusic, pursuing plans to report Korean Independence issue all around world through Paris Peace Conference. He participated in the publication of the English magazine The Orient with Syngman Rhee and encouraged Koreans that Korean independence was not long in 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held in Washington DC. His activities like this was so active and continuous that no Korean independentista in America could carry out until the liberation.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by Hulbert was very special and precious under the situation that the people who persistently brought forward Korean issues to the American society were rare. For this reason, we have to estimate him highly as a fighter for Korean independence out of the limitation that bound him as a man of the The Movement to Restore National Sovereignty in the Late Period of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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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大原社會問題硏究所와 재일 한인 독립운동

          김경남(Kim, Kyung-nam)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57

          본 연구는 1919년에 설립한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가 추진한 수집·조사활동이 한인독립운동과 어떠한 연관을 가지는지에 대하여 고찰하고, 소장기록을 통해 한국독립운동의 식민지적 특징을 검출하고자 하였다. 또한 한국독립운동연구와 관련하여 향후 활용방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오하라 연구소는 1919년 노동사회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산업자본가 오하라와 당시 일본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던 다카노 등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다. 연구소는 일본사회문제연감이나 일본노동연감 등을 만들기 위하여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 자료를 대량으로 수집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노동단체나 사회단체를 조사하고, 직접 자료를 수집하러 출장 방식을 취하였다. 또한 일본노동당계 인사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내부자료를 대거 사들여 비밀을 유지해야할 중요한 기록까지 확보하였다. 각 단체들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연구소는 한인독립운동단체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만 노동운동단체 60단체, 청년·학생운동 7단체 등으로 총 67단체이지만, 내부 자료보다 유인물, 강령 등을 중심으로 확보하였다. 이 가운데에는 재일조선인단체뿐만 아니라 재조선 단체에 대한 수집활동도 일부 전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한인 민족해방운동 단체에 대한 보다 많은 노동자, 청년, 농민, 여성 조직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 기록은 한인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기록의 총체상을 파악하는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오하라연구소 수집 조사의 특징은 운동을 실행하고 있던 당시에 직접 출장방식, 조합조사방식, 주요단체 일괄구매방식을 취하여 운동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독립운동관련 기록을 수집하기 위하여서도 각 단체에 앙케이트 조사를 수행하였다. 오하라연구소 수집위원이었던 후세 다쓰지는 한국 독립운동관련 기록 수집과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후세는 한국 강제병합부터 시작하여 특히 1920년대~30년대에 재일 유학생과 노동단체·농민단체 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일본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투쟁을 일본 본토와 조선에서 전개하였다. 이처럼 오하라연구소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한인독립 운동단체에 대한 기록을 목적의식적으로 수집하는 전략을 통해 한국독립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로 인해 당시의 유인물, 강령, 규약 등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노동운동단체의 내부기록을 입수한데 비해 한인독립운동단체의 기록은 유인물 중심으로 수집된 한계를 보인다. 이러한 한계는 오하라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다른 기록을 발굴하고, 메이지대학도서관, 일본조선대학교, 이시마키문화센타(石巻文化センター) 등에 소장되어 있는 후세관련기록을 보충함으로써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인 단체가 소속되어 있던 기업들에 대한 자료수집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들을 실마리로 삼아 일본제국과 조선 식민지 사이의 일본과 조선에서 활동하던 각 기관 단체와 인물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수집, 활용이 필요하다. 요컨대, 기록물의 총체적인 수집과 분석을 통해, 재일한인독립운동이 일본혁명의 수단이 아니라 한국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목적의식적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colonial characteristics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by collecting the records relate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oused at the Ohara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 and understanding the characteristics of these records. The study also examined the measures for the future use of the records in relation to studies o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Founded in 1919, the Ohara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 has collected materials regarding labor issues and social issues, which provide a key clue to identify the overall status of the records o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order to systematically understand its history. At the time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institute collected materials related to the movement by using the site visit method, combination survey method and bulk purchase method for the materials from the major organizations. In particular, the records on the questionnaire survey conducted o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clearly shows the actual status of the groups at that time. Fuse Tatsuji (布施辰治), who was a research fellow of the institute and took charge of material collecting, is an important link to the collection of the records related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e strongly protested against Japan's imperialism polic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being in close relation with Korean students' groups in Japan, labor organizations, and farmers' unions in both Japan and Joseon. As the institute established a purposeful collecting strategy for the records on each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that were active at that time, their handouts, platforms and regulations related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can be preserved. Meanwhile, the researchers in charge of material collecting were closely related to the labor organizations in Japan and this enabled them to collect internal data such as handwritten minutes, members' lists and notes. On the other hand, the collection of the records related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shows its limitations as they mainly consist of handouts. These limitations should be complemented by collecting the records created by Korean residents in Japan or those owned by Tatsuji's family members, along with the records obtained by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systematically investigate, collect, and utilize the records on the organizations and individuals that were active in Japan and Joseon at that time, using the records related to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oused at the Ohara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 as clues. This will help overcome the national viewpoint towar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to open a new horizon for studies on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history of Korea from the viewpoint of the twofold structure of empire and col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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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미국인

          홍선표(Hong, Seonpyo)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43

          본 글은 해방이전 미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미국인들은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고찰한 논문이다. 그동안 미국인의 신분으로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인물에 대한 연구는 몇몇 국내 선교사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미국인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 독립을 위해 벌인 활동과 업적을 제대로 조명해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때문에 국내에서 활동한 미국인들과 달리 미국에서 활동한 미국인들 중에 한국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은 인물은 단 한명도 나오지 못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한 미국인들의 수나 활동의 질이 국내의 것보다 훨씬 적었거나 미약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미국 현지에서 한국독립을 돕는데 앞장선 미국인들에 대해 주목하지 못한 주된 요인은 미국인 중심으로 한국문제를 바라보고자 하는 관심과 관점의 부족 때문이었다. 한국의 독립문제를 한국인의 시각에서 만 보려고 했던 것이 외국인, 특히 미국인의 활동상을 간과했던 것 같다. 본고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3 ?1운동시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시기까지 미국에서 한국인과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한국 독립을 도운 미국인에 대해 집중 조명하였다. 국내 3?1운동의 소식과 영향은 미주지역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미국사회에도 확산되어 한국인을 동정하고 한국 독립 문제를 돕는 미국인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국인들은 미주지역 한인독립운동가들이 계획하였거나 조직한 단체와 행사 등에 동참해 기꺼이 한국독립을 지지하였다. 또한 스스로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거나 저서를 발행해 한국 독립을 지원하였다. 미국 의회의 의원들은 한국독립을 동정하는 연설을 하거나 결의안을 채택을 주도해 미국 정부로 하여금 한국 독립을 지원하거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압력을 행사하였다. 해방이전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미국인들은 본고에서 언급한 인물만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연구가 진척되면 더 조명 받아야 할 인물들이 적지 않게 발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미국인들은 미주지역 한인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후원자이자 동역자로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체 한국독립운동을 추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따라서 주목을 받을 만한 인물이든 그렇지 못한 인물이든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도운 미국인들의 가치는 일본과 싸우는 무장 항일독립군 못지않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서 귀중한 역사적 자산으로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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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유공자 서훈의 역사와 제도화 추이

          이성우(Lee, Sung Woo)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73

          독립유공자 서훈은 독립운동가를 정부에서 포상하는 제도이다. 독립유공자 서훈은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1960~70년대에는 실질적으로 1962·1963·1968·1977년 4차례 시행되었다. 이 시기 2,700여 명의 서훈이 시행되었으며, 1963년과 1977년에는 1,000명이 넘는 대규모 서훈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루어면서 독립유공자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한 의지가 낮았고 정치적 필요에 따라 서훈을 시행했다. 서훈은 1980년대 들어 정례화되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는 매년 서훈이 이루어졌으며, 서훈인원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1983년부터는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심사에 참여하면서 공적자료를 중심으로 정밀한 공적심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1986년부터는 독립유공자의 공훈을 전승시키기 위해 독립유공자공훈록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상훈법 개정에 따라 서훈이 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건국포장·대통령표창 7등급 체제로 세분되었으며, 서훈제도가 변경됨에 따라 1990·1991·1992년에 유공자의 훈격조정이 이루어졌다. 훈격조정은 1968·1977·1980년에도 시행된 바 있으나 상훈법 개정에 따라 대규모 조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1990년대부터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이 확대되고 발굴포상이 시행되면서 서훈인원이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발굴포상은 포상신청에 의한 서훈의 한계를 극복하고 독립유공자의 서훈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으며, 서훈의 질적·양적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였다. 독립유공자 훈격은 애족장·애국장·대통령표창·독립장·대통령장·대한민국장 순이다. 독립유공자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지만 훈격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1990년 이후에는 유공자 대부분이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으로 서훈되었다. 이는 1990년대 이전 공적이 많은 유공자의 서훈이 완료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독립유공자 심사기준이 완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운동계열별로는 3·1운동, 국내항일, 의병, 만주방면이 압도적으로 많다. 3·1운동과 의병, 국내항일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민족운동이었고, 국외에서는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과 독립운동단체들이 항일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The government confers decorations for independence patriots. The conferment of decorations for independence patriots was begun in 1962, and during 1960~70s, the government conferred decorations in 1962, 1963, 1968 and 1977. During the period, the government invested about 2,700 persons with decorations, and more than 1,000 was invested in 1963 and 1977. The conferment paved the way to change the perception on independence patriots. The Park, Jeong Hee government had a weak mind on the conferment of decorations, and the government invested decorations for political needs During the 1980s, the government invested decorations regularly. From 1986, the government invested decorations every year, and the number of the decorated personnel was increased. Also, from 1983, scholars specializ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participated in the official committee, and it resulted in close evaluation based on official evidences. From 1986, 『Doklibyugongjahunlok』 was published to pass on the meritorious deed of independence patriots. In 1990, Awards and Decorations Act was revised to devide decorations into Daehanminkukjang, Daetonglyeongjang, Doklibjang, Aekukjang, Aejokjang, Keonkukjang, and Daetonglyeongpyochang and due to the revision of the Act, the grade of decorations was adjusted in 1990, 1991, and 1992. From the 1990s, the number of the decorated personnel was increased, due to expanding decoration for socialist independence patriots and investing decorations to whom the government discovered. Investing decorations to whom the government discovered made overcome the limitation of decoration application, and showed the government's will to take responsibility to the end for independence patriots. Also, it became the starting point of qualitative and quantitative changes in the decoration system. The grade of decorations is Aejokjang, Aekukjang, Daetonglyeongpyochang, Doklibjang, Daetonglyeongjang, and Daehanminkukjang in order. The number of independence patriots is increasing, but the grade is getting lower relatively. After 1990s, in a large percentage of cases, Aejokjang, Aekukjang and Daetonglyeongpyochang was invested. The reason is that investing decorations was completed for the meritorious deed of independence patriots before 1990s, and the standard for the grade was lowered. The number of independence patriots is predominantly from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domestic anti-Japanese activities,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and Manchuria, because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rmy raised in the cause of justice, and domestic anti-Japanese activities were national movement which many people participated in, and armys for national independence and organizations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conducted anti-japanese activities activities in Manchu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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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ㆍ중 항일기념관의 전시 내러티브와 동아시아 역사인식

          조은경(Cho, Eun-Kyung)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47

          이 연구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대표적인 항일기념관인 독립기념관과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중심으로 건립과정과 전시 내러티브를 비교검토하고 전시에서 재현된 동아시아 역사인식을 살펴보았다. 두 기념관은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동을 계기로 1987년 건립하였으며 항일투쟁사를 주제로 전시 내러티브가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일제의 침략만행을 고발하고 민족단결의 통합가치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성이 있었다. 동아시아 역사인식에 대한 검토 결과 두 기념관 모두 일제의 침략만행을 고발하고 있으나 오늘날 일본에 대한 인식은 차이가 있었다. 독립기념관은 일본의 역사왜곡과 영토분쟁을 규탄한데 반해 항전관은 중일우호관계를 강조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상호인식, 한중공동항일투쟁에 대한 인식은 충분치 않았다.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군), 일본군‘위안부' 등 공통된 전시주제가 확인되었지만 두 기념관 전체 전시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적고 역사해석에서 차이가 있었다. 두 기념관의 전시 내러티브를 구체적으로 검토해볼수록 양국 간 역사인식차가 더욱 커진 원인은 두 기념관 모두 각국에서 공식적으로 공유되는 집단기억을 전시 내러티브로 삼았기 때문이다. 역사인식의 주체와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전시되는 내용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과 중국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피해를 입었고 항일투쟁을 전개한 유사한 역사경험을 했기 때문에 역사인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두 기념관이 한국과 중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염두에 두어볼 때 기념관에서 확인되는 역사인식과 내러티브의 차이는 한·중 양국의 근현대사 인식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이 확대 강화되는 현재 독립기념관과 항전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두 기념관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일본의 역사왜곡을 실증적으로 반박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지속적인 교류로 한중 양국의 역사해석을 공유하고 상호 인식을 확대하여 한중 역사공조의 토대가 될 수 있도록 역할을 담당해야한다. 두 기념관의 활동을 통해 동아시아 공동의 역사인식을 형성하고 반침략 평화주의를 후손에게 전승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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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리석의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체계 초안(1942)」과 안창호의 대공주의

          장석흥(Jang, Seok-heung)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49

          이 글은 차리석이 작성한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체계 초안'(1942)을 통해 1920년대 후반 안창호가 주창한 대공주의의 실체를 규명한 것이다. ‘이론체계 초안'을 작성한 동암 차리석은 도산이 제창한 대공주의 정신을 적통으로 계승한 인사였다. 신민회 이래 20여 년을 넘게 동고동락한 동암과 도산은 평생의 동지였다. 동암은 1932년 도산이 피체될 때 도산의 역사를 최초의 기록으로 남긴 『도산선생약사』를 남겼고, 1938년 도산이 서거하자 「한국혁명영수 안창호선생 40혁명분투사략」을 통해 도산의 혁명사상이 어떠한 것인가를 세상에 밝힌 바 있었다. 동암의 서술은 1920년대 후반 도산이 민족대혁명당 건설을 제창할 때의 주장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비록 대공주의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도산 사상의 본질과 핵심을 짚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1942년 8월에는 ‘이론체계 초안'을 통해 한국독립당 당의의 이론을 체계화했는데 그 요체 역시 1926년 삼일당 연설에서 도산이 민족대혁명당을 제창 때와 1938년 「분투사략」때의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다만 한국독립당의 당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이제까지의 것보다 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이며 이론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것은 삼균주의의 논리와 달리 주권독립, 건설균등, 세계공영이 불변의 당의라 규정했다. 이는 곧 도산이 민족대혁명당을 주창할 때 내세운 정신과 주의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대공주의란 ‘민족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강구된 사상이자 주의였다. 도산의 대공주의는 국민대표회 때 창조파와 개조파의 논리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모아지고 있었으며, 명실공히 민족세력의 통합을 위해 새로운 방도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새 지평을 열어간 민족대당운동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무렵 도산에게는 민족세력을 포용하여 통합으로 이끌어내는 자체가 주의와 사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공주의의 본질이자 실천이었다. 도산의 대공주의는 1930년 한국독립당이 결성될 때 당의·당강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대공주의는 1938년 동암이 작성한 「분투사략」을 거쳐 1942년 ‘이론체계 초안'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ruth of Ahn Chang Ho's Daegongjueui(大公主義) in the late 1920s through The draft of theoretical system of Korean Independence Party's policy(1942) written by Cha Lee Seok. Dongam Cha Lee Seok who wrote to ‘The draft of theoretical system' was direct inherited Dosan's Daegongjueui. Since the establishment of New People's Association(1907), Dongam and Dosan have been great feeling of camaraderie for over 20 years. In the arrested Dosan in 1932, Dongam wrote 『Dosan's Summary History』what the book that Dosan's history at first. At Dosan died in 1938, He illuminated value what Dosan's revolutionary ideas through the book that 『The Korean revolutionary leader, Dosan Ahn Chang Ho 40 revolution vigorous history』. Dongam's description accorded with Dosan's opinion that he advocated the establishment of The Great National Party in the late 1920s. Even if the named Daegongjueui was not, Dongam's description accorded with the essence and point of Dosan's idea. He systematized theory of Korean Independence Party's policy through The draft of theoretical system in 1942. 8. Also The key point was accorded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Great National Party in 1926 and the idea of 『vigorous history』 in 1938. Simply speaking, It means more detailed systematizd process that theory of Korean Independence Party's policy. It defined Independent Sovereignty, Equality Construction, Public Management to the World was unchangeable party policy differentiate from Samgyunjueui (三均主義). Daegongjueui was Dosan's idea for achievement of national independence. Dosan's Daegongjueui combined the logic behind politics of The creationist and The Reconstructionist in The Representative of the Nation Conference. Also it suggested The New Way for national unification. Consequently, The Great National Party Movement achieved good results. Dosan's idea embraced national power be integrated. It was the essence and action of Daegongjueui. Advanced, Dosan's Daegongjueui was reflected in party policy and principle at the establishment of Korean Independence Party in 1930. And Daegongjueui suggested more detail in The draft of theoretical system of Korean Independence Party's policy in 1942 through 『vigorous history』by Dongam in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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