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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호국기념관 건립과 운영 활성화 방안 연구

          김현익 ( Kim Hyun Ik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21 역사학연구 Vol.81 No.-

          본 논고는 호남 최초 호국기념관인 호남호국기념관의 건립의의와 과정, 그리고 운영활성화 방안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국가수호 현충시설 기념관인 호남호국기념관이 건립됨으로써 지역적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호국 정신을 기억하는 기념의 공간을 호남지역에 조성하였다는 것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호남호국기념관을 건립할 당시, 국가보훈처는 사업운영방향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독립, 호국, 민주에 관한 내용을 상설전시에 구성하려 했으나 호남의 호국영웅들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내용을 추가하면서 재차 수정되었다. 국가수호 기념관이라는 기본 틀 안에서 6·25전쟁과 호국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전시는 현재 6·25전쟁의 과정, 호남의 호국영웅과 학도병, 의병의 활동, 그리고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등으로 구성되었다. 건립 진행 과정에서 자문회의는 “패널 위주의 전시 구성은 피로감을 줄 수 있다”는 자문을 제시하였고 전시주제와 관련한 문제들도 다방면 지적하였으나 아쉽게도 반영되지 않은 채 현재의 전시구성으로 확정되었다. 신생 기관인 호남호국기념관이 호국보훈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호남호국기념관은 운영 활성화 방안을 모색해야 하며, 지역적 특수성을 반영하여 전시를 기획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호국 관련 콘텐츠 제작과 기증운동 홍보작업을전개하고, 데이터베이스 조성을 위한 치밀한 아카이브 작업과 구술사연구를 진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장소와 시간의 제약 없이 이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한 호남 권역의 박물관 협력망을 구축한다면, 호남의 호국정신을 조명하고 소속 기관과의 교류를 통해 전문화된 프로그램을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탁운영이 종료된 이후 기념관의 안정화와 중장기적인 운영 활성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2020년 코로나 19로 인해 많은 기념관들이 휴관하면서 비대면 프로그램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학교 수업과 각종 행사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현재, 호남호국기념관에서 시행할 수 있는 비대면 프로그램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며,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앞장서 개척한다는 신념으로 운영 활성화 방안 등의 개발 과제를 완수해야 할 것이다. 국난극복의 역사와 호국정신 계승 속에 건립된 호남호국기념관이 앞으로 당면한 과제들을 해결하고, 국론통합과 지역주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에 이바지하는 기관으로 성장할지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This treatise focused on the significance and process of the construction of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the first Patriots Memorial Hall in Honam, and it was created focusing on the plan to activate the operation. The construction of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a memorial hall for National Protection Memorial facilities, enabled regional balance to be achieved, and the significance of the creation of a memorial space to remember the spirit of patriotism was created in the Honam region. At the time of the construction of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the Ministry of Patriots and Veterans Affairs tried to organize a permanent exhibition on independence, patriots, and democracy in accordance with the purpose of the project operation direction, but it was revised again with the addition of Honam’s patriots heros and the MND Agency for KIA Recovery·Identification, In the basic framework of the National Protection Memorial Hall, the focus was on the Korean War and patriots, and now the exhibition consisted of the process of the Korean War, Honam’s patriots hero, school soldiers, the activities of Righteous army and MND Agency for KIA Recovery·Identification. During the construction process, the advisory meeting offered advice that “a panel centered exhibition composition can cause fatigue” and pointed out various issues related to the exhibition theme, but unfortunately, it was confirmed as the current exhibition composition without being reflected. It is necessary to think about what direction to proceed the new institution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should take in order to realize the value of patriots veterans. To this end,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should seek a plan to activate the operation, plan exhibitions and develop educational programs reflecting regional specificity. In addition, patriots related content production and donation campaign promotion work is carried out, and detailed archive work and oral history research are conducted to create a database so that many people should be made to use It without restriction of place and time. Also, if the museum cooperation network in the Honam region is established, specialized programs can be created through exchanges with the affiliated institutions and examine Honam’s spirit of patriotism. Finally, after the consignment operation is finished, it is necessary to think about the stabilization of the memorial hall and plans to activate mid to long term operation. Many memorials are closed due to Covid-19 in 2020, further accelerating the development of non face to face programs. Now that school classes and various events are held online. the non face to face program that can be implemented at the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is concerned with which direction to proceed, with the belief of pioneering in the information age of the 21st century, it will be necessary to complete development tasks such as plan to activate the operation Honam Patriots Memorial Hall, built in the history of overcoming the national crisis and the succession of the spirit of patriotism, aims to pay attention to whether it will grow as an institution contributing to the consolidation of national opinions and the cultivation of the spirit of love for the country of local residents.

        • KCI등재

          호남절의록의 사료가치 검토(1)

          김동수 호남사학회 2011 역사학연구 Vol.44 No.-

          『호남절의록』은 호남 의향론(義鄕論)의 핵심자료 중의 하나로 널리 이용되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이용하여 여러 국난(國難)시기에 호남지방의 모의(募義)활동의 양상이나 경향 등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내는 연구들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의 기사 내용 중에는 사실과는 다른 잘못된 내용이 꽤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호남절의록』의 사료 가치를 검토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몇 가지가 있겠으나 필자는 현재의 여러 형편 등을 고려하여 우선 “『호남절의록』에서 다룬 이른바 5난사에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누락없이 수록되었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수행하였다. 방법으론 이른바 5난사중의 몇 사건에 관해 출판된 몇 자료들에 수록된 인물들과 『호남절의록』의 해당 사건의 수록인물들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 아울러 『호남절의록』의 서지적 부분의 문제로서 저자·출판년·참고 자료 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검토해 보았다. 『호남절의록』의 수록인물들과 여타 『절의록』류에 수록된 인물들을 비교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① 임진왜란 당시 장성 남문에서 창의한 사적을 다룬 『남문창의록』 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은 남문창의의 사적이 있는 인물의 30% 정도 밖에 정리하지 않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이괄의 난 때의 거의 사적을 정리한 『호남모의록』괴 비교하면 양서가 엇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양서 중에 서로 일치하는 인물은 100명에 지나지 않아 『호남절의록』은 거의의 사적이 있는 인물의 68%, 『호남모의록』은 61%를 정리, 수록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③ 1627년의 후금의 침입(정묘호란) 때의 창의사를 다룬 『정묘거의록』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에는 정묘년 거의 사적이 있는 사람들 총 수의 약 36%, 『정묘거의록』에는 약 76%의 비율로 입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호남절의록』과 『정묘거의록』 모두 不完하지만, 『호남절의록』이 특히 누락된 인물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④ 1636년의 청나라의 침입(병자호란) 때의 창의사를 다룬 자료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이흥발 등 5현의 의진(義陣)을 중심으로 정리한 『병자창의록』과, 은봉 안방준의 의진을 중심으로 정리한 『은봉창의록』이다. 이 두 자료의 수록 인물들과 『호남절의록』과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에 병자년의 거의 사적이 있는 인물로 입록된 인원은 병자거의 사적이 있는 총 인원의 30%정도에 불과한 수효가 된다. 『병자창의록』에는 총 인원의 62% 정도, 『은봉창의록』은 28% 정도가 정리되어 있는 셈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둘은 각기의 의진사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 때문에 이처럼 비교하여 수치를 제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검토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에는 『병자창의록』과 『은봉창의록』에 보이는 거의의 지휘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많이 누락되어 있다. 이처럼 지휘부의 많은 인물들이 누락된 까닭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이처럼 매우 단순하고 거칠게 『호남절의록』과 5난사관련 일부 자료에의 수록 인물들의 수효를 비교해 보는 작업을 수행한 결과 자료에 따라 비율에는 차이가 있으나 어쨌든 『호남절의록』에 매우 많은 누락이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인물들이 대거 누락되어 있는 것은 『호남절의록』의 자료수집과 정리가 매우 부족한 데서 ... Honamjeoluirok is widely used as one of primary historical materials for Honam as Righteous Region. in Korean. For example, the book is used to academically examine the historical progresses of righteous activities of Honam people in national crises, and their tendencies. However, it is suspected that the book carries within itself factual errors. There could be various ways of evaluating the book in terms of historical material. Granting this, I focus this research upon the recording of the figures involved in so-call Five National Crises. With this focus in mind, this research compares Honamjeoluirok with other materials in their recording of the people related in Five National Crises. Also, this research critically examines the issues such as the authorship, the publication date, and the bibliographies. The comparison of the recorded peoples shows the followings. First, Honamjeoluirok recorded some 30 percentage of people contained in Nammunchang’uirok(南門倡義錄) in their accounts of the righteous activities at Nammun of Jangseong(長城) region in Japan’s 1592 Invasion of Korea. Second, Honamjeoluirok contained the almost same number of the righteous people as Honammouirok(湖南募義錄) did in their accounts of the righteous activities in the time of Yi Kwal’s(李适) Revolt. In addition, while taking into account the fact that the people commonly recorded in the two books numbered 100, we can say that the former recorded 68 percentage of the righteous people while the latter recorded 61 percentage of the righteous people in the same Revolt. Third, more people were left off Honamjeoluirok than Jeongmyogeouirok(丁卯節義錄) in their accounts of Manchus’s 1627 Invasion of Korea in that the former contained 36 percentage of all the people who had the merits in the Invasion while the latter contained 76 percentage of the total number. Forth, Honamjeoluirok recorded only some 30 percentage of all the people who had the merits in Chinese Qing’s(淸) 1636 Invasion of Korea when it is compared, in terms of the number of the people included, with the two sources which recorded the history of righteous activities in the Invasion: the one, Byeongjachanguirok(丙子倡義錄) which centered on the activities of the Righteous Camp(義陣) of Yi Heung-bal(李興浡) and other leaders, recording 62 percentage of all the related people; the other, Eunbongchanguirok (隱峰倡義錄) which centered on the activities of An Bang-jun’s Righteous Camp, recording 28 percentage of them. Additionally, this research raises the question: why Honamjeoluirok left out many people, almost all of whom seem to have taken commanding posts according to the other two books. Admitting that just the numerical comparison carries within itself some methodological limitations, what is briefed above confirms the fact that Honamjeoluirok omitted not a few people worthy of notice in their activities. This implys that Honamjeoluirok was lacking in its collection and compilation of related materials, and at the same time that it does not have a great value in terms of historical material. Therefore, we need to take this implication into full account when we use Honamjeoluirok in the jobe of writing the history of the righteous activities in Honam.

        • KCI등재

          병자호란 시 申適道와 曺守誠의 『倡義日記』를 통해 본 영・호남의병

          유창규 호남사학회 2013 역사학연구 Vol.49 No.-

          The diary of Shin, Jeok-do and Jo, Su-seong is important and rare material to help us understand the guerrilla force during Byeongja-horan, the second war occurred from Ching’s invasion. Shin, Jeok-do and Jo, Su-seong were guerrilla leaders at that time. Their diary deal with various aspect of ui-byeong(Guerrilla force),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their guerrilla force. Their diary tell the reason and process why they created the guerrilla force, what were the components of the guerrilla force and its activity. Also, difference between ui-byeongs in Honam and Yongnam area. Shin’s diary is mainly about the situation at that time, also briefly depicting guerrilla component and training. Shin’s force was located in Ui-seong and quite massive. It’s main objective was to reach Namhansanseong(the refuge of Joseon King, In-jo) independently and secure it. The objective is partly the reason for their early dismissal right after their failure to secure it. Shin strongly opposed to the truce. His troop was completely relied on the Confucian theory of expulsing barbaric outlanders. Jo’s diary depicts the enlistment of guerrillas and supply, training content and troop movement in detail. Jo’s background as a minority gentry affected the whole process of his guerrilla force. He stressed training which didn’t rely on the other force. Because of his background, his troop didn’t get assistance from other troops. That is the reason why his troop had to be a minor force, regardless of the troop’s outstanding organization and personnel. Shin’s and Jo’s objective was not for coordinated battle. Shin’s troop swiftly moved toward Namhansanseong and Jo’s troop concentrated on preparation. Jo’s troop sometimes participated in the coordinated battle but its main focus was independent battle. Shin and Jo’s minor background as a Nam-in fraction was the reason why they couldn’t be the main guerrilla force. 인조 14년(1636) 청의 침략으로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 가까스로 남한산성으로 피한 인조는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였으며, 이에 호응하여 각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그 성과는 크지 않았다. 그나마 병자호란 시 의병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호남의병을 통해 알 수 있다. 호남의병에 관한 내용도 호남 전체를 아우르기보다는 각 진영 별로 남아 있기 때문에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호남의병에 비해 경상의병은 더 더욱 구체적인 내용이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 경상도 의성의 신적도와 전라도 화순의 조수성이 남긴 의병일지는 병자호란 시 의병의 구체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는 데 주요한 자료이다. 신적도와 조수성의 의병일지는 의병을 일으킨 시점에서부터 집으로 귀향하기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일지를 통하여 이들이 의병을 일으킨 과정과 이유, 의병에 참가한 구성원, 활동 등에 대한 대략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영남과 호남에서 일어난 의병진의 차이도 엿볼 수 있다. 신적도의 일지는 의병의 구성원과 훈련 등에 관한 내용은 소략하며, 주로 그가 접한 당시 상황이 중심이 되어 있다. 신적도의 의병진은 의성현에 국한되었지만 상당한 규모였으며, 관이나 다른 지역 의병과 협력하지 않고 인조가 있던 남한산성을 향해 나아하는 것이 일차적인 주요 목표였다. 왕이 있는 남한산성 보위가 주요한 기치가 된 셈이다. 화의 논의가 일어나고 의병이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하자 다른 지역 의병과 달리 곧 해산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지 않나 여겨진다. 신적도는 출정 도중에도 정국의 상황을 끊임없이 접하였으며, 오랑캐인 청과 화의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결국 그가 의병을 해산한 채 홀로 남한산성 들어간 것도 화의의 불가함을 피력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의 의병진은 성리학적 명분과 화이론에 철저하게 기대고 있었다. 조수성의 일지는 의병을 모집과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과정, 그리고 훈련 내용과 진격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서인 중심의 호남 정서와 서인으로부터 엄청난 수난을 당하였던 동인 가계 출신이라는 점이 조수성의 의병 거의 과정에 작용하였으며, 조수성은 독자적인 전투를 염두에 둔 군사훈련을 강조하였다. 자신의 집안 인물을 중심으로 의병 모집과 군수물자 조달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화순 지역 유생들의 도움이 보태져 구성된 조수성 의병진은 관이나 호남 지역 다른 의병진과 협력하는 데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른 호남의병과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움직였으며, 비록 화순현감의 협조를 받기는 하였지만 관으로부터 도움이나 정보를 듣지 못하여 마치 별동 부대인 것처럼 활동하였다. 조수성 의병진이 다른 호남의병에 비해 조직과 인원에서 뛰어났음에도 후대 병자호남의병의 주축으로 자리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요인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적도와 조수성의 의병은 다른 의병과 합세하여 적과 전투를 치르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지는 않았다. 신적도는 화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남한산성을 향해 신속하게 나아갔으며, 조수성은 적과 전투를 염두에 두고 준비 과정에 노력하였다. 다만 조수성은 호남을 아우르는 호남의병진과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비록 다른 호남의병과 협력하더라도 자신의 의병진이 갖는 독자적인 전투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호남의병은 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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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임란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

          하태규 ( Tae Gyu Ha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9 No.-

          임진왜란기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 송정현교수가 선구적 역할을 하였고, 1980년대부터 조원래 교수가 주도하여 왔다. 최근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연구자들이 많은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호남의 의병의 양상과 특성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렇지만 아직 몇가지 측면에서 검토되어야할 과제가 남아 있다고 보여진다. 임란기 호남의병의 개념과 실체를 좀 분명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를 위하여는 의병진을 형성하는 지도층의 계층 구조, 의병의 전투력의 근원이 되는 병력 구성원, 국가의 전란 대응책으로서 의병 장려정책과 통제책, 그에 따른 의병의 변질 문제 등을 좀 더 세심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호남의병의 봉기의 계기와 성격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임란 초기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은 호남근왕병의 출동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도성함락과 임금의 파천``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근왕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그러나 왜군의 호남 침공으로 위기에 직면하자 지역을 지키기 위한 향보활동을 하였고, 호남지방이 지켜진 뒤에는 주로 경상도로 출동하여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 대립적으로 파악했던 호남의병과 관군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 더 고찰이 필요하다. 호남 의병은 처음부터 수령이나 관군 장수들의 협력과 지원을 받으며 결성되었고, 그들이 전투에 임할 때도 서로 협력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또한, 임란기 호남의 관군이 엄존하고 구체적인 활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의병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도 불합리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호남의병의 전술·전략적 역할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사례 검토가 필요하다. 의병 관련 사료의 발굴과 함께, 현존하는 사료의 신빙성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그동안 연구자들이 활용하였던 사료 중에는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것이 상당히 많이 있다. 따라서 의병관련 사료에 대한 검증을 통하여 기왕의 연구성과도 비판적으로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In 1970s professor Song Jeong Hyun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study of the Honam righteous army during the Imjinwaeran and professor Jo Won Rae has led the study since. Recently quite a number of researchers has announced many products of their studies with a high profile about the Imjinwaeran. The facet and the feature of the Honam righteous army have been revealed in some degree through such studies. But it would seem that there are some assignment that should be reviewed in several ways. It is considered that there is necessity to stipulate more clearly the concept and the substance of the Honam righteous army in the Imjinwaeran. For this, it is necessary to examine more closely about the hierarchy in the leadership class of the Honam righteous army, the members of army as the root of combat power, army incentive policy and control plan as the countermeasure of war, and as a result, the problem from transmutation of the righteous army etc. It is necessary to reexamine the start and character about the uprising of the Honam righteous army. In the early Imjinwaeran the action of the righteous army in Honam started with Royal guards in Honam at nearly the same time and was founded for the loyalty to the king in national crisis of ‘being taken capital city and royal refuge from the palace’. However there was the crisis because of Japanese invasion of Honam in Korea. and the righteous army started to protect their region. After guarding Honam area, it mobilized to Gyungsang province and kept on protecting the nation. Moreover there is the necessity to study more about relation between the Honam righteous army and the government army that is regarded as adversarial one. The Honam righteous army had been organized with the local governors or the royal forces’ cooperation and support from the beginning and they attacked the enemy together in the battle. Also it is absurd to overemphasize only the role of the righteous army though there was the royal forces in Honam during the Imjinwaeran. Therefore it is definitely required to examine the concrete and empirical cases about the tactical and strategic role of Honam righteous army. It is needed to inspect authenticity of the present historical records with discovery of historical documents about the righteous army. There are many unclear ones among the previous historical records to be utilized by history researchers. So it is also necessary to review critically the foregone research achievement through the verification of the historical documents related with the righteous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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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호남절의록의 사료가치 검토(1)

          김동수 ( Dong Soo Kim ) 호남사학회(구-전남사학회) 2011 역사학연구 Vol.44 No.-

          호남절의록?은 호남 의향론(義鄕論)의 핵심자료 중의 하나로 널리 이용되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자료를 이용하여 여러 국난(國難)시기에 호남지방의 모의(募義)활동의 양상이나 경향 등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내는 연구들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의 기사 내용 중에는 사실과는 다른 잘못된 내용이 꽤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호남절의록의 사료 가치를 검토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몇 가지가 있겠으나 필자는 현재의 여러 형편 등을 고려하여 우선 "?호남절의록?에서 다룬 이른바 5난사에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누락없이 수록되었는가?"라는 문제에 초점을 두고 연구를 수행하였다. 방법으론 이른바 5난사중의 몇 사건에 관해 출판된 몇 자료들에 수록된 인물들과 ?호남절의록?의 해당 사건의 수록인물들을 서로 비교해 보았다. 아울러 ?호남절의록?의 서지적 부분의 문제로서 저자·출판년·참고 자료 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검토해 보았다. ?호남절의록?의 수록인물들과 여타 절의록?류에 수록된 인물들을 비교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① 임진왜란 당시 장성 남문에서 창의한 사적을 다룬 ?남문창의록? 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은 남문창의의 사적이 있는 인물의 30% 정도 밖에 정리하지 않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이괄의 난 때의 거의 사적을 정리한 ?호남모의록?괴 비교하면 양서가 엇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양서 중에 서로 일치하는 인물은 100명에 지나지 않아 ?호남절의록?은 거의의 사적이 있는 인물의 68%, ?호남모의록?은 61% 를 정리, 수록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③ 1627년의 후금의 침입(정묘호란) 때의 창의사를 다룬 ?정묘거의록?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에는 정묘년 거의 사적이 있는 사람들 총 수의 약36%, ?정묘거의록?에는 약 76%의 비율로 입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호남절의록?과 ?정묘거의록? 모두 不完하지만, ?호남절의록?이 특히 누락된 인물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④ 1636년의 청나라의 침입(병자호란) 때의 창의사를 다룬 자료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이흥발 등 5현의 의진(義陣)을 중심으로 정리한 ?병자창의록?과, 은봉 안방준의 의진을 중심으로 정리한 ?은봉창의록?이다. 이 두 자료의 수록 인물들과 ?호남절의록?과를 비교해 보면 ?호남절의록?에 병자년의 거의 사적이 있는 인물로 입록된 인원은 병자거의 사적이 있는 총 인원의 30%정도에 불과한 수효가 된다. ?병자창의록?에는 총 인원의 62% 정도, ?은봉창의록?은 28% 정도가 정리되어 있는 셈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둘은 각기의 의진사를 중심으로 정리한 것인 때문에 이처럼 비교하여 수치를 제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검토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에는 병자창의록과 ?은봉창의록?에 보이는 거의의 지휘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인물들이 많이 누락되어 있다. 이처럼 지휘부의 많은 인물들이 누락된 까닭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이처럼 매우 단순하고 거칠게 ?호남절의록?과 5난사관련 일부 자료에의 수록 인물들의 수효를 비교해 보는 작업을 수행한 결과 자료에 따라 비율에는 차이가 있으나 어쨌든 ?호남절의록?에 매우 많은 누락이 있음을 확인해 볼수 있었다. 인물들이 대거 누락되어 있는 것은 ?호남절의록?의 자료수집과 정리가 매우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호남절의록?이 나름대로의 편찬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인물들을 정선한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검토는 이 글에서는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수록인물에 많은 누락이 있다는 것은 곧 호남절의록 의사료가치에 큰 한계가 있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호남절의록?을 활용하여 호남지방의 의병 활동상을 정리하고자 할 때에는 이런 면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Honamjeoluirok is widely used as one of primary historical materials for Honam as Righteous Region. in Korean. For example, the book is used to academically examine the historical progresses of righteous activities of Honam people in national crises, and their tendencies. However, it is suspected that the book carries within itself factual errors. There could be various ways of evaluating the book in terms of historical material. Granting this, I focus this research upon the recording of the figures involved in so-call Five National Crises. With this focus in mind, this research compares Honamjeoluirok with other materials in their recording of the people related in Five National Crises. Also, this research critically examines the issues such as the authorship, the publication date, and the bibliographies. The comparison of the recorded peoples shows the followings. First, Honamjeoluirok recorded some 30 percentage of people contained in Nammunchang`uirok(南門倡義錄) in their accounts of the righteous activities at Nammun of Jangseong(長城) region in Japan`s 1592 Invasion of Korea. Second, Honamjeoluirok contained the almost same number of the righteous people as Honammouirok(湖南募義錄) did in their accounts of the righteous activities in the time of Yi Kwal`s(李适) Revolt. In addition, while taking into account the fact that the people commonly recorded in the two books numbered 100, we can say that the former recorded 68 percentage of the righteous people while the latter recorded 61 percentage of the righteous people in the same Revolt. Third, more people were left off Honamjeoluirok than Jeongmyogeouirok(丁卯節義錄) in their accounts of Manchus`s 1627 Invasion of Korea in that the former contained 36 percentage of all the people who had the merits in the Invasion while the latter contained 76 percentage of the total number. Forth, Honamjeoluirok recorded only some 30 percentage of all the people who had the merits in Chinese Qing`s(淸) 1636 Invasion of Korea when it is compared, in terms of the number of the people included, with the two sources which recorded the history of righteous activities in the Invasion: the one, Byeongjachanguirok(丙子倡義錄) which centered on the activities of the Righteous Camp(義陣) of Yi Heung-bal(李興?) and other leaders, recording 62 percentage of all the related people; the other, Eunbongchanguirok (隱峰倡義錄) which centered on the activities of An Bang-jun`s Righteous Camp, recording 28 percentage of them. Additionally, this research raises the question: why Honamjeoluirok left out many people, almost all of whom seem to have taken commanding posts according to the other two books. Admitting that just the numerical comparison carries within itself some methodological limitations, what is briefed above confirms the fact that Honamjeoluirok omitted not a few people worthy of notice in their activities. This implys that Honamjeoluirok was lacking in its collection and compilation of related materials, and at the same time that it does not have a great value in terms of historical material. Therefore, we need to take this implication into full account when we use Honamjeoluirok in the jobe of writing the history of the righteous activities in Ho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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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호남의병 연구의 현황과 과제

          홍영기 ( Hong Young-ki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6 역사학연구 Vol.64 No.-

          이 연구는 한말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 현황과 향후 과제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이를 위해 해방후 지금까지 발표된 연구논저를 중심으로 검토하였다. 특히,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의 경향을 살펴보았으며, 아울러 향후 과제를 제시하였다. 한말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그 이후 현재까지 약 70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박사학위논문도 2편이나 제출, 간행된바 있다. 물론 그 이전에는 독립운동사를 개관하는 과정에서 호남의병을 단편적으로 혹은 의병장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그후 자료집이 발굴, 간행되면서 1세대 연구자들이 1980년대 중반까지 호남의병 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1990년대에 이르러 2세대 연구자들이 연구와 자료집의 간행을 주도하였고, 2000년대에는 한층 심화된 연구로 진전되고 있다. 향후 과제로는 첫째 앞으로 호남의병 연구의 발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연구자를 시급히 양성해야 한다. 둘째, 중·소 규모의 의진과 그것을 주도한 인물에 대한 연구로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호남의병이 후기의병을 주도한 직접적 배경이나 다양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넷째, 호남의병의 생활사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 다섯째, 타 지역 의병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각 지역별 의병의 특징을 밝혀야 할 것이다. 나아가 가능하다면 다른 나라의 민족운동과도 비교함으로써 한말의병의 세계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This study reviewed the status and future tasks of research for Honam Righteous Armies(HRA) in the Great Han Empire. For this, several prior studies which published since independence were examined and looked into especially in the 1970s which this subject started. In addition, future directions are discussed. A research on HRA of the Great Han Empire began in earnest in the 1980s. Since then, about 70 papers have been released so far, including two doctoral thesis. In the process of overview the history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activities of the RA leaders were focused while HRA were described in small parts. After this, the biographies of RA were discovered and released, amounting to the first generation of researchers studying HRA in the mid 1980s. As a result, a second generation of research lead to the publication around the 1990s and deeper studies were broadened in the 2000s. Future tasks are as follows : first, new researchers urgently need to be trained for the developmental study on HRA in the future. Second, the study should intensify into small and medium sized groups for RA and their leaders. Third, direct background research on several factors of the third RA which took the main lead by HRA, needs to be found. Fourth, studying the life history of HRA is also necessary. Fifth, regional characteristics of RA should be found through comparative study with other regions. Futhermore, comparing RA of the Great Han Empire more with other countries` national movements will have a more meaning in a worlds historical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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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세기 말~16세기 중반 전라도 유배인의 활동과 교유양상

          이종범 ( Jong Bum Lee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1 역사학연구 Vol.41 No.-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반에 호남으로 방출된 유배객과 호남사림간의 교유 양상을 정리한 이 글은 훈구파의 탄압을 극복하려는 유배지의 역동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즉 호남의 유배객은 시대의 불리함을 딛고 후일을 기약하며 교육과 학문 연마에 힘썼던 것이다. 또한 당시 학문과 정치 활동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주던 호남의 지역 사림들과 각별한 교육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유배인의 활동과 교유는 호남사림이 학문과 정치 활동에 있어서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즉 15세기 말 최충성은 수기론을 중심으로 실천성리학과 도학적 정치사상을 표방하였고, 최부의 이달선은 훈구세력과 정면으로 대립하며 강도 높은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또한 16세기에도 호남사림들은 학문적 토대를 탄탄히 하며 훈구파와의 치열한 대결을 보여주었다. 중앙유배객은 이러한 호남사림들과 함께 시사 등을 통해 교유하고 소통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대표적인 을사사림으로 명망 높던 노수신도 호남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두드러진 학문적 성과를 내었다. 그 과정에서 김인후와의 교유는 유배와 피신생활로 깊은 정신적 상흔을 입은 노수신에게 심적으로 큰 위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학술적 성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는 ``유배 과정``에서 수반되는 유배객 및 지방학인의 학문 성취와 의식 전환이 ``중앙-주변``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쌍방향적으로 이루어지는 同行의 관계였음을 시사한다. This paper examines the aspect on social relationship between the exile in Honam district and the literati[士林] from the local region from the end of 15th century to late 16th century. Under unyielding conflict with Hungupa(勳舊波) along with a series of literati purges[士禍], social and academic activities of the exiled literati reflect the new academic tradition and dynamic movement of the ara. Through Muo Purge to Ulsa Purge, many literati were vanished or put to death on account of their renovative approaches on political matter which were against to Hungu and royal relatives. The exile who were transported to Honam district comforted themselves pursuing learning and training the upcoming generation, while staying on intimate terms with local officials and scholars who displayed considerable activities on their study and politics. The Honam literati already distinguish themselves since the late 15th century. Choi Chung-sung(崔忠成) explored the moral political ideology and pratical neo-confucianism and the literati from Honam district, like Choi Pu(崔溥) and Lee Dal-seong(李達善), confronted hungu with intentive political activities. The exile in this area founded comforting and meaningful with these Honam literati through constant communication. A noted Ulsasarim(乙巳士林) of reputation, No Soo-sin(盧守愼) also spend his years of exile in Honam which led his academic performance to its best. During that time, his relationship with Kim In-hoo(金麟厚) enabled his learning to improve in comfort. The relationship or impact, between the exile and local literati, shows that the academic achievement and changes in perception are not an unreciprocated donation, but an interactive process sharing their ideas, knowledge and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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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 역사에 대한 인식의 현황과 대책

          고석규 호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9 No.-

          This study intends to review the contemporary understanding of the history of ‘Honam’ and examines the ways to resolve problems associated with the distorted and negative recognition thereof. Different from the administrative district denominated as ‘Jeonrado (全羅道)’*, the region of ‘Honam’ as an emotionally defined zone was established in the 16thcentury.SincetheearlyageofJoseon(朝鮮) dynasty, lots of Confucian scholars who kept the fidelity to respective principles have been chosen this area; and the image of remoteness of this area placed distant from central government far away has been consolidated by the choice of this area as a place for exile. It has been understood that the inclination of people residing in this area ­ a hometown of justice ­ represented as the images of fidelity, criticism, and activism was attributable to the background of building the Honam Confucian scholars; and the other images of people associated with the remoteness of this place have been organized with emotions of alienation, resistance, and discontent. And, due to the abundance of natural resources from wide flat fields, the place also called a place of art and inherited many subject matters of traditional art ripened by the allowance and quality of life. In addition, the area of ‘Honam’ is also described in authorized official textbooks of Korean History for high school students as the hometown of traditional art and justice; and as a leader of democratization in contemporary history.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viewpoint of positive recognition of the people residing in the area of ‘Honam’ seeing history and that of the descriptions of the history in such text books. However, the distorted image and recognition of the area of ‘Honam’ is diffused throughout the whole contemporary society. What could be the cause of such a distorted recognition? The lack of the historical origin, the dependent and exclusive inclination of people, the regional status that had been remaining in historical periphery and the regionalism can be pointed out as the causes brought about such a problem of distorted image and recognition. The ways to resolve such problems were explored in this study; and the domestic politics was pointed out as one of the background of the diffusion of the frame of discrimination that exploited the regionalism. Thus the transformation of this political frame is necessary and important; and for this purpose, the importance of the issue of regional cooperation was presented for the balanced national development of Korea. Besides, the cultivation of regional competitiveness through enlightening the strength of people in ‘Honam’ area was suggested as the shortcut to the society free from such a distorted recognition. And finally, the necessity to promote the Observance of Public Order was proposed to improve the local image. It would take the people long time and efforts to be free from such a distorted understanding of ‘Honam’ area. Nevertheless, the regional cooperation would be an imperative choice for the people in this area to be living in the future of ‘Honam’ area fair and from regional discrimination. * The name originally denotes the province embracing the cities of Jeon-ju and Rah-ju placed south-west region of the Korean peninsula. 이 글은 호남 역사에 대한 인식의 현황들을 점검해 보고, 부정적으로 왜곡된 인식을 초래하는 문제의 소재를 살펴,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보는 시론적 연구이다. ‘전라도’라는 행정구역과는 달리 ‘호남’이란 정서적 구역은 16세기경에 정립된다. 조선 초 절의를 지키기 위해 사림(士林)들은 변방인 이곳을 택해 왔고, 또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유배지로 활용되면서 변방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다. 호남 사림의 형성으로부터는 절의ㆍ비판ㆍ실천정신 등 의향(義鄕)적 성향이 나타났고, 변방 이미지는 민중성과 겹치면서, 소외, 저항, 한 등의 정서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풍요로운 자연이 주는 삶의 질과 여유가 있어 예술적인 풍치를 보임으로써 예향(藝鄕)의 소재들을 남겼다. 한편, 검인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을 통해 배우는 공식적인 역사에서 호남은 예향과 의향, 그리고 현대사에서 민주화의 주역 등으로 나오고 있다. 호남인들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호남 역사 인식과 교과서로 대표되는 공식적인 역사 인식에서는 차이를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 호남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초래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 문제의 소재들로는 첫째, 역사의 뿌리가 없다는 점, 둘째, 의타적 성향, 셋째, 배타적인 성향, 넷째, 한국사의 변방에 머물렀다는 점, 그리고 다섯째, 지역주의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모색에서는 먼저 지역주의에 의한 차별 구도의 확산 배경에 정치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정치판의 구도를 바꾸는 일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 대한민국 전체의 발전을 위한 지역간 공조가 중요함을 피력하였다. 또 나아가 호남의 장점을 계발하여 지역경쟁력을 키우는 일이 현재의 왜곡된 인식을 벗어나는 첩경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지역 이미지 개선을 위한 ‘기초질서 지키기’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협력을 통해 이런 과제들을 해결하여야만 미래의 호남인들은 차별 없는 공정한 세상에서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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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란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

          하태규 호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9 No.-

          In 1970s professor Song Jeong Hyun played a leading role in the study of the Honam righteous army during the Imjinwaeran and professor Jo Won Rae has led the study since. Recently quite a number of researchers has announced many products of their studies with a high profile about the Imjinwaeran. The facet and the feature of the Honam righteous army have been revealed in some degree through such studies. But it would seem that there are some assignment that should be reviewed in several ways. It is considered that there is necessity to stipulate more clearly the concept and the substance of the Honam righteous army in the Imjinwaeran. For this, it is necessary to examine more closely about the hierarchy in the leadership class of the Honam righteous army, the members of army as the root of combat power, army incentive policy and control plan as the countermeasure of war, and as a result, the problem from transmutation of the righteous army etc. It is necessary to reexamine the start and character about the uprising of the Honam righteous army. In the early Imjinwaeran the action of the righteous army in Honam started with Royal guards in Honam at nearly the same time and was founded for the loyalty to the king in national crisis of ‘being taken capital city and royal refuge from the palace’. However there was the crisis because of Japanese invasion of Honam in Korea. and the righteous army started to protect their region. After guarding Honam area, it mobilized to Gyungsang province and kept on protecting the nation. Moreover there is the necessity to study more about relation between the Honam righteous army and the government army that is regarded as adversarial one. The Honam righteous army had been organized with the local governors or the royal forces’ cooperation and support from the beginning and they attacked the enemy together in the battle. Also it is absurd to overemphasize only the role of the righteous army though there was the royal forces in Honam during the Imjinwaeran. Therefore it is definitely required to examine the concrete and empirical cases about the tactical and strategic role of Honam righteous army. It is needed to inspect authenticity of the present historical records with discovery of historical documents about the righteous army. There are many unclear ones among the previous historical records to be utilized by history researchers. So it is also necessary to review critically the foregone research achievement through the verification of the historical documents related with the righteous army. 임진왜란기 호남의병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 송정현교수가 선구적 역할을 하였고, 1980년대부터 조원래 교수가 주도하여 왔다. 최근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연구자들이 많은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호남의 의병의 양상과 특성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렇지만 아직 몇가지 측면에서 검토되어야할 과제가 남아 있다고 보여진다. 임란기 호남의병의 개념과 실체를 좀 분명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를 위하여는 의병진을 형성하는 지도층의 계층 구조, 의병의 전투력의 근원이 되는 병력 구성원, 국가의 전란 대응책으로서 의병 장려정책과 통제책, 그에 따른 의병의 변질 문제 등을 좀 더 세심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호남의병의 봉기의 계기와 성격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임란 초기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은 호남근왕병의 출동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으며, ‘도성함락과 임금의 파천’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근왕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그러나 왜군의 호남 침공으로 위기에 직면하자 지역을 지키기 위한 향보활동을 하였고, 호남지방이 지켜진 뒤에는 주로 경상도로 출동하여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기왕의 연구에서 대립적으로 파악했던 호남의병과 관군의 관계에 대해서도 좀 더 고찰이 필요하다. 호남 의병은 처음부터 수령이나 관군 장수들의 협력과 지원을 받으며 결성되었고, 그들이 전투에 임할 때도 서로 협력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또한, 임란기 호남의 관군이 엄존하고 구체적인 활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의병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도 불합리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호남의병의 전술ㆍ전략적 역할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사례 검토가 필요하다. 의병 관련 사료의 발굴과 함께, 현존하는 사료의 신빙성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 그동안 연구자들이 활용하였던 사료 중에는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것이 상당히 많이 있다. 따라서 의병관련 사료에 대한 검증을 통하여 기왕의 연구성과도 비판적으로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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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 호남 역사에 대한 인식의 현황과 대책

          고석규 ( Seok Kyu Ko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9 No.-

          이 글은 호남 역사에 대한 인식의 현황들을 점검해 보고, 부정적으로 왜곡된 인식을 초래하는 문제의 소재를 살펴, 해결 방안을 모색해 보는 시론적 연구이다. ``전라도``라는 행정구역과는 달리 ``호남``이란 정서적 구역은 16세기경에 정립된다. 조선 초 절의를 지키기 위해 사림(士林)들은 변방인 이곳을 택해 왔고, 또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유배지로 활용되면서 변방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다. 호남 사림의 형성으로부터는 절의·비판·실천정신 등 의향(義鄕)적 성향이 나타났고, 변방 이미지는 민중성과 겹치면서, 소외, 저항, 한 등의 정서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풍요로운 자연이 주는 삶의 질과 여유가 있어 예술적인 풍치를 보임으로써 예향(藝鄕)의 소재들을 남겼다. 한편, 검인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을 통해 배우는 공식적인 역사에서 호남은 예향과 의향, 그리고 현대사에서 민주화의 주역 등으로 나오고 있다. 호남인들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호남 역사 인식과 교과서로 대표되는 공식적인 역사 인식에서는 차이를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 호남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을 초래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 문제의 소재들로는 첫째, 역사의 뿌리가 없다는 점, 둘째, 의타적 성향, 셋째, 배타적인 성향, 넷째, 한국사의 변방에 머물렀다는 점, 그리고 다섯째, 지역주의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모색에서는 먼저 지역주의에 의한 차별 구도의 확산 배경에 정치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정치판의 구도를 바꾸는 일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 대한민국 전체의 발전을 위한 지역간 공조가 중요함을 피력하였다. 또 나아가 호남의 장점을 계발하여 지역경쟁력을 키우는 일이 현재의 왜곡된 인식을 벗어나는 첩경임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지역 이미지 개선을 위한 ``기초질서 지키기``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협력을 통해 이런 과제들을 해결하여야만 미래의 호남인들은 차별 없는 공정한 세상에서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intends to review the contemporary understanding of history of ‘Honam’ and examines the ways to resolve problems associated with the distorted and negative recognition thereof. Different from the administrative district denominated as ‘Jeonrado 羅道)’*, the region of ‘Honam’ as an emotionally defined zone was established in the 16thcentury.SincetheearlyageofJoseon(朝鮮) dynasty, lots of Confucian scholars who kept the fidelity to respective principles have been chosen this area; and the image of remoteness of this area placed distant from central government far away has been consolidated the choice of this area as a place for exile. It has been understood that the inclination of people residing in area a hometown of justice represented as the images of fidelity, criticism, and activism was attributable to the background of building Honam Confucian scholars; and the other images of people associated with the remoteness of this place have been organized with emotions alienation, resistance, and discontent. And, due to the abundance of natural resources from wide flat fields, the place also called a place of art and inherited many subject matters traditional art ripened by the allowance and quality of life. In addition, the area of ‘Honam’ is also described in authorized official textbooks of Korean History for high school students as the hometown traditional art and justice; and as a leader of democratization contemporary history.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viewpoint positive recognition of the people residing in the area of ‘Honam’ seeing history and that of the descriptions of the history in such text books. However, the distorted image and recognition of the area of ‘Honam’ is diffused throughout the whole contemporary society. What could be the cause of such a distorted recognition? The lack of the historical origin, the dependent and exclusive inclination of people, the regional status that had been remaining in historical periphery and the regionalism can be pointed out as the causes brought about such a problem of distorted image and recognition. The ways to resolve such problems were explored in this study; and the domestic politics was pointed out as one of the background of the diffusion of the frame of discrimination that exploited the regionalism. Thus the transformation of this political frame is necessary and important; and for this purpose, the importance of the issue of regional cooperation was presented for the balanced national development of Korea. Besides, the cultivation of regional competitiveness through enlightening the strength of people in ‘Honam’ area was suggested as the shortcut to the society free from such a distorted recognition. And finally, the necessity to promote the Observance of Public Order was proposed to improve the local image. It would take the people long time and efforts to be free from such a distorted understanding of ‘Honam’ area. Nevertheless, the regional cooperation would be an imperative choice for the people in this area to be living in the future of ‘Honam’ area fair and from regional discri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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