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 좁혀본 항목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 주제분류
          • 발행연도
          • 작성언어
          • 저자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1919~1922년 황기환의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

          윤선자 한국근현대사학회 2016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0 No.78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Europe was organized mainly by the Paris Commission formed for the Paris Peace Conference held after the WWI. Hwang Gi-hwan moved to the US in his teens and joined the US army during WWI. After the war, he joined the Korean Representative of the Paris Peace Conference upon request by Kim Gyu-sik. However after 2 months, the chairman and the vice chairman died and he became the effective leader of the Korean Representative. After the Paris Peace Conference, the Korean Representative was reorganized and incorporated into the Paris Commission and Hwang Gi-hwan asked the Paris Commission for more staff but was rejected because they claimed financial difficulties and he was considered inappropriate by the Commission. Along with Paris, promotional activities were made also in England; however the finance was reduced and the staff were not recruited. Despite lack of manpower and financial support, Hwang Gi-hwan did his best in promoting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lthough he could not understand or speak French, he got help from a few Europeans to publish promotional materials for Europeans; he made complaints to the European newspapers that published false reports regarding Korea and interviewed regarding the horrible situation in Korea and the independence movement. For Koreans who did not understand promotional activities in Europe, he published Our Work in Europe. Also he negotiated with French and British government to help Korean workers and students in Europe and helped Korean students study in Europe. For 2 years, Hwang Gi-hwan was the effective director of the Paris Commission and the London office and he went to the US when Lee Seung-man asked him to join when Lee was preparing for the Washington conference. The fact that Hwang Gi-hwan went to the US suggests that the US Commission did not take promotional activities in Europe seriously. The US Commission accepted the President Lee’s decision and the promotional activities in Europe were compromised for propaganda in the States. After the Washington Conference, Hwang Gi-hwan made diplomatic and promotional effort both in the US and England for about a year before his death. It was short but passionat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at Hwang Gi-hwan did for the Paris Commission in Europe. 유럽에서 한국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개최된 파리강화회의를 위해조직된 파리위원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0대 후반에 미국으로 건너가 제1차세계대전에 미군 지원병으로 참전하였던 황기환은 전쟁이 끝난 후 김규식의 요청을받고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가 참여한지 두 달여 만에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유고로 한국대표부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후 한국대표부는 파리위원부로 개편 설립되었고, 황기환은 파리위원부에서 함께 일할 사람을 요청하였지만 재정곤란,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이유 등으로거절당하였다. 파리와 더불어 영국에서도 홍보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재정은 축소되었고 인원도 보충되지 않았다. 인적·물적 궁핍 속에서도 황기환은 한국독립을 위한 홍보활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였지만, 몇몇 유럽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유럽인 대상 홍보물을 발행하고, 한국 관련 誤報를 수록한 유럽신문들에 항의하고, 한국의 참상과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인터뷰를 하였다. 유럽에서의 홍보활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구주의 우리 사업도 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럽에 온 한국인 노동자들과 유학생을 돕기 위해 프랑스·영국 정부와 교섭하였고, 학생들의 구미행과 유럽에서의 수학을 도왔다. 2년여 동안 파리위원부와 런던사무소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황기환은 워싱톤회의를 준비하고있던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의 미국행은 구미위원부에서 對유럽홍보활동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구미위원부는 대통령 이승만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유럽홍보활동은 미국에서의 선전활동을 위해 희생되었다. 워싱톤회의 후 황기환은 약 1년 동안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외교홍보활동을 계속하다 사망하였다. 짧지만 유럽에서 전개되었던 파리위원부의홍보활동은 황기환의 열렬한 한국독립운동이었다.

        • KCI등재

          세노 우마쿠마(瀨野馬熊)의 編史활동과 한국사 인식

          홍순영 한국근현대사학회 2018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0 No.85

          The present study was aimed to examine the Korean history study and awareness of Seno Umakuma (1874~1935), which had played a critical role in distorting Korean history for 19 years (1917~1935). In addition, it attempted to identify his influence over the historiography of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after analyzing his study and perspective of Korean history. To justify the invasion and colonial rule, Japan paid a keen attention to establishing ideology. This attempt began with the occupation by force and a number of colonial historians were involved in this work. Seno Umakuma was one of them and known to have advocated factionalism. Seno had particular career background: he had worked in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Taiwan, the Inquiry Section of Mansun’s History and Geography, and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fter he came to Korea, he worked in Jungchuwon and the Compilation Association of Chosun History. Seno had published a number of books and most of them are about Korean history, mainly focusing on Goryeo(Korean dynasty, 918-1392) and Chosun, of which the latter take the majority of his publications. He often described Korea(Chosun) as a nation of non-independence and often suffering from external invasions and pervasive with toadyism. He unjustly ignored the independence of Korean history, emphasizing only heteronomy. And he described that Korean politics is the history of party strife and asserted factionalism. He extended the historical scope of Korean factionalism, applying it back to Goryeo Dynasty. The way he understood Korean history falsely found the cause of the fall of Chosun inside and tried to justify Japanese colonial rule. 본 논문은 1917년부터 1935년까지 한국의 역사 왜곡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세노 우마쿠마(瀨野馬熊, 1874~1935)의 한국사 연구와 인식을 검토하였다. 일제는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식민 지배의 당위성을 마련하기 위해 이데올로기의 정립에 주력하였다. 이 작업은 강점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수많은 식민사학자들이 투입되었다. 세노도 여기에 참여해 당파성론을 주창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세노는 타이완 총독부와 만선역사지리조사부,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타이완 총독부에서 문서 편찬 및 土匪討伐史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주도하는 만선역사지리조사부에 들어가 일제의 침략 행위를 돕는 조사 사업에 참여하였다. 내한한 후에는 중추원,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하였고, 다양한 관찬사서의 집필을 담당하며 한국사 왜곡작업의 실무진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한국사 중에서도 고려와 조선시대를 주로 다루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조선사편수회 참여를 기준으로 연구 주제가 대외관계사에서 정치사로 확대된다. 그는 특히 한국의 정치를 당쟁사로 서술하고 당파성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쟁의 기원을 사화로 확립시켰고 고려시대까지 당파성론의 적용 범위를 확대시켰다. 이러한 그의 한국사 인식은 조선 멸망의 원인을 조선 내부에서 찾아 식민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그가 참여한 각종 저술과 관찬사서에 반영되어 확산되었고 한국사 왜곡의 지침이 되었다.

        • KCI등재

          1947년 미군정 문교부 고문들의 미국유학 청원 활동과 결과

          윤종문(YOON Jong-mun) 한국근현대사학회 2021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 No.96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1947년 미군정 요원들은 한국인들의 미국 유학·연수의 필요성을 다시금 들고나왔다. 이들은 향후 한국이 독립국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경제를재건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전문인력 양성 방안으로 미국 유학을 꼽았다. 이들은 일군의 한국인들을 미국 고등교육기관에 입학 시켜 미래 한국 교육의 ‘중핵적 교원’으로 길러내야 한다고 했다. 주한미군 수뇌들은 미국 유학 사업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연방정부 한국 담당자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원조 방안이 담겨져 있는 ‘한국 특별교부금법’을 만들었다. 문교부 고문들은 미국 고등교육기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입학 청원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미국유학 사업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미국고등교육기관 관계자들이 제안한 장학금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이들은 여비와생활비를 제공할 수 없다는 뜻을 보내왔다. 달러를 구할 수 없었던 미군정 당국자들은 유학에 필요한 비용을 연방정부의 원조를 받아 해결하고자 했지만, 연방의회는전략적 가치가 낮았던 한국에 원조하는 것을 꺼렸다. 1946년 상황이 다시 일어난것이다. 미군정은 일부 인사들을 미국연수생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록펠러재단의 지원을받아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장 윤일선, 미군정 보건후생국 간호과장 홍옥순 등을미국 의료기관에서 연수시킬 수 있었다. 미주한인 김창순이 회장으로 있던 한미문화협회의 재정지원으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이춘녕을 미국에 보냈다. 하지만이러한 연수 사업은 한계가 따랐다. 미군정은 연수생 파견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도할 수 없었다. 연수생 파견 분야와 인원은 지원재단의 성격과 요구에 달려 있었다. 미국연수를 마친 인사들은 배운 것을 한국 교육에 적용하고 후학들을 길러내는효과도 낳았지만, 연수생 자체가 극소수였던 만큼 효과도 미비한 것이었다. 미국유학을 통해 전문인력을 양성하여 교육 및 경제를 재건하겠다는 이들의 구상은 1948년7월까지 현실화될 수 없었다. USAMGIK, Deportment of education Advisors had raised again the necessity to despatch Korean students to the U.S. higher educational institution in 1947. They concluded that economic and education reconstruction were essential to maintain independent state for Korea. To reconstruct Korea economic and education was essential to training professional group. They choose to admission Korean students to the U.S. educational institution as its methods. They thought that Korean student studying in U.S. was the only way to bring up ‘the small nucleus of trained Korean professors’ for economic and educational rehabilitation. USAFIK headquarters had gone to obtain education aid in U.S.. General Hodge discussed the Korea economic and education reconstruction aid problem with the person in charge of U.S. Government. They had made ‘the Special Korean Legislation’. USAMGIK Advisors had petitioned to admission Korean student to U.S. higher educational institution, but tjey had not came true this project. The scope of scholarship proposed by the U.S. higher educational institution was limited. They clearly expressed not to provide travel and living expenses for Korean students. They had couldn’t get the dollar. They solved with U.S. Government foreign aid, but U.S. Government hesitated to support Korea economic and educational reconstruction aid. They judged that the Korean had low strategic value. The situation was reenacted in 1946. USAMGIK sent some Korean to the U.S.. Yun Il Sun, the dean of medical school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Hong Oak Soon, the head of Nursing Department at USAMGIK went to U.S. sponsored by the Rockefeller foundation. They were trained at U.S. medical institution and medical college in short time. But this trainee program was limited. USAMGIK were unable to play any role in selection process. The field and number of dispatching trainees had depended on the needs of supporting foundation. Those who trained in the U.S. contributed to the Korea educational reconstruction and to bring up junior scholars, but the effect of training in U.S. was extremely insignificant. USAMGIK’s idea of sending Korean students in the U.S. had couldn’t be realized in 1948.

        • KCI등재

          미군정 公報部 정치교육과의 활동과 구성원의 성격

          김동선(KIM Dong-sun) 한국근현대사학회 2021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 No.97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7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1945년 9월 수립된 미군정은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의 내용과 선거에 대한 교육을 시행하였다. 그중 핵심적 역할을 했던 기관 중 하나가 공보부 여론국에 속한 정치교육과였다. 정치교육과는 출판물과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 미군정의 입장을 홍보하고,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를 알리고 교육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맡은 정치교육과의 핵심 구성원은 대략 2인의 미국인 고문과 3인의 한국인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모두 감리교인이며, 반공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 한국인들은 모두 서북지역 출신으로 정치교육과 책임자이던 최봉윤과 고문한치진은 안창호와도 일정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개인의 인권과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였고, 독점자본과 자유방임주의 경제체제에 부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관계자들의 경우 일제강점기 경험(독립운동, 친일)과 교육의 경험으로 미국인 관계자들과는 달리 민족주의를 긍정하고 국가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정치인식과 배경은 정치교육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치교육과의 주된 임무는 주로 언론매체의 통제와 민주주의 교육 및 정책홍보였다. 이 출판물의 내용은 미군정의 정치교육방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인 관계자들의 입장도 반영되어 있었다. 라디오 방송 원고에는 소위 ‘민주주의 국가주의’라는 것을 애국주의의 하나로 규정하였다. 이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경계하는 미군정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또한 정치교육과에서 발간한 잡지 『민주조선』에는 중간파 지식인들의 정치적 입장을 담은 글이 상당수 게재되었다. 배성룡, 엄우룡 등의 중간파 지식인들은 남한만의 총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토로하였다. 이러한 기조는 1948년 무렵 상당 수의 중간파 지식인들이 월북을 감행하면서 바뀌었다. 이런 경향 또한 정치교육과 내 한국인 관계자들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정치교육과에서 홍보하고 교육한 ‘민주주의’는 미국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미군정하에서 한국에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의 본질을 알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이시기의 민주주의 교육은 이승만정권 하의 일민주의를 강조하는 공민교육이나 도의교육보다는 훨씬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시기의 민주주의 도입이 이후의 한국의 민주화를 가능케한 씨앗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Established in September 1945,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provided education on the contents of democracy and elections for Koreans. One of the organizations that played a key role was the Political Education Section belonging to the public opinion bureau of the 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 The Education Section was in charge of promoting the position of the U.S. Army military government through publications and radio, and informing and educating Koreans about democracy. The core members of the Political Education Section in charge of these duties are roughly identified as two American advisers and three Korean. They were all Methodist and anti-communist. The Korean advisers are from northwest Korea. Among them, Choi Bong-yoon and Han Chi-jin had a certain relationship with Ahn Chang-ho. They emphasized individual human rights and equality of opportunity, and had a negative stance on monopolistic capital and laissez-faire economic systems. However, Korean officials also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nationalism and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nation, unlike American officials, due to their experience in Japanese colonial era(independence movement, pro-Japanese) and education. Their political consciousness and background also influenced their activities in political education. The main tasks of the Political Education Section were mainly control of the media, democratic education, and policy promotion. The content of the publication was consistent with the political education direction of the U.S. Army military government. However, the position of Korean officials was also reflected. The radio manuscript defines what it calls ‘democratic nationalism’ as one of patriotism. This was different from the position of the U.S. Army military government, which is wary of nationalism or nationalism. In addition, many articles containing the political positions of moderate intellectuals were published in the magazine Democratic Chosun, published by the Department of Political Education. The moderate intellectuals such as Bae Sung-ryong and Eom Woo-ryong expressed negative opinions about the general elections in South Korea alone. This changed when a considerable number of moderate intellectuals defected to North Korea around 1948. This tendency also seems to reflect the position of Korean officials of the Political Education Section. Democracy, promoted and educated by the Political Education Section, was based on the needs of the United States. Also, democracy has not been realized in Korea under the U.S. Army military government domination. However, it is meaningful in that it has informed Koreans of the nature of democracy. In addition, democratic education at this time is much more democratic than civil education or provincial education, which emphasizes Ilminism under the Syngman Rhee administration. Therefore, it is believed that the introduction of democracy at this time could have been the seed that enabled the democratization of Korea later.

        • KCI등재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의 파견 배경과 성격

          류동연 한국근현대사학회 2020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0 No.95

          This study is on the background and character of the dispatch of KNALU. The background of the KNALU dispatch can be found in the activities of the S.O.E India Mission during World War II and the external activities of the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However, due to the checks of the Kuomintang of China and the Korea Independent Party and the indifference of S.O.E., the KNALU centered on the Korean Nationalist Revolutionary Party could not be dispatched. Nevertheless, the Korean Nationalist Revolutionary Party managed and operated the KNALU, and based on this, it wanted to take the leading position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Thus, the KNALU can be interpreted as a “diplomatic” activity with the Korean Nationalist Revolutionary Party and the Allied Powers during World War II. And it can be said that the Korean Nationalist Revolutionary Party wanted to take an advantageous position in international relations and make the situation of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post-liberation political situation in their favor. 이 글은 한국광복군의 대표적 활동으로 평가받는 인면전구공작대의 파견 배경과성격을 살핀 글이다. 인면전구공작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S.O.E India Mission 의 활동과 민혁당을 중심으로 하는 재중국 한인독립운동 좌파세력의 대외 활동에서파견 배경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영국 S.O.E India Mission의 I.F.B.U.에 소속되어대적선전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공작대 파견은 민혁당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과 한독당의 견제, 영국 측의 무관심 등으로 민혁당 중심의 공작대는 파견되지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혁당은 공작대를 관리ㆍ운영하며 자신들의 세력을확대하고, 독립운동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인면전구공작대는 제2차 세계대전기 민혁당과 연합국과의 ‘외교’ 활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민혁당이 국제관계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여 한국독립운동과 해방 후 정국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나가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KCI등재

          ‘포스트-식민/제국’의 아이러니와 네이션의 자기 변주-제2차 세계대전 후 한일 가족법 제정과 여성의 위치-

          김은경 한국근현대사학회 2017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0 No.82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flect on democracy from 'East Asia' and 'everyday life' perspectives by examining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family laws of Korea and Japan. For that, it reviewed how the family law was enacted and the organization of legislation in Korea and in Japan, and analyzed complicity with systems of modern nation-state. In addition, gender politics were explored.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 Korea enacted a new family law, but the law failed to free itself from coloniality. That is the reason why the family system was recognized as 'tradition' in Korea. In Japan, strong demands of the GHQ for reformation enabled democracy and constitutional principles to have a powerful influence over the family law. The context of post-colony/empire brought about ironic results in the family laws of Korea and Japan. Second, a few juridical bureaucrats performed a significant role in Korea, while legal experts and each section of the GHQ took a pivotal role in Japan. Also there was a channel through which demands of female societies could be considered in Japan. Next, the family laws of Korea and Japan had similar features to one another. In Japan, 'tradition' and 'good morals' became stable supports for maintaining notional family. In Korea, too, traditional discourses equating family and nation had intertwined with democratic discourses insisting on 'modernization of family.' The family laws of Korea and Japan were involving gender discrimination. Last, the family laws of Korea and Japan rejected the despotic power of a head in family and adopted some elements of democracy and egalitarianism. The laws, however, normalized the families of heterosexual marriage that were supported by family headship and family registration systems. Then such demands of female societies as for women's legal rights and equality reinforced the discourses on 'normal family,' which gave way to a paradox of returning back to a 'normal nation.' After all, the family laws of Korea and Japan could not innovate the pre-war legacy but became a foundation for the modern nation-state again, which made themselves lie under the suspicion of a self-variation of modern nation. 이 글은 한국과 일본의 가족법 제정과정을 검토하고 그 차이와 공통점을 분석하여 ‘동아시아’와 ‘일상’의 지평에서 민주주의를 성찰하려는 시도이다. 한국과 일본의 가족법 제정과정과 입법구도를 살펴보고 그것이 근대국민국가 시스템과 어떻게 공모했는지 탐색했다. 또 그것의 젠더 정치적 함의를 고찰했다.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국은 독립국가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는 가운데 가족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구법의 식민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호주제를 ‘전통’으로 간주해 유지했다. 일본에서는 연합국최고사령부가 주도한 ‘전후 개혁’의 과정에서 가족법개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헌법정신과 민주주의가 강력한 담론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포스트-식민/제국’의 맥락은 한일 가족법에서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았다. 둘째, 한국에서는 소수의 사법 관료가 가족법 제정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컸다. 일본에서는 연합국최고사령부 각 섹션과 법률 전문가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 여성계의 요구가 적극 반영될 수 있는 통로가 있었다. 셋째, 한일 가족법은 차이에 못지않게 유사점이 많았다. 일본은 가제도를 폐지했지만, 호적법과 성씨제도가 가제도를 대신했다. 관념적인 가를 유지하는 데 ‘전통’과 ‘순풍미속’은 굳건한 지지대가 되었다. 한국에서도 민족 정체성의 근거를 가족에서 찾으려는 전통 담론과, ‘가족의 근대화’를 내세운 민주주의 담론이 서로 경합하면서도 교묘하게 착종되어 있었다. 이전에 비해 ‘민주화된’ 한국과 일본의 새 가족법은 ‘전통’과 ‘민주주의’가 착종된 채 젠더차별을 내장하고 있었다. 넷째, 한일 가족법은 전제적인 호주 권력을 부정하며 일부 자유주의적․평등주의적 요소를 도입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성애 중심 부부가족을 ‘정상화’했다. 호주제 또는 호적제도가 이를 뒷받침했다. 이에 여성의 법적 권리 보장과 평등을 요구하는 여성계의 요구가 ‘정상 가족’ 담론을 강화하고 이것이 다시 ‘정상 국가’로 회귀하는 역설이 빚어졌다. 결국 한일 가족법은 이전 시기의 유산을 혁신하지 못하고 다시 근대국민국가의 토대가 됨으로써 근대 네이션의 자기변주라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 KCI등재

          3·1운동기 일제의 한국인 자위단체 조직과 운용

          이양희 한국근현대사학회 2017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0 No.83

          Beginning in Daegu on April 6, the Korean Self-Defense Corps were founded in more than 138 counties by August. The Japanese government assessed that the self-defense corps was “definitely effective” in suppressing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appeasing the public. The Korean Self Defense-Corps, under the support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in Korea, was organized by the provincial ministers and local military-police forces, to be used as a tool of placating the Korean people. The formation of the self-defense corps, however, was not without problems, because there was a great repulsion among the Korean public about making a pledge to the corps or signing the document. Some Koreans publicly argued against signing into the self-defense corps, concerned that it would be used by the Japanese to legitimize the removal of sovereignty from the Korean people. Despite the turbulence, the self-defense corps organizations expanded nationwide in Korea under the active support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한국인 자위단은 4월 6일 대구를 시작으로 8월까지 적어도 138郡이 넘는 지역에서 조직되었다. 각 道에서는 자위단 본부를 도청이나 군청에 두고 각 면에 지부를 두어 道-郡-面 체계를 갖추었다. 도장관의 내훈이나 지시에 의해 面을 단위로 한국인 자위단을 조직하고 해당 지역 경찰서장의 감독·지휘하에 두었다. 자위단 규칙은 상호경계, 치안확보, 자위단 명칭방법, 본부 및 지부 설치방법 및 장소, 자격조건을 제시하고, 군청 및 경무관헌의 지휘·감독, 密告 의무, 서명날인을 명시했다. 아울러 관청의 지시와 명령에 절대 복종하도록 규정했다. 일제측은 자위단이 만세운동 진압 및 회유하는 데 ‘확실한 효력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한국인 자위단은 조선총독부의 지원 아래 도장관과 지역 내 군경에 의해 조직되어 한국인에 대한 회유기관으로 이용되었다. 한국인 자위단 조직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서약이나 날인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경상남도, 경상북도, 충청북도 등에서는 국권피탈을 합리화시키는 데 이용될 것을 우려해 서명 거부를 주장하는 한국인들이 있었다. 서약과 날인은 한국인 간에 분열을 조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자위단 조직은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전국으로 확장되었다.

        • KCI등재

          근대개혁기 한국인의 터키관

          크란 스벨 한국근현대사학회 2017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0 No.80

          식민지화의 위기 속에서 한국의 식자층은 터키의 국내외 위기 상황을 보도했다. 다른 나라들의 위기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즉 근대개혁기 한국인의터키에 대한 이해를 통해 당시 한국인이 가졌던 위기의식과 타개책을 확인할 수있을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거울에 비추어야만자기 모습을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글은 터키라는 멀리 떨어진 나라를거울로 삼아 근대개혁기 한국의 모습을 비추어보고자 한다. 이는 한국인이 볼 수없는 한국사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This thesis examines publications during the Gabo and Gwangmu reforms, as they directly relate to Turkey. Although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Turkey dates as far back as The Three Kingdoms period, Koreans began to take a considerable interest in Turkey starting from the late 19th century.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as Korea’s socio-political problems arose, Korean intellectuals began to observe other countries, looking to gain further insight on how to better protect, recover and develop their nation’s identity. Thus, because Koreans viewed Turkey as a country facing often relatable internal and external conflicts, they would go on to analyze Turkey in detail.

        • KCI등재

          갑오·광무개혁기 근대 우체제도 운용과 의의

          신동일 한국근현대사학회 2020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0 No.94

          This study focuses on the way postal system was established and the roles it played in Korea’s state-led reformation during the Gabo and Gwangmu reforms (1894~1905). The modern Postal System, which was invented in Britain in 1837, was a gignatic work accompanied by high-level central organization and administrative technology that standardized postal networks across the whole country. Through this, the Korean government not only centralized the existing lands and relevant finances which belonged to traditional relay station, but also standardized local administration to construct a modern state centered on the emperor. Based on this, joining the Universal Postal Union provided an international legitimacy for Korea to show off its administrative sovereignty and compete with Japanese post offices in its own country. Securing sovereignty in the postal area was also a guarantee of the development of the vernacular press. The government’s institutional and material support for newspapers not only enabled Korean press to compete with Japanese newspapers to produce their own knowledge about Korean, but also formed readers and listeners all over the country, creating a foundation for them to connect with the state. Even after Korea lost her telecommunications sovereignty in 1905, these experiences made it easier for Koreans to accept the newly produced National history that broke away from relations with China. The modern postal system of the Gabo and Gwangmu reform periods was already transforming Korea into a modern nation-state. 이 연구는 갑오·광무개혁기 한국의 국가주도 개혁에서 우체제도가 구축된 방식과수행한 역할들에 초점을 맞춘다. 1837년 영국에서 창안된 근대 우체제도는 전국의우체망을 표준화하는 고도의 중앙조직과 행정기술을 동반하는 작업이었다. 한국정부는 이를 통해 기존의 역토를 전국의 역과 분리해 관련 재정을 중앙으로 귀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방행정을 표준화하여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국가 건설에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만국우체연합 가입은 한국이 행정주권을과시하고, 자국 내 일본 우체국과 경쟁할 국제법적 기반을 제공했다. 우체영역에서의주권확보는 당시 한국 언론의 발전을 담보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부의 신문에 대한제도적, 물질적 지원은 한국 신문이 일본 신문과 경쟁하여 민족에 대한 지식을스스로 생산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독자와 청자들을 형성하여 이들이 국가와 연결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한국인들이통신주권을 상실한 이후에도 언론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탈피해 새로 생산한 민족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하는 것이었다. 갑오·광무시기 근대 우체제도는 이미한국을 근대민족국가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 KCI등재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결성과 항일공연예술 활동

          오은아 한국근현대사학회 2018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0 No.87

          The Youths Mission Corps was an anti-Japan propagation group formed early February 1939 in Liuzhou, China on the premise of integration of youths on the Korea Liberation Front and resolved in October of the same year. The Youths Mission Corps was in charge of the a wide spectrum of activities from basic propagation operations to fund raising concerts for injured Chinese soldiers, commemoration performance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Day and other shows. The performance of the group not only let the Chinese become aware of the necessity and appropriateness of the Korea and China union but also allowed them to sympathize and experience the union through <The Nightat the Border>. The anti-Japanese performing arts activities by the Youths Mission Corps, later on, had positive impact on forming friendly relationship with China. When the news widely broke out on the newspaper that the corps donated its entire profit for the Chinese on their anti-Japan movement really engraved the status of corps as an international support organization to the Chinese.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1939년 2월 초 중국 유주에서 결성되어 삼일절 기념 공연, 위로금 모금공연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중국 측에 한중연대의 필요성 을 인식시킨 것은 물론 ‘한중연합군의 연대투쟁’을 주제로 한 연극 <국경의 밤>을 통해 중국인 관객들에게 진정한 한중연대를 몸소 공감하고 체감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아울러 일제에 맞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연극 무대는 당장에 군사적 대일항전을 수행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대원들의 아쉬움을 달래주고 사기를 진작시켜주었다. 더욱이 항일을 소재로 한 공연 외에도 한국 고유의 정서와 특색이 담긴 공연을 선보여 중국인 관객들 앞에서 한국인으로서 정체성과 자부심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청년공작대의 항일공연예술 활동은 중국 측과의 우호적인 관계 형성에도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공연 이후 수익금 전액을 중국의 대일항전을 위해 기부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 측의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내고 나아가 중국의 항전을돕는 국제지원단체로서 지위와 위상을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었다. 이후 청년공작대는 군사특파단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거쳐 한국광복군으로연결된다. 또한 이들이 전개한 항일공연예술 활동은 전지공작대로 계승되어 전문성과 예술성이 더해진 항일예술극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청년공작대는 한국광복군 창설의 실질적인 인적기반을 구축하였고, 한국독립운동전선에서 효과적인항일투쟁방략이 정립하게 되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맨 위로 스크롤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