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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후기 홍건적의 침입과 安祐의 군사활동

        박진훈(Park, Jin Hoon) 한국사학회 2018 史學硏究 Vol.0 No.130

        元의 세력 약화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흔들리자, 중국에서 일어난 농민반란군인 홍건적이 2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다. 원 간섭기 동안에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더불어 왜구의 침입 및 동북면 지역 여진족에 대한 대비 문제로 군사력을 분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공민왕 8년 홍건적의 1차 침입 때 고려는 처음부터 불리한 입장에서 전투를 치루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서북지역에서 홍건적을 교란 내지는 저지하는 동안 고려군을 집결시키는 군사정책을 폈다. 이러한 임무를 맡은 사람이 안우였다. 안우는 철주 및 淸江에서 홍건적을 여러 차례 방어하며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이에 홍건적은 청강을 우회하여 안우군의 뒤쪽으로 돌아가 매복을 한 다음 안우군을 유인하였으며, 안우군은 결국 매복작전에 걸려 대패하였다. 안우군은 정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고려군의 집결이 완료되지 못하였으므로 고려군은 서경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서경은 홍건적에게 함락되었다. 서경 함락 이후 고려군은 군대를 집결시켜 홍건적을 공격하였다. 이때 안우를 비롯한 고려군 지휘부의 솔선수범과 희생정신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결국 4만 명이 침입한 홍건적은 300명 만이 살아서 돌아가는 대패를 당하였다. 홍건적의 2차 침입은 공민왕 10년에 있었다. 1차 침입 때 고려가 직면했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인데다가 1차 침입 때 입은 피해가 복구되지 않았으므로, 1차 침입 때보다 상황은 더욱 불리하였다. 더구나 홍건적은 1차 침입 때의 5배인 20만 명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청야전술을 구사하기로 결정하고, 서해도의 절령에 목책을 설치하고 백성과 양곡을 이곳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는 서경을 포함한 서북면 전역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차 침입 때와 마찬가지로 안우가 지휘하는 고려군이 홍건적의 침입로에서 유격 전술을 펴도록 하였다. 홍건적은 1차 침입 때 그들이 저지당한 곳을 피해 2차 침입 때는 내륙 쪽의 삭주 방면으로 침입하여 귀주를 거쳐 무주 쪽으로 공격하였다. 안우의 고려군은 홍건적이 침입하는 경로상의 여러 곳에서 유격전을 펴 많은 성과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안주에서 패배를 당하고, 절령으로 후퇴하였다. 절령에 집결한 고려군을 홍건적은 야밤에 1만 명으로 기습하였다. 기습을 당한 고려군은 대패하였고, 홍건적을 막기 힘들다고 판단한 고려 정부는 수도 개경을 포기하고 피난하였다. 이후 고려는 20만 명을 개경 근처에 집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홍건적의 방비 상태를 정탐하였다. 적의 주력이 모여 있는 숭인문 쪽의 방어가 허술한 것을 파악하고 이 곳을 집중 공격하여 승기를 잡았다. 결국 홍건적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홍건적 잔당 10만 명 정도만이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고려군이 홍건적에 비해 중과부족이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홍건적과의 1~2차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배한 이유를 살펴보면, 경계의 실패를 틈탄 적의 기습 공격이나 우회 기동 등을 파악하지 못해 매복에 걸린 것이 패배의 주요 요인인 경우가 있었다. 반면 고려군이 승리한 이유도 홍건적의 허실을 탐지하고 이를 이용한 작전계획을 세워 계획대로 실행한 것이 결정적인 경우가 있었다. 즉 매복, 기습 등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이 승패를 결정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안우를 비롯한 고려군 지휘관들의 솔선수범이나 희생정신, 용맹함 등도 전투 승리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 KCI등재

        고려 말 안우 장군의 군사활동과 ‘삼원수’ 살해 사건의 당대 인식

        홍영의(Hong, Young Eui) 역사실학회 2019 역사와실학 Vol.69 No.-

        안우 장군의 군사활동과 ‘삼원수’ 살해 사건의 당대 평가이 글에서는 안우와 관련한 자료가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고려사』등의 남은 기록을 통해 홍건적 1,2차 침입의 격퇴 과정을 정리하고자 한다. 나아가 ‘삼원수(三元帥)’ 살해와 당대 평가를 통해 안우 등 삼원수의 살해와 관련한 후대 인식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우선 그의 가계를『탐진안씨족보』등을 통해 추적하고, 홍건적의 격퇴와 관련한 군사활동, 김용의 ‘삼원수’ 살해 사건과 당대 평가는『고려사』·『고려사절요』와 조선시대의 개인 문집자료 등을 이용하여 그 대략을 기술하고자 한다. 안우(安祐, ?∼1362)는 무장(武將)으로써 공민왕으로부터 1359년과 1360년에 두 번의 공신 책봉을 받았다. 안우는 공민왕의 측근으로 1352년 최영(崔塋)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1354년 원의 남정군(南征軍) 참가요청으로 고울부(高鬱府) 전투에서 참여하였다. 또 원과 고려의 사신(使臣)을 지내기도 했다. 1359년(공민왕 9)과 1361년의 홍건적 1,2차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1362년(공민왕 11) 1월 경성 수복이 끝나자 마자, 1362년(공민왕 11) 1월에 김용(金鏞)의 거짓 왕명을 믿어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왕명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이방실·김득배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이 ‘삼원수 살해 사건은 김용의 무고(誣告)에 의한 것이지만, 1391년(공양왕 3) 방사량(房士良)의 요청에 의해 복권이 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 사가들에 의해 ‘공민왕이 시킨 것이 아니라고 기필(期必)하기도 어렵다’는 평을 듣게 된다. 결국, 총병관 정세운 및 삼원수의 죽음은 대규모 홍건적 침입이라는 큰 변란을 당하여 삼원수의 군사력 관장, 전공과 관련한 국왕의 의구심, 그리고 조정 중신과 최고위 장수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함께 얽혀 발생한 사건으로 보인다. 특히 먼저 총병관이 되었던 김용과 뒤에 총병관이 된 정세운이 왕의 총애를 다투다가 김용의 간계에 말려 안우·김득배·이방실 세 장수가 정세운을 살해하고 그 결과 세 장수가 처형당한 것으로 정리되지만 그 내면에는 지휘체계의 문제가 작용하고 있었다. 김용에 의해 주도된 이 ‘삼원수’ 살해사건과 ‘홍왕사의 난’의 결과는 반원개혁을 주도하며, 공민왕의 국왕권을 지탱해주던 국왕 측근세력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제거 소멸됨으로써 왕권의 약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즉 2차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정세운과 안우·김득배·이방실 등이 흥왕사의 난의 주모자인 김용의 음모에 의하여 살해된 데 이어 왕의 외척으로 최대 후원자였던 홍언박 마저 살해됨으로써 측근세력이 와해된 반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던 최영 등 무장세력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공민왕의 왕위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필연적으로 군사들을 지휘하여 전쟁을 수행하였던 장수들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교서에 “천하가 평안할 때에는 재상에 주목하고, 천하가 위태로울 때에는 장사에 주목한다”는 말을 한 것도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 이 무렵에 최영이 최고의 실권자로 대두하고, 이성계, 임견미, 우선 등이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또한 불안정한 정치상황 속에서 왕은 측근에 있는 환관이나 간신을 보다 미덥게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An Wu was awarded the title of meritorious retainer from King Gongmin in 1359 and 1360 as a warrior. As prisoners of the king, he suppressed the revolt of Joilsin(趙日新) with Choi Young and others in 1352, and participated in the battle of Goulbu(高鬱府) at the request of the namjeong army(南征軍) of the Yuan Dynasty. He also visited the Yuan Dynasty twice as an ambassador. He defeated the Red Turban Bandits(紅巾賊) in 1359 and 1361. However, after KaeKyeong recaptured in January 1362, he murdered the chongbyeong-gwan(摠兵官), Jeong se-un(鄭世雲), according to Kim Yong(金鏞)’s false king’s orders, but he was responsible for this and was killed with Lee bang-sil(李芳實) and Kim deug-bae(金得培). This is called Three Marshals’s murder case. After that, it was revealed that their killing was caused by Kim Yong’s false accusation, they were reinstated at the request of Ban gsa-lyang(房士良). In the late Joseon Dynasty, Yu gye(兪棨, 1607∼1664) said in the Yeosajegang(麗史提綱) that it is difficult to say that he was not ordered by King Kongmin. After all, the death of Jeong se-un and three marshals’s murder case was not unrelated to the domestic political situation at the time of the invasion of a large scale Red Turban Bandits. When they were in control of the military, it was a mixed incident of King Gongmin’s doubts after defeating the Red Turban Bandits, confrontation and conflict between the government’s cabinet and the highest-ranking marshal. While former chongbyeong-gwan Kim Yong and his successor Jeong se-un were fighting against Gongmin’s favor, Although Jeong se-un was killed by An Wu, Lee bang-sil and Kim deug-bae as Kim Yong’s trick, but eventually the three marshals were removed. This indicates that the problem of command system was acting on the inside.

      • KCI등재

        1361년 홍건적의 침입과 공민왕의 충청지역 피난정치

        이정란(Lee, Jung Ran) 역사문화학회 2018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21 No.1

        공민왕은 홍건적의 2차 침입으로 파천을 단행하여 약 1년 3개월 동안의 행재소 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공민왕 일행은 여러 곳을 전전하며 피난생활을 하였다. 공민왕 일행의 파천지로 흔히 안동이 잘 알려져 있으나, 공민왕은 안동보다 상주와 청주에서 더 오랜 기간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국정의 중요한 개혁을 단행하였고 원과의 외교에도 변화를 모색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공민왕의 몽진 지역으로 안동만이 주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홍건적 격퇴에 있어 안동이 갖고 있던 상징성 때문에 불거진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안동행궁 시절에 홍건적을 격퇴하였던 관계로, 홍건적의 침입하면 공민왕의 몽진과 안동이 자동적으로 연상되었던 것이다. 사실 공민왕은 상주와 청주에 체류하면서 피폐해진 민심을 복구하고 국정을 정상궤도로 되돌리기 위해 상당히 중요한 행보를 이어갔다. 우선, 홍건적이 개경에서 물러난 직후 分司體制를 도입하여 개경과의 연락망을 복구하여 還都에 대비하였다. 또한 행재소에서 정규의 사신을 파견하고 과거까지 設行함으로써 행궁의 건재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했다. 즉, 공민왕은 청주행궁에서 원나라에 보내는 정규사신을 파견하였다. 뿐만 아니라 使行에 부수되는 拜表儀禮까지 거행함으로써 고려 조정이 정상궤도에 올라섰음을 내외에 과시했다. 아울러 국자감시 · 예부시 · 승보시를 세 달 동안 연달아 설행하여 국정이 평소와 다르지 않게 운영되고 있음을 과시했다. 나아가 환도 이후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크고 작은 제도의 개선은 물론 관제의 개혁까지 단행했다. 관제의 개혁은 상주행궁에서 실시되었다. 선행연구에 따르면 이때의 개혁은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 잡고 원나라의 불신을 무마하여 군사적 제휴까지 도모하기 위해 실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행재소에서의 개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대외만큼이나 대내적 요인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수도를 쉽게 외적에게 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감행함으로써 천하의 비웃음꺼리가 되었던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분명 국내적 요인이 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공민왕은 아마도 관제개혁을 통해 환도 후에 행할 국정의 방향을 천명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혼란한 정국을 틈타 권력을 장악하려는 친원파의 준동을 제어하기 위해 그와 같은 개혁을 단행했다고 생각된다. Invasion by Red Turban Bandits into Goryeo led King Gongmin to evacuate and stay in Chungcheong Region for about one year and three months. During the period, King Gongmin and his company wandered about in Andong, Sangju, and Cheongju. While staying at Sangju and Cheongju, he took considerably important steps. First, right after Red Turban Bandits retreated from Gaegyeong, he prepared for returning to the capital by establishing a network of contacts with Gaegyeong. In addition, he dispatched official envoys to Yuan Dynasty and even administered state examinations in his travel palace, showing off the fact that his power remained undiminished. In other words, King Gongmin sent official envoys to Yuan Dynasty in his temporary palace in Cheongju. Besides, he held magnificent ceremonies to teach manners in accompaniment with the sending of envoys, thereby informing in and out of the nation that the Royal Court of Goryeo was running back the right track. Moreover, he held three important state examinations in a row for three months, boasting of the fact that his government was under normal operation as usual. Further, for smooth operation of his government after returning to the capital, he carried out innovation of government-related laws as well as small and large improvement upon institutions. Innovation of government-related laws was done in Sangju. According to previous research, such innovation was conducted in order to tighten the discipline that had relaxed, and cover up distrust by Yuan Dynasty and achieve military partnership with the neighboring country. Nevertheless, his series of reforms were made in his travel palace, which meant that they were much influenced by domestic factors. Given that he not only gave his capital to the foreign enemy with ease but also fled from his palace, which made him subject to universal ridicule, domestic factors may have acted as important variables. Probably by proclaiming the direction of state affairs after returning to the capital through government-led reforms, King Gongmin aimed for settling the public sentiment and controlling the pro-Yuan group who attempted to seize power amid chaotic political situation.

      • KCI등재

        高麗 恭愍王代 중엽의 정치적 변동

        민현구 진단학회 2009 진단학보 Vol.- No.107

        This study is to better understand King Kongmin's reign which has been known as significant transition period. During his reign, four years from tenth year(1361) to fourteenth year has not been well studied. However, this intermediate period of his reign must have played bringing roles between the early stage and later stage of his reformative politics. So I tried to focus on this particular time frame which covers from 1361 when Koryŏ court escaped its capital to avoid Red Turban Bandit to 1365 when he finally tried to resume his reform by empowering buddhist monk Sinton to lead initiatives of reform politics. By thoroughly scrutinizing major political events, I tried to discover how those political turmoils in this particular time frame resulted in the following later part of King Kongmin's reform policy after 1365. Firstly, murder of three chief commander who enormously contributed to Koryŏ's victory over those Red Turban Bandits, was deliberately schemed liquidation of military commanders by King Kongmin who worried if they would threaten his kingship. However, this paradoxically undermined his kingship. Secondly, treason of King Kongmin's merit subject Kim Yong which happened at Hŭngwang Buddhist temple in a complicated situation where King Kongmin struggled to free himself from Yuan pressure and domestic enemies, seriously damaged his kingship. He barely saved his life, but his political supporter groups were practically dissolved along with the murder of one of his most significant supporter, Hong OnPak who was a prime minister. And accordingly, without many political options, King Kongmin could not help depending on those military commanders who made contribution to defend Koryŏ court from Red Turban Bandits, even though he once killed those three chief commanders before worrying if they would threaten his power. Thirdly, in this situation, those military commanders began rapidly taking central positions of Koryŏ court as commissioners of Chŏngpang which took control of affairs of personnel and as inner ministers. Fourthly, this situation created phenomenal transitions in Koryŏ court politics. When it comes to political promotion, priority was given to military contribution. Many high level temporary posts were established to accommodate many of those military commanders. And Chŏngpang which used to take control of affairs of personnel under Koryŏ Military Regime, was restored. Furthermore, rise of those powerful military commanders eventually resulted in expansion of the size of highest council called Todang and emergence of inner ministers. All these, does not belong to normal mode of Koryŏ monarchical politics. After all, this situation caused anomalies of political practice and enfeeblement of King Kongmin's authorities. And the following King Kongmin's drastic political measure of empowering buddhist monk Sinton for his reform policies was actually a contingency plan to take political initiatives in this hostile political surroundings. 고려 恭愍王代는 역사상 두드러진 변혁기요 전환기였는데, 그것을 대변하는 두 가지 사실이 공민왕 5년(1356)에 단행된 反元的 改革政治와 공민왕 14년(1365)에 辛旽을 등용해 다시금 추진된 새로운 개혁정치였다. 그런데, 위의 두 개혁정치 사이에는 9년간의 격차가 개재하는 바, 특히 그 가운데 후반의 수년간은 홍건적난 끝에 三元帥가 살해되고, 뒤이어 興王寺 정변이 발생하고, 또한 德興君을 앞세운 元軍의 침입이 감행되는 등 복잡하고 중대한 사건으로 점철되면서 역사의 파고가 높았던 시기이다. 이 논문은 바로 그 시기, 즉 고려가 제2차 홍건적 침입을 당하자 공민왕 10년 11월 개경을 버리고 福州(安東)로 수도를 옮기는 때로부터 공민왕 14년 5월 辛旽이 등용되기 이전까지 약 3년 6개월 동안의 복잡한 정치적 변동을 추적한 것인데, 이로써 변혁기, 전환기로서의 공민왕대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紅巾賊亂이 마무리될 무렵에 발생한 總兵官 鄭世雲 및 安祐․金得培․李芳實 등 三元帥의 살해사건에 주목하여 검토한 결과 그것을 공민왕이 개입된 정치적 숙청으로 파악하였다. 大軍을 지휘해 승전을 이룩함으로써 위세를 떨치게 된 3원수에 대한 왕의 정치적 부담이 숙청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지만, 그들의 숙청은 곧 공민왕의 세력기반을 축소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져 그의 국정운영의 폭을 축소시켰다. 앞서 추진된 공민왕의 反元的 개혁정치에 큰 불만을 품었던 元은 그 동안 고려가 홍건적 침입으로 타격을 입은 것을 기화로 삼아 공민왕의 폐립을 획책하였는데, 이러한 외압에 편승해 왕의 총신인 金鏞이 開京 환도 직후에 興王寺 변란을 일으킴으로써 고려 정치는 치명타를 입었다. 공민왕은 겨우 弑害를 모면하였으나 首相 洪彦博이 죽음을 당한 이 변란으로 공민왕의 세력기반은 와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변란의 진압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새로운 武將勢力이 대두하였는데, 뒤이어 元의 공민왕 폐립 획책에 따라 德興君을 앞세운 원군이 침입하자 그에 항전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그들 무장세력의 움직임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렇게 대두한 무장세력이 새롭게 정치적 지배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들은 거의 대부분 홍건적난 때 활약한 무공자이기도 했다. 이들 무장세력은 무인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고, 대다수 안정된 유력 가문 출신으로 蔭敍나 成衆愛馬選補의 길을 따라 入仕하였으며, 공민왕의 신임이 컸다. 그들은 政房提調나 內相으로서 정치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흥왕사 정변 이후 신돈 등용 이전까지 약 2년간 빠른 속도로 승진하였다. 이와 같은 무장세력의 대두는 고려의 국정운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軍功중심, 武官위주의 인사행정과 그에 따른 政房의 復設, 또한 賞軍政으로서의 添設職 설치와 官職者의 증대, 그리고 都堂의 확대와 內相의 출현 등이 그 중심 내용인데, 이것은 모두 새로운 시대적 여건에 따른 것이었으나 대개 상궤에서 벗어난 것으로 국정운영체계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궁극적으로 국왕 권능의 약화를 초래했다. 그리하여 공민왕 13년 말엽에는 무장세력이 주도하는 강력한 都堂 앞에 국왕이 무기력하게 서 있는 형국이 연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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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州 拱北樓 應製詩의 創作背景과 詩意識

        윤호진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21 남명학연구 Vol.71 No.-

        이 글은 고려 공민왕 때에 청주의 拱北樓에서 지어진 應製詩의 創作 背景과 그 시의식을 살펴본 것이다. 이 글에서는 홍건적의 침입과 안동으로의 피란, 그리고 홍건적을 물리치고 난 뒤 송경으로 귀환하는 중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바탕으로 응제시가 지어지게 된 배경과 그 시의 성격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특히 송경으로 가는 중간에 청주의 공북루에 들러 權漢功의 시에 차운하게된 까닭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리하였는데, 청주의 공북루에서 권한공의 시를 차운하여 응제시를 짓도록 한 배경에는 親元政策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이들 시에 담겨 있는 내용과 작자들이 시에서 보여주는 詩意識으로는 무엇이 있는가를 탐구하였는데,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친원정책의 공표와 자괴감의 표출이다. 공민왕은 본래 원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하다고 판단하여 원나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홍건적의 내침을 계기로 원나라와의 화친이 절실함을 인지하고 원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몇몇 일을 하였는데, 공북루에서 권한공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짓도록 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공민왕을 시종하여 청주에까지 갔던 신료들은 공민왕의 이러한 정책의 변화에 대해 한편으로는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부끄럽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응제시 가운데에는 그 자리에서 시를 짓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시에 표출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둘째는 歷史中興의 宣言과 自矜心의 顯示이다. 첫 번째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공민왕이 청주의 공북루에 올라 누대에 걸려 있는 권한공 시에 차운하라고 한 것은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보다는 나라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조치였고, 이를 기반으로 고려를 중흥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시에 읊은 것이다. 마치 이전에 현종이 청주에 이르러 고려를 재건하였던 선례를 노래한 것도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 때 시 작자들의 마음은 앞서 자괴감을 읊었던 것과는 달리 매우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려의 중흥과 재건을 소망하고 자부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 많다. 세 번째는 기쁜 感懷의 表現과 즐거움의 流露이다. 이 때는 아직 홍건적이 완전히 진압된 것은 아니었지만 홍건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안동 피난길에서 개경으로 가는 도중이었고, 또 산천과 풍속이 아름다운 공북루에 올라 그 경치를 감상하고 시를 지으려 하니, 무엇보다 마음이 가볍고 즐거웠음을 시로 읊은 것이다. 공북루 주변의 평활한 들판과 그 들판을 흐르는 무심천과 무심천 위에 떠가는 하늘의 구름, 그리고 저 멀리 공북루를 감싸고 서 있는 여러 산봉우리들이 아름답기 그지 없었고, 이들을 바라보고 감상하는 즐거운 마음이 응제시의 여러 작품 가운데 많이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This thesis examines the creation background and the spirit of Eungjesi, which was written in Gongbuklu in Cheongju during the reign of King Gongmin of Goryeo. In this thesis, I explored the background and the nature of the poem, which contains the backdrop of Honggeonjeok's invasion of Andong, and what happened on the way back to Songgyeong after defeating Honggeonjeok. In particular, I focused on figuring out why he emulated Kwonhangong's poem in Gongbuklu on the way to Songgyeong and concluded that it was out of pro-Yuan policies. Based on this background, I analyzed the contents of these poems and what the authors showed in the poems, which can be summarized in three ways: The first is the announcement of pro-Yuan policies and the expression of shame. King Gongmin recognized the desperate need for friendship with the Yuan Dynasty in the wake of Honggeonjeok's invasion and did some things to win favor with the Yuan Dynasty. One of them was to emulate Kwonhangong's poem in Gongbuklu. It seems that the believers who followed King Gongmin to Cheongju were both positive about the change in King Gongmin's policy and ashamed on the other hand. Therefore, in the middle of the poem, he expressed his sense of self-same. The second is the declaration of historical revival and the realization of self-esteem. It's the opposite of the first one. King Gongmin's request to climb to Gongbukru to mimic Kwonhangong's poem was a step to escape the crisis of the country rather than to swear allegiance to the emperor of the Yuan Dynasty, and based on this, he recited it in a poem. At this time, unlike the previous ones, the writers of the poems looked very positively at the world and sang many songs wishing and proud of the revival and reconstruction of Goryeo. The third is the expression of joy and pleasure. At this time, Honggeonjeok was not completely suppressed, but he was on his way to Gaegyeong from Andong, and when he climbed up Gongbuklu where the landscape of the mountains and springs is extraordinary, he appreciated the scenery with pleasure and made poems by heart. Among the many works of Eungje Poem, the smooth fields around Gongbuklu, the clouds of the sky floating over Musimcheon Stream, and the various mountain peaks surrounding Gongbuklu can be s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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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공민왕대의 공신 책봉

        김회윤 한국중세사학회 2022 한국중세사연구 Vol.- No.71

        King Gongmin of Goryeo collectively appointed 415 meritorious people as contributors. And 62 people were given names of contributors. The first group was 37 contributors who followed the Yuan Dynasty in the first year of King Gongmin’s reign. King Gongmin was worried about changing the throne from the beginning of his throne. He appointed his subjects who knew well about the Yuan Dynasty’s imperial family and government as meritorious subjects. It was to strengthen their power. The second group is the 20 people who executed Gi-cheol in the 8th year of King Gongmin. King Gongmin tried to stabilize relations with Yuan after executing Ki-cheol, who was close to Yuan Dynasty. Because of this, the leaders were not rewarded. In the 8th year of King Gongmin’s reign, when Honggeonjeok tried to invade, King Gongmin appointed them as contributors. It was because they were forming a military command. The third and fourth are 358 people who defeated the suppression of Heungwangsa Temple and the invasion of the first and second Hong Geon-jeok in the 12th year of King Gongmin. When the Yuan decided to depose King Gongmin, the purpose was to secure loyal forces. The 62 contributing names are organized into five types.(Linked to the above four groups, Contributed to overcoming a national crisis, Show loyalty, Doing something special, Powerful man.) 고려 공민왕은 재위기간 중 네 차례에 걸쳐 10개 공적 415명을 집단으로 공신책봉하였고, 62명에게 개별 공신호를 하사하였다. 이는 개국공신 2천 여 명을 책봉하였던 태조대 다음 가는 규모였다. 본고는 공민왕대의 공신책봉의 전반적인 추이와 의미를 종합적으로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첫 번째 집단책봉은 공민왕 원년 6월의 연저수종공신 37명이다. 공민왕은 즉위 전 원에 10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수종신료들로부터 정치적·경제적 기반과 교육·통역·시종·신변보호 등의 도움을 받았다. 즉위 후 충성심과 현저한 공적을 보인 수종신료들에게 관직과 공신의 지위를 내렸다. 논공행상이기도 하였지만, 실제적으론 원이 언제든지 결정할 수 있는 폐위의 위협으로부터 왕위를 지켜줄 측근세력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연저수종공신은 조일신의 독자세력화로 인해 정치세력화하지 못하였고, 조일신이 공민왕 원년에 난을 일으켜 위상이 실추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공민왕에게 충성하여 재위기간 내내 중요한 지지기반이 되었다. 두 번째 집단책봉은 공민왕 8년 6월의 주기철공신 20명이다. 조일신의 난 이후 공민왕은 피해를 입은 기씨일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기에 공민왕 2년에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원의 황태자가 되면서 기씨일족과 친원세력은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원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공민왕은 계획을 세워 재위 5년 5월에 기씨일족과 친원세력을 숙청하였다. 이 일로 대원관계가 악화되자 공민왕은 기철 숙청을 주도하였던 홍언박을 경질하는 등의 저자세를 통해 양국관계를 안정시켰다. 이러한 기조가 계속되면서 기철 숙청 공로는 인정되기 어려웠다. 공민왕 8년 6월에 홍건적의 침입이 가시화되자 주기철공신이 책봉되었다. 기철 숙청에 나섰던 김득배 등이 주요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충성심을 제고하고 사기를 진작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공민왕 12년 윤3월에 행해진 흥왕사의 난 진압과 2차 홍건적 침입을 방어한 288명에 대한 집단책봉이다. 공민왕에게 재위 12년 초는 어려운 시기였다. 원이 폐위를 결정하였고, 2차 홍건적 침입을 격퇴한 직후 명망있는 삼원수를 숙청하여 조정 안팎의 불만여론이 고조된 상태였다. 더욱이 흥왕사의 난이 발생하여 왕권은 실추되었고, 일련의 사태 중에 다수의 측근세력들이 사망하였다. 왕위를 지키기 위해 공민왕은 자신에게 적극 충성할 세력이 급하게 필요하여 대규모로 공신을 책봉하였다. 8개월 뒤, 1차 홍건적 침입 유공자 70명을 대상으로 하는 네 번째 집단책봉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공민왕이 하사한 개별 공신호는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정리된다. 집단책봉과 연계한 경우,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공로가 있는 경우, 충성심과 절의를 보인 경우, 특정 소임을 맡은 경우, 권신과 그 당여에게 수여한 경우이다. 공민왕이 재위기간 중에 공신을 적극적으로 책봉하였던 것은 오랜 원 간섭과 기황후의 존재로 인해 고려왕실의 지지기반이 약화되어 인위적인 방법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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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민왕의 신돈 등용의 배경

        신은제(Shin, Eun-Jae) 부산경남사학회 2014 역사와 경계 Vol.91 No.-

        승려 신돈의 등용은 공민왕대 정치에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본 논문은 그러한 이례적 사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을 규명하기 작성되었다. 신돈의 등용은 공민왕의 의지였다. 두 가지 상황 하에서 공민왕은 이같은 파격적 정치를 단행했다. 첫째, 공민왕은 연저호종공신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해 왔었다. 그러나 정세운 살해사건을 계기로 공민왕의 측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결국 흥왕사의 변란에서 확인되듯이, 일부 세력은 공민왕 시해를 시도했다. 이 사건의 결과 공민왕의 충성스러운 측근들이 살해당했고 공민왕은 연저호종공신에 대한 신뢰를 거두었다. 이제 공민왕은 새로운 측근을 필요로 했다. 둘째, 기철이 제거된 이후, 원조정의 실력자 기황후는 공민왕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홍건적의 반란에 직면한 원조정은 공민왕을 징치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홍건적이 진압되자 원은 즉각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책봉하였다. 덕흥군 책봉을 관철하기 위해 원은 군대를 고려로 파견했고 공민왕은 무장세력을 동원해 그들을 막아야 했다. 덕흥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후, 고려 조정에서 무장세력의 지위는 상승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 13년 기황후가 원조정에서 실각하고 원이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면서 공민왕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신돈은 이런 분위기에서 공민왕에 의해 등용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한 신돈은 공민왕의 기대에 부응해, 유숙과 김보와 같은 연저수종공신, 최영으로 대표되는 일부 무장세력, 이공수와 이수산과 같은 기씨일문과 가까웠던 인물들을 권력의 주변부로 몰아내었다. Shin-don(辛旽)"s appointment as prime minister was exceptional affair in King Gong-Min politics. This paper was written in a intention of understanding that affair. It was King Gong-Min who appointed Shin-don as prime minister in Groye(高麗) court. Two situations made King Gong-Min give Shin-don the prime minister. From his enthronement, King Gong-Min had conducted state affairs on the retainers, who attended King Gong-Min in the capital of Yuan Dynasty. But the administration was ended in the killing of Jeong She-Yun(鄭世雲) who was the retainer, the hero to save Groye from the invaders, named Hongkonjeck(紅巾賊). Some of retainers would like to kill King Gong-Min in the Heungwang-temple(興王寺), After the rebellion of Heungwang-temple, King Gong-Min didn"t give retainers the trust. He should get a new supporter. After the elimination of Gi-Cheol who was the brother of the Empress in Yuan, the relation between the Yuan Dynasty and King Gong-Min made bad. As soon as repressed the Hongkonjeck, Yuan dethroned King Gong-Min, gave Deckheunggun(德興君) the throne of Groye Dynasty. Yuan"s sent the army to Groye because Groye Dynasty rejected the Yuan"s decision. Though Groye successfully defect the Yuan"s army, a anxiety of King Gong-Min wasn"t removed. A lot of military officals was developed through the wars, they threatened the king"s power. In 1364, Yuan was swiftly collapsing, King Gong-Min attacked them under the situation, appointed Shin-don. Shin-don ceased the power under the king"s support, he removed the officials from Groye court. There were three type of removed officials. One was the military officials, who were developed in the war against Yuan. Another was the officials, who were on the friendly terms with Yuan court, expecially the Qi empress. The other was some retainers, who lost the King"s tr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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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옹의 귀국 후 주요 행적과 다비 및 추념 - 국립중앙도서관본에 추가된 행적을 중심으로 -

        황인규 한국불교학회 2020 韓國佛敎學 Vol.93 No.-

        This study, focusing on the edition of Monk Naong’s biography in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which has been rarely utilized, is a reexamination of Monk Naong’s activities, including the Buddhist funeral and memorial services for him after his entering Korea. There are many different editions of the Naong Hwasangeorok, but in most cases, their contents are quite similar. However, three sections are added in the version of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 I would say that the compilation and editorial opinion of the book are based on the fact that its material value is very important.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it is not found in the other editions of the book. In this paper, added the most into the contents of the National Library of Korea's edition of the Naong Hwasangeorok, verily concrete is the fact that during the Red Turban invasions of Goryeo, Naong protected the Shinkwangsa Temple, in addition to his practice of the Gongbuseon and the scenes of Naong's Buddhist funeral at the Heoamsa Temple. This fact is very important. It is because it is found only in the National Library version. 본 연구는 그 동안 거의 활용이 안된 국립도서관본 나옹화상어록 의 행장을 중심으로 나옹의 원에서 귀국후 다비 및 추념까지 주요 행적을 재검토한 것이다. 나옹화상어록 의 판본 가운데 국립중앙도서관본에는 크게 세 부분의 내용이 추가되어 실려 있는데, 다른 판본에서는 찾아지지 않는 내용이다. 즉, 국립도서관본 나옹화상어록 의 행장 가운데 가장 많이 추가되어 현재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홍건적의 칩입시 나옹의 신광사 수호 사실, 공부선의 실시 부분과 신륵사에서의 나옹의 유골 다비와 회암사의 추념시 장면이다. 홍건적의 침입시 나옹이 신광사를 수호한 사실은 다른 판본 보다 자세하며, 나옹이 주맹한 공부선은 후삼국 통합 이후 그 때까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고 특기하였다. 그리고 신륵사 다비와 회암사 추념시 다른 판본에서는 찾아지지 않는 승려와 신도들이 찾아진다. 이렇듯 국립도 서관본의 행장에서만 유일하거나 더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러한 내용은 나옹의 행적에 필히 추가되어 이해해야 될 중요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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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후반 고려-원 관계의 연구

        이익주(Lee, Ikjoo) 동북아역사재단 2016 東北亞歷史論叢 Vol.- No.53

        이 논문은 고려가 반원운동에 성공한 1356년(공민왕 5)부터 북원이 멸망한 1388년(우왕 14)까지 고려와 원의 관계를 연구한 것이다. 이 시기의 고려-원 관계는 1219년부터 시작된 고려-몽골 관계의 대미에 해당하나 지금까지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근래 들어 고려의 반원운동 이후 고려-원 관계와 원-명 교체 이후 고려-북원 관계가 연구되고 있지만, 두 시기의 고려-원 관계를 종합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14세기 후반 고려-원 관계는 고려의 반원운동으로 ‘세조구제’가 폐기된 이후 그것을 대신할 원칙을 수립하지 못했고, 새로이 명이 등장함으로써 다원적인 구조를 갖게 됨으로써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단기간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으므로 다음과 같은 몇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 단계는 1356년 고려의 반원운동이 성공한 뒤로부터 홍건적의 침입을 받는 1359년(공민왕 8)까지의 시기이다. 이때는 고려가 원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주도하면서 형식적인 책봉 -조공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홍건적의 침략으로 고려가 대원관계의 개선을 위해 원에 접근하고, 그에 따라 원의 입장이 다시 강화된 시기이다. 이에 대응하여 원은 고려와의 관계를 반원운동 이전으로 되돌리고자 했는데, 그러한 정책은 공민왕을 폐위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고, 이후로는 고려의 주도권이 다시 회복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1369년(공민왕 18) 이후의 시기이다. 중국에서 원-명 교체의 조짐이 보이자 고려는 원과 관계를 단절하고 명과 책봉 -조공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정세 변화에 대응하였다. 그 뒤로도 북원이 건재하면서 명과 대립하였지만, 고려는 시종 친명·반원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네 번째 시기는 1374년(공민왕 23) 우왕이 즉위한 뒤로부터 북원이 멸망하는 1388년(우왕 14)까지의 시기이다. 공민왕 시해와 명 사신 살해사건을 계기로 고려와 명의 관계가 일시 중단되고, 그 사이에 고려는 북원과의 책봉 -조공 관계를 일시 회복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친명반원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려가 원-명 교체를 일찍부터 인정하고 친명 정책을 채택함에 따라서 북원과의 관계는 급속히 소원해지고, 북원의 존재가 고려-명 관계에서 중요한 변수로서 작용하지 못했다. 당시 고려가 친명 정책을 견지한 것은 공민왕의 반원운동 이후 양국 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원의 공민왕 폐위 등 무리한 정책에 대한 고려의 반원 감정과 더불어 당시 원-명 간의 대립에서 명이 우세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명과 북원이 대립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의 외교정책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었다. This paper investigates Goryeo’s relationship of with the Mongol Empire from its successful anti-Yuan movement in 1356 until the fall of the Yuan Dynasty in 1388. Despite the importance of this period, there have been only a few relevant studies. Some current research on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after the anti-Yuan movement and the Goryeo-Northern Yuan relationship after the Yuan-Ming transition are insufficient to account for the entire relationship between Goryeo and the Mongol Empire. In the late 14th century, the Goryeo-Mongol relationship had no replacement for Sejoguje (世祖舊制) after its abolishment by the anti-Yuan movement. As a consequence, relations became unstable with the emergence of Ming China. The resulting significant short-term changes in the relationship are discussed in the following four stages. First, soon after the anti-Yuan movement succeeded, Goryeo was in the leading position over Yuan while establishing a perfunctory investiture-tribute relationship. However, during the Red Turban Invasion in 1359, Goryeo approached Yuan seeking a stronger relationship. Acquiring a reinforced position accordingly, Yuan demanded to restore the relationship to the pre-anti-Yuan movement level, but this did not continue beyond the dethronement of King Gongmin, and finally failed. The starting point of the third stage is the Yuan-Ming transition in 1369. Recovering its superiority again, Goryeo severed diplomatic ties with Yuan and created a new investiture-tribute relationship with Ming China, which it kept coherent despite Northern Yuan’s presence and antagonism against Ming China. The last stage is from the enthronement of King Wu in 1374 to the fall of Northern Yuan in 1388. During this period, the Goryeo-Ming relationship was severed for a time due to the assassination of King Gongmin and the murder of a Ming envoy. There once was a two-sided diplomacy as Goryeo temporarily restored the investiture-tribute relationship with Northern Yuan, but Goryeo maintained pro-Ming and anti-Yuan principle. Goryeo experienced a sinking in its relationship with Northern Yuan since its quick acceptance of the Yuan-Ming transition and the inclination toward Ming China. Although Goryeo could have profited through a two-sided diplomacy between Northern Yuan and Ming China, its unbalanced foreign policy of pro-Ming and anti-Yuan prevented this from working. In that sense, Goryeo’s foreign policies in the late fourteenth century can be evaluated as not having fully reflected the contemporary sit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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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명을 통해 본 대원제국 말기의 정국 -‘새인적답홀(賽因赤答忽) 묘지명’의 분석을 중심으로

        권용철 ( Kwon Yong Cheol ) 대구사학회 2019 대구사학 Vol.137 No.-

        본고에서는 사인치다쿠의 묘지명을 중심으로 대원제국 말기의 정국을 살펴보았다. 至正 11년(1351)에 汝州, 穎州를 중심으로 발생한 홍건적의 반란은 제국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제국 정부 측에서 반란군을 일거에 제압하지 못한 것은 제국의 군사력 약화를 표면적으로 드러냈고, 이에 지방에서 개인적으로 군사를 모은 세력들이 정치적ㆍ군사적으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반란이 일어난 河南江北行省 일대 출신의 군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대대로 河南 固始縣에 거주했던 사인치다쿠가 ‘義兵’을 모아 활약했던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인치다쿠는 역시 河南에서 거병한 차간테무르의 휘하에서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제국 조정은 그 전공을 인정하여 빠른 속도로 그의 관품을 높여주었고, 최종적으로 從1品의 관직과 正1品의 文資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개인적으로 병사들을 모아 활동을 시작했던 사인치다쿠가 국가의 고위 관료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했다. 사인치다쿠의 아들인 쿠케테무르는 자신의 외삼촌인 차간테무르의 휘하에서 활약했고, 차간테무르의 ‘養子’가 되었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至正 22년(1362)에 차간테무르가 암살되면서 쿠케테무르는 그 군대를 이끄는 지위에 올랐고, 제국 조정도 이를 승인했다. 쿠케테무르는 이후 제국 조정의 정치 분쟁에 개입하면서 중서좌승상이 되었다. 쿠케테무르가 이렇게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부친 사인치다쿠의 戰功이 존재했다. 사인치다쿠 묘지명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고, 또한 원대 말기 정국의 흐름을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한 것이다. 쿠케테무르는 明代의 자료에서는 주로 ‘王保保’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고, 이는 쿠케테무르가 漢人이고 원대 말기에 몽골인이 아닌 漢人 군벌이 등장하여 제국을 좌지우지했다는 인식이 형성되는 데에 일조한 바 있다. 하지만 사인치다쿠 묘지명을 통해서 쿠케테무르가 몽골 바야우트 씨족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고, 쿠케테무르의 부친이라고 여겨졌던 차간테무르조차도 漢人이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묘지명을 통해서 正史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들을 밝혀낼 수 있다는 점이 새삼 드러나는 대목이다. 차후에도 사료의 부족과 왜곡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묘지명 자료의 발굴이 계속 이루어져 원대 말기의 정국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현재 정리되어 있는 묘지명, 석각 자료들에 주목하고 기존 正史 등과 면밀하게 비교 분석하는 연구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 범주는 원대 말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中國前近代史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In this paper, I reviewed the state of the end of the Yuan Empire with the epitaph of Sain-Čidaqu. In 1351 the Red Turban rebellion occurred around the provinces of Ruzhou(汝州) and Yingzhou(穎州), and this incident was the cause of the fundamental shake of the Yuan Empire. Yuan government could not suppress Red Turban rebels, it revealed the weakening of the empire’s military power, which led to emergence of individual military forces in the province. It is especially noteworthy that warlords from the Henan(河南) began to appear. Under this circumstances, Sain-Čidaqu who lived in Henan for generations, gathered military forces and acted as “righteous army”(義兵). Under leadership of Čagan-Temur, who was also a strong warlord in the Henan, Sain-Čidaqu made great achievements in suppressing the insurrection forces. The Yuan Court acknowledged his achievements and rapidly promoted his status. This meant that Sain-Čidaqu, who had personally gathered soldiers and started activities, was recognized as a high-ranking official of the Yuan Dynasty. Köke-Temur, the first son of Sain-Čidaqu, played an active part under his uncle Čagan-Temur and was so trusted to be Čagan-Temur’s “adopted son”. When Čagan-Temur was assassinated in 1362, Köke-Temur became the leader of the army, and the Yuan Court approved it. Köke-Temur later intervened in the political disputes of the Imperial court, and became the Junior Chief Councillor of the Central Secretariat(中書左丞相). The background of Köke-Temur's rapid growth was his father, Sain-Čidaqu. The Sain-Čidaqu epitaph reveals this historical background, and it is also a source of information about the situation of Late Yuan dynasty. Köke-Temur appeared mainly the name Wangbaobao(王保保) in sources of Ming, which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the notion that Köke-Temur was a non-Mongol(Chinese) warlord. However, Sain-Čidaqu epitaph clearly confirms that Köke-Temur is a Mongol Baya’ut clan, and even Čagan-Temur, who was considered the father of Köke-Temur, was not a Chinese. Likewise, epitaph reveals the facts that were not revealed in the official history. In the future, it is hoped that excavation of epitaph that can overcome the shortage and distortion of sources. And I also hope that epitaph will help to analyze the politics of the Late Yuan Dynasty from various viewpoi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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