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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우스트 그리고 파우스트적인 것 -어느 논쟁의 실제 측면들

        요헨골츠 ( Jo Chen Golz ) 한국괴테학회 2014 괴테연구 Vol.- No.27

        슈베르테의 저서 『파우스트 그리고 파우스트적인 것』(1962)에 따르면, 파우스트적이라는 단어는 파우스트라는 인물에 속하는 것을 칭하는 말로 본래 중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7세기와 18세기 초에 나온 파우스트버전들에서 파우스트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공포를 주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파우스트적인 것 역시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였다. 그러나 괴테의 『파우스트』가 출판되면서 이러한 경향에 변화가 생겼다. 파우스트를 인류의 대표상으로 보는 쪽과 파우스트의 죄를 강조하는 쪽이 공존하면서, 파우스트적이라는 단어는 어떨 때는 긍정적인 맥락에서, 또 어떨 때는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1870/71년 독일제국이 세워지면서 파우스트적인 것은 오직 긍정적인 의미를 담지하게 된다. 전설적 영웅 지크프리트와 유사하게, 파우스트는 게르만적 인간이자 행동하는 인간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빌헬름시대의 이상적 인간상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새로운 관점이 나타났다. 『서구의 몰락』(1919)에서 슈펭글러는 파우스트적인 것을 독일적 정서 및 내면과 관련시켜 정의될 수 있는 표현이라 보았다. 빌헬름시대의 관점과 슈펭글러의 관점은 각각 파우스트라는 인물을 행동하는 인간으로 볼 것인가 혹은 성찰하며 학문적 욕구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하는 학자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관된다. 이후 뵘은 1933년에 나온 저서에서 파우스트적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호문쿨루스라고 주장하였으나 그의 주장은 곧 나치의 지배하에 묻혀버렸고, 파우스트는 위대한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비록 파우스트의 노력은 여전히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독일민족적인 것은 더 이상 강조되지 않았다. 동독 초기에도 파우스트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루카치는 파우스트에게서 자본주의적 비인간성과 생산적인 삶의 활동성이 변증법적으로 구현된다고 해석하였다. 1956년 이후 동독에서는 특히 『파우스트 제2부』의 결말에 유토피아적 잠재력이 담지되어 있다고 보았고, 이 유토피아적 잠재력은 현실 사회주의 속에서 실제로 실현가능하다고 주장되었다. 1981년에는 하이제와 슐라퍼 사이에 이른바 파우스트논쟁이 있었다. 파우스트가 필레몬과 바우키스를 살해한 것을 하이제는 역사적 진보에 대한 대가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슐라퍼는 이를 범죄로 간주하였고, 바로 여기에서 괴테가 현대를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있음이 드러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1998년의 저서에서 야스퍼는 파우스트적인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나치의 야만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였고, 파우스트라는 인물과 작가인 괴테가 서로 같은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보일은 파우스트적인 것을 독일교양시민계급에 속하는 파우스트의 병리학적 측면으로 이해하였는데, 보일의 견해에 따르면 작가 괴테는 파우스트라는 인물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지닌 것으로 파악된다. 파우스트 그리고 파우스트적인 것에 관하여 벌어지는 논쟁들 중 어떤 의견이 본질을 덧칠하여 수정하고, 어떤 의견이 텍스트와 연관된 해석인지, 그 경계를 분명히 정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에 대해서는 괴테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로 대신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가 때때로 다시 쓰여야만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오늘날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게 다시 쓰여야만 하는 필연성은 많은 사건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하는 시대에 발맞추는 자에게는 과거의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찰하고 판단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관점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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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ust und das Faustische. Ein abgeschlossenes Kapitel deutscher Ideologie?

        요헨 골츠 ( Jochen Golz ) 서울대학교 독일어문화권연구소 2014 독일어문화권연구 Vol.23 No.-

        괴테의 『파우스트』는 출간 직후부터 무수한 작품 내재적인 해석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수행하는 담론에 끊임없이 이용되기도 했다. 본 논고는 괴테의 『파우스트』 출간 이후부터 2차 대전 종전까지 ‘파우스트적인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이루어졌던, 독일 정신사에 대단히 중요한 논쟁들의 경과를 추적하였다. ‘파우스트적인것’의 개념은 결코 가치중립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파우스트』는 출간 직후부터 독일의 대표적인 민족문학, 또 대표적인 세계문학, 그리고 인류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추앙된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괴테가 생각한 자율적 인간상이 기독교적 인간상과 합치될 수 없다고 여겨 『파우스트』를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다. 독일제국이 출범했을 당시에 괴테는 쉴러와는 달리 지나치게 세계시민적이라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괴테의 『파우스트』는 대독일적 이데올로기 안에 흡수되어 ‘게르만 민족의 본질적인 작품’으로 추앙되는 등 독일의 민족 이데올로기, 나치 이데올로기와 계속해서 결부되었다. 이 때 ‘파우스트’는 북방게르만인의 전형적인 특징, 이를테면 ‘행동형 인간’의 모습, 또는 이와는 완전히 반대로 ‘독일적 내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매번 다르게 해석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대독일 이데올로기와 『파우스트』와의 연관성은 더 이상 주장될 수 없었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다시 새롭게, 즉 동독의 좌파 이데올로기적 관심사에서 해석되었다. 여기에는 ‘파우스트’가 근대적 부르주아의 전형이면서도 그 부르주아 질서 너머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중적인 인물이라는 루카치의 해석이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파우스트』는 동독의 국민문학이 되었다. 최근에는 괴테가 ‘파우스트적인 것’에 대한 비판 의식을 작품 안에 숨겨 놓았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때 ‘파우스트적인 것’이란 개념은 근대성, 진보 이념, 교양시민, 인류 등등을 의미한다. ‘파우스트적인 것’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들로 오염되어 2차 대전 이후에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되었지만 최근에는 다시 그 개념이 보다 객관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 해석은 지금도 진행중이며 작품 내재적 해석과 함께 『파우스트』 연구의 중요한 경향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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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우스트』 -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가 맞이하는 비극

        베네딕트예씽 ( Jeßing Benedikt ) 한국괴테학회 2013 괴테연구 Vol.- No.26

        주체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은 계몽주의시대에 점점 더 확산되고 확립되며, 18세기 말에 그 정점에 이른다. 감상주의와 ‘질풍노도’ 이후로 독일문학 역시 이러한 경향 속에서 근대적 주체의 모델을 보여주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인간이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기도 한다. 본고는 괴테가 자신의 드라마 『파우스트』에서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를 문학적으로 시험대에 올리고 있다고 보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파우스트의 첫 독백에는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가 드러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요구가 실현되는 것을 방해하는 세 가지 요소, 즉 멜랑콜리와 절망과 행동하지 못하는 무능력 또한 확인된다. 멜랑콜리와 절망이 고양될수록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고 자율적이고자 하는 모든 것이 실체 없는 제스추어로 격하된다. 그리고 멜랑콜리와 절망은 파우스트가 실제 행동하는 인간이 되는 것을 방해한다. 말로만 행동을 선취하는 파우스트를 실제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메피스토이다. 메피스토와의 계약 이후 비로소 파우스트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행동능력을 현실로 만들어나간다. 여기서 메피스토는 파우스트가 획득한 행동의 자율성을 구현한다. 행동의 자율성이 근대적 주체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행동하는 파우스트는 근대적 인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파우스트, 비극 제2부』에서는 파우스트의 이러한 변화를 중심으로 산업사회가 시작되는 근대에 있어 행동의 자율성이 지니는 의미를 성찰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은 메피스토의 입을 빌려 이렇게 구현된 자율성이 환상이자 자기기만임을 드러낸다. 파우스트의 자율성구현이 다른 이들의 희생을, 심지어 자율적 주체 자신의 희생을 요구함으로써 괴테의 『파우스트』는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가 맞이하는 비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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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심의 방문 - 파우스트에 나타난 근심과 속도의 연관성

        박희경 한국독일언어문학회 2023 독일언어문학 Vol.- No.99

        Dieser Beitrag befasst sich mit der Problematik der Sorge und der Beschleunigung in Goethes Faust. In der Mitternacht-Szene führt Faust ein Streitgespräch mit der Sorge durch. Obwohl er, der “rastlos durch die Welt gerannt ist”, die das menschliche Handeln lähmende Sorge zu verscheuchen scheint, stellt sich heraus, dass er insofern von der Sorge angetrieben wird, als er unfähig ist, sich einem Augenblick hinzugeben und - laut der Sorge - sich „der Zukunft nur gewärtig“ ist. Faust praktiziert eine Existenzweise, die man kapitalistisch bezeichnen kann, dass er stets auf Kosten der Gegenwartsleugnung in die Zukunft hineinrastet. Kapitalistisch, weil hierbei alles Gegenwärtige, dem Dasein eingeschlossen in Kapital für das transformiert wird, was (noch) nicht da ist und nichtsdestotrotz zur Verfügung gestellt werden sollte. Faust verschreibt sich dem Lebensprojekt, die “Menschheitskrone” zu gewinnen, nämlich das Leben in all seinen Zügen, seinen Höhen und Tiefen und seiner Komplexität auszukosten(Rosa 2014, 40). Mephistopheles beschleunigt ‘veloziferisch’ das Lebenstempo, dass die Zeit vom Begehren zum Genuss verkürzt wird und Faust im Moment des Genießens wieder ins nächste Begehren voranschreitet. Fausts Drama der Beschleunigung läuft darauf hinaus, dass er nie den Augenblick erreicht, den er zum Verweilen einzufordern bereit ist. Die Vergangenheit ist aus der Gegenwart vertrieben, die Gegenwart ist nichts anderes als ein Defizit und die Zukunft ist grundsätzlich unverfügbar. Die Sorge, die der Menschheit uralte Empfindung der Selbsterhaltung, avanciert beim Kapitalisten Faust und wohl auch bei seinen geistigen Nachfahren zur Grundlage der Mentalität sowie zur Antriebskraft des Handelns. Folglich erachtet dieser Beitrag die Tragödie Faust für aktuell, insbesondere in der jetzigen hyperkapitalistischen Gesellschaft, wo das Überleben allein zum Ethos wird. 본 논문은 괴테의 비극 파우스트에 나타난 근심의 문제를 분석하고 파우스트의 근심이 가속화하는 속도와 맺는 관계를 살펴본다. 논문의 전반부에서는 근심이 파우스트한테 나타나는 이유를 밝힌다. 행동과 활동을 멈추지 않는 파우스트는 근심과 무관하게살아온 듯 보이지만, 현존을 포함한 현순간의 모든 것을 미래에 투자하는 자본가적인존재 양태와 현재를 부정하는 행동 양식이 합쳐질 때 근심은 심성의 토대로 자리 잡는다. 근심은 미래를 기대하거나 미래에 대비하여 현재에 머물지 못하는 것으로, 이는 맹목적으로 미래를 지향하는 파우스트의 노력과 구조적으로 같다. 이로부터 시간의 문제가 나타나는데, 논문의 후반부에서는 이 문제를 살핀다. 파우스트는 시간을 걸고 메피스토펠레스와 내기하고, 유한한 삶의 시간에 무한한 인생을 살려고 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무한인생 프로젝트가 실현되는 속도를 ‘악마적으로 가속화 veloziferisch’ 한다. 이 두 인물의 ‘속도의 드라마’에서 파우스트는 내기에 걸었던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의 현재는 과거와 단절되고, 현재로 불러들이는 미래는 원천적으로 전유할 수없고, 파우스트의 현재는 늘 부정된다. 근심은 인간의 생존을 둘러싼 아주 오래된 감정이지만, 이제 부와 속도에 따르는 자본가적인 행위와 활동을 추동하는 심성이 된다. 이로부터 본 논문은 살아남기가 에토스가 된 초자본주의적인 현시대에 고전 파우스트가갖는 시의성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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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우스트의 ‘비극’과 ‘구원’

        송성회 ( Song¸ Sung-hoe ) 한국독일어문학회 2020 독일어문학 Vol.91 No.-

        괴테의 『파우스트. 비극』의 난해성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 난해성은 ‘비극’의 주인공 파우스트가 결말에 ‘구원’을 받는다는 점 때문에 배가된다. 이 논문에서는 주인공 파우스트의 ‘비극’적인 생애와 그의 ‘구원’이 하나의 틀 안에서도 이해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파우스트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주님의 종‘으로 선택 받은 인간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모든 방면에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인간 파우스트의 노력은 여러 가지 오류를 초래한다. 그 결과 파우스트의 삶은 ‘비극’으로 얼룩진다. 그러나 오류를 범하면서도 파우스트는 ‘더욱 더 고귀해지고 더욱 더 순수해지려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과 ‘자신의 힘’이라는 두 가지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킨 파우스트는 죽은 뒤에 ‘구원’의 길을 걷는다. 주님의 구원계획을 전혀 모르는 ‘초인’ 파우스트가 지상에서 영위한 삶을 ‘비극’으로 처리함으로써 괴테는 자신의 ‘문학적인 의도’가 ‘근대인의 초인적인 노력 대부분이 잘못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임을 드러냈다. 또한 괴테는 파우스트가 결말에서 구원의 길을 가는 것으로 처리함으로써 ‘비극’으로 점철된 삶을 영위한 자라고 해도 그 가능성을 토대로 하여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비교적 너그러운 종교관을 제시했다. Die Unbegreiflichkeit von Goethes Faust ist weithin bekannt. Sie wird dadurch vergrößert, dass Faust, der Held von einer Tragödie, am Ende erlöst wird. In der vorliegenden Abhandlung soll gezeigt werden, dass die Tragödie und die Erlösung des Heldens beide auch zusammenhängend begreiflich gemacht werden können. Faust ist ein Mensch, der von Gott als sein Knecht auserwählt worden ist. Mehrere Verirrungen werden durch Fausts Streben verursacht, der als der Gottheit Ebenbild allenthalben der Gottheit ähnlich zu machen. Daher wird Fausts Leben von mehreren Tragödien heimgesuscht. Faust fährt ununterbrochen damit fort, sich immer ehrwürdiger und reiner machen zu wollen, um die beiden Bedingungen für seine Erlösung zu erfüllen. Auch nach seinem Tod beschreitet er weiterhin den Weg der Erlösung. Das irdische Leben von Faust als einem Übermenschen gestaltet Goethe als eine Tragödie und demonstriert dadurch, dass seine poetische Absicht eine Anspielung auf die Falschheit der meisten Bemühungen der modernen Menschen ist. Zugleich wird die Erlösung von der Tragödie Helden Faust gestaltet und dadurch eine großmütigere Religionsanschauung vermittelt.

      • KCI등재

        Faust - Tragödie des menschlichen Autonomieanspruchs

        Benedikt Jeßing 한국괴테학회 2013 괴테연구 Vol.- No.26

        주체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은 계몽주의시대에 점점 더 확산되고 확립되며, 18세기 말에 그 정점에 이른다. 감상주의와 ‘질풍노도’ 이후로 독일문학 역시 이러한 경향 속에서 근대적 주체의 모델을 보여주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인간이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기도 한다. 본고는 괴테가 자신의 드라마 『파우스트』에서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를 문학적으로 시험대에 올리고 있다고 보고, 이것이 어떤 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파우스트의 첫 독백에는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가 드러나고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요구가 실현되는 것을 방해하는 세 가지 요소, 즉 멜랑콜리와절망과 행동하지 못하는 무능력 또한 확인된다. 멜랑콜리와 절망이 고양될수록주어진 한계를 넘어서고 자율적이고자 하는 모든 것이 실체 없는 제스추어로 격하된다. 그리고 멜랑콜리와 절망은 파우스트가 실제 행동하는 인간이 되는 것을방해한다. 말로만 행동을 선취하는 파우스트를 실제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메피스토이다. 메피스토와의 계약 이후 비로소 파우스트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행동능력을 현실로 만들어나간다. 여기서 메피스토는 파우스트가 획득한 행동의 자율성을 구현한다. 행동의 자율성이 근대적 주체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행동하는 파우스트는 근대적 인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파우스트, 비극 제2부』에서는 파우스트의 이러한 변화를 중심으로 산업사회가 시작되는 근대에 있어 행동의 자율성이 지니는 의미를 성찰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은 메피스토의 입을 빌려 이렇게 구현된 자율성이 환상이자 자기기만임을 드러낸다. 파우스트의 자율성구현이 다른 이들의 희생을, 심지어 자율적 주체 자신의희생을 요구함으로써 괴테의 『파우스트』는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가 맞이하는 비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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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 『파우스트』의 영화적 변환에 관한 연구 -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감독의 영화 <파우스트>를 중심으로 -

        정미숙 ( Jeong Mi Suk ) 세계문학비교학회 2021 世界文學比較硏究 Vol.76 No.-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감독의 <파우스트>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영화화하였다. 영화화과정에서 문학의 구원에 관한 주제는 전복된다. 영화는 괴테의 중세적 분위기를 영상으로 구현하면서 종교적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 내재화된 악의 기원을 구현한다. 괴테의『파우스트』의 비극적 요소는 형이상학적 고뇌와 진리의 탐구, 그리고 감각적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비극적 요소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추구하려는 파우스트의 의지적 행동과 생성으로 연결된다. 괴테는 극의 전개 과정에서 무한한 생성의 의욕과 변화를 구현한다. 한편 소쿠로프 감독의 <파우스트>에서 비극적 요소는 정신적, 물질적 곤궁과 결핍이다. 곤궁과 결핍은 생성과 변화가 아니라 이미 소멸되거나 파괴된 굳음과 정체를 추구한다. 소쿠로프 감독의 <파우스트>는 권력에 관한 4부작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이다. 그의 영화 속 파우스트는 4부작 시리즈주인공(레닌, 히틀러, 히로히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있다. 영화는 사랑과 구원에 대한 실천과 노력이 부재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악마를 유혹하는 인간 욕망의 기원을 이야기한다. 소쿠로프는 정치적, 역사적 이념에 대한 비판과 논쟁 보다는 인간의 육체와 죽음에 주목하는 것처럼 이 작품 역시 문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성과 변화가 아니라 권력 욕망의 기원을 육체와 죽음에서 찾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곤궁과 결핍은 죄악과 근심으로 연결되지만 문학작품과 연관되지 않고 인간의 악마성으로 연결된다. 즉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악마는 곤궁과 결핍에서 시작하여 스스로 악마를 처단함으써 신이 되려는 인간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인간의 내재화된 악의 기원은 곤궁과 결핍에서 비롯되었다. 소쿠로프 감독의 영화가 열린 구조로 마무리되면서 다양한 해독 가능성이 있지만 이 논문은 문학작품 속 생성과 변화가 영화 속 굳음과 정체로 연결되는 지점을 독해하면서 문학 속 인물의 틀을 유지하면서 주제를 전복하는 작품 속 상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 Faust > by Aleksandr Sokurov, the movie director is a movie version of Goethe’s 『Faust』. In the process of production of the movie, the theme of salvation in most literature is overthrown. The movie, while materializing Goethe’s middle age atmosphere in images, embodies the origin of vice internalized in human minds rather than religious salvation. The tragic elements of Goethe’s 『Faust』 come from metaphysical agony, exploration of truth and sensational desires. Such tragic elements lead to willful behavior and creation of Faust who searches for something ceaselessly. Goethe materializes enthusiasm for infinite creation and change in the unfolding of the drama. On the other hand, the tragic elements in Sokurov’s < Faust > are mental and material poverty and deficiency. The poverty and deficiency follow after already exterminated or destroyed solidness and identity rather than creation and change. Aleksandr Sokurov’s ≪Faust≫is the final work of art in his four-part series on the power. Faust in his movie projects the desires of the protagonists of the four-part series (Lenin, Hitler and Hirohito). The movie is devoid of practice and effort for love and salvation and talks about the origin of human desire seducing devils rather than ceaselessly attempting to secure human salvation. The movie expresses mythical and historical meaning of the shape of devils metaphorically in its prologue and epilogue. The dead body dissected by Faust and the body of a loan shark who made a contract with Faust (reminding us of Mephistopeles) are described with equal weight. The movie symbolically describes the relationship between Faust and the loan shark as well as the relationship between Faust and Wagner and these protagonists are projected interactively. As Sokurov focuses on human bodies and deaths rather than criticism and discussion of political and historical ideologies, this work of art attempts to find the origin of desire for power in bodies and deaths rather than creation and change that can be found in the literature. In the process, while poverty and deficiency lead to sins and worries, they are connected not to the literature but to the evilness of humans. In other words, the devil found in the movie finishes his journey as a human trying to be God by starting from poverty and deficiency and then, punishing the devil. The origin of vice internalized in humans has come from poverty and deficiency. As Sokurov’s movie is finished open-ended, there may be various interpretations. However, this paper explores symbols in the work of art that overthrows themes and still, maintains the framework of characters in the literature while interpreting the points where creation and change in the literature are connected to solidness and identity in th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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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 없는 이미지들의 표현력-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의 무성 영화 「파우스트」를 예로

        오순희 서울대학교 독일어문화권연구소 2019 독일어문화권연구 Vol.28 No.-

        Murnaus Faust war eine Ausnahme in seiner erfolgreichen Geschichte als Regisseur expressionistischer Stummfilme. Der Film wurde vor allem im inhaltlichen Vergleich zur literarischen Tradition kritisiert. Komplimente für den Film begannen erst mit Kritikern wie Lotte H. Eisner, die sich auf ästhetische Formen dieses Films konzentrierten. In welchem Verhältnis aber stehen Inhalt und Form dieses Films? Stehen sie miteinander im Konflikt? Um diese Frage geht es in der vorliegenden Arbeit. Denn die inhaltliche Auseinandersetzung des Films mit seinen literarischen Vorläufern überschneidet sich mit der für Murnau spezifischen visuellen Schönheit. Goethe schildert in seinem Drama Faust die Welt der verwischten Grenzen zwischen Gut und Böse. Im Gegensatz dazu bleibt Murnaus Faust der mittelalterlichen Dichotomie von Gut und Böse verhaftet, was wiederum durch die Chiaroscruro-Technik verstärkt wird. Diese in Barockmalereien häufig vorkommende Technik enthüllt die Ausdruckskraft von Murnaus stummen Bildern in seinen expressionistischen Stummfilmen. Das Merkmal dieser neuen Narrativität ist, dass sie die Selbstreflexion des Films durch diese visuelle Beschreibung visualisiert. In diesem Sinne wird aus dem Zerstörer Mephisto ein Kameramann Mephisto, der dem erstaunten Zuschauer Faust eine schockierende neue Perspektive der Weltanschauung zeigt. Dieser metafilmische Charakter von Murnaus Film ist eine Weiterentwicklung des metadramatischen Charakters von Goethes Werk. Der entscheidende Unterschied zwischen Goethe und Murnau bersteht in der Verklärung des Faust. Anders als Goethes Faust, der ohne zu wissen in den Himmel steigt, wird Murnaus Faust ein Büßer und trägt die Verantwortung für die Folgen seiner Begierde. Entsprechend diesen Änderungen hat Murnau all seine visuellen Techniken wie Spezieleffekte entwickelt, die den Charakter des Murnauschen Faust ausmachen. Der Charakterwandel des Faust entspricht dem Common Sense der Menge, die, ohne irgendwelche tiefere ontologische Bedeutungen zu ergründen, einfach nach moralischer Verantwortung von Filmhelden verlangt, und dies zeigt, dass im Kino des 20. Jahrhunderts der gesunde Menschenverstand wie ein Über-Ich funktioniert, das die Finale zahlreicher Filme beeinflusst. 무르나우의 「파우스트」는 표현주의 무성 영화의 감독으로서 무르나우가 누렸던 성공의 역사에서 예외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도 문학 전통과의 비교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칭찬은 로테 아이스너처럼 미학적 형식에 주목하는 평론들이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내용과 형식은 어떤 관계인가? 그들은 서로 상충하는가? 이것이 이 논문의 문제의식이다. 이 영화의 내용이 이전의 문학작품들과 달라지는 부분들과 무르나우 특유의 시각적 아름다움이 빛나는 부분들은 공교롭게도 서로 겹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괴테는 그의 『파우스트』에서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해진 세계를 보여준다. 그에 반해 무르나우의 「파우스트」는 선과 악이라는 중세적 이분법 안에 머무르며, 이는 다시 ‘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라는 표현 기법을 통해 강화된다. 바로크 회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 기법은 무르나우의 표현주의 영화들에서 활용되면서 무성 영화, 즉 소리 없는 영화들의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강렬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사의 새로운 특징은 무엇보다도 영화의 자기반영성이라는 주제가 시각적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파괴자였던 메피스토는 카메라맨의 역할을 하는 메피스토가 되고, 이제껏 보지 못했던 세계의 모습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파우스트는 그러한 광경 앞에서 놀라워하는 관객처럼 된다. 무르나우의 「파우스트」가 보여주는 이러한 메타영화적 특성은 괴테의 『파우스트』가 선보였던 메타드라마적 특성의 연장선에 있다. 괴테와 무르나우의 결정적 차이는 파우스트의 본질적 변화이다. 스스로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하늘로 오르는 괴테의 파우스트와 달리, 무르나우의 파우스트는 참회자로서 그의 욕망으로 인한 결과들에 대한 책임을 진다. 파우스트의 변화는 영화 주인공들의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는 대중 관객의 상식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심오한 존재론적 의미를 파고드는 것 대신에 상식적인 인간 오성에 근거해서 영화주인공들의 도덕적 책임을 묻는 평범한 관객들의 존재가 20세기의 많은 영화들에서 초자아처럼 작용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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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의 「파우스트」 중, <발푸르기스의 밤>의 무용적 수용 과정

        김경희 ( Kyung Hee Kim ) 대한무용학회 2012 대한무용학회논문집 Vol.70 No.4

        「파우스트」는 괴테의 모든 체험과 사상, 지식 등이 그의 타고난 문학적 재능으로 집약된 희곡이다. 아마도 괴테는 전설의 파우스트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을지 모른다. 그는 작품을 통하여, "영원히 여성적인 것", 즉 ``사랑``이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겪은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다 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이것이 수많은 예술가들이 각기 다른 장르에서「파우스트」를 소재로 명작을 만들어내는 이유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파우스트」를 소재로 한 발레 작품은 없으나, 구노의 오페라「파우스트」 제 5막에 삽입된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을 위한 발레곡이 발표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두 명의 안무가에 의해「발푸르기스의 밤」이란 발레 작품이 탄생되었다. 레오니드 라브로프스키는 1949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이 작품을 초연시켰으며, 조지 발란쉰은 오페라 「파우스트」를 위해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을 몇 차례 안무하였으나, 1980년 뉴욕 스테이트 극장에서 이 작품을 초연시켰다, 라브로프스키는 괴테의 작품 속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을 충실히 반영하여 보다 사실적으로 발레화 하였으며, 발란쉰은 스토리를 배제하고 음악적 영감으로, 주제인 ``사랑``을 여성 무용수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간결하게 추상화 하였다, 이렇게, 이 두 작품 모두 음악은 같은 곡, 즉 구노의 「파우스트」를 사용하고 있지만, 두 안무가의 각기 다른 해석으로 하나는 ``볼쇼이 버전``으로 또 다른 하나는 ``발란쉰 버전``으로 현재까지 여러 단체들에 의해 공연되어지고 있다. The purpose of the study is to investigate how the <Walpurgisnacht>, one of the scenes of 「Faust」 by Goethe, was received in dance and to better understand the two ballet works, titled 「Walpurgisnacht」. The methodology for the study is to analyze the relevant dance literatures, and video materials from internet (video blog post). ``Walpurgisnacht`` is one of the scenes of 「Faust」, published in 1832. Ever since then, the various genres such as drama, music, films, and even computer game found their themes in 「Faust」 and created the new works. However, in dance, ballet in particular, no works based on 「Faust」 by Goethe have been produced yet, but only the scene of ``Walpurgisnacht`` was transformed into the ballet on stage. It was possible that the composer, Charles Gounod composed the music for ``Walpurgisnacht`` and added the ballet scene for the 5 acts Grand Opera 「Faust」 in 1869. There were two ballets titled 「Walpurgisnacht」. One was first performed in 1949, in Bolshoi Theater in Moscow, choreographed by Leonid Lavrovsky, and the other was first performed in 1980, in New York State Theater, choreographed by George Balanchine. It was analyzed that the so-called ``Bolshoi version`` by Lavrovsky was more realistic than Balanchine`s work. Balanchine`s 「Walpurgisnacht」 was very clear response to the music and the abstraction of the theme. I believe this study help the future choreographers produce the ballet 「Faust」 by Goethe, and the readers to further understanding of 「Faust」, especially 「Walpurgisnacht」.

      • KCI등재

        17세기 고대 루시 문학 속의 파우스트 테마 : 『사바 그루드쯔인에 대한 이야기』와 독일 슈피스의 『민중본 요한 파우스트 박사의 이야기』, 그리고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적인 이야기』 간의 비교

        홍대화 한국러시아문학회 2010 러시아어문학 연구논집 Vol.33 No.-

        서구에서나 러시아에서나 파우스트 테마는 중세적인 세계관이 위기에 이르고 새로운 세계관 혹은 세계 감촉이 시작되던 시기에 등장하고 유행한다. 유럽의 파우스트들은 인간과 세계가 발견되고 인간의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가 밝혀지면서 개인의 개성과 지상에서의 업적에 관심이 쏠리고 그것을 기록하고자 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이다. 신의 은총이 아닌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 초월적 지식에 이르고, 타인들이 가질 수 없는 ‘힘’을 갖고자 한 유럽의 파우스트들은 중세의 기독교 전통을 개혁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계승하기도 한 종교 개혁가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인간 이성, 과학, 인식의 힘의 폭발적인 성장이 신앙의 세계에 경계의 대상이 되면서, 신의 은총을 벗어난 인간 이성의 지식추구는 결국 타락하여 온전한 지식에도 이르지 못하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민중본 이야기』 속에는 담겨 있다.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악마와의 계약’과 파우스트의 파멸의 모티브이다. 파우스트의 파멸의 과정을 보여주면서 『민중본 이야기』와 『포스터스 박사』는 성모도, 성인도,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외롭게 영적인 투쟁을 벌이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런 점에 두 작품은 종교개혁기의 산물이다.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희곡은 종교개혁이란 시대적 배경 하에 루터와 캘빈의 인간의지의 전적 타락과 ‘오직 은혜’에 의한 구원의 교리에 근거해 포스터스 박사의 파멸을 설계하지만, 가장 훌륭한 지성의 마음을 유혹하는 ‘마법의 심오함’을 암시함으로써 개신교까지 이어지는 기독교 전통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의심을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의 파우스트들이 도전하던 시대에 악마는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의 종복인 듯이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압되지 않고 주도권을 발휘하는 때로는 폭력적이고 강하며, 자신이 느끼는 좌절과 절망을 이용해 인간을 옭아매는 교활한 심리적인 인격체로 그려져 있다. 17세기의 러시아는 서구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와는 사뭇 다르기는 하지만, 중세와 피터대제의 18세기를 잇는 전환기라는 점에서 서구의 두 시기와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한다. 문화의 세속화가 가속화되고, 서구의 문물이 보다 자유롭게 들어오고, ‘예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러시아적인 종교개혁으로 인해 신앙적 통일성이 깨어지고, 상인 계급이 발달하며, 문학 속에서 뛰어날 것 없는 평범한 주인공들의 모험이 그려지고, 기존의 가치들이 전복되어 풍자되기 시작하는 역동적인 세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서구와 공유하지 않았고, 르네상스를 충분히 체험하지 못한 러시아에서 새로운 시대의 인간형은 파우스트처럼 ‘인식’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힌 인물이 아니다. 가톨릭의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체계와 위계, 교리와 전통을 개혁한 서구의 프로테스탄트들과는 달리 러시아의 종교 개혁은 유일한 정교 국가로서 누구와 ‘소통’할 것이고,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적 전통과 체제 자체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교회의 위계와 제도, 교리는 여전히 굳건한 채로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란의 시대와 종교분열은 러시아인들의 의식에 큰 충격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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