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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調)가 지시하는 선법과 토리의 개념

        이보형 한국국악학회 2012 한국음악연구 Vol.51 No.-

        조(調=Diao)’라는 음악용어는 중국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은 선법, key, 노래곡조양식 등 여러 가지음악적 개념을 지시하고 있다. 여러 음악적 개념을 조라는 한 가지 용어로 지시하는 것이 혼란스러우므로 근래에 중국음악에서는 조의 선법 개념은 조식(調式), key 개념은 조성(調聲) 또는 조고(調高), 노래곡조양식 개념은 조 또는 강조(腔調=Tiangdiao)라 변별하여 지시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에서도 조의 선법의 개념은 조(調), key의 개념은 ‘청’, 노래곡조양식의 개념은 ‘토리(Tori)’라 변별하여 지시하자고 주장하여 왔다. 그런데 한편 이를 모두 ‘조’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지시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본 논문은조가 지니는 여러 개념을 한 가지 용어로 지시하게 되면 혼란이 있으므로 조의 여러 개념에 따라 다른용어로 지시하자고 다시 주장하기 위하여 조의 ‘선법’ 개념과 ‘토리’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선법의 개념을 정리하기 위하여 여러 민족의 음악에서 선법끼리 변별되는 음악적특징은 반드시 궁(宮), 수조음(首調音), Sa 등으로 지시되는 선법적 주음(중심음)이 규명되어야 하고, 이선법적 주음을 기준으로 하여 각 구성음간의 음정 차이를 규명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한국의노래곡조양식인 ‘토리’에는 선법끼리 변별되는 특징으로 구명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먼저 메나리토리, 육자배기토리, 성주풀이토리(남도경토리), 창부타령토리(진경토리), 수심가토리에 나타나는 토리의 음악적 특징을 밝히고, 이들 토리끼리 변별되는 음악적 특징을 추려 보았다. 토리에는선법적 특성으로 변별되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선법적 주음(중심음)을 밝히기 어려운 것들이 있어 시김새 차이, 중요음의 음정 차이, 관용적 선율형 차이 등 여러 가지 특성 차이로 변별되는 점을 밝힌 것이다. 이런 특성은 중국음악의 강조(腔調), 베트남음악의 Hoi과 같은 노래곡조양식에서도 볼 수 있었다. 토리 특성 가운데 중심음이 애매한 경우에는 선법적 특성으로 규명할 수 없고 시김새 차이로 변별되는 특성, 중요음 간의 음정구조 차이, 관용적 선율형과 같은 다른 특성으로 토리끼리 변별되는 특성을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의 여러 개념 가운에 선법 개념과 토리 개념은 서로 달라서 이것을 ‘조’라는 용어로 함께지시하게 되면 혼란이 있으므로 중국음악이나 베트남음악에서 그런 것처럼 한국음악에서도 조의 여러개념에 따라 선법의 개념은 조(調), key의 개념은 ‘청’, 노래곡조양식의 개념은 ‘토리(Tori)’라 하여 의미및 개념에 따라 다른 용어로 지시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A musical terminology of “Jo(調)” came from that of Chinese, of which meaning indicates various musical meanings such as mode, key, and style. Because it's very confusing to designate a concept with a single terminology, Chinese musicologists subdivide it into Diaoshi(調式) for mode, Diaosheng(調聲) for key, and Qiangdiao(腔調) for style. I have claimed to name it as Jo(調, 조) for mode, Cheong(청) for key, and Tori(토리) for style. Mean while, there's another opinion to call all of it as a single word of “Jo” in Korea. This thesis is to tell the difference between the concept of Mode and Tori, and to subdivide their terminologies according to its meanings. Otherwise, we could face nothing but confusion to grasp the idea in one terminology with no subdivided terminologies. To prove the difference between Mode and Tori, I summarized musical characteristics among those of Korean, Chinese, and Vietnamese. As a result, I figured out that a music should be equiped with center tone(中心音),designated as 宮, 首調音, or Sa. The characteristics, where their mode differs lie on its interval between organized tones in a scale. Tori does not always possess its center tone(中心音) within folksongs or shaman ritual music. The characteristics among Tori are made by many variants such as intervals between organized tones, grace notes, and the intervals of major tones, idiomatic melodies, and so on. These characteristics are also appear in Chinese and Vietnamese music. Mean while, it is impossible to call it a “characteristics” in such cases that they have uncertain center tone, subdivided its characteristics by grace notes, discrimination by intervals between major tones. Like the above, the concept of Mode and Tori is different. It is strongly confusing when we call it only with a sing terminology without subdivision. Therefore, I claim to name them with different terminologies according to each meanings of their concept such as Jo (調, 조) for mode, Cheong(청) for key, and Tori(토리) for style like people do in Vietnam and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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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佛敎禪敎兩宗과 朝鮮佛敎禪宗의 종헌 비교 연구

        김순석(Kim, Sun-Seok) 보조사상연구원 2010 보조사상 Vol.34 No.-

        이 논문은 일제시대 불교계에서 자주적인 노력에 의해서 창종된 조선불교선교양종과 조선불교 선종의 종헌을 비교해 보았다. 이 두 종단의 설립은 총독부가 1920년부터 실시한 문화정치로 인하여 문화단체설립이 허용됨에 따라 시작된 불교계의 통일기관 설립운동과 맞닿아 있다. 두 종단 모두 설립의 주체 세력은 청년 승려들이었다. 청년 승려들은 불교계의 현실이 종단도 없고, 종헌도 없으며, 집행기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행동 양식을 규율할 수 있는 법령도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제도와 법규를 제정하지 않고는 불교계의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서 승려대회를 발의하게 되었다. 1929년 1월 3일부터 5일까지 개최된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는 약 두 달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불교계의 근간을 이루는 종헌을 제정하고, 입법기관인 종회를 설치하고 중앙집행기관인 중앙교무원을 성립시켰다. 조선불교 선종 창종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승려들은 선학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비구승들이다. 이들은 일본 불교의 유입으로 대처승들이 늘어가는 현실에서 계율을 지키고, 선 수행을 통하여 정법을 널리 전파하고자 하였으며, 이들은 조선불교선교양종의 주류를 이루던 대처승과는 차별성을 가지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전통 강원에서 수학하였거나 선방에서 선 수행에 전념하였던 선승들이었다.이들 가운데는 해방 이후 이른바 정화운동에 주역들이 많았으며, 종정을 지낸 승려들도 있다. 조선불교선교양종과 조선불교 선종의 공통점은 두 종단 모두 식민지 상황에서 자주권을 획득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조선불교선교양종은 현실적으로 움직이면서 교단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강하였고, 조선불교 선종은 보다 원칙적인 입장에서 정법을 구현하려고 하였다는 차이점이 있다고 하겠다. This study compared Chosun Buddhism Seongyoyangjong and the last libation in a sacrifice of Zen Sect of the Chosun Buddhism which was developed by independent effort. The establishment of these two religious bodies are in relation to establishing drive for united organization of Buddhism as Cultural Policy had been allowed since 1920 by government general. The establishment of these two religious bodies were started by the young Buddhist monks. In the current situation at that time, there were no religious bodies, the last libation in a sacrifice, executive bodies and even legislation that can define patterns of behavior of monks. Therefore, with the spirit which made base to future of Buddhism, the young monks tabled a proposal which was Buddhist monk's general meeting. The Chosun Buddhism Seongyoyangjong General Meeting, held from 3rd~5th Jan, 1929, was prepared for 2months to legislate the last libation in a sacrifice and establish a family meeting and Joongang Gyomoowon which was a central executive body. The monks who played a major role for creating The Zen Sect of the Chosun Buddhism are the Buddhist monks worked for Seonhakwon. In a period that the number of a married Buddhist priest was increasing due to introduction of Japanese Buddhism, these monks kept religious precepts and spread the right principles. There were different from the married Buddhist priest who made mainstream of Chosun Buddhism Seongyoyangjong. The monks were Zen Monks who studied in traditional Gangwon or concentrated on learning virtue. Among the monks, some led a cleanup movement after the liberation and some became chief leader of the Buddhism. There was something in common between the Chosun Buddhism Seongyoyangjong and the last libation in a sacrifice of Zen Sect of the Chosun Buddhism which they tried to obtain autonomy. The Chosun Buddhism Seongyoyangjong, however, tried to protect the religious body with the thoughts of actuality and the last libation in a sacrifice of Zen Sect of the Chosun Buddhism tried to realize right principles as a genera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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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措大에 관한 小考

        윤호진 열상고전연구회 2011 열상고전연구 Vol.33 No.-

        이 글은 우리말의 쪼다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는 조대라는 말의 용례와 의미, 그리고 어원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이 말은 중국에서도 오래전 동한시절부터 사용이 되었고, 청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중기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조대라는 말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조대라는 말은 사전에 ‘청렴결백한 선비를 이르던 말’이라고 정의되었다. 어떤 경우는 높은 벼슬아치까지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의 경우 선비라는 뜻으로 쓰였고, 빈궁하고 빈한한 선비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더러는 秀才를 가리키기도 하고, 수재를 빈정거리는 말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것을 모두 종합하여 보면, 첫째는 선비들이 醋溝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醋大라고 불렀고, 여기에서 措大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둘째는 선비들의 거조가 성글기 때문에 措大라고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선비의 자태가 마치 식초를 마신 사람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넷째는 선비들이 사민의 으뜸으로 까칠하여서 초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어쩌다 그들을 범하게 되면 신맛을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섯째는 선비가 교외에 거주하면서 식초를 팔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곱째는 선비들이 큰일을 잘 처리하였기 때문에 조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조대를 풀이한 여러 설 가운데 송나라 曾慥가 편한 ꡔ類說ꡕ에 그대로 소개되고, 진계유도 ꡔ침담ꡕ에서 지지한 이광예의 설, 곧 선비가 큰 일을 잘 처리하여 조대라고 불렀다는 것이 가장 유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Before teacher was extremely respective title, but now teacher is sometimes used to call someone sarcastically. Likewise the word Zhoda could have been changed from the original meaning. Some poor classical scholars who didn't know nothing of world were called Zhoda, and we could easily imagine that to emphasize Zhoda people accented the word hardly like Zhoda. The word Zhodae[措大] was used from Donghan[東漢] dynasty and was used occasionally at Tang[唐] dynasty and was used pervasively at Song[宋] dynasty. In our country, people used it from the middle of the Korea[高麗] dynasty to the end of the Joseon[朝鮮] dynasty. Then what was the meaning of Zhodae[措大] before? The meaning of Zhodae sometimes included high officers, but most of the time it was used to call impoverished classical scholars; Sometimes it was used to call brilliant minds or to call them sarcastically. There are several origins of this word. Firstly, it is because classical scholars lived together at Chogu[醋溝]. Secondly, it is because classical scholars behaved stupidly. Thirdly, it is because classical scholars' attitudes were like someone who had drunk vinegar. Fourthly, it is because they were impolite and fifthly is because they sold vinegar in suburb area. Sixthly, it is because they would let somebody taste bitter when somebody had insulted them. Finally, it is because classical scholars have capability to do some big aff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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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소리 가곡성우조 연구

        박희순 한국국악학회 2007 한국음악연구 Vol.41 No.-

        가곡성우조는 김명환이 소개한 판소리의 조이며, 주로 판소리 창법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조이다. 이 글은 가곡성우조가 나타난 대목들의 음계, 종지음 등을 분석하여 선법적 개념과 그것이 지닌 전통 악조적 의미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판소리의 가곡성우조는 종지음이 도인 5음계로 구성되며, 이는 남창가곡 평조<소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그 대목에는 판소리적 기법인 계면조와 엇청도 나타났다. 진우조는 종지음이 솔인 5음계로 구성되며, 이 중 음계는 가곡성우조의 것과 유사하였다. 평우조는 종지음이 레인 6음계로 구성되며, 출현음이 다른 조와 구분된다. 그리고 가곡성우조는 종지음과 최저음이 동일하고 선율은 순차적으로 하행한다. 진우조는 종지음과 최저음이 동일하지 않고 선율은 도약 진행하며, 평우조는 종지음과 최저음이 동일하지 않고 선율은 순차적으로 하행한다. 이렇듯 음계는 가곡성우조와 진우조가 동일하며, 음의 성질은 진우조와 평우조, 선율진행은 가곡성우조와 평우조가 동일함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세 조의 음악요소는 서로 연관성을 지녔다. 가곡성우조ㆍ진우조ㆍ평우조에 구성된 음악요소를 살펴본 결과 세 조 가운데 가곡성우조와 진우조의 음계는 남창가곡 평조<소용>의 것과 유사하였다. 그리고 평조<소용>과 동일한 내드름, 선율진행, 음계 등 가곡의 음악요소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가곡성우조이다. 따라서 전통음악의 악조개념에 있어서 판소리의 가곡성우조와 진우조는 남창가곡 평조<소용>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단, 남창가곡 평조<소용>은 본가곡에서 변형되거나 변조한 양식을 지녔다. Gagokseongujo is one of the pansori tunes, introduced by Kim, Myong-hwan, which is mainly used for the concept of the pansori vocalism. This paper aims to analyse the musical elements of the gagokseongujo parts of the musical pieces and examine the idea of the tune as well as the meaning of the traditional music. Gagoseongujo in pansori is a mixed tune of pansori technique on the base of the similar musical elements in ‘Soyong’ of the namchanggagok pyeongjo (the level tone of man's songs). As for the musical tone, gagokseongujo can be easily confused with jinujo and pyongwoojo. Jinujo usually has four musical scales lower than gagokseongujo, but shows similarity in tones appeared in the songs. On the other hand, pyongwoojo is made by the woojo vocalization added on the similar scale with the saseol sijo (narrative verses). In addition, the scale appeared in pyongwoojo is lower than eollong and eonpyeon; the structure of the scale is similar. In this consideration, jinujo and pyeongwoojo utilize the similar musical elements of gagok which is seen in gagokseongujo. Nevertheless, it is gagokseongujo which a number of musical factors of gagok are applied such as naedeureum in ‘Soyong’, melody, and the scale. Examining the musical elements examined in gagokseongujo, jinwoojo, and pyeongujo, it is turned out that the scales appeared in the above three tunes reveal similarities to that of gagok, while pansori technique is applied to the musical expression. In other words, as seen from the term ‘gagokseongujo’, the combination word of the two genres, the musical pieces with gagokseongujo represent the musical elements in gagok, while pansori technique is also practiced in musical expression. However, the musical elements of gagok utilized in pansori are the transformed or modulated version from the bongagok (original gag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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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론서(肇論序)」의 주석(注釋) 연구

        조병활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9 동아시아불교문화 Vol.0 No.39

        Zhao Lun is a book that takes an important position in the flow of Chinese thought. Every time in the history of Chinese Buddhism, annotations and writings about Zhao Lun appeared. Preface of Zhao Lun written by Huida in the Chen Dynasty is one of them. This is not a systematic analysis of Zhao Lun. It is a short article that comprehensively looks at the articles included in Zhao Lun. It is noteworthy that it is the early writings in which the words Introductory Chapter and Zhao Lun appeared. YuanKang of the Tang Dynasty and JingYuan of the Song Dynasty commented Zhao Lun in the Annotation of Zhao Lun and Zhao Lun Ji Jie Ling Mo Chao respectively. LeTanXiaoYue of the Song Dynasty also wrote Jia Ke Zhao Lun Xu Zhu. It is relatively long among the three. YuanKang’s Annotation of Zhao Lun is the first existing systematic commentary on Preface of Zhao Lun. It is noteworthy that XiaoYue’s Annotation of Zhao Lun and JingYuan’s Annotation of Zhao Lun inform the buddhist situation of the Song Dynasty. After reviewing the life of YuanKang, XiaoYue, and JingYuan, this paper intensively examined how they interpreted Zhao Lun and what 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three annotations etc. 『조론』은 중국사상의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이다. 중국불교 역사의 매 시기마다 『조론』에 관한 주석서와 글들이 등장했다. 진나라(陳, 557-589) 혜달(慧達)이 쓴 「조론서(肇論序)」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글은 『조론』을 체계적으로는 분석한 주석서는 아니다. 『조론』에 포함된 글들을 종합적으로 조망한 짧은 글이다. 「종본의」와 『조론』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초기의 글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당나라 원강(元康)과 송나라 진수정원(晉水淨源, 1011-1088)은 각각 『조론소』와 『조론집해령모초』에서 「조론서」를 상세하게 주해(注解)했다. 송나라 늑담효월(泐潭曉月)도 「조론서」를 해설한 『협과조론서주(夾科肇論序注)』를 지었다. 이해력이 아주 뛰어났던 원강은 장안 안국사에 주석하며 중관(中觀)의 이치를 밝히는 글들을 지었다. 낭야혜각(琅琊慧覺)의 제자인 늑담효월의 생애를 알려주는 기록은 매우 소략하다. 불일계숭(佛日契嵩, 1007-1072)의 글을 모은 『담진문집(鐔津文集)』에 「여석문월선사(與石門月禪師)」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효월과 계숭이 친밀한 관계임을 알 수 있는 정도다. 송대 화엄학의 중흥조를 평가되는 정원은 『조론』과 『조론중오집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조론집해령모초』를 1061년 전당(錢塘, 항주) 현성정사(賢聖精舍)에서 찬술했다. 원강의 『조론소』는 「조론서」에 대한 현존하는 최초의 체계적인 주석이다. 『협과조론서주』와 『조론집해령모초』는 송나라의 불교 상황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본고는 원강·효월·정원의 생애를 조망한 뒤 그들이 「조론서」를 어떤 입장에서 풀었는지, 세 편 주석의 특징은 무엇인지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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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복<SUP>安鼎福</SUP>의「천학문답<SUP>天學問答</SUP>」에 대한 비평과반서학적<SUP>反西學的</SUP> 인식의 확산 - 손재<SUB>損齋</SUB> 남한조<SUB>南漢朝</SUB>의 「안순암천학혹문변의<SUB>安順菴天學或問辨疑</SUB>」

        조지형(趙志衡) 한국국학진흥원 2019 국학연구 Vol.0 No.38

        본고는 영남 출신 남인 학자 남한조南漢朝의 학문적 계보와 생애사를 검토하여 그가 지녔던 반서학적 인식의 형성 과정과 실질을 살피고, 그를 통해 영남지역으로 서학 비판의 흐름이 확산되어 가는 국면을 탐색하였다. 남한조는 경상도 상주尙州 출신으로서 본래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한 영남 이학파理學派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승 사후에 다시 안정복安鼎福에게 나아가 수학하면서 당시 근기 남인 사이에서 큰 문제거리가 되고 있던 서학西學의 실체를 인지하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는 스승의 권유로 「천학문답天學問答」에 대한 교정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과 비평을 개진한 「안순암천학혹문변의安順菴天學或問辨疑」라는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조선에 서학이 치성하게 된 원인을 탐색하다가 「이성호천주실의발변의李星湖天主實義跋辨疑」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 두 저술은 남한조가 지녔던 반서학적 인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18세기 후반 근기 남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서학 비판의 흐름은 남한조를 매개로 하여 이상정 문하의 영남 이학파 문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에 남한조와 교유하던 영남 지역의 여러 문인들, 예컨대 정종로鄭宗魯‧조술도趙述道‧황용한黃龍漢‧신체인申體仁‧이동급李東汲은 각각 반서학적 인식을 담은 저술들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남한조의 제자였던 류건휴柳健休는 『이학집변異學集辨』을 찬술하였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반서학적 인식과 흐름이 근기 지역에서 영남 지역으로 확산되고, 영남 지역 안에서 반서학 정서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남한조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This study is to review the academic pedigree and life histories of Nam Han-jo, a scholar from Yeongnam region, to research the process of formation of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at he had, and to investigate the phases that the flow of criticizing Western learning was spread into Yeongnam region through him. Nam Han-jo originally studied under Lee Sang-jeong and succeeded to Yeongnam Yi School scholastic mantle. As he studied under Ahn Jeong-bok after his teacher died, he recognized the true nature of Western learning that was very problematic among Geungi Namin scholars and held critical position on it. While he was in charge of correction of 「Cheonhakmundab (天學問答)」 by his teacher’s recommendation, he left a book 「Ansunamcheonhakhokmunbyeonui (安順菴天學或問辨疑)」 that states his opinions and criticitisms. This book well shows Nam Han-jo’s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e tendency of criticizing Western learning done by 18th century Geungi Namin scholars affected Yeongnam region’s Namin with the medium of Nam Han-jo. Therefore, such scholars who had academic exchange with Nam Han-jo as Jeong Jong-ro, Jo Sul-do, Hwang Yong-han, Shin Che-in and Lee Dong-geub left their own books that contain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In addition, Ryu Geon-hyu, who was a pupil of Nam Han-jo, wrote 『Yihakjibbyeon (異學集辨)』. As shown above, Nam Han-jo played a great role in spreading anti-Western learning awareness throughout Yeongnam region in the late 18<SUP>th</SUP>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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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馬祖 門下의 다양한 禪風 고찰

        정운스님(신명희) 한국선학회 2020 한국선학 Vol.0 No.56

        중국 당나라 때, 홍주종의 개조(開祖) 마조(馬祖, 709~788)는 조사선(祖師禪)의 조사이다. 마조의 문하는 기록마다 다른데, 적어도 88명에서 몇 백여 명까지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이 많다보니, 다양한 부류의 제자들이 있다. 먼저 교를 버리고 선을 선택한 사교입선(捨敎入禪) 수행자들이 있다. 두 번째 마조 문하에 여러 제자들이 있어서인지, 출가전이나 출가 이후에도 독특한 행적을 남긴 제자들이 많았다. 세 번째 부류는 특이한 집단인데, 재가자·비구니 여성 수행자, 그리고 독특한 선풍을 전개한 이들이다. 네 번째 부류는 마조에게서 심인(心印)을 얻은 뒤 은둔한 부류이다. 다섯 번째 부류는 중앙 제도권과 가까이 지내는 선사들이 있었는데, 이들로부터 마조선이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여섯 번째 부류는 한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선풍을 전개한 이들인데, 이들에 의해 마조선이 크게 발전되었다. 이 여섯 번째 부류에서 파생되어 신라 말기~고려 초기~고려 중기에 이르기까지 마조의 3세·4세·5세 등 다양한 제자들이 있다. 마조에 의해 당나라 때의 선사상이 발전하였고, 2대 제자와 3세에 해당하는 제자들에 의해 마조선은 중국 전역은 물론이요, 우리나라에까지 선풍이 전개되었다. 마조 문하에서 발전된 조사선이 근자에까지 전개되고 있음을 상기해 현 우리나라 선을 비추어보는 동기로 삼는다. During the era of the Tang Dynasty in China, the Buddhist monk Majo (709-788) of the Zen sect was the originator of the religious sect of the Zen thought that had been achieved by him, who was the founder of the school. The disciples of Majo are different in every record. At least 88 persons and up to over several hundred persons have been recorded. As there had been a lot of the disciples, there are the disciples of the diverse kinds. Firstly, there are the people who entered the Zen performance who threw away the religion and selected the Zen. The second kind is the people who had independently unfolded the Zen style in one region. Thanks to these people, the Majo Zen had been developed greatly. Regarding the third kind, by spending the time close to the central, institutional sphere, the Majo Zen had received the recognition from these people. The fourth kind is the kind who had lived in seclusion after obtaining the shimin from Majo. The fifth kind is an unusual group. They are the jaegaja and bhikkhuni (Buddhist nun) woman performers and the people who had unfolded the unique Zen style. Regarding the sixth type, there are the diverse disciples, including the third generation, the fourth generation, the fifth generation, etc. of Majo from the last period of Shilla to the beginning of Goryeo and to the last period of Goryeo. Thanks to Majo, the Zen thought at the time of the Tang Dynasty had developed greatly. And thanks to the disciples of the later generations and the disciples who pertain to the third generation, Majo Zen had been spread out widely not only in the whole region of China, of course, but, also, in Korea and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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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행 양상을 통한 가래조 고찰

        변진섭(Byeon, Jinsup) 한국무속학회 2017 한국무속학 Vol.0 No.35

        가래조는 경기도 남부지역의 무속굿에서 등장하는 장단의 명칭이다. 이 장단은 청배와 노랫가락의 반주에 사용된다. 현재의 굿에서 출현빈도가 높지 않고, 경기도 남부굿의 화려한 장단들에 가려져 실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장단이다. 하지만 가래조는 경기도 남부굿에서 주요한 장단이다. 그 이유는 가래조가 등장하는 굿거리가 굿의 핵심적인 재차이기 때문이다. 가래조는 구성이 323의 혼소박 형태의 6대강으로 고악보의 곡들과 연관이 된다. 연행방식은 무가의 종류에 따라 달라서 그 형태가 다양하다. 가래조와 관련된 그간의 연구는 대부분 장단자체에 집중되었으며, 그나마도 온전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로 박자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가래조가 10박이냐 혹은 16박이냐의 문제 제기에 머물렀다. 논의가 확장되어 진전된 연구도 진행되었다. 김헌선은 서울의 중디밧산과의 비교를 통하여 장단의 기능적인 측면의 성과를 도출시켰다. 원나경은 무가와 선율 및 장단의 관계에서 접근하여 가래조의 연행면모를 밝히고 있다. 이상의 연구들은 장단의 구조와 역할 및 의의 등에 관련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부의 사례만을 다루고 있어 전체적인 면모를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고 연구를 확장, 심화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첫째로 가래조와 관련된 가능한 모든 자료를 대상으로 삼는다. 자료가 산만하게 존재하는데, 이들을 집적하고 정리하여 다양한 형태의 연행을 파악한다. 조사보고서에서 가래조의 의미를 찾고, 연행자료 분석을 통하여 양상을 확인한다. 둘째로 고악보, 불가에서의 화청, 동해안굿의 청보와의 관계를 통하여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측면에서 다른 곡들과의 상관성을 찾는다. 셋째로 이를 바탕으로 굿에서 가래조가 지니는 의의와 가치를 도출한다. 이 고찰에서 얻어진 소중한 사실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경기도 남부굿의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래조가 반주되는 굿거리는 제석, 군웅, 조상이다. 이 굿거리들은 굿에서 성대하게 모셔지는데, 굿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인식하는 자손, 마을의 안녕, 조상님과 관련된 신이 주신이 된다. 둘째, 연행방식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가래조는 청배와 노랫가락이라는 두 가지의 무가에서 기능을 하는데, 장단의 속도와 구송의 방식 및 반주와 창의 결합 측면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가래조의 연행방식은 이외의 장단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자성을 지닌다. 셋째, 가래조는 고악보, 화청, 청보와 상관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가래조는 경기도 남부굿에서만 홀로 등장하는 장단이 아님이 드러났다. 과거, 현재, 미래의 곡들과 가래조라는 장단을 바탕으로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다른 어느 장단 못지않은 깊은 역사성과 광범위한 분포를 갖는 소중한 연행임이 확인된다.

      • KCI등재

        『조론(肇論)』의 성속불이(聖俗不二) 사상과 혜공의 대중교화

        이병학 ( Lee Byoung Hak ) 한국사상사학회 2018 韓國思想史學 Vol.0 No.60

        『삼국유사』의 「이혜동진」조에서는, 신라 승려 혜공이 승조의 저술, 『조론』을 자신의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혜공은 『조론』을 매우 중시한 것이며, 승조를 삶의 모범으로 여긴 것이 분명하다. 승조는 ‘유’와 ‘무’ 어느쪽에도 치중하지 않는 포용적 경향의 교학을 지녔다. 그는 ‘양 극단(유·무)’의 논리를 자제하면서 세속인과 친숙하여야 한다는 점(‘화광동진’)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즉 혜공이 『조론』을 중시했다면, 이러한 실천적 측면의 교학에 착안하였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승전』에 나타난 기록과 같이, 승조는 『유마경』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조론』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유마경』에서는 주인공 ‘유마힐’이 자신의 ‘질병’을 ‘중생의 번민’과 동일시하면서 적극적인 대중교화를 강조하고 있다. 승조 역시 『유마경』을 통해 ‘성속불이’의 태도를 일관되게 중시하였다. 따라서 그는 ‘유’와 ‘무’, 양자를 포용적으로 보면서, ‘진제’와 ‘속제’의 원융을 주장했던 것으로 인식된다. 서민의 지위로 보이는 승조와 그의 독자적인 입신과정은 신라의 대중교화승들의 생애와 닮아있다. 혜공은 노비 소생이었으며, 사복 역시 기층민 과부의 아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종교적 성취를 거둔 뒤, 원효를 능가하기도 했으며, 귀족세력을 교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당시의 철저한 신분의식과는 거리가 있다. 어쩌면 자신의 종교적 능력을 통해 사회적 신분을 넘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혜공을 비롯한 신라의 대중교화승들은 승조의 사회적 처지와 성공을 모범으로 삼아 대중교화에 더욱 매진했을 것이다. 승조의 통합적 교학논리는 원효가 중시한 『대승기신론』의 구조와 유사하다. 극단적인 이원론을 극복한 승조의 교학은 현상 세계(‘心生滅門’)와 종교적 진리 영역(‘心眞如門’)을 모두 ‘일심(一心)’의 범주로 포섭하려 했던 『대승기신론』의 논리와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승조의 사상이 원효에 영향을 주었음을 암시한다. 무엇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논리를 통해 저술한 『금강삼매경론』에 승조의 ‘성속불이’ 사상을 강조하기도 했다. 요컨대 승조의 교학은 『대승기신론』을 바탕으로 교리를 통합적으로 인식한 원효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원효의 대중교화 논리에도 영향을 주었음이 확실하다고 보인다. In “SamgukYusa(三國遺事)”, Hyegong(惠空), the Buddhist monk of the Silla(新羅) Dynasty, thought that “the Joron(肇論)”, written by Seungjo(僧肇), is his own writings. In addition, he considered Seungjo was like himself. Seungjo had a comprehensive logic that he did not bias either '有(Image, Illusion)' or '無(Source, Voidness)'. Hyegong(惠空) emphasized on < Joron >, this practical aspect was considered important. Seungjo(僧肇) highly regarded the “Yumagyoung(維摩經)” as significant doctrine in his life. This can be found in the mention ; The main character, Yuma-Hill(維摩詰), regarded that his illness was like suffering people. In the book(commentary, 肇論), Seungjo(僧肇) also considered the sacred(聖) and secular(俗) equally. Seungjo(僧肇), as a commoner, his rise to fame was similar to the life of a commoner of Silla(新羅) monk. Hyegong(惠空), Hyesook(惠宿) and Sabok(蛇福), were also a farmer and the son of a widow. Perhaps Monks ,origin of ordinary person, had strong sense of kinship toward Seungjo in social position. After their religious success, they surpassed Wonhyo(元曉, 誓幢) to his astonishment. The Buddhist doctrine of Seungjo(僧肇), in his book(肇論), is similar to the structure of “Daeseunggisinron(大乘起信論)”. This can be confirmed by referring to the idea of the "和光同塵(enlightenment for people in human society)." in his literary works(肇論). In short, Seungjo(僧肇)'s ideas influenced on Wonhyo(元曉)’theory exactly, GeumgangSammaegyeongron(金剛三昧經論) for instance, and helped Wonhyo's Buddhist activities.

      • 韩国对朝奥运外交对朝鲜半岛局势的影响

        涂,波 대한중국학회 2018 대한중국학회 학술대회 발표집 Vol.2018 No.2

        朝鲜在金正恩就任最高领导者以后一直在不断试射导弹, 并进行了数次的核试验。尤其在2017年, 朝鲜进行了两次核试验和多次导弹试射, 极大的加剧了朝鲜半岛的紧张局势, 也引发了国际社会的一致批判和制裁。2017年新上任的韩国文在寅政府一方面采取了加强韩美同盟, 通过举行联合军演等方式来应对朝鲜的核导试射, 另一方面也没有放弃在参选期间就提出的继承发扬“阳光政策”, 文在寅先后提出了“柏林构想”、向朝鲜提供人道援助计划和朝鲜局势“驾驶员论”等具有怀柔性质的外交设想。伴随着平昌冬奥会越来越近, 韩国对朝鲜加强了“奥林匹克外交”的攻势。文在寅于2017年末向美国提出了延期美韩军事演习的提案, 释放出了对朝鲜的最积极信号, 获得了朝鲜的积极回应。两国在板门店举行会谈, 拉开了以“平昌奥运会”为契机的朝韩对话序幕。2018年后, 朝韩成功实现了三次首脑会谈, 朝美首脑也成功的在新加坡举行了首次会谈。以奥运外交为契机, 朝鲜半岛的局势重新回到了协商谈判的良好局面。文在寅政府通过以平昌奥运会加深了朝韩两国的互信, 也加强了朝鲜弃核的决心;不过半岛的局势虽然有所缓和, 光靠韩国一国之力来推动局势的良性发展还面临很大的困难, 美国的态度将继续影响朝鲜半岛局势的未来发展方向;在奥运外交后期的半岛要实现无核化和推动和平进程仍然任重道远。朝韩等国应该充分利用平昌奥运外交带来的良好态势来延续对话, 促进朝美协商签署停战协定, 并最终找到朝鲜半岛走向和平发展的根本之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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