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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호와 미국 남감리교 선교

        강명숙(Kang Myung-sook) 한국사학회 2016 史學硏究 Vol.0 No.124

        1885년부터 1893년 가을까지 중국과 미국 남부에서 유학한 윤치호는 귀국 후 개성상인들의 풍부한 자본과 상재(商材)를 조선의 산업발전에 이용하기 위해 남감리교의 개성선교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 남감리교는 남부의 발전을 위해 흑인선교와 아프리카 선교에 몰두하였으므로 아시아 선교는 소극적이었다. 중국 선교부와 윤치호의 노력으로 조선 선교가 시작되었으나 남감리교 선교본부의 지원은 여러 가지로 부족하였다. 더구나 조선에 파견된 남감리교 선교사들은 중국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 중심 말씀 중심의 선교를 고집하여 윤치호가 계획한 조선 근대화를 위한 개성 선교는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다. 윤치호는 남감리교 중국 선교부의 선교정책을 극복하기 위해 개성으로 이주하여 ‘한영서원’을 설립하고 농업중심의 실업교육에 나섰다. 윤치호의 실업교육은 농업을 육성하여 생산을 증진하고 그를 바탕으로 조선의 산업화를 추진하려는 중농주의 산업화였다. 그러나 농업중심의 실업교육(반공과)은 일제가 제정한 ‘사립학교령’과 ‘개정 사립학교령’에 의해 공업부로 재편되어 일제가 요구하는 노동자 교육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한영서원의 실업장은 선교사들의 주도로 근대 공장으로 변모하였으나 조선의 산업화를 견인하지 못하고,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제공하는 선교부의 공장으로 전락하였다. 1907년 안창호와 손잡은 윤치호는 개성상인들을 민족자본가로 결집하려는 ‘신민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윤치호는 모범촌을 만들고 개성상인들을 모범촌에 참여시킴으로 ‘신민회’ 회원을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선교본부의 지원이 미진하여 모범촌을 설립하지 못했고 산업화의 방법도 제시하지 못하여 이재에 명민한 개성상인들의 참여를 도출하지 못했다. 그래도 윤치호는 미국을 방문하여 선교본부의 지원을 호소하고, 학생 YMCA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개성상인들의 ‘신민회’ 참여를 끝내 유도하지 못했다. 윤치호가 추진한 개성상인들의 민족자본가화는 실패하였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 윤치호가 파트너로 설정한 개성상인들이 조선의 근대화운동을 외면한 이유는 개성상인들의 자본이 토지와 대부업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성상인들은 일제의 조선미 수탈정책과 인삼전매제도 그리고 금융경영에 편승하여 인삼과 미곡 중심의 토지 경영과 고리대금업에 안주하면서 산업자본가로의 변신을 외면하였다. 그러므로 개성상인을 근대화의 파트너로 선택한 윤치호는 개성상인들의 변화를 촉구하는 종교운동과 교육운동 사회운동 등을 전개하면서 개성상인들의 변화를 기다렸다고 하겠다. 윤치호는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고 민족 발전에 투신할 기독교 자본가의 출현을 남감리교 선교를 통해 도모하였으나 선교와 변혁의 대상이었던 개성상인들은 윤치호의 노력을 외면하였다. 윤치호는 유학시절 입장료를 내면서 쫓아다녔던 존스(Samuel P. Jones :‘남부의 Moody’로 불림)의 부흥운동이 조선에서도 재현되어 라이먼(T. G.Ryman)과 같은 희생적인 자본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윤치호가 간절히 바라던 조선의 근대화는 이기적인 식민지 토착자본의 논리와선교사들의 자기편의적 선교정책 그리고 일제의 탄압에 둘러 싸여 갈 길을 잃었다고 하겠다. After studied in China and America from 1885 to 1893, Yun Tchi-ho(Yun) came to Korea and promoted the Mission of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MECS) in Gaeseong. Through the Mission of MECS Yun wanted to modernize Korea with the Gaeseong Region Merchants. Say in other words, in order to develop the agriculture and industrialize the Korea, Yun chose the Gaeseong Region Merchants to utilize their capital and abilities of management. But the South(America), defeated in Civil War, wanted to reconstruct the economy of the South. In oder to develop the economy and prevent the Blacks’ emigration, the South made an investment in Black and Africa mission. Since the resources of MECS were exhausted and they hated Chinese, the Mission of Asia were difficult and Korean Mission were more difficult. Besides korean mission in Gaeseong region was more difficult for the policies of missionaries. Missionaries wanted to take mission in Seoul and evangelize instead of setting up the schools and dispensaries. In oder to enlarge the mission of MECS in Gaeseong, Yun emigrated to Gaeseong and erect the Anglo-Korean School. Through teaching the agricultural and the industrial skill, Yun wanted to modernize korea. By the way Japanese ‘Law Governing Private Schools’ was distorted the education of skills in Anglo-Korean School. Skill for agriculture was changed into skill for factory. Also the policies of missionaries were distorted the skill education. C. H. Deal(teacher in Anglo-Korean School) changed the manual factory into machine industry. In spite of exporting the cotton textile, the machine industry was not developed the korean cotton textile industries. And Yun Participated the New People’s Society to gather the Gaeseong Region Merchants. Also Yun wanted to make them into national capitalists. But they disregarded the Yun’s efforts and went on board japanese’ appeasements in production of rice, ginseng, and loan markets. The Gaeseong Region Merchants did not want any economical damage. By the japanese’ colonial oppression, the Gaeseong Region Merchants’ self-centered minds and the egoistic missionaries’ policies, Yun’s efforts of korean modernization were fai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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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일기와 다양한 근대] : 윤치호의 "죽음"과 장례문화 인식 - 『윤치호 일기』를 중심으로 -

        ( Juljan Biontino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5 民族文化硏究 Vol.66 No.-

        윤치호(1864-1945)는 널리 알려진 역사 인물이다. 윤치호가 당시 평균보다 오래산 윤치호의 삶이 길어지면서 그는 부인 2명과 사별하였고, 많은 가족, 친척, 친구, 지인의 죽음에 대해 애통하기도 했다. 윤치호 자신이 1945년 12월 6일 뇌출혈로 인해 81년간의 삶을 마쳤을 때, 그는 조선 말기, 대한 제국의 흥망, 일제 강점기의 전부와 한반도의 광복, 해방 공간을 모두 경험하고, 약 60년에 걸쳐 이러한 경험과 자신의 내면세계까지 일기에 자세하게 수록한 인물이었다. 조선 왕족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며 명성황후의 암살과 장례식·제사를 경험하고, 고종과 순종의 죽음과 국장도 경험했고 이런 사건들에 대한 기록 역시 남겼다. 게다가, 일본 총독부의 한국 장례식, 무덤 문화에 관한 개입을 목격했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기타 근대적 공동묘지에 대해도 알고 있었으며, 기타 동시대의 역사적 인물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도 언급했다. 그런 한편으로 그는 일본의 대한(對韓) 정책은 “오래 끌었던 나라의 죽음”의 원인으로 인식하며, 1901년에 “틀림없이 조선은 정치적으로, 지식적으로 완전히 죽어버렸다”라고 애통했다. 본 연구는 윤치호는 이러한 여러 가지 차원의 죽음에 대한 언급을 바탕으로, 그의 죽음과 장례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1984)의 대표적 죽음 관련 연구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죽음”의 역사성 연구에 공헌하려고 한다. 윤치호 일기를 통해, 조선 근대화의 갈림길에 썬 윤치호가, 커다란 시대적 변화 속에서, 삶의 끝으로 불변성 강한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인식한지 알아볼 시도이다. 또한 “죽음”에 불변성이 있더라도, 장례 문화는 시대 배경에 따라 당연히 바뀔 것이다. 윤지호가 기독교와 일제 통제로 인해 바꿔가는 장례문화에 대한 인식을 추구함으로써 근대화를 늘우선한 윤치호의 조선 전통문화와의 대립에 대해도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윤치호가 젊은 시절부터 조선을 지옥으로 생각했음을 일기에서 알 수 있는데, 조선이 곧 지옥이라면 사후에야 갈 수 있는 하늘은 이 조선의 대안이었다. 나이 많은 윤치호 개인에게도 죽음은 곧 더 행복한 세계의 구상이었다. 서양과 달리 기독교가 지배이념이 아니었던 조선에서, 기독교는 줄곧 윤치호에게 조선의 상태를 분석하는 틀과 문명에 대한 인식적 기반을 제공했다. 윤치호가 친일적인 행동을 보이면서 백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황인의 해방을 기리던 시기에도 영어로 일기 쓰는 관습을 못했던 것처럼, 그는 기독교적 인식을 포기하지 못했고, 그의 우민관도 극복하지 못했다. Without doubt, Yun Ch``i-ho (1864-1945) is one of the most well known and controversial figures in modern Korean history. His diaries, covering a huge span of his eventful life, give witness of the thoughts and feelings of a man who struggled between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 Korean nationalism and Japanese collaboration. When Yun himself passed away during the morning of December 6, 1945, he had not only witnessed the end of the Korean Empire and the entire colonial period, but also had parted from three wives and many other family members and friends. In this age of huge transformations in Korea, Yun was also a firsthand witness to such prominent deaths and funerals as those of Queen Min and King Kojong and personally had to struggle with the Japanese meddling to reform Korean burial practices. Although Yun``s views on death and burials can by no means be considered representative for the lot of Koreans during the colonial period, his concerns on death and burials will not only help to trace how death had an impact on his singular life and his changing attitudes. This paper also aims to provide insights into how a modern conception of death became a constant in an ever changing every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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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서서원의 종교교육이 윤치호의 개종에 미친 영향 연구

        李惠源 한국교회사학회 2019 韓國敎會史學會誌 Vol.52 No.-

        본 논문은 윤치호가 1885년부터 1888년까지 중국 상해에 머물며 남감리회 미션스쿨인 중서서원에서 수학하던 시기를 그 연구대상으로 삼아, 윤치호가 중서서원에서 받은 근대교육과 종교교육에 대해 살펴보면서, 미션스쿨이 윤치호의 개종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대해 본 논문은 첫째, 윤치호가 상해에서 수강한 과목들을 당시 중서 서원의 8년 학제에 포함된 교과목들과 비교하면서 윤치호가 그 중 3-6학년 도 과정을 수학한 것을 밝혔으며, 둘째, 중서서원의 종교교육을 검토하면서 중서서원은 세속학교가 아닌 전형적인 미션스쿨로서, 윤치호도 그가 받은 모든 수업에서 성경이 교재로 사용되었고 매일 두 차례씩 종교예식을 갖고 토요일에는 성경강독 수업을 받았음을 살펴보았다. 셋째, 선행연구에서와 달리 윤치호가 처음 예배당에 간 것은 1885년 2월 15일이 아닌 2월 8일이었으며 교회에 데려간 사람은 알렌이 아닌 로얄 선교사였음을 밝혔고, 이를 통해 윤치호가 중서서원에 입학한 직후부터 선교사들의 특별한 선교적 관심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음을 추론하였다. 결국, 윤치호는 윤리적 종교에 대한 개인적 관심 및 근대 사상에 대한 관심에서 스스로 기독교 에 접근하기에 앞서, 이미 미션스쿨의 종교적 학풍과 선교사들의 전략적 전도 과정을 통해 이미 기독교적 환경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었다. This study illustrates the influence of the mission school's religious education on Chi-ho Yun's conversion. From 1885 to 1888, Yun moved to Shanghai and studied in the Anglo-Chinese College run by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The study reveals that the Anglo-Chinese College had eight years of curriculum and Yun entered into the third grade. Next, the study finds that the college followed curriculum typical of mission schools in Asia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They used the Bible in every class, had religious services every morning and afternoon, and had a Bible class every Saturday. The study also finds that Yun went to church for the first time in his life on February 8, 1885, influenced by Rev. W. W. Royall—not on February 15, 1885, led by Rev. Y. J. Allen as previously argued. Missionaries paid great attention to Yun, who was an influential exile from a country that the M.E.C.S Church had yet to enter, and made every effort to lead him to Christianity. Thus, the study emphasizes the strategic approach taken by the mission school in converting Yun, which created a particular environment for him to explore and develop his personal interest in the religion and modern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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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호(尹致昊)의 『우순소리』저본 연구

        최선아,김양선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7 人文硏究 Vol.- No.78

        To find the original script of “Usunsori,” I searched figures who contacted Yun Chi-Ho thoroughly based on his journal and Jwaong Yun Chi-Ho Letters(佐翁尹致昊書翰集) in this research. As a result, Brother Loehr and George R. Loehr had been confirmed as the same person, and Yun's teacher George R. Loehr wrote HaeHoon YooSul(孩訓喩說) on 1900, student Yun Chi-Ho published “Usunsori” on 1908. George R. Loehr wrote HaeHoonYooSul(孩訓喩說) earlier and he acted as a catalyst to the birth of “Usunsori” as his teacher. And the dean of Anglo Chinese College Young John Allen let student Yun Chi-Ho to be exposed to Aesop's Fables naturally by publishing Man KookGongBo(萬国公報 The Chinese Globe Magazine) As a result of having compared EuSeupYooUn(意拾喩言) of Robert Tom and HaeHoonYooSul(孩訓喩說) of George R. Loehr with “Usunsori”, I found that Yun Chi- Ho eventually translated to let readers contact author directly without any interference as possible as EuSeupYooUn(意拾喩言) and HaeHoonYooSul(孩訓喩說), even though they had different purposes EuSeupYooUn(意拾喩言) and HaeHoonYooSul(孩訓喩說) are for the Christian propagation, and “Usunsori” is for the enlightenment. 『우순소리』의 저본은 고대에서부터 전승되어온 이솝우화 원본의 모호성 등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우순소리』의 저본을 찾기 위해 2단계에 걸쳐 조사하였다. 첫째, 작가를 중심으로 저본을 찾아보고자 중국유학시절 윤치호의 일기와 『(국역) 佐翁 윤치호 서한집』등을 바탕으로 윤치호가 접촉한 인물들을 면밀히 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윤치호의 『우순소리』는 다수의 이야기가 『의습유언(意拾喩言)』과 『해훈유설(孩訓喩說)』을 참고하여 집필되었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 근거는 다음 3가지이다. ①중서서원의 교사이자 목사 조지 알 로에(Rev. Geroge R. Loehr)가 상해상무인서관(上海商務印書館)에서 로버트 톰의 『의습유언(意拾喩言)』을 저본으로 한 우화집 『해훈유설(孩訓喩說)』를 출판했다는 점과, 윤치호의 일기에 빈번하게 출현하는 인물인 ‘Brother Loehr’와 조지 알 로에는 동일 인물로 윤치호의 스승이자 먼저 이솝우화를 번역한 번역가로서 『우순소리』의 집필에 촉매제 역할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② 중서서원의 학장 알렌이 창간한 「만국공보(萬國公報)」에 『의습유언(意拾喩言)』의 우화들을 정기적으로 게재함으로써 당시 학생이었던 윤치호도 자연스럽게 우화들을 접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는 점이다. ③ 『의습유언(意拾喩言)』에는 존재하지 않으나 『해훈유설(孩訓喩說)』과 『우순소리』에는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스토리가 있다는 점이다. 둘째, 『우순소리』의 내용을 중심으로 저본을 찾고자 로버트 톰의 『의습유언(意拾喩言)』, 조지 알 로에의 『해훈유설(孩訓喩說)』와 『우순소리』를 각각 비교 분석하였다. 그 결과 다음 3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① 우선 『의습유언(意拾喩言)』과 『우순소리』를 비교 검토한 결과, 『의습유언(意拾喩言)』의 개정판 『이사보유언(伊沙菩喩言)』에는 종교적 신화적인 이야기가 대폭 생략되어 출판되는데, 생략된 이야기가 『우순소리』에 번역되어 재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윤치호는 『이사보유언(伊娑菩喩言)』 등과 같은 개정판을 본 것이 아니라 직접 『의습유언(意拾喩言)』를 보고 『우순소리』를 집필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의습유언(意拾喩言)』과 ㅍ우순소리』가 제작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그 번역 경향을 비교해보니, 번역의 원 목적은 서로 달랐지만, 윤치호는 로버트 톰과 함께 ‘작자가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으로 번역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② 다음은 『해훈유설(孩訓喩說)』과 『우순소리』를 비교한 결과, 『해훈유설(孩訓喩說)』은 『우순소리』가 창작되는 과정에 모티브가 되는 이야기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우순소리』의 제1화 「굴송사」는 플롯의 유사성과 그 내용면에서 『해훈유설(孩訓喩說)』의 제50화 「猿判猫争」에서 그 모티브를 따서 재창작한 스토리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상에 근거하여, 『우순소리』가 『의습유언(意拾喩言)』과 『해훈유설(孩訓喩說)』을 저본으로 제작되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겠다. 물론 일본유학 당시 접했을 가능성이 있는 『통속이소보물어(通俗伊蘇普物語)』와의 접점도 고려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280화의 방대한 내용으로 구성된 『통속이소보물어(通俗伊蘇普物語)』(1888년)과의 관련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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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 속에 나타난 윤치호의 서양 근대개념의 변천과 행위

        최영태 한국세계문화사학회 2014 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Vol.0 No.30

        This paper looks into the process through which Yun accepted the western modern thought and defines his idea of a civilized society and his behavior as to accepted western modern conception. Yun Chi-ho(1865-1945) was one of the most representative enlightenment leaders and intellectual in the times of historic turbulence in Korea from Enlightenment Age(1883-1904) to the Japanese Colonial rule(1910-1945). Yun Chi-ho studied in Japan, China and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period of our nation's enlightenment only to learn about the social evolution theory and Christianity. Yun was the first in the Chosun Dynasty to study in Japan where he came into contact with and accepted the idea of civilization enlightenment of the West. The first period Yun accepted modern conception through japanese intellectuals. The modern conception was 개화(the flowering). The second period his modern conception was that modern age is the point to start the genuine world history. European modern civilizations are organized as the theory of social evolution, also a Caucasian superiority and racism. It is the problem how Korean modern intelligentsia accepted and recognized these Western modern civilization. The modern nation or modern society as envisaged by Yun was an enlightened and civilized western society comparable to that of the U.S and Japan, a democratic society where the public enjoy freedom and citizen rights, and a christian society where the christian doctrine of love is exercised by the reflection of an individual and the public action. The third period modern conception was not changed the second period modern conception. Yun's ideas on civilization with its emphasis on the acceptance of the modern West inclined to a excessive degree toward the enlightenment, westernization, the 'justice of power'. Such emphasis supported the social evolution theory and ultimately justified the cooperation between the Chosun and the colonial Japan. The first period Yun was a conservative and a liberalist, the second period was a liberalist and a radical, the third period was a realistic liberalist. Ultimately Yun was liberalist his lifetime that accepted Individual freedoms and property.(Uiduk University) 19세기 조선이 처한 위기상황에서 지식인들은 발생한 문제를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윤치호 역시 이러한 위기 속에서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대표적인 지식이다. 그가 이해한 수용한 근대의 개념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윤치호가 수용한 첫 번째 시기(1888. 11이전까지)의 근대 개념은 일본 지식인들의 근대 개념을 선별하여 수용하였다. 그가 접한 근대 개념은 ‘문명’(civilization)이었고 서구의 문명과 문화의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지기 전의 의미였다. 이것은 서구의 문명, 즉 정치적 · 경제적 근대화라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개화’라는 의미였고 윤치호도 문명의 개념에 중요한 의미를 개화로 이해하였다. 그러다가 187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도 근대의 개념을 문명이라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일본에 유학중이었던 윤치호도 이러한 경향의 문명의 의미를 근대의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두 번째 시기 윤치호의 근대개념에 중요한 의미는 기독교와 물질적 근대화, 그리고 사회진화론이다. 그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측면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것도 있겠으나 이 시기 미국 유학을 통해 그가 보고 체험한 근대는 정신적인 측면의 문화라기보다는 물질적 문명의 근대라는 개념에 가깝다. 물론 그는 정신적인 측면의 근대도 도외시하지는 않았지만 특히 근대 개념의 중심에 물질적 측면의 근대, 산업화에 무게를 두었다. 그의 이러한 근대 개념의 이해는 (실업)교육이라는 부분에 특히 강조점을 두는 이유였다. 미국 유학에서 서구 제국주의의 속성을 체험하게 되었고 서구 근대의 개념 속에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이 있음을 인식하였다. 세 번째 시기 윤치호의 근대 개념은 새로울 것이 없다. 기본적으로 이 시기 그의 근대 개념은 두 번째 시기의 의미와 크게 차이가 없다. 그는 이 시기에 현실적으로 가능한 실업교육을 통한 경제적 근대화,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내적으로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단지 1938년 전후한 그의 행동은 그의 생애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왜곡된 근대 개념에 기반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왜곡된 근대 개념을 인식하고 행동하게 한 기저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의 근대 개념의 이해가 있어 가능했으리라 판단된다. 이러한 근대 개념의 이해를 바탕으로 윤치호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했을 때 그의 이데올로기는 변화의 속도라는 측면에서 격변의 가능성보다는 의회의 토론과 같은 사회적 리듬이나 기존의 통치법을 준수하려는 정당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육과정을 기반으로 한다는 의미에서 자유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윤치호의 전 생애에서 보이는 일관된 모습이다. 즉, 첫 번째 시기의 윤치호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양면을 가지고 있으며 두 번째 시기에서 윤치호는 구조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믿고 있으며 새로운 기초 위에서 사회를 재건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급진주의자의 모습도 보인다. 세 번째 시기도 그를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을 강조하였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여기에 수식어로 ‘현실적’이라는 말을 앞에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 개념의 이해 변천에서 나타난 그의 이념과 행동은 첫 번째 시기의 보수주의자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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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근대 기독교 유입의 여러 갈래 : 윤치호의 계몽사상과 기독교적 자유 -후쿠자와 유키치의 자유관과 종교관의 비교를 통해서-

        류충희 ( Chunghee Ryu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5 동방학지 Vol.171 No.-

        본고에서는 계몽지식인 윤치호(1865~1945) 의 계몽사상을 일본 메이지기 계몽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정치사상과 비교하여 논하였다. 본고에서 윤치호의 자유관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것이라고 가정했다. 특히 윤치호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종교관과 자유관을 분석하여 그 관점의 동일성과 차이, 그리고 그들의 관점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정치적 상상력을 문제 삼았다. 윤치호와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문명을 표본으로 삼아 인민계몽을 주장.실천하여 근대화를 추구한 인물들이다. 그 사상적 기반은 자유로운 개인과 사회.국가의 관계성을 전제로 한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이다. 윤치호와 후쿠자와 유키치가 논하는 문명론에는 자연 상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인식이 공통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인간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대한이해가 달랐다. “종교 밖에 소요(逍遙)”하는 태도를 일관하여 종교적 신앙에 거리를 두었던 후쿠자와는 인간의 “지력(智力)”에 의한 “정신의 자유”에 중점을 두었다. 윤치호도 후쿠자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성을 중시했지만, 신앙에 근거한 기독교적 자유와 구제를 염두에 두고 문명론을 이야기했다. 이처럼 윤치호와 후쿠자와 유키치에게는 종교의 신앙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적 차이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 두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는 종교를 계몽의 도구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공리주의적인 인식의 기층에는 문명론, 내셔널리즘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이 공리주의적 종교관의 기층에는 신(문명, 국가) 등과 개인의 관계에 근거한 개인의 내면화.인격화된 근대적 신앙이라는 정치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다. 윤치호는 조선인이 적자(適者)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절대적 조건이라고 여겼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종교의 신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고수했지만,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종교의 효용성이라는 공리주의적 태도를 평생 견지했다. 윤치호는 서구문명과 기독교의 암면을 인식하면서도 기독교와 문명에 대한 그의‘신앙’이 존재했기 때문에 문명론을 상대화할 수없었다. 후쿠자와 역시 서구문명을 절대적 명제로 인식하는 ‘신앙’적 태도로 문명론을 주장했다. 윤치호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치사상의 비교분석을 통해서, 본고에서는 근대 동아시아의‘자유’라는 정치적 상상력과 ‘신앙’이라는 종교적 상상력이 상호 연관되어 작동하는 사상적 계보의 한 예를 제시했다. This paper discusses the Enlightenment thought of Korean Enlightenment intellectual Yun Ch’iho (1865-1945) in comparison with the political thought of famous Meiji Enlightenment intellectual Fukuzawa Yukichi (1835-1901). This study hypothesizes that Yun’s view of liberty was based on the Christian faith. In particular, it discusses the two men’s views on liberty and religion,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in their views, and the driving forces behind their fundamental political imaginations. We can see that Fukuzawa and Yun shared an understanding of Man’s freedom from, and control over, nature in civilized conditions. However, they differed in the ways they considered the driving force behind this freedom and control. While Fukuzawa believed it was intelligence, Yun Ch``iho agreed that intelligence was crucial but believed that the Christian faith was a more important and fundamental force than intelligence. Yun Ch``iho’s and Fukuzawa Yukichi’s views on liberty and religion involved various factors, including civilization, nationalism, and Christianity. We can assume that what was at work in all of these factors was the religious imagination of modern faith. This faith is bas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or civilization, or the nation) and the individual, and the way this relationship is internalized and personified in the individual’s mind. Therefore, it is difficult for people who believe that civilization and the nation have a divine origin that began with God to stop imagining this divinity as an absolute propo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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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년 元山 콜레라 창궐을 통해 본 尹致昊의 정부 비판

        김용진 ( Kim Yong-jin ) 청계사학회 2021 청계사학 Vol.23 No.-

        『윤치호 일기』의 원산 기록은 윤치호가 덕원부윤 겸 덕원감리로 1899년 3월에 부임하여 1903년 2월까지의 활동상을 담고 있다. 재임 기간 동안 자신이 겪으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나 일상 생활 등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어 개항장 원산을, 한 개인의 일기를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특히, 그는 1902년 원산의 콜레라 창궐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과 원산 주민들의 비위생적 관념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였다. 『윤치호일기』에서 1902년 원산의 콜레라 창궐을 주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윤치호가 독립협회를 조직해서 근대 자주 개혁을 추진하려던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배아닌 유배’ 로서 선택한 첫 피난처가 원산이었다. 그가 지방관으로서 겪은 원산의 콜레라 현장은 조선의 낙후성을 적나라하게 들어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1902년 콜레라 창궐은 1895년 콜레라 제4차 대유행 이후 조선의 중앙 정부에서 각종 법령과 규칙 등을 반포함으로써 서양의 근대 의료 체계로 진입하고자 시도하던 와중에 겪은 첫 번째 사례였다. 이는 1902년 콜레라 창궐이 조선 정부의 서양 근대 의료체계의 수용과 그에 따른 효용성 여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셋째, 원산은 동북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과 물산의 집산지이자 군사상의 요충지로 부각되면서 러시아와 일본 등 여러 열강들의 각축장이 전개되는 곳이었다. 이에 따라 1904년 러·일 전쟁의 전초전 역할을 하였다. 이는 콜레라 창궐의 급속한 확산에 부채질하는 것이었다. 넷째, 대표적인 개화지식인 중 한 명인 윤치호가 원산에서 부임하면서 기록한 3여 년간의 일기는 개화지식인의 당시 시대 인식을 엿볼 수 있으며, 또한 공적인 기록에서 담아내지 못한 내면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윤치호일기』는 관 주도의 공적 기록이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던, 날 것의 기록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당대를 살아간 개화지식인 내면의 속사정을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그동안 선행 연구에서는 그의 사상적 토대를 주로 사회진화론적 관점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일기 속에 담겨진 윤치호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윤치호 개인이 느꼈을 좌절·감정·성격 등이 응축되어 기록으로 표출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원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여러 요인에 기인한 바가 컸으며 이는 비단 원산에만 머물러지 않고 조선 왕조와 조선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장되었다. 다시 말해 윤치호가 평소에 지녔던 사상적 측면 뿐만 아니라 그가 처한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함을 시사한다. 한 인간의 사상은 그가 겪은 사회적 경험을 기반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당시 내한한 서양 의료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던 조선에 대한 인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방관자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부정시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일관된 ‘일그러진’ 태도는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에 따라서 ‘침략적 사회진화론’ 으로 서서히 심화되었고, 그에 따른 일본에 대한 찬양과 동경은 종국에는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 전쟁을 거치면서 고급친일파로 변모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치호가 작성한 방대한 일기는, 그가 친일파임을 차치하더라도 당시 시대 상황과 한 지식인계층의 고뇌와 내면 세계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An account of the cholera outbreak in Wonsan is included in Yun Chi-ho’s Diaries. Yun recorded it when he was magistrate and direc-tor-general of Deokwon where Wonsan was located. He held the posts from March 1899 to February 1903. While in office, he wrote what he saw and heard as well as how he led his daily life. It is interesting to see the open port of Wonsan through his personal diary. In particular, his critical description of the government’s response to the cholera out-break in 1902 is noteworthy. First, the outbreak made him as magistrate confront the explicit backwardness of Joseon’s healthcare system. Second, on the other hand, it was a chance for him to verify the effi-ciency of the Western medical system which the government had just adopted. Third, Wonsan was a challenging place for him, where an in-fectious disease could spread rapidly to many people because it was a commercial port and a strategic military hub. The account provides a glimpse into the progressive intellectual Yun’s perception of the issue at the time which was not captured in the public records. This article examines not only the account but the process of how his perception of the local issue led to his criticism of the Joseon dynasty and its gov-ernment on the whole. Furthermore, while previous research has mainly focused on his ideology based on the theory of social evolution, this ar-ticle focuses on the social circumstances surrounding him. This is be-cause a man’s ideology is built on his social exper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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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윤치호의 식민지 조선 인식과 자조론의 정치적 상상력 -최남선의 자조론과의 비교를 통하여

        류충희 ( Chung Hee Ryu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6 동방학지 Vol.175 No.-

        본고에서는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윤치호의 인식의 특징을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 특히 자조론적 사고에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당시의 윤치호와 식민지 통치권력의 관련성을 폭력 성에 기초한 긴장관계로 파악하고 그의 행보를 조선지식인의 피식민자의 안전보장의 문제로 검토했다. 자조론적 사고는 윤치호에게 있어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인 동시에 조선인을 계몽하는 논리이자 식민지 통치권력을 비판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윤치호의 자조론적 사고는 현실주의적 특성의 발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윤치호의 자조론적 사고를 입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1918년에 자조론을 번역하고 그다음 해인 1919년에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에 주목하여, 그의 자조론적 사고가 3·1 운동의 정치적 상상력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지 살폈다.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 에서도 자조론적 사고가 보이는데,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년도에 출판된 자조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자조론의 내용은 개개인의 “사람(人)”의 자조를 통해 “국가”의 강성은 물론 “문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최남선의 자조론적 사고는 그가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 에 개인의 자유라는 보편성에 근거한 이상적 논리로 작용했다. 1910년대 윤치호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며 3·1운동에 참여한 조선인들과 3·1운동에 폭력적으로 대응한 식민지 통치권력, 이 모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그 이유는 윤치호의 자유주의적 사상, 특히 그의 현실주의적 자조론이 조선 독립불능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됨과 동시에 조선인의 권익을 보장하지 않는 식민지 통치권력을 비판하는 근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식민지기 조선인의 안정보장에 대한 윤치호의 추구는 현실주의적 자조론과 자유주의 정치사상에 기초한 틀 안에서의 것이며, 현실주의적 자조론은 식민지라는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사고하고자 한 논리로 작용 하게 된다. 3·1운동의 정치적 상상력을 제공했던 이상주의적 자조론은 1920년대 조선지식인들이 식 민지 상황을 용인하는 논리로 전화된다. 식민지상황 속에서 조선지식인들은 자신들, 나아가 조선인들을 계몽하고 자조·자립할 필요성을 주창하는데, 그들의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자조론의 정치적 상상력이 작용하게 된다. 윤치호가 그러하였듯이, 그들이 가진 자조론은 식민지 상황을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적 논리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This study discusses Yun Ch``i-ho (1865-1945)’s perceptions of colonial Korea in 1910s by focusing on his thought on liberalism, and particularly on the principle of self-help. The paper shows that Yun’s notion of “self-help” was a realistic principle used on the one hand to justify the colonial situation, and on the other hand to criticize the colonial ruling power. We conducted a comparative study by also considering Ch’oe Nam-son (1890-1957)’s different conception of “self-help”. For Ch’oe, who had himself translated Self-Help into Korean as Chajoron(自助論) in 1918, the principle of self-help was a form of ideal political imagination. In Chajoron, the notion of “self-help” supported the development of the individual as well as of the state, and the accomplishment of civilization. Ch’oe re-articulated his conception of “self-help” based on the idea of the universal freedom of the individual in the “Kimi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hich he drafted in 1919. The study then turns its attention to Yun Ch``i-ho’s relationship with the colonial ruling power, and the circulation of the principle of self-help and liberalism among Korean intellectuals in the 1910s. Yun criticized Koreans who supported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who joined the March 1st Movement. However, he also took issue with the colonial ruling power’s repression of the Movement. This ambivalent attitude to Koreans and to the colonial ruling power was based on Yun’s own liberal ideas, and particularly on his notion of self-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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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재화된, 그러나 다가갈 수 없는 서양 : 일기를 통해 본 청년기 윤치호의 서양 인식

        김용신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22 동국사학 Vol.73 No.-

        This paper attempts to trace why Yun Ch’i-ho, an intellectual in the transition period when state-centered “nationalism” and race-centered “orientalism” competed, had no choice but to return to “orientalism.” To this end, this study mainly analyzes Yun Ch’i-ho’s diary before he returned to Chosun permanently in 1895. This period was when Yun Ch’i-ho was 17 to 31 years old, which is essential in establishing one’s own values and worldviews. Furthermore, by examining with what criteria Yun Ch’i-ho perceived the West and the world before his full-fledged activities in Korea, we will trace the intrinsic causes of Yun Ch’i-ho’s affection for Japanese- led “orientalism” instead of “nationalism.” The West, which was claimed to be universality rather than specificity, was the reference point for Yun Ch’i-ho’s world perception. However, the exclusivity inherent in Western modernity did not allow him to access it thoroughly, so he had no choice but to choose “orientalism” as an alternative to the West. 본 논문은 ‘국가주의’와 ‘동양주의’가 경합하던 전환기 지식인이었던 윤치호가‘국가주의’보다는 인종주의에 근거한 ‘동양주의’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추적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윤치호가 1895년 조선에 영구 귀국하기 이전까지의 일기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한다. 이 기간은 윤치호가 17세에서 31세까지였던 기간으로 한 인간의 가치관, 세계관이 정립되는 청년기 시기이다. 국내에서의 본격적인 활동 이전에 윤치호는 어떠한 준거점을 가지고 서양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후 윤치호가 ‘국가주의’ 대신 일본 주도의 ‘동양주의’에 경도된 내재적 원인을 추적해본다. 윤치호가 ‘국가주의’ 대신 ‘동양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본 논문은 윤치호 내부에 내재된 서구에 주목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특수성으로서가 아닌 보편성으로 편재(偏在)하는 서구가 윤치호의 세계 인식의 준거점이었으나, 서구의 근대 속에 내재되어 있는 배타성은 조선인 윤치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기에 서구의 대안으로서 ‘동양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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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호의 미국 유학 경험과 사회개혁사상

        마상훈(Sang Hoon Ma),최연식(Yeon Sik Choi)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2017 동서연구 Vol.29 No.2

        이 연구는 윤치호의 미국 유학 경험이 그의 사회개혁사상 형성에 미친 영향을 살피는데 목적이 있다. 윤치호가 유학하던 시기인 19세기 말의 미국 남부는 기독교적 이상과 사회진화론이 현실에서 충돌하는 곳이었다. 윤치호는 인종 차별과 기독교적 가치가 공존하는 미국 남부의 모순적인 상황 가운데서 조선의 독립과 개혁이라는 당면의 문제를 해결할 개혁안을 구상했다. 윤치호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 독립과 자강을 이룰 수 있는 길은 힘을 기르는 것이며, 국가의 힘의 근원은 국민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윤치호는 자신의 사회개혁안을 통해 국민들의 능력을 향상시켜서 독립과 자강을 이루고자 했으며, 개혁의 초점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시민 교육과 실업 교육에 두었다. 이러한 윤치호의 개혁안은 국가의 외형적 독립 보다는 국민의 삶의 조건 향상과 권익 증진을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먼저 실력을 갖추어야 실질적인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외세의 통치를 정당화 하는 논리로 활용될 수도 있었다. 이 점에서 윤치호의 사회개혁안은 근대적 시민을 형성하고 사회를 개선할 가능성을 담고 있었지만, 동시에 강자의 약자 지배를 불가피한 현실로 인정하고 독립과 자강을 위해 강자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한계도 드러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effect of Yun Ch’i-ho’s experience of studying in America had on his social reform thought. The American South in the late 19th century, during the time he studied abroad, was a place where Christian ideals collided with social Darwinism. He formulated reform projects to solve the issues of independence and reform that Korea was faced with while he lived amidst the contradictory situation in the American South where racial discrimination and Christian values coexisted. He decided that within the international affairs dominated by the law of the jungle, the road to independence for Korea was to build strength, and that the source of strength in a country was within its people. Through his social reform projects, he aimed to achieve independence and self-strengthening by improving the ability of the people, and focused the reform on civic and industrial education based on Christian spirit. These types of reformation projects by Yun placed importance on improving living standards, and enhancing the rights and interests of the people over the outward appearance of political independence. However, his idea that actual independence can only be achieved after competence is achieved, could be used as the logical basis to justify foreign rule. In this regard, while the social reform projects proposed by Yun had the possibility to cultivate modern citizens and improve society, it also had the limitations of acknowledging rule of the strong over the weak as unavoidable reality and justifying the rule of the strong as part of achieving independence and self-strengthe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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