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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의 조지훈과 민족문화 프로젝트

        고지혜 ( Ko Ji-hye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21 民族文化硏究 Vol.90 No.-

        이 논문은 1960년대 조지훈의 학술 활동을 조감하고 당대의 담론 지형 안에서 그 위치를 가늠해 보면서 ‘학인 조지훈’을 역사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다. 1964년에 조지훈은 단독저서 1권과 공동저서 2권을 출간하고 잡지 및 학술지에 3편의 논고를 발표 했으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으로서 학술지 『민족문화연구』를 창간하고,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 및 출간했다. 이러한 조지훈의 학술 활동은 민족이라는 주체의 삶을 이루는 ‘거의 모든 지식’을 체계화하는 작업, 이른바 ‘학(學)으로서의 민족문화’를 수립하는 것으로 수렴된다. 즉, 조지훈은 ‘민족지 구축’과 ‘민족문화사 다시 쓰기’라는 방법론을 통해 민족문화학을 세우고자 했는데, 이러한 작업의 배면에는 면면히 이어 왔어야 할 단일민족의 전통과 문화가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1920년대생 조지훈의 학술 활동은 언제나 ‘일본’ 혹은 ‘식민의 경험’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기에, 결국 조지훈이 몰두했던 것은 식민사학이 그토록 부정했던 ‘단일한 실체로서의 국가/민족’이 상정되고 작용될 수 있는 지식체계를 만드는 일이었으며, 이러한 ‘탈식민을 위한 욕망’이야말로 학인 조지훈을 추동하던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지훈의 탈식민 민족문화학에 대한 구상은 식민지 조선학운동의 연구 성과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특히 최남선의 학술적 작업을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는 조지훈의 작업은 우리 민족문화(사)에 내재해 있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계승하고 발현시키는 학술 활동이야 말로 민족의 독자성과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작업이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이는 196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역사인식이기도 했다. 즉, 조지훈은 민족을 주체로 하는 ‘계보의 서사’를 상상하고 창출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작업에는 보편에의 충동, 달리 말하면 한국문화사/문학사에도 형이상(사상)이 있음을 증명해내고픈 욕망이 잠재해 있다. 이는 식민과 탈식민이 교차하고, 분단과 냉전체제 안에서 치열한 담론 투쟁이 일어나던 1960년대의 시대정신이기도 하며, ‘한국적인 것’을 탐구하고 찾아내야 했던 (한)국학 연구자로서의 자기정립을 향한 의지이기도 했다. This study aims to examine scholar Cho Ji-hoon in terms of historical context by seeing the entire view of his academic activities in the 1960s and estimating the position within the discourse arena of that time. In 1964, Cho Ji-hoon published one single-authored book, two co-authored books, and three research papers in periodical and academic journal, issued the academic journal Korean Culture Studies as the Research Director of the Institute of Korean Studies, Korea University, and planned and published An Outline of the Korean Civilization. His academic activities are converged into establishing the project of systemizing ‘almost all knowledge’ that comprise the life of ethnic group, so-called ‘national culture as academic studies’. In other words, he tried to establish national culture studies by ‘establishing ethnography’ and ‘rewriting national culture studies’. There underlain the problem consciousness that tradition and culture of a single race, which should have been passed on continuously, were not properly succeeded. Since the academic activities of Cho Ji-hoon who was born in the 1920s had no other choice but to rely on either ‘Japan’ or ‘colonial experience’, he focused on making a knowledge system that can introduce and apply ‘country and race as a single substance’, which was totally denied by the colonial academia. Such a desire for decolonization was an impetus for him. When it came to study contents and methodology, he substantially succeeded the academic projects of the 1920s colonial era Joseonhak movement, especially Choi Nam-seon. Here underlain the thinking that academic activities succeeding and manifesting mankind’s universal value inherent in the Korean ethnic culture history is the project of identifying race’s identity and existence value. This was the historical awareness of the intrinsic development which began to be discussed from the late 1960s. In other words, Cho Ji-hoon aimed to conduct the work of imagining and creating ‘description of genealogy’ which became the root of nation. Here underlain universality orientation―desire to prove that metaphysics exist in Korean culture and literature history. This is the spirit of the 1960s when colonization and decolonization combined and fierce discourse struggle took place in division and the Cold War and the will toward establishing oneself by researchers of Korean Studies who had to explore and discover ‘Korean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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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논문: 문화연구의 비판적 성찰; "문화" 개념과 "성차" 관련 개념들에 관한 몇 가지 고찰 :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 "페미니즘 문화연구"를 중심으로

        김현경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0 民族文化硏究 Vol.53 No.-

        페미니즘 문화연구는 단일한 하나의 학제적 카테고리라기보다, 학제와 학제를 가로 지르며, 맥락화된 현실과 이론을 오가는 두 연구 분야가 만나거나 혹은 경합하며 이론을 생산해내는 장(field)이다. 따라서 지난 20여년간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진 "페미니즘 문화연구"의 작업을 검토하는 이 글은 핵심적인 개념인 "문화"와 "성차" 관련 개념들을 나침반 삼아 그 변동과정을 따라가보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우선 서구 사회 "문화"와 "성차"관련 개념 변동 지형은 첫째, 문화 개념을 경유한 남성우월체계와 그 논리비판, 둘째, 구조기능주의적 논의에서 "성차별적 문화"의 섹스-젠더 환원성, 셋째, 문화연구의 등장과 함께 가능해진 페미니즘 문화연구 활성화로 파악되었다. 또한 한국 사회 변동의 계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심 모순"에 대한 대당 개념으로서의 "문화" 와 주변적 위치로서의 "여성" 개념 등장, 둘째, 성정치론자들의 "섹슈얼리티"와 규범적 "성문화"에 관한 문제제기, 셋째, 성정치론자들의 문제제기와 문화연구 프레임을 받아들인 페미니스트들이 분석하는 성별과 섹슈얼리티의 교차성 그리고 대중문화. 이러한 "성차" 관련 개념과 "문화" 개념의 변동 속에서 페미니즘 문화연구의 외연은 확대되었지만, 매체의 다변화, 문화산업의 양적 성장이라는 조건들 속에서 더욱 조밀하고 복잡해지는 성차의 의미망들을 관련 체제들과 연관지어 분석, 비판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도래했다. Feminist Cultural Studies is rather an interdisciplinary field producing theories by different areas traversing contextualized reality and theories than a homogeneous disciplinary category. Therefore, this article which examines tasks of "Feminist Cultural Studies" in Korean society for over twenty years takes the essential "culture" and "sexual differences" related concepts as a compass and follows their changing process. To begin with, the changing topography of "culture" and "sexual differences" related concepts in Western society was grasped by 1) the criticism on male supremacy and its logic via culture concept 2) sex-gender reduction of "sexist culture" concept in structural functional discussion 3) the increased Feminist Cultural Studies enabled by the advent of cultural studies. In addition, the causes of the changes in Korean society are as follows. 1) the advent of "culture" concept as a anti idea against "main cause of problem of Korean society" and "women" concept as a marginal position 2) sexual politics 'raising a question about "sexuality" and normative "sexual culture" 3) intersection of gender and sexuality and popular culture analyzed by feminists who accepted sexual politics' question and the frame of cultural studies. In the aforementioned changes of "sexual differences" related concepts and "culture" concept, the scope of feminist cultural studies has been extended. Yet, under the conditions of diversified media and quantitative growth of cultural industries, the new task of analyzing and criticising the denser and more complicated semantic net in the association with related system has arr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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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脫)식민 초기(1945.8~1950.5), 남한국가 엘리트의 아시아기행기(紀行記)와 아시아표상(表象)

        임종명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0 民族文化硏究 Vol.52 No.-

        탈식민 시기 한국인들은 인종·지역 중심의 인식틀에서 아시아를 자신의 정체성 구성과 향후 발전전망 모색의 자원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아시아를 구주와 특히 미국의 대항적, 대안적 실체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대안적 실체로서의 아시아 인식은 전후 남한에서의 미국 패권의 구축을 인식론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대 남한의 지배엘리트들은 아시아를 재구성하여 주류적 아시아 인식을 수정하여야 했고, 또 실제로 다양한 문화적 사업과 그 사업물의 생산을 통해 수정하고자 시도했다. 당대의 기행문 역시, 당대 주류적 인식과 마찬가지로 아시아를 전통시대 종교·철학·문화적으로 서로 연결되고, 또 근대시기 제국주의 희생의 역사를 공유하는 민족들로 구성된, 장구한 역사의 실체로 표상한다. 나아가 관련 기행문은 공통한 역사·문화·이익을 가진, 또 순전하게 단결해야 할 실체로서의 아시아상(像)을 구축하였다. 이렇게 아세아·동양은 '장구한 역사와 자랑스러운 문화'를 가진 단일한 실체로 표상된다. 기행기는 동시에 아시아를 '서구주의적 문명론의 관점'에서, '전(前)근대·비(非)문명의 공간'으로 표상한다. 즉, 전(前)근대공간으로서의 아시아상(像)은 역사적으로 과거의 공간으로, 구체적으로는 '중세·봉건적(封建的)인, 고대적(古代的)인 공간'으로 표상된다. 전(前)근대적 아세아상(像)은 다시 한번 '고대적인 동양상(東洋像)'에 의해서도 보강된다. 즉, 관련 기행기는 東洋(the Orient)의 대표적인 나라인 이집트를 오래된 나라로, 나아가 고대의 나라로 변형시키면서, 이집트에 의해 대표된 동양을, 아시아를 고대화한다. 그런데, 아시아의 현재를 고대화하는 것은 두개의 시간, 즉 현재와 고대를 하나로 통합하면서, 동일한 시간성의, 나아가 시간이 정지한, 변화 없는, 정체(停滯)된 아시아를 표상한다. 정체된 공간으로서 표상된 아시아가 자연화되는 것은 필지(必至)의 것이었다. 이와 같이, 아시아는 세계기행기 속에서 자연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상으로 원시적 공간으로, 또 문화·문명론상에서 비(非)문화적 공간으로 표상되고 구성된다. 이로써, 아세아는 시간상으로 원시적 공간으로, 또 문화·문명론상에서 비(非)문화적 공간으로, 따라서 문화·문명이 없는 자연의 공간으로 표상되고 구성된다. 이와 같이 자연화된 아시아는 관련 기행기에 의해 자신의 단일성 마저 부인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각종 기행문은 서양에 대(對)해서 단일한 실체로서 구축했던 아시아상(像)을 스스로 부인한다. 즉, 관련 기행기는 상호 생면부지(生面不知)인 나라들로 구성된 "亞細亞"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세아·동양은 각각 "자기 나라 고유의 문화"를 갖고, 따라서 다양한 생활문화를 가진 나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서로의 만남조차도 '미안함과 창피함, 불만, 그리고 어색함과 당황스러움, 또 불만과 낙심(落心)'이, 나아가 쌈판 같은 소란이 동반(同伴)하는 곳이 아시아이었다. 나아가 기행기는 아시아를 인종적으로도 순일(純一)한 공간이 아닌 것으로 표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속에서 앞서 구축된 아시아상(像), 즉 '단일한 실체로서의 아시아'는 의심되고 동요되어진다. 뿐만 아니라, 그것의 공동한 이해(利害)와 단결의 필요성조차 의심되고 반박된다. 아시아 기행기의 '순일한 아시아'의 부인은 당시 상상되던 구미, 특히 미국의 대안적 실체로까지 인식되던 아시아를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단일한 실체성 부인은 당대의 상황에서 동시대 한국인의 구미(歐美), 특히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대안의 존재를 원인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당대 남한국가 엘리트들의 아시아기행기가 갖고 있는 정치적 함의의 하나라 한다면, 또 다른 정치적 의미는 그 기행기가 구주와 미국, 특히 미국의 헤게모니를 남한사람으로 하여금 수용하도록 촉진하는 것과 관련된다. 다시 말해서, 아시아기행기의 아시아상 구축은 독자로 하여금 당대 '최고의 문명국'으로 인식되던 미국문명의 실현을, 달리 말해서, 미국의 문명적 지도를, 요컨대 미국을 수용하도록 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이러한 점에 유의할 때, 우리는 당대 남한국가 엘리트의 아시아 기행기가 남한국가와 미국의 '유대', 또는 탈식민지 남한에 작동하는 미국의 패권을 인식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문화작업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 기행기가 초(超)인종·지역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표상된 냉전의 초기 진행에서 미국 블록(bloc)의 일원이 된 남한국가를 민주주의 이념·담론과, 또 마찬가지로 초(超)인종·지역적인 이념·담론인 근대주의와 문명주의로 정당화하는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것이 탈식민 초기 남한 지배엘리트의 아시아기행기가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였다. From the race-and region-oriented view of the world, not a few post-colonial South Korean texts conceived the Aisa as the foundational entity for their own identification and development. This meant that the Asia was imagined as an entity alternative to the contemporary hegemon United States of America. This imagination threatened to nullify the epistemology necessary for the construction of the States as a hegemon over East Asia and also South Korea. Faced with this problematics, ruling elite of contemporary South Korean state had to reconstruct the major imagination of the Asia shared by multitudes of South Korean people and actually did so with a veriety of cultural projects and products such as travelogues to the Asia written by South Korean elite in governmental, political, cultural and other realms. As the major imaginations concerned did, the travelogues also spatialized the Asia as the long history and traditional culture. That is, the texts represented the Asia as the entity of long history which shared the common traditional religion, philosophy and culture, and the modern experience that Asian people got victimized by Western colonialism, and accordingly were to unite for their common interest. In a word, The travelogues identified the Asia as the entity of common interests caused by history and culture. At the same time, the travelogues represented the Asia, in terms of 'civilization', the space with no civilization. This civilizational representation was followed by historical representation. That is, the Asia was represented as what it historically belonged to the past, in other words, the ancient or feudal. This temporalization was illustrated in the representation of Egypt, where the country was presented as the old state, and, one step farther, as the ancient one. The imagination of Egypt rendered ancient the Orient represented by Egypt, and the Asia in extension. This series of temporal identification of the Asia meant that the area has stagnated with no historical development. This temporalization of the Asia, in turn, was to represent it as an ahistorical space, and accordingly as the space of no culture insofar as contemporarily culture was conceived as historical achievement of humans. This constructed Asia, however, was never stable nor settled, it was always contested within the text per se. The text contained the fissures and collisions within itself. That is, the text denied the imagined homogeneity of the Asia against its other of the West/Oxident, and even within the self of the Asia. The text represented Asia as the space composed of different races with different cultures. This representation meant that they had no common interest which united them. Ultimately it led to nullification of the Asia as an entity and accordingly the contradiction of the necessity of their solidarity. This nullification and contradiction epistemologically de-constructed the Asia which was contemporarily imagined as the entity alternative to hegemonic America. It is this de-construction that determined one of the political implications of the travelogues. Other implications of the travelogues could be confirmed in their politics that they had the cultural potentials of persuading South Korean masses to embrace the hegemony of the "highly modernized" States in terms of civilization and modernism. In this sense, what the travelogues constructed constituted the preliminary work for the ultimate construction of the American hegemony over South Korea and the East Asia in extension. With this in mind, we can conclude the travelogues were the cultural products for the ideational justification of the 'alliance' of South Korean state with regionally new hegemon in the post-colonial era, the States. Also we can say that the travelogues meant to ideologically justify the positioning of South Korean state in the American bloc with the seemingly trans-racial and -regional ideologies of modernism and civilization. These justifications constituted the political implications of the travelogues to the Asia produced by the contemporary ruling elite in post-colonial and post-War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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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논문: 문화연구의 비판적 성찰; 문화연구의 연구문화 : 언론학계에서의 제도화 효과에 관한 성찰

        이상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0 民族文化硏究 Vol.53 No.-

        이 글은 한국 문화연구의 연구문화에 대한 하나의 비판적 성찰이다. 연구문화란 연구노동을 조건 지으면서도 그 자체는 연구자들에게 좀처럼 의식되지 않는 암묵적 지식과 실천 감각의 형성구조를 가리킨다. 이 글은 언론학계 내에서 문화연구가 하나의 전공분야로 제도화된 이래 어떠한 연구문화가 구축되어왔는지, 또 그 특성과 문제점은 무엇인지 검토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이 글은 문화연구자들이 제도화의 부정적인 효과로부터 벗어나 사회과학계 내에서 새로운 대안적 학문실천의 공간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This article attempts to provide an informed critical reflection on the research culture in Korean cultural studies. The notion of 'research culture' means, in this work, a formative structure of tacit knowledge and practical sense which conditions the research practice not very consciously. This article especially probes some traits and problems of the research culture since the incorporation of cultural studies by communication studies. In doing so, this article argues that researchers of cultural studies, liberated from the negative effects of the institutionalization, should constitute a new space of alternative academic practices in the social sci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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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민족전선(FN), 포퓰리즘 그리고 파시즘

        김용우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4 民族文化硏究 Vol.63 No.-

        이 글은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민족전선에 적용된 경위와 그로부터 발생한 다양한 문제점들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첫째, 40년의 세월 동안 변화하는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적인 변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전선의 이데올로기는 극단적, 유기체적, 배타적 민족주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민족전선은 신파시즘이나 극우파 같은 용어로 규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둘째, 민족전선에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적용된 배경에는 프랑스식 파시즘의 존재를 망각하려는 기억의 정치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민족전선에 적용된 포퓰리즘은 한편으로는 ‘인민’과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전선에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인종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를 ‘평범한’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민족전선을 경멸의 대상으로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합리화하는 이중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veal how ‘populism’ applies to le Front National and to expose various problems incurred by this. Firstly, during four decades strategic changes existed which adjusted to changing circumstances and environments. However, when considering the ideology of le Front National which still retains nationalism that is tendentious, organic, and exclusive, it becomes appropriate to replace it with neofascism or the radical right. Secondly, it must be pointed out that behind the application of populism in le Front National is the politics of remembering which aims to neglect the existence of French fascism. Lastly, this applied populism is used for justifying aversion against ‘the people’ and democracy on one hand, whereas it also contributes to alteration of racism and radical nationalism as being ‘normal’. While the terminology ‘populism’ raises le Front National as an object of contempt, it simultaneously displays a twofold effect by rationalizing the o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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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한국문집과 한학연구] 한중 문화의 교차적 이해 (2) : 조선시대 문인 초상화(文人畵像) 텍스트에 대한 추론

        모문방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4 民族文化硏究 Vol.62 No.-

        초상화는 자아(自我)를 이해하기 위한 인류의 전통적인 흔적으로 볼 수 있으며, 개인의 용모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세계와 문화적인 배경에 대한 모방이기도 하다. 필자는 오랜 기간 동안 중국 명청(明淸) 시기의 문인 초상화 및 그 문화적인 배경에 관심을 기울여왔고, 지금은 이러한 인지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시기 문인 초상화 텍스트의 보존현황 및 그와 관련한 문화적인 글쓰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윤증(尹拯)의 『影堂紀蹟』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약간의 개별적인 사례를 예로 들어 다차원적인 탐구를 진행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타인의 초상화와 자화상, 타인이 쓴 畵題와 자신이 직접 쓴 畵題 등을 서로 넘나들며 다중적인 시각과 관점으로 조선 중, 후기 초상화를 상세히 분석하였다. 아울러 그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處士氣象의 山林 풍조, 文房雅齋의 맑고 그윽한 품격, 仙隱境界의 향락 분위기)에도 관심을 기울여, 근세 思潮에 있어서 문인 초상화 텍스트의 진보적인 성향도 함께 정리해보았다. 畵像可視爲人類理解自我的傳統軌跡,不僅表現個人神貌,亦是對周圍世界與文化型態的模擬. 筆者長期關注中國明淸時期的文人畵像及其文化生産,今以此認知基礎爲一參照,略窺朝鮮文人畵像文本的存留槪況與觸及的文化書寫. 本文玆由尹拯之『影堂紀蹟』導入正文,揀選若干個案進行多層次探討,用以剖析他畵像/自畵像,以及他題/自題等相互交織的多重眼光及觀看思維,幷關注朝鮮中後期畵像的轉變線索: 處士氣象的山林風調·文房雅齋的淸婉品味·仙隱境界的行樂분圍,嘗試梳理文人畵像文本於近世思潮中的演進趨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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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30년대 문일평의 민족사와 문화사의 서술

        류시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0 民族文化硏究 Vol.52 No.-

        문일평(1888~1939)은 평북 의주 출신으로, 언론인, 교육가, 역사가로 활동했다. 본고에서는 그의 생애 가운데 국외 민족운동 및 삼일운동 참가시기(1913~1924)와 교사 및 기고활동 시기(1925~1932)를 중심으로 역사가로서의 문일평을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시기는 중국 언론 매체에서 활동했고 삼일운동에 참가한 시기이며, 셋째 시기는 역사관련 기고 활동과 역사 교사로 재직한 시기이다. 이 기간동안 문일평이 교사, 언론인, 역사로 활동한 점은 연속되나, 일본유학(동경제대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 청강생)을 기준으로 삼았다. 역사가로서의 문일평에 관해 1) 신채호의 사학을 계승한 민족주의 사학자이며 2) 역사 대중화에 중점을 두었고 3) 역사 연구를 넘어서 조선 문화 연구에 대한 학문적 체계를 만든 '조선학 연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강행된 그의 개인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문일평은 '후기 문화사학자' 외에도 이병도, 최남선, 안확 등 다양한 역사·문화 연구자와 교륙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사학사 분류 기준의 높은 '장벽'을 거두면 당대 사학자의 폭 넓은 스펙트럼을 볼 수 있다고 판단된다. 본고에서는 문일평에 관해 신채호 사학의 영향을 받은 민족주의 사학자란 전제를 재검토하기 위해, 그의 텍스트를 당대 다른 문화사학자, 민족사학자의 연구 성과와의 비교 속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첫째, 역사와 문화 연구가 그에게 지닌 의미가 무엇이며, 둘째, 민족사의 서술을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했으며, 셋째, 문화사 연구의 검토를 통해 그의 '조선학' 연구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문헌고증을 강조한 문일평의 역사 방법론은 기존의 사학사의 분류 기준에 근거한 '실증사학'과 다르지 않았으며, 국수주의를 극복했다는 '조선심'의 논의에서도 과학적 연구 방법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일정한 '비약'이 존재했다. Mun Il-pung(1888~1939) was a famous Korean historian during the colonial period. He also worked at both a teacher and a journalist. He was regarded as a national historian on Korean history based on preceding researches. And he also evaluated as a pioneer of Korean Studies in 1930s. For the purpose of approaching his writing on Korean national and cultural history, this paper focuses on notions which indicated Korean culture through his articles and dissertations. In particular, I will examine the notion of Korean identity and thought which was called Chosun Sim(朝鮮心). This paper begins with several questions regarding colonial modernity, nationalism and the studies on the Korean culture and history in colonial Korea. Why do some Korean historians, especially not scholars but popular writers, emphasized the father of Korean history(DanKun), the lineage of Korean Nation? In oder to answer these sequential questions, I will focus on the case of Mun Il-pung' writings. He stressed the historical positivism and poplar historical books such as the textbook for students. It is need to examine of the competing and comparative texts during those time, Mun strove to established both rational writings and esthetics of nation mind through the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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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태의 사회문화사 연구

        박대재 ( Park Dae-jae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8 民族文化硏究 Vol.78 No.-

        南滄 孫晉泰(1900-?, 1950년 납북)의 역사학은 일반적으로 新民族主義史學으로 규정되어 왔다. 하지만 손진태의 역사학은 해방 이후 정립된 신민족주의의 틀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손진태의 학문은 1920년대 민속학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1980년대 이후 손진태의 학문을 일제시기의 민속학과 해방 이후의 신민족주의 역사학으로 구분해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학계 일각에선 일제시기 손진태의 학문이 滿鮮史學의 타율 사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그에 대한 반성으로 해방 이후 신민족주의를 내세웠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1930년대 反貴族的 민족의식이 투영된 저술들을 통해 볼 때, 손진태의 학문자세나 문제의식이 해방 이후 크게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글에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손진태가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사회문화사 연구를 주목하였다. 민속학을 통한 사회문화사 연구는 손진태 학문의 基調였으며, 이를 통해 민속학과 신민족주의사학의 節合(articulation)도 가능하게 되었다. Historical studies by Namch'ang(南滄) Son Chint'ae(孫晉泰, 1900-?, abducted to North Korea in 1950) is generally classified as neo-nationalistic history. Yet, his historical researches cannot be interpreted under the frame of neo-nationalism, which was founded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His scholarship started from researches on folklore during 1920’s. From 1980’s, there is a strong tendency to classify his studies as a part of ethnolog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neo-nationalistic history after the independence of Korea. Some scholars viewed that his studies were not free from the heteronomous historical viewpoint of Manchuria-Choson History(滿鮮史學) during the Colonial Period; as a result, Son Chint'ae propounded neo-nationalism as his self-reflection after Korea’s liberatrion. Still, taking his writings from 1930’s reflecting his anti-aristocratism into consideration, it is hard to say he changed his academic attitude and critical mind after Korea’s liberation. This paper paid attention to Son Chint'ae’s sociocultural studies he consistently pursued from the late 1920’s. Sociocultural researches by ethnology were the foundation of his academic career, which enabled articulation of Ethnology and Neo-Nationalistic History.

      • KCI등재

        구수한 큰 맛: 번역된 자연미

        정혜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20 民族文化硏究 Vol.88 No.-

        Ko Yu-seoup, the first Korean scholar on Korean art history and aesthetics suggested some concepts including ‘Earthy and Generous Taste’ and ‘skillfulness of no- skill’ as Korean original beauties. Ko imported Neo-Kantianism though Japanese Neo-Kantianism in Keijō Imperial University and applied its famous cultural science as method for studying Korean art history and ideas of values, the Truth, Good and Beauty as its values. The result he got as Korean original art was just craft art and its natural beauty, for traditional Korean art lacked the idea of Beauty and fine arts of modern Europeans. He should have deduced Earthy and Generous Taste from traditional Korean art works and texts not from Modern European thoughts. Though Ko intended describe the history of Korean art with the criteria of newest and advanced academic view and methods, he reduced the history to craft arts and natural beauty, which continues at some corners of academic fields and art world wide as well as Korea until now never criticized. 고유섭(高裕燮)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미술사학자이자 미학 연구자로서 한국 미술사를 구축했다. 이 논문이 주목하는 바는 그가 「조선미술문화의 몇 낱 성격」과 「조선고대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에서 한국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자 전통으로 제시한 ‘구수한 큰 맛’, ‘무기교의 기교’를 대표로 하는 자연미 계열의 개념어들이다. 이 개념들은 그 질박한 뉘앙스와 달리 서양 미학과 미술사, 일본⋅중국의 미술과 긴밀한 비교 속에 조성된 것들이다. 고유섭은 문화과학, 진⋅선⋅미와 지⋅정⋅의의 분류법을 수입하여 한국 미술문화의 모든 역사 구간을 아우르는 ‘보편타당한 가치 표준’을 탐색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수함⋅고수함⋅맵자⋅단색⋅적조미⋅우아⋅단아, 이들을 구수한 큰 맛이 그것이다. 문화과학, 진⋅선⋅미와 지⋅정⋅의 등의 개념은 신칸트학파의 산물로서 경성제국대학에서 고유섭의 재학 시절 철학⋅미학을 담당했던 아베 요시시게는 빈델반트, 리케르트 등의 신칸트학파의 대표적 전달자이다. 고유섭은 당시 최신의 선진적 학문을 따라 자신의 학문의 방법론과 연구대상을 설정하고 이로부터 한국미술의 역사를 한국인의 손으로 서술하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근대 유럽의 학문 체제와 가치로 한국 미술문화를 재단하고 번역함으로써 그의 한국미술사에는 시서화일치를 추구하는 회화가 제외되고 공예만 남았다. 한국근현대사에서 구수한 큰 맛과 같은 자연미를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으로 제시하는 발언은 수없이 이어져 왔는데 시기상으로 볼 때 고유섭이야말로 이러한 논란을 학계로 끌어들인 근원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공예미로서의 자연미는 근현대 한국 문화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그 개념들이 한국 자생의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한번도 명확히 지적되지 않았다. 이제 구수한 큰 맛이 근현대라는 시대의 산물임을 밝혀 이 개념이 지시하는 과거, 이 개념에서 시작한 현재가 고유섭의 시대로부터 보다 자유로워질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 KCI등재

        1930년대 중반 임화와 홍기문의 사회주의 민족어 구상

        임동현 ( Lim Dong Hyun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7 民族文化硏究 Vol.77 No.-

        임화와 홍기문은 조선어학회의 언어규범화운동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민족어를 주장했다. 임화와 홍기문은 민족을 하나의 형식으로 이해했고, 그 안에 프롤레타리아적 문화요소를 채우는 것을 사회주의 민족문화라고 보았다. 민족어도 언어가 사회경제적 조건에 규정된다는 유물론적인 인식과 언어의 발전은 언어 간의 상호접촉으로 진행된다는 언어관을 기반으로 해야한다고 했다. 임화와 홍기문은 사회주의 언어관을 바탕으로 다수 인민이 사용하는 일상어를 표준어로 제시했다. 조선어학회의 표준어가 노동계급의 언어를 간과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언어를 강제한다고 비판했다. 현재 조선의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경제적 한계로 인해서 독자적인 문화수립의 역량이 없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언어규범화운동을 사회주의자들이 대신 진행해야 했다. 임화와 홍기문이 말하는 다수 인민은 노동자·농민이었다. 이들은 언어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고, 고유한 조선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표준어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임화와 홍기문은 사회주의 민족어를 만드는 방법론에 있어서 입장이 달랐다. 언어 학자였던 홍기문은 민족어 규범의 통일화와 표준화에 필요한 근대적 시스템이 식민권력에 장악되어있기 때문에 언어규범화운동은 해방 이후의 사업이고, 식민지 상황에서는 조선어 정리만 해야 한다는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반면에 임화는 사회주의 문학가들을 통한 민족어 형성을 구상했다. 문학을 통해서 노동계급의 일상어를 표준화하고 문학작품을 통해서 전국적인 통일화를 이루려고 했다. Lim-hwa and Hong Gi-mun asserted the Socialism National Language during criticized the standardization of Korean language movement by the Korean Language Society. Lim-hwa and Hong Gi-mun understood the Korean nationalism in a single format, and asserted the Society National culture with proletarian cultural constituent. They also asserted that The native Korean base on the perception with materialism, what is provided with social-economic condition, and view of language in the development of the mutual linguistic contact. Lim-hwa and Hong Gi-mun suggested ordinary Korean, what was used by most of the proletarian on the Social linguistic, as standard native Korean. They criticized to standard Korean without ordinary Korean of the proletarian by the Korean Language Society. In addition, Korean bourgeois do not have any capability. for separate cultural establishment cause of lack of the social-economic condition. So they want to lead the standardization of Korean language movement by the socialist. Proletarian and farmer were set as 'the people' by Lim-hwa and Hong Gi-mun. These people positioned most of using indigenous and ordinary Korean. So it was the main reason for the standard Korean. However there are different stance to makes the socialism standard Korean between Lim-hwa and Hong Gi-mun. Hong Gi-mun, who was a linguist, asserted that the standardization of Korean language movement is a work after independent, because modern system, which for the harmonization and standardization, was dominated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Also he asserted linguistic arrangement of the Korean first at that time. Meanwhile Lim-hwa formulated native Korean by socialism literary people. He formulated proletarian ordinary lan-guage and nationwide by literary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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