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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양원(愛養園) 한센병 환자 자치조직의 형성과 공동체의 성격 변화(1910-1940)

        장민한,유연실 의료역사연구회 2022 의료사회사연구 Vol.10 No.1

        애양원은 1909년 광주에서 한센병 치료를 목적으로 설립된 나요양소를 모체로 한다. 광주 나요양소는1909년 선교사 포사이트가 나주 남평에서 발견한 한센병 환자를 광주로 이송하면서 치료를 시작했으며, 1912년11월 15일 한센병 환자 전문 수용기관으로 정식 개원하였다. 광주 나요양소는 1926년 도시민들의 반발로 여수 율촌면의 신풍반도로 이전하였다. 1962년 이후 애양원은 한센인 정착촌의 형성과 소아마비 중심의 진료체제로의 전환 속에서 환자공동체가 점차 해체된다. 애양원은 일제시기 기독교 나요양소의 대표적인 모델로서 환자 자치조직의 운영과 자활 노동을 통한 경제적 자립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본고는 애양원의 환자 자치조직의 운영에 주목하여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첫째, 애양원 환자자치조직과 교회 권력의 관계를 시기별로 검토하여, 환자공동체의 성격 변화를 고찰하였다. 애양원은 광주 나요양소시기(1910-1926), 여수 애양원 시기(1926-1934), 일심회 사건과 김응규 목사 퇴진 운동 이후 시기(1934-1940)까지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겪는 동안 그 성격이 ‘선교사 중심의 신앙공동체’에서 ‘환자 중심의 생활공동체’로 변화하였다. 이는 애양원이 운영지도부(병원ㆍ 교회)와 환자 자치조직의 관계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이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주 나요양소의 환자 자치조직은 선교사의 지도하에 성장했으며, 환자들의 우두머리인 회장도 병원장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독립적인 권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1926년부터1934년까지는 집행위원회(부장회)를 중심으로 환자 자치조직이 성장하면서, 교회 권력과 자치조직이 서로 대립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는 1934년 반교회적 일심회 사건과 1938년 김응규 목사 퇴진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일심회 사건 이후 1936년 환자 자치조직이 재편되고, 병원장이 일부 집행위원에 대한 임명권을 확보한다. 이를 통해 병원장의 환자 자치조직에 대한 견제와 통제가 강화되고, 교회 권력과 환자 자치조직의 운영이 일원화되면서 신앙공동체적 성격이 회복된다. 둘째, 애양원 한센병 환자들의 주체성을 검토하였다. 애양원 내에서 환자들은 신앙을 통해 교회 권력에 접근하였고, 11개 부서(시기에 따라 변화)의 장을 환자들이 선출하여 집행위원회(부장회)를 구성하였다. 환자가 자치조직의 대표(집행위원/ 부장)를 직접 선출하여 애양원의 운영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환자들은 교회 권력에 대한 견제가 가능했다. 또한 환자들은 노동 자활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고 가정사를 구축하여 가족단위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환자 자치조직의 자율성은 교회 권력의 견제 속에서 축소되기도 하였지만, ‘부장회’와 같은 환자 자치조직의 자율적 운영은 환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며, 주체적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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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장로회선교부 한센병 환자 수용정책의 성격(1909~1950)

        최병택(Choi Byung-Taek)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0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2 No.-

        이 논문은 일제하~1950년까지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인 애양원의 환자 수용정책과 그 영향을 다룬 글이다. 그동안 일제하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이 환자들을 외부사회와 격리함으로써 환자들의 인권을 침해하였다는 비판적 시각이 있어왔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한센병 수용 시설이 그 활동을 시작할 무렵 전세계적으로 한센병에 대해서는 환자들을 격리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이 점에서 환자들을 격리하였다는 것만으로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구에서는 한센병 환자를 ‘죄’로 인해 병을 얻게 된 자로 규정하고 이를 차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환자들을 병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된 ‘선택된 자’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애양원의 ‘격리’ 방침은 환자가 외부인을 접촉함으로써 병을 옮기지 않도록 하는 그야말로 전염병 예방 차원에 머무르는 것으로 환자들을 평생 격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완치될 경우 환자들은 자유로이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환자들이 퇴원 후 격심한 사회적 편견속에 살아갈 길이 사실상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환자들은 경제적 안정이 보장된 애양원에 남기를 원하였고 이 때문에 애양원 내 환자 구역은 비교적 안정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 환자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규율하는 역할은 교회에 주어져 있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병이 완전히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환자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에 더욱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속에서 애양원 수용자의 상당수는 외부와 단절된 채 개인적 신앙생활에 매달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1960년대에 정착촌으로 이주할 당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This article deals with American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ary's activities on treating Hansen’s disease patients and providing shelter for them through AeYangWon. Earlier studies urged that the missionary segregated many patients from society and confined them in leprosy asylums, and by this they treated lepers as social issue for the first time. And on this account lepers be treated discriminatingly. But at that time there were no adequate measures except keeping patients in isolation. Conventionally Western people take lepers as sinner since Middle Ages. By contrast the missionary in korea considered lepers as the blessed for they receive benefits from God through missionary leprosy asylum. The Patients did not protest against segregation and discrimination, but wanted to remain in asylum. In this environment AeYangWon maintained stable relationship between inmate. The leader that keeping order in AeYangWon was the church. pastors of AeYangWon-church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preparing for The Second Advent of Christ, and pushed lepers to concentrate on religious life. Because of them the lepers stuck on religious belief on the millennium, so that they couldn't prepare economical background to meet the new policy on lepers that focus on building settlements in 196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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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양원과 구라(救癩) 선교

        최병택(Choi Byung-Taek)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1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4 No.-

        애양원을 설립한 윌슨은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대풍자유를 치료약으로 사용하면서, 그 치료 과정을 이겨낼 의지와 신앙에 기반한 도덕성(윌슨은 이를 영적 영향mental influence이라고 지칭하였다)을 치료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는 ‘믿음과 대풍자유’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애양원교회 성원들로 하여금 성경 공부와 기도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에 비해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구호의 대상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인간’의 하나로 보고 그들과의 ‘라포’를 형성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전임 교역자, 의사들과는 달리 환자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손양원 목사가 환자들의 신뢰를 얻는 주된 요인이었다. 이처럼 일반인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 환자들을 거리낌 없이 대하고, 그들과 삶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손양원 목사의 구라 사역은 상당히 주목을 끈다. 손양원 목사가 한센병 환자들을 그토록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적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천년왕국’이 곧 임하여 지상의 모든 질병과 고난이 사라질 것이라는 종말론적 신앙관을 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손양원 목사의 신앙관과 구라사업 활동은 언뜻 보기에 현대 의학의 발달에 따라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은 기독교적 봉사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다. 나아가 그가 부르짖은 ‘전쾌’론도 질병이 없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 기독교회에 던지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Robert Manton Wilson, who established AeYangWon emphasized the need to long for morality that is based on faith. He thought that Hansen’s disease resulted from moral paralysis. On this prejudice he underlined ‘mental influence’ when preaching a sermon to lepers. To maintain ‘mental influence,’ he encouraged lepers to concentrate on Bible study and prayer service. In this angle Wilson made lepers 'othering' who are to be supported by normal. But Rev. Son treated them as ordinary people that have to be restored and renewed. From that point of view on lepers, he had physical contact with lepers actively. Therefore patients could trust him, and Under his guidance, the AeYangWon and AeYangWon-church had grown to a mature ecclesiastical community. In this respect Son Yang-won was prominent Church leader. He often mentioned that when Jesus return to earth every lepers would be completely cured by the power of Faith. Actually he was premillenarian. as a premillenarian, he believe that all disease on earth would be disappeared by Christ. On this belief Son Yang-won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preparing for The Second Advent of Christ, and pushed lepers to concentrate on religious life. Because of him the lepers of AeYangWon stuck on religious belief on the millennium, so that they couldn't prepare economical background to meet the new policy on lepers that focus on building settlements in 1960s'. but Son Yang-won's leprosy relief was warmly received by the lepers at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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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양원과 구라(救癩) 선교 -애양원(愛養院)교회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최병택 한국기독교역사학회 2011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4 No.-

        Robert Manton Wilson, who established AeYangWon emphasized the need to long for morality that is based on faith. He thought that Hansen’s disease resulted from moral paralysis. On this prejudice he underlined ‘mental influence’ when preaching a sermon to lepers. To maintain ‘mental influence,’ he encouraged lepers to concentrate on Bible study and prayer service. In this angle Wilson made lepers 'othering' who are to be supported by normal. But Rev. Son treated them as ordinary people that have to be restored and renewed. From that point of view on lepers, he had physical contact with lepers actively. Therefore patients could trust him, and Under his guidance, the AeYangWon and AeYangWon-church had grown to a mature ecclesiastical community. In this respect Son Yang-won was prominent Church leader. He often mentioned that when Jesus return to earth every lepers would be completely cured by the power of Faith. Actually he was premillenarian. as a premillenarian, he believe that all disease on earth would be disappeared by Christ. On this belief Son Yang-won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preparing for The Second Advent of Christ, and pushed lepers to concentrate on religious life. Because of him the lepers of AeYangWon stuck on religious belief on the millennium, so that they couldn't prepare economical background to meet the new policy on lepers that focus on building settlements in 1960s'. but Son Yang-won's leprosy relief was warmly received by the lepers at that time. 애양원을 설립한 윌슨은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대풍자유를 치료약으로 사용하면서, 그 치료 과정을 이겨낼 의지와 신앙에 기반한 도덕성(윌슨은 이를 영적 영향mental influence이라고 지칭하였다)을 치료의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는 ‘믿음과 대풍자유’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애양원교회 성원들로 하여금 성경 공부와 기도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에 비해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을 구호의 대상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인간’의 하나로 보고 그들과의 ‘라포’를 형성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전임 교역자, 의사들과는 달리 환자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손양원 목사가 환자들의 신뢰를 얻는 주된 요인이었다. 이처럼 일반인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 환자들을 거리낌 없이 대하고, 그들과 삶을 함께 했다는 점에서 손양원 목사의 구라 사역은 상당히 주목을 끈다. 손양원 목사가 한센병 환자들을 그토록 가까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적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천년왕국’이 곧 임하여 지상의 모든 질병과 고난이 사라질 것이라는 종말론적 신앙관을 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손양원 목사의 신앙관과 구라사업 활동은 언뜻 보기에 현대 의학의 발달에 따라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과 헌신은 기독교적 봉사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다. 나아가 그가 부르짖은 ‘전쾌’론도 질병이 없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 기독교회에 던지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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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장로회선교부 한센병 환자 수용정책의 성격(1909~1950) : 여수 애양원을 중심으로

        최병택 한국기독교역사학회 2010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2 No.-

        This article deals with American Southern Presbyterian Missionary's activities on treating Hansen’s disease patients and providing shelter for them through AeYangWon. Earlier studies urged that the missionary segregated many patients from society and confined them in leprosy asylums, and by this they treated lepers as social issue for the first time. And on this account lepers be treated discriminatingly. But at that time there were no adequate measures except keeping patients in isolation. Conventionally Western people take lepers as sinner since Middle Ages. By contrast the missionary in korea considered lepers as the blessed for they receive benefits from God through missionary leprosy asylum. The Patients did not protest against segregation and discrimination, but wanted to remain in asylum. In this environment AeYangWon maintained stable relationship between inmate. The leader that keeping order in AeYangWon was the church. pastors of AeYangWon-church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preparing for The Second Advent of Christ, and pushed lepers to concentrate on religious life. Because of them the lepers stuck on religious belief on the millennium, so that they couldn't prepare economical background to meet the new policy on lepers that focus on building settlements in 1960s'. 이 논문은 일제하~1950년까지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인 애양원의 환자 수용 정책과 그 영향을 다룬 글이다. 그동안 일제하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이 환자들을 외부사회와 격리함으로써 환자들의 인권을 침해하였다는 비판적 시각이 있어왔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한센병 수용 시설이 그 활동을 시작할 무렵 전세계적으로 한센병에 대해서는 환자들을 격리하는 것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이 점에서 환자들을 격리하였다는 것만으로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구에서는 한센병 환자를 ‘죄’로 인해 병을 얻게 된 자로 규정하고 이를 차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환자들을 병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된 ‘선택된 자’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애양원의 ‘격리’ 방침은 환자가 외부인을 접촉함으로써 병을 옮기지 않도록 하는 그야말로 전염병 예방 차원에 머무르는 것으로 환자들을 평생 격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완치될 경우 환자들은 자유로이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환자들이 퇴원 후 격심한 사회적 편견 속에 살아갈 길이 사실상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환자들은 경제적 안정이 보장된 애양원에 남기를 원하였고 이 때문에 애양원 내 환자 구역은 비교적 안정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 환자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규율하는 역할은 교회에 주어져 있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병이 완전히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방식으로 환자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에 더욱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 속에서 애양원 수용자의 상당수는 외부와 단절된 채 개인적 신앙생활에 매달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1960년대에 정착촌으로 이주할 당시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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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는 왜 쓰는가

        한순미(Han Soon-Mi)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2 인문과학연구 Vol.0 No.34

        이 글의 목적은 한국 나환자 작가 심숭(沈崧)이 남긴 두 편의 장편소설 『낙화유수』(1933-34)와 『애생금』(상권, 1949.8, 중권, 1950)을 치유서사의 관점에서 읽고 그 역사적 맥락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치유서사(healing narrative)’라는 개념을 다음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한 개념으로 쓴다. 첫째 글쓰기가 곧 자기치유의 과정이라는 것, 둘째 나환자와 같은 사회적 타자들이 자기상처를 쓰는 것은 그 자체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기획이라는 것, 셋째 상처의 기록인 문학은 역사의 이면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로서 그것을 읽어봄으로써 역사치유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은 ‘상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출발한다. 이러한 물음을 던져보는 것은 나환자 작가 심숭이 사회적 타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발언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회와 역사가 그들을 어떻게 위치 지웠는지를 함께 읽어보기 위해서다. 한국 최초의 나환자 자전소설을 남긴 작가 심숭은 누구인가. 그는 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이름은 여럿이었다. 여러 증언과 자료에 의하면 ‘그’의 본명은 이은상 혹은 이성민이었으며 무명생, 심숭이라는 필명으로 문학활동을 하였다. 사회와 역사는 ‘나환자’인 그에게 하나의 이름만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에게 나병은 신체적 고통의 원인일 뿐 아니라 인간과 비(非)인간, 자기와 이웃의 경계를 질문하고, 몸과 마음, 삶과 죽음의 관계를 사유하며, 궁극적으로 사회, 민족, 국가, 종교란 무엇인지를 묻는 원(原)흔적과 같은 것이었다. 두 편의 장편소설이 발간되어 대중독자를 만난 시기는 1933년부터 1953까지다. 나환자로서의 상처를 말하고 산는 것은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두편의 소설을 간단하게 비교할수 있다. 식민지배기에 출간된 『낙화유수』에는 나환자 요양소 바깔에서 방랑하는 거지 나환자들의 생활이 주로 묘사되고 있다. 이에 비해 해방 이후에 출간된 『애생금』에서는 소록도 갱생원과 여수애양원의 기억이 세밀하게 서술되고 있다. 특히 『애생금』의 중권은 해방 직후 요양원의 사상적, 정치적, 종교적 혼란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당시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주는 징후이다. 소설 『애생금』의 결말은 요양원에서 현수가 추방된 이후, 그의 연인 선주가 현수에게 보내는편지로 되어 있다. 그녀의 편지는 이 편지를 읽어줄 현수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주인공 현수가 아니라 소설 바깥의 "독자"들이다. 선주의 편지, 아니 작가 심숭의 소설은 언젠가 이 기록을 읽어줄 ‘누구’, 익명의 수신자를 향해 발신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호소를 읽어줄 ‘편지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 근대 이후 어떤 사상도, 종교도, 정치도 그들의 상처를 온전하게 돌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환자 작가 심숭이 남긴 고통의 문자에서 가장 희미한 얼굴로, 가장 작은 목소리로 살다간 한국 나환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소통은 바로 이 고통의 문자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만지는 자리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통의 자리에서 역사가 그들의 몸에 새긴 상처와 흔적이 점점 치유되리라는 기대를 건다. 지금, 이 글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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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색 순교에서 적색 순교로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4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0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대표적인’ 순교자로 기록되고 있는 손양원 목사는 경남 함안에서 장로교 신앙과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손종일 장로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1921년 일본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스가모중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일본 동양선교회 창설자 나카다,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등으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고 복음 전도자로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귀국해서 경남노회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 나환자교회인 부산 상애원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으며 경남노회 추천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38년 졸업한 후 나환자교회인 여수 애양원교회의 초빙을 받고 나환자 목회에 임하였다. 일제말기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손양원 목사는 신사참배를 강하게 비판, 거부하였고 그 때문에 1940년 9월 체포되어 1945년 해방되기까지 5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 여수 애양원교회에 복귀하여 목회하면서 부흥사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한국 교회와 민족의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1948년 ‘여순사건’ 사건이 터졌을 때 순천에서 유학 중이던 두 아들이 공산주의 학생들에게 희생되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가해자 학생을 용서하고 그를 양아들로 삼아 그로 인해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이 그에게 붙여졌다. 다시 2년 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환자 교인들을 버려두고 갈 수 없다”며 애양원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1950년 9월 28일 여수에서 희생되었다. 나환자 목회로 출발하여 일제말기 신사참배 거부투쟁과 투옥, 그리고 해방 후 부흥사역과 순교에 이르는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신학에서 발견되는 특징을 1) 성경 절대주의, 2) 종말론적 소명감, 3) 대속적 자기희생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는 30여년 나환자 목회를 통해 ‘자기 비움’과 겸비를 경험, 실천하였고 성경중심적 복음주의 신앙과 종말론적 재림신앙에 입각하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였으며 해방 후 민족분단과 좌우익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두 아들을 잃고도 가해자(원수)를 용서하는 ‘완전사랑’의 본을 보였고 전쟁 중에도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목자’의 자리를 지키다가 순교자가 되었다. 결국 손양원 목사는 평소 목회자로서 자기 비움과 희생을 실천하는 ‘백색 순교’의 삶을 살다가 결국 피를 흘리는 ‘적색 순교’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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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 공동체 ‘애양리 마을’의 형성과 공간 변화에 관한 연구

        우승완(Woo, Seong-Wan),남호헌(Nam, Ho-Hyun) 한국도시설계학회 2010 도시설계 : 한국도시설계학회지 Vol.11 No.2

        본 연구의 대상은 전라남도 여수시에 소재한 ‘여수애양병원’의 모태가 된 애양리 공동체 마을이다. 여수애양병원(또는 애양원)은 자의성이 강했던 한센병 선교 시설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는 치료 대상의 주체가 한센병 환자였지만 현재는 일반 재활 환자로 바뀌었다. 국가적으로 격리 대상이 된 한센병 환자로 이뤄진 특수 공동체 마을의 형성 과정과 그 공간 변화의 과정을 통해 지역의 특징과 이들이 미친 영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현재 이곳은 여수공항 확장과 산업단지 지정 등 개발이라는 주변 여건의 변화 속에 있다. 본 연구는 특수한 마을의 원형과 공간 변화과정 속에 드러난 지역의 특성을 기초로 삼아‘애양리 마을’의 학술적 가치와 문화관광 사업에 대한 대응 전략의 기초 자료로 삼고자 한다. This study investigates Aeyangli community village which is the origian of Yeosu Aeyang Hospital located in Yeosu, Cheonlanamdo. Yeosu Aeyang Hospital(or Aeyangwon) was a missionary facility of its own will for the patients with Hansen’s Disease. Originally it was established for the medical treatment of Hansen’s Disease, but later it was changed into a rehabilitation facility for the handicapped. We inverstigated the distinctive feature of the isolated place and the influence of those people by analysing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community. Presently the place is in the middle of transition such as expansion of Yeosu Airport and development of Industrial area. This study intends to find the cultural valu of Aeyangli and make a foundation for cultural tourism by exploring the original form and spatial change of the unique commu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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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양원의 초기 목회활동과 신사참배 거부항쟁

        김승태(Kim Seung-Tae)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1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4 No.-

        손양원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에 관한 전기나 자료들은 일찍부터 출판되고, 정리되었으나, 그에 관한 연구나 논문은 적다. 그리고 그에 관해서 잘못 알려진 분분이 상당히 있다. 이 논문은 이제까지 연구에서 잘 이용되지 않았던 『손양원 說敎集帳』(설교노트)과 『손양원 일기』(일지)를 사용하여, 그의 1945년 8월 이전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규명된 새로운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손양원은 1926년 4월에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하여, 1929년 3월 6일 졸업하였고, 당시 그 명칭은 ‘경남성경학교’가 아니라 ‘경남성경학원’이었다. 2. 손양원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 계명과 교리 위반, 하나님에 대한 불경 행위로 철저히 반대하고 배격하기는 하였지만, 신사참배를 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3. 손양원의 말세론/재림론은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가까운 것으로 나카다[中田重治]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4. 손양원의 목회는 1938년 7월 애양원교회 부임 이전 대부분 순회 목회였지만,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부흥사경회 강사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5. 손양원의 목사 안수는 1939년 7월경 애양원 엉거 선교사에 의해서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방 후인 1946년 2월 19~20일에 마산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에서 다시 공식적인 목사 안수를 받았다. Rev. Son Yang-Won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martyrs of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Some biographies and historical documents have been published, yet academic papers on his life and ministry are very few. Thus there are many unknown or wrongly-known facts about his life and works. This paper uses 『Son Yang-Won's Sermon Notes』and 『Son Yang-Won's Diaries』 as its primary sources, which have been little used by other studies so far. It covers his activities up to August 1945. The followings are the newly found facts through this study. 1. Son entered the Gyeongnam Bible Institute in April of 1926, and was graduated from the same on March 6, 1929. The name of the institution at the time of his graduation was not ‘Gyeongnam Bible School,' but ‘Gyeongnam Bible Institute.’ 2. Son opposed Shinto Shrine worship and resisted it thoroughly because he believed that it was idol worship, an outright violation of the Christian doctrine, and an act of insulting God. 3. It is likely that Son's eschatology was premillennialism, which was similar to that of Rev. Nakada Juji(中田重治) of the Holiness Church. 4. Most of Rev. Son's ministry was itinerating evangelism from 1926 to July 1938. He also worked as a preacher at revival meetings from the late 1920s. 5. As Son was ordained privately at the Aeyangwon Church by Rev. Unger in July 1939, he was ordained officially by the Gyeongnam Presbytery in February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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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양원의 초기 목회활동과 신사참배 거부항쟁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2011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4 No.-

        Rev. Son Yang-Won is one of the representative martyrs of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Some biographies and historical documents have been published, yet academic papers on his life and ministry are very few. Thus there are many unknown or wrongly-known facts about his life and works. This paper uses 『Son Yang-Won's Sermon Notes』and 『Son Yang-Won's Diaries』 as its primary sources, which have been little used by other studies so far. It covers his activities up to August 1945. The followings are the newly found facts through this study. 1. Son entered the Gyeongnam Bible Institute in April of 1926, and was graduated from the same on March 6, 1929. The name of the institution at the time of his graduation was not ‘Gyeongnam Bible School,' but ‘Gyeongnam Bible Institute.’2. Son opposed Shinto Shrine worship and resisted it thoroughly because he believed that it was idol worship, an outright violation of the Christian doctrine, and an act of insulting God. 3. It is likely that Son's eschatology was premillennialism, which was similar to that of Rev. Nakada Juji(中田重治) of the Holiness Church. 4. Most of Rev. Son's ministry was itinerating evangelism from 1926 to July 1938. He also worked as a preacher at revival meetings from the late 1920s. 5. As Son was ordained privately at the Aeyangwon Church by Rev. Unger in July 1939, he was ordained officially by the Gyeongnam Presbytery in February 1946. 손양원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에 관한 전기나 자료들은 일찍부터 출판되고, 정리되었으나, 그에 관한 연구나 논문은 적다. 그리고 그에 관해서 잘못 알려진 분분이 상당히 있다. 이 논문은 이제까지 연구에서 잘 이용되지 않았던 『손양원 說敎集帳』(설교노트)과 『손양원 일기』(일지)를 사용하여, 그의 1945년 8월 이전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이 논문에서 규명된 새로운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손양원은 1926년 4월에 경남성경학원에 입학하여, 1929년 3월 6일 졸업하였고, 당시 그 명칭은 ‘경남성경학교’가 아니라 ‘경남성경학원’이었다. 2. 손양원은 신사참배를 우상숭배, 계명과 교리 위반, 하나님에 대한 불경 행위로 철저히 반대하고 배격하기는 하였지만, 신사참배를 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3. 손양원의 말세론/재림론은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가까운 것으로 나카다[中田重治]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4. 손양원의 목회는 1938년 7월 애양원교회 부임 이전 대부분 순회 목회였지만,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부흥사경회 강사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5. 손양원의 목사 안수는 1939년 7월경 애양원 엉거 선교사에 의해서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방 후인 1946년 2월 19~20일에 마산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에서 다시 공식적인 목사 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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