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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대한기독교회에서 한국교회 파견목사의 지위 변천 과정

        이상훈(李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5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2

        본 연구의 목적은 그 선교가 시작(1908년)된 이후 재일대한기독교회(KCCJ)의 역사 속에서 한국에서 파송되어 온 파견목사의 지위가 목사를 받아들인 측, 즉 입수자 측인 KCCJ와 파견자 측인 한국교회(장로교, 감리교 등)에서 각각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KCCJ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본 후 세 가지의 시대구분, 즉 ‘선교 시작부터 재일본조선 기독교회의 성립까지(1908∼1934년),’ ‘재일본조선기독교회의 성립부터 KCCJ의 성립까지(1934∼1945년),’ ‘KCCJ의 성립 이후(1945년∼)’로 나누어 한국에서 파송된 파견목사의 지위부여에 관해서 고찰하고자 했다. 본 연구가 이용한 주된 자료는 KCCJ 및 한국교회 측의 회의록이나 기독교계 신문의 기사 및 미국·캐나다 선교사들의 보고서 등이다. 고찰한 결과, 장로교의 경우 1917년 이후 재일조선인 선교를 위해서 파견한 목사에게 ‘전도목사’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었지만 해방 후 1960년대 중반부터 ‘선교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확인하였다. 한편 감리교는 일관되게 ‘선교사’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런 차이가 1925년부터 재일조선인 선교를 담당하게 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도 반영되었다. 즉 공의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전도목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감리교에 소속한 이들이 ‘선교사’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례도 있었다. 한편 1934년에 창립된 재일본조선기독교회(KCCJ의 전신)는 조선에서 파견된 목사들을 ‘선교사’와는 구별된 ‘목사’로 지칭하고 있었다. 해방 후 KCCJ는 선교 60주년(1968년)을 맞이했을 때부터 한국교단의 파견 목사를 ‘선교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재일본조선기독교회와는 달리 KCCJ가 한국의 파견목사에게 ‘선교사’라는 지위를 부여한 요인으로는 한국 장로교 각 교단들이 ‘선교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과 KCCJ 스스로 독립교단으로 자기인식을 심화해 나갔기 때문이며, 또한 KCCJ가 선교사를 받아들인 배경으로 한국교회 측의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독자적으로 개척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인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부족한 CCJ 측의 상황이 맞물렸던 것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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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의 현상(現狀)에 대한 역사적 검토

        서정민(Suh Jeong-Min)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1 No.-

        현재의 이명박 정부는 제1공화국 이래 이른바 ‘기독교적 정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는 오히려 반 기독교적 정서를 야기하는 요인이 된다. 한국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한국기독교가 보여주는 여러 현상들에 대해 결코 긍정적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이글은 이러한 한국기독교의 현상들에 대해 사회참여의 특성에 따른 시기구분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종교적 차원이 아닌 정치적 힘의 이데올로기로 수용했던 초기 한국 기독교는 1907년 대 부흥운동을 거치며 사회적 문제보다는 개인적 내면의 문제에 치중하는 특징으로 전환되었다. 물론 3ㆍ1운동을 통해 일부 신앙적 동기가 민족적 에너지로 전환된 사례를 찾을 수 있지만 주류는 개인중심, 내세중심의 신앙이었다. 이는 일제 말기 신사참배 강요에 의한 수난의 시대를 통해 소수의 저항과 다수의 순응이라는 역사적 현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들 소수의 신앙적 동기에서의 저항은 강력한 정치적 저항으로 현상화되었다. 해방 후 한국기독교는 미군정기를 거쳐 이승만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특혜를 누리며 ‘기독교적 정부’를 형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정교유착은 말기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박정희 정부에서도 여전하였다. 소수의 진보적 기독교 인사들은 1969년 ‘삼선개헌’을 계기로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민중신학’을 창출하여 세계적 신학의 흐름과 동류하며 신학적 예언성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양적성장에 매진하는 보수 다수의 기독교 세력과 적극적 사회참여의 진보 소수의 기독교 세력 사이의 양극화와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소수의 진보적 기독교 세력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기를 통해 직접 정치일선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전 민주화 운동 당시의 예언성을 상실하며 사회적 신망마저 잃게 되었다. 반면 다수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정권반대의 결집과 투쟁을 통해 차기 정권을 창출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시대 한국기독교는 더욱 많은 갈등을 빚어내며 세간의 비난을 받고 있다. 총체적으로 현재의 한국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는 한국 일반사회의 인식 수준에서 최하의 평가에 놓여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고난의 민족사에 십자가를 지고 앞장섰던 역사적 유산을 지니고 있다. 또한 민중 크리스천의 신앙 에너지는 오늘날 여전히 강력하다. 또한 어두운 상황을 밝게 비친 예언자적 신학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사고의 전환, 가치관의 변혁, 목표의 수정을 지향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또한 한국기독교는 일본이나 중국 기독교와의 선교협력 사명을 자각하고 있는 동시에, 세계 기독교 안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새롭게 발견해 가고 있다. 이는 한국기독교의 불멸하는 긍정적 희망과 과제이다. Today, the Lee Myoung-bak administration is estimated as christian government again, since the first republic of Korea. But this image is a factor lead to anti-christianity emotion, on the contrary. Social recognition on the Korean christianity has not given positive estimation on the status quo of Korea christian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nvestigate on the status quo of Korean christianity centered on division of period depended on the specific character of participation in public affairs. Early Korean christianity has received christianity as not religious dimension but ideology of political power. Passing through the great revival movement 1907, Korean christianity was transformed to emphasize the individual inner matter rather than social problem. To be sure, through the 3ㆍ1 Independent Movement, we can find some case of a part motivation of faith turning to the national energy, but main stream was focused on individual or hereafter faith. This tendency continued historical situation as minority's resistance and majority's adaptation in the age of sufferings caused by demand of Shinto shrine worship in the last years of the Japanese reign. But this minority's resistance that made faith-based motivation was shown powerfully political resistance. After the Emancipation of August 1945, Korean Christianity formed ‘christian government' with special benefit through the age of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and the course of founding Rhee Seung-man administration. The close relationship of church and state which made in this process, was continued in the last years of Rhee Seung-man regime in spite of the dictatorship and unrighteousness. This disposition was unchanged in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Minority progressive christians came forward to full-scale democratization movement for the chance of ‘constitution amendment of election for the third term(三選改憲)' in 1969. They made 'Minjung Theology' together with current of world theology and displayed theological propheticality. But, in this course, the trouble and struggle between the conservative majority christian who striving for the quantitative growth and the progressive minority christian positive participating to the society were deepened. This progressive minority christian powers were participated immediately in the front of political affairs through the age of Kim Dae-jung and No Mu-hyun administration. But, in this process, they lost propheticality at that time of democratization movement and social confidence. On the other side, conservative majority christians got an opportunity to make the next term administration through the struggle for political power and the concentration for against campaign. But Korean christianity in the age of Lee Myung-bak administration was criticized by Korean society more and more because of it made troubles much more. As a whole, it is impossible of we cannot conclude that the Korean protestant christianity at the present is received the lowest estimation in the rebel of recognition of general society in Korea. However, the Korean christianity has a historical heritage that leaded suffering national history undertake together with the corss. Also, the faith energy of people christian is still powerful. Also, the Korean christianity has a tradition of prophetical theology that lighted on the dark situation of Korean history. And, little by little, an atmosphere intend to conversion of thinking, reform sense of value, rectification of target is perceived. Also, the Korean christianity is conscious of the mission of cooperation missionary work with Japanese and Chinese christianity as well as newly discovering the role of Korean christianity in the world christianity. This is the imperishably affirmative hope and t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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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 70년, 한국 기독교의 권력유착 사례와 그 성격

        윤경로(Yoon Kyung-R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6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4

        본 논문은 ‘한국 기독교의 성찰과 반성’이라는 큰 주제 아래 “분단 70년, 한국 기독교의 권력유착 사례와 그 성격”을 논구한 글이다. ‘분단 70년’을 고려할 때 2015년까지 다루어야 했으나 이 연구대상 시기는 해방 이후 미군정기(1945-1948), 이승만 집권기(1948-1960), 박정희 군사집권기(1960-1971) 그리고 유신 독재기(1972-1979)까지 한국교회와 정권유착 관계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와 그 성격을 다루는데 그쳤다. 첫째, 미군정기 권력유착과 한국 기독교 특히 교회문제는 적산불하(敵産拂下), 곧 패전한 일본의 한국 내 재산처분을 미군정이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받은 특혜를 중심으로 천착했다. 둘째,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권력유착 문제는 그 정권이 ‘기독교 정권’이라 할 만큼 여러 특혜를 받은 구체적 사례를 적시했다. 반공이념을 국시로 내세우면서 상대적으로 친기독교적 정책을 펼친 이승만 정권에서 진행된, 예컨대 종교인들에 대한 각종면세 혜택을 비롯해 군대와 형무소 안에 실시한 군종제(軍宗制)와 형목제(刑牧制) 등을 비롯해 일요일과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정한 것과 공영방송을 통한 기독교 선교방송 허용, 기독교방송국 설립 허가, 그리고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독교적으로 실시한 것 등등 구체적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셋째,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권력유착관계를 좀 더 천착해 구명했다. 먼저 군사정권 초기의 기독교계 추이를 돌아보며 베트남 파병과 군목파견에 따른 정권유착과 대통령조찬기도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권력유착관계, 전국신자화운동 등을 추진하면서 권력과 한국교회 특히 교회지도력과의 권력유착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살펴보았다. 끝으로 유신독재기 권력유착 사례를 이 시기 진행된 초대형 전도집회와 이러한 초대형 집회를 가능하게 한 물적 토대(物的土臺) 제공자 역할을 한 기독실업인회에 대해 구명했다. 이러한 사례연구를 통해 해방 이후 한국교회와 기독교계는 종교적 전도와 선교를 내세웠지만 매우 정치적이었으며 권력과 유착한 정치집단의 성격이 강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해방 이후 지난 70년간의 한국교회와 기독교는 교세로는 매우 크게 성장 발전했다 할 수 있으나 본래 기독교 복음정신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세속적이었다는 자기반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하겠다. 특히 개신교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2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한국 기독교계는 자기성찰과 반성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This paper is a writing that reviews ‘Seventy years after National division, cases and nature of Korean Christianity’s adhesion to power’ under the big theme of ‘introspection and reflection of Korea Christianity.’ The period to 2015 should be dealt with when considering ‘Seventy years after national division" but this study only dealt with the specific cases and nature on the adhesion relationship between Korean church and regime in Regime of U. S. Army(1945-1948), Rhee Syng-man’s reign(1948-1960), Park Chung-hee’s military reign(1960-1971) and Yushin(Revitalizing Reform) dictatorship period(1972- 1979). First, adhesion of power during Regime of U.S. Army and Korean Christianity, especially the church problem was explored with a focus on enemy property transfer(敵産拂下), that is, special favors given to Korean Church in the process of the U.S. Military Government handling defeated Japan"s assets in Korea. Second, the power adhesion problem under Rhee Syng-man government pointed out specific cases of receiving many privileges enough to call the regime as ‘Christian regime’. We examined specific cases conducted in Rhee Syng-man government that carried out the relatively pro-Christian policies while presenting the anti-Communist ideology as a national policy, for example, designation of Sundays and Christmas as holidays including military chaplaincy and Prison chaplaincy implemented in the military and prisons including various exemptions for religious people and permission of Christian missionary broadcasting through public broadcasting, approval of establishment of Christian broadcasting system and Christian major events of the country. Third, power adhesion relations under the Park Chung-hee military regime were further explored. We first reviewed the trends of the Christian world in the early military regime and examined the specific cases on adhesion of regime caused by dispatch of armed forces to Vietnam and army chaplain dispatch, power adhesion relations with a focus on Presidential Prayer Breakfast and adhesion of power made between power and Korea Church, especially with church leadership while promoting national believers movement etc. Finally, power adhesion cases during the Yushin dictatorship period were examined for mass missionary meeting conducted during this period and Christian Business Men’s Committee who played a role as a material foundation provider enabling these mass meetings. Through these case studies, it can be said to be difficult to deny that although asserting religious evangelism and mission, Korean Church and the Christian world after the liberation were very political and had the strong nature of political groups that adhered to power. From this point of view, the congregation of Korean Church and Christianity is considered to have developed and grown very significantly for last 70 years after the liberation but self-reflection and introspection on being very worldly in the light of the original spirit of the Christian gospel are required. In particular, the reflection and self-reflection of Korea Christianity can be said to be further required in a situation with two years ahead of the five hundredth anniversary of the Lutheran Reformation that enabled the birth of Protestan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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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정과 일본기독교와의 관계

        서정민(徐正敏)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5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3

        한국기독교 수용자의 한 축을 이룬 인물이 이수정이다. 이수정의 기독교수용은 한국 프로테스탄트 수용역사에 있어 지식인계층 수용의 중심축을 이룬다. 이로써 비교되기를 만주의 서상륜과 ‘로스성서’ 번역자들에 의한 수용루트가 민중계층 수용의 특성을 지닌 것과 달리 일본을 기점으로 하는 기독교 수용은 ‘양반, 엘리트’ 수용의 특징으로 함축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듯 이수정은 한국 프로테스탄트역사에서 엘리트 수용자의 대표적 첫 당사자이다. 그동안 그의 연구는 개인의 생애, 활동, 미국선교사들의 한국선교 착수를 권고하는 선교사 유치 노력, 그리고 특별한 업적으로 성서번역의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들 연구는 한국기독교 수용 역사에서 이수정의 위치를 충실히 정리해 주는 주제들이다. 그런데 본 논문에서는 이수정의 프로테스탄트 수용 활동의 바탕, 즉 ‘콘텍스트’가 되는 당시의 일본, 일본기독교, 그리고 이수정과 관련되었던 일본의 조력자들을 중심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이는 한국기독교 수용역사에서 일본이 지닌 역할, 하나의 중요한 관계 축으로서의 의의를 확인하는 주제이다. 이수정은 한국기독교의 수용자일 뿐 아니라 한일기독교 관계사의 첫 사람이다. 그는 또한 한국 신구교의 연결 정체성을 지니기도 했다. 또한 미국선교사의 한국선교 유치를 주도하고, 첫 선교사들의 내한에 관여함으로 한미기독교의 중간자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이수정은 서로 다른 주체 간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사명을 다했다. 이 논문에서는 특히 이수정과 일본기독교의 관계, 더 나아가면 한일기독교의 초기 관계사의 관점에 유의했다. 이수정 시대의 한일 기독교, 물론 이 시기의 한국기독교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긍정적 관계에서 출발했다. 일본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수정을 한 예로 만나면서 자신들의 선교자로서, 더 근본적으로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사명을 발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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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미국 종교지형과 기독교 역사학의 변화

        류대영(Ryu Dae-Young)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6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24 No.-

        20세기 초 미국 기독교 역사학은 1920년대까지 미국 역사학계를 지배한 “과학적 역사학”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과학적 역사학의 경험주의적 전제들이 붕괴되면서 미국 기독교 역사학은 그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1930년에 처음으로 현대적 의미의 미국 종교사/기독교사 통사가 출간 된 이후 약 한 세대 동안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양의 연구가 축적되었다. 1960 년대에 나온 통사들은 이런 집단적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1972년에 출간된 시드니 알스트롬의 통사는 그때까지 미국 기독교 역사에 대한 모든 연구를 총집결한 기념비적 저술이었다. 그러나 알스트롬의 통사까지의 미국 기독교 역사는 여전히 기독교를 미국의 종교와 동일시하고, 기독교 내에서도 개신교, 특히 주류 개신교를 중심으로 미국 기독교 역사를 이해하고 있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종교지형은 급격하게 변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종교의 다원성과 여성주의의 등장이었다. 비기독교 전통의 나라들로부터 꾸준히 이민이 들어오고, 동양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비기독교 종교들이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했다. 이와 아울러, 여성주의가 대두함에 따라 초대 기독교 시절부터 기독교의 실질적 주력이었던 여성의 독특한 목소리와 역사적 역할에 대한 관심이 일었다. 미국 종교사/기독교사 내에서 여성을 찾는 움직임은 1981년부터 5년에 걸쳐 발간된 “미국에서의 여성과 종교”라는 선구자적 저술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21세기 들어서도 20세기를 걸쳐 진행되던 종교적 변화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미국 기독교 역사학은 이와 같이 변화하는 종교지형에 처한 기독교의 모습을 관찰하기 위해 방법론적 혁신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 역사학계는 미국 기독교 역사학의 변화뿐 아니라, 미국 종교지형의 변화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American religion has undergone dramatic changes in the 20th century. As “Protestant America” or “Christian America” came to an end by any measure during the 1960s, pluralism has become the part and parcel of American religion. With the increasing influx of immigrants from the non-Judea-Christian world, the demography of American religion has dramatically changed. For instance, Islam, with its over 6 million adherents, already surpassed the size of the Jewish community as well as such mainstream denominations as the Episcopalian Church and the Presbyterian churches. Los Angeles has the most complex and variegated Buddhist community in the world. Besides, due mainly to the marching feminist movement, churches are forced to discover and recognize the place and contributions of women in and to Christianity in the United States. Historians of American religion and Christianity have tried to reflect the changes in American religion. The primary themes of religious historiography have been changed from Christianity to the Judeo-Christian tradition, and finally to religious pluralism. Women, black religion, native American religion, and eastern religious traditions have become legitimate and important subjects of historical discourses. New historiographical methods have been developed to better articulate the changes in American religion. Christianity remains to be the dominant religion ; it nonetheless has been losing ground and finds itself in an increasingly pluralistic environment. Historians of Korean Christianity may draw insights from changes in American religion and religious historiography. In particular, they need to pay more attention to women in the history of Korean Christianity and to the changes in the Korean religious terrain that is becoming more pluralistic than ever bef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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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1운동과 기독교

        이덕주(Rhie Deok-J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7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7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 기독교(개신교)는 선교역사가 30년이 되지 않은 ‘신흥종교’ 수준이었다. 종교인 비율로 봐도 전체 인구의 1.5% 수준에 머무는 ‘소수종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 1운동의 준비, 모의단계로부터 대중 투쟁단계, 그리고 3 · 1운동 후 임시정부 조직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기독교계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한국 기독교는 선교초기부터 강력한 ‘민족주의 종교’로 성격이 형성되었다. 19세기말 근대화시기에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소개된 기독교 복음은 ‘자유와 평등’의 메시지를 한민족에게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적 사회체제에서 억압당하며 살았던 하층민과 부녀자 계층이 기독교를 통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체득, 실천하였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기독교를 통하여 서구문화와 문명의 유입이 이루어졌고 그와 함께 수직적 질서가 강조되던 봉건사회가 붕괴되면서 수평적 가치가 구현되는 시민사회로 바뀌었다. 이처럼 한말 민족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한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어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종교로 변모하였다. 그것 역시 일제의 억압통치로부터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는 민족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고 참여하는 민족주의 성향을 띠게 되었다. 둘째, 한국교회는 식민통치 상황에서 민족문제를 논의하고 투쟁하는 ‘민족운동 공간’이 되었다. 선교초기부터 서구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며 기독교인들의 정치 참여나 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활동에 간섭하지 않도록 정치권(총독부)과 타협하였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 교회는 선교사들의 보호 아래 ‘치외법권적 영역’이 되었을 뿐 아니라 총회와 연회, 지방회(노회)를 연결하는 전국 연락망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경찰력이 미치지 않았던 교회와 기독교 선교기관 안에서 (선교사들의 의도와 달리) 민족주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민족문제를 논의하고 항일 민족저항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3 · 1운동 때 만세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자료가 지방에 신속하게 전파되어 전국적인 시위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전국 연락망’을 갖춘 교회와 기독교의 연결 조직이 있어 가능했다. 셋째, 한국 기독교의 초교파 연합운동 경험이 종파를 초월한 ‘전 민족적’ 독립운동을 가능케 하였다. 선교초기 각기 다른 교파와 교단을 배경으로 하여 내한한 선교사들에 의해 ‘교파중심’ 교회 설립과 선교가 추진되었다. 그러다가 1903~07년 일어난 초기 부흥운동의 여파로 교회 일치운동이 일어나 성서번역과 문서출판, 의료와 교육 사역에서 초교파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연합과 연대 경험을 바탕으로 3 · 1운동 때 장로교와 감리교목회자, 평신도 지도자들이 천도교와 불교 등 다른 종파 지도자들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할 수 있었고 서울과 지방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다른 종파 지도자, 일반 시민들과 연대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 기독교는 3 · 1운동을 통해 교파와 종파를 초월하여 대동단결하는 민족운동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렇듯 선교초기부터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던 한국 기독교는 3 · 1운동을 거치면서 민족주의 종교로서 그 성격과 역할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런 배경에서 한국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 하에서 항일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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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강제병합 전후 일본 여성 기독교인의 한국 인식

        가미야마 미나코(神山 美奈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6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5

        본 논문은 한국 강제병합기(1894년 청일전쟁부터 1919년 3.1 독립운동 시기까지를 중심으로)에 있어서의 일본의 여성 그리스도인, 그 중에서도 이 시기에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여성 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기독교부인교풍회’(1886년 설립. 이하, 교풍회)와 일본 YWCA(1905년 설립. 이하, YWCA)에 소속된 여성들의 한국 인식을 고찰하였다. 특히 양 단체의 기관지, 즉 교풍회가 발행한 『도쿄부인교풍잡지』(이후 『부인신보』)와 YWCA가 발행한 메이지의 여자 (이후 수차례 개명 후 현재는 『YWCA』)에 게재된 한국 인식의 내용을 고찰함으로써, 한일 기독교사에 있어서의 여성 그리스도인을 통한 새로운 관점을 확보하고, 두 단체에 있어서의 당시 기독교 이해 및 선교 이해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청일·러일 전쟁 시기에는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는 일본’으로서의 모습을 연출하는데 일본의 기독교 여성들도 지원 활동을 전개했지만, 한국 강제병합기에 들어선 이후부터는 교풍회와 YWCA 모두가 공통되게 일본의 식민지하에 놓인 한국의 상황을 그대로 긍정하며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1919년의 3.1독립운동에 관해서는 한국에서 발생한 ‘소요사건’이라는 이해에 머물면서도, 한국인에 대해서 동정과 유감의 뜻을 나타내며 정치적 상황과 기독교 신앙과의 관계 가운데서 갈등하고 있음을 보인다. 그 중에서도 교풍회가 YMCA보다 일본의 식민지화 정책에 더욱 적극적인 협력의 태도를 보인다. 결국, 당시의 일본의 여성 그리스도인들은, 일본의 국책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피동적으로 휩쓸려 가면서, 남성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스스로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과 일본의 제국주의의 양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망국조선’을 영적으로 각성시켜 구원의 길로 이끄는 손길로서의 선교 활동이 자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믿으며 그 역할을 잘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한국인을 향한 동정이나 한국인 차별에 대한 반성을 재촉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기는 했지만, 식민지 지배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견해나 고뇌, 갈등은 찾아볼 수 없다. 그 근저에는 뿌리 깊이 존재하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우월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한국인에 대한 동정 심리나 반성적인 기사의 내용들도 그러한 우월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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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과 한국기독교의 관계의 역사적ㆍ정치사회적 맥락

        안교성(Ahn Kyo-Seong)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4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 No.40

        2008년 소위 ‘좌편향 교과서’ 사건 이후 한국사회에는 역사적 관심이 비상하게 높아졌고, 그 결과 ‘건국’은 이제 단순한 ‘정치’ 사건이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건국과 한국기독교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본 논문은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기존 연구와 두 가지 점에서 차별화된 접근을 하고자 한다. 첫째, 본 논문은 이 관계 자체를 상세히 다루기보다 이 관계의 역사적·정치사회적 맥락을 고찰하고자 한다. 둘째, 기존 연구에서 건국을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본 논문은 건국이 실제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의 관점까지 고려하면서,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하여 답하였다. 첫째, 건국 이전에 대해서는, 민족지도자들과 한국기독교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한국기독교는 건국과 관련된 민족지도자의 거대한 인력 풀을 마련하였다. 둘째, 건국 당시에 대해서는, 건국과 한국기독교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특히 기독교건국론의 문제를 재고하였고, 건국을 둘러싼 기독교 내부의 다양한 정치 지형을 살펴보았다. 한국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정치 참여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적으로 정치 참여를 하였고, 한국가톨릭교회는 소극적으로 그런 추세를 따라갔다. 셋째, 건국 이후에 대해서는, 미국과 한국기독교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특히 건국과 친미주의에 대하여, 분단 문제, 친일세력 발탁 문제, 신탁통치 문제를 살펴보았다. 국가와 종교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며, 이것은 건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Since the controversy over the so-called ‘leftist textbook’ in 2008 aroused national interest in history in Korea, the issue of ‘nation-building" became not only an event of ‘politics’, but also a very ‘political’ one. It is in this context that re-emerged the question of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nation-building and Korean Christianity.’ This paper aims to answer this question. In doing so, this paper distinguishes itself from previous studies in two aspects: first, it focuses on the context of the relationship rather than the relationship as such; and second, it approaches the issue of nation-building from the practical viewpoint rather than the ideological one. This paper argues that, regarding the pre-nation-building period, Korean Christianity provided the pool of national leaders who finally became the masterminds of nation-building. It maintains that, in regard to the nation-building years, the Korean Protestant Church was ready to engage in politics, while its counterpart, the Korean Catholic Church, passively swam with the tide. It also stresses that, as regards the nation-building years and its aftermath, Korean Christianity had a complex relationship with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hich cannot be reduced to pro-Americanism, in the various areas such as the division of the nation, the selection of the pro-Japanese group in nation-building, and the trusteeship. It must be remembered that the relationship of Church and State has never been simple and straightforward, and the issue of nation-building in Korea is a case in po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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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 외원단체의 구호활동

        김흥수(Kim Heung-Soo)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5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23 No.-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구호를 필요로 하는 전쟁 난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1952년 3월 통계에 의하면, 전쟁으로 집을 잃은 피난민, 전쟁으로 물자 상실이나 지원수단이 파괴되어 고통을 받는 전쟁 이재민, 빈곤과 인플레이션으로 괴로움을 받는 지방 빈민이 남한 인구 21,000,000명 가운데 절반이나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으며, 원조단체 중에서도 외국의 기독교회와 구호단체들은 한국교회에 다량의 구호금품을 보내거나 직접 구호활동가들을 보내 구호활동에 나섰다. 이 단체들은 40여 개에 달했으며, 민간 구호 단체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 글은 한국전쟁 시기 및 전쟁 직후 활동한 기독교 외원단체들의 내한과 구호활동 과정을 살펴보고 그 중에서도 미국과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구호사업을 대변했던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활동을 정리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전시에 내한한 외원단체들은 한국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온 미국교회에 속한 단체가 가장 많았다. 교파는 장로교, 침례교, 나사렛교회, 메노나이트, 퀘이커, 동양선교회, 감리교, 안식교, 유니테리언교회, 루터교, 천주교 등 다양했다. 구호품을 가장 많이 전달하고 구호활동을 가장 활발히 전개한 기독교 외원단체는 미국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가톨릭구제위원회와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속한 기독교세계봉사회였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구호 활동도 대행하였다.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한국 책임자는 헨리 D. 아펜젤러 목사였다. 기독교 외원단체들은 제한된 자원과 구호의 긴급성 때문에 응급한 구호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보건사업에도 손을 대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피난민들을 위한 사업과 아동, 전쟁미망인, 부상자 등을 위한 구호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전시의 구호활동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사업이었다. 이 시기에 외국 기독교 외원단체들을 통해 전개된 구호 및 복구 활동은 한국사회에 대한 봉사의 양과 규모에서 한국교회 초기에 있었던 외국교회들의 교육과 의료활동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으며 한국사회에 대한 대규모 봉사의 재현이었다. 외원단체들은 구호 활동을 통해서 한국인들에게 사회봉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사회교육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기독교 외원단체의 영향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했으며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다. 미국으로부터의 엄청난 양의 원조는 미군의 참전과 함께 전후의 한국인들에게 미국이 일종의 구원국가로 보이게까지 했으며 이러한 인식은 외원단체의 최대의 수혜자였던 교회에 아직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Shortly after the Korean War broke out, half the people of Korea were in need of relief. Refugees, war sufferers, and local destitute amounted 10, 291,774 of the total population 21,000,000. In this situation about 40 foreign voluntary agencies with Christian background came to South Korea and began to play a key role in relief activities for war refugees and sufferers. Among other things, Church World Service and War Relief Service of the 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 played prominent part in the relief and rehabilitation during and after the Korean War. This essay examines the relief activities of Christian voluntary agencies from foreign countries in general and those of Church World Service in particular. Church World Service conducted relief and rehabilitation programs in Korea ever since the end of World War II, but during the Korean War it carried on more extensive program of relief of Korean refugees and other war victims as agent of the American Churches and World Council of Churches. Since February, 1951, Rev. Henry D. Appenzeller directed relief work of the Church World Service in Korea. He and his missionary and Korean Christian associates were engaged in distributing supplies, in assisting with the movement of refugees and in their settlement with the cooperation of other voluntary agencies such as War Relief Service Committe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CARE, etc. Main relief work of the Church World Service included orphans and unaccompanied children, the physically handicapped, vagrant adolescents, children and war wid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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