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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세기 동북아 국제정세와 契丹의 요동정책

        나영남(羅永男)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1 역사문화연구 Vol.39 No.-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10세기는 변화의 분기점이자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출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진원은 무엇보다도 중원세력의 분열을 틈탄 거란의 발흥을 들 수 있으며 이러한 정복왕조의 출현은 동북아시아 정세를 일변시킨다. 과거에는 중원왕조가 주변제국을 압도하던 반면 10세기는 장성이북의 북방민족이 동북아 질서를 주도하는 시대가 된다. 중국의 주도권 상실은 華夷思想을 바탕으로 하는 조공ㆍ책봉체제를 맹약체제로 변질시켰고 주변 제국들도 이러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이념보다는 각국의 실리를 추구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 동북아 국제정세의 가장 큰 특징은 契丹의 崛起라고 할 수 있는 한편 거란의 요동정책은 東丹의 설립으로 대변할 수 있다. 거란은 요동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한순간에 발해를 멸망시켰지만 어떤 형태로 그 지역을 통제할지 망설인다. 발해유민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요 태조는 일단 국호만 바꾼 채 발해의 연속성을 인정한다. 동란은 외견상 독립국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 과도기적 정치체제에 불과했다. 야율아보기는 동란이라는 위성국가를 세워 일단 발해유민들의 저항을 완화시키고 초기 거란의 재정을 충실히 확보하면서 궁극적으로 동군연합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조 아보기의 이러한 뜻과는 달리 거란 내부의 권력투쟁 및 발해 유민들의 끊임없는 반요투쟁으로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도 전에 동란을 축소하게 된다. 태종이 성급하게 동란을 포기함으로써 동란은 독립국에서 지방행정단위로 편입되었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요동에 대한 거란의 지배영역은 상당부분 후퇴하였다. 더욱이 발해를 구성하고 있던 성원들과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한 결과가 정안국 건립, 燕頗 및 大延琳의 반항, 생여진의 불만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반란은 비록 실패했지만 요조의 동북지역에 대한 통치에 심각한 타격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발해고지의 통제력 이완은 훗날 거란을 멸망시키는 一因을 제공하기도 한다. 발해 인들은 요가 멸망하는 날까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저항을 계속하였고 최후에는 여진이 요에 반항하는 큰 흐름 속으로 합류되어 요 왕조를 약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란의 성급한 폐지는 요동지배의 실패를 의미하며 또한 요동의제 민족들을 거란의 구성원으로 포섭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훗날 발해 인들이 아골타가 금을 건국하고 거란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공헌하는 결과를 제공하게 된다. 東北亞的十世紀可以說是變化的兩平點, 也可以說是進入新時代的門口。這一時期的根源, 首先列舉趁機分裂中原勢力而契丹的勃興。這些征服王朝的出現, 大大改觀了東北亞的局勢。過去與中原王朝來壓倒周邊諸國相反, 到十世紀, 成爲長城以北的北方民族來主導東北亞秩序的時代。中國的授人以柄, 把以華夷思想爲本的朝貢冊封體制變爲盟約體制。周邊諸國也爲了應對如此的情勢, 追求各國的實利。 在如此的變化裏, 東北亞國際情勢的最大特點可以說是契丹的崛起, 另一方面契丹的遼東政策表現出東丹的建立。爲了鞏固契丹對遼東的支配, 短時間內滅亡渤海, 反而, 猶豫了利用什麽形態來控制那些地區。遼太祖面臨渤海遺民的激烈地抵抗後, 一旦改變渤海國號而認定渤海的連續性。外表上東丹國具備獨立國的形態, 實際上只不過是一個過渡期性的政治體制。耶律阿保機一方面以建立叫做東丹的衛星國家, 緩和爲渤海遺民的抵抗, 另一方面, 確保初期契丹財政, 最後要建設東軍聯合的國家。 但是, 與遼太祖阿保機的意圖不同, 由於契丹內部的權力鬪爭以及渤海遺民的連續不斷的反遼鬥爭, 實現鞏固對遼東地區的支配以前, 東丹國就縮小了。遼太宗由於急躁放棄東丹, 東丹國就從獨立國到編入爲地方行政單位。當如此一系列過程中, 契丹對遼東的支配領域相當後退了。尤其沒有除根和構成渤海的成員們矛盾的後果, 出現了定安國建立, 燕頗和大延琳的反抗以及生女眞的不滿等問題。這些反亂雖然失敗, 但是遼朝對東北地域的統治, 給了深刻的打擊。後日對渤海故地和緩統制力, 提供了契丹滅亡的一個原因。渤海人到遼朝滅亡時, 在到處不斷地繼續抵抗, 最後會合於女眞對遼朝反抗的歷史潮流, 成爲遼朝衰弱的一個重要原因。 歸納而言, 東丹的急躁廢止, 意味著契丹對遼東支配的失敗, 而且如同契丹把遼東諸民族沒有容納爲契丹的成員。這是後日渤海人在阿骨打建金國和滅亡契丹的過程中, 提供了直接或者間接地貢獻的結果。

      • KCI등재

        興遼國 國號 문제에 대한 재검토

        권용철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4 인문학연구 Vol.63 No.1

        본고에서는 1029년에 거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대연림이 세운 국가의 명칭인 ‘興遼’의 의미에 대한 재검토를 시도했다. 대연림이 왜 ‘요를 일으키다’로 해석될 수 있는 興遼를 국호로 정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학계에서 오랫동안 명쾌하게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다. 거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놓고, 거란의 국호인 요를 쓰면서 요를 일으키겠다는 모순적인 모습이 드러났다고 연구자들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추론들이 제기되었지만, 이러한 추론들 중에서는 상황을 억지로 연결시키려는 논리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興遼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해결하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필자는 거란의 국호 변경 상황 그리고 대연림의 반란이 일어난 1029년이라는 시점에 주목하여 興遼의 의미를 다르게 분석했다. 거란은 大契丹과 大遼라는 국호를 시기에 따라 바꾸면서 사용하였고, 한자 국호인 大遼는 주로 한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통용되었다. 특히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켰던 1029년은 오로지 大契丹만이 거란의 공식 국호로 사용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 대연림이 세운 국가인 興遼라는 국호에서 ‘遼’는 거란의 한자 국호가 아니라 대연림이 근거한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기록인 고려사 에서도 ‘遼’를 거란의 한자 국호로 사용하지 않은 사례가 興遼國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고려와 거란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고려의 영덕진에서 거란의 내원성에 보낸 첩문에는 ‘平遼’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興遼國을 평정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만약 거란의 한자 국호인 遼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平遼’ 대신에 얼마든지 다른 표기를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가 첩문을 거란의 내원성에 보낸 1035년 당시에도 거란의 공식 국호는 ‘大契丹’이었기 때문에 ‘平遼’ 역시 ‘요동(혹은 요양)을 평정’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興遼國의 ‘遼’를 거란의 한자 국호가 아닌 요동(요양)으로 해석해야 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 증거로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This article attempts to revisit the meaning of Xingliao(興遼), the name of the state founded by the Daeyeonlim(大延琳) in 1029, which rebelled against the Khitan(契丹). The question of why Daeyeonlim chose Xingliao, which can be interpreted as "to set up Liao dynasty," has long been unresolved in scholarship. Various theories have been proposed to resolve this problem, but there is still no clear answer. This is because the contradiction is so difficult to resolve. Therefore, this article analyzed the meaning of Xingliao differently by focusing on the circumstances of the Khitan's change of state name and the time point of 1029. The Khitan used both Great Khitai(大契丹) and Great Liao(大遼) at different times. By 1029, when Daeyeonlim rebelled, only Great Khitai(大契丹) was used as the official state name of Khitan. With this fact in mind,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the "Liao" included in Xingliao, was not the Chinese state name of Khitan.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Liao was referring to Liaoyang(遼陽) or Liaodong(遼東).

      • KCI등재후보

        渤海國과 契丹의 교섭관계 재검토

        임상선(LIM Sang-sun) 고구려발해학회 2008 고구려발해연구 Vol.32 No.-

        이 논문에서는 契丹太祖가 渤海를 거란의 대대로의 원수라고 한 것이 두 나라간의 관계에서 어떤 연원이 있는지를 발해와 거란의 관계를 통하여 검토하였다. 발해와 거란은 이웃하고 있었고, 풍속도 서로 같다고 하였다. 『舊唐書』와『新唐書』발해전에서는 발해의 풍속이 高麗만 아니라 거란과 같다고 하였다. 결국, 발해와 거란, 고려, 말갈, 돌궐은 습속상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발해 건국집단이 거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營州로부터 탈출이 바로 거란의 난으로 인한 것이었고 또 東走과정에서도 거란과 일정한 협력이 있었고, 乞乞仲象의 칭호인‘舍利’는 바로 거란군사를 관할하는 頭目의 칭호였다. 당 則天이 대조영 무리를 끈질기게 토벌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이들이 李盡忠의‘餘黨’이기 때문이었고, 崔致遠의 글에서도 발해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발해와 거란이 공모하였다는 것을 신라인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와 거란의 협력은 발해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720년 9월 奚와 거란을 토벌하라는 唐의 요구에 발해가 응하지 않았고, 심지어 732년 발해가 당나라의 登州를 공격한 배경에 거란의 지원이 있었다. 9세기에 발해와 거란의 관계에 대해서는『신당서』발해전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데, 夫餘府는 원래 夫餘의 옛 지역이었고, 이곳에 항상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방어하였으며, 扶州와 仙州를 관할하였다고 하였다. 발해의 5경 15부 중에서 부여부 이외에 군사를 주둔시켜 방비하는 곳이 한 곳도 없다는 점에서 부여부는 발해에서 가장 군사적으로 민감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때에는 발해와 거란이 대립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耶律阿保機가 거란족의 유력한 지도자로 등장하는 시기인 10세기부터는 거란이 발해에 대하여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게 된다. 925년 12월 야율아보기는“이른바 두 가지 일 가운데서 한가지 일은 이미 완수하였으나, 발해와의 대대로 내려온 원수는 갚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926년 1월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 시기 발해와 거란간의 관계에 대하여, 고려 太祖는 발해와 거란은 아보기의 등장 이전까지는 서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아보기 등장후 거란이 無道하게 발해를 멸망시켰다고 보았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발해는 건국 이전부터 거란과 친밀하였고, 이러한 관계가 8세기 전반까지 유지되고, 9세기에 일시 긴장관계도 있었지만, 거란 태조인 야율아보기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양국이 대대로의 원수사이는 아니었다. This thesis studied relationship between Balhae(渤海) and Khitan(契丹) that had had special reason that Taizu(太祖) of Khitan had said Balhae a enemy for generations. Balhae and Khitan were neighbors and had same customs. In September 720, Balhae did not bow to the Tang Dynasty’s demands that were to subdue Xi(奚) and Khitan. Even in 732, Balhae supported from Khitan attacked Deungju(登州). In this manner, Balhae and Khitan had cooperated since foundation of Balhae. In the 9<SUP>th</SUP> century, the relationship between Balhae and Khitan by means of New History of Tang Dynasty(新唐書) seems to be antagonistic each other because Buyeobu (夫餘府) lied at ancient Buyeo(夫餘) and troops stationed there to defend Khitan. However, Khitan became to change to the offensive actively against Balhae from the 10<SUP>th</SUP> century when Yelu Abaoji(耶律阿保機) appeared as a powerful leader. In December 925, Yelu Abaoji said “though what is called one of two things was finished already, but we could not revenge Balhae. Under these circumstances how can we live in comfort?”, called to arms and destroyed Balhae in January 926. Taize of Koryo(高麗) considered both countries kept peace before the advent of Yelu Abaoji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Balhae and Khitan at this time and after Yelu Abaoji, Khitan destroyed Balhae irrationally. As above, Balhae had been intimate with Khitan before foundation. This relationship continued until the 8<SUP>th</SUP> century. Though between two countries had strained relations, in the 9<SUP>th</SUP> century, it seems that they kept friendship before the advent of Yelu Abaoji that is the Taize of Khitan. It seems that “Balhae were the enemy of Khitan for generatioins”it was justication of Yelu Abaoji to conquest Balhae was not real. It was only diplomatic skill to justify subjugating Balhae and really both countries were not enemies for gene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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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문자 분석을 통한 거란(契丹) 국명(國名) 연구

        류병재(Yoo Byungjae) 백산학회 2021 白山學報 Vol.- No.119

        국명(國名)은 한 국가나 왕조를 나타내는 상징성을 가진다. 따라서 국명을 정할 때 그 의미가분명해야 하며 한번 정해진 국호는 거의 바뀌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야율아보기(耶 律阿保機)가 세운 거란은 여러 차례 국명이 변동되었다고 보아 왔다. 거란은 원래 ‘거란(契丹)’을 국가의 명칭으로 삼았으나 이후 중국 북쪽의 연운16주를 차지한이후에는 ‘요(遼)’라는 한자 명칭을 병행하여 사용하였고 이후 거란 황제들의 재위 기간에따라 두 명칭을 번갈아 사용하였다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거란인들은 자신들의 국명을 거란문자로는 “[khitai]”와 “ [quli~quliʧi, xus]” 등으로 표기하고, 한문으로는 ‘契丹(Khtai or Khitan)’과 ‘遼(Liao)’라는한자로 표기하였다고 보았다. 이를 조합하여 “대(중앙)요거란국(大中央遼契丹國)” 혹은 “대(중앙)거란요국(大中央契丹遼國)”이라는 뜻을 가진 거란어 국명과 “大契丹” 혹은 “大遼”라는 한자 국명을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또한 ‘遼(Liao)’와 대응하는 거란어 는 [quli/qur]라고 발음되며 요하(遼河, Liao River)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The name of country has symbolism that shows a nation or dynasty. Accordingly, its meaning must be clear when naming a country. It is common for the name of nation, which has been decided once, to be hardly ever changed. However, Khitai that was founded by Yelu-Abaozhi(耶律阿保機) was modified the name of the country many times. Khitan was confirmed to have originally had ‘Khitai’ as a national name, but to have subsequently used Chinese character dubbed ‘Liao(遼)’ in parallel after occupying 16 states of Yeonun(燕雲十六州) in northern China, and to have alternated between the two names after this according to the period of reign in emperors of Khitan. Khitan people marked the name of a country as “[khitai]” and “[quli~qur, hulʤi, xus]” with the Khitan Scripts and notated it as the Chinese character dubbed ‘Khitai or Khitan’ and ‘Liao’ with the Chinese writing. In combination of this, Khitan people used it with mixing the name of nation in Khitan language, which has a meaning dubbed “Great [central] Liao Khitan State(大[中央]遼契丹國)” or Great [central] Khitan Liao State(大[中央]契丹遼國),” and the name of country in Chinese character called “Great Khitan(大契丹)” or “Great Liao(大遼).” Also,  in Khitan language of corresponding to Liao is pronounced as *[quli/qur] and was considered to have high possibility of being likely related to Liao River(遼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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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의 國信使가 契丹의 황제·황태후를 알현하는 의례

        金成奎 동양사학회 2012 東洋史學硏究 Vol.120 No.-

        ?淵之盟(公元1004年)以後, 宋朝?契丹(遼朝)在??平等的地位的前提下,?持了120多年, 多?680次的定期使臣往?. ?是宋朝在中?外交?史中前所未有的. 但至於??如何進行交流?接??待?究. ?者在前稿中, ?《??新?》中的“契丹使??”三??,? 《契丹使??》, 《契丹使宴?》, 《契丹使??》做了分析,??述了宋朝接待契丹使臣的?法和形式. 宋朝原本不?同其他?家?自己的同等地位,但在新的???境中,?了适???情況,宋朝在?外?的“?”?“?”方面做了?大的?整,?些宋朝?契丹的新????去?待其他?家的方式?然不同. 那契丹究竟如何接待宋朝使臣? ?也是頗具?究性的??,但?去?沒有?注?方面的?究. 本文??者的前稿相反,?契丹的角度?看接待宋朝使臣的??. ??点上看本文可?是前稿的後?. 契丹?宋朝之??使臣互相派遣, 接待,其次?相差无幾. ???明契丹?宋朝使臣的接待方面也有一定的??.《?史·?志》 中的五???就是契丹接待宋朝使臣的?程中所?生出?的.本文?了?“契丹使??”?別,?之??“宋使??”. 宋朝使臣不但?契丹皇帝,?要?皇太后?行“???”,?正是“宋使??”?“契丹使??”的最大差別. 除此之外,契丹所制定的???唐宋等中原王朝的??有著?大的?係,就是?不能???究契丹的??. 因此,本文?上述????之??行了比?分析,以更深入?究契丹方面??的特徵. ?去宋??係史的?究?偏於政治,?致?在??方面的?究?乎无可?究之?.本文?“?”的角度?看契丹人???的?念, 北方民族的自我?重的天下?, ?中原王朝的??意?和二元化的契丹社???. ?然本文主要探??象?“?”,而且?是其中的“外交??”,但?者相信通??“?制”的?究,?可以看到契丹的“征服王朝”性二元化特徵,?可以提供一?新?的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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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渤海와 遊牧王朝의 交流

        韓圭哲(HAN Giu-cheol) 고구려발해학회 2009 고구려발해연구 Vol.34 No.-

        본고는 지금까지 발해와 거란 및 돌궐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고 그 의미를 찾아 보면서 발해와 유목제국과의 관계를 알아보고자 한 초보적 연구이다. 돌궐은 발해가 건국되고 맨 먼저 사신을 파견해야 할 정도로 당과의 외교·군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왕조였다. 발해의 건국은 거란 李盡忠의 반란과 함께 突厥이 당나라를 일정하게 견제하고 있던 국제적 환경속에서 가능했다. 발해와 돌궐 등의 교류는『吐蕃文書』나 발해시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를 잇는‘담비길’이 있었다는주장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발해는 突厥및 西域과도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음이 점차 확인되어 가고 있다. 유목민족의 하나인 거란도 발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발해의 풍속이 거란 그리고 고구려와 같았다고 할 정도로 거란은 고구려시대부터 문화적으로도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발해시대에는 발해에서 거란으로 통하는‘契丹道’도 있었다. 또한 발해는 거란으로 인해 나라를 세울 수 있었고, 거란으로 인해 멸망하였다. 한편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유민들을 상당수 받아들인 거란으로서는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해유민으로 인해 요나라의 부흥을 꾀할 수 있었다. 발해인들이 거란인이 되면서 그 역사 문화적 전통을 계승·발전하였다는 점은 양국간의 교섭에서 얻어진 중요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This thesis is a basic study on past inspections of relations of Balhae(Palhae, Parhae, Bohai) and nomadic dynasties such as Turk and Khitan. Turk played an important role in diplomatic and military aspects with Dang Dynasty. So, Balhae had to dispatch the first ambassador to Turk after the establishment of Balhae. The establishment of Balhae was only possible with the international environment of Li Jinchoong(李盡忠) rebelling and Turk regularly checking Dang Dynasty. The exchange between Balhae and Turk and Seoyeok is gradually being confirmed as documents of Tibet and such are found. Khitan, one of nomadic tribes, had an inseparable relation with Balhae. Khitan was deeply related in cultural aspect since Koguryo Dynasty. The customs of Balhae were almost similar to those of Khitan and Koguryo. There even was ‘Khitan Road(契丹道)’ connecting Balhae to Khitan in the Balhae period. Also, Balhae was established and fell because of Khitan. On the other hand, Khitan, which had destroyed Balhae and had taken in many nomads of Balhae, was able to intend the renaissance of Liao Dynasty only with nomads of Balhae both in military and cultural aspects. The fact that Khitan’s historic and cultural traditions had inherited and developed after the people of Balhae became the people of Khitan is an important result of the exchange between two cou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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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契丹大、小字的类型及研究现状

        吳英喆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12 東洋學 Vol.52 No.-

        十世纪初,契丹人曾创制使用过两种文字,学界分别称之为契丹大字和契丹小字。这两种文字与汉字一并通行于辽朝境内,长达二百余年。辽朝灭亡后,契丹字在金代也被沿用了一段时间,直至金章宗明昌二年(1191) “诏罢契丹字”,契丹文渐渐被世人所忘却,逐渐成为了死文字。上世纪初,契丹大、小字在内蒙古东部和辽宁等地陆续被发现,引起了学术界的广泛关注。据统计,迄今发现的契丹小字碑刻有41件,字数约有五万,大字碑刻有15件,纸质文献有一册,字数约有三万。然而,由于参考资料的严重匮乏,长期以来契丹文字的解读工作未能得到顺利开展。到了1970年代,在内蒙古大学蒙古语语文研究所和中国社会科学院民族研究所部分研究人员共同的成立的“契丹文字研究小组”的努力下,契丹文研究解读取得了重要的进展。关于契丹大、小字类型的鉴别及性质特征的判断方面,在契丹文研究界一直存在不同的看法。目前,多数学者认为,庆陵哀册式的契丹字为小字、西孤山式的契丹字为大字,大字和小字均为拼音文字,小字的拼音程度高于大字。契丹文原始资料陆续涌现,促进了研究队伍的壮大和研究成果问世。目前除了中国学者,来自日本、澳大利亚、美国、芬兰、韩国以及俄罗斯等国的学者们,从历史学、语言学、文字学等不同角度都在进行该领域的研究。通过近90年的努力,学界已释读契丹小字的200多个原字,1300多条词语,数十种附加成分以及近一百个句子的基本意义。释读了约200个契丹大字、个别句子及附加成分。此外,两种文字所见若干规律也逐步被学界探明。21世纪以来,契丹文字研究方法和条件不断得到改善,研究水平也明显得到提升,这项研究迎来了新的发展时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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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化?胡化 : ?金?期燕云地?的人口?徙及其影?

        游彪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9 역사문화연구 Vol.32 No.-

        당대 중엽 이후로 중국 고대의 커다란 정치 구조에 분명한 변화가 발생하여 일찍이 중원을 위협하던 서북과 서남지방의 소수민족 세력이 점차적으로 쇠퇴하고 대신해서 일어난 것이 서부와 동북지방의 소수민족 정권을 수립하여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남북 사이의 점이지대인 연운지역은 단순한 군사적 중심지에서 정치적 중심지로 전환되었고, 따라서 중국 고대의 정치적 중심지가 동북쪽으로 이동하는 서막을 알렸다. 이로 인해서 뒤를 이은 金代에는 燕京에 定都한 후, 元、明、?의 세 왕조도 燕京을 都城으로 하였다. 따라서 중국 고대의 정치적 중심지는 최종적으로 연경지역으로 확정되었다.燕雲地域은 당대 말렵부터 契丹과 奚와 女?등의 소수민족 세력이 흥기하여 이러한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은 신속하게 상승하였다. 그리하여 당대부터 이곳에 정예부대를 배치한 후에 燕雲지역의 藩?들은 河朔지역의 藩?들과 함께 中央에서 벗어난 地域集?을 형성하였고, 强大한 少?民族政?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과 中原王朝와의 관계는 때로는 좋고 때로는 나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燕雲地域은 원래부터 존재한 중원문화를 보존하는 동시에 소수민족의 문화에 적응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契丹과 女?이 이 지역을 점령한후에 이 지역이 중원왕조가 동북지방을 방어하는 전선의 성격에서 少?民族이 ?力을 남쪽으로 확장하는 기지가 되게 하였고, 이에 따라서 정치적인 지위도 점차적으로 높아졌다. 그러한 가운데 燕雲地域과 少?民族의 사이에는 왕래가 빈번하여 그 지역의 사회에서는 “?化”와 “胡化”의 과정아 동시에 진행되었고, 이러한 양면적인 교류는 그 지역의 문화와 사람들의 의식 등 여러 방면에서 다원화되게 하였다. 自唐朝中?以?, 中?古代大的政治格局?生了明?的?化, 曾?威?中原王朝的西北、西南少?民族?力日?衰落, 代之而起的是北部和?北地??起的少?民族政?, 其?力不?向南??, 在?一?史?程中, 位于南北交接地?的燕云地??始???的?事重心向政治重心?移, ?而揭?了中?古代政治重心向?北移?的序幕. 因而?金代定都于燕京之后, 元、明、?三朝均以燕京?都城, ?而使中?古代的政治重心最??定在了燕京地?.燕云地?自唐末以?, ?着契丹、奚、女?等少?民族?力的?起, ?一地?的?事地位迅速上升, 唐朝在此??重兵. 此后, 燕云藩??河朔藩?一道形成了一?游?于中央的河朔地域集?, 由于得到各强大少?民族政?的支持, 他??中原王朝的?系?好??. ?此以后, 燕云地??保持了原有中原地?的文化, 同?也适??接受了各少?民族的文化. ??情?自契丹、女?占?后, ?一地?由中原王朝防御?北的前??成?少?民族?力向南??的基地, 其政治地位逐?得以提升.?管如此, 燕云地??各少?民族之?的?繁往?, 使?地社?的“?化”?“胡化”?程同??行着, ???向的交流使?地人的文化和心?等?多方面更加多元化.

      • KCI등재

        安藏王의 始祖廟 親祀와 政局運營

        鄭媛朱(Jung, Weon-joo) 백산학회 2013 白山學報 Vol.- No.96

        안장왕은 문자명왕대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대외적 위기를 극복하여 5세 기대 고구려의 동북아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한 왕이었다. 안장왕은 즉위 초에 남조 梁과의 관계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北魏로부터 이전보다 낮은 책봉호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동북아에서 고구려의 우월적지위를 인정하는 ‘領護東夷校尉’라는 작호를 받게 되면서 523년까지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즈음 유연이 내분으로 약화되고 북위는 沃野鎭반란이 六鎭전체로 번지면서 6년간의 내란에 휩싸이게 되는 대외정세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북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힘의 공백지대가 된 遼海諸族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지두우와 거란에의 영향력을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遼西지역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또한 고립된 물길에 대한 공세를 강화함으로써 고구려는 서쪽과 북쪽 방면에서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러한 안장왕의 노력은 제위 초 卒本에서 始祖廟親祀를 행하면서 시작 되었다. 안장왕대의 시조묘 친사는 졸본을 비롯한 국내지역이 갖는 국방상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행해진 일이라 할 수 있다. 국내지역은 舊都이자 고구려의 전통적 구귀족 세력들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나, 장수왕의 평양천도와 왕권강화책으로 인해 중앙 정부와 괴리되면서 점차 소외되고 있었다. 안장왕은 서•북방 방어의 중핵지인 이 지역의 위상을 재확립하고 위무활동을 벌임으로써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요동 전역의 방어력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 지역 인사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후 변화하는 대외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서쪽과 북쪽 방면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얻게 되었다. 또한 남쪽 방면으로도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침으로써 문자명왕대 잃은 한수북부 지역을 회복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이처럼 안장왕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흔들리고 있던 동북아에서의 고구려의 위상을 재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왕이었다. King Anjang(安藏王) was the king who had made efforts to overcome external threats emerging since the reign of King Munjamyeong(文咨明王) and to get back to the situation that Goguryeo Dynasty(高句麗) had exerted a powerful influence over the countries and tribes of Northeast Asia in the 5th century. In the early of his reign,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Goguryeo and Southern Liang Dynasty(梁) made a trouble with Northern Wei Dynasty(北魏), which made King Anjang given a lower royal succession title (冊封) than before. But he was obtained the royal official title 'Yeonghodongigyoi(領護東夷校尉)', which means that Northern Wei admitted its power of influence in Northeast Asia, and had maintained friendly relations with Northern Wei until 523. There had been rapid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that Yuyeon(柔然) got weaken due to internal conflicts and Northern Wei was embroiled in the civil wars for six years, spreading out six military forts from the rebellion of Okya Fort(沃野鎭). Goguryeo stopped the diplomatic relations with Northern Wei and turned its military power into the tribes around the Liao River region(遼海). Finally Goguryeo regained control over Jiduu Tribes(地豆于) and Khitan Tribes(契丹), and expanded its power of influence to the western region of Liao River(遼西). Also taking the strengthen offensive against Mulgil Tribes(勿吉) became stabilized the Western and the Northern frontiers of Goguryeo. These efforts of King Anjang had started from the personal Ancestral Service for the State Founder at Shrine at Jolbon(卒本) in the early of his reign. This was the event with due regard to the military importance of Gungnae region(國內) including Jolbon. Gungnae region was the old capital and the stronghold based on the old nobilities for a long time. After King Jangsu(長壽王) had moved the capital to P‘yŏngyang(平壤) and had been engaging in strengthening royal power, Gungnae region had gradually been left outside the central politics. Owing to the strategic importance in defending the Liadong region(遼東), King Anjang raised the status of Gungnae region and pacified its habitants through this event. Such activities enabled its local leaders to enter the central politics. And coping actively with a variable international situation had restored the power of influence in the western and the northern directions of Goguryeo. Also he had actively performed military activities to the southern direction of Goguryo and succeeded in regaining the northern territory of Han River that had lost in the reign of King Munjamyeong. Like this, King Anjang was the king who coped actively with rapidly changing international situation and tried to retake its powerhouse position in the Northeast Asia, which had started to be unstable since King Munjam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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