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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delartz, Michael 독일언어문학연구회 1993 독일언어문학 Vol.1 No.-
되블린은 20년대초의 연극비평가들이 그러했던 것 처럼 고전주의 작가괴테와 쉴러에 대해 상호 대조적인 이중의 태도를 취한다: 그는 한 편으로 그들의 작품을 현재의 독자들을 위해 구제하려고 하지만, 그러자면 시민정신에 의해 잘못 수용된 상으로부터 그 작품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쉴러의 '군도'공연을 계기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상황은 마치, 매우 힘든 일을 하기 위해, 아니, 영혼의 험상궂은 콜셀을 풀어주기위해, 괴테 쉴러와 싸워야하는 것 같다". 고전주의 작가들의 가시적인 거부가 실제로는 비로소 그들의 생산적 소득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을 쉴러의 '군도'와 비교해보면 드러난다: 이 소설은 비단 쉴러를 연상시켜주는 많은 개별적인 부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체적인 구도에 있어서도 쉴러의 '군도'가 함께 유입되었옴이 분명히 드러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심하게 현재화되고, 또한 되블린자신의 소설관에 맞추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되블린은 사회사적 배경을 칼 모어가 그에 저항했던 절대군주시대로 부터 20년대 베를린의 산업사회로 옮겨놓는다.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작품은, 주인공들의 사회적응이 여러가지 간계에 의해 차단된다고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강요된 국외자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강도가되어 사회와 싸우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주인공의 자기희생을 통해서 사회와의 합일이 다시 회복된다. 쉴러의 '군도'속에서는 칼 모어의 자기희생을 통해서 봉건적 사회가 확인된다고 한다면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에서는 비버콮의 자기희생과 더불어 개인과 사회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진다: 주인공 자신이 경직된 상태로 부터 해방됨과 동시에 그는 사회의 행동하는 성원으로서 사회가 새로운 인간성을 향해 발전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